要約
프로이센의 指導下에 統一 獨逸을 이룩하려는 비스마르크의 政策과 그것을 沮止하려는 나폴레옹 3歲의 政策이 衝突해 일어난 戰爭.
사크레쾨르 大聖堂
直接的인 契機는 에스파냐 國王 選出問題를 둘러싼 兩國間의 紛爭이고, 그 過程에서 일어난 엠스電報(電報)事件은 事件의 演出者인 비스마르크의 豫見대로 프랑스와 프로이센 兩 國民을 激昂케 하여 1870年 7月 19日 프랑스가 宣戰布告를 하였다. 그러나 軍備가 優勢한 프로이센은 북독일 聯邦帝國뿐만 아니라, 南獨逸 帝國의 支持까지 얻어서
兵力
을 더욱 增强하여 參謀總長 몰트케의 作戰에 따라 프랑스 國內로 쳐들어갔다.
戰況은 프로이센 獨逸軍이 壓倒的으로 優勢하여 9月 2日
나폴레옹 3歲
는 獨逸軍에게 降伏하였다. 그러나 獨逸軍은 繼續 다시 進擊하여 파리를 包圍하고, 파리에서는 共和制 國防政府가 組織되어 프랑스 國民은 더욱 頑强하게 獨逸軍에 抵抗하였다. 그러나 9月 末에
스트라스부르
, 10月 末에는 메츠
要塞
가 陷落되어 파리도 1871年 1月 28日 마침내 城門을 열고 말았다.
2月
베르사유
에서 平和協定, 5月 프랑크푸르트에서 講和條約이 締結되어 프랑스는 獨逸에 賠償金 50億 프랑을 支拂하고 알자스-로렌의 大部分을 割讓하였다. 또, 파리 開城(開城) 直前인 1月 18日, 베르사유에서 獨逸帝國의 成立이 宣布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