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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 [경인일보 뿌리를 찾다·6]아픔을 딛고(상) - 統合 後 1970年代

創刊 68周年 경인일보 뿌리를 찾다

[경인일보 뿌리를 찾다·6]아픔을 딛고(상) - 統合 後 1970年代

維新의 傷處 '地域密着 取材'로 昇華
   
京畿 言論의 仁川偏在 時代
무뎌진 政府批判 '박통 뉴스'
社會 어두운 裏面 報道 充實


1973年 9月 京畿新聞 出帆으로 景氣·仁川 言論은 그 外延을 擴張했다. 京畿新聞은 仁川이라는 中心點에서 부챗살처럼 放射狀으로 京畿道 全域에 퍼지게 된다.

京畿言論의 뿌리는 仁川이었고, 仁川에 本社를 둔 言論社들은 京畿道 全域을 取材圈域으로 삼았었다. 하지만 1960年代 産業化 以後 擴大 一路에 있던 京畿道 全域을 仁川에 本社를 둔 新聞이 擔當하기는 力不足이었다.



서울에 있던 경기도청이 1967年 水原으로 移轉한 뒤에는 都市 志向의 '이촌향도 現象'과 '서울 郊外 都市의 擴張'李 더욱 加速化됐지만, 이러한 趨勢에 副應하는 取材시스템은 갖춰지지 않았다. 當時 仁川 言論界의 元老조차 '景氣 言論의 仁川 偏在性'을 指摘할 程度였다.
┃關聯記事 3面

'自律 形式으로 包裝된 强制 統合'으로 태어난 競技新聞의 限界도 분명했지만, 그 限界가 景氣新聞만의 것은 아니었다.

統合 以前과 以後의 編輯方向이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게 當時 일했던 記者들의 衆論이다.

1966年 경기일보 創刊 當時 公採 1期 記者로 入社했다가, 京畿新聞으로 옮긴 金昌洙(75) 仁川言論人클럽 副會長은 "統合 以前의 (京畿每日·연합신문·경기일보) 1面은 다 비슷비슷했고, (京畿新聞 統合) 以後에도 크게 달라진 건 없다"고 했다.

   
▲ 1970年代 景氣新聞은 '地域性 强化'에 注力했다. 仁川을 비롯한 京畿道 全域의 消息을 고루 傳하면서, 歷史와 人物을 發掘해 記錄하는 일에도 힘썼다. 寫眞은 競技新聞이 1977年 初 發刊된 '韓國新聞年鑑'에 낸 廣告寫眞.
實際 競技每日은 統合을 앞두고 낸 指令 9千戶 特輯(1973年 8月10日子)에 朴正熙 大統領에게 송수안 發行人이 勳章을 받은 寫眞을 比重있게 싣기도 했다.

경기일보는 陸士 8期 出身으로 大統領 祕書官을 지낸 유승원 議員이 '實質的 使嗾'여서 政府 批判記事를 내기 힘든 構造였다. 統合 以前 競技 3社의 新聞 1面에는 1980年代 '땡錢뉴스'와 비슷한 '박통뉴스'가 있었다.

京畿新聞 出帆으로 仁川에 本社를 둔 言論社는 門을 닫았지만, 仁川을 記錄하는 競技新聞 記者들은 쉬지 않았다.

또한, 維新政權에 날카로운 칼끝을 겨누지 못한 '아픔'이 있었지만, 新聞으로서 社會批判機能을 完全히 잃지는 않았다.

社會 곳곳의 어두운 裏面을 드러내고, 地域 開發 過程을 密着해 지켜보고, 各 地域의 歷史와 人物을 記錄하고, 地域 文化 發展에 滋養分을 提供한 것도 競技新聞의 役割이었다.

京畿新聞 本社는 水原이었지만 仁川 消息도 比重있게 다뤘는데, 1973年 9月1日부터 1979年 12月31日까지 競技新聞에 紹介된 仁川 記事는 約 2萬3千件이었다.

/김명래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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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래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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