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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 [경인일보 뿌리를 찾다·5]언론 統廢合(下) - 뒤범벅 編輯局

創刊 68周年 경인일보 뿌리를 찾다

[경인일보 뿌리를 찾다·5]언론 統廢合(下) - 뒤범벅 編輯局

仁川 噴射體制 運營… 混亂속 높아진 位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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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個社 出身 '聯合體系' 構築
記者들 靈前과 左遷 뒤엉켜
공화당 出身 論說委員 汚點


1973年 9月 1日子로 創刊號를 낸 京畿新聞의 初期 編輯局은 경기매일신문, 연합신문, 경기일보 出身 記者들이 뒤범벅된 形態였다. 仁川은 知事·分室이 아닌 分社(分社)로 運營돼 그 位相이 높았다. ┃關聯記事 3面

京畿新聞 初代 編輯局長은 조창환(趙昌煥)으로 경기일보 編輯部局長(1966~69) 出身이었다. '新聞社의 꽃'이라 불리는 編輯局長 자리를 경기일보側에서 맡은 것이다.



編輯部局長 오광철(吳光哲) 亦是 경기일보에서 왔다. 경기일보 出身의 編輯部局長 李蘗(李闢)에 對해서는 두 가지 記錄이 남아 있다.

'仁川言論社'는 京畿新聞 創刊과 함께 言論界를 떠났다고 했는데, '全國言論人芳名錄'에는 競技新聞으로 移籍한 것으로 돼 있다.

外勤 記者들에게 取材를 指示하는 데스크는 연합신문 出身으로 채워졌다.

政經部長 이진영(李鎭榮)은 연합신문 社會部次長이었고, 社會部長 公席으로 데스크 役割을 했을 社會部 次長 김화양(金和洋)은 연합신문 平澤駐在記者였다.

編輯局에서 仁川은 分社 形態로 運營됐다. 서울支社·議政府知事보다 格이 높았다. 仁川分社長은 박채근(朴彩根)으로 1980年代 京仁日報 社長을 지낸 박상복 東洋石油株式會社 會長의 父親이다.

仁川噴射 編輯責任者는 競技每日 編輯局長을 지낸 김형희(金亨熙)였다. 仁川에서 活動하는 記者 數는 15名으로 水原 本社의 記者(데스크 包含) 12名보다 많았다.

出身 新聞社別로 競技每日 4名, 연합신문 6名, 경기일보 5名으로 構成됐다.

이처럼 競技新聞 編輯局은 競技每日, 연합신문, 경기일보 3社의 '聯合 體制'로 出發했다.

京畿新聞 出帆 人事에서 榮轉한 이도 있지만 左遷된 記者들도 있었다. 各其 다른 3個社가 모여 '聯合體制'를 構築하는 過程에서 混亂도 컸을 것으로 斟酌할 수 있다.

政權에 依한 統廢合 産物이라고 할 수 있는 競技新聞은 言論社로서는 보여선 안 될 모습까지도 나타난다.

'新聞社의 눈'인 社說을 쓰는 論說委員에 當時 공화당 出身 人士를 앉힌 건 致命的 汚點이었다고 할 수 있다. 論說委員 김진동(金晋東)은 水原의 7線 國會議員 이병희(李秉禧)의 補佐官을 지낸 人物이었다.

이병희는 陸士8期, 中央情報部 서울支部長을 지낸 뒤 政界에 進出한 有力 政治人이었다.

이병희는 연합신문의 前身인 競技聯合日報가 1969年 새 經營陣을 짤 때 背後에서 役割을 했고, 當時 김진동이 '京畿聯合日報 引受팀'에 屬해 實務를 遂行했다고 傳해진다.

또한 編輯局 아래 '特輯部'라는 職制가 存在했는데, 이 特輯部長은 各 郡·區의 '補完取材'와 '廣告業務'를 竝行하는 役割을 했다고 한다.

/김명래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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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래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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