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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內 데뷔 25周年 맞은 팝페라 歌手 임형주|여성동아

PEOPLE

國內 데뷔 25周年 맞은 팝페라 歌手 임형주

윤혜진 프리랜서 記者

2023. 12. 06

正規 9輯 앨범 ‘Life On Air’ 發賣를 앞둔 임형주를 만났다. 國內 데뷔 25周年, 通算 20番째 앨범이라 準備한 質問이 많았지만, 마주 앉은 지 10分이 되지 않아 質問紙를 치웠다. 斷言컨대 이 2時間의 수다를 쫓다 보면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한 임형주를 보게 될 것이다.

江山이 2番 바뀌고도 남을 時間 동안 제자리, 그것도 頂上을 지켜온 사람은 宏壯히 무던하거나 몹시 徹底하거나 둘 中 하나다. 올해 國內 데뷔 25周年, 世界 데뷔 20周年을 맞은 팝페라 歌手 임형주(37)는 徹底히 大衆이 아는 그 ‘임형주’로 살아왔다. 임형주는 12歲인 1998年 ‘Whispers of Hope’로 國內에 데뷔했고, 5年 뒤인 2003年 ‘Salley Garden’으로 國際 舞臺에 첫발을 내디뎠다. 荒蕪地나 다름없던 韓國 팝페라를 開拓해나가고 世界的인 팝페라 테너로 자리 잡기까지 목 管理를 위해 술, 담배, 커피를 一切 입에 대지 않는 것은 勿論 쉬지 않고 世界 곳곳의 舞臺에 섰다. 한창 바쁠 때는 1年의 折半 以上을 海外에서 보냈다.

그러나 豫期치 못한 코로나19로 임형주는 cpbc FM 라디오 프로그램 ‘임형주의 너에게 주는 노래’ DJ를 하며 國內 活動에 集中했다. 月曜日부터 金曜日 午後 7~9時 週 5日 生放送은 예전이라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엔데믹을 맞아 海外 스케줄이 늘고 健康上의 理由로 2年 6個月間 지켜온 라디오 DJ 자리에서 물러난 임형주는 다시 조금씩 世界 活動을 再開 中이다. 올 9月에는 몽골에서 열린 프란치스코 敎皇 執典 미사에 招請받아 食後 閉幕 行事 엔딩 舞臺를 裝飾했고, 來年에는 日本 데뷔 20周年을 맞아 日本에서 베스트 앨범을 낸다.

프리 프로덕션 미팅車 日本을 다녀온 임형주를 11月 11日 이른바 ‘빼빼로데이’에 서울의 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오붓한 時間을 보내고 있는 한 家族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임형주는 戶口調査를 始作으로 오히려 質問을 쏟아냈다. 2009年 그와 처음 인터뷰했을 때는 보지 못한 모습이다. 2008年 데뷔 10周年을 맞아 設立한 아트원 文化財團과 敎育事業에 對한 抱負를 밝히던 야무진 20代 靑年은 30代가 되어도 틀린 말을 바로 修正하는 徹底함과 童顔 얼굴은 如前했지만, 어딘가 달랐다.

結婚하는 게 眞짜 獨立이라고 생각

1998년 발매한 국내 데뷔 앨범(왼쪽)과 25년 뒤인 올 11월 발매한 정규 9집 ‘Life On Air’ 커버.

1998年 發賣한 國內 데뷔 앨범(왼쪽)과 25年 뒤인 올 11月 發賣한 正規 9輯 ‘Life On Air’ 커버.

日本은 잘 다녀왔나요.

來年이 日本과 홍콩, 臺灣 데뷔 20周年이에요. 코로나19 以前 日本에 자주 다닐 때는 한 달에 세 番 간 적도 있었는데 오랜만에 다녀왔어요. 일 마치고 유후인에 들러 溫泉도 즐기고 좋았어요.



2009年에는 저한테 “公演하랴, 音盤 錄音하랴, 工夫하랴, 學生들 가르치랴 正말 바빠요. 놀지도 못하고, 戀愛도 못하고 그렇게 지냅니다”라고 했어요.

眞짜요? 저는 그때도 그렇게 살았군요. 하하. 그때보단 삶을 보는 게 觀照的으로 바뀌었어요. 20代에는 只今보다 훨씬 緊張하며 살았거든요. 그러니까 只今보다 훨씬 더 말랐겠죠. 確實히 나이는 거저먹는 게 아니에요. 예전에는 일이 잘 안 되면 ‘Why me?’ ‘왜 나한테만?’이라고 생각했다면 只今은 ‘It doesn’t matter’ ‘상관없어 괜찮아’ 하고 말아요. 노래를 부를 때도 예전보다 힘을 빼는 境遇가 많아졌고, 소리를 더 예쁘게 내려고 執着하지도 않아요.

좋은 變化네요. TMI입니다만 14年 前 임형주 氏를 만나고 온 날 임형주 氏와 同甲인 제 男동생과 比較가 돼 宏壯히 印象的이었어요. 너무 빨리 달리면 그만큼 번아웃度 일찍 오잖아요.

欲心은 只今도 있어요. 다만 코로나19街 제 人生에 쉼標를 찍어줬어요. 그렇지 않았으면 번아웃이 왔을 거예요. 海外를 오가느라 제 버킷 리스트였던 라디오 DJ도 못 했을 거고요. 그런데 男동생은 結婚했나요? 只今 건너便의 家族 보이죠? 저렇게 多情한 家庭을 보면 부러워요. 저는 結婚하고 子女가 있는 분들이 저보다 훨씬 더 成功한 삶 같아요. ‘나도 언젠가 한 家庭의 家長이 될 수 있을까?’ ‘예쁜 아이들을 낳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하는데 結論은 늘 똑같아요. 사람은 各自 할 일이 있나 봐요. 只今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더 해보려고요.

어머님은 結婚하라는 얘기 안 하나요.

어머니가 잔소리하시면 스트레스가 쌓일 텐데 神奇할 程度로 푸시가 없어요. 오히려 얼마 前에는 제가 “이렇게 結婚도 못 하고 죽으면 抑鬱해서 어쩌죠?” 하니까 어머니가 “100歲 時代에 別걱정을 다 한다” 하셨어요(웃음). 저, 또 궁금한 게 있어요. 저도 女同生이 있지만 男妹가 둘 다 結婚해 家庭을 이루고 나면 確實히 前보다는 많이 못 보죠?

아무래도 그렇죠. 各自의 삶이 있으니까요.

그렇겠네요. 前에는 사람들이 “사는 게 바빠서”란 말을 하면 잘 理解하질 못했어요. 이제는 사는 게 眞짜 바쁘면 “같이 밥 한番 먹자”란 말이 人事치레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가끔 카카오톡에 生日 맞은 사람들 目錄이 뜨면 膳物과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요. “生日 祝賀해. 우리 본 지 오래됐지만 이렇게 문득문득 생각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우리가 특별한 因緣이라고 생각한다”라고요. 이제 제 나이가 이렇게 지낼 때가 됐나 봐요.

그래도 문득문득 생각나는 사람들이 곁에 많이 있단 事實만으로도 幸福한 삶 같아요.

저는 元來 어디 가서든 ‘늘 幸福하세요’라는 말을 많이 썼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문득문득 幸福하세요’라고 해요. 왜냐면 늘 일에 치여 사는데 어떻게 每日 幸福할 수 있겠어요. 世上 物情 모르는 얘기였던 거죠(웃음).

人生曲 ‘아베마리아’와 ‘千 個의 바람이 되어’

2003년 2월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서 역대 최연소로 애국가를 선창해 화제가 됐다.

2003年 2月 盧武鉉 大統領 就任式에서 歷代 最年少로 愛國歌를 先唱해 話題가 됐다.

1998年 當時 人氣 프로그램이었던 ‘이소라의 프로포즈’에 出演해 淸雅한 목소리로 自身의 데뷔 앨범 타이틀曲 ‘난 믿어요’를 불렀던 6學年 어린이는 以後 最年少, 最初의 삶을 살았다. 特히 17歲인 2003年, 뉴욕 카네기홀 歷史上 世界 男性 聲樂家 中 最年少로 獨唱會를 열고 世界 데뷔를 한 以後 삶은 더 華麗하다. 소니뮤직(2003), EMI뮤직(2007), 워너뮤직(2010), 유니버설뮤직(2014) 等 世界 4大 메이저 音盤社와 모두 獨집 앨범 流通 契約을 締結한 最初의 韓國人 아티스트란 大記錄을 세웠다.

그러나 ‘You Raise Me Up’ ‘Nella Fantasia’ ‘下월街’ 等 發表하는 曲마다 큰 人氣를 누린 임형주에게도 아픈 손가락은 있다. 바로 세월호 追慕曲으로 有名한 ‘千 個의 바람이 되어’다. 元來는 2009年 2月 16日 金壽煥 樞機卿의 선종일에 맞춰 發賣된 曲이었다. 各種 追慕 行事와 放送 및 온라인上에 널리 使用되자 임형주는 2014年 5月 1日 歲月號 慘事 追慕曲으로 再發賣했고, 그 이듬해 이 曲의 音源 收益金 全額을 寄附했다.

지난 2020年 藝能 프로그램 ‘밥은 먹고 다니냐?’에 出演한 임형주는 “大韓民國 國民으로서 함께 슬퍼했을 뿐인데 세월호 追慕曲을 發表한 後로 放送 涉外가 끊겼다. 미리 잡혀 있던 스케줄마저 모두 取消됐고 國家 行事는 말할 것도 없었다”고 이 曲에 얽힌 뒷이야기를 털어놓은 바 있다. 큰 사랑을 받은 代表曲이 한便으론 歌手 人生을 威脅하게 된 아이러니라니, 알 수 없는 게 人生이다.

2003년 웨일 리사이트홀, 2007년 아이작 스턴 오디토리엄, 2010년 잔켈 홀 공연까지 ‘카네기홀 완전 정복’ 대기록을 세웠다.

2003年 웨일 리사이트홀, 2007年 아이작 스턴 오디토리엄, 2010年 盞켈 홀 公演까지 ‘카네기홀 完全 征服’ 大記錄을 세웠다.

올 9月에는 데뷔 25周年 記念 콘서트와 함께 좀 특별한 海外 公演이 있었죠. 敎皇 바로 앞에서 노래 부를 때 떨리지 않던가요.

프란치스코 敎皇님은 歷代 敎皇 가운데 처음으로 몽골을 訪問한 분이에요. 그런 뜻깊은 訪問에서 제가 執典 미사 閉幕 行事 엔딩 舞臺를 선 것만으로도 榮光이었는데, 다음 날 敎皇님을 謁見하는 자리에서 “칸打레! 칸打레!” 하시는 거예요. 노래를 불러달라는 要請을 받고 無伴奏로 카치니의 ‘아베마리아’를 불렀어요. 노래 부르다 침 튀기지 않았나 걱정될 程度로 가까운 距離에서 들려드리게 될 줄 몰랐어요. 깜짝 놀랐지만 正말 特別한 經驗이에요.

甚至於 ‘아베마리아’는 지난 2005年 吉祥紗에서 열린 宗敎和合音樂會에 招請받아 법정 스님과 金壽煥 樞機卿 앞에서도 부른 적이 있더라고요.

제 人生曲이라 할 수 있죠. 저는 그동안 發表한 曲들 中 代表曲을 꼽아보라면 ‘아베마리아’와 ‘千 個의 바람이 되어’를 꼽고 싶어요. 特히 ‘千 個의 바람이 되어’는 最近까지도 林英雄, 폴킴, 임태경, 김세정 等 여러 장르 後輩들이 불러주는 等 이젠 임형주 하면 ‘千 個의 바람이 되어’가 됐어요.

‘千 個의 바람이 되어’는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지만, 意圖와 달리 政治色이 담겼다는 誤解를 사기도 했잖아요. 當時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글쎄요. 노래가 사랑받을수록 逼迫을 받기도 하고 힘들었죠.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榮光과 苦難의 歷史라고 하잖아요. 저한테 ‘千 個의 바람이 되어’는 빛과 그림자 같은 曲이에요. 이 노래가 없었다면 繼續 팝페라 임형주, 愛國歌 少年 임형주로 불리다 끝났을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이 노래가 있어서 또 다른 音樂 人生의 챕터가 열렸다고 생각해요.

各種 國家 行事 舞臺에 많이 서고 유네스코 本部 親善 大使 같은 對外 活動을 熱心히 한 것도 그런 誤解에 影響을 미쳤을 듯해요. 요즘도 民主平和統一諮問會議 常任委員으로 活動하잖아요. 萬若 政治權에서 러브 콜이 온다면 受諾할 意向이 있나요.

實際로 20代 大選 때 國民의힘과 民主黨에서 共同選對委員長 提議가 一週日 間隔으로 들어왔었어요. 그때 제가 中央選擧管理委員會 選擧諮問委員을 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저는 政治에 對한 꿈은 1도 없어 拒絶했어요. 다만 文化藝術 行政에는 關心이 있어요. 藝術 機關 團體長이나 藝術監督 提議가 온다면 挑戰해보고 싶어요. 後輩들이 나아갈 길을 닦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제가 民間으로 文化財團을 運營해봤자 國家的인 次元에서 行政 시스템을 改編하지 않으면 限界가 있더라고요.

特히 어린이와 靑少年 敎育에 關心이 많던데요. 最近 滿 10歲에 서울科學高等學校에 入學했던 백강현 軍이 한 學期 만에 學校를 그만두는 일이 있었잖아요. 分野가 다르긴 해도 英才 先輩로서 이런 케이스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익히 알려진 대로 임형주는 藝苑學校 聲樂科 首席 卒業 後 美國 줄리아드 豫備學校를 거쳐 이탈리아 山펠리체音樂院 聲樂科와 로마市立藝術大學 聲樂科 最高演奏者過程을 卒業했다).

眞짜 좋은 質問이에요. 저는 백강현 君의 心情을 理解합니다. 저도 親舊들의 嫉妬心을 겪어봤거든요. ‘이소라의 프로포즈’에 出演한 後 學校에 갔는데 한 아이가 오더니 “내가 널 밀치면 쓰러져줄 수 있어?”라고 묻는 거예요. 理由를 물으니 어떤 애가 저를 밀치면 自己한테 1000원을 주기로 했대요. 애들만 그런 것도 아니에요. 어른들이 “쟤는 너무 애늙은이야” “아이답지 않게 노래도 징그럽게 부른다”며 저를 두고 수군거리기도 했어요. 이런 稱讚과 同時에 손가락질도 받는 삶을 살아봤기에 제가 더 英才敎育 시스템과 制度를 改善하는 데 一助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英才들을 위한 멘털 케어가 必要해요.

임형주 氏도 멘털 케어가 必要했나요.

저도 傷處가 많았어요. 많은 분이 제가 溫室 속의 花草처럼 자랐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溫室은 溫室이나 그 안에서 雜草처럼 자랐어요. 저 엄청 독해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해요.

그래미 어워즈 審査 委員으로 본 K-팝

2010년 한국인 최초이자 역대 최연소로 뉴욕 국제연합본부에서 UN평화메달을 받았다.

2010年 韓國人 最初이자 歷代 最年少로 뉴욕 國際聯合本部에서 UN平和메달을 받았다.

이렇게 25年을 버틴 거군요. 25라는 數字가 주는 무게感 때문에 아무래도 여러 사람이 나이가 많다고 誤解하지 않나요.

抑鬱해요. 제가 데뷔한 지 오래되기도 했고 2003年 盧武鉉 大統領 就任式 때 愛國歌를 불렀으니까 다들 只今 한 40代 程度 됐겠거니 생각하세요. 저랑 同甲인 歌手 보아 氏도 會社에 가면 다 理事님이라 부르고 放送局에 가도 스태프가 自己를 어려워한다고 放送에서 얘기했잖아요. 어쩔 수 없나 봐요. 抛棄했어요. 이제는 ‘先生님’ 소리를 들으면 ‘나를 리스펙트해주는구나, 고맙다’ 생각해요.

實際로 先生님이기도 하죠. 이탈리아 로마市立藝術大學 聲樂科 夕座敎授로 學生들을 가르치니까요.

夕座敎授는 1年에 몇 次例 特別 마스터클래스 爲主로 授業을 해요. 2015年 名譽敎授로 始作해 이듬해 夕座敎授가 된 거니까 ‘敎授님’ 소리 듣는 건 이제 좀 適應이 됐어요. 藝苑學校 親舊들 中에도 이제 敎授가 많은데요. 通常的으로 보면 제가 좀 빠른 便이었죠. 남들보다 일찍 始作한 德分에 人生 2幕도 빨리 準備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일찍 始作한 德分에 只今 現役이면서 美國 ‘그래미 어워즈’ 審査 委員으로도 活動할 수 있는 게 아니겠어요. 임형주 氏 SNS에서, 來年 2月 열리는 그래미 어워즈 候補 選定을 위한 祕密 電子投票를 마쳤다는 글을 봤어요.

맞아요. 그래미賞을 받아도 대단한 成果인데 審査 委員이자 投票人團이 된 건 엄청난 榮光이에요. 다만 그래미 어워즈가 이런 式으로 흘러가면 안 된다는 이야기는 꼭 하고 싶어요. 이番에 K-팝 아티스트들이 大擧 挑戰했는데 아무도 候補로 指名받지 못했잖아요. 아이돌뿐만 아니라 K-클래식 아티스트도 다 탈락했어요. 오랜 傳統의 最高 大衆音樂 施賞式이 時代的 趨勢를 反映하지 못하고 淘汰되는 듯해요. K-팝 아이돌들이 販賣 數値 그래프를 보나, 音樂 評論을 보나 不足함이 없었거든요. 이番 일은 메인스트림을 빠른 時間 안에 掌握하고 있는 K-팝에 對한 눈에 보이지 않는 防禦膜을 친, 一種의 差別이라고 생각해요.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이나 노래가 있나요.

저는 BTS ‘화양연화’ 시리즈 全部와 뉴진스의 ‘Ditto’를 좋아해요.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Sugar Rush Ride’나 잔나비 曲들도 좋아하고요. 最近에는 라이즈를 눈여겨보고 있어요. 요즘 아이돌은 어쩜 이리 다 잘생기고 예쁘고, 노래도 춤도 잘할까요. 저는 늙어도 트렌디한 할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充分히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只今 아이돌 이야기하는 걸 봐서는요.

제 趣向이 宏壯히 젊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저한테 期待하는 이미지가 있어서 애어른으로 사느라 이런 趣向을 숨겨왔어요. 제가 2:8 가르마를 固守하는 理由도 이 머리 스타일로 사람들이 저를 記憶하니까 維持하는 거예요. 어떤 面에서는 임형주가 임형주를 延期하고 있는 거죠.

내가 나를 演技하고 살면 疲困할 것 같아요.

안 疲困하다면 거짓말이죠. 젊은 巨匠, 바른 이미지가 저한테는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足鎖예요. 人間 임형주는 많은 걸 犧牲하고 살고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영화랑 드라마 보는 걸 엄청 좋아해요. 或是 臺灣 드라마 ‘相見니’ 보셨어요? 제가 요즘 ‘上親子’(‘相見니’에 미친 자라는 意味의 流行語)예요. ‘相見니’ OST도 엄청 들어요. 한番 보실래요? (유튜브에서 多樣한 로맨스물을 찾아 보여주며) 저는 이런 校服 입은 靑春들의 풋풋하고 아련한 로맨스물이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어요. 피터팬症候群이 內面에 있나 고민될 程度로 좋아요. 하지만 제가 周邊에 推薦하면 다들 “철 좀 들어라” 그래요.

或是 學窓 時節에 校服 입고 그런 戀愛를 못 해봐서 그런 건 아닐까요.

아니에요. 校服을 願 없이 입어보진 못했어도 學校 다닐 때 戀愛는 해봤어요. 그보다는 映畫 ‘말할 수 없는 祕密’을 始作으로 ‘그 時節, 우리가 좋아했던 少女’ ‘相見니’, 中國 資本으로 찍긴 했지만 臺灣 監督이 만든 映畫 ‘먼 後날 우리’ 等 臺灣 靑春 멜로物들은 正말 웰메이드 作品이에요. ‘相見니’를 보면 臺灣에 旅行 가고 싶어져요. 이런 게 文化의 힘이죠. 요즘 우리나라 콘텐츠가 장르물에 集中하고 있지만 저는 眞짜 株 種目은 멜로라고 생각해요. ‘스물다섯 스물하나’ ‘나의 解放日誌’ 같은 드라마는 우리나라 情緖에서만 만들 수 있는 作品이거든요.

“人生은 生中繼, 安息年에는 유튜브 放送으로 만나요”

뜻깊은 만남이 많았던 올 9월 몽골 방문. 프란치스코 교황을 개별 알현하고, 명예교장으로 몸담고 있는 몽골 노밍요스 중등학교에서 학생들도 만났다.

뜻깊은 만남이 많았던 올 9月 몽골 訪問. 프란치스코 敎皇을 個別 謁見하고, 名譽校長으로 몸담고 있는 몽골 老밍요스 中等學校에서 學生들도 만났다.

여러 分野에 두루 關心이 많은 임형주는 버킷 리스트에 라디오 DJ가 올라 있었다. 그는 이番에 라디오 DJ를 하며 다양한 사람과 疏通할 수 있어 幸福했다. 그래서 11月 27日 發賣하는 正規 9輯 ‘Life On Air’ 亦是 노래와 멘트가 있는 라디오 콘셉트로 企劃했다. 타이틀曲인 오리엔탈風 팝페라曲 ‘消滅하는 밤’ 外에 後續 타이틀曲 ‘記憶해줘요’, 性歌曲 ‘Nearer My God To Thee’ 等 總 10曲을 事前 이벤트를 통해 팬들이 直接 보내온 事緣과 함께 담았다. 임형주가 읽어주는 事緣은 디지털 音源으로는 나오지 않는 데다 損害를 甘受하고 딱 999張만 發賣할 豫定이라 팬들 사이 訴狀을 위해 熾烈한 競爭이 不可避할 듯하다.

只今 보니 英才敎育도, 콘텐츠도 分野만 다를 뿐 選擇과 集中 戰略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已往이면 잘할 수 있는 部分을 擇해서 集中하는 게 效果的이니까요. 그런 意味에서 來年에 安息年을 갖고자 해요. 몇 달 程度 쉬면서 一旦은 破格的으로 유튜브 채널에만 集中하려고요. 時代가 바뀌었잖아요. 이제는 美國 發賣 이런 말이 意味가 없어요. 스포티파이나 유튜브 뮤직을 통해 全 世界로 流通되니까 全 世界 同時 發賣人 셈이죠. 安息年을 가지면서 只今까지의 25年을 決算하고 또 다른 25周年의 챕터를 열어보려 해요.

새로운 챕터에는 어떤 內容을 담을 건가요. 플레이어와 코치 比重이 달라지나요.

뮤지션으로서의 活動은 좀 줄이고 後輩 養成이나 文化藝術 行政 工夫를 하고 싶어요. 率直히 저는 餘恨이 없어요. 第 基準에서 많은 것을 이루었기 때문에 體力이 될 때 人間 임형주의 個人的인 삶을 살아보고 싶어요. 이거야말로 選擇과 集中이네요.

敏感한 部分이긴 한데, 聲帶도 나이가 들잖아요. 或是 그런 變化를 느껴서인가요.

그건 아니에요. 오히려 앞으로 한 5年 동안이 제 목소리의 全盛期일걸요. 다만 體力이 목소리를 받쳐주질 못해요. 라디오에서 下車한 理由도 甲狀腺 機能이 좀 떨어져서예요. 제가 1.1kg으로 태어나서 先天的으로 臟器들이 다 작아요. 主治醫가 種種 저한테 肺活量이 안 좋은데도 이렇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건 “正말 神이 주신 才能”이란 말을 하세요. 그런데 普通 테너들은 목소리에 圓熟美가 묻어나는 30代나 40代가 가장 노래를 잘할 때예요. 저는 發聲이 다 자리 잡기 前에 全盛期가 너무 빨리 와서 才能을 더 잘 發揮하지 못한 게 아쉬워요.

이 좋은 목소리가 담긴 이番 新譜를 999張만 發賣하는 게 아쉬워요. 999張인 理由가 설마 1章은 임형주 氏가 갖고 1000章 限定 音盤을 만들려는 건가요.

어떻게 알았어요? 3年間의 幸福했던 DJ 活動을 意味 있게 갈무리하면서 已往이면 좀 象徵的이고 싶었어요. 收益은 抛棄한 거죠.

팬들 立場에서는 膳物 받는 氣分이겠네요. 임형주 氏의 音樂 人生도 生日 때 姨母가 膳物해준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의 베스트 音盤으로 始作된 거잖아요. 그때 膳物을 받지 않았더라면 只今 土曜日 午後 家族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을까요.

아직도 그 CD를 가지고 있어요. 가끔 마음이 흔들릴 때 꺼내 봐요. ‘姨母는 왜 나한테 이 앨범을 줘서 내가 聲樂을 하며 힘들게 살도록 만들었을까?’라고 實際로 생각해본 적도 있어요. 저는 다른 길로 돌아가더라도 音樂을 하고 있을 것 같아요. 正確히 어떤 일일지는 모르지만 文化藝術 쪽에 從事하고 있을 건 確實해요.

한바탕 수다를 마치며 임형주는 限定版 信保 代身 正規 8輯 CD에 사인해 記者에게 건넸다. 그런 임형주에게 記者도 집에서 發掘해 온, 2009年에 받은 死因 CD를 보여줬다. 앳된 얼굴이 담긴 앨범 커버 위에는 正말로 “늘 幸福하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늘’이 ‘문득문득’으로 바뀌는 歲月 동안 임형주는 新曲 弘報와 좋아하는 映畫 얘기를 오가며 인터뷰마저 즐기는 ‘餘裕 萬렙’이 되어 있었다.


임형주가 推薦하는 12月의 플레이리스트

平素 클래식부터 우리 歌曲, 最新 K-팝까지 고루 듣는 임형주에게 12月에 어울리는 노래를 紹介해달라 要請했다. “라디오 DJ 같아 재미있다”는 임형주는 自身의 新曲을 제쳐두고 實際로 겨울마다 즐겨 듣는 노래 5曲을 推薦했다.

달린 러브 ‘Christmas (Baby Please Come Home)’ 
임형주가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즐겨 듣는 노래. 全州에서부터 크리스마스의 흥겨운 雰圍氣가 물씬 풍긴다.

셀린 디온 ‘O Holy Night’ 
머라이어 캐리, 휘트니 휴스턴 等 多樣한 버전의 ‘O Holy Night’ 中 셀린 디온이 부른 노래를 가장 좋아한다는 임형주. 셀린 디온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지만 부드러우면서도 呼訴力 짙은 셀린 디온의 音色이 이 曲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다.

사카모토 류이치 ‘Merry Christmas Mr. Lawrence’ 
오시마 나기사 監督의 ‘戰場의 크리스마스’의 株 테마曲. 1983年 作品이라 映畫는 모를 수 있어도 曲을 들으면 “아, 이 曲” 할 만큼 只今도 사랑받는 사카모토 류이치의 代表曲 中 하나다. 임형주는 只今은 故人이 된 사카모토 류이치를 삶의 롤 모델이자 偶像으로 꼽았다.

강수지 ‘혼자만의 겨울’ 
임형주는 初等學生 때 四寸 兄이 사준 강수지 카세트테이프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카세트테이프를 보며 ‘혼자만의 겨울’을 들으면 그 時節로 돌아간 듯해 좋아한단다.

나카시마 미카 ‘雪の華(눈의 꽃)’ 
임형주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說明이 必要 없는 名曲”이다. 드라마 ‘未安하다, 사랑한다’ OST로 使用된 박효신의 韓國語 리메이크 버전과는 또 다른 哀切한 맛이 있다.

#임형주 #千個의바람이되어 #아베마리아 #BTS #여성동아

寫眞提供 디지엔콤
寫眞出處 벅스 임형주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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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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