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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區別 항해기|新東亞

地區別 항해기

第48回 신동아 논픽션 共謀 優秀作

  • 김연식

    入力 2012-11-20 16: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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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별  항해기

    발틱해 해무海霧.

    2010年 9月 28日 이른 아침, 잠을 깨우는 電話벨이 울렸다.

    “김연식 氏죠? 來日 인도네시아에 가서 써니 영(Sunny Young)號를 타세요. 仁川空港에서 같이 乘船하는 船員을 만나면 됩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나의 航海는 禪寺에서 걸려온 多急한 電話 한 通으로 始作됐다. 出港 하루 前날, 아침, 잠결에. 電話機 너머 職員은 적도 反對便에 가는 일을 무척 쉽게 말했다. 이 사람에게 인도네시아는 내가 생각하는 釜山쯤 되는 模樣이다.

    “떠나는구나!”

    느닷없는 消息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설렘인지, 아쉬움인지, 기쁨인지, 걱정인지 複雜多端하다. 房 안에 짐이 잔뜩 널브러져 있다. 지난 6個月間 釜山 韓國海洋水産硏修院에서 海技士(海技士) 敎育을 받으며 쓰던 것이다. 修了式 날 가져와 흩어놓고는 ‘整理해야지, 곧 할 거야’ 하면서 보름을 넘겼다. 마음속으로 늘 出航을 準備했지만, 막상 來日이라니 漠漠하다.



    窓밖을 보니 車들이 奔走히 달린다. 뛰노는 아이들 소리, 과일장수의 트럭 소리. 나는 來日 떠나는데 밖은 섭섭하리만큼 日常的이다. 日記帳을 폈다. 남은 하루 사이에 할 일을 모조리 적었다. 來日 떠나면 10月 部分은 하얗게 남을 테니 뭐라도 채워 넣고 싶었다. 開天節이면 大學 同門이 모여 體育大會를 하겠지. 크리스마스에는 모두 흥겨울 테지. 寢臺에 몸을 파묻었다. 내 房이 이렇게 포근한 줄은 미처 몰랐다. 山中턱의 綠陰이 푸르다. 바람이 爽快하다.

    危機의 靑春

    日記帳을 펴는데 첫 張의 座右銘이 눈에 들어온다.

    “人生은 짧다. 靈魂의 소리에 귀기울이자.”

    冊에서 베낀 건지, 어디서 주워들은 건지, 手帖에 적어둔 내 座右銘은 짧은 글句에 不過했다. 이것의 쓰임은 남이 봤을 때 내 어깨를 으쓱하게 하는 程度? 그래서 일부러 더 크고 津하게 적은 건지 모르겠다. 나는 이 座右銘을 꽤 오래 잊고 지냈다. 토익 點數를 받느라, 인턴으로 일하느라, 奉仕活動 하느라, 語學硏修를 떠나느라 日記帳의 첫 張을 볼 겨를이 없었다. 卒業을 앞두고 進路를 定할 때도 履歷書를 쓰느라 분주했을 뿐, 靈魂의 소리에는 무심했다.

    이걸 다시 본 건 大學을 卒業하고 2年이 지난 2009年 늦은 가을. 그때 나는 어느 가게의 아르바이트生이고, 靑年 인턴社員이었다. 아주 잠깐 어느 작은 會社의 社員이었지만 오래하지는 못했다. 나는 눈은 높고 허리띠는 졸라매기 싫은 그저 그런 靑春이었다. 어렴풋이 드라마 關聯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撮影 現場에서 바닥부터 始作하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여러 해를 投資해 放送局 公採에 挑戰하기에는 危險負擔이 컸다. 實은 自身이 없었다.

    하고 싶은 건 많은데 몸은 게을렀다. 여기저기 쑤셔 넣은 履歷書는 어설프게 끼워 넣은 廣告紙처럼 쓰레기桶으로 들어간 模樣이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그날도 나는 憂鬱하게 日記帳을 펴고 履歷書를 보낸 곳과 脫落한 곳, 消息이 없는 곳을 區分했다. 답답한 마음에 椅子를 젖히는데 日記帳이 주르륵 접히더니 첫 章에서 멈췄다. 그리고 映畫처럼 靈魂의 소리를 들으라는 글句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只今 뭘 하는 거지?”

    어지러운 생각으로 흔들리던 視線이 내가 한때 地下鐵에서 팔았던 地球본에 닿았다. 그때 나는 大學 4學年이었다. 中心을 놓친 視線과 쭈뼛한 발걸음. 새하얀 케이크에 튄 김칫국물처럼 地下鐵에서 안절부절못했다. 꽤 오래 머뭇거렸다. 그 사이 首都圈 電鐵 1號線 구로역과 주안역을 열 番도 넘게 오갔다. 어느새 날은 어두워지고 退勤 行列圖 잦아들었다. 나는 엉겁결에 입을 열었다. 쓰디쓴 藥을 눈 질끈 감고 털어 넣듯, 미리 練習한 말을 던졌다.

    “暫時 失禮하겠습니다. 大學을 卒業하기 煎 꼭 한 番 地下鐵에서 物件을 팔아보는 經驗을 하고 싶어 勇氣를 내서 나왔습니다. 앞으로 우리 아이들 寢臺 맡에 이런 地球본 하나씩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每日 아침, 저녁마다 더 큰 世上을 꿈꿨으면 좋겠습니다.”

    어설픈 장사꾼이었지만 電動車마다 네댓 個씩 팔았다. 乘客들은 3000원짜리 地球본이 아니라 내가 말한 世界를 向한 꿈을 샀다. 그때 나를 보던 高等學生들의 반짝이는 눈망울을 잊을 수 없다. 어른들의 視線도 따스했다. 아직도 ‘世界’라는 單語가 具體的으로 뭔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以上에 젖은 푸른 젊음이었다.

    “그랬지. 나는 世界를 꿈꿨지.”

    子正이 지나도록 멍하니 寢臺에 누웠다.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다. 나는 工夫하기 위해 大學生이 된 게 아니라 大學生이기 위해 學校를 다녔다. 英語를 잘하기 위해 토익 900點을 받은 게 아니라, 就業을 잘해보려고 工夫했다. 그러다보니 토익 900點을 수월하게 넘겼지만 英語는 한마디도 못했다.

    軍隊에 갔다. 卒業했다. 때 되면 나오는 食堂 밥을 먹듯, 나는 맛도 모르고 젊음을 꾸역꾸역 먹어치웠다. 이제 저녁 食事를 기다린다. 뭘 먹고 싶다는 바람은 없다. 뭐든 一旦 먹을 것이다. 但只 남보다 늦지 않으려 애肝腸을 태우면서. 結婚도 할 것이다. 남이 말하는 ‘때’를 놓치지 않을까 조바심치면서. 돈을 모으려 할 것이다. 돈을 쓸 데도 없는데, 그저 빈 주머니의 焦燥함에 시달리면서. 아이를 낳을 것이다. 남이 하는 대로. 그렇지만 내가 正말 아내와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한 親舊는 좋은 詩를 쓰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詩人이 될 수 있는지 苦悶한다. 警察이 되겠다는 녀석은 바람직한 警察像을 苦悶하지도 않고 學院부터 찾는다. 나는 高校 時節 閔泰瑗의 ‘靑春禮讚’을 보고 가슴 설레ㅆ다. 只今 내게 그런 熱情은 없다. 끓는 피, 巨船의 機關같이 힘찬 心臟, 透明하되 얼음 같은 異性, 匣 속의 칼 같은 智慧를 바라나봤는가? 나는 피기 前에 시들었다.

    88萬 원 世代

    나는 우리나라에서 월드컵 大會가 열린 2002年 大學生이 됐다. 젊었다. 새로운 삶을 잔뜩 期待했다. 눈이 녹지 않은 2月, 新入生 豫備모임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낯선 얼굴들과 버스를 타고 忠淸道로 向했다. 語塞함이 사그라질 무렵 天安休憩所에 들렀다. 그런데 진눈깨비 날리는 駐車場에 珍風景이 펼쳐졌다. 또래 學生들이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電氣·電子·建築·土木·體育學科처럼 男學生이 많은 科마다 얼차려를 했다. 豫備役 先輩들은 창이 긴 帽子를 눌러 썼다. 溫氣 없는 목소리로 ‘하나, 둘’ 외치면 新入生들은 休憩所가 떠나가게 악을 썼다. 學科끼리 競爭이 붙었다. ‘鋼鐵! 工大!’와 ‘점프! 체대!’가 競合했다.

    “빨리 가자.”

    갓 사귄 同期들이 발길을 재촉했다. 그 말은 外面하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一旦 避하고 보는 것이다. 나는 入學과 同時에 大學放送局에서 일했는데 社會問題에 關心 있는 學生이 많았다. 철쭉이 필 즈음 京畿道 청평에서 모꼬지(MT)를 했다. 봄이 무르익은 밤, 卒業한 先輩들은 建物 뒤 외진 곳으로 우리를 불러냈다. 그날 난生처음 얼차려를 받았다. 내 깊은 곳에서 나오는 呻吟이 어둠을 흔들었다. 얼차려는 學科 모꼬지에서도 받았다. 大學은 온통 얼차려. 도무지 避할 길이 없었다.

    월드컵은 盛大하게 끝났다. 얼마 後 새 大統領이 當選됐다. 그의 노란色은 새 時代를 象徵했다. 그 大統領이 就任을 앞둔 2003年 2月 어느 날 9時 뉴스에 大學 新入生이 숨졌다는 消息이 나왔다. 新入生 豫備모임의 얼차려 途中 꽃잎 하나가 졌다. 새 世上이 열렸다는데 우리 大學生은 하나도 變하지 않았다.

    그해 고려대에서 열린 勞動節 前夜祭에서 나는 갓 就任한 大統領을 非難했다. 이듬해에도 어느 大學校에서 밤을 꼬박 지새웠다. ‘時局’을 걱정하면서 말이다. 나는 정작 이른 아침 授業을 만날 빼먹거나 映像物만 틀어놓는 敎授에게는 옳은 말 한마디 못했다. 就業準備소가 돼가는 大學에 對해서는 苦悶하지 않았다. 밖에서는 더 나은 社會를 말하면서 안에서는 얼차려 같은 舊態를 踏襲했다. 눈앞에 있는 것은 바꿀 생각도 못하면서 國家와 社會를 말하려 들었다. 나는 休講을 밥 먹듯이 하던 敎授에게 學期末 講義 評價를 厚하게 줬다. 內 學點이 조금이라도 威脅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렇게 바짝 엎드린 나는 結局 88萬 원 世代로 불린다. 돌아보니 내 靑春은 限없이 초라하다. 나이 서른. 어깨가 무겁다. 父母님은 주름이 깊어지더니 血色도 어둡다. 짝을 찾아 結婚式을 올리는 親舊들 小食과 얼마 前 洞네 電鐵驛에 붙은 高校同窓의 司法試驗 合格 懸垂幕은 나를 躁急하게 한다.

    잘난 虛榮心

    모든 걸 멈추고 숨을 고르기로 했다. 終日 집에 있어도 父母님은 나무라지 않으셨다. 그러나 TV를 켜면 靑年失神(靑年 失業者·信用不良者), 靑白戰(靑年 白手 全盛時代), 薔薇族(長期間 未就業族) 같은 新造語가 쏟아졌다. 나는 神經質을 내며 채널을 돌렸다. 그래도 坐不安席. 結局 洞네 職業訓鍊所를 찾아갔다. 勞動部의 支援金으로 運營되는 富川 自動車職業學校다. 自動車整備技能士 資格試驗 工夫와 整備所 就業을 도와준다. 意志만 있으면 얼마든지 일자리를 求할 수 있다. 高校를 갓 卒業한 親舊부터 60代 老人까지 일자리 없는 사람은 다 모였다. 어른들은 敗北主義에 빠져 있고, 담배에 前 아이들은 머리카락이 샛노랗다. 나라고 다르지 않다. 率直히 손에 기름때 묻히며 살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 주머니에 손 찔러 넣고 自動車 修理는 어떻게 하는지 좀 보자는 式이었다. 出席만 잘해도 交通費가 나왔다. 나는 皆勤해서 每달 11萬 원을 꼬박꼬박 받았다. 出席으로만 치면 優等生이었다. 가만 보니 大學校도 이렇게 다녔다. 꿈도 없이 몸뚱이만 왔다 갔다…. 나는 거기서도 어정쩡하게 젊음을 흘려보냈다.

    그때 눈에 띄는 동생 하나를 만났다. 숫氣 없이 만날 혼자 點心을 먹는, 그러나 自動車에 對한 꿈으로 가득한 스무 살 才俊이었다. 어머니는 안 계시고, 아버지의 無關心 속에 혼자 자랐다고 했다. 高校 卒業 後 그리로 直行했다. 그는 授業時間에 빛이 났다. 實習 때마다 먼저 나섰고 質問도 많이 했다. 저렇게 工夫했으면 名門大를 갔겠다 싶었다. 나는 再준이의 未來를 가늠해봤다. 녀석이 自動車 修理로 대단한 成功을 한다 해도 洞네 整備所 社長이 全部일 것이다. 大學 卒業張씩이나 가진 나는 그의 未來를 내려다보는 듯한 快感을 느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정작 내 꿈은 뭐지….”

    남의 꿈은 깐깐하게 저울질하면서 내 꿈은 달아보지 않았다. 나는 怯쟁이다. 社會的 位置를 配定받는 게 두려워 그러고 있는지 모른다. 大企業 아래 中小企業 職員이 되기 싫어서. 그보다 못한 非正規職이 되기 싫어서 그냥 就業準備生의 白紙 狀態를 즐기지는 않나. 幼稚하게도 나는 만족스러운 點數를 받을 수 있을 때까지 토익 應試를 미뤘다. 낮은 點數를 받으면 그게 나일 것 같아서. 그래놓고 남이 받은 700點이니 800點이니 하는 點數는 속으로 ‘그까짓 거’하면서 嘲弄했다. 재준이는 바닥에 꿇어앉아 더러운 볼트를 닦았다. 世上 全部인 것처럼 熱情을 쏟는 모습을 보니 虛榮心에 팔짱만 끼고 있는 내가 猖披했다. 내가 녀석보다 나은 건 아무것도 없다. 그 얼룩진 손앞에 내 하얀 손이 부끄러웠다.

    나는 그 즈음 航海士가 되는 計劃을 두고 眞摯하게 苦悶했다. 사나이라면 누구나 한番쯤 품었을 飛行機 操縱士와 마도로스의 꿈. 地球본을 팔던 大學 時節부터, 아니, 大學을 選擇할 때에도 眞摯하게 關心을 뒀다. 周邊의 反對와 船員에 對한 否定的인 視線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했을 뿐이다. 이제 와서 航海士가 되겠다는 건 宇宙飛行士가 되겠다는 것만큼이나 엉뚱하다. 그래서 가슴 한구석에 뜯지 않은 便紙로 간직했다. 그러다 韓國海洋水産硏修院에 海技士 短期 養成課程이 있는 것을 알았다. 苦悶이 많았지만, 앞뒤 재지 않고 熱中하는 재준이를 보면서 志願書를 썼다.

    고마워요, 알렉세이

    이어서 알렉세이는 酒店을 紹介했다. 籠球場처럼 지붕이 높고 넓은 가게는 우리가 들어가자 門을 열었다. 卓子는 달랑 8個. 길손은 우리뿐. 하얗게 입김 나오는 홀에서 마신 麥酒가 한 甁에 6달러나 했다. 우리는 老人에게 잔뜩 失望했다. 두 番째 上陸 때는 이 여우에게 當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밤사이 배에 올라온 人夫들에게 물어 周邊 名所를 알아놨다. 알렉세이는 내 메모를 슬쩍 보더니 시큰둥하게 알았다고 끄덕였다. 한참을 달려 老人이 車를 세운 곳은 荒凉한 駐車場. 밖에서는 ‘우우웅’하고 매서운 바람소리가 났다.

    “벤츠빌스는 海邊이 有名해. 가봐.”

    “뭐야, 이렇게 추운데 밖에 나가라고?”

    해도 너무했다. 알아듣지 못할 것을 알고 韓國말로 怒發大發했다.

    “잘 보라고! 有. 敵. 지. 遺跡地를 가자고!”

    나는 종이를 들이밀며 言聲을 높였다. 老人은 다 알겠다는 듯이 웃으며 一旦 다녀오라고 했다.

    “都大體 언제까지 저 늙은 여우에게 끌려 다녀야 하는 거야.”

    一行은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 둔덕을 오르며 투덜거렸다. 꼭대기에 오르자 칼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火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런데 어쩐지 異常하다. 이렇게 바람이 부는데도 周邊은 고요하다. 알 수 없는 느낌이다. 物價에 가자 다들 歎聲을 터뜨렸다. 바다가 얼었다. 그것도 波濤 치는 모습 그대로. 난 처음 보는 모습에 눈이 동그래졌다. 바다의 푸른빛을 담은 波濤는 魔女의 魔法에 ‘뿅’하고 얼었는지 물결을 그대로 간직했다. 水平線까지 모두 얼었다. 새들은 바다 한가운데를 잔디처럼 걸어 다녔다. 얼음 맛을 봤다. 짜다. 우리는 신이 나서 그 울퉁불퉁한 얼음 위를 뒤뚱뒤뚱 오르내렸다. 萬날 보는 바다에 이렇게 感動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참 만에 알렉세이의 車로 돌아갔다. 그는 時計를 보며 ‘얼마나 놀랐기에 이제 오느냐’ 하는 表情이다. 이어서 老人은 英雄 야니스의 銅像, 中世 廣場, 週末市場, 圖書館을 案內했다. 寸陰을 다퉈 바쁘게 돌아다녔다. 나는 港口에 碇泊할 때마다 半나절이면 돌아와야 하는 짧은 旅行에서 어떻게든 意味를 만들려 버둥거렸다. 그래서 博物館이니 遺跡地니 하는 것들에 欲心을 냈다. 오늘도 老人을 그렇게 닦달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熱心히 다닌 뒤 記憶에 남은 건 겨울의 魔法뿐이다. 대단한 遺跡보다 日常의 작은 變化가 놀랍고 神祕하다. 아마 이때부터일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 짧은 旅行을 나서기 始作한 건.

    라트비아의 石炭을 벨기에 앤트워프에 荷役했다. 童話 ‘플란다스의 개’의 背景이고, 世界 最大 免稅點이 있다. 魅力 있는 港口지만 港灣國 檢査를 받는 바람에 上陸은커녕 정신없는 사흘을 보냈다. 다음은 地球의 꼭대기 러시아 무르만스크(Murmansk). 航海하는 내내 노르웨이의 險峻한 雪山이 보였다.

    늦깎이의 失手 連發

    航海士는 4時間씩 하루 2番 航海黨職을 맡는다. 3恒士는 午前 8時부터 正午까지, 저녁 8時부터 子正까지다. 2恒士는 매 12時부터 4時까지, 1恒士는 4時부터 8時까지다. 航海는 배에서 가장 重要한 일이다. 그러나 GPS와 레이더 같은 尖端裝備가 發達해 이제는 사람의 役割은 裝備를 監視하는 데 그친다. 배에 事情이 생겨 當分間 나는 4時부터 8時까지 일한다. 새벽에 곤히 자는데 電話機가 울렸다.

    “只今 몇 時예요!”

    2恒士가 冷冷하게 쏘아붙이고 受話器를 거칠게 내렸다. 壁에 걸린 배의 時計를 보니 새벽 4時다. 自鳴鐘은 3時를 가리킨다. 아차! 한 時間 前進한 걸 깜빡하는 바람에 當直에 늦었다. 어제 내가 이렇게 放送했다.

    “船內에 알립니다. 今日 本選은 한 時間 前震합니다.”

    배는 洞(東)이나 서(西)로 15度씩 航海할 때마다 1時間씩 時計를 돌리는데 이를 前進, 後進이라 부른다. 地球 한 바퀴 360度를 24(時間)로 나누면 15度다. 서울에서 東쪽으로 15度를 가면 해가 前보다 한 時間 일찍 뜬다. 西쪽은 反對다. 그래서 東쪽으로 가면 時間을 당기고 西쪽으로 가면 늦춘다. 나는 어제 배의 時計를 1時間 앞으로 돌려놓고, 내 自鳴鐘은 그대로 놔뒀다. 事故를 친 셈이다. 이미 4時 10分. 交代時間을 한참 넘겼다. 배에서는 勤務始作 15分 前에 宣敎에 오는 게 原則이다. 航海 狀況을 익히고, 어두운 바다에 맞춰 瞳孔이 열리는데 時間이 걸리기 때문이다.

    2恒士는 잔뜩 화난 表情이다. 그는 내 高等學校 1年 後輩다. 下級者로 늦깎이, 그것도 가까운 因緣이 왔으니 族譜가 꼬이기 始作했다. 이럴수록 내가 失手 없이 잘해야 하는데, 가끔 이렇게 깜빡할 때가 있다. 나는 ‘罪悚합니다’를 連發했다. 終日 鬱寂했다.

    처음 배에 왔을 때 垂直的인 組織 雰圍氣에 적잖이 唐慌했다. 3等 航海士라면 一旦 半말이다. 大部分 海洋高校나 海洋大學을 卒業하고 乘船하기 때문에 3等 航海士와 機關士는 어리다. 上級者일수록 나이가 많다. 또 海洋系 學校 出身들은 乘船으로 軍服務를 代身한다. 이런 事情이 얽혀 位階가 嚴格하다. 하지만 나는 兵役을 마쳤고, 이곳은 職場일 뿐이다. 그런데 다시 二等兵이 된 느낌이다. 어쩌랴. 나는 모두 내려놓고 바짝 엎드렸다.

    그 사이 배는 스칸디나비아 半島를 돌아 러시아의 北西쪽 끝 콜라반도에 들어섰다. 눈 덮인 凍土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자 無色의 都市 무르만스크가 나왔다. 이파리 없는 나무로 뒤덮인 검은 山, 그 속에서 검은 煙氣를 뿜는 在來式 家屋. 睡眠은 무거운 구름을 머금어 하늘처럼 어둡다.

    커피共和國, 산토스

    우리는 러시아 石炭을 유럽 第 1項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내려줬다. 이제 브라질 산토스에서 雪糖을 실어 아시아로 간다. 도버海峽을 빠져나온 배는 南으로 南으로 나아갔다. 밤이면 별들이 葡萄알처럼 매달렸다. 銀河水 앞에서는 英雄의 별자리도 보이지 않았다. 너른 바다에 별똥별이 쏟아졌다. 黨職 서는 4時間 사이 눈으로 9個를 셌다.

    이튿날 아침 우리를 반긴 건 검은 鬚髥고래. 溫泉水가 보글보글 끓듯이 四方 數十 곳에서 물보라가 뿜어 올라왔다. 그런 곳에서는 어김없이 집채만한 고래가 空中으로 뛰어올랐다. 난生처음 보는 고래다. 이 神祕한 물고기가 暫時 모습을 보여줄 때마다 모두 歎聲을 질렀다. 배를 타기 前에 꼭 고래를 보길 바랐다. 그토록 바라던 고래를 이렇게 쉽게 볼 줄은 생각도 못했다. 나는 每日 눈앞에 펼쳐지는 自然의 魔法에 驚歎했다. 우리 地球는 이 깊숙한 곳에 이런 光景을 숨겨놓았다.

    열흘을 달려 브라질 中部 沿岸 산토스(Santos)項에 到着했다. 서울의 關門 仁川처럼 이 나라 最大 都市 상파울루와 바다를 잇는 港口다. 짧은 사이 季節이 反對가 됐다. 우리는 개나리와 벚꽃, 철쭉도 구경하지 못하고 싱겁게 여름을 맞았다.

    산토스 거리에서는 커피 香이 난다. 담牆 너머 마을 어귀까지 풍기던 어머니의 된醬찌개 냄새처럼, 가게마다 볶는 구수한 커피香이 都市 구석구석을 메운다. 허름한 食堂의 단돈 몇 푼짜리 食事에도, 消毒藥 냄새 가득한 病院에도 향긋한 커피는 빠지지 않는다. 어둑한 밤 커피香 가득한 골목을 걷노라면 이곳 사람들은 酸素가 아니라 커피 香으로 숨 쉬는 것만 같다.

    커피는 산토스 經濟의 原動力이다. 브라질은 19世紀 末부터 커피 耕作으로 富를 쌓았는데, 大部分 이 港口에서 輸出했다. 커피 德에 港口가 생겼고, 돈이 흘러들었으며, 일자리를 찾아 世界 各地에서 移民을 왔다. 都市가 커지면서 축구팀이 생겼는데, 蹴球 皇帝 펠레가 산토스 蹴球클럽에 平生 몸담았다.

    都市를 闊步하다 날이 저물어 브라질 代表飮食 秋라스코(churrasco)食堂을 찾아갔다. 소와 羊, 돼지와 닭 等 各種 고기를 꼬치에 꽂아 燻製한 것이 끝없이 나온다. 職員은 ‘네가 얼마나 먹을 수 있는지 보자’는 듯이 고기를 勸했다. 겉은 바삭하고 안은 촉촉하다. 方今 덩어리에서 잘려 나온 살點은 숯의 溫氣를 그대로 담고 있다. 입에 넣자 고기 香이 퍼지며 입안에서 녹았다. 肉汁이 스펀지에 담긴 것처럼 뿜어 나왔다.

    晩餐의 기쁨은 暫時뿐. 다들 約束한 듯 숟가락을 내려놨다. 기름진 飮食을 김치 없이 먹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다. 經驗 많은 1等機關士가 배에서 김치와 된醬을 싸왔지만 냄새 때문에 선뜻 꺼내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그저 검은 비닐封紙 속 김치를 손가락으로 쭉 찢어 입에 넣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結局 우리는 쌀쌀한 밤바람에도 아랑곳 않고 바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지 않고서는 到底히 숟가락을 들지 못할 것 같았다. 珍羞盛饌度 김치 없이 못 먹는 우리는 영락없는 韓國 사람이다.

    旅行은 映畫가 아니다. 現實이다. 눈을 마주치고 가볍게 人事하는 게 重要하다. 그러다보면 서로 말하게 되고, 이것저것 주고받게 된다. 主로 티 없는 아이들이 好奇心을 감추지 않는다. 그런 낌새가 있을 때 얼른 웃어주거나 한마디 건네면 質問이 와르르 쏟아진다. 부루盧가 그런 아이다. 이날 저녁 찾아간 산토스 海邊에는 蹴球하는 人波가 가득했다. 波濤소리와 歡呼聲, 공 차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200餘 名이 各自 모둠 지어 맨발로 공을 찼다. 공이며 옷이며 갖춘 것은 초라하지만 選手들 눈빛은 총명했다. 海邊에서 寫眞을 찍자, 부루노 이 녀석이 우리 쪽으로 공을 흘렸다. 공을 주우러 오면서 繼續 視線을 보내는 게 아닌가. 내가 寫眞을 찍자며 손을 내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멀찍이 지켜보던 親舊들까지 우르르 몰려왔다. 그렇게 어울리다 같이 공을 차기 始作했다. 밤이 깊도록 海邊을 뛰었다. 船員들 體力은 형편없고 발才幹은 어설프지만, 이 親舊들이 配慮해 즐겁게 어울렸다. 子正이 다 될 즈음, 아쉬움을 뒤로하고 배로 돌아왔다.

    부루勞와 親舊들은 每日 모래 위에 蹴球場을 그린다. 冊가방으로 세운 골대와 낡은 蹴球공 하나면 充分하다. 해가 지고 숨이 가쁠 때까지 공을 찬다. 그의 蹴球場은 길이 일흔 걸음, 幅 마흔 걸음이다. 思春期를 훌쩍 넘은 그의 걸음 幅은 예전보다 길다. 競技場은 코흘리개 時節보다 세 倍가 넘게 넓어졌다. 少年이 그리는 건 競技場이 아니라 펠레 같은 蹴球選手가 되겠다는 꿈이다.

    이튿날 우리는 雪糖 6萬t, 20t 트럭 3000代 分量을 싣고 두바이로 出發했다. 떠나는 날에도 두터운 구름이 내려앉았다. 커피와 秋라스코, 그리고 한밤의 뜨거운 蹴球. 짧은 旅行 속에서도 산토스는 잊지 못할 追憶을 남겼다.

    이제는 中東에 간다. 처음 배에 오를 때 꼭 한 番 太陽이 뜨거운 이곳에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벌크船이 가끔 시멘트나 穀物을 싣고 간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 그러나 油槽船이 아니고서야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 같은 곳에 가는 건 드물다. 그럼에도 언제나 이곳을 바라왔다. 뜨거운 햇살, 40度가 넘는 더위, 물이 한결 所重해지는 곳. 沙漠의 나라에 가는 기대는 달에 가는 想像만큼이나 나를 설레게 했다.

    目的地는 두바이다. 이곳 人工 섬은 中國 萬里長城과 더불어 地球 밖에서도 볼 수 있는 人間의 創造物이다. 우리는 3個 人工 섬 中 하나인 팜 제벨 알리(Palm Jebel Ali) 바로 옆 제벨 알리 港에 간다. 期待가 크다.

    꼬山의 신발

    지구별  항해기

    브라질 산토스 海邊.

    喜望峯을 지나자 바다는 잔잔하고 오가는 배는 드물다. 船員들은 이 틈에 甲板을 整備한다. 船體의 祿을 벗기고 페인트를 漆한다. 全東망치를 使用하지만 뜨거운 햇살과 四方으로 튀는 殘骸 때문에 몹시 고되다. 나는 꼬産科 짝을 지었다. 미얀마에서는 尊待하는 意味로 이름 앞에 ‘꼬’를 붙인다. 올해 나이 마흔. 미얀마 親舊들 사이에서 그는 맏兄이다. 誠實하고 다른 船員을 代辯하는 役割도 잘했다. 史觀들도 이 親舊에게는 믿고 일을 맡겼다. 꼬산이 사다리를 타면, 나는 아래서 흔들리지 않게 붙잡고 工具를 올려주는데 내 눈앞에 그의 신발이 멈췄다. 낡은 安全靴는 疲困에 지친 듯 혓바닥을 날름 내밀었다. 찢어진 겉감 사이로 안감이 삐져나왔다. 反對便 洋襪에는 큼지막한 구멍이 났다.

    그날 저녁, 나는 韓國에서 챙겨간 두툼한 登山 洋襪을 조용히 건넸다. 安全靴 支給大將을 보니 얼마 前 새 신발을 받아갔다. 安全을 위해 새 신발도 신으라고 勸했다. 그러나 꼬産銀 이튿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낡은 것만 신었다. 두꺼운 洋襪과 安全靴는 故國에 가져가려고 가방에 넣어뒀단다. 山에서 일하는 동생을 위해, 思春期인 아들을 위해서 말이다. 저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이다. 미얀마 船員들은 파스와 頭痛藥, 작은 손電燈처럼 제 나라에서 貴한 物件들을 몰래 챙긴다. 꾀病으로 藥을 타가는 걸 알면서도 薄待하지 못한다. 家族을 생각하는 속내를 알기 때문이다.

    하루를 마치며 日記에 이 이야기를 쓰는데, 記憶 저便 아버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어린 時節 父親은 種種 工事場에서 새참으로 받은 단팥빵을 먹지 않고 주머니에 넣어뒀다가 집에 와서 내게 주셨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가 無心코 빵만 받아 왔다.

    나는 여태껏 아버지의 고마움을 모르고 살아왔다. 내가 잘나서 스스로 컸다고 생각했다. 登錄金 負擔을 덜기 위해 地方 國立大에 다녔다. 工事場 雜夫, 行事案內원, 配達員 같은 아르바이트는 勿論 大學放送局에서 일하면서 받은 奉仕 奬學金까지 用돈에 보탰다. 大學校 英語大會에서 首席을 해 海外語學硏修 奬學生이 됐고, 背囊旅行도 提出한 計劃書가 公募展에 當選된 德分에 支援金을 받아 다녀왔다. 집에 손 한番 안 벌리고 살았다 믿었으니 父母님의 고마움은 생각도 안 했다.

    海賊의 바다

    初等學校를 卒業한 게 全部인 아버지는 조세희의 小說 속 난쟁이처럼 온갖 苦生을 마다않으며 家庭을 꾸려오셨다. 나는 그런 父親께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잘난 줄만 알았다. 이제 보니 나는 아버지의 꼬깃꼬깃한 단팥빵을 먹으며 자랐다. 이렇게 속 안 썩이고 커나가는 게 孝道인 줄 알았는데, 다른 게 아니라 이게 不孝다. 오늘 꼬産을 보고 알게 된, 이제껏 내가 모르던 따뜻한 아버지의 사랑에 눈물이 멈출 줄 모르고 터져 나왔다. 맛있게 먹은 것은 빵인데, 그리운 건 아버지 목소리다.

    赤道를 지나자 걱정이 몰려왔다. 요 몇 年 사이 印度洋은 온통 海賊이다. 소말리아 沿岸은 勿論 아덴灣과 紅海, 멀리 아라비아海 一帶에서도 판친다. 南아메리카에서 곧장 中東으로 가는 바닷길은 모두 막혔다. 우리는 7日을 더 航海해서 印度 南部, 몰디브諸島 東쪽 海岸까지 돌아가기로 했다.

    요즘엔 여러 가지 海賊 對應策이 나왔다. 우리 政府는 배의 비밀스러운 곳에 船員 避難處를 만들도록 한다. 海賊이 나타나면 遭難信號를 보내고 숨으면 된다. 그러면 곧 救助隊가 到着한다. 人質이 없는 海賊은 도망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여기에 더해 武裝 安全要員을 태우기로 했다. 28日을 航海한 끝에 스리랑카 西南端 갈레(Galle) 項에 닿았다. 이곳은 印度洋 海賊危險地域의 入口, 保安要員이 乘船하는 停留場이다. 우리는 要員 셋을 태우고 엔진을 全速力으로 돌렸다. 곧장 甲板을 鐵條網으로 둘렀다. 經驗 많은 要員들은 鐵條網을 더 촘촘히 치라고 닦달했다. 그들은 眞摯했다. 船員들을 敎育하고 배의 모든 것을 統制했다. 甲板으로 나가려면 許諾을 받아야 했다. 保安要員이 要求하는 대로 航路를 바꿨으며, 밤에는 窓으로 새는 빛을 가렸다. 緊張 속에 7日을 航海한 끝에 페르시아灣 入口에 다다랐다. 그前에 오만 무스카트에 들러 保安要員을 떠나보냈다. 長靴 같은 아라비아半島의 엄지발가락 部分이다. 海賊의 바다를 無事히 건넜다는 安堵感 사이로 같이 밤을 새운 要員과 헤어지는 아쉬움이 덮쳤다. 사람을 만나고 떠나보내는데 이골이 났고, 지난 1週日은 스쳐 지난다 할 만큼 짧은 時間이다. 그러나 海賊이라는 共同의 敵을 막아야 한다는 同質感 때문에 쉽게 마음을 열었다. 사람은 오래 지내는 것보다 같은 感情을 共有하는 것이 重要하다.

    두바이 제벨 알리 項은 어마어마했다. 外港에 컨테이너가 木洞 아파트團地처럼 높고 빼곡하게 쌓여 있다. 안壁에는 크레인과 배들이 줄줄이 붙어 있다. 배들의 行列은 안개 너머까지 이어졌다. 조금 들어가자 石油貯藏庫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온갖 埠頭가 다 있다. 우리가 가져간 雪糖은 勿論 알루미늄, 穀物埠頭도 있다.

    埠頭에 닿자 알싸한 煤煙과 낯선 異國의 香氣가 덮쳤다. 여기는 地球의 新都市. 맨땅에 都市를 만들고 港口를 지어 사람을 모았다. 甓돌 한 張까지 밖에서 들여왔다. 일하는 사람도 外國에서 왔다. 甲板에서 몸으로 일하는 사람은 大部分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出身이다. 荷役은 船長 出身 프랑스人이 總括한다. 크레인 擔當은 英國人. 멀리 人工 섬 위 다리는 우리나라 삼성물산이 짓는다. 나는 그동안 巨大한 땅덩이에 盲腸같이 붙어 있는 좁은 나라에서 일자리를 求하지 못해 힘들어했다. 視野를 地球 全體로 넓히면 여기는 일자리가 넘치는 大都市다. 나중에라도 經歷을 쌓고 機會가 생기면 이런 곳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不定期船의 航海는 언제나 豫測不許다. 다음에 어느 港口에 갈지 마지막까지 모른다. 福券 當籤番號만큼 船員들의 期待를 모은다. 이番에도 消息은 그렇게 왔다. 印度다. 西쪽 中南部 海岸 孤兒(Goa)에 간다. 正式 名稱은 몰巫歌誤(Mulmogao). 우리는 여기서 鐵鑛石을 실어 中國 산둥半島 룽커우(龍口)에 내려준다.

    印度. 이곳을 다녀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뜬구름 같은 이야기를 풀었다. 精神의 故鄕이다. 過去와 現在가 共存한다. 秩序와 無秩序가 平行線을 그린다. 神祕로운 말뿐이다. 大體 어떤 곳이기에 이렇게 어려운 說明이 붙는 것일까? 好奇心과 期待가 차올랐다.

    10月 아라비아 해는 고요했다. 바다가 이렇게 온순하면 海賊들이 배에 오르기 수월하다. 날이 맑을수록 不安感은 커졌다. 오가는 漁船도 많아졌다. 배들은 悠悠히 우리를 스쳐 지났다. 그때마다 警戒하는 눈초리를 켰다. 차라리 暴風 속을 航海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印度와 英國海軍이 沿岸에서 射擊 訓鍊을 하는 德分에 걱정을 덜었다. 멀리 孤兒 燈臺가 보이자 船長님은 安堵의 한숨을 쉬었다.

    못된 稅關員

    埠頭 위에는 現地人 50餘 名이 바글거리며 우리를 기다렸다. 玄文사다리를 내리기 무섭게 배에 올라왔다. 胎盤이 장사꾼. 파는 것도 많고 價格도 제멋대로다. 크게 보면 寶石, 記念品, 海産物 그리고 電話카드 等이다. 배는 瞬息間에 북새통을 이뤘다. 우리 돈 1萬 원으로 韓國에 있는 携帶電話에 한 時間假量 連結할 수 있다. 구석진 港口에서도 無線 인터넷이 제법 빨랐다. 最新 流行曲을 내려받았다. 印度가 情報通信 强國이라는 말을 實感했다.

    船舶 業務를 돕는 代理店 職員과 稅關, 檢疫, 出入國管理所, 港口 職員도 왔다. 다른 나라에서는 혼자 하는 일인데 各 官廳에서 둘, 셋씩 왔다. 배에서 챙겨갈 것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代理店 職員이 仲裁해 담배 30뭉치를 풀자 모든 게 一瀉千里다. 이내 電氣가 들어오고 港口는 다시 숨을 쉬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낮에 온 稅關員이 다시 찾아왔다. 처음 보는 추레한 社內 셋과 함께였다. 능글맞은 얼굴로 ‘낮에 못한 檢査를 마저 하자’고 했다. 먼저 工具倉庫와 페인트倉庫를 열었다. 工具倉庫는 들어가지도 않고 밖에서 흘끗 둘러보고 말았다. 페인트倉庫에서는 검은色 페인트가 있느냐고 물었다. 없다고 하니 作定한 듯 여기저기를 뒤졌다. 집에 검은色이 必要한 模樣이다. 그러다 斷念한 듯 腐蝕倉庫로 向했다. 언제나 마지막은 이곳이다. 事實, 앞 두 곳은 模樣새 갖추기다. 사내들은 門밖에 둔 가방을 들고 왔다. 셋의 가방을 합치면 空港에서 볼 수 있는 移民 가는 사람의 짐 程度다. 男子는 腐蝕倉庫에 들어서자마자 主人 없는 가게를 터는 것처럼 무섭게 담았다. 잼과 桶조림, 케첩은 勿論이고 부피가 큰 라면에도 손을 뻗었다. 큼지막한 손으로 한 番에 대여섯 個를 집었다. 몇 番 손길에 빈 箱子만 남았다.

    그들은 搖亂한 稅關 檢査 끝에 船長님께 人事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船長님은 泰然하게 應對했지만 속은 까맣게 타는 模樣이다. 얄밉지만 어쩔 수 없다. 數百 가지 規定을 들이대고 하나하나 따지고 늘어지면 荷役作業이 遲滯된다. 이 배 하루 傭船料가 數千萬 원이다. 不合理하지만 그냥 쥐여 보내는 게 上策이다. 나는 배웅하는 길에 웃으며 韓國말로 쓴 소리를 뱉었다.

    “빨리 가고 다시는 오지 마라. 이 추접스러운 것들아.”

    이튿날 아침 食事 時間에 船長님이 꾸지람했다.

    “이 사람들도 눈치가 있다. 우리말이지만 네가 醜접하다고 말하면 다 斟酌한다. 이 사람들이 이러는 건 못사는 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 어른들도 前에는 다 그랬다. 네가 只今 史觀을 하는 건 잘사는 나라에 태어났다는 아주 些少한 理由 때문이다. 네가 아무리 잘나고 誠實해도 이곳에서 태어났으면 그들과 같았을 것이다. 다시는 그런 말 말아라.”

    짧은 꾸중이지만 깊은 餘韻이 남았다. 生計의 벼랑 앞에 선 사람을 無條件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장발장’을 擁護하던 내가 아니던가. 處地가 같다면 나는 더 甚할 수도 있다. 眞摯하게 마음을 추슬렀다.

    미얀마人 뾰 웨이

    人道에서 怪짜가 한 名 乘船했다. 미얀마 出身 2等 打數 뾰 웨이다. 첫印象부터 普通이 아니다. 頭目 원숭이가 생각났다. 웃을 때마다 마른 얼굴 全體에 주름이 진다. 검은 콧鬚髥도 웃는다. 이 親舊가 뾰족구두를 신고 乘船한 날, 다들 수군댔다. 날라리다, 건들댄다, 또는 건방지다. 좋지 않은 方向으로 意見이 모였다.

    이마에 주름이 많은 船員들이기에 틀리지 않았다. 이 親舊, 꽤나 뺀질댔다. 그동안 사람들이 나를 보고 뺀질댄다고 할 때는 都統 그 뜻을 몰랐다. 이 親舊를 보니 알겠다. 아마 警戒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規則을 어기지 않는 線에서 最大限 삐딱한 것. 해야 하는 일은 最小限만 하고 自己 時間을 보내는 걸 말하나보다. 英敏하지 않고서는 못하는 行動이다.

    出港 다음 날 消防訓鍊을 했다. 船員들 사이에서 깔깔대는 녀석이 눈에 거슬렸다. 어디 보자는 式으로 消化服을 입어보라고 시켰다. 뾰 웨이는 自信感 있게 기지개를 한 番 쭉 켜더니 혼자서 次例次例 입어나갔다. 重要한 것들은 再次 보여주면서 말이다. 어쩌면 내 머리 꼭대기에서 내 心中을 훤히 내려보는 것 같았다. 頭目 원숭이 같은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내 意圖를 들킨 것 같아 뜨끔했다. 어찌됐건 그는 다른 일에도 꽤나 積極的이고, 마음에 들게 解決했다. 건들거리는 것만은 如前하지만.

    어쩌면 그는 내가 憧憬하던 그리스인 조르바를 닮은 것 같다. 豪宕하고, 自由奔放하며, 愉快하고, 自信感 있고, 때론 眞摯하고, 할 것은 똑 부러지게 하는 모습. 담배는 얼마나 맛있게 피우는지, 그걸 보면 담배를 모르는 나도 같이 피우고 싶어진다. 그는 남이 뭐라 하면 받아들이면서도 주눅 들지 않는다. 妙하게 사람 마음을 잡아끈다. 그를 보면서 나는 왜 그동안 上官에게 꾸중 들을 때마다 죽는 시늉을 했을까 抑鬱하기까지 했다. 딱 뾰 웨이만큼만 할 것을…. 아무도 모르게 嫉妬하는 나를 發見했다.

    이 녀석이 오늘 事故를 쳤다. 入港 前날 술을 마시고 宣敎 當直을 안 왔다. 배에서 勤務에 늦는 것은 想像할 수 없는 일이다. 더 큰 問題는 運轉대를 잡는 打數가 술을 마신 것이다. 배가 坐礁할 수도 있다. 終日 배의 이야깃거리는 뾰 웨이였다. 乘船한 지 一週日 만에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그냥 넘길 수 없다. 이런저런 事情 때문에 그를 나무랄 사람은 나밖에 없어 보인다. 녀석을 事務室로 불렀다. 속을 또 게워냈는지 얼굴이 퉁퉁 부었다. 本人도 제 잘못을 아는지 멋쩍게 들어왔다. 眞摯하고 强力한 警告, 낱낱이 말하기보다 嚴重한 눈빛과 말套가 重要하다. 簡單하다.

    “오늘 네가 우리의 安全을 威脅했어. 너는 오늘 옐로카드野. 난 옐로카드가 더 없어. 무슨 말인지 알지?”

    그는 ‘나름 反省하고 있어요’하는 表情으로 섰다. 무거움을 털기 위해 옆구리를 쿡 찌르자 스위치를 누른 것처럼 씩 웃는다. 나는 왜 이 날라리가 밉지 않은 걸까. 오히려 그렇게 境界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그가 부럽다. 얽매여 있지 않은 自由로운 망아지가 떠오른다(사실 좋은 意味로 ‘개’라는 表現을 쓰고 싶다), 그는 正말 자유로운 靈魂, 조르바다.

    中國의 再發見

    배를 타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 가까이 지낸다. 豪宕한 사람, 小心한 사람, 거친 사람, 부드러운 사람 等 배를 타지 않았으면 못 만났을 世上 온갖 部類를 接한다. 自然스레 사람을 보는 눈도 넓어진다. 世上에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뾰 웨이처럼 지저분한 印象에 건들대는 날라리가 일은 잘하고, 술은 잘 먹고, 事故를 치는데도 밉지 않을 수 있다. 그건 사람이 따라 할 수 없는, 神이 내린 妙한 才能이다. 오늘도 뾰 웨이는 甲板을 휘젓는다.

    “3항士, 只今 배가 어디 있는 거야? 埠頭에 接岸했는데 아직 바다 位라니 무슨 말이야?”

    “그게…. 자이로컴퍼스와 GPS는 異常 없습니다. 그런데 海圖上 陸地에서 1km 떨어진 바다입니다.”

    2011年 6月 15日 中國 룽커우港에 接岸한 우리는 混亂에 빠졌다. 海盜를 보면 埠頭가 6個인데, 實際로는 26個나 된다. 甚至於 水深이 깊어야 들어올 수 있는 超大型 船舶까지 接岸했다. 現在 位置는 北緯 37度18分, 東京 120度39分. 分明히 바다 한가운데서 港口를 바라보는 곳인데 배는 이미 接岸했다. 導船士에게 물은 뒤에야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그새 埠頭를 새로 지은 것이다. 이 港口는 지난 2008年에 길이가 2.2km인 超大型 埠頭를 完工했다. 只今도 새 埠頭를 짓는다. 普通 港灣施設을 갖춘 先進國은 해도가 變하지 않는다. 反面 開發途上國은 해마다 모습이 바뀐다. 中國 海盜를 사는 건 浪費다. 얼마 後면 全혀 다른 모습이 된다.

    새 埠頭는 숨 가쁘게 돌아갔다. 이곳에는 밤이 없다. 午前, 午後, 저녁, 새벽마다 人夫들 얼굴이 바뀐다. 우리는 印度에서 나흘間 실은 貨物을 크레인 7臺로 이틀 만에 내렸다. 港口 밖에는 배 數十 隻이 닻을 놓고 제 次例를 기다렸다. 埠頭 뒤便에는 鐵鑛石과 石炭, 보크사이트가 山더미처럼 쌓여 있다. 이뿐 아니다. 反對便 埠頭에서는 大型 컨테이너船이 짐을 내렸다. 그 옆으로 原油貯藏施設도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멍하니 그 光景을 지켜봤다. ‘桑田碧海.’ 나는 산둥半島 이름 모를 港口에서 中國의 成長을 目擊했다. 뉴스에서만 보고 듣던 이야기, 中國이 原油와 原資材를 마구 들이는 바람에 國際市場 價格이 출렁인다는 現場이 바로 이곳이다.

    아침에 接岸하고 點心에 同僚 機關士와 市內로 나갔다. 開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外地사람이 자주 드나드는 特有의 雰圍氣가 없다. 船員을 꾀는 運轉士가 없고, 外國人을 위한 飮食店도 없다. 中國大陸 깊숙한 小都市에 온 느낌이다. 別일 없는 우리는 이곳의 唯一한 觀光地 ‘南山大佛’로 向했다. 택시를 타고 往復 10車線 道路에 올랐다. 길은 곧게 뻗어 地平線에 닿았다.

    只今도 航海 中

    廣闊한 中國大陸을 1時間 동안 가른 끝에 目的地에 到着했다. 이곳은 一柱門을 지나면 法堂이 나오는 우리나라 山寺가 아니다. 正門을 들어서자 서울大公園처럼 觀光列車가 기다렸다. 山꼭대기 大佛 坐像은 멀리 周邊 山과 섞여 稀微하게 보였다. 우리는 汽車로 가는 길을 한 時間 동안 걸었다.

    아무 소리도 없다. 間間이 나뭇잎 떨리는 소리가 요란스럽다. 波濤와 엔진 소리에 시달려온 내게 이곳은 武陵桃源. 우리는 沈默에 젖어 걷고 또 걸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기나긴 航海에 지쳤다. 흔들리는 배, 밤새 달달거리는 機械들, 쉬지 않고 돌아가는 換風機, 무엇보다 나를 괴롭히는 緊張感. 넓은 바다를 航海한다지만 내 視線은 좁은 寢室에 갇혔다.

    바람마저 숨죽이는 호젓한 湖水가. 새들도 沈默하는 境內 앞마당. 이곳에 내리는 햇살은 어느 때보다 溫和하다. 南山大佛은 360個 階段 위에서 나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左相 높이만 38.66m, 무게는 380t에 達한다. 點보다 작은 나는 깊은 平和에 갇힌 듯, 部處의 넓은 가슴에 푹 묻혔다. 그날 나는 南山大佛의 고요한 속삭임에 航海를 暫時 쉬기로 마음먹었다.

    그길로 歸國해 오랜만에 休暇를 보냈다. 그건 아주 짧은 낮잠. 나는 다시 일어나 이름 모를 바다를 가르고 있다.

    바다는 놀라운 風景으로 넘친다. 港口는 재미난 이야기로 북적인다. 船員들은 바다에서 놀라운 自然을 만난다. 波濤를 넘나드는 돌고래 무리의 才弄, 베토벤도 못 본 환한 月光, 발틱의 蜃氣樓, 거울처럼 잔잔한 赤道 無風帶, 무섭게 쏟아지는 스콜 앞에 精神을 빼앗긴다. 港口에서는 재미난 世上을 만난다.

    멋모르고 꿈만 찾아 떠나는 나를 周邊에서 많이 걱정했다. 좋은 會社에서 좋은 사람을 만난 德分에 꿈은 現實이 됐다. 地球본을 보면 점점이 흩어진 追憶이 살아난다. 지난 22個月 사이 24個國 36個 港口에 寄港했다.

    이 中 24곳을 旅行(上陸)했다. 旅行하면 남는 건 寫眞뿐이란다. 하루짜리 짧은 旅行이 쌓이고 쌓여 寫眞을 1萬 張이나 남겼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남은 건 하루하루, 場面 場面보다 가볍게, 때로는 깊게 스친 이름 모를 因緣들이다. 암스테르담 반 고흐 博物館이나 안네 프랑크의 집보다 브라질 海邊에서 같이 공을 찬 부루勞와 순둥이 亞하마드가 그립다.

    航海는 만만치 않다. 어느덧 내 얼굴은 太陽에 그을리고 海風에 갈라졌다. 그러나 바다는 나를 더 크게 만들고, 波濤는 나를 剛하게 했다. 複雜하게 꼬인 世上에서 精神없이 살면서 놓친 것들을 다시 찾았다. 한동안 놓은 트럼펫을 다시 잡는다. 每日 肉體의 彈力을 維持할 만큼 運動한다. 돈과 時間에 超然해진다. 저녁에 손 便紙를 쓴다.

    記憶을 더듬는다. 怯 많고 콧대만 높은 大學 卒業生, 또는 靑年 白手. 그때는 모든 게 깜깜했다. 아직도 船員이라면 無視하는 사람을 種種 만나지만, 나는 바라던 대로 이 地球를 신나게 돌아다니는 只今의 내가 좋다. 그 사이 내 通帳에 적지 않은 俸給이 쌓였다. 갓 乘船한 3恒士는 1年에 5000餘萬 원을 받는다. 銀行에 가니 職員이 무척 반긴다. 등밖에 보이지 않던 世上이 나를 向해 두 팔을 벌린다. 이 모든 건 虛榮心에 가득 찬 손길로 인터넷만 뒤지는 버릇을 끊고, 오직 내 꿈을 向해 勇氣 있게 나선 結果라고 생각한다.

    이제 始作이다. 앞으로도 나는 神이 許諾한 이 地球別을 더 細密하게 더듬을 테다. 내게 世上은 끝없는 寶物 箱子다. 못난 젊음이 어디까지 가는지 두고 보자.

    當選所感

    지구별  항해기

    김연식<br>●1983年 서울生<br>●서울 우신고·인천대 卒業<br>●중앙상선 3等 航海士

    就業難이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나도 여느 젊음들처럼 괴로워하며 이리저리 휘둘렸다. 우연한 契機로 願하는 일을 찾아 남들이 꺼리는 바다로 갔다. 그곳은 살아 있는 勞動의 現場. 땀과 疲困, 波濤와 외로움으로 찌들었다. 바다는 世上에서 가장 낮은 곳, 港口는 그 나라 最下層民이 사는 곳이다. 世上의 陰地를 다니면서 虛榮心에 빠져 살아온 나를 發見했다. 就業難? 海運業界는 人力難이다.

    사람들은 海技士를 싫어한다. 海技士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아무도 激勵하지 않았다. 처음 배에 오를 때도 다들 表情이 어두웠다. 정작 우리는 海技士가 없으면 살 수 없다. 原油를 輸入 못하니 道路에 自動車가 사라지고 學校의 電氣가 나갈 것이다. 工場이 멈추고 먹을 것도 동난다. 海技士. 고된 일이다. 사랑하는 家族과 떨어져 波濤를 맞으며 산다. 그러나 이 社會는 우리를 ‘뱃놈’이라 부르며 賤視한다.

    海技士를 제대로 알리고 싶었다. 배에 애꾸눈 船長과 망나니 술꾼은 없다. 外國에 살림을 하나 더 차린다는 건 말도 안 된다. 港口에 갈 때마다 우리를 기다리는 건 속옷函까지 열어보는 稅關員과 檢査官이다. 海技士는 國際 規定을 遵守하는 模範生이다. 落水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믿음으로 글을 始作했다. 덜컥 큰 賞을 받으니 꿈이 커진다. 欲心도 많아진다. 努力해서 사람들에게 신나는 바다 이야기를 傳하고 싶다.

    不足한 글을 예쁘게 봐준 ‘신동아’와 못난 놈에게 좋은 機會를 준 韓國海洋水産硏修院 장은규 敎授님, 중앙상선 김지영 社長님, 황태욱 所長님, 同僚 船員, 언제나 아리따운 女子親舊 박석진에게 感謝드린다.


    “靈魂의 소리”

    그 겨울, 잘나가는 職場人 女子親舊와 배고픈 선비가 全羅南道 海南으로 旅行을 떠났다. 속 깊은 女子 親舊는 내게 제 自動車 運轉대를 맡겼다. 白手 男子親舊가 助手席에 앉으면 작아질 것을 配慮한 것이다. 그 즈음 나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女子 親舊마저 떠나면 나는 世上 모두에게 버림받는 셈이다. 서른을 目前에 둔 同甲내기 男女, 아니, 婚期 찬 女子와 無能力한 男子의 旅行이다. 우리의 믿음은 充分히 堅固하고, 사랑은 뜨거웠다. 그렇지만 나는 갈수록 움츠러들었다. 이 旅行이 우리의 未來를 판가름할 것이라는 豫感이 들었다.

    웃고 떠드는 사이 날이 저물었다. 우리는 南道의 지붕 낮은 술집에서 조용히 盞을 기울였다. 거센 물살에 휩쓸리듯 話題는 우리의 앞날 이야기로 흘렀다. 내가 未來 計劃을 밝혀야 했다. 卓子 건너 女子親舊의 눈瞳子는 홍명보의 마지막 페널티킥을 바라보는 觀衆처럼 반짝였다. 나는 삼포世代(戀愛, 結婚, 出産 抛棄)인데 곧 三一節(31歲까지 못하면 就業 길 막힘)이니 永遠히 캥거루族(大學 卒業하고도 父母님에게 얹혀사는 靑年)李 될 處地다. 조심스럽게 女子 親舊에게 計劃을 說明했다. 마지막에 물었다.

    “釜山에 있는 韓國海洋水産硏修院에서 海技士 敎育을 받을 수 있는데 모레 面接이 있어. 갈까? 말까?”

    나는 答을 세 가지로 豫想했다. 첫째, 가지마. 둘째, 너 혼자 가. 셋째, 같이 가자. 面接을 이틀 앞두고 밝히는 건 세 番째 答을 바랐기 때문이다. 나는 두 番째 ‘갈 테면 혼자 가’라는 答만은 않기를 바랐다. 그건 헤어지자는 말이다.

    “그럼 來日 가야겠네? 當日에 가면 時間에 쫓기잖아.”

    그女는 아무렇지도, 正말 아무렇지도 않게 세 番째 答을 했다. 자장면과 짬뽕을 두고 내린 決定만큼 무덤덤했다. 속으로 안절부절못한 게 抑鬱했다.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던 것을 알기나 할까? 혼자 끙끙댄 것이 猖披하고 未安했다. 그날 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女子 親舊의 同意를 받은 것에 不過한데, 나는 벌써 異國 港口에 있었다. 그 거리와 불빛이 아른거렸다.

    TV 속 고래를 直接 본다. 아침저녁으로 타는 太陽을 맞는다. 밤이면 달을 본다. 별을 센다. 갖가지 구름과 벗하고 소나기와 무지개를 맞는다. 藥品 냄새 나는 水道물은 안녕. 이제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에 얼굴을 댄다. 煤煙으로 찌든 空氣 代身 시리게 푸른 하늘 아래 크게 숨 쉰다. 아프리카며 地中海며 온 나라를 다닌다. 어릴 적 본 漫畫 映畫 ‘80日間의 世界 一周’와 텔레비전 世界紀行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勿論 念慮도 많았다. 父母님이 第一 걱정이었다. 數個月間 波濤에 흔들리는 倍라니. 分明 어마어마한 颱風과 世上에서 가장 至毒한 海賊을 만날 것처럼 말씀하실 게다. 童話 같은 戀愛와 달콤한 新婚을 꿈꾸는 女子親舊도 마음에 걸렸다. 週末 早起蹴球度 못하게 될 터. 집 앞 三겹살집과 우리 洞네 名物 떡볶이도 떠올랐다.

    그러나 이 셈에는 計算器가 必要 없다. 世界를 航海하는 꿈 앞에 모든 게 값어치를 잃었다. 航海士는 仕樣 職種이다. 半 年 넘게 家族과 떨어져 있어야 하니 海洋大學을 卒業한 親舊들도 다른 일을 찾는다. 只今 내 決心은 平凡한 사람들의 基準과 어긋난다. 하지만 人生은 짧다. 이제 남의 꿈이 아니라 내 꿈을 꿀 생각이다. 내가 바라던 것을 直接 할 것이다. 모두 經驗하고 싶다. 하늘을 올려보고, 空氣의 냄새를 맡고, 飮食을 맛보고, 사람을 만날 것이다. 밤이 길었다.

    유엔 旗발

    이틀 後 韓國海洋水産硏修院에서 面接을 치렀다. 海技士 短期 養成課程에 選拔되면 6個月間 釜山 硏修院 寄宿舍에서 지내며 國費로 敎育받는다. 競爭率이 4對 1을 넘었다. 海洋系 大學과 名門大 卒業生, 海軍이나 海洋警察에서 바다 經歷을 쌓은 사람 等 錚錚한 志願者가 수두룩했는데, 나는 運 좋게 단박에 合格했다.

    같이 工夫하는 100名을 살펴보면 共通分母를 찾기 힘들었다. 갓 轉役한 23歲 靑年부터 딸아이 大學入試를 걱정하는 46歲 家長까지 있었다. 高等學校만 마친 사람에서 席·博士까지 學歷도 다양했다. 移轉 職業 亦是 敎師, 演藝人 매니저, 運動選手, 料理師, 考試生, 將校, 朝鮮 엔지니어, 公務員, 航空社 職員 等 제各各이다. 서로 다른 우리를 엮는 건 ‘바다’ 外에 아무것도 없었다.

    韓國海洋水産硏修院 本館 앞에는 유엔 旗발이 펄럭였다. 파란 바탕에 새하얀 地球를 담은 旗발이 힘차게 나부꼈다. 入敎하는 날 旗발을 멍하니 치켜봤다. 地球본을 볼 때보다 가깝고 뚜렷한 무언가를 느꼈다. 6個月 동안 이 旗발 아래서 體操하며 아침을 맞았다. 하루하루가 새로웠다. 海技士 養成 過程은 만만치 않았다. 實戰 英語 實力이 必要했다. 船舶의 기울기를 制御하기 위해 記憶 너머 三角函數를 끄집어냈다.

    修了를 앞두고 硏修院에서 就業博覽會를 열었다. 禪師를 꼼꼼히 알아봤다. 船舶의 種類는 무척 다양하다. 흔히 아는 油槽船과 컨테이너船을 비롯해 石炭이나 鐵鑛石을 싣는 散積貨物船, 시너와 벤젠 같은 化學物質 運搬船, 旅客船, 車輛運搬船 等이 있다. 一般的으로 定해진 港口만 往來하는 ‘鄭基宣’과 番番이 다른 곳을 航海하는 ‘不定期船’으로 區分한다. 鄭基宣은 油槽船과 컨테이너船이 代表 格이다. 時日에 맞춰 바삐 運航하는데다 港口에서 貨物을 迅速하게 내리고 올리기 때문에 接岸해도 外出하기 힘들다. 水深이 깊은 先進國의 一部 港口에만 寄港한다. 그런 面에서 나는 鄭基宣과 큰 배는 避하고 싶었다.

    苦悶 끝에 入社한 중앙商船은 배 5隻을 保有한 작은 會社다. 好況일 때 욕심내지 않아 不況일 때 흔들리지 않았다. 德分에 수많은 會社가 생겼다 사라지는 海運 業界에서 30年 以上 成長했다. 내게 이 會社가 魅力的인 건 5隻 모두 重刑 不定期 벌크화물線이라는 點이다. 배가 여러 對人 會社에서 일하면 자칫 鄭基宣에 配定받을 수 있다. 나는 世界 곳곳을 다니기 위해 배를 탄다. 그러니 내가 일할 곳은 중앙商船뿐이다. 이 會社 배는 主로 콩, 옥수수, 雪糖, 石炭, 鐵鑛石, 보크사이트를 옮긴다. 多樣한 港口에 入港해 오랫동안 짐을 싣고 내린다. 周邊 都市를 자주 旅行할 수 있다.

    이제 出國이다. 世界를 向한 내 所重한 꿈이 이제 幕을 올린다. 쉽지만은 않을 거란 걸 안다. 하지만 마냥 설렌다. ‘써니英’은 어떤 배일까? 누구를 만날까? 어디를 갈까? 어떤 飮食을 먹을까? 逍風 前날처럼 눈을 감아도 생각이 쏟아진다.

    10年 前에 품은 꿈

    아쉬운 마음에 놓지 못한 술盞이 늦잠으로 이어졌다. 헐레벌떡 일어났는데 房에 발 디딜 곳이 없다. 아차! 짐을 펼쳐놓고 담지 않았다. 놓친 게 있는 것 같아서 더 챙기려고 내버려뒀다. 부랴부랴 가방에 짐을 쏟아 넣고 仁川空港으로 疾走했다. 아직 9月인데 싸늘한 바람이 귓불을 때렸다. 멀리 空港 展望臺가 보였다. 그래! 올해가 꼭 10年째구나. 옛 생각이 났다.

    1999年 어느 겨울날이었다. 40代 젊은 牧師가 中·高生 50餘 名을 데리고 金浦空港 國際線 廳舍를 찾았다. 邊두리에서 온 장난꾸러기들은 空港을 瞬息間에 亂場판으로 만들었다. 皮膚色이 다른 外國人과 키 큰 乘務員에게 視線을 빼앗겼다. 아이들이 찾은 곳은 空港 展望臺. 커다란 飛行機가 코앞에서 滑走路를 박찼다. 손에 잡힐 것 같던 飛行機는 금세 蒼空으로 사라졌다. 그때 그 뜨거운 氣分을 어떻게 말로 옮길까. 왁자지껄하던 學生들은 말을 잃고 멍하니 飛行機를 바라봤다. 牧師는 말했다.

    “우리 오늘부터 世界를 向한 꿈을 꿉시다. 10年 뒤에는 우리가 저 飛行機를 타고 넓은 世上으로 나갑시다.”

    모두 眞摯했다. 無理 구석에 있던 나 亦是 漠然하지만 그날 마음속 꿈이 한 치는 자란 느낌이었다. 우리를 이끈 건 서울 신일高等學校 임일국 敎育牧師님이고, 나는 正確히 10年 뒤인 오늘 飛行機를 탄다.

    나는 서울 구로구와 京畿道 부천시의 境界인 항동에서 자랐다. 여름이면 貯水池에서 水泳하고 가을에는 마른 논에서 쥐불놀이를 했으니 나와 親舊들은 所謂 ‘스타 講師’ 아래서 자란 아이들에게 劣等意識이 있었다. 只今 보니 사람의 앞날을 左右하는 건 비싼 課外가 아니라 眞心 어린 가르침이다. 學窓 時節 林 牧師님처럼 좋은 분을 만나 쌓은 작은 體驗이 내 삶에 굵은 씨앗이 되었다.

    지구별  항해기

    써니 영號.

    經驗 많은 船員들은 일찌감치 空港에 와 있었다. 모두 낯선 얼굴. 操心스레 人事했다. 같이 出國하는 甲板長은 30年 넘게 배를 탔다. 停年이 3年 남았다. 그는 表情 없이 握手했다. 내가 늦어서 火가 난 줄 알았다. 나중에 보니 船員들이 大槪 그렇다. 마음에 없는 微笑를 보이지 않는 사람들. 무뚝뚝하고 반가운 척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내가 늦는 바람에 促迫해졌다. 풋내기가 멋모르고 餘裕를 부렸다. 부랴부랴 出國場으로 向했다. 船員들은 짐을 一般人의 두 倍까지 실을 수 있다. 그렇지만 半 年値 世間에 船舶 附屬까지 얹어야 하니 한참 不足했다.

    우리는 免稅店 구석에 있는 店鋪에 찾아가 觀光振興開發基金 1萬 원을 돌려받았다. 旅行이 아닌 目的으로 出國하는 乘客에게는 航空券 價格에 包含된 基金을 還給해준다.

    “當身은 觀光客이 아니군요!”

    손에 든 紙幣가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놀러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實感했다. 그렇다. 이제 나는 배에서 일한다. 同時에 텔레비전과 冊으로 본 世上을 두 눈으로 보러 간다. 그림자가 아닌 實體를 보고, 만지고, 느끼러 간다.

    7時間 동안 乘務員에게 ‘飼育’당한 끝에 滑走路에 내려앉았다. 인도네시아다. 赤道 위 都市는 몹시 뜨겁다. 널찍한 나뭇잎, 소란스러운 異邦 言語, 차도르를 둘러쓴 무슬림 女性들, 코를 刺戟하는 異國의 香氣. 익숙한 게 없다.

    手續을 代行하는 職員의 車를 타고 수라바야(Surabaya) 港을 向해 달리기를 3時間,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우리는 漆黑 같은 어둠을 비집고 들어갔다. 얼마 지 않아 환한 불빛으로 뒤덮인 都市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우리나라 釜山처럼 印度네시아 第2의 都市다. 港口에는 굴뚝과 크레인이 잔뜩 솟아 있다. 멀리 埠頭 가장자리에서 ‘써니英’ 呼價 의젓하게 우리를 기다렸다. 우리말로 하면 ‘燦爛한 젊음’쯤 되겠다. 나를 만나기 위해 이 외딴곳에서 기다려준 것만 같았다.

    배가 무척 크다. 길이 229m, 높이 51m, 너비 32m다. 길이는 蹴球場의 1.5倍, 높이는 15層 빌딩과 맞먹는다. 主 機關은 말 1萬3000마리가 끄는 힘을 낸다. 우리나라 대우조선해양에서 乾燥했다. 穀物이나 鐵鑛石 같은 貨物을 8萬餘 t, 卽 20t 트럭 4000代 分量을 싣고 世界를 돌아다닌다. 幅이 좁은 파나마運河 閘門을 通過할 수 있는 最大 크기라 해서 ‘罷拿막스(Panamax)’라고 부른다. ‘써니英’은 美國 시애틀에서 콩 8萬餘 t을 싣고 여기까지 왔다. 男·北韓 모든 國民에게 1kg씩 나눠줄 수 있는 量이다.

    배에 오르려는데 미얀마 船員이 사다리 아래로 후다닥 내려왔다. 3等 甲板手 꼬山이다. 그의 作業服은 페인트와 기름때가 잔뜩 묻어 다 해졌다. 깊게 팬 주름이 고된 航海를 말해주는 것 같다. 이 배에는 韓國人 船員 11名과 미얀마 船員 9名 等 모두 20名이 乘船한다.

    燦爛한 젊음

    미얀마 사람은 印度系, 中國系, 東南亞系 等에 따라 皮膚色과 생김새가 다르다. 中國系인 그는 우리와 똑같이 생겼다. 나이 마흔인 꼬山은 우리나라 배에서 오래 일한 까닭에 우리말과 大衆文化를 잘 안다. 무엇보다 우리 情緖를 잘 理解했는데, 그가 第一 操心하는 건 職級에 따른 位階秩序다. 出國하기 前 아버지가 가장 强調하신 게 禮儀다. 아무리 史觀이라도 나이 많은 船員들 앞에서 操心하라고 累累이 말씀하셨다. 還甲이 넘은 只今도 막勞動판에서 새파란 녀석들에게 ‘金 氏’로 불리는 아버지다. 나만은 그러지 않겠노라 다짐했지만, 꼬産을 보니 헛기침만 나왔다.

    배에 오르니 當直 勤務者뿐, 아무도 없다. 船員들은 上陸을 나가거나 房에서 잔단다. 이미 子正이 넘었다. 房에 짐을 풀고 寢臺에 누우니 배가 碇泊했는데도 左右로 흔들리는 것 같다. 複雜 微妙하다. 바삐 달려와 짐을 푼 이곳은 너무나 다른 世上이다. 期待와 달리 배는 먼지와 기름투성이. 階段과 通路는 비좁고 天障은 너무 낮아서 머리를 누른다. 밖에 넓은 바다가 있지만 當場 나를 누르는 건 좁은 船室. 前날 잠도 못 자고 설레며 逍風 왔는데 놀이公園에는 뜨거운 太陽 아래 끝도 없이 늘어선 줄뿐인 것이다. 世界를 一周하는 幻想은 單 1分 만에 散散이 깨졌다.

    나는 따뜻한 솜이불을 덮는 代身 듣도 보도 못한 피터 팬이라는 녀석의 손을 덥석 잡아버렸다. 밤空氣는 생각보다 싸늘하고, 나는 얇은 잠옷 하나 걸친 초라한 아이다. 이건 금세 돌아갈 수 있는 한 달 旅行이 아니다. 짧게는 1, 2年에서 길게는 十數 年을 旅行해야 한다. 피터 팬, 이 녀석을 믿어야 하는 걸까? 손을 잡은 것이 꽤나 후회스럽다.

    돌이킬 수는 없다. 只今부터 내게 닥친 世上을 살아내야 한다. 어쩌면 그건 곰이 사람이 되기 위해 먹는 마늘처럼 쓰디쓸 것이다. 그 끝에 찾아오는 寶石 같은 저 너머 世上은 한결 달콤하겠지? 一場春夢을 始作한다.

    개미나라

    잠깐 눈을 붙였다 뗐는데 날이 밝았다. 緊張한 탓에 疲困했나보다. 꽉 막힌 房에 달린 작은 窓으로 햇빛 한 줄기가 들어온다. 房 안에는 寢臺와 冊床, 소파, 옷欌이 야무지게 들어차 있다. 배가 흔들려도 움직이지 않도록 잘 짜맞췄다.

    房門을 여니 좁은 複道와 階段이 나온다. 迷路 같은 船室에 똑같이 생긴 房들이 어찌나 많은지, 이 房이 저 房 같고, 그 房은 또 아랫房과 똑같다. 이 좁은 空間에도 各自 잠자리가 있고 밥 먹는 자리가 있다. 어디서 뭘 해야 하나 머뭇거리는데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불쑥불쑥 나온다. 各自 工具를 집어 들고 제 할 일에 바쁘다. 잘 訓鍊된 개미나라에 온 것 같다.

    서울은 슬슬 丹楓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는 땡볕이다. 正午 太陽이 雨傘 꼭지처럼 하늘 한가운데 올랐다. 赤道에서 南쪽으로 約 800㎞ 地點. 北半球에서 南半球로 넘어가는 해가 赤道를 지나 이곳에 닿았으리라 斟酌한다. 生涯 처음 맞는 赤道의 太陽은 苛酷하다. 垂直으로 내리꽂는 뙤약볕에 그림자조차 자취를 감췄다. 熱氣를 뿜는 디젤 엔진 아래도 그늘이라고 人夫들은 앞 다퉈 들어갔다. 이 사람들은 불가마 같은 船體와 鐵製 컨테이너에 맨몸으로 오른다. 終日 그늘도 없는 곳에서 일한다. 一黨은 6萬2000루피. 約 7달러다.

    솔로몬의 말처럼 ‘모든 것은 곧 지나간다.’ 永遠할 것 같던 太陽도 때가 되니 사그라졌다. 午後 6時, 日課를 마치고 都市로 向하는 隊列에 合流했다. 첫 上陸이다. 玄文사다리를 내려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신나게 길을 나섰지만 속으로는 不安하다. 이곳은 인터넷으로 檢索하면 旅行 情報가 줄줄이 나오는 觀光地가 아니다. 나는 그동안 旅行을 할 때나 映畫를 볼 때, 甚至於 저녁에 食堂을 갈 때도 인터넷으로 알아봤다. 世上 모든 것에 答을 해줄 것 같은 인터넷이 그런데 이곳에 對해서는 默默不答이다. 이제 나는 인터넷을 접고 眞짜 世上을 만나야 한다. 나는 未熟하다. 怯이 난다. 不安한 마음을 누르고 旅程을 재촉했다.

    택시 한 臺가 埠頭 正門에 서 있다. 上陸하는 船員을 낚아채려고 終日 기다린 模樣이다. 누구든 나를 기다려주는 건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船員들의 胡주머니를 쉽게 생각하는 장사꾼의 등쌀은 싫다.

    “살라맛.”

    記事 암만이 살살 웃으며 다가왔다. 性格 같아서는 뿌리치고 싶지만 一行이 있다. 떠밀리듯 뒷座席에 올랐다. 낡고 낡아 안감이 삐져나온 시트, 消音器 어딘가가 터졌는지 귀를 간질이는 엔진소리. 택시를 타자마자 後悔가 밀려왔다. 이 택시技士가 좋은 가이드가 되어주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바가지를 안 쓰려고 齷齪같이 버티지도 않을 테다. 堪當할 수 있을 만큼 바가지를 써주겠다. 代身 나는 情報를 얻어 時間을 알차게 쓰면 그만이다. 그나저나 나는 또 計算器만 두드리는구나.

    낡은 택시는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都市의 품으로 냉큼 달려들었다. 낯선 香辛料 냄새와 濕한 바람, 군데군데 피운 長斫불 煙氣가 매캐했다. 멀리 이슬람 寺院에서 잔잔한 祈禱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기저기 있는 寺院의 經費는 서울 光化門 美國大使館처럼 森嚴했다. 섬 1萬8000餘 個로 構成된 인도네시아에는 360餘 個 部族이 산다. 宗敎 間, 不足 間 對立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部族 사이에 殺人과 暴力이 頻發하고, 宗敎가 다르면 結婚도 할 수 없다니 한데 섞여 있지만 같은 나라 사람이 아니다. 여기는 인도네시아 한가운데 있는 港口. 宗敎와 宗敎가, 不足과 部族이 만나는 空間이다. 남모를 緊張이 흘렀다.

    수라바야 抗議 밤

    商店街로 발길을 재촉했다. 現地 英字新聞과 携帶電話를 샀다. 자카르타 포스트에는 우리나라에 傳해지지 않는 갖가지 消息이 담겨 있었다. 1面은 이슬람 指導者가 알카에다와 連繫한 證據를 發見했다는 뉴스로 塗褙돼 있었다. 이어 나무를 많이 베는 바람에 비온 뒤에 땅이 주저앉은 現場, 지난 1週日 사이 洪水로 90名이 숨졌다는 뉴스, 汽車 衝突 現場 救助 速報가 나왔다. 政爭·北韓·敎育·不動産 消息이 大部分인 우리와 다르다.

    三星電子 賣場에서 여러 나라에서 쓸 수 있는 電話機를 단돈 4萬 원에 샀다. 이곳 携帶電話는 우리나라처럼 通信社에 加入해 固有 番號를 받을 必要가 없다. 一回用 審(Sim)카드만 끼우면 쓸 수 있다. 當然히 로밍도 없다. 國境을 넘어도 該當 國家 通信社 카드를 넣으면 된다. 심카드 값은 우리 돈으로 800원 程度. 印度삿(Indosat)이라는 通信社에서 우리 돈 1萬2000원을 充電하면 서울 집과 2時間 가까이 通話할 수 있다. 携帶電話 間 國際通話料가 우리나라 國內 通話料와 비슷하다.

    지구별  항해기

    배들의 休憩所 싱가포르.

    어느덧 午後 10時. 이제 都市는 잠들 模樣이다. 저만치서 암만이 우리를 기다린다. 그는 우리가 遊興業所에 가기를 바란다. 그래야 收入이 좋은 模樣이다. 굳이 밝히자면 船員들은 健康한 男性들이다. 드물지만 海外에서 밤을 보내는 境遇가 있다. 倫理 問題는 暫時 접는다. 내가 꼬집고 싶은 것은 船員들에 關해 겪지 않은 일을 겪은 듯이, 보지 않은 것을 본 듯이 떠벌리는 사람들이다. 배를 타면 海外에 女子가 생긴다는 둥, 살림을 차린다는 둥 없는 말로 船員들을 깎아내린다. 나와 女子 親舊도 그런 말 때문에 적지 않게 힘들었다. 잘라 말해 모르는 소리. 배를 타면 陸地에 있는 사람들보다 女子를 接할 機會가 적다. 요새는 上陸해서 밤새 술을 마시는 일이 드물다. 船員들은 땀 흘린 만큼 버는 正直한 사람이다. 사랑하는 家族을 위해 집을 떠나 바다와 死鬪한다. 우리 社會가 船員에 對해 正確하게 알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암만의 誘惑을 뿌리치고 배로 向했다. 마침 비가 내렸다. 人力自轉車에 비닐을 씌우고 손님을 기다리는 老人을 보노라니 玄鎭健의 小說 ‘運數 좋은 날’李 떠올랐다. 비가 와서 신이 난 金 僉知가 아마 저런 모습이었겠지? 나도 運數 좋은 上陸이었다. 특별할 건 없지만 수라바야의 歡待를 받은 느낌이다. 船上 生活이 꽤나 재미있겠다 싶다.

    아하마드는 바보다. 順한 곰이다. 亞하마드와 同僚들은 크레인이 甲板에 떨어뜨린 콩을 모아 나른다. 選任 同僚들은 갓 일을 始作한 스무 살 풋내기에게 잔심부름을 시키고 그의 시원한 그늘을 뺏는다. 그는 고분고분하다. 絶對 화내는 法이 없다. 삐쩍 마른 몸이 얼마나 다부진지 同僚들 몫까지 척척 해낸다. 午前 11時가 지나면 가방에서 솥과 버너, 그릇을 꺼낸다. 물을 끓이고 꼬깃꼬깃 싸온 飮食을 펼친다. 그러다가도 남의 일을 돕는다. 그러다보면 料理는 12時가 다 되어서야 끝난다. 順둥이는 하얗게 불어버린 面과 밥을 山海珍味라도 되는 것처럼 맛있게 먹는다.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문다. 나는 노을 속으로 걸어가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이튿날, 나와 同僚들의 電話카드가 바닥났다. 날이 저물 무렵, 나는 착한 亞하마드에게 30달러를 쥐어주고 새 카드를 사달라고 付託했다.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예스, 예스’했다. 付託을 欣快히 들어주는 게 고마웠다. 우리 順둥이가 돌아오면 수고費로 이곳 하루 一堂에 該當하는 7달러를 주기로 마음먹었다.

    淳朴한 아하마드

    착한 亞하마드가 빨리 오기를 바랐다. 나는 손에 電話機를 들고 約束한 時間 30分 前부터 玄文에 나갔다. 10分前, 5分前, 3分前, 1分前. 기다리는 時間은 길기만 했다. 約束한 6時가 지났다. 하지만 길은 政敵뿐. 나는 焦燥했다. 처음에는 조금 늦겠거니 했다. 그러나 時間이 지날수록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차올랐다. 스무 살 때 혼자 떠난 旅行길에 汽車驛에서 멀쩡하게 생긴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連絡이 끊긴 일이 떠올랐다. 가만히 생각하니 우리 배는 來日 떠난다. 그는 하루 쉬고 안 오면 그만이다.

    “一黨의 4倍가 넘는 돈을 쥐어주는 게 아니었는데….”

    아하마드는 착하지만 그렇게 큰돈은 誘惑일 수 있다. 나는 그가 돌아오기를 바라면서도 마음속 저便에서부터 헐뜯기 始作했다. 10分 사이 그는 ‘逃亡者’와 ‘國際 詐欺꾼’이 됐다. 나는 한없는 詛呪를 퍼부었다. 同僚들 카드 값은 어찌할지, 새 카드는 어떻게 사야 할지, 그리고 萬一 그가 돌아오면…. 갖가지 생각을 하는 사이 子正이 지났다. 當直을 마치고 쓸쓸히 房으로 들어갔다. 天眞爛漫한 亞하마드가 꿈에 나타났다.

    잠깐 생각한 것 같은데 아침이 밝았다. 온몸이 찌뿌드드했다. 오늘은 作業을 마치고 떠난다. 平素보다 緊張해야 한다. 옷을 주섬주섬 입고 玄文에 나갔는데 간밤에 當直을 선 2恒士가 電話카드와 잔돈을 내밀었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親舊 새벽 1時쯤 왔더라고. 뭐라뭐라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나름 事情이 있었나봐. 오늘은 다른 일로 우리 배에 못 오는 模樣이야.”

    아하마드는 付託한 電話카드와 내게는 必要도 없는 인도네시아 잔돈까지 놓고 갔다. 그 늦은 時間에.

    “집이나 會社에 急한 일이 있겠지. 그렇다고 새벽에 올 건 뭐람.”

    고마움과 未安함, 섣불리 그에게 퍼부은 詛呪가 회오리쳤다. 생각해보니 나는 단돈 3萬 원에 順둥이를 惡黨으로 만들었다. 곱절로 고맙고, 그 곱절로 未安했다. 깊은 밤 어둠을 헤치고 港口로 왔을 天眞爛漫한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나는 아하마드 德에 故國의 所重한 사람들과 連絡했다. 그냥 떠날 수 없었다. 짧은 便紙와 수고費 10달러, 그가 주고 간 잔돈을 封套에 담았다. 그걸 傳해달라고 同僚들에게 付託하려다 瞬間 멈칫했다.

    “果然 이 親舊들이 이걸 亞하마드에게 傳達할까?”

    다른 方法이 없다. 나는 또 疑心하지만 이番에는 믿어보는 수밖에 없다. 다시 亞하마드가 안쓰럽다. 바보.

    믿을 수 없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原住民들이 自然을 벗 삼는 곳. TV에서나 본, 안드로메다처럼 멀어서 直接 가리라 想像조차 못한 곳에 내가 간다. 첫 航海가 原始의 江이라니 뜻밖이다. 이탈리아 나폴리나 濠洲 시드니처럼 이름난 아름다운 港口를 期待한 게 事實이다. 그러나 이番이 아니면 아마존에 갈 일은 平生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무척 설렌다. 不定期 貨物船에 乘船하기를 잘했다.

    期待만큼 걱정도 많다. 워낙 깊숙한 곳이라 우리 배에는 現地 해도가 없다. 窮餘之策으로 컴퓨터로 스캔한 것을 電子郵便으로 받았다. 하지만 너무 흐려서 水深이 얕은 江을 航海하지 못한다. 蹴球場만한 배가 모래톱에 얹히기라도 하면 끝장이다. 萬一 奧地에서 機關이 故障이라도 나면 修理하는 데 한참이 걸린다.

    아마존을 向해

    가만히 아마존을 떠올리니 죄스럽기도 하다. 우리 배는 그 푸른 숲길 위에 얼마나 많은 煤煙을 뿜을 것이며, 나는 더러운 달러와 냄새 나는 쓰레기를 또 얼마나 뿌릴까? 事實이 그렇다. 우리 배는 講을 1000km나 거슬러 올라 그 支流인 트롬베타스(Trombetas)에 닿을 豫定이다. 南아메리카 指導를 놓고 가장 깊숙하리라 생각하는 地點을 찍으면 그곳이 우리 目的地다. 距離만 놓고 보면 釜山에서 洛東江 뱃길로 白頭山까지 가는 셈이고, 仁川에서 상하이를 훨씬 지난다. 그곳에서 보크사이트를 5萬t쯤 싣고 大西洋으로 나온다. 트롬베타스에서는 이런 式으로 보크사이트를 1年에 1100萬t씩 캐낸다. 해마다 汝矣島 全體를 0.5m씩 파내는 것이다. 이 鑛物을 캐려면 祖上 代代로 다닌 길을 허물고, 數百 年間 숲을 지켜온 나무를 쳐내야 한다. 地球의 허파가 죽어간다는 消息에 눈살을 찌푸리던 내가 그 일의 共犯이 되는 셈이다.

    多幸히 브라질 政府는 環境 破壞를 嚴格히 規制한다. 江을 오르내리는 열흘 동안은 빨래조차 못한다. 入港 前에 甲板을 깨끗하게 해서 비가 내려도 汚物이 흘러내리지 않게 해야 한다. 藥品에 關한 規定도 嚴하다. 이래저래 힘들고 귀찮다. 그럼에도 이番 航海가 설레는 건, 내 平生 다시 못 갈 ‘아마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一旦 燃料를 채우기 위해 싱가포르로 向했다. 말레이半島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사이에 있는 말라카 海峽의 始作點이다. 이 海峽은 모래時計의 오목한 部分처럼 太平洋과 印度洋을 잇는다. 좁고 얕아 危險하지만 여기가 아니면 數百, 數千km를 돌아가야 한다. 큰 바다를 건넌 배들이 이쯤해서 허기질 법하다. 自動車가 高速道路 休憩所에서 기름을 넣고 療飢하듯, 배들에게 이곳은 기나긴 旅程의 쉼터다. 이 나라 政府는 船舶을 相對로 장사를 할 수 있도록 바다 一部를 船用品과 기름을 去來하는 곳으로 指定했다. 一旦 닻을 던지기만 해도 利用料를 내야 한다. 배 한 隻이 한番 오면 기름과 部品, 腐蝕을 數億 원어치씩 사간다.

    目的地를 100km쯤 남기고부터 左右앞뒤로 배들이 몰리기 始作했다. 바다에서는 며칠 동안 안 보이던 배들이 어디서 왔는지 駐車場처럼 빼곡하다. 航海士들은 緊張해야 한다. 브레이크가 없는 船舶이 가까이 지나면 事故 나기 十常이다.

    이튿날 바다가 混雜해 現地 導船士를 태웠다. 普通 3恒士가 導船士를 마중한다. 쉰 살쯤 돼 보이는 필리핀 出身 導船士는 배에 오르자마자 나에게 제 가방을 던졌다. 제대로 걷기 힘들 程度로 무거웠다. 以後에도 眼下無人. 한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 아무 말 없이 船長님과 握手했다. 그것도 거의 스치듯 손을 뺐다. 禮儀가 없었다.

    “내 指示 없이 아무것도 하지 마. 안 그러면 난 當場 내리겠어.”

    脅迫調였다. 싱가포르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설마 내리겠냐만 배가 遲滯되면 損害가 크다. 船員들은 숨소리도 못 냈다. 5分쯤 지났을까? 充分히 배를 掌握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배를 천천히 움직이게 했다. 韓國 사람을 마음껏 操縱하면서 快感을 느끼는 模樣이었다.

    요즘 韓流 德에 外國에서 우리나라 사람에 對한 待遇가 좋아졌다지만 바다에서는 다르다. 이 導船士는 우리나라 史觀들과 오래 乘船했다. 이런저런 事情으로 感情이 좋지 않은 模樣이다. 서글펐다.

    배들의 쉼터

    緊張 속에 到着한 싱가포르 앞바다는 온통 玉빛, 맑은 하늘에는 구름이 옹기종기 모여 다녔다. 그러다 한가운데로 동그랗게 주둥이를 내밀더니 熱帶 소나기 스콜을 시원하게 뿌렸다. 닻을 놓자마자 장삿배 4隻이 달라붙었다. 現地 職員들은 能熟했다. 왼쪽에 붙은 배가 燃料 管을 連結했다. 오른쪽에선 各種 潤滑油를 넣기 始作했다. 배 뒤쪽에서는 크레인으로 물과 쌀, 과일, 飮料 等 食材料를 실었다. 가만 보니 山地가 모두 다르다. 鉛筆은 韓國産, 지우개는 中國産, 종이는 인도네시아産, 圖章은 네덜란드産이다.

    누구보다 緊張하는 건 機關士다. 이곳에는 羊을 속이는 장사꾼이 많다. 줄자로 기름 탱크가 잠긴 程度를 재서 넣은 量을 재는데, 計算 方式만 달리해도 數千 L가 달라진다. 조금 넉넉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바닥에 물이 들어 있다. 재미있는 건 機關士들은 後進國에서 精製한 燃料를 좋아한다는 點이다. 배에 넣는 벙커C油는 原油에서 揮發油, 輕油, 燈油, 重油, 벙커A油 等을 만들고 남은 찌꺼기다. 우리나라같이 精製技術이 좋은 나라에서는 좋은 成分을 남김없이 빼간다. 反面 後進國 것에는 좋은 成分이 조금 남아있다. 그래서 벙커C油는 精製技術이 떨어질수록 爆發力이 좋다. 機關士들은 精油 業體까지 꼼꼼히 確認한다.

    조리長度 바쁘다. 食材料를 確認해 自動車가 들어갈 만큼 커다란 冷藏庫에 넣는다. 12時間이 넘게 싣고 또 실었다. 쌀과 飯饌, 과일, 물이 끝도 없이 올라왔다. 都大體 이걸 누가 다 먹나 싶다. 이날 넣은 燃料만 1000t(100萬L)이다. 輕車 3萬 臺에 기름을 가득 채울 수 있고, 돈으로 3億 원에 達한다. 이 程度면 한 달도 거뜬하다.

    이튿날 이른 아침, ‘써니英’은 奇跡을 한 番 힘차게 울리고 엔진을 돌렸다. 커튼을 열자 푸른 바다의 아침이 나를 맞았다. 새하얀 구름 사이로 바늘처럼 날카로운 햇살이 삐죽 나왔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句節이 떠올랐다.

    “잠깐만 大將! 저게 무엇이오? 저기 저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파란 色깔, 저 奇跡이 무엇이오? 當身은 저 奇跡을 뭐라 부르지요? 바다?”

    신이 나서 배 꼭대기까지 單숨에 올랐다. 바다에 부딪힌 햇빛은 數千 個로 燦爛하게 부서졌다. 돌고 돌아도 하늘이고 바다다. 瞬間, 가슴이 먹먹했다. 누가 머리를 누르는 것 같았다. 멀미다. 땅에서 발을 뗀 값으로 나는 이틀 내내 寢臺에 누워 바다의 숨소리를 들어야 했다.

    航路에 오른 배는 波濤를 따라 넘실댔다. 지루할 것만 같은 40日 大洋 航海지만 地圖에 없는 섬과 볼거리가 있다.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은 건 말라카 海峽. 이곳은 海賊과 坐礁의 바다로 惡名이 높다. 海峽의 幅은 18km지만 大型 船舶이 다닐 수 있을 程度로 깊은 곳은 고작 3~4km. 航路는 좁고, 船舶은 頻繁히 往來한다. 얼마 後 ‘怨 패덤 뱅크(One fathom bank)’에 다다랐다. 水深이 한길에 不過하다. 바닷속 곳곳에는 배에 致命的인 모래톱이 솟아 있다. 水深이 얕은 곳은 船底와 海底 사이가 1m도 안 된다. 조금이라도 航路를 벗어나면 坐礁한다. 緊張 속에 꼬박 하루를 달려 協水路를 빠져나왔다.

    뱃길은 여럿으로 갈라졌다. 우리는 中東과 수에즈로 向하는 무리에서 떨어져 아프리카大陸 南端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마침 海峽 끝에 2005年 인도네시아 쓰나미 事故 現場 ‘반다 아케(Banda Ache)’가 보였다. 막다른 곳에 있는 海邊. 난데없는 물亂離를 避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곧 赤道를 지났다. 赤道에서는 햇빛에 加熱된 水蒸氣가 垂直으로 上昇한다. 이 때문에 바람이 없고 睡眠은 거울처럼 잔잔하다. 赤道無風帶라고 부른다. 過去 無風帶에 들어선 帆船은 다시 바람이 불 때까지 넋 놓고 기다려야 했다. 地球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던 時節에는 이 모든 現象이 龍王님이나 포세이돈 또는 무슨 무슨 神 때문이었을 게다. 그래서 예부터 赤道를 지나는 배들은 航海의 安全을 위해 赤道祭를 지냈다. 이제 뱃사람은 龍王님보다 GPS를 믿는다. 다음은 平穩하고 너른 바다 印度洋, 맑은 하늘과 爽快한 바람이 우리를 반겼다. 모두 한시름 놓고 기나긴 航海에 突入했다. 그 사이 印度洋에서 맞은 첫날이 저물었다. 大洋의 노을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아마존 가는 길은 正말 길고 길다. 싱가포르를 出發한 지 24日째. 배는 1萬9000km를 달렸다. 窓밖은 만날 같은 場面. 反復되는 日常에 船員들은 表情을 잃었다. 곧장 아마존에 들어섰다. 講을 150km나 거슬러 올라도 如前히 바다같이 넓다. 水平線 위로 낮은 숲이 어렴풋이 보인다. 이대로 아마존이라는 바다가 나오겠다. 빽빽하게 우거진 숲은 겹겹이 쌓인 구름을 이고 있다. 巨大한 UFO(未確認飛行物體)가 떠 있는 것 같다.

    雨期를 맞은 아마존은 時時刻刻 모습을 바꾼다. 이른 아침이면 하얀 숲 안개를 내뿜는다. 떠오르는 太陽빛에 透明한 이슬이 반짝인다. 한낮 睡眠은 맑은 하늘을 고이 담아낸다. 거울 같은 江물 위를 새들이 날아가면 이곳은 武陵桃源의 그 場面이다. 잔잔한 물위로 粉紅色 민물돌고래 報土가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냈다.

    自然의 속살

    窓門을 열자 아무데서도 맡아본 적 없는 짙은 숲 香氣가 밀려든다. 到處에서 아우성치듯 맑은 空氣를 뿜어낸다. 船員들은 ‘음-하- 음-하-’ 숨소리를 내며 香氣에 빠졌다. 欠 잡을 데 없이 淸凉한 空氣. 갖가지 나무와 풀이 體臭를 뿜어내는 이곳은 分明 地球의 허파인 게 틀림없다.

    땅거미가 깔리자 아마존은 얼굴을 바꾼다. 불을 밝힌 窓門은 벌레로 빼곡하다. 나는 놈, 기는 놈, 뛰는 놈, 달라붙는 놈, 매달리는 놈, 튀어 오르는 놈에 뒹구는 놈까지. 世上 벌레가 다 모였다. 바깥은 박쥐 떼로 萬원. 배를 밝히는 照明에 몰려든 벌레를 잡아먹느라 정신없다. 室內는 換氣口로 들어온 작은 벌레들로 엉망이다. 배를 타지 않았다면 地球 反對便에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모르고 죽을 게 아닌가. 이제 始作이지만 내 選擇은 分明 옳다.

    지구별  항해기

    아마존의 구름.

    우리는 곧장 아마존 깊숙한 곳으로 向했다. 産卵期 鰱魚처럼 巨大한 江물을 거꾸로 거슬러 올랐다. 江은 끝도 없다. 불덩이 같은 太陽이 달에게 자리를 내주고 그 달도 저물기를 反復했다.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고, 구름이 걷히고, 太陽이 불타고, 다시 먹구름이 몰려오기를 數十 番. 江이 갈라졌다 모이고, 넓어지고 다시 좁아지기를 數百 番. 빼곡한 숲이, 때론 濕地가, 늪지가, 絶壁이 보였다. 江물은 누랬다, 붉었다, 푸르렀다. 드문드문 작은 집들이, 환한 빛을 쏟아내는 큰 마을이 우리를 지나쳤다. 이런 곳에 사람이 사는 게 神奇할 뿐이다. 고삐 매지 않은 말이 풀을 뜯고, 물소 떼가 한가히 뒹군다.

    航海 사흘 만에 트롬베타스에 닿았다. 江인지 하늘인지, 저녁 빛을 담은 睡眠은 그 自體로 신비롭다. 赤道의 密林은 고요하다. 두꺼운 구름이 달과 별을 가렸다. 빛도, 소리도, 바람도 숨어들었다. 나지막한 물안개가 倍 周圍를 덮었다. 아! 하고 소리치면 바로 앞 壁에 부딪혀 今方 되돌아올 것 같다. 五感 제로. 宇宙 空間에 떠 있는 느낌이다. 莊嚴한 大地의 고요를 맨몸으로 마주하려니 숨소리조차 조심스럽다.

    이곳은 아마존의 보크사이트 生産基地다. 1979年부터 半徑 60km 密林을 파헤쳤다. 여기에서 일하기 위해 勞動者 1300餘 名이 브라질 全域에서 移住했다. 그 家族을 包含한 4000餘 名의 居住地가 생겼다.

    첫날 찾은 마을은 생각보다 雅淡했다. 택시를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자니 어린왕자의 별처럼 5分 만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密林 한가운데 그런 곳이 있다. 마당 널찍한 집들이 甕器種이 모여 있는 곳. 나는 사람을 찾아 近處 食堂에 갔다. 마침 마당에 걸린 TV에서 브라질과 프랑스 間 蹴球競技를 中繼하고 있어 住民이 여럿 모여 있었다. 이곳은 社長이 料理師高, 支配人이고 從業員인 햄버거 가게. 햄버거를 注文하자 主人은 잠깐 廚房에 다녀오더니 마당을 쓸기 始作했다. 그러고는 暫時 廚房에 들르더니 다시 TV 앞에 앉았다. 그는 손님과 함께 競技에 빠졌다. 所重한 時間을 虛費하는 것 같았지만 딱히 갈 곳도 없었다. 햄버거는 前半戰이 끝날 즈음에야 나왔다. 順序대로 주지도 않았다. 내가 먼저 기다리던 住民들보다 먼저 받았지만, 사람들은 그를 타박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손님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이 王이다.

    나는 大學修學能力試驗을 마치고 學資金을 마련하기 위해 서울 이문동에 있는 洋食堂에서 일했다. 胡주머니가 넉넉해 學校 構內食堂을 꺼리는 大學生들이 主로 왔다. 種種 同甲내기로 보이는 學生이 手票를 끼운 計算書를 던지고 갔다. 그런 손님 자리는 어김없이 지저분한 담배꽁초와 여기저기 던져놓은 쓰레기로 엉망이었다. 食堂 일을 마치면 새벽에 注油員 일을 했는데, 조금만 늦어도 警笛을 울리며 亂離 치는 運轉者가 있었다. 大槪 내게 쓰레기桶을 내밀며 종처럼 부렸다. 내가 主人이면 ‘너 같은 놈한테는 기름 안 팔 테니 가라’ 말하고 싶었다.

    고개 숙인 船員

    같은 돈이지만 이 사람들 것은 다르다. 여기서 돈은 相對의 수고에 對한 監査다. 그깟 돈 좀 쥐었다고 奉仕 職員을 下待하는 사람이 없는 世上이다.

    우리는 아마존의 보크사이트를 近處 사오 루이스에 부렸다. 다시 캐리비안海 沿岸 콜롬비아 산타마르타에서 石炭을 싣고 英國 東部 沿岸 이밍햄(Immingham)으로 向했다. 貨物을 싣고 내리는 바쁜 일은 끝났다. 열흘間 大西洋을 건너면서 슬슬 배를 整備하면 된다. 船員들은 숯불에 새끼 통돼지를 구워 파티를 열었다.

    甲板長은 皮膚라기보다 껍질 같은 손으로 盞을 집었다. 두툼하게 앉은 굳은살이 샛노랗다. 갈라진 손톱 사이에 검은 때가 永遠처럼 끼었다. 희끗한 머리칼과 깊게 팬 주름 사이로 얼마나 많은 太陽과 얼마나 많은 海風이 스쳤단 말인가. 還甲이 넘은 甲板長은 外貌만큼이나 性格도 거칠다. 갓 乘船한 나는 唯獨 그와 자주 부딪쳤다.

    “뭣 하려고 배에서 휘파람을 부노!!”

    甲板長은 바다를 보며 感歎하는 나를 쏘아보고 지나갔다. 얼마 後 바람이 거칠어지자 甲板長은 내가 휘파람을 불어서 그렇다고 떠벌렸다. 그는 배에서 唯一하게 뱃사람의 낡은 迷信을 지킨다. 배 生活을 漁船에서 始作해 生鮮도 뒤집어 먹지 않는다. 나는 그가 어려웠다.

    會食을 빌미로 마주 앉았다. 그는 한때 알아주는 酒黨이었다. 술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사우디아라비아에 入港할 때는 注射器로 오렌지에 위스키를 넣어 두기까지 했다. 入港 첫날 술 냄새가 나는 것을 異常하게 생각한 檢査官은 그의 房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그런데 이튿날도, 그다음 날에도 술 냄새가 나는 것이다. 船長은 바늘 하나까지 털어내 쓰레기桶에 있는 오렌지 껍질에서 덜미를 잡았다. 그런 그가 요새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지난해엔 담배를 끊었다. 좋아하는 고기를 마다하고 쓴맛 나는 菜蔬와 補藥을 먹는다. 몸이 예전 같지 않은 模樣이다. 무릎을 들춰보니 검게 부었다. 甲板長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3항士, 나는 한때 愛國者로 불렸다. 76年度. 우리나라가 한참 가난할 때 배를 탔어. 그때는 船員들이 外貨를 엄청 벌었다고. 그때 내 月給이 公務員 親舊보다 다섯 倍나 많았어. 달러벌이로 나라 살리고 家族들까지 다 챙겼어. 그때는 船員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웠지.”

    노선원은 술김에 속이야기를 풀었다.

    “日本 배에서 5等 甲板員을 할 때는 맨손으로 똥물을 치우고 좁은 바닥을 기어 다녔어. 말을 못 알아들어서 턱 아래를 스패너로 맞았지.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그때는 愛國하다 생긴 傷處라 생각했어. 근데 이제 찬바람에 시려 죽겠다. 子息들은 나도 모르게 훌쩍 컸지, 배 탄다고 하면 洞네에서 좋게 보지도 않지. 이제는 몸이 아파서 술도 마음껏 못 먹는다.”

    고개를 떨어뜨린 甲板長은 連거푸 盞을 들었다. 事實 甲板長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이제 船員은 忌避 職種이다. 平生을 바다에 바쳤지만 家族조차 박수치地 않는다. 會食은 漸漸 恨을 달래는 자리가 됐다.

    ‘써니英’은 緊張 속에 한겨울 北大西洋으로 向했다. 바다가 瞬息間에 거칠어졌다. 選手에서 커다란 波濤가 부서지면 하얀 물보라가 虛空으로 치솟았다. 이 물에 커다란 솜沙糖이 달린 것 같다. 배는 左右앞뒤를 豫測할 수 없게 마구 흔들렸다. 그 사이, 하나 남은 프린터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마저 故障 났으니 書類를 만들지 못한다. 배에는 故障 난 電子製品이 많다. 修理工을 태울 時間이 없고 費用도 만만치 않아 버리는 便이 낫다. 프린터를 사느라 英國 이밍햄에 上陸했다. 船員센터 弘報職員이 찾아온 틈에 船長님이 車를 얻어 타고 다녀오라 했다. 現門을 나서면 언제나 발걸음이 가볍다. 職員은 머리가 새하얗고 키가 큰 패트릭에게 나를 紹介하고, 프린터를 사야 하는 事情을 傳해줬다.

    발틱의 겨울

    和暢한 休日 午後, 都市는 사람들로 붐볐다. 집 떠난 지 3個月. 多情한 英國 사람들 모습에 家族과 女子 親舊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러나 패트릭은 꽤나 性急했다. 나는 露店에서 군것질하고 싶고, 커피도 한盞 마시고 싶고, 가게에서 記念品도 사고 싶은데 浪漫 없는 老人은 서둘러 電子製品 賣場으로 向했다. 上陸을 無味乾燥하게 만든 ‘꼰대’가 미웠다. 港口가 가까워지자 나는 交通費 이야기를 꺼냈다. 대단히 感謝한데 어떻게 標示하면 되겠냐고 돌려 묻자 그는 손사래를 쳤다.

    “이것은 내 使命(mission)이야. 나는 政府의 손이 닿지 않는 사람들을 도와. 船員은 約자지. 버스 같은 公共서비스를 利用할 줄 모르고, 現地 事情에 어두우니 바가지를 쓰는 일도 茶飯事고. 오늘 내 도움이 가장 必要한 사람은 바로 자네야. 안 그래?”

    내가 約自라니…. 한 番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곱씹어보니 나는 어린아이처럼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패트릭은 自動車 기름 값이라도 줘야 마음이 便하겠다는 나를 限死코 말렸다. 오히려 제 使命을 完遂하게 해달라고 付託했다. 老人의 純粹한 使命 앞에 紙幣 몇 張을 든 내 손이 초라했다.

    우리는 다시 거친 大西洋을 건넜다. 캐나다 東쪽 뉴펀들랜드 섬 隣近 카티어 項에서 鐵鑛石을 싣고 재즈의 都市 美國 뉴올리언스에 荷役했다. 다시 美國에서 石炭을 싣고 네덜란드 首都 암스테르담에 荷役했다. 그 사이 北半球엔 겨울이 깊었다. 이番엔 라트비아 벤츠필스(Ventspils)에서 石炭을 싣고 벨기에에 내려준다. 발틱 해의 入口는 좁고 오가는 倍는 많다. 게다가 우리는 겨울의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하루가 다르게 季節이 變할 것이다. 그런데도 설렌다.

    덴마크 北쪽 끝을 돌아 발틱 入口에 들어서자 뱃길은 좁아지고 물살은 거세졌다. 가장 좁은 ‘더 사운드’ 地點은 幅이 고작 3km. 漢江 河口와 비슷하다. 왼쪽으로 스웨덴 都市가, 오른쪽으로 덴마크 家庭집이 눈에 들어왔다.

    발틱에 들어섰을 때 異常한 일이 생겼다. 멀리 배 한 隻이 하늘에 떠 있는 게 아닌가. 어떤 배는 높이가 普通 것의 두 倍가 넘는다. 그런데 레이더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暫時 後 空中에 떠 있던 배의 形象이 漸漸 稀微해지더니 水平線 아래서 아까와 같은 배가 나타났다. 蜃氣樓다. 大氣 密度가 달라져 光線이 屈折된 것. 沙漠에서나 나타나는 줄만 알던 蜃氣樓는 이곳 발틱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氣溫이 瞬息間에 零下로 떨어졌다. 地球의 꼭대기 近處라 正午에도 太陽은 어깨 아래. 하늘은 가을처럼 푸르렀다. 폴란드 沿岸에 접어들자 바다가 입김을 吐했다. 相對的으로 따뜻한 물 위에 찬바람이 덮치면서 물안개가 꼈다. 날씨는 맑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共同墓地를 가로지르는 것처럼 섬뜩했다. 이곳에서 숨진 사람이 적지 않으니 그럴 만했다.

    普通 最惡의 沈沒事故라면 1503名이 숨진 타이타닉 號 事件을 떠올린다. 널리 알려진 데다 有名人士가 많이 犧牲된 탓이다. 그러나 世界 5代 海難은 모두 이곳, 발틱에서 일어났다. 딱 이 무렵이다. 1945年 1月 30日. 1萬583名을 태운 獨逸 빌헬름 구스틀로프 號가 이 近處에 沈沒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1239名. 나머지 9343名이 차가운 바다에 水葬됐다. 事故 열흘 뒤 旅客船 슈토이벤 呼價 5200餘 名을 태우고 航海하다 또 가라앉았다. 4500餘 名이 숨졌다. 같은 해 高夜壺, 캡 알코나호, 티엘벡호까지 海難事故를 當했다. 그해 이 바다에서 旅客船 5隻이 가라앉아 2萬7000餘 名이 숨졌다. 死亡者는 大部分 第2次 世界大戰 中에 동프로이센에서 避難하던 民間人이다. 當時 戰勢가 聯合軍 쪽으로 기울자 獨逸은 避難을 재촉했다. 蘇聯軍이 밀려들고 道路와 鐵道가 끊어진 뒤엔 大型 旅客船을 動員해 輸送 作戰을 폈다. 배는 定員을 다섯 倍 以上 넘겨 船室과 複道, 甲板과 貨物倉庫에까지 避難民을 태우고 港口를 떠났다. 그리고 차가운 바다를 가르다, 蘇聯 潛水艦이 쏜 魚雷를 맞고 줄줄이 가라앉았다. 戰爭은 水深이 채 100m도 안 되는 얕은 바다를 魔手로 만들었다. 果然 人類 最惡의 事故는 戰爭이다.

    벤츠필스에서 上陸할 때는 運轉技士 알렉세이가 우리를 도왔다. 머리가 허옇게 센 70代 老人이다. 나는 그를 늙은 여우라고 불렀다. 첫 上陸 때 우리를 좋은 곳으로 案內하겠다며 近處 大型 商店으로 데려갔다. 그런데 우리를 正門에 두고 후다닥 사라지는 것이다. 나는 돈을 어디서 바꾸는지도 몰라 한참 헤맸다. 가게를 둘러보는데, 割引 코너 앞 길게 늘어선 줄에 알렉세이가 보였다. 바구니에는 저녁거리가 잔뜩. 손에 노란 메모紙를 들고 나선 걸 보니 作定하고 우리를 여기로 데려온 것 같았다. 割引 時間을 놓치지 않으려고 서두른 模樣이다. 나와 눈을 마주친 老人은 語塞하게 웃었다. 그의 夫人에게 煉炭이 必要하지 않아 多幸이다. 萬一 그랬으면 우리는 煉炭 工場을 有名한 觀光地나 되는 것처럼 갔을 테니.

    지구별  항해기

    추위에 얼어 붙은 발틱海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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