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 東小門派出所 앞에서 拳銃이 불을 뿜었습니다. 警戒勤務 中이던 日本人 巡査가 쓰러졌죠. 죽을힘을 다해 派出所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巡査에게 銃彈 6發이 더 쏟아졌습니다. 이때가 1926年 7月이었죠. 2個月 뒤 京畿道 安城郡의 이름난 富者 朴陞六 집에서 銃聲이 울렸습니다. 縛繩六의 맏아들이 銃에 맞아 숨졌죠. 한 달 뒤에는 京畿道 伊川郡 駐在所와 面事務所가 襲擊당해 面書記 한 名이 射殺됐습니다. 같은 달에 京城 수은동, 現在 묘동의 한 典當舖에서 主人의 親兄이 銃傷을 입어 卽死했죠. 3個月 사이에 4件의 銃擊事件이 연이어 일어난 겁니다. 共通點은 犯人이 靑年 같고 鬼神같이 사라진 點이었죠. 京城과 京畿道 一帶가 발칵 뒤집혔고 武裝警察이 境界에 나서 마치 戒嚴令이 내려진 듯했습니다.
①日帝 警察에 붙잡힌 이수흥 ②6寸 兄의 密告로 붙잡힌 뒤 毯요가 씌워진 채 押送되는 이수흥 ③京城 水運動 典當舖를 襲擊한 유택수 ④이수흥의 親舊로 獨立運動의 뜻을 함께한 유남수
靑年은 利川 出身의 스물한 살 이수흥이었습니다. 身分은 大韓民國臨時政府 週만(駐滿)참의부 第2中隊 特務艇社였죠. 이 무렵 滿洲의 獨立軍 團體들은 正義部 新民府 參議府 等으로 나뉘어 있었고 이中 參議府는 過去 義兵系列이 主軸이었습니다. 이수흥은 일찍이 日帝의 甚한 民族差別에 憤慨해 19歲 때 혼자 滿洲로 가서 獨立軍에 合流했죠. 偶然인지 그곳에서 예전 義兵系列 義軍府의 總長을 지낸 채상덕을 만나 그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채상덕은 이수흥의 아버지 이일영과 勉庵 崔益鉉 麾下의 義兵으로 因緣을 맺었더랬죠. 이일영은 58歲 때 늦둥이 이수흥을 낳았고요. 이수흥은 채상덕을 父親처럼 따랐고 채상덕은 이수흥을 신명無觀衆學校에 보내 獨立軍이 되도록 키웠습니다. 後繼者로 삼을 생각이었죠.
①이수흥이 1926年 7月 京城에 潛入한 뒤 日本人 巡査에게 銃擊을 加한 東小門派出所 ②유택수가 襲擊한 京城 水運動 典當舖에서 現地 調査를 하고 있는 日帝 檢警
1925年 뜻하지 않은 不幸이 닥쳤습니다. 參議府 最高指揮官을 비롯한 隊員 60名이 滿洲 지안縣 고마령에서 軍事會議를 열었죠. 이수흥度 參席했죠. 諜報로 이를 把握한 日帝가 急襲해 이수흥 等 3名을 除外한 全員이 몰살당하는 慘變이 일어났습니다. 이수흥度 다리에 負傷을 입었죠. 九死一生으로 돌아온 이수흥에게 報告를 받은 채상덕은 이수흥이 完快되자 “安重根을 본받으라”며 拳銃 2梃을 갖게 해줍니다. 訓鍊不足과 背信者 續出로 團體行動은 틀렸으니 個人行動을 하란 뜻이었죠. 채상덕 自身은 ‘내 部下가 다 죽었으니 나 혼자 무슨 面目으로 살겠느냐’며 期於이 飮毒 殉國했고요. 스승이자 아버지 같던 채상덕의 피맺힌 遺言에 따라 이수흥은 一齊 高官 暗殺과 軍資金 確保를 위해 滿洲를 떠납니다.
①日帝 警察이 京畿道 伊川郡에서 逮捕한 이수흥 一行을 自動車에 태운
채로 나룻배에 실어 漢江을 건너 京城으로 押送하고 있다. ②이수흥이 탄 車를 동아일보 寫眞記者 車輛이 追擊하며 寫眞을 찍었다.
동아일보는 總督府가 4代 銃擊事件의 報道를 禁止한 狀況에서도 支局網을 總動員해 取材를 해놓은 德分에 報道禁止가 풀린 1926年
11月 17日에 2個面 號外를 낼 수 있었다.
一旦 이수흥은 朝鮮總督府 給仕로 일한다는 먼 친적이자 故鄕 親舊인 유남수와 함께 暗殺을 實行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艱辛히 京城에 와보니 유남수는 利川으로 돌아갔다고 했죠. 虛脫해진 이수흥은 그래도 故鄕에서 유남수를 만나고 그 兄 유택수와 意氣投合해 軍資金 確保에 나섰습니다. 1926年 京畿 一帶의 4代 銃擊事件은 이들이 主導했죠. 典當舖事件은 유택수가 맡았고 나머지는 이수흥이 앞장섰다고 日帝는 結論지었습니다. 하지만 神出鬼沒했던 擧事는 6寸 兄의 密告로 끝이 나고 말았죠. 隱身하던 利川의 6寸 兄 집에서 붙잡혀 京城으로 押送되던 이수흥은 自身이 탄 車輛을 따라붙는 동아일보 寫眞記者의 車를 보더니 빙긋 웃고는 머리를 끄덕여 人事했답니다. 그의 配布를 보여주는 한 場面이겠죠.
①이수흥이 얼굴을 가린 用水를 쓴 채 1928年 6月 28日 法廷으로
移動하고 있다. ②法廷에 선 被告 中 맨 앞이 이수흥, 가운데가 유남수, 뒤가 유택수로 보인다. ③이수흥 一行의 裁判을 보기
爲해 傍聽券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長蛇陣을 이뤘다. ④傍聽券을 받고 法廷으로 들어가는 데도 줄을 서야 했다.
2年 뒤 裁判에서 이수흥은 모든 일은 自身이 저질렀다고 主張했습니다. 辯護士에게 ‘擇數, 남수 두 兄弟가 공연히 辱을 當하는 것이 實로 憫惘下’다며 積極 辯護해 달랬죠. 하지만 이수흥 유택수는 死刑, 유남수는 懲役 2年型이었죠. 이수흥은 一切 上訴하지 않았습니다. 當時 死刑宣告에도 上訴하지 않은 이는 虛僞 강우규 이수흥 3名뿐이라고 했죠. 結局 1929年 이수흥는 刑場의 이슬이 됐죠. 다만 하나 짚고 넘어갈 點이 있습니다. 이수흥은 獨立運動이나 慈善을 많이 한 富者집에도 軍資金을 要求했죠. 사람을 해치기도 했고요. 앞길을 가로지른 日本 女人에게도 銃을 쐈죠. 큰일 하려는데 不吉하다면서요. 父親이 숨지자 열일 제쳐놓고 初喪을 치렀습니다. 理性을 앞선 血氣와 儒敎的 世界觀 탓이었다고 斟酌해 봅니다.
記事入力日 : 2021年 12月 24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