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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잔동 100日 이야기

낯선 房에서 눈을 뜰 때마다 이곳이 어디인지 記憶하는 데 時間이 걸렸다. 冊꽂이에 붙어있는 준혁이의 寫眞과 窓 너머 낡은 聯立住宅 壁이 보이면 오늘이 며칠 째인지 생각했다. 記者는 京畿 安山 檀園區 고잔동에 있었다.

古棧洞의 時計는 4月 16日에 멈췄다. 골목길을 왁자하게 채우던 檀園高 아이들 250名(死亡·失踪)은 그날 한 瞬間에 사라졌다. 父母들은 休職했고 동생을 잃은 兄과 언니는 休學을 해 아침이면 檀園高와 遺家族 天幕으로 向했다. 食堂 社長도, 文具店 主人도, 派出所 職員도 한창 다른 이야기들을 하다가도 結局 ‘아이들’ 이야기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이곳은 歲月號 以後의 古棧洞이었다.

記者는 8日부터 14日까지 6泊 7日間 2學年 5班 生存 學生 박준혁 軍의 집에서 함께 지냈다. 檀園高를 中心으로 北쪽의 渦動(99名)과 南쪽의 고잔1棟(108名)은 檀園高 被害 學生(死亡·失踪者와 生存者)들이 가장 많이 살던 곳이다. 記者는 一週日間 이 두 곳을 걸어 다니며 남겨진 이들의 모습을 꼼꼼히 記錄했다. 安山=곽도영 記者 now@donga.com         ▲ 檀園高 生存學生 그림으로 본 心理狀態 바로가기

하늘공원

-세월호 犧牲 學生들의 納骨堂
-學生들 位牌와 함께 追慕 便紙가 쌓여 있음

희생학생 전출가구1

犧牲學生 朴某 孃이 살던 집.

꽃빛공원

-고잔동 北東쪽에 있는 綠地 公園
-追慕 公園 造成 論議 中
-犧牲 學生들 位牌와 이들에 對한 記憶을 모을 豫定

준혁이네집

生存學生 박준혁 君의 집

희생학생 전출가구2

犧牲學生 金某 孃이 살던 집

합동분향소

-花郞遊園地 안에 있음
-政府 公式 歲月號 慘事 犧牲者 合同焚香所
-訪問者數는 減少 趨勢
-7月6日(일)에는 900名 訪問

고잔1동 주민센터

-被害者 福祉 管理의 實質 據點
-遺家族들에게 飯饌 配達 해오다 더위로 中斷
-生必品 配達 方案 檢討 中

명성교회

-檀園高 正門 바로 옆 敎會
-犧牲學生 量온유 羊이 家族과 살던 곳
-慘事 以後 양 量 父親은 焚香所에서 머무름

놀러와 분식

-檀園高 登校길 길목에서 6年째 營業 中
-犧牲 學生들이 中學生이었을 때부터 단골
-主人 아주머니는 犧牲 學生의 詩를 코팅해 간직

고잔동 파출소

-謄下校 時間에 檀園高 앞에 巡察車가 待機
-父母들이 進度로 갔을 때 빈집을 지킴
-警察官 13名, 巡察車 5臺가 常時 巡察

유가족 천막

-合同焚香所 앞
-집에 혼자 있기를 어려워하는 學父母들이 머묾

경기도 미술관

-合同焚香所에서 걸어서 5分 距離
-犧牲學生 學父母 對策委 分科委 事務室
-每日 아침 10時 遺家族 會議 열림

단원고

-2學年 學生 250名이 犧牲된 뒤 敎室 텅 빔
-生存學生 敎室은 建物 反對便 特別室에 새로 마련
-2層에 生存學生 學父母 對策委 事務室
-아이들이 授業에 잘 集中하지 못하고 있음

옷사랑 세탁소

-琉璃 쪽門이 달린 작은 洗濯所 兼 便宜店
-犧牲 學生 전현탁 君 어머니가 運營했음
-應援 메시지들은 사라지고 門을 닫은 狀態

안산문화광장

-安山市廳 앞에 造成된 市民 廣場
-追慕 藝術品과 便紙로 가득함
-追慕 公演과 安山 市民 촛불行事가 열림

희생교사 최혜정 선생님의 집

-단원고에서 3㎞ 떨어짐
-崔 敎師는 赴任 2年 만에 慘事를 當했음
-崔 敎師 父親은 遺族과 함께 署名運動
준혁이네

每日 午前 7時 正刻이면 어머니가 차린 아침床에 준혁이, 누나와 함께 둘러앉았다. 수더분한 性格인 준혁이는 記者에게 누나 房을 내줘도 괜찮다고 했지만, 첫날은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준혁이는 세월호가 물에 잠긴 뒤 潛水를 해 헤엄쳐 바다로 脫出했다. ‘배’를 탔던(생존 學生들은 歲月號를 ‘배’라고 불렀다) 같은 班 親舊들 36名 中에서 살아 돌아온 것은 준혁이를 包含해 9名뿐이었다.

아침을 먹고 나면 어머니가 出勤하고 준혁이가 登校한 뒤, 記者는 누나와 아버지와 함께 生存學生 學父母 對策委員會 事務室이 있는 檀園高로 갔다. 日傭職에 從事하던 아버지는 다른 生存 學生 아버지 17名처럼 休職을 했다. 大學校 3學年이던 누나는 休學하고 對策委員會에서 컴퓨터 作業을 맡았다.

아버지는 담배가 늘었다. 車 뒷 琉璃窓엔 노란 리본 스티커가 붙었다. 檀園高 2學年 學生 아버지들의 車에는 ‘眞相糾明’ 스티커가 붙어 있거나 아이들이 親舊와 찍은 寫眞이 運轉席 앞에 달려 있었다. 平生 해본 적 없던 集會와 署名 運動, 國會 籠城을 다니느라 준혁이 아버지의 얼굴은 새카맣게 타 있었다. 學父母 大部分은 ‘短期 記憶 喪失’ 症狀을 겪었다. 車를 타고 한참을 가다가 문득 “내가 언제 여기까지 왔지”라며 멈춰 섰다. 生存學生 學父母 代表를 맡고 있는 장동원 氏는 9日 午後 한참동안 辯護士와 通話를 한 뒤 끊자마자 “내가 方今 누구랑 通話했지?”라고 혼잣말을 했다.

준혁이보다 5살 많은 누나의 冊欌에는 事故 以後 준혁이와 함께 찍은 寫眞들이 걸려 있었다. 카카오톡 프로필 寫眞도 준혁이였다. 누나는 檀園高에 갔다가 준혁이가 授業을 마치면 같이 집에 걸어왔다. 온 食口가 ‘退勤’韓 저녁이면 누나와 어머니는 소파에 앉아 學父母 團體 카톡을 하나하나 짚고 읽곤 했다. 엄마 아빠들은 카톡房에서 밤늦게까지 아이들 얘기를 하며 慰勞도 걱정도 함께 나눴다.

期末考査가 한 週 뒤로 다가왔지만 준혁이는 工夫가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어머니가 걱정했지만 준혁이를 비롯해 아이들은 授業에 예전처럼 集中하기가 힘들었다. 준혁이는 “半 親舊들 거의 授業을 아무도 안 들어요. 서너 名만 듣고, 나머지는 엎드려 있거나 폰 만지고 있거나 해요”라고 말했다. 집에 오면 컴퓨터 게임으로 時間을 보냈다. 趣味이자 特技였던 배드민턴도 한동안 치러 나가지 못했다. 檀園高 배드민턴 동아리 所屬이었던 준혁이는 積金을 모아 얼마 前 새 배드민턴 채를 샀지만 함께 배드민턴을 치던 親舊는 배에서 나오지 못했다. “(20餘名의 배드민턴 동아리 멤버 가운데) 아무도 없어요(안 남았어요). 아, 한 名… 저 말고 한 名 있어요”라고 준혁이는 말했다. ▲ TOP

단원고



午前 8時 아이들의 登校가 끝나면 午前 9時 學父母들의 登校가 始作됐다. 生存 學生 學父母들은 如前히 불이 켜진 예전 빈 敎室 옆 事務室에서 每日 아침 會議를 했다.

檀園高 3層엔 2學年 1班부터 6班, 2層엔 2學年 7班부터 10班의 敎室이 있었다. 元來 敎室엔 冊床과 私物函이 그대로 있었다. 平常時처럼 아이들이 登校할 時間이면 불이 켜졌고 終禮 時間이 지나면 꺼졌다. 하지만 敎室엔 아무도 없었다. 犧牲 學生들의 冊床 위엔 비닐로 包裝된 菊花꽃이 한 송이씩 놓여 있었고 漆板과 門에는 남겨진 이들의 메시지만 가득했다. 빈 冊床에 “三寸 된 것 祝賀한다. -사랑하는 兄이”라는 글句가 적혀 있었다. 그 사이 조카가 생겼다는 兄의 ‘申告’였다. 每日 午後 2時가 되면 生存學生 學父母들은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빈 冊床을 쓸고 닦았다.



檀園高 建物은 ‘ㄱ’字 形態였다. 生存 學生 75名의 敎室은 같은 層 다른 쪽 複道에 있는 美術室, 컴퓨터室 等 特別室에 새로 마련됐다. 11班부터 18班까지, 한 班에 10名 안팎이었다. 元來의 敎室과, 새 敎室이 있는 複道를 兩쪽으로 두고 가운데에 生存學生 學父母 對策委員會가 꾸려졌다. 어머니 아버지는 이곳에서 每日 午前 9時 會議를 열고 살아남은 아이들을 돌볼 方案과 歲月號 眞相 糾明 對策을 論議했다. 아이들의 放課 後 活動 支援을 오랫동안 要請했지만, 學校도 敎育廳도 “論議 中”이라고만 했다. 學父母들은 地域 敎育 奉仕 團體와 體育館에 도움을 請하고 아이들에게 直接 放課 後 特別活動 申請을 받았다. 父母들은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곧잘 事務室 門을 두드리고 엄마 아빠가 있는지 確認했다. 女學生 하나가 門을 빼꼼히 열고 “저희 엄마 여기 있어요?”라고 물으면 어머니가 “그래 내 새끼”라고 했다. 아무 일이 없는데도 아이들은 事務室 안 冷藏庫 핑계를 대며, 엄마 아빠 얼굴을 보러, 그렇게 하루에도 몇 番씩 門을 두드렸다.

가끔 아이들은 反對쪽 複道에 있는 元來 敎室에 가서 예전 自己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기도 했다. 멍하니 있거나 엎드려서 冊床 위에 뭔가를 끄적이곤 했다.

11日에는 단원고 學生會長 選擧가 있었다. 2學年 候補로 나온 한 學生의 포스터에는 “모두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環境을 만드는 데 最善을 다하겠습니다”라는 內容이 적혀 있었다. 여느 學生會 選擧처럼 祝祭에 演藝人을 부른다거나 하는 公約은 없었다. 배에서 살아나온 아이들은 훌쩍 자라버린 듯했다. ▲ TOP

명성교회

명성교회 2學年 犧牲學生 量온유 量은 父母와 세 동생과 함께 明聲敎會 뒤便에 딸린 집에 살았다. 온유는 4月 16日 세월호 甲板 위에 있다가 親舊들을 救하러 船室로 돌아간 뒤 돌아오지 못했다. 溫柔의 아버지는 이 敎會의 管理職을 맡고 있었다. 每日 저녁 8時면 이곳에선 歲月號 慘事 被害者를 위해 禮拜가 열렸다.



慘事 以後에도 온유네는 如前히 이곳에 살았다. 父母는 어린 딸을 苦生만 시키다 보낸 것이 未安해 그저 罪人 같았다. 아버지는 다른 遺家族들과 合同焚香所 앞 天幕에서 大部分의 時間을 보냈다. 남겨진 딸의 冊床을 쓸어 보던 아버지는 “父母 걱정 한 番도 끼치지 않았던, 의젓하고 믿음직한 그런 애였는데…”라며 고개를 떨궜다.집안에만 있던 어머니는 이제 낮이면 가끔 집 밖을 나와 다니기도 하고 이웃들과 이야기도 조금씩 始作했다. 어머니는 이웃 粉食집 아주머니와 앉아 있다가 눈물이 나면 거울을 보는 척하면서 “아 눈이 왜이래…”라고 하곤 했다. 그러면 粉食집 아주머니는 모른 척 일손을 다시 움직인다고 했다. ▲ TOP

옷사랑 세탁소

‘옷사랑 洗濯所’는 犧牲 學生 전현탁 君의 어머니가 運營하는 작은 洗濯所 兼 便宜店이었다.

門 앞에 있던 꽃다발과 노란 리본은 더 以上 그 자리에 없었다. 누군가가 갖다 두었던 應援의 便紙도 비를 맞다가 언젠가 없어졌다.

‘現託兒 돌아와’라고 쓰여 있던 글句도 사라졌다. 連絡處만 메모紙에 남긴 채 洗濯所는 내내 門을 닫아걸고 있었다.

현탁이가 끝내 犧牲된 것으로 드러난 뒤 어머니는 洗濯所 안 쪽방에 누워 아무하고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웃 粉食집 社長은 “가끔 불이 켜질 때도 있었지만, 門을 연다고 해도 아직은 일을 할 수 있는 狀況이 아닐 것”이라며 걱정을 했다. ▲ TOP

놀러와 분식

“준혁아, 粉食집 아주머니가 너 토스트 먹으러 오래.” 아침을 먹던 준혁이가 記者의 말에 살짝 웃었다. 함께 지낸 지 이틀째, 처음으로 건넨 말이었다.

‘놀러와 粉飾’은 檀園高 앞에서 6年째 營業 中이다. 學校 隣近에서는 가장 오래된 粉食店이다. 이 곳을 運營하는 夫婦는 檀園高 2學年 學生들이 中學校를 다니던 때부터 토스트, 김밥, 떡볶이를 팔아왔다.

午後 4時 半, 授業을 마친 아이들은 如前히 粉食店을 찾아왔다. 夫婦는 2學年 名札을 단 아이가 오면 토스트 값을 받지 않았다. 가게에는 犧牲된 3班 신승희 羊이 慘事 以前에 白日場에서 썼던 ‘航海’라는 題目의 詩가 남겨져 있었다. “우리는 잔잔한 바다를 永遠히 함께 航海하리…”라는 詩句가 이젠 칼날처럼 남겨진 이들의 가슴을 후벼 팠다. 누군가 손 글씨로 다시 써서 檀園高 앞 골목에 걸어두었던 詩였다. 夫婦는 비를 맞고 귀퉁이가 찢어진 종이를 코팅해 가게 안에 간직했다.

4月 16日 前에는 點心 給食 메뉴가 別로인 날이면 가게는 學生들로 꽉 찼었다. 逍風이나 行事가 있는 날이면 夫婦는 새벽부터 나와서 아이들 김밥을 말았다. 放課 後에 先生님이 間食이라도 사는 날이면 敎室까지 와플 數十 個를 配達했다. “修學旅行 가던 날도 와서 떡볶이 시켜 먹고 떠들던 애들인데…” 主人 아주머니는 말을 삼켰다. 社長님은 “事故 前에 최혜정 先生님이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버스 놓칠까 종종걸음으로 가는 걸 봤어요.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으면 내가 집에 태워다 줬을 텐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慘事 以後 아이들의 빈자리엔 다른 손님들이 찾아왔다. 全國 坊坊曲曲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檀園高 앞에 노란 리본을 매달고는 粉食店에 들러 療飢를 했다. 어느 날은 大邱에서 새벽에 와서 點心을 먹고 내려간다는 高等學生 男妹가 라면을 시켰다. 또 어느 날은 못 보던 中年 夫婦가 구석에 앉아서 쫄麪을 먹었다. 犧牲된 최혜정 敎師의 父母였던 夫婦는 默默히 食事를 마친 뒤 나가면서 “우리 혜정이 집에 잘 들어왔어요. 걱정 마세요, 感謝합니다”라고 말했다. 主人 아주머니는 “저희는 애들 이름은 다 몰랐지만 얼굴을 다 알잖아요. 合同焚香所에 가면 걔들 이름을 다 알게 되는데… (마음이 아파서) 갈 수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 TOP

희생교사 최혜정 선생님의 집

犧牲者 최혜정 先生님의 아버지는 14日 安山 트라우마 센터에서 診斷書를 받아오는 길에 粉食店에 들렀다. “나는 최혜정이 아빠에요.” 땀범벅이 된 記者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냉커피를 시켜줬다.

최혜정 先生님의 집은 단원고에서 3㎞ 떨어진 洞네에 있었다. 아버지는 딸의 房을 아직까지 다 치우지 못했다. 寢臺에는 딸이 쓰던 이불과 베개가 그대로 깨끗하게 펼쳐져 있었지만 房바닥에는 싸다 萬 짐 가방 서너 個가 널려 있었다. 居室 텔레비전 밑에는 딸의 寫眞이, 壁에는 學窓時節 받았던 學業優秀 賞牌가 걸려 있었다. “얼마나 꼼꼼하고 快活한 애였는데…” 아버지는 말끝을 맺지 못했다.



赴任 2年 만에 慘事를 當한 崔 敎師에게 남은 弟子는 1學年 때 맡았던 아이들 8名과 2學年 9班 아이들 2名, 總 10名뿐이었다. 딸은 初任 敎師의 熱情이 넘쳤다. 放課 後 授業을 하고도 거의 每日 밤늦게까지 아이들이나 學父母와 相談을 하고 오곤 했다. 房에 남겨진 敎務 手帖에는 班 아이들 別로 특별히 보살핌이 必要한 아이인지, 챙겨줘야 할 部分들은 무엇인지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아버지는 犧牲된 9班 아이들의 學父母와 함께 아들딸 代身 까만色 9班 반티를 입었다. 티셔츠 등 쪽에 흰色으로 ‘9’字가 새겨지고 그 위에 까만 글씨로 ‘최혜정 先生님’과 아이들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다른 遺家族들과 함께, 아버지는 반티를 입고 全國 巡廻 버스를 타며 特別法 制定 署名運動을 하고 國會 籠城을 나갔다.

얼마 前 딸의 弟子 10名을 모아 밥을 사 먹였다고 했다. 딸은 늦게까지 남은 아이들을 모아 粉食店에서 와플을 사먹이곤 했다.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앞으로 工夫 熱心히 하고 큰 사람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요즘 授業을 거의 안 듣는다는데… 걱정이에요. 내가 가서 잔소리라도 해주고 싶어요”라며 아버지는 쓸쓸히 웃었다. ▲ TOP

고잔동 파출소

“巡察하다가 學校 앞 亭子에 앉아 있으면 ‘아저씨, 아저씨’ 하던 애들이 싹 사라졌으니까… 요새도 거기 앉아 있으면 이걸 믿을 수가 없어”

登下校 時間이면 檀園高 앞 눈에 띄지 않는 곳에 巡察車 한 臺가 서 있었다. 고잔派出所 職員들은 6月 末까지 24時間 巡察 體制였다. 最近 午前 10時부터 새벽 2時까지로 거리 徒步 巡察 時間이 짧아졌다.

慘事 以後 얼마間 洞네는 鬱憤에 싸여 있었다. 밤이면 아들딸을 잃은 아버지들이 술에 醉해 理性을 잃고 싸움이 일어났다. 孫女를 잃은 할머니가 울면서 대낮에 學校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親舊를 잃은 男學生이 밤에 學校 앞에서 알 수 없는 소리를 오래도록 지르기도 했지만 아무도 나와서 말리지 않았다. 수많은 申告에 派出所는 쉴 틈이 없었다. 아이들을 찾으러 父母들이 모두 進度로 내려갔을 때 職員들은 텅 빈 집들을 찾아다니며 門에 붙은 傳單紙를 떼고 쌓인 郵便物들을 거두어 지키며 기다렸다.

時間이 흐르면서 洞네는 漸次 安定을 찾아갔지만 派出所는 警戒를 늦출 수 없었다. 常時 巡察 人力 13名에 巡察車 5臺를 配置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두 名씩 짝지어 巡察을 도는 職員들이 익숙한 지 人事를 건네기도 했다. 派出所長은 檀園高 生存 學生들이 登校하던 날 學校 앞까지 찾아갔다고 했다. 이름도 모르는 아이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洞네가 작으니까 애들이 ‘아저씨, 아저씨’하며 얼굴을 다 알아요… 이 洞네 아무도 이게 時間이 지나면 슬프지 않을 거라고,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다들 그냥 익숙해지면서 이렇게 살아가는 거죠.” ▲ TOP



合同焚香所 : 安山 花郞遊園地 안 政府 公式 合同焚香所. 日曜日인 6日 基準 900名이 訪問하는 等 休日 訪問客들이 꾸준히 찾고 있다.





京畿道 美術館 : 犧牲學生 學父母들의 分課 委員會 事務室이 마련된 곳. 每日 아침 10時에 遺家族 會議가 열린다.

遺家族 天幕 : 合同焚香所 앞 遺家族 天幕. 休職했거나 집에 혼자 있기를 어려워하는 學父母들이 머물고 있다.

고잔1棟 住民센터 : 6月까지 遺家族들에게 飯饌과 도시락 等을 配達했다. 안산시에서 오는 生必品과 食資材를 職員들이 直接 遺家族 집으로 나르는 것을 考慮하고 있다.

하늘公園 : 아이들의 納骨堂. 2學年 犧牲 學生들의 位牌와 아이들에게 보내온 便紙, 膳物이 쌓여 있는 곳이다.





꽃빛公園 : 學父母들은 安山 곳곳의 納骨堂에 흩어져 있는 아이들의 位牌를 모아 이곳에 ‘追慕 公園’을 만들 것을 論議 中이다.

轉出家口 1 : 犧牲學生 朴某 孃이 살던 집. 朴 孃이 숨진 뒤 父母님과 오빠는 渦動 住民센터의 도움을 받아 常綠區로 移徙했다.

轉出家口 2 : 犧牲學生 金某 孃은 이곳 半地下房에서 어머니와 살았다. 金 孃이 숨지고 나서 어머니는 고잔1棟 住民센터의 도움을 받아 常綠區로 移徙했다.

安山文化廣場 : 安山市廳 앞 市民 廣場. 많은 詩人, 畫家 等 藝術家들이 남긴 作品과 市民들이 남긴 便紙, 노란 리본이 廣場 全體를 메우고 있다. ▲ TOP

“○○야 未安해. 나만 살아 돌아와서.” 安山 檀園高 2學年 A孃의 카카오톡 프로필 寫眞에는 4月 16日 歲月號 慘事가 일어나기 前 7名의 級友들과 多情하게 찍은 寫眞이 올라 있다. 하지만 이 寫眞 속 主人公들 中 A量만 살아남았다. 지난달 25日 세월호 事故 以後 처음으로 登校한 生存學生들은 거짓말처럼 휑하게 비어버린 敎室과 調和가 올려져 있는 級友들의 冊床을 바라보며 무거운 납덩이가 마음 한 구석을 짓누르는 느낌을 받았다. 이날 自身들보다 먼저 世上을 떠난 親舊들에게 便紙를 쓰며 學生들은 그동안의 눈물을 한꺼번에 터뜨렸다.


歲月號 慘事가 일어난 지 어느덧 100日이 가까워진다. 遺家族 못지않게 ‘살아남은 者의 슬픔’을 느끼고 있는 生存 學生들의 現在 心理 狀態 및 治療 過程 一部를 本報가 들여다봤다.


現在 生存 學生들이 느끼는 感情의 많은 部分을 ‘罪責感’과 ‘無氣力症’이 차지하고 있다. 學生들이 安山中小企業硏修院 合宿 期間 中 그린 그림을 보면 이런 感情이 잘 드러나 있다. 本報는 生存學生 學父母 對策委員會의 同意를 얻어 學生들이 그린 그림 78點을 入手했다.


生存 學生들이 그린 그림을 分析한 車醫科大 美術治療大學院 김선현 院長(46·寫眞)은 外傷後 스트레스 症候群(PTSS)
治療 專門家이다.
金 院長은 現在 慰安婦 할머니들을 對象으로 한 美術心理治療 活動을 7年 동안 해오고 있으며
北韓의 延坪島 砲擊으로 인해 被害를 입은 住民들 및 性暴力 被害 女性들에 對한 美術心理治療活動도 進行했다.


한 學生이 그린 그림을 보면 圖畫紙 아래는 파란色으로 波濤가 그려져 있고 歲月號 선미가 물결 위로 若干 드러나 있다. 왼쪽에는 希望과 奇跡을 象徵하는 노란리본이, 오른쪽에는 꽃잎이 떨어지고 있는 흰 菊花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림 가장 위쪽에는 세월호 事故가 發生한 날짜 4月16日이 적혀 있다.


美術心理治療 專門家인 김선현 車醫科大 美術治療大學院腸은 “菊花 꽃잎이 바다로 떨어지고 있는 것은 犧牲者들에 對한 哀悼와 함께 學生 自身의 憂鬱感이 表現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노란 리본은 같은 班 學友에 對한 그리움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分析했다. 金 院長은 “事故 날짜를 적은 것은 ‘마음속에 새기고 잊지 않겠다’라는 다짐을 表現한 것으로 犧牲者에 對한 哀悼 및 외상 事件에 對한 衝擊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學生은 그림 代身 글로 “사랑한다 ○○○, 끝까지 親舊들 神經 쓴 너는 正말 最高였어, 世上이 亡해가는 氣分이 들어, 거기서 기다려 … 너희 몫까지 살다갈게 나만 나와서, 그날 그저 未安해”라고 自責感을 表現했다. 이은경 명지대 靑少年指導學科 敎授는 “마음 속에서 죽은 親舊에 對한 罪責感이 남아있어 現在 혼란스러운 狀態인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李 敎授는 “自身의 罪責感을 씻기 위해 過度한 行動이나 情緖를 보일 境遇 暴食, 不眠 等의 不適應 行動도 나타날 수 있다”고 分析했다.


生存學生 學父母 對策委員會에서 75名의 生存學生들을 對象으로 7~13日 實施한 設問調査에서도 비슷한 結果가 나왔다. 調査 結果 ‘지난 一週日동안 느낀 感情’을 묻는 質問에 ‘지쳐 있어요’와 ‘지루해요’가 各各 33名(複數應答)으로 가장 많았다. ‘複雜해요(28명)’ ‘마음아파요(25명)’ ‘불만스러워요(24명)’ ‘지긋지긋해요(23명)’ ‘슬퍼요(21)’ 等 否定的인 應答이 大部分이었다.


생존 학생들의 최근 일주일 동안 기분을 나타낸 워드클라우드!

  • 생존 학생들의 최근 일주일 동안 기분을 나타낸 워드클라우드!
  • 생존 학생들의 최근 일주일 동안 기분을 나타낸 워드클라우드!


    生存學生 學父母 對策委員會에서 7月 7日~13日 사이 檀園高 生存學生 75名에게 ‘지난 一週日 동안 느낀 感情’을 물어본 結果를 土臺로 만든 워드 클라우드.
    워드 클라우드에서는 答辯 頻度가 높은 單語일수록 더 크게 標示된다. ‘지쳐있어요’, ‘지루해요’ ‘마음 아파요’ 等 否定的인 答辯이 大部分을 차지했다.
    ‘幸福해요’ ‘장난치고 싶어요’ 等 一部 學生들의 장난스런 答辯도 있었다.

‘한달 前부터 느낀 感情’에 對해 묻자 ‘不安하거나 憂鬱할 때가 있다’는 學生이 71%, ‘무슨 일을 하더라도 集中하기 어렵다’는 學生이 49%를 차지했다.


전우영 忠南大 心理學科 敎授는 “學生들은 自身들이 經驗했던 衝擊的 事件이 社會的으로 어떻게든 마무리되고 그 事件이 過去의 것이라 생각돼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며 “自身들의 잘못이 아님에도 親舊들을 救하지 못했다는 當時의 衝擊과 無氣力感이 只今까지 影響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2000年 부일외고 修學旅行 慘事의 生存者 김은진 氏도 “生存 學生들은 事故를 責望할 原因을 찾다 結局에는 本人에게 돌릴 수 있다”며 生存 學生 治癒의 重要性을 指摘했다.


生存 學生들의 心理治療를 進行했던 非營利 敎育團體 ‘아름다운 배움’은 ‘大學生 멘토’라는 方法을 통해 學生들의 參與를 誘導했다. 아름다운 배움은 京畿道 敎育廳의 要請으로 4月 30日부터 7月 4日까지 3次例에 걸쳐 멘토링 敎育을 實施했다. 이 프로그램은 ‘단원고 生存學生 治癒 및 家庭, 學校 復歸 프로그램’의 一環으로 進行된 것이다.


5月 5日부터 大學生 멘토로 心理治療 過程에 參加한 B氏는 처음 본 生存 學生들의 가슴 아픈 모습을 잊지 못하고 있다. 當時 事故의 衝擊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學生들은 “親舊들에게 罪責感이 느껴져요”, “삶이 無氣力해요”란 말을 했다. 하지만 멘토링 프로그램이 進行되면서 敎師 및 專門 相談師 等에게는 心理的으로 萎縮돼 自身의 아픔을 털어놓지 못하던 學生들이 兄, 누나뻘 되는 멘토들과 親해진 뒤로는 움츠렸던 感情을 드러내기 始作한 것. B氏는 “처음에는 말도 걸지 않던 學生들이 한 달 程度 지나자 멘토 先生님들에게 먼저 連絡을 하기도 했고 父母님 및 親舊들의 이야기도 꺼낼 程度로 밝아졌다”고 傳했다.


아름다운 배움은 세월호 事故로 숨진 學生들의 兄弟, 姊妹에게까지 ‘멘토링’프로그램을 擴大할 方針이다. 백연상 記者 baek@donga.com ▲ 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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