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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플래시100
1926年 11月 17日

拳銃强盜?…安重根 본받으려던 臨時政府 特務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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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 東小門派出所 앞에서 拳銃이 불을 뿜었습니다. 警戒勤務 中이던 日本人 巡査가 쓰러졌죠. 죽을힘을 다해 派出所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巡査에게 銃彈 6發이 더 쏟아졌습니다. 이때가 1926年 7月이었죠. 2個月 뒤 京畿道 安城郡의 이름난 富者 朴陞六 집에서 銃聲이 울렸습니다. 縛繩六의 맏아들이 銃에 맞아 숨졌죠. 한 달 뒤에는 京畿道 伊川郡 駐在所와 面事務所가 襲擊당해 面書記 한 名이 射殺됐습니다. 같은 달에 京城 수은동, 現在 묘동의 한 典當舖에서 主人의 親兄이 銃傷을 입어 卽死했죠. 3個月 사이에 4件의 銃擊事件이 연이어 일어난 겁니다. 共通點은 犯人이 靑年 같고 鬼神같이 사라진 點이었죠. 京城과 京畿道 一帶가 발칵 뒤집혔고 武裝警察이 境界에 나서 마치 戒嚴令이 내려진 듯했습니다.

①日帝 警察에 붙잡힌 이수흥 ②6寸 兄의 密告로 붙잡힌 뒤 毯요가 씌워진 채 押送되는 이수흥 ③京城 水運動 典當舖를 襲擊한 유택수 ④이수흥의 親舊로 獨立運動의 뜻을 함께한 유남수


靑年은 利川 出身의 스물한 살 이수흥이었습니다. 身分은 大韓民國臨時政府 週만(駐滿)참의부 第2中隊 特務艇社였죠. 이 무렵 滿洲의 獨立軍 團體들은 正義部 新民府 參議府 等으로 나뉘어 있었고 이中 參議府는 過去 義兵系列이 主軸이었습니다. 이수흥은 일찍이 日帝의 甚한 民族差別에 憤慨해 19歲 때 혼자 滿洲로 가서 獨立軍에 合流했죠. 偶然인지 그곳에서 예전 義兵系列 義軍府의 總長을 지낸 채상덕을 만나 그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채상덕은 이수흥의 아버지 이일영과 勉庵 崔益鉉 麾下의 義兵으로 因緣을 맺었더랬죠. 이일영은 58歲 때 늦둥이 이수흥을 낳았고요. 이수흥은 채상덕을 父親처럼 따랐고 채상덕은 이수흥을 신명無觀衆學校에 보내 獨立軍이 되도록 키웠습니다. 後繼者로 삼을 생각이었죠.

①이수흥이 1926年 7月 京城에 潛入한 뒤 日本人 巡査에게 銃擊을 加한 東小門派出所 ②유택수가 襲擊한 京城 水運動 典當舖에서 現地 調査를 하고 있는 日帝 檢警


1925年 뜻하지 않은 不幸이 닥쳤습니다. 參議府 最高指揮官을 비롯한 隊員 60名이 滿洲 지안縣 고마령에서 軍事會議를 열었죠. 이수흥度 參席했죠. 諜報로 이를 把握한 日帝가 急襲해 이수흥 等 3名을 除外한 全員이 몰살당하는 慘變이 일어났습니다. 이수흥度 다리에 負傷을 입었죠. 九死一生으로 돌아온 이수흥에게 報告를 받은 채상덕은 이수흥이 完快되자 “安重根을 본받으라”며 拳銃 2梃을 갖게 해줍니다. 訓鍊不足과 背信者 續出로 團體行動은 틀렸으니 個人行動을 하란 뜻이었죠. 채상덕 自身은 ‘내 部下가 다 죽었으니 나 혼자 무슨 面目으로 살겠느냐’며 期於이 飮毒 殉國했고요. 스승이자 아버지 같던 채상덕의 피맺힌 遺言에 따라 이수흥은 一齊 高官 暗殺과 軍資金 確保를 위해 滿洲를 떠납니다.

①日帝 警察이 京畿道 伊川郡에서 逮捕한 이수흥 一行을 自動車에 태운 채로 나룻배에 실어 漢江을 건너 京城으로 押送하고 있다. ②이수흥이 탄 車를 동아일보 寫眞記者 車輛이 追擊하며 寫眞을 찍었다. 동아일보는 總督府가 4代 銃擊事件의 報道를 禁止한 狀況에서도 支局網을 總動員해 取材를 해놓은 德分에 報道禁止가 풀린 1926年 11月 17日에 2個面 號外를 낼 수 있었다.


一旦 이수흥은 朝鮮總督府 給仕로 일한다는 먼 친적이자 故鄕 親舊인 유남수와 함께 暗殺을 實行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艱辛히 京城에 와보니 유남수는 利川으로 돌아갔다고 했죠. 虛脫해진 이수흥은 그래도 故鄕에서 유남수를 만나고 그 兄 유택수와 意氣投合해 軍資金 確保에 나섰습니다. 1926年 京畿 一帶의 4代 銃擊事件은 이들이 主導했죠. 典當舖事件은 유택수가 맡았고 나머지는 이수흥이 앞장섰다고 日帝는 結論지었습니다. 하지만 神出鬼沒했던 擧事는 6寸 兄의 密告로 끝이 나고 말았죠. 隱身하던 利川의 6寸 兄 집에서 붙잡혀 京城으로 押送되던 이수흥은 自身이 탄 車輛을 따라붙는 동아일보 寫眞記者의 車를 보더니 빙긋 웃고는 머리를 끄덕여 人事했답니다. 그의 配布를 보여주는 한 場面이겠죠.

①이수흥이 얼굴을 가린 用水를 쓴 채 1928年 6月 28日 法廷으로 移動하고 있다. ②法廷에 선 被告 中 맨 앞이 이수흥, 가운데가 유남수, 뒤가 유택수로 보인다. ③이수흥 一行의 裁判을 보기 爲해 傍聽券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長蛇陣을 이뤘다. ④傍聽券을 받고 法廷으로 들어가는 데도 줄을 서야 했다.


2年 뒤 裁判에서 이수흥은 모든 일은 自身이 저질렀다고 主張했습니다. 辯護士에게 ‘擇數, 남수 두 兄弟가 공연히 辱을 當하는 것이 實로 憫惘下’다며 積極 辯護해 달랬죠. 하지만 이수흥 유택수는 死刑, 유남수는 懲役 2年型이었죠. 이수흥은 一切 上訴하지 않았습니다. 當時 死刑宣告에도 上訴하지 않은 이는 虛僞 강우규 이수흥 3名뿐이라고 했죠. 結局 1929年 이수흥는 刑場의 이슬이 됐죠. 다만 하나 짚고 넘어갈 點이 있습니다. 이수흥은 獨立運動이나 慈善을 많이 한 富者집에도 軍資金을 要求했죠. 사람을 해치기도 했고요. 앞길을 가로지른 日本 女人에게도 銃을 쐈죠. 큰일 하려는데 不吉하다면서요. 父親이 숨지자 열일 제쳐놓고 初喪을 치렀습니다. 理性을 앞선 血氣와 儒敎的 世界觀 탓이었다고 斟酌해 봅니다.

記事入力日 : 2021年 12月 24日
畿內(機內)를 中心(中心)으로 續發(束髮)韓 拳銃事件(拳銃事件) 眞相(進上)
戒嚴狀態(戒嚴狀態)의 三個月間(3個月間)
四大事件(4大事件)은 同根異枝(동근이地)
東小門(東小門)·安城(安城)·利川(利川)은 主犯(主犯)李 專行(前行)
鐵甕城中(鐵甕城中)의 授恩洞(수은동)은 共犯(共犯)李 獨行(獨行)
滿洲로부터 平壤을 것處 入境 卽時로 爲先 東小門
鏡城을 떠나 安城 리천 등디로 제집 價値 돌아다녀
失色(失色)韓 警察(警察)과 總動員(總動員)의 裡面史(裏面史)

事(寺) 件(건) 當(黨) 時(詩)
로 部 터
解(害) 禁(금)
十七日(17日) 午前(午前)
揭(게) 載(財) 禁(금) 止(知)

지난 七月 十日에 市內 東小門派出所(東小門派出所)를 襲擊한 事件이 잇슨 後부터는 市內를 中心으로 筋긔디房(近畿地方) 一帶(一帶)에 銃소리가 끈칠 새 업시 이곳저곳에서 重大한 事件이 뒤를 이어 發生되야 一般은 젼젼긍긍하는 샹태로 지내는 한便으로 警察當局에서는 鬼神價値 出沒하는 犯人이 누구인지 이런 事件이 發生된 때마다 八方으로 活動을 하다가 얼마 젼에 犯人의 端緖를 어든 뒤로 卽時 警務當局으로부터 이 事件의 新문긔社 揭載를 禁止하고 活動을 하던 즁 事件의 眞犯人이 잡히게 되쟈 비로소 解禁이 되엿슴으로 그동안 本社에서 됴사한 것을 綜合하야 즁大事件의 젼말을 大江 報道하노라.

駐滿(週만) 參議部(參議府) 第二中隊(第2中隊)
二十二歲(22歲)의 李壽興(이수흥)
?授恩洞事件(수은동事件)은 利川(利川) 出生(出生)의 柳澤秀(유택수)?
◇지난 七一部로 本報가 振作 報道한 犯人◇
判明(判明)된 前後事件(戰後事件)의 主犯(主犯) 共犯(共犯)

지난 七月 十一 밤 열時半頃에 鏡城市內 東小門(東小門)派出所를 襲擊하야 덕영(德永)巡査를 狙擊한 것을 비롯하야 뒤를 이어 게속 發生하든 安城(安城)事件이며 리천事件이며 京城 輸銀洞事件은 물샐 틈업시 느려 노흔 卿게網을 이리 뚤코 저리 뚤으며 鬼神價値 出沒하야 卿긔도 內 二三千 名의 警官이 잠을 자지 못하고 搜索을 하며 조곰만 殊常하거나 밤이 느著書 길을 가는 사람이 잇스면 게嚴令을 實施한 것價値 嚴重히 取調河엿스나 犯人은 그림자도 보이지 안코 複雜한 情報와 空然한 밀뎡의 보고만 꼬리가 달려 統義府院이니 正義團이니 海外 잇는 무슨 단톄이니 下野 조곰만 嫌疑가 잇스면 붓잡어다가 몃漆式 잠을 재우고 家宅搜索을 하야 京城에서만도 近 百名의 嫌疑者를 取調河엿섯스나 眞犯人은 그림자도 못 보든 中 本報가 지난 七一部(七日附)로 振作 報道한 바와 價値 지난 六일 午前에 리천警察署에서 잡은 犯人 세 名이 卿긔 一帶를 놀라게 하든 여러 가지 事件의 眞犯人인 것이 判明되엿는데 그 犯人들의 住所 姓名 職業은 아래와 갓더라.
▲本籍(本籍) 京畿道(京畿道) 利川郡(伊川郡) 邑內面(읍내면) 倉前里(창전리) 二二四(224)
▲現住(현주) 未定(未定) 大韓臨時政府(大韓臨時政府) 駐滿(週만) 參議部(參議府) 第二中隊(第2中隊) 特務正士(特務艇社)
李壽興(이수흥)(二二?22)
一名(一名) 成檀(星團)、佐聖(左性)
▲本籍(本籍) 京城府(京城府) 靑葉町(靑葉情) 二丁目(2정목)
▲現住(현주) 京畿道(京畿道) 利川郡(伊川郡) 邑內面(읍내면) 中里(中里) 二三七(237)
柳(류) 澤(擇) 秀(水)(二六?26)
▲本籍(本籍) 同上(銅像)
▲現住(현주) 同上(銅像)
無職(無職)(前?前 朝鮮日報?조선일보 利川支局?利川支局 記者?記者)
柳(류) 南(남) 秀(水)(二二?22)

이와 街튼데 리수흥은 主犯으로 大韓臨時政府 州만 參議府 뎨이중대 特務艇社로 그곳 守令의 命令으로 『모젤』拳銃과 『부로우닁』式 拳銃 두 자루와 彈丸 九百八十발을 가지고 지난 五月에 國境을 넘어 리천에 드러와 류택수 류남수의 元祖를 힘닙어 卿긔일一帶 拳銃事件 全部를 犯行河엿는데 수은동 前當局 事件만은 류택수가 直接 한 것이 警察의 取調로 判明되엿더라.

水陸警戒中(水陸警戒中) 連發(連發)韓 四大事件(4大事件) 梗槪(경개)
東小門事件(東小門事件)
□七月(7月) 十日(10日)□

이 事件은 지난 七月 十一 밤 열時 五十分 頃에 市內 東小門(東小門) 안 헤화동(惠化洞)에 拳銃 가진 靑年 한名이 나타나서 東小門派出所(東小門派出所)를 襲擊하야 그 派出所 壓헤서 監視를 하고 잇든 日本人 巡査 덕영乘車(德永勝次)(三五?35)가 派出所로 쫏겨 들어가는 것을 追擊하야 拳銃을 女덜 발이나 發射하야 여섯 군데의 重傷을 當케 하고 卿게 嚴重한 틈을 타서 巧妙히 자취를 감추어 버리餘 한참 동안 京城 安易 뒤집히여진 事件이며

安城郡事件(安城郡事件)
□九月(9月) 九日(9日)□

이 事件은 전긔 東小門派出所 襲擊事件이 突發한지 꼭 두 달이고 하로가 더 되던 지난 九月 十一 밤 女덜時 頃에 卿긔도度京畿道) 安城郡(安城郡) 읍내면(邑內面) 洞里(東里) 四百八十誤번디 富豪(富豪) 朴陞六(朴承六)(七○?70)의 집에 拳銃 가진 靑年 두 名이 나타나 그 집 主人의 맛아들 박태병(朴泰秉)(五二?52)에게 面會를 請하고 『軍資金』을 請求하다가 應치 아니한다고 拳銃으로 전긔 박태병을 쏘아 죽이고 그와 同時에 그 집에서 일을 보는 김춘명(金春明)(四二?42)까지 쏘아 重傷을 식힌 後 그 靑年들도 亦是 어데로인지 鬼神價値 齊衰를 감추어버려 한참 동안 潛潛하던 卿긔 一帶는 다시금 騷亂하게 되엿섯던 事件이며

利川郡事件(伊川郡事件)
□十月(10月) 二十日(20日)□

이 事件은 전긔 安城 富豪 射殺事件이 發生된 지 꼭 한달 裂罅로가 된 지난 十月 二十日 午後 세時 三十分人 臺羅濟(白晝?白晝)에 卿긔도度京畿道) 리천群(利川郡) 백사면(柏沙面) 현방리(玄方里)에 拳銃을 가진 靑年 한名이 나타나 먼저 그 洞里에 잇는 현방리(玄方里) 警察官駐在所(警察官駐在所)를 襲擊하여 日本人 삼송순사부댱(森松巡査部長)을 밧그로 쪼고 그 다음으로 그 겻헤 잇는 현방리(玄方里)공립보통학교댱(公普校長?公報校長) 正常(井上)의 妻 화혜(花惠)(二九?29)를 쏘아 重傷을 黨케한 後 그 길로 卽時 그 洞里에 잇는 백사면事務所(柏沙面事務所)를 襲擊하야 事務所 안에 잇는 사람들을 쫏고 마츰 便所(便所)로부터 나오는 그 面서긔 송텬의(宋天義)(三四?34)를 쏘아 한放에 卽死케 한 後 또 亦是 그 靑年도 鬼神價値 齊衰를 감추어 버리餘 筋긔디房 一帶는 물끌틋 惹端을 하엿섯고 卿긔 各 警察은 水陸 각디에 警戒網을 느리고 惹端을 치든 事件이며

授恩洞事件(수은동事件)
□十月(10月) 卄五日(25日)□

이 事件은 전긔 리천群 현방리駐在所와 面所를 襲擊한 事件이 突發되자 근긔일대는 戒嚴狀態(戒嚴狀態)로 텰옹성 가튼 警戒網에 물샐 틈 업시 嚴重한 警戒 속에 겨우 닷새밧게 아니된 지난 十月 二十五日 저녁 일곱時 二十分 頃에 市內에서도 가장 눈띄이는 수은동(授恩洞) 大路邊(大路邊)에 拳銃 가진 靑年 한名이 나타나 길가에 잇는 수은동(授恩洞) 一百五十舊번디 뎐당抛(典當?) 대성호(大成號)를 襲擊하야 그 집 主人의 親兄 전긔英(全基榮)(三五?35)에게 運動資金을 請求하다가 듯地 안는다고 拳銃으로 전긔 전긔靈을 쏘아 죽이고 또 亦是 鬼神 價値 齊衰를 감추어 댱안텬디(長安天地)를 물 끌틋 뒤집혀 노앗든 事件이다.

??(蔥蔥)韓 犯人(犯人)에게
찬밥을 어더다 주어
幇助犯(幇助犯) 嚴大燮(엄대섭)

리수흥 류택수 류남수와 價値 리천群(利川郡) 백사면(柏沙面) 도립리(道立里)에 社는 엄대섭(嚴大?)(四七?47)도 警察部로 잡혀왓는데 톄포되여 온 理由는 지난 十月 二十一에 里數흥이가 현방리駐在所를 襲擊하고 面서긔를 射殺한 後 火藥냄새가 무럭무럭 나는 모젤권총을 손들고 리천邑으로 도라가다가 저녁 때에 前긔 엄대섭의 집에 이르러 밥을 請하매 엄대섭은 눈치를 亞러채리고 밥을 지어줄 터이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河엿스나 리수흥은 밥 짓기까지 기다릴 수 업다 하며 찬밥을 달라고 함으로 엄대섭은 洞里 집에 가서 찬밥을 어더다 먹여 보내고도 警察에 告發을 아니한 罪라고 하는데 엄대섭이가 맞춤 張에 갓다가 자긔 아들로부터 警察이 잡으려 왓드란 말을 듯고 卽時 리천警察署로 自首河엿다더라.

內剛(內腔)韓 柳南秀(유남수)
敏捷(敏捷)韓 柳澤秀(유택수)
◇두 兄弟의 父親은 書堂 훈댱
大事(大使)에 加擔(加擔)韓 兄弟(兄弟)의 履歷(履歷)

柳南秀(유남수)의 性行(性行)
共犯者로 잡힌 류택수와 류남수는 두 兄弟로 그 아버지 류창六(柳昌陸)(五三?53)은 漢學者로 只今 리천邑內에서 書堂 訓長노릇을 하며 한便으로는 雜貨商을 한다고 한다. 食口는 父母와 맛누의와 큰어머니를 合하야 여섯名인데 本來 京城府 靑葉뎡(靑葉町) 이뎡목에서 살다가 대정 九年에 現住所인 리천群(利川郡) 읍내면(邑內面) 중리(中里) 二百三十漆 번디에 理事하야 只今까지 사러오는데 동생 류남수는 리천普通學校를 卒業하고 대정 十一年부터 대정 十三年까지 朝鮮總督府 殖産局 給仕를 다니다가 얼마동안 집에서 自習하고 대정 十五年 社月부터 同年 九月까지 朝鮮日報 리천支局 긔字로 잇섯다고 하는데 리수흥과는 竹馬故友로 特別히 親分이 잇서서 리수흥이 滿洲에 건너가서도 여러 番 나오라 勸誘를 바덧섯다高 한다. 것츠로 보면 極히 柔順하여 보히지마는 속으로는 恒常 民族運動에 贊成하여 왓섯는데 지난 七月 里數흥이가 자긔집에 車低價 事情을 이야기하며 그는 리수흥에게 對하야 왜 좀 더 큰사람을 죽이지 안느냐는 質問까지 河엿다고 하는데 直接 拳銃事件을 범치는 안엇지마는 恒常 里數興의 行動에 便宜를 道아주엇다고.

柳澤秀(유택수)의 素質(素質)
兄 류택수는 동생萬콤 思想이 깁지 못하나 몸이 날새서 汎價値 날내다는 稱讚을 洞里사람에게서 바덧다고 한다. 本來 일뎡韓 職業이 업서오다가 昨年 末부터 리천自動車部에서 일을 보아오든 바 이番 리수흥이 드러오자 里數興과 그 동생 류남수의 懇切한 勸誘를 밧어 ○○運動에 獻身하기로 決心하고 安城事件에 里數흥이를 度와주엇고 수은동(授恩洞)뎐당國을 單獨히 襲擊河엿다고 한다.

老父(老夫)의 訃音(訃音) 듯고
痛哭(痛哭)하며 奔喪(墳上)
八十 로富의 訃音을 들은 리수흥
喪服을 입고 痛哭하며 분상하여
朔風客窓(朔風客窓)의 一幕(일幕) 悲劇(悲劇)

里數興의 아버지 리일영(李日瑩)은 今年에 八十 老翁으로 只今까지 水原郡(水原郡) 양감면(楊甘面) 宋山里(松山里) 妹夫 송범수(宋範壽)의 집에 依支하고 잇다가 世上근심과 陸身上 苦痛에 고만 病이 되여 지난 十月 二十日 頃에 世上을 떠낫는데 그도 또한 녯날 義兵大將 최현익(崔鉉翼)의 不하이엇다고 한다. 리수흥은 그 아버지의 訃告를 듯든 때는 그가 리천 현방리事件을 치루고 리천邑을 거처 安城郡(安城郡) 일죽면(一竹面) 화곡리(和谷里) 妹夫 江肯注意 집에 가든 十月 二十三日 驚異엇는데 江肯株價 리수흥에게 그 訃告를 前하자 그는 業드려 땅을 치며 不孝莫大하다는 罪를 하늘에 呼訴하고 卽時 喪服을 지어 입은 後에는 江肯株를 재촉하야 水原으로 가서 일헤 동안을 묵으면서 先山에 安葬한 後에는 京城으로 드러왓든 것이라더라.

 『銃(銃)만 잇섯더면』
大膽한 犯人의 말씨에
落膽(落膽)韓 取調刑事(取調刑事)

리수흥은 엇地圖 沈着하고 大膽한지 리천서 取調를 바들 때에도 取調하는 刑事의 肝膽을 서늘하게 한 일이 잇섯는데 그는 지난 陰曆 八月 秋夕에 拳銃을 안 가지고 리천 길로 다니다가 리영근(李永根)이라는 刑事의 取調를 밧은 일이 잇슨 것을 긔억하여 두엇다가 리영근이가 警察에서 取調코저 할 때에 大膽히 『그때 萬一 내게 銃만 잇섯더면 너는 죽엇스리라』는 말을 하여 리刑事를 놀래게 한 일도 잇섯다더라.

六十(六十) 老翁(老翁)의 貴童子(貴童子)로
十六歲(16歲)에 入山修道(入山修道)
서울서 日本사람의 雇傭살이에 설음
十九셰 때 滿洲 가서 義軍總裁의 部下
士官學校(士官學校)를 昨年(昨年)에 卒業(卒業)

眞犯人으로 확뎡된 리수흥(李壽興)은 엇던 사람인고. 本來 리천(利川) 사는 沿岸(延安) 리氏 리일영(李日瑩)(八○?80)(號?號 雪山?雪山)의 맛아들로 兩班의 집인데 그 아버지 리日영이가 늣도록 子孫이 業스며 쉰한살 되든 뎡軸(丁丑)年에 열아홉살 되는 處女에게 장가를 들어 七年 만에 리수흥(李壽興)이를 나語 愛之重之하여 길르면서 리천公立普通學校에 入學케 下野 二年級까지 授與케 한 後 열한살 되든 乙卯年(乙卯年)에 父親이 젊은 어머니에게 빠지어 三十餘席 秋收하든 前張도 파러가지고 서울로 移徙하야 市內 防産뎡(芳山町)에 집을 잡고 살면서 一年 동안 어의동(於義洞)公立普通學校에 通學하든 바 그 젊은 어머니는 畢竟 늙은 男便을 버리고 어듸로 가버리여 리수흥은 그 아버지를 水原郡(水原郡)  양감면(楊甘面) 宋山里(松山里)에 사는 妹夫 송범수(宋範壽)의 집에 依支하게 하고 各處로 도라다니다가 庚申年(庚申年)에 리천群 백사면(柏沙面) 원적산(圓寂山) 령원癌(靈源庵)에 드러가 二年 동안 중노릇을 河엿는데 열일곱살 되든 해에 아버지를 安城郡(安城郡) 일죽면(一竹面) 화곡리(化谷里) 妹夫 江肯週(姜兢周) 집에 依託하게 하고 리수흥은 열일곱살 되는 해에 홀로 京城에 올라와 對話뎡(大和町) 案等寫眞通信社(安藤寫眞通信社)에 雇傭事理로 드러가 일을 하든 中 그 主人이 朝鮮사람 差別을 넘어 甚히 하는 것에 憤慨하야 自由를 찾는데는 ○○을 하여야 된다는 구든 決心을 하고 ○○運動에 몸을 밧치리라고 맹서한 後 只今부터 四年 前 열아홉살 되든 해 봄에 京城을 出發하야 徒步로 滿洲에 가서 滿洲 관뎐현(寬甸縣)에 이르럿섯다고 한다. 관뎐현에 이르러 滿洲(駐滿) 參議府(參議務) 뎨일重大(第一中隊) 府使(副士) 금룡步 金某(金某)의 紹介로 義軍府(義軍府) 總裁(總裁) 채상덕(蔡相德)을 맛낫는데 그의 周旋으로 吉林省(吉林省)에 잇는 김좌진(金佐鎭)의 士官養成學校에 入學하야 昨年에 卒業하고 株만 參議府 뎨이중대 特務艇社(特務正士))에 任命되야 채상덕의 部下가 되엿다가 채상덕의 命令을 밧어 가지고 中隊長의 許可를 어더 가지고 陰曆 지난 五月에 『부로우닁』拳銃과 『모젤』拳銃을 가지고 對官○○을 목뎍하고 드러오게 되엿다고 한다.

入京(粒徑)하든 途中(途中)
平山(평산)서도 一發(一發)
로자 엇高低 中路에서도 한 房
失敗를 當하고 텰로길로 逃亡
平壤(平壤) 떠나 黃海道(黃海道) 山路(山路)

警察에서 調査한 바에 依支하면 리수흥(李壽興)이가 平壤을 떠나 서울을 向하든 七月 六일 頃에 黃海道 平山郡(平山郡) 안성면(安城面) 팔尖利(撥站里) 附近을 通行하다가 송뎡리__301 近方에서 엇던 크다란 집을 發見하고 旅費를 엇高低 그 집을 차저 드러가 主人을 車저보고 獨立單元인데 五百원만 내여 노라고 要求하얏더니 그 집 主人은 남의 집 山直이엇슴으로 목뎍을 達치 못하고 그 집 아들의 印度를 바더 그 附近 함성호(咸聖鎬) 집에 가서 主人의 일홈을 련해 불러서 大門을 열게 하고는 열자마자 안으로 드러가 主人과 面會를 請하엿더니 뒷門으로 多러南으로 威脅하는 意味로 한 放을 쏘고 텰도 線路를 밟으면서 鏡城市內로 드러왓다더라.

京畿道를 中心으로 連이어 發生한 拳銃事件 眞相
戒嚴 狀態의 3個月 間
4大 事件은 한 뿌리의 다른 가지
東小門·安城·利川은 主犯이 도맡아 犯行
鐵甕城 속 수은동은 共犯이 홀로 犯行
滿洲에서부터 平壤을 거쳐 京城 들어오자마자 東小門
鏡城을 떠나 安城 利川 等地로 제집 같이 돌아다녀
낯빛이 질린 警察과 總動員의 속事情

事件當時로부터
揭載 禁止
17日 午前 解除

지난 7月 10日에 市內 東小門派出所를 襲擊한 事件이 일어난 뒤부터는 市內를 中心으로 近畿地方 一帶에 銃소리가 끊어질 사이 없이 이곳저곳에서 重大한 事件이 뒤를 이어 發生하여 一般人들은 戰戰兢兢하는 狀態로 지내왔다. 한便 警察當局에서는 鬼神같이 出沒하는 犯人이 누구인지 이런 事件이 일어날 때마다 八方으로 活動을 하다가 얼마 前에 犯人의 端緖를 얻은 뒤로 卽時 警務當局을 통해 이 事件의 新聞記事 揭載를 禁止하고 活動을 하던 中 事件의 眞犯人이 잡히게 되자 비로소 解除가 되었으므로 그동안 本社에서 調査한 內容을 包含하여 重大事件의 顚末을 大略 報道한다.

滿洲 參議府 第2中隊
22歲의 이수흥
?輸銀洞事件은 利川 出生의 유택수?
◇지난 7日 現在 本報가 이미 報道한 犯人◇
判明된 戰後事件의 主犯과 共犯

지난 7月 10日 밤 10時半 頃에 鏡城市內 東小門派出所를 襲擊해 도쿠나가 巡査를 狙擊한 것을 비롯해 뒤를 이어 繼續 發生한 安城事件이며 利川事件이며 京城 輸銀洞事件은 물샐 틈 없이 늘여놓은 警戒網을 이리 뚫고 저리 뚫으며 鬼神같이 出沒해 京畿道 內 2000, 3000名의 警官은 잠을 자지 못하고 搜索을 하며 조금만 殊常하거나 늦은 밤에 길을 가는 사람이 있으면 戒嚴令을 實施한 것같이 嚴重히 取調하였다. 그러나 犯人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複雜한 情報와 空然한 密偵의 보고만 꼬리를 이어 統義府院이니 正義團이니 海外 있는 무슨 團體니 해서 조금만 嫌疑가 있으면 붙잡아다가 며칠씩 잠을 재우고 家宅搜索을 해 京城에서만도 近 100名의 嫌疑者를 取調하였으나 眞짜 犯人은 그림자도 못 보았다. 그러던 中 本報가 지난 7日附로 이미 報道한 바와 같이 지난 6日 午前에 利川警察署에서 잡은 犯人 3名이 京畿 一帶를 놀라게 했던 여러 가지 事件의 眞犯人인 것이 判明되었는데 그 犯人들의 住所 姓名 職業은 아래와 같더라.

▲본적 京畿道 伊川郡 읍내면 창전리 224
▲현주 未定 大韓臨時政府 주만참의부 第2中隊 特務艇社
이수흥(22)
一名 星團, 左性

▲본적 京城府 靑葉情 2정목
▲현주 京畿道 伊川郡 읍내면 中里 237
유택수(26)

▲본적 상동
▲현주 상동
無職(前 朝鮮日報 利川支局 記者)
유남수(22)

이와 같으며 이수흥은 主犯으로 大韓臨時政府 주만참의부 第2中隊 特務艇社로 그곳 指導者의 命令으로 모젤권총과 브로禹닝食 拳銃 두 자루와 銃알 980發을 가지고 지난 5月에 國境에 넘어 利川에 들어왔다. 유택수 유남수의 支援을 받아 京畿 一帶의 拳銃事件 모두를 犯行했고 수은동 典當舖 事件만은 유택수가 直接 한 것이 警察 調査로 밝혀졌다.

水陸 警戒 中 連發한 4代 事件의 줄거리
東小門事件
□7月 10日□

지난 7月 10日 밤 50分 頃에 市內 東小門 안 혜화동에 拳銃 가진 靑年 한 名이 나타나서 東小門派出所를 襲擊해 그 派出所 앞에서 警戒業務를 하고 있던 日本人 巡査 도쿠나가 街쓰지(35)가 派出所 안으로 避身하는 것을 좇아가 拳銃을 8發이나 發射해 6군데 重傷을 입히고 境界가 嚴重한 데도 巧妙히 자취를 감춰버려 한참 동안 京城 安易 뒤집혔던 事件이다.

安城郡事件
□9月 9日□
앞서 東小門派出所 襲擊事件이 일어난 지 꼭 2個月과 하루가 더 지난 9月 10日 밤 8時 頃에 京畿道 安城郡 읍내면 洞里 485番地 富豪 朴陞六(70)의 집에 拳銃 가진 靑年 2名이 나타나 그 집 主人의 맏아들 박태병(52)에게 面會를 要求하고 ‘軍資金’을 달라고 했으나 말을 듣지 않는다고 拳銃으로 박태병을 쏘아 죽이고 그와 同時에 그 집에서 일을 보는 김춘명(42)까지 쏴 重傷을 입힌 뒤 亦是 어디로인지 鬼神같이 자취를 감춰버려 한참 동안 潛潛하던 京畿 一帶가 다시 騷亂하게 되었던 事件이다.

伊川郡事件
□10月 20日□

앞서 安城 富豪 射殺事件이 일어난 지 꼭 1個月 11日이 된 지난 10月 20日 午後 3時 30分인 대낮에 京畿道 伊川郡 백사면 현방리에 拳銃을 가진 靑年 한 名이 나타나 먼저 그 洞네에 있는 현방리 警察官駐在所를 襲擊해 日本人 모리마쓰 巡査部長을 밖으로 쫓나내고 뒤이어 곁에 있던 현방리公立普通學校腸 이노우에의 아내인 하나에(29)를 쏴 重傷을 입힌 뒤 그 길로 곧장 그 洞네에 있는 白蛇面事務所를 덮쳐 事務所 안에 있던 사람들을 내쫓고 마침 化粧室에서 나오는 面書記 松川의(34)를 쏴 한 放에 卽死시킨 뒤 亦是 鬼神같이 자취를 감춰버려 近畿地方 一帶는 물 끓듯 떠들썩하였고 京畿 各 警察은 水陸 各地에 警戒網을 펼치고 법석을 떨었던 事件이다.

수은동事件
□10月 25日□

앞서 伊川郡 현방리駐在所와 面事務所를 襲擊한 事件이 일어나자 近畿一帶는 戒嚴狀態로 鐵桶 같은 警戒網에 물샐 틈 없이 嚴重한 警戒 속에 겨우 5日밖에 안 된 지난 10月 25日 저녁 7時 20分 頃에 市內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수은동 큰길 가에 拳銃 가진 靑年 한 名이 나타나 길가에 있는 수은동 159番地 典當舖 대성호를 덮쳐 그 집 主人의 親兄 전기영(35)에게 軍資金을 달라고 했으나 듣지 않는다고 拳銃으로 전기영을 쏴 죽이고 亦是 鬼神같이 자취를 감춰 서울天地를 물 끓듯 뒤집어 놓았던 事件이다.

서두른 犯人에게
찬밥을 얻어줘
幇助犯 엄대섭

이수흥 유택수 유남수와 같이 伊川郡 백사면 도립리에 사는 엄대섭(47)도 警察部로 붙잡혀왔다. 逮捕된 理由는 지난 10月 20日에 이수흥이 현방리駐在所를 襲擊하고 面書記를 射殺한 뒤 火藥냄새가 무럭무럭 나는 모젤권총을 손에 들고 이천읍으로 돌아다니다가 저녁 때에 엄대섭의 집에 닿아 밥을 要求하자 엄대섭은 눈치를 알아차리고 밥을 지어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수흥은 밥 짓기까지 기다릴 수 없다며 찬밥을 달라고 해 엄대섭은 洞네 집에 가서 찬밥을 얻어다 먹여 보내고도 警察에 申告를 하지 않은 罪라고 한다. 엄대섭은 마침 場에 갔다가 自己 아들한테 警察이 잡으러 왔다는 말을 듣고 卽時 利川警察署에 自首했다.

마음 굳은 유남수
몸이 날랜 유택수
◇두 兄弟의 父親은 書堂 勳章
큰 일에 加擔한 兄弟의 履歷

유남수의 됨됨이와 行實
共犯으로 잡힌 유택수와 유남수는 두 兄弟이고 아버지 流暢六(53)은 漢學者로 現在 利川邑內에서 書堂 訓長노릇을 하며 한便으로는 雜貨商을 한다고 알려졌다. 食口는 父母와 큰누나, 큰어머니를 合쳐 6名이며 本來 京城府 靑葉情 2正木에서 살다가 1920年에 現住所인 伊川郡 읍내면 中里 237番地로 移徙해 只今까지 살고 있다. 동생 유남수는 利川普通學校를 卒業하고 1922年부터 1924年까지 朝鮮總督府 殖産局 給仕를 하다가 얼마동안 집에서 自習하고 1926年 4月부터 같은 해 9月까지 朝鮮日報 利川支局 記者로 있었다고 한다. 이수흥과는 竹馬故友로 特別히 親分이 있어서 이수흥이 滿洲로 건너가서도 여러 番 나오라고 勸誘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겉으로 보면 매우 柔順하지만 속으로는 恒常 民族運動에 贊成해 왔었고 지난 7月 이수흥이가 自己 집에 찾아와 事情을 말하자 그는 이수흥에게 왜 좀 더 巨物을 죽이지 않느냐는 質問까지 했다고 한다. 直接 拳銃事件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恒常 이수흥의 行動에 便宜를 돌봐주었다고.

유택수의 素質
兄 유택수는 동생만큼 思想이 깊지는 못하지만 몸이 날쌔서 범같이 날래다는 稱讚을 洞네 사람들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本來 일정한 職業이 없다가 昨年 末부터 利川自動車部에서 일을 보아오던 中 이番에 이수흥이 들어오자 이수흥과 동생 유남수의 懇切한 勸誘를 받아 ○○運動에 獻身하기로 決心하고 安城事件에 이수흥을 도와주었고 수은동 典當舖를 혼자 襲擊했다고 한다.

늙은 아버지의 訃音을 듣고
痛哭하며 달려가 初喪 치러
八十 父親의 訃音을 들은 이수흥
喪服을 입고 痛哭하며 달려가 肖像
北風 나그네 窓가의 일幕 悲劇

이수흥의 아버지 이일영은 올해 80 老人으로 只今까지 水原郡 양감면 宋山里 妹夫 송범수의 집에 依支하고 있다가 世上근심과 몸의 苦痛으로 그만 病이 들어 지난 10月 20日 頃에 世上을 떠났다. 그도 또한 옛날 義兵大將 최현익의 部下였다고 한다. 이수흥이 아버지의 訃告를 들었던 때는 利川 현방리事件을 치르고 이천읍을 거쳐 安城郡 일죽면 화곡리 妹夫 江肯注意 집에 갔던 10月 23日 卿이었으며 江肯株價 이수흥에게 訃告를 傳하자 엎드려 땅을 치며 不孝莫甚하다는 罪를 하늘에 呼訴하고 卽時 喪服을 지어 입은 뒤 江肯株를 재촉해 水原으로 가서 7日 동안을 묵으며 先山에 安葬한 뒤 鏡城으로 돌아온 것으로 傳해졌다.

“銃만 있었다면”
大膽한 犯人의 말套에
落膽한 取調 刑事

이수흥은 어찌나 沈着하고 大膽한지 이천서 取調를 받을 때에도 取調하는 刑事의 肝膽을 서늘하게 한 일이 있었다. 그는 지난 陰曆 8月 秋夕에 拳銃을 지니지 않고 二千 길로 다니다가 이영근이라는 刑事의 調査를 받은 일이 있던 것을 記憶해 두었다가 이영근이가 警察에서 調査하려고 할 때에 大膽하게도 “그때 萬一 내게 銃만 있었더라면 너는 죽었을 것이다”라는 말을 해 이 刑事를 놀라게 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六十 老人의 늦둥이로
열여섯 살에 入山 수도
서울서는 日本人의 雇傭살이로 설움
열아홉에 滿洲 가서 義軍總裁 部下
士官學校를 昨年에 卒業

眞犯으로 確認된 이수흥은 어떠한 사람인가. 本來 二千 사는 沿岸李氏 이일영(80·濠 雪山)의 맏아들로 兩班의 집인데 아버지 이일영이 늦도록 子孫이 없어 51歲 되던 丁丑年에 열아홉 먹은 處女에게 장가를 들어 7年 만에 이수흥을 낳았다. 愛之重之 기르면서 利川公立普通學校에 입학시켜 2學年까지 마치게 한 뒤 열한 살 되던 乙卯年에 父親이 젊은 어머니의 꼬임에 빠져 30餘 席 秋收하던 논밭도 팔아가지고 서울로 移徙와 市內 房山頂에 집을 얻어 살면서 1年 동안 어의동公立普通學校를 다녔다. 젊은 어머니는 結局 늙은 男便을 버리고 어디로 가버려 이수흥은 아버지를 水原郡 양감면 송산리에 사는 妹夫 송범수 집에 맡겨 놓고 各地로 돌아다니다가 庚申年에 伊川郡 백산면 원적산 영원암에 들어가 2年 동안 중노릇을 했다. 17歲 되던 해에 아버지를 安城郡 일죽면 화곡리 妹夫 江肯週 집에 얹혀 살게 하고 이수흥은 혼자 京城으로 올라와 對話鄭 安堵寫眞通信社에 雇傭살이로 들어가 일을 하던 中 主人이 朝鮮사람을 너무 甚하게 差別하는 것에 憤慨해 自由를 찾으려면 ○○을 해야 된다는 굳은 決心을 하고 ○○運動에 몸을 바치겠다고 盟誓한 뒤 只今부터 4年 前 19歲 되던 해 봄에 京城을 出發해 걸어서 滿洲로 가서 滿洲 콴덴현에 到着했다고 한다. 콴덴현에서 滿洲 參議府 第1中隊 府使 금룡步 金某의 紹介로 義軍府 總裁 채상덕을 만났고 그의 周旋으로 지린省에 있는 金佐鎭의 士官養成學校에 入學해 昨年에 卒業하고 株만 參議府 第2中隊 特務艇社에 任命돼 채상덕의 部下가 됐다가 채상덕의 命令을 받아가지고 中隊長의 許可를 얻어 지난 陰曆 5月에 브로우닝 拳銃과 모젤 拳銃을 지닌 채 巨物○○을 노리고 潛入하게 되었다고 한다.

入京하던 途中
평산에서도 한 발
路資 얻으려고 오다가 한 房
失敗하고 鐵道길로 逃亡
平壤 떠나 黃海道 山길로

警察 調査에 따르면 이수흥이 平壤을 떠나 서울로 向하던 7月 6日 頃에 黃海道 平山郡 안성면 팔尖利 附近을 지나다가 송정리 近方에서 어떤 큰 집을 發見하고 旅費를 얻으려고 그 집을 찾아들어가 主人을 불러 獨立單元인데 500원만 내놓으라고 要求했다. 집 主人은 남의 집 山지기였으므로 目的을 達成하지 못하고 그 집 아들의 案內를 받아 附近 함성호 집에 가서 主人 이름을 연달아 불러 大門을 열게 하고는 열리자마자 안으로 들어가 主人을 만나겠다고 要請했더니 뒷門으로 달아나므로 威脅하는 뜻으로 한 房을 小鼓 鐵道 線路를 밟으면서 鏡城市內로 들어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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