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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師任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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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師任堂

[ 申師任堂 ]

要約 朝鮮 中期의 畫家이자 文人으로 栗谷 李珥의 어머니이다.
신사임당상

申師任堂賞

出生-死亡 1504 ~ 1551
本館 평산
師任堂ㆍ임사재
活動分野 美術, 文學
出生地 江原道 江陵
主要作品 <山水圖>, <草蟲圖> 等
時代 朝鮮

本貫은 평산(平山)이고, 號는 師任堂(師任堂)이다. 師任堂은 中國 周나라 文王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겠다는 뜻에서 使用된 堂號로 임사재(任師齋)라고 稱하기도 했다. 本名은 確認되지 않는다. 이름이 人選(仁善)이라는 說도 있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歷史的 資料는 없다.

아버지는 寧越郡수(寧越郡守) 新숙權(申叔權)의 아들 신명화(申命和)이고, 어머니는 世祖 때의 原從功臣(原從功臣) 理由約(李有若)의 孫子인 移徙온 (李思溫)의 외동딸 龍仁 李氏(龍仁李氏)이다. 司憲府 監察(司憲府監察) 等을 지낸 李元壽 (李元秀)와 結婚하여 이선 (李璿)·이番(李?)· 李珥 (李珥)·이우(李瑀)의 네 아들을 두었고, 조대남(趙大男)·윤섭(尹涉)·홍천우(洪天祐)에게 出家한 세 딸을 두었다. 딸들의 이름은 傳해지지 않으며 맏딸이 매창(梅窓)이란 號를 使用한 記錄만 남아있다.

出生과 成長

申師任堂의 삶은 아들인 이이가 記錄한 〈선비行長(先?行狀)〉이라는 글을 통해서 比較的 仔細히 傳해진다. 그 記錄에 따르면 申師任堂은 1504年(연산 10) 陰曆 10月 29日에 外家가 있는 江原道 江陵에서 신명화와 龍仁 李氏의 다섯 딸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申師任堂의 外祖父인 移徙온은 大司憲·漢城副左尹·刑曹參判 等을 지낸 최응현(崔應賢)의 딸 江陵 崔氏(江陵崔氏)와 結婚해서 딸 하나만 낳았는데, 그가 申師任堂의 어머니인 龍仁 李氏이다. 外祖父 移徙온은 結婚한 뒤에 妻家로부터 烏竹軒(烏竹軒)을 물려받아 江陵 北坪村(北坪村)에 살았으며, 過去에 及第한 뒤에도 官職에 오르지 않았다. 申師任堂의 아버지인 신명화度 1516年(中宗 11) 式年試에 及第하였으나 官職에 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인 龍仁 李氏는 申師任堂을 낳은 뒤 줄곧 男便과 떨어져 江陵에 머물렀기 때문에 申師任堂度 外家인 江陵에서 成長했다.

申師任堂은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外祖父인 移徙온의 寵愛를 받아 그에게 學問과 詩(詩)·西(書) 等을 배웠다고 傳해진다. 特히 그女가 그림에 才能을 보이자 外祖父 理事온이 安堅 (安堅)의 그림을 求해다 주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傳해진다. 李珥의 〈선비行長〉에는 申師任堂이 7歲 때에 安堅의 그림을 模倣해 山水도 (山水圖)를 그렸는데, 그때 이미 매우 絶妙한 솜씨를 보였다고 記錄되어 있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經典(經傳)에 能通하고 글도 잘 짓고 글씨도 잘 썼으며, 바느질과 自首 까지 丁卯夏至 않은 것이 없었다고 傳하고 있다.

結婚과 죽음

申師任堂은 1522年(中宗 17) 太宗 때 漢城府尹(漢城府尹) 等을 지낸 泥鰍(李抽)의 曾孫이자 홍산縣監(鴻山縣監)·判官(判官)을 지낸 이의석(李宜碩)의 孫子인 李元壽(李元秀)와 結婚했다. 李元壽의 祖母는 世宗 때 한글 創製에 反對한 人物로 有名한 儒學者 최만리(崔萬理)의 딸인 海州 崔氏(海州崔氏)이다. 李元壽의 아버지인 利川(李?)은 官職에 오르지 않았지만, 利川의 四寸들人 이기(李?)와 履行(李荇) 兄弟들은 1519年 己卯士禍(己卯士禍)로 趙光祖가 失脚한 뒤에 한성부윤(漢城府尹)과 工曹判書(工曹判書) 等의 職位에 올라 있었다. 곧 李元壽는 朝鮮 建國 初期부터 이어진 有力 家門이며, 特히 中宗 때 以後 隆盛하던 家門 出身이었다.

李珥의 〈선비行長〉에 따르면, 申師任堂이 結婚하자 그女의 아버지인 신명화가 李元壽에게 申師任堂만큼은 곁에서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結婚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신명화가 죽자 1524年 江陵을 떠나 媤宅이 있는 서울로 올라와 生活했다. 그러나 그 뒤 다시 江陵으로 가서 살기도 하고, 한때는 江原道 平昌에서 살기도 했으나, 1541年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 수진방(壽進坊, 只今의 수동동 一帶)에서 살았다. 언제나 江陵을 그리워하며 한밤에 눈물을 흘리며 새벽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했다고 한다.

1550年(明宗 5) 李元壽는 淫書(蔭敍)로 官職에 올라 漢江의 水運을 擔當하는 水運判官(水運判官)으로 任命되었다. 그래서 이듬해 봄에 삼청동(三淸洞)으로 居處를 옮겼다. 그해에 李元壽는 二線과 李珥 두 아들과 함께 조운(漕運)의 일로 平安道로 갔다. 그러나 그 사이에 病이 난 申師任堂은 陰曆 5月 17日 새벽에 死亡했다. 李珥의 〈선비行長〉에는 그날 關西 地方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돌아와 西江(西江)에 到着했는데, 申師任堂이 죽었다는 消息을 傳해듣기 前에 行長에 있던 鍮器그릇이 모두 빨갛게 變하는 怪異한 일이 생겼다고 記錄되어 있다.

申師任堂은 죽은 뒤에 坡州 두문리(斗文里)의 者雲山(紫雲山)에 埋葬되었다. 現在 坡州 紫雲書院(紫雲書院) 뒤便에 있는 栗谷 李珥의 家族墓域에는 栗谷 李珥의 墓域 아래에 申師任堂과 男便 李元壽의 合葬墓가 있다. 栗谷 李珥의 家族墓域은 紫雲書院 等과 함께 國家指定文化財 私的 525號로 指定되어 있다.

申師任堂의 藝術世界

申師任堂은 市(詩)·西(書)·火(畵)에 모두 뛰어나 朝鮮 中期를 代表하는 曳引(藝人) 가운데 한 名으로 꼽힌다. 하지만 아들인 李珥의 影響으로 그女가 朝鮮 中期 以後 賢母良妻(賢母良妻)의 典型으로 여겨지면서 그女의 글씨와 그림을 賞讚하는 儒學者들의 글은 많이 傳해지지만, 막상 그女가 直接 쓰고 그린 글씨와 그림으로 確認되는 作品들은 매우 드물다. 그리고 그女의 影響으로 朝鮮 後期에 풀·벌레를 그린 草蟲圖(草蟲圖)가 크게 流行했다. 그래서 오늘날 그女의 作品으로 傳해지는 것들은 振作(眞作) 與否가 確認되지 않은 全稱作(傳稱作)들이 大部分이다.

申師任堂은 쓴 詩는 李珥의 〈선비行長〉에 〈 유대관令望親庭 (踰大關嶺望親庭)〉, 〈私親(思親)〉, 〈落句(落句)〉 세 作品이 收錄되어 傳해진다. 七言(七言)과 五言(五言)의 限時(漢詩)인 이 作品들은 모두 父母에 對한 그리움과 걱정을 나타내고 있는데, 格調를 갖추어 그러한 感情을 섬세하게 잘 表現하고 있다.

申師任堂이 쓴 것으로 알려진 글씨는 現在 江陵의 烏竹軒博物館에 保存되어 있는 〈 申師任堂草書屛風 (申師任堂草書屛風)〉, 國立中央博物館에 所藏되어 있는 두 幅의 〈山水圖〉에 製靴(題畵)로 當時(唐詩)의 句節들을 적어놓은 것 等이 傳해진다. 特히 종이에 唐나라 때의 五言絶句 6首를 草書로 쓴 〈申師任堂草書屛風〉의 글씨는 짜임이 端正하여 全體的으로 깔끔하고 차분한 風格을 보여준다. 이러한 글씨는 그女의 아들인 이우와 황기로(黃耆老), 백광훈(白光勳) 等의 書體와 特徵을 共有하고 있어서, 一部 學者들은 이들을 ‘師任堂庶派(師任堂書派)’라고 부르기도 한다.

申師任堂의 그림에 關해 이이는 〈선비行長〉에서 “葡萄를 그렸는데 世上에 시늉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그 그림을 模寫(模寫)韓 屛風이나 簇子가 世上에 많이 傳해지고 있다”고 記錄하였다. 그리고 송시열(宋時烈)은 〈申師任堂墓碣門(申師任堂墓碣文)〉에서 “書畫(書?)에 있어서도 妙境(妙境)에 이르러 이것을 얻은 者는 구슬을 안은 듯이 보배로 여겼다”고 記錄하였으며, 어숙권(魚叔權)은 《稗官雜記(稗官雜記)》에서 申師任堂의 葡萄그림과 山水畫家 眼見에 버금간다고 적었다.

오늘날 申師任堂의 그림이라고 傳해지고 있는 것들은 〈山水圖(山水圖)〉, 〈草蟲圖(草蟲圖)〉, 〈 묵포도도 (墨葡萄圖)〉, 〈 勞聯度 (鷺蓮圖)〉, 〈 어하도 (魚鰕圖)〉 等이 있다. 眼見과 中國 明나라 初期의 山水畫 流派인 折破(浙派)의 影響이 드러나는 〈山水圖〉는 大膽하고 簡潔한 構圖로 山水를 描寫하면서도 女性 特有의 섬세한 表現 技法이 同時에 나타난다. 江陵의 烏竹軒博物館에 있는 〈 申師任堂草蟲圖病 (申師任堂草蟲圖屛)〉에는 8幅의 草蟲圖가 傳해진다. 여기에는 오이와 메뚜기, 접시꽃과 잠자리, 수박과 여치, 가지와 사마귀, 맨드라미와 개구리, 楊貴妃와 풀거미, 봉숭아와 잠자리, 원추리와 벌이 섬세한 筆致와 構圖로 그려져 있다. 이 밖에도 朝鮮 後期 以後에 製作된 畫帖 等에 申師任堂의 것으로 收錄되어 있는 그림들이 多數 傳해진다.

한便, 申師任堂의 맏딸인 이매창 (李梅窓)과 넷째아들인 이우도 書畫에 能해 名聲을 떨쳤다. 現在 江陵의 烏竹軒博物館에는 이매창이 그린 〈梅花島(梅花圖)〉와 이우가 그린 〈菊花도(菊花圖)〉가 함께 畫帖으로 만들어져 保存되어 있다. 그리고 이매창의 아들로 申師任堂의 外孫子인 造營(趙嶸)도 書畫에 能해서 〈群山이우도(君山二友圖)〉라는 그림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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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師任堂賞 江原特別自治道 江陵市 師任堂敎育원 내 있는 申師任堂 銅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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