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드레드스콧判決

두산百科

드레드스콧判決

[ Dred Scott Decision ]

要約 1857年 3月 6日 美國 聯邦 大法院이 黑人 奴隸였던 드레드 스콧(1795∼1858)의 自由를 認定할 수 없다고 한 判決로,?미국 聯邦 大法院의 親 奴隸制 判決이었으며 奴隸論爭을 격화시켰다.
언제 1857年 3月 6日
어디서 美國 聯邦 大法院
누가 聯邦 大法院長 로저 토니
무엇을 黑人 奴隸 드레드 스콧의 自由 不人情
어떻게 黑人 奴隸는 法院에 訴訟을 提起할 權利가 없으며 특정한 地域에 奴隸를 禁止하는 미주리 妥協은 違憲이라 主張
南部 黑人 奴隸制度를 擁護하기 政治的 意圖

1857年 美國 聯邦 大法院은 奴隸였던 드레드 스콧 이 自身의 自由를 主張한 事件에서 原告 敗訴判決을 내렸다. 스콧은 自身의 主人을 따라 奴隸가 禁止되는 地域에 居住하였던 事實을 根據로 自身의 自由를 主張하는 訴訟 을 法院에 提起했다. 그러나 聯邦 大法院은 奴隸인 스콧이 法院에 訴訟을 통하여 自身의 權利 救濟를 要請할 法的인 權利 自體가 없다고 判決했다. 뿐만 아니라 北緯 36° 30′ 以北에 新設되는 朱에 對해 奴隸를 禁止하는 1820年 미주리 妥協 은 個人 財産權의 剝奪을 禁止하는 憲法 規定에 違背된다고 判斷하였다. 따라서 聯邦 大法院은 原告인 스콧에게 敗訴 判決을 내렸던 것이다. 스콧 判決은 1803年 마베리 臺 메디슨 判決 에 이어 54年 만에 나온 大法院의 두 番째 違憲判決이었으며, 奴隸問題로 葛藤을 겪던 南北關係를 더욱 악화시킨 美國 歷史上 最惡의 大法院 判決로 評價된다.

發端과 展開

드레드 스콧은 奴隸主人 미주리 州에서 居住하던 陸軍 軍醫官 존 에머슨(John Emerson)의 個人 奴隸였다. 1833年 에머슨은 轉出 命令을 받고 미주리 州를 떠나 數 年 동안 自由主人 일리노이 州와 自由 樽酒 (準州)인 위스콘신에서 居住했다. 에머슨은 일리노이와 위스콘신에서 勤務하는 동안 繼續 스콧을 데리고 다녔다. 1840年代 初 에머슨은 다시 미주리로 돌아와 1843年에 死亡했다. 에머슨은 死亡할 當時 結婚한 狀態였으므로 스콧과 그의 아내는 에머슨 夫人에게 相續되었다.

에머슨 夫人에게 相續된 스콧은 自身과 아내는 自由州에 居住한 事實이 있기 때문에 自由人이 되었다며 에머슨 夫人을 相對로 1846年 미주리 州 法院에 訴訟을 提起했다. 스콧의 訴訟에 對해 1850年 미주리 州 法院은 스콧에게 自由를 認定하는 判決을 내렸다. 그러나 1852年 미주리 州 大法院은 스콧의 自由를 否定하는 原告 敗訴判決을 내렸다.

그 後 에머슨 夫人은 미주리를 떠나며 모든 財産의 管理 權限을 뉴욕 州에 居住하는 男동생 존 샌포드(John F. A. Sanford)에게 넘겨주었다. 그러자 스콧은 샌포드를 相對로 미주리 州 法院 代身 聯邦 法院에 다시 訴訟을 提起했다. 原告와 被告가 居住하는 株價 달라 管轄法院이 聯邦 法院이 되었기 때문이다. 스콧 事件은 聯邦 下級 法院을 걸쳐 1857年 3月 마침내 聯邦 大法院에서 最終 判決을 내리게 되었다. 이 때 法院 擔當者의 失手로 被告의 이름이 샌포드(Sanford) 代身 샌드포드(Sandford)로 記錄됨으로써 事件名이 ‘드레드 스콧 臺 샌드포드(Dred Scott v. Sandford)’가 되었다.

스콧 事件에 對한 大法院 判決文은 大法院長이던 로저 토니 (Roger B. Taney)가 主導的으로 作成했다. 南部 出身인 토니는 南部의 視角에서 當時 南北 사이에 深化되고 있던 奴隸論爭을 根本的으로 解決하고자 했다. 토니는 奴隸를 人權이 保障되지 않는 財産으로 보는 것이 美國 憲法의 올바른 解釋이라고 判斷했다. 따라서 判決文에서 토니는 첫째 스콧은 財産에 不過한 奴隸이며, 奴隸나 奴隸의 後孫들은 人權이 없기 때문에 訴訟을 提起할 수 있는 法的 權利 自體가 없다고 主張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는 美國 聯邦 憲法 修正條項 5條의 正當한 補償 없는 財産權 侵害 禁止 規定이 있음에도 不拘하고 아무런 補償도 없이 北緯 36° 30′ 以北 地域에서 奴隸를 無條件 禁止하는 미주리 妥協은 違憲法律이라고 判決했다.

意義 및 評價

大法院長 토니는 스콧 事件에서 스콧 個人의 自由를 否定하는 判決을 내렸을 뿐 아니라 1854年 캔자스-네브래스카 法 으로 이미 死文化되었던 미주리 妥協에 對해서조차 違憲判決을 내린 것이다. 當時 美國 社會는 1854年 캔자스-네브래스카法 以後 南北이 奴隸問題로 尖銳하게 對立하고 있었다. 이런 狀況에서 토니는 大法院의 判決로 奴隸問題를 한 番에 解決할 意圖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스콧 判決은 奴隸論爭을 더욱 격화시켰다. 美國 社會는 奴隸制에 對한 贊反 두 陣營으로 完全히 갈라졌다. 南部社會는 스콧 判決에 對하여 全幅的으로 歡迎하였으나 北部에서는 거친 抗議와 批判이 쏟아졌다. 스콧 判決로 南北關係는 妥協을 위한 一抹의 餘地조차 사라졌다. 政治的 問題를 司法的 判決로 解決하려던 토니 大法院長의 스콧 判決은 美國 歷史上 最惡의 判例로 남아 있다.

두산百科의 著作權은 doopedia(두산百科)에 있습니다.
著作權法의 保護를 받는 著作物로 無斷 轉載 및 複製를 禁하고 있습니다. 著作物 利用許諾 問議하기

位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