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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 [경인일보 뿌리를 찾다·8]경인지역 言論의 뿌리는 하나

創刊 68周年 경인일보 뿌리를 찾다

[경인일보 뿌리를 찾다·8]경인지역 言論의 뿌리는 하나

對中日報가 뿌린 씨앗

京仁 言論의 싹 틔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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創刊主役 송수안 '뚝심 經營'
虛합, 地域 文化 暢達 先驅者
김응태, 꼿꼿한 記者로 足跡


京畿·仁川地域 言論은 大衆日報를 뿌리로 삼아 成長해 왔다고 할 수 있다. 對中日報가 創刊된 1945年 以後 言論人들의 移動 흐름은 그 自體로 競技·仁川地域 言論社의 軌跡이다.

京畿·仁川 言論의 土臺를 닦은 主要 人士로는 송수안 경기매일신문 發行人, 虛합 인천신문 社長, 김응태 경기일보 副社長 等을 꼽을 수 있다.



송수안은 1945年 對中一步 創刊 主役 中 한 名으로 對中日報의 뒤를 잇는 仁川信保, 기호일보, 경기매일신문 社長·發行人을 지냈다.

仁川信保 時節인 1954年 12月 16日부터 約 5年間 '財政難'으로 新聞을 내지 못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를 克服하고 新聞社를 다시 세웠다.

1973年 言論統廢合 때 '統合 圖章'을 가장 늦게 찍은 人物도 송수안이었다. 忠南 舒川 出身의 虛合은 1959年 當時 숭의동에 있던 個人 땅을 팔아 週間 仁川을 引受하고, 이듬해 인천신문을 創刊했다.

基督敎的 淸貧 思想이 몸에 밴 人物이었고, 地域의 文化·體育·社會團體 活動에 積極的이었다. 虛合은 大衆一步 編輯局長을 지낸 高日課 親分이 두터웠다.

高일은 인천신문 初代 主筆을 맡았다. 김응태는 大衆一步 記者로 言論界에 入門해 週間 仁川 編輯局長, 인천신문 編輯局長, 경기일보 編輯人 等을 지냈다.

記事 作成·出庫에 있어서는 例外 없이 嚴格했던 先輩였다는 것이 後輩 記者들의 그에 對한 共通된 記憶이다.

이처럼 송수안은 '言論 經營人'으로, 虛合은 '地域 文化 暢達子'로, 김응태는 '꼿꼿한 記者'로 京畿·仁川 言論社에 한 劃을 그었다. 이들과 함께 言論活動을 한 사람들이 後날 京畿·仁川 言論의 重要한 資産이 됐다.

京畿每日에서 編輯局長을 지낸 김형희는 옛 경인일보(1962年 廢刊) 出身으로 京畿訊問을 거쳐 現 경인일보에서 編輯移徙를 지냈다. 京畿每日 記者였던 전중열은 後날 京仁日報 編輯局長까지 올랐다.

1960年代 虛합 社長의 인천신문에서 記者를 한 오광철은 1966年 創刊한 경기일보, 1973年 京畿訊問을 거쳐 1988年 創刊한 인천신문(現 인천일보)에 合流해 編輯局長을 했다.

연합신문·京畿新聞 出身의 이천우는 京仁日報 編輯部局長을 거쳐 경기일보 論說委員, 인천일보 理事를 지냈고, 亦是 연합신문·京畿新聞 코스를 밟은 이진영은 1980年代 以後 京仁日報 編輯局長, 경기일보 編輯理事, 중부일보 編輯局長을 歷任했다.

경기일보 代表理事 社長을 지낸 신창기 亦是 연합신문 出身이다. 1960年 인천신문 記者로 入社한 임상규는 京畿新聞 業務局長 等을 거쳐 1980年代 景氣新聞·경인일보에서 各各 社長을 했다.

/김명래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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