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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플래시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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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플래시 100

近現代史와 함께 숨 쉰 東亞日報 100年 記事를 紹介합니다

 동아일보가 創刊 100年을 맞아 創刊號부터 오늘 新聞까지 東亞 100年의 모든 記事를 더 쉽게, 더 便하게 볼 수 있도록 '東亞 디지털 아카이브'의 門을 활짝 열었습니다.

 이에 맞춰 意味 있고, 재미도 있는 동아일보 過去記事를 嚴選해 紹介하는 '東亞플래시100'을 連載하고 있습니다. 100年 記事를 다시 照明하는 칼럼을 該當 記事의 原文 및 現代文 텍스트와 함께 선보입니다. 原文 텍스트는 漢字에 音을 붙이고 띄어쓰기를 하는 程度에 그쳐 當時 느낌을 最大限 살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原文을 現代文과 對照해보면 理解하기 쉬울 뿐 아니라 옛날 記事를 읽는 맛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東亞 플래시 100'과 함께 하면서 抗日과 獨立을 이뤄내고, 자랑스러운 大韓民國 近·現代史를 開拓한 우리 國民의 熱情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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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日報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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創刊

日帝는 1919年 3·1獨立運動에 큰 衝擊을 받고 ‘文化政治’를 標榜해 이듬해
1月 동아일보 朝鮮日報 시사신문 等 3개지를 許可했다. 當時 사이토 朝鮮總督은 이에 對해
日本人들이 抗議하자 “동아일보는 朝鮮 民族의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가스를 排出시키는 굴뚝이야.
가스를 排出시키지 않으면 쌓이고 쌓여 끝내는 暴發하게 되거든...”이라고 對答했다는 逸話가 있다.
인촌 金性洙 先生 等 創刊 主導 人士들은 當初 3·1運動 1周年인 1920年 3月 1日子로 創刊하려
했으나 資金不足으로 한달 後인 4月 1日 타블로이드판 夕刊 4面 體制로 創刊했다. 當時
發行部數는 1萬 部 程度, 購讀料는 한 部에
3錢(只今의 約 900원)이었다. 民族主義 民主主義 文化主義를 斜視(社是)로 내걸었다.

1920 04.01 最初의 社屋

서울 종로구 화동에 있던 大韓帝國 學部大臣 이용태의 기와집을
月貰 120원(1원은 只今의 約 3萬 원)에 賃貸해 첫 社屋으로
使用했다. 社長室과 서고만 別室로 마련하고 그 밖의 部署는 한
房에 합친 壅塞한 規模였다. 社長, 編輯監督, 週間 以外에 論說半
및 編輯局 22名, 營業局 17名, 工場 22名, 雜務 9名 等 總 74名에
支局網은 全國 5個 都市에 設置했다.
俸給은 週間 120원, 國葬 100원, 部長과 論說半 70~80원, 記者
60~80원 等이었고 記者에게는 月 125원의 取材費가 別途로
支給됐다. 當時 한 달 旅館費가 20~25원 程度였으니 꽤 높은
水準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20 09.25 第1次 武器 停刊

創刊 後 6個月이 되지 않았던 1920年 9月 25日 동아일보는 첫 番째 無期停刊을 當했다.
直接 原因은 社說 ‘祭祀問題를 再論하노라’에서 日本 皇室 象徵인 警(鏡?거울) 珠玉(珠玉?구슬) 檢(劒?칼) 等 所謂 ‘3種 神奇(神器)’를 冒瀆했다는 것이었다. 發端은 이랬다. 慶北 榮州軍에 사는 主婦 박성녀(朴姓女)는 媤어머니賞을 當해 朝夕上食(朝夕上食)을 至誠껏 받들었다. 그러나 基督敎를 믿던 男便이 ‘偶像崇拜’라며 常識(上食)을 金(禁)하자 夫人 朴 氏는 죽음으로 不孝를 代贖(代贖)하겠다며 新株(神主)를 묻은 뒤 8月 27日 밤 附近 냇물에 投身自殺했다. 이에 동아일보는 그해 9月 10日子 社說 ‘祭祀와 偶像崇拜’에서 祭祀는 偶像崇拜가 아니며 다만 祭祀가 虛禮虛飾으로 흐르는 것은 本來의 精神을 沒覺하는 일이라고 論評했다. 이에 基督敎 側이 抗議하자 다시 9月 24日부터 社說 ‘祭祀問題를 再論하노라’를 連載해 論旨를 敷衍 說明했다. 24日 第1回分에서 祭祀의 意義를 論한 뒤 25日 第2回分에서는 祭祀와 偶像崇拜의 區別을 論證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設或 人身(人身)을 模作(模作)韓 偶像이 무(無)할지라도 或은 警(鏡)으로, 或은 주옥(珠玉)으로, 或은 檢(劒)으로, 그 타(他) 何等(何等) 模樣으로든지 物形(物形)을 作(作)하여 혹處(或處?어떤 場所)에 봉치(奉置)하고 神이 字(玆)에 재(在)하며 或 영(靈)李 者(玆)에 재(在)하다 하여 이에 對하여 崇拜하며 或 祈禱함은 一切(一切) 偶像崇拜라 할 것이니….” 日本 皇室을 象徵하는 3種 神技를 偶像 崇拜에 빗댔던 것. 이로 인해 朝鮮總督府는 9月 25日子에 發賣禁止 處分을 내리는 한便 總督 名義로 發行 停止 處分 내렸다.

1920 10 記者 3名 殉職

本報는 創刊 以後 特別取材를 위해 海外에 派遣한 記者 3名을 잃었다.
1920年 10月 中旬 日本軍이 北間島 一帶의 朝鮮人 2200餘 名을 無差別 虐殺했다는
消息을 듣고 장덕준 記者가 自願해 룽징(龍井)으로 가 日本領事館과 討伐軍司令部를
相對로 取材를 벌이다가 投宿 中이던 旅館에서 11月 初 行方不明됐다. 當時 여러 情況과
現地人, 家族 等의 證言에 依하면 日本軍이 그를 誘引해 銃殺한 것으로 推定된다.
우리나라 新聞史上 最初의 殉職記者로 記錄됐다.
또 백광남 記者가 1966年 11月 베트남戰爭에 從軍記者로 派遣돼 取材 中 交通事故로
殉職했으며, 이중현 寫眞記者가 1983年 10月 전두환 大統領의 東南아시아 巡訪을 遂行
取材 中 버마(現 미얀마)의 아웅산墓所 爆發事件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들 3名의 寫眞은 現在 本報 編輯局에 나란히 걸려 24時間 本報 記者들의 新聞製作
活動을 默默히 지켜보고 있다.

1926 12.10 光化門 時代 開幕

1926年 12月 서울 세종로 네거리에 地上 3層짜리 社屋을 完工해
創刊 6年 半 만에 光化門 時代를 열었다. 이 建物은 그 後 3個
層이 增築돼 忠正路 社屋 入住 以前까지 동아일보 社屋으로
쓰다가 現在는 일민미술관이 들어서 있다.
忠正路 社屋에는 1992年 移徙해 이듬해 朝刊化에 이어 全面
가로쓰기, 컴퓨터製作시스템(CTS) 構築 等 新聞社(新聞史)에 남을
큰 變化를 맞았다. 現在의 社屋 동아미디어센터에는 1999年 12月
31日 入住해 21世紀와 함께 第2의 光化門 時代를 열었다.
세종로 네거리는 創刊 當時부터 現在까지 변함없는 象徵性을
지니고 있다. 卽 朝鮮總督府와 軍政廳, 景武臺, 靑瓦臺에 이르는
最高의 權府(權府)를 肉眼으로 가까이 볼 수 있는 距離에 두고
있어 權力을 監視 批判 牽制하는 言論의 役割과 맞아떨어진다.
그런 理由로 仁村 先生이 굳이 이곳을 固執했다는 이야기가 傳해
내려온다.

1930 03.21 第 1回 東亞마라톤 大會

本報는 1931年 第1回 東亞마라톤大會 以來 74年間 이 大會를
開催해 오며 손기정 황영조 이봉주 等으로 이어지는 ‘마라톤
韓國’의 土壤을 마련했다. 손 選手는 양정고보 時節 2回 大會
때 準優勝하고 3回 大會 때 優勝했다.
이 밖에도 1923年 7月 女子庭球大會, 1924年 10月
學生雄辯大會, 1925年 동아新春文藝, 1926年 8月 4俱樂部(배재,
中央, 휘문, 更新) 野球聯盟戰, 1929年 9月 水營競技大會 및
男女學生作品展覽會 等 各種 年例 스포츠와 敎育文化 行事를
主催했다.
特히 1923年에는 朝鮮物産奬勵運動(朝鮮사람 朝鮮 것
쓰기운동), 1931年 브나로드 運動(文盲退治運動) 等 大大的인
民族主義 啓蒙運動을 展開했다. 光復 以後에는 1947年
黃金獅子機 高校野球 爭霸戰, 1956年 바둑 國手戰, 1961年
동아音樂콩쿠르, 1962年 名唱名人大會, 1964年 東亞演劇大會,
1985年 東亞國樂콩쿠르 等을 마련해 多樣한 分野의 發展에
寄與했다.

1936 (1936.08.29~1937.06.02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優勝者 손기정 選手 日章旗
抹消事件으로 無期 停刊

第11回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2時間 29分 19秒 2로 當時 待望의 2時間 30分 壁을 깨고
優勝한 손기정 選手는 全世界에 韓國人의 氣像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本報에도 큰 波長을
불러왔다. 손 選手가 施賞臺에 서 있는 場面 寫眞을 1936年 8月 25日子에 揭載하면서 가슴
部分의 日章旗를 지워버려 總督府로부터 네 番째 武器停刊 措置를 當했다.
이는 當時 이길용 體育部 記者와 이상범 畫伯의 ‘以心傳心’이 이뤄낸 作品이었다. 이 事件으로
本報 記者 8名이 拘束되고 이中 5名은 끝내 新聞界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主筆 編輯局長 等도
辭任했다. 停刊은 1936年 8月 29日부터 1937年 5月 31日까지 9個月間 持續되고 그 사이
송진우 社長, 장덕수 副社長, 양원모 社長職務代理 等도 잇따라 물러나야 했다.

1940 08.10 强制 廢刊

1939年 9月 第2次 世界大戰이 勃發하자 日帝는 朝鮮 民族의 ‘皇民化(皇民化)’를 旗幟로 내걸고
民族抹殺政策에 光分解 除去 對象 1號로 本報를 指目했다. 總督府는 自進廢刊 慫慂에도 不拘하고
新聞을 繼續 發行하자 口實을 만들어 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1940年 6月 初 日本人 警察 幹部들이 料亭에서 會食 中 料理床을 덮은 흰色 종이가 本報에서 破紙를
購入한 것이란 말을 듣고는 ‘經理否定’ 事件을 造作해 낸다. 當時 新聞用紙는 展示(戰時)
統制物資로서 配給制를 實施하고 있었는데 이를 不法 處分했다는 口實로 本社 經理部長을 拘束했다.
또 보성전문학교에 2萬 원을 빌려준 事實도 問題삼아 常務와 營業局長 等에 이어 송진우 拷問과
백관수 社長까지 拘束하고 말았다.
結局 本報는 總督府의 强壓에 依해 그해 8月 10日子 社說을 통해 廢刊을 宣言하고 만다. 그러면서도
廢刊號 3面 上段에 탐스러운 葡萄송이 寫眞을 揭載해 全 社員이 다시 뭉칠 날이 있을 것임을
讀者들에게 期約한다. 그로부터 暗黑時代 5年 4個月이 지나고 光復 3個月 半 만인 1945年 12月 1日
에야 復刊됐다.

1950 06.28 6·25戰爭과 釜山 避亂

南侵이 始作된 1950年 6月 25日 아침 非常 召集된 本報 社員들은 時時刻刻 들려오는 戰況에
따라 號外를 發行하다 27日 午後 南侵 先鋒隊가 이미 議政府를 거쳐 미아리 附近까지
내려왔다는 消息에 製作 中斷 決斷을 내린다. 編輯局에 모인 記者와 印刷職員들은 ‘敵, 서울
近郊에 接近, 우리 國軍 苦戰 血鬪中’이라는 題目의 號外 300張을 마지막으로 發行하고 서울
市內 一圓에 直接 配布한 뒤 武橋洞 설렁湯집으로 모였다.
新聞社 가운데 最後의 號外를 낸 記者精神을 自祝하는 술盞도 잠깐, 이들은 再會를 期約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그後 本報는 國軍과 유엔軍의 進退에 따라 避亂地 釜山을 오르내리며
地域新聞에 ‘求乞 印刷’도 마다하지 않고 新聞 製作을 繼續했다. 國民防衛軍 事件과 居昌
良民虐殺 事件, 拔萃改憲案을 둘러싼 政治波動 때는 李承晩 政府의 極甚한 彈壓을
받으면서도 批判의 强度를 낮추지 않았다.
本報는 1953年 7月 27日 休戰協定 以後 8月 18日子를 끝으로 釜山 避亂時代의 幕을 내리고
光化門 社屋으로 돌아왔다.

1955 02.01 ‘고바우 令監’ 筆花와 ‘나대로 先生’ 難産

1955年 2月 1日子부터 連載된 김성환 畫伯의 ‘고바우 令監’은 1958年 1月 23日子 ‘
景武臺에서 똥 치는 人夫’로 景武臺의 威勢를 諷刺해 長安의 話題를 모았다. 當時
權力者에게 無條件 阿附하는 風潮를 反映한 것으로, 이 漫畫의 背景은
이강석(李起鵬의 아들로 李承晩 大統領의 養子)을 詐稱해 地方 官吏들에게 極盡한
待接을 받은 ‘假짜 이강석’事件이었다. 金 畫伯은 警察에 連行돼 ‘他人의 四史(私事)에
關하여 虛僞事實을 揭載’했다는 理由로 ‘輕犯’으로 몰려 450圜의 科料를 낸 뒤
풀려났다.
1980年 11月 11日부터 金 畫伯의 뒤를 이어 ‘나대로 先生’을 그려온 이홍우 畫伯 亦是
첫 號부터 戒嚴令下의 軍 檢閱로 難産을 거듭했다. 그는 情報機關에 依한 數次例의
連行調査와 脅迫, 懷柔工作에도 屈하지 않고 4컷 漫畫로 權力世界를 銳利하게
諷刺해왔다.

1960 03.15 4·19革命의 牽引車

1959年 4月 30日 경향신문이 廢刊되자 本報는 自由黨 政權의
不正選擧 劃策을 看破하고 줄기찬 反政府 鬪爭을 벌여 4·19革命의
牽引車 役割을 했다. 5月 2日子에 ‘왜 新聞을 폐간시켰는가’ 題下의
社說로 砲門을 열어 경향신문 廢刊의 不當性부터 條目條目 指摘했다.
엄청난 不正選擧 計劃이 露骨化되자 1960年 3·15選擧를 앞두고
全國에선 學生과 市民들이 連日 示威를 벌였다. 本報는 다시 3月 11日
者 ‘天人이 共怒할 蠻行’ 題下의 社說에서 “可能한 限 모든 鬪爭을
全國民의 이름으로 展開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새삼스레 느낀다”고
事實上 政權에 對한 全面戰을 宣言했다.
3·15選擧가 恐怖雰圍氣와 公開投票, 테러 等에 依해 大大的인
不正選擧로 얼룩지자 全國的인 抗議데모 속에 馬山에서는 群衆이
支署를 襲擊하는 事件이 發生했다. 이어 4月 11日 警察의 無慘한
虐殺로 밝혀진 金朱烈 君 死亡事件은 馬山을 폭발시키고 4月 19日
서울에서는 10萬 名의 大學生과 數萬 名의 中高校生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一部는 景武臺 앞까지 몰려가 警察과 對峙하며
大統領 面談을 要求했다.
非常戒嚴令이 宣布되고 同時에 警察은 示威隊에 發砲하는
事態로까지 번졌다. 結局 이 大統領은 4月 26日 下野하고 하와이로
亡命했으며 이기붕 一家는 集團自殺로 李承晩 政權의 終焉을 告했다.

1961 06.04 言論 목 조른 5·16軍事政變

5·16軍事政變 勢力은 5月 27日 非常戒嚴을 警備戒嚴으로 代替하면서 形式上
事前檢閱은 없앴지만 言論에 꼼짝달싹할 수 없는 재갈을 물렸다. 特需犯罪處罰에
關한 特別法을 만들어 ‘政府를 誹謗할 目的의 虛僞事實 捏造 流布行爲는 10年
以下의 懲役’에 處하도록 했고, 反共法에 ‘反國家團體와 그 構成員의 活動을 讚揚
고무 同調하는 境遇 7年 以下의 懲役’에 處한다는 條項을 넣었다. 1960年代
大部分의 筆禍事件은 이들 條項에 抵觸되는 것이었다. 이는 記者들에게 事實上
記者室과 化粧室의 出入만을 許容하는 것이었다.
本報는 尹潽善 前 大統領이 ‘早速한 民政 移讓’을 要求한 記者會見 內容을
報道하면서 軍事政權과 첫 衝突을 했다. 이로 인해 當時 編輯局長, 政經部 次長과
이만섭(前 國會議長) 이진희(前 文公部 長官) 記者가 連行돼 두 記者는 한달 以上
陸軍刑務所에 收監됐다. 以後 記者들이 頻繁하게 連行되고 拘束됐다.
5·16軍事政權은 當時 朝夕刊制이던 新聞發行을 단간制로 바꿀 것도 强要했다.
“政治 記事가 너무 많아 國民이 政治에 지나치게 敏感하며 이에 따라 新聞이
재미없어 讀者가 늘지 않는다”는 名分이었다. 本報는 이때 夕刊을 選擇했다.

1963 04.25 東亞放送 個國과 弊國

4·19革命 이듬해인 1961年 1月 16日 민주당 政府에 依해
放送局(콜 死因 HLKJ) 設立 加허가를 받은 지 2年 3個月 만인
1963年 4月 25日 午前 5時 30分 3個月 만인(DBS)은 첫 뉴스
報道로 誕生을 알렸다.
官營放送人 KBS와 民營放送인 MBC, CBS에 이은 것이지만 3
個月 萬人은 日刊新聞社가 運營하는 첫 放送으로서, 聽取率은
그해 7月 18.9%(公報部 調査), 그해 9月 20%(연세대 調査),
이듬해 2月 33.5%(公報部 調査)로 急成長했다. 더욱이
동아방송은 首都圈 一帶에서만 聽取가 可能했던 點을 勘案하면
全國 放送인 KBS의 39.8%를 壓倒하는
首都圈 聽取率 50%에 이르렀다.
동아방송은 特히 뉴스에 重點을 두어 동아일보가 ‘보는
新聞’이었다면 東亞放送은 ‘듣는 新聞’으로서 補完關係를
이루었다. 그러나 동아방송은 1980年 新軍部의 言論統廢合
措置로 11月 30日 마지막 放送을 함으로써 17年의 짧은 一生을
마감했다.

1966 03.24 記者들에 잇단 政治테러

國交正常化를 위한 韓日協商과 協定批准에 對한 朴正熙 政權의 獨走를 앞장 서
批判하고 反對하던 本報의 변영권 編輯局長 代理의 自宅이 1965年 9月 7日 밤
爆破되고 東亞放送 조동화 製作課長이 집에서 怪漢에게 拉致돼 몰매를 맞았다.
이어 當局은 10月 1日子 本報 社會面 ‘서울에 北傀 新聞’ 題下의 記事를 問題 삼아
남중구 社會部 記者를 反共法 違反(讚揚 鼓舞) 嫌疑로 拘束했다.
이듬해인 1966年 3月 24日 ‘獨走(獨走)’시리즈 세 番째 記事인 ‘所信은 萬能인가’를
쓴 최영철 政治部 記者가 4月 25日 밤 自宅 附近 골목길에서 暴行을 當했고 이튿날
새벽에는 ‘救國特供團長’ 名醫의 脅迫狀과 함께 어린아이 머리만한 돌 2個가
집안으로 날아들었다. 7月 20日 밤에는 권오기 政治部 次長이 집 앞에서 2名의
怪漢에게 暴行당하고 12月 29日에는 傷痍軍警 50餘 名이 本社 編輯局에 亂入해
集團 亂動을 부렸다.

1974 01.08 ‘維新’ 抵抗과 廣告彈壓

永久執權의 바탕을 마련한 維新憲法에 對한 改憲運動이 1974年 1月 8日
大統領 緊急措置 1, 2號 宣布로 禁止됐다가 8月 23日 解除되면서 大學과
宗敎界 在野團體 野黨을 中心으로 維新憲法의 廢止, 民主回復 運動이
洑물처럼 터져 나왔다. 이 渦中에서 그해 10月 23日子 本報에 ‘서울 農大生
300名 데모’記事가 報道되자 中央情報部는 當時 編輯局長 송건호, 地方部長
한우석, 東亞放送 뉴스 쇼 擔當 部長 박중길을 連行했다.
記者들은 卽刻 編輯局에 모여 籠城에 突入해 이튿날 ‘外部 干涉 强力 排除’
‘機關員 出入禁止’ ‘言論人의 不法連行 拒否’ 等 3個項의 決意內容을 담은
自由言論實踐 宣言文을 發表했다. 10月 25日子에는 ‘왜 自由言論을
부르짖는가’ 題下의 社說을 실었다. 以後 本報는 禁忌事項(緊急措置
違反)이던 維新反對 集會 示威 記事를 本格的으로 다루기 始作해 하루 平均
7~10個의 大學街 示威 記事를 실었다.
이와 關聯해 뉴욕에 本部를 둔 國際人權團體 프리덤하우스는 그해 11月 20日
言論統制에 맞서 鬪爭하는 本社에 表彰狀을 보내 讚揚했다. 及其也 그해
12月 16日頃부터 政權의 壓力을 받은 廣告主들이 뚜렷한 理由를 밝히지
않은 채 廣告를 解約하는 事態가 發生했다. 廣告彈壓 한 달 後 本報 廣告는
98%가 떨어져 나갔다.
白紙 廣告가 나오기 始作하자 1萬 件이 넘는 國內外 讀者들의 激勵廣告가
줄을 이었다. 돼지貯金筒을 털어온 어린이, 就勞長 하루 勞賃을 몽땅 내놓은
勞動者, 끼고 있던 金半指를 欣快히 빼준 讀者도 있었다. 廣告는 이듬해 7月
16日부터 再開됐다.

1979 05.03 10·26事態 孕胎한 YH女工 籠城

1979年 5月 30日 신민당 全黨大會에서 ‘鮮明 野黨’을 내세운
김영삼 氏가 새 總裁로 選出되면서 維新 政局은 暗雲을
드리우기 始作했다. 8月 9日 YH貿易 女工 170餘 名이 서울
麻布의 신민당使 4層 講堂을 占據하고 勞使紛糾 問題로 籠城에
들어갔다. 警察은 解散 慫慂에도 不拘하고 말을 듣지 않자 이틀
뒤인
8月 11日 深夜에 奇襲 連行作戰을 敢行했으며 이 渦中에서
女工 1名이 投身 自殺하고 新民黨 議員들과 取材記者들도 함께
負傷 또는 연행당하는 事態가 벌어졌다.
本報는 維新 末期의 斷末摩的인 政府 壓力에도 不拘하고
暴力的인 警察의 解散 作戰을 大書 特筆해 政局은 一時에
激浪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理性을 잃은 朴正熙 政權은
新民黨 內部와 法院, 國會를 操縱해 8月 11日 金 總裁
職務執行停止 假處分, 10月 4日 議員職 除名을 强行했다.
드디어 10月 22日 釜山 馬山 一圓에서 暴發한 駙馬(釜馬)
抗爭은 政權의 內紛과 10·26事態를 부르는 契機로 作用했다.
維新政權 崩壞 過程에서 本報는 고비고비마다 다른 言論社를
훨씬 凌駕하는 取材와 批判으로 政局 狀況을 主導해 나갔다.

1980 05.15 光州民主化運動과 東亞日報

1980年 5月 18日 光州民主化運動이 始作된 後 19~23日 初期 5日
동안 本報는 無社說(無社說)로 抵抗할 수밖에 없었다. 當時
서울市廳에 設置된 郡(軍) 言論檢閱團은 첫날부터 社說을
‘토막屍體’로 만들어 돌려보냈다. 토막난 채로는 論理가 構成되지
않아 社說로 揭載할 수 없었다. 다음 날에도 表現만을 조금씩 바꿔
비슷한 內容의 社說을 실으려 했지만 檢閱團은 餘地없이 빨간
줄을 그어댔다.
1面 萬坪人 ‘동아희평’(백인수 畫伯)과 社會面 時事漫畫人
‘고바우令監’(김성환 畫伯)도 실리지 않은 날이 많았다. 5月 27日
鎭壓이 끝날 때까지 日曜日을 除外한 13日 동안 동아희평은 11
日刊, 고바우令監은 8日間 紙面에서 사라졌다. 또 ‘金大中
內亂陰謀 事件’ 大法院 判決을 앞둔 어느 날에는 ‘金氏는 死刑이
마땅하다’는 軍法務官 出身 辯護士의 글을 싣도록 壓力을
받은 일도 있었으나 本報는 “裁判 繫留 中이어서 困難하다”는 理由로
이를 拒否했다.
光州民主化運動 初期 光州 全南 地域에서는 本報 記者만이
示威隊에 接近해 取材가 可能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言論社 記者
中에 本報 記者를 詐稱하는 境遇가 많아 이 一帶에는 난데없이
‘동아일보 記者’가 들끓는 웃지 못할 狀況이 演出되기도 했다.

1987 05.03 박종철 拷問致死事件 連續 特種

1987年 1月 15日 이 事件 첫 報道는 中央日報에 빼앗겼지만 그 다음부터는 本報의
連續 特種報道로 6月民主抗爭을 觸發하는 原因이 됐다. 搖之不動이던 全斗煥 政權의
‘護憲(護憲)’立場은 드디어 大統領 直選制 改憲 約束으로 바뀌어 6·29宣言이 誕生하게
됐다. 事件 初期 강민창 治安本部長을 비롯한 警察 幹部들은 서울대生 박종철 君이 쇼크로
숨졌다며 "調査 警察官이 冊床을 ‘탁’ 치니 朴 君이 ‘億’하고 쓰러졌다"고 主張했다.
그러나 本報는 朴 君 三寸의 證言을 통해 數十 군데 멍자국이 있었음을 밝혀낸 데 이어
最初 剖檢醫師의 證言에 依해 물拷問 等 各種 拷問 疑惑을 提起했다.
顧問이 事實로 드러나면서 內務長官과 治安本部長이 解任되고 加擔 警察官 5名이
拘束됐으나 本報는 다시 對共搜査 幹部들의 犯人 縮小 및 事件隱蔽造作 謀議 事實을
暴露했다. 民心이 걷잡을 수 없이 惡化되자 政府는 노신영 總理와 安企部長, 內務
法務長官, 檢察總長, 安企部 1次長, 治安本部長 等 時局 關聯 內閣을 全面 交替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本報는 이에 그치지 않고 “事件 初期 治安本部長 等 警察 首腦部가 拷問 致死
事實을 알고도 이를 隱蔽 造作했다”는 剖檢醫師의 日記帳 內容을 暴露해 解任에
그쳤던 治安本部長까지 拘束되게 만들었다. 本報는 當時 서울市內 街販 販賣에서만 40
萬 部를 넘기는 놀라운 新記錄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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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04.01 創刊 78年 만에 全面 가로쓰기 斷行

本報는 創刊 73周年을 맞은 1993年 4月 1日 夕刊時代 30年을
마감하고 朝刊으로 새 出發을 했다. 朝刊化 斷行 6個月 만에
發行部數 200萬 部를 突破해 1984年 150萬 部를 記錄해 韓國
新聞史上 新紀元을 이룩한 以後 9年 6個月 만에 다시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어 朝刊化 5年 만인 1998年 1月 1日 新年號부터 全面 가로쓰기를
斷行했다. 첫날 發行面數는 48面으로, 3個 섹션으로 나눈 새 얼굴을
선보였다.

2000 12.15 ‘21世紀의 榮光’ 펼칠 동아미디어센터

言論의 使命을 象徵하는 서울 세종로 四거리에 21世紀를 맞으며 21
層짜리 인텔리전트 빌딩이 새로 들어섰다. 21世紀 ‘東亞의 雄飛’를
豫見하듯 동아미디어센터와 旣存 社屋 屋上에 設置된 國內 最大의
電光板은 2002年 월드컵大會 期間 中 世界的 名物로 떠올랐다.
세종로 四거리 一帶엔 韓國팀의 競技가 있는 날마다 數百萬 名의
‘붉은 惡魔’ 應援團이 몰려와 "大~韓民國"을 외침으로써 월드컵 4强
達成에 決定的 寄與를 했다. 本社는 爆竹 터뜨리기 等 多樣한
이벤트로 群衆의 熱狂的인 應援을 支援해 讚辭를 받았다.
2000年 12月 15日에는 동아미디어센터에 韓國 最初의, 그리고 現在
唯一한 新聞博物館이 들어서 우리나라 近現代 言論社 및 憲政史를
보여 주는 산 敎育場으로 定着됐다.

2005 '청계천과 함께 ‘讀者에 더 가까이’

청계천이 復元되면서 동아미디어센터 앞에 造成된 噴水臺 廣場은 청계천 始發點임과 同時에
‘동아廣場’으로서 本報가 讀者들에게 성큼 다가서게 하는 電氣를 마련했다. 이에 따라 74年 傳統의
東亞마라톤 兼 서울國際마라톤의 코스도 청계천邊을 따라 뛰는 새로운 코스로 變更되고
동아일보의 歷史는 讀者와 함께 새롭게 만들어 가는 時代로 접어들었다.
淸溪川 時代에도 本報는 흔들림 없는 政論紙로서, 讀者의 생각과 목소리를 더욱 忠實하고 正確하게
代辯하는 믿음직한 親舊가 되고자 한다. 그리하여 讀者들을 더욱 幸福하고 살맛나는 世上으로
招待하는 꿈을 펼쳐갈 것이다.

2011 12.01 채널A 個國

21世紀 뉴미디어 時代를 이끌 채널A 個國… 새로운 ‘新放兼營 時代’ 열려
2011年 12月 1日 綜合編成채널 채널A가 開局했다. 이로써 1980年 11月 30日
軍事 政權의 强制 廢房 措置로 동아방송(DBS)의 電波가 끊긴지 31年 만에 다시
放送을 始作하게 되었다. 동아미디어그룹의 새로운 ‘新放兼營 時代’가 열린 것.
‘꿈을 담는 캔버스’라는 슬로건 아래 報道와 敎養, 娛樂 等 모든 分野에서
斬新하고 재미있는 콘텐츠를 提供한 ‘채널A’는 開局 以來 9分期 連續 視聽者
滿足度 1位를 차지 했다. 또 가장 빠른 速度로 視聽率이 上昇해 2015年 12月에는
個國 4年 만에 月刊視聽率 2%를 突破했다. 이와 함께 綜編채널 最初로 中國에
進出, 中國 放送社와 共同으로 프로그램을 製作해 글로벌 미디어의 길을
開拓했다.
歷史와 傳統을 지닌 동아미디어그룹의 土臺에서 誕生한 채널A는 公益과 程度를
지키는 ‘올바른 放送’, 재미와 感動을 주는 ‘따뜻한 放送’, 視聽者를 向한 ‘열린
放送’, 協力하고 相生하는 ‘착한 放送’을 志向하며 21世紀 大韓民國을 代表하는
放送社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2014 10.07 東亞디지털미디어센터(DDMC) 竣工

동아미디어그룹의 새로운 100年의 舞臺가 될 上岩
東亞디지털미디어센터(DDMC)가 2014年 10月 17日 竣工됐다. DDMC는
地上 19層, 地下 6層 規模의 超大型 建物로 스튜디오 4個 等 尖端 放送製作
시스템을 構築하고 있다. 技術은 勿論 內部 動線과 인테리어 等이 製作
效率을 높이고 新聞과 放送의 시너지를 極大化할 수 있도록 맞춤型으로
設計된 것이 特徵이다.
DDMC가 門을 열면서 外部 賃貸 세트에서 進行했던 ‘이제 만나러 갑니다’,
‘나는 몸身이다’ 等의 채널A 主要 프로그램 錄畫를 社內에서 進行할 수 있게
됐다. 채널A 製作陣이 力量을 集中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지면서 話題性
높은 高品格 프로그램들이 잇따라 誕生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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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04.01 100年 前 靑年의 꿈으로 다시 ‘젊은 100年’

"꿈이 뭐예요?" 創刊 100年을 맞은 동아일보는 大韓民國 靑年 100名을 만나 꿈을 물었다. 100年 前 創刊을 이끈 主役들도 20代 靑年. 創刊 100年 生日에 새로운 100年의 出發을 알리며 더 나은 世上을 위해 靑年들이 어떠한 꿈을 꾸고 있는지 묻고 未來 世代의 方向性을 共有한 것. 디지털 미디어가 쏟아내는 情報 洪水 時代, 東亞DNA 價値와 善한 影響力 擴散을 위해 ‘히어로콘텐츠팀’도 出帆됐다. 히어로콘텐츠팀은 동아미디어그룹의 뉴스룸 革新 戰略 報告書 '레거시플러스' 內容을 現實化시킨 組織. 한世紀 동안 蓄積한 力量을 바탕으로 새로운 價値와 挑戰을 더한 히어로콘텐츠팀의 複合 콘텐츠 ‘蒸發 사라진 사람들’ ‘환생-長期 寄贈’ 시리즈 等은 社會에 묵직한 울림을 던졌다. 또한 1920年 4月 1日 創刊부터 以後 모든 紙面을 搭載한 ‘東亞 디지털 아카이브’를 동아닷컴에 公開했다. 日帝 强占期와 分斷, 戰爭을 克服하고 産業化와 民主化, 情報化를 이뤄낸 大韓民國의 어제와 오늘을 인터넷으로 便利하게 接近해 確認할 수 있다.

동아방송 18+

1959 11. 라디오 放送 全盛時代

1959年 11月 금성사가 國內 最初로 '錦城 라디오 A-501'모델을 組立 生産했다. 當時 出市 價格은 2萬 圜으로 輸入 라디오의 60% 水準. 1962年 公報部는 라디오가 없어 放送을 듣지 못하는 農家에 트랜지스터 라디오 금성사 T-604 5000臺를 無償으로 配付했다. 當時 國內 라디오 受信機 數는 130萬臺였다. 60, 70年代 라디오 放送 全盛時代를 맞이했다. TV 受像機 普及이 全國的으로 擴大되기 前까지 庶民들의 삶과 文化에 파고 들었다.

1961 01.16 4月 民主革命이 안겨준 放送局 設立 가인가 제1호

1960年 10月 민주당 政府 出帆 直後 동아일보는 新聞社의 放送共有를 決定했다. 印刷媒體인 新聞의 長點과 放送의 速報性을 極大化해 言論 領域을 擴大하자는 趣旨였다. 1960年 12月 遞信部에 放送事業의 許可를 申請했는데 제2공화국의 민주당 場面 內閣도 民間放送 育成에 積極的으로 나왔다. 1961年 1月 16日 동아방송(DBS)의 設立許可申請을‘허제9402호’로 가인가 했고 28日에는 한국문화방송(MBC) 設立을 認可했다.

1963 04.25 “빠른 뉴스… 귀로 듣는 東亞日報”

1963年 4月 25日 午前 5時 30分 동아방송(DBS)李 첫 電波를 쏘며 開局했다. 呼出符號는 HLKJ, 周波數 1230kHz, 出力10kW. 設立認可 以後 2年間의 準備 期間을 거쳐 民間放送으로서는 基督敎放送(CBS)、文化放送(MBC)에 이어 세番째였다. 個國 때부터 定時뉴스를 하루 15回 내보내는 果敢한 編成에 나섰다. MBC와 RSB(TBC의 前身)가 各各 1961年, 1964年 個國 때 하루 8回와 13回의 뉴스를 내보냈던 것에 比하면 質的 量的으로 壓倒的이었다.

1963 ‘큰 뉴스에 强하다’

1963年 10月 49名이 溺死한 京畿 驪州郡 粗暴나루터 나룻배 事件, 11月 이득주 中領 一家 沒殺 事件은 동아방송의 特種이었다. 1964年 1月 美國 케네디우주센터의 새턴 로켓 發射 全 過程을 3時間동안 中繼放送했다. 發射 實況이 日本 駐屯 오키나와 美軍基地(AFRTS)에 短波로 中繼되는 事實을 알고 高性能 短波受信機로 AFRTS 電波를 잡아 解說을 곁들였다. 1967年 忠南 구봉鑛山 落磐事故에서 8日間 地下에 갇혀있던 生存 鑛員의 育成을 파이프를 통해 傳했고 1968年 1月 北韓 武裝共匪 浸透 事件에서 김신조와의 單獨 인터뷰도 성사시켰다.

1964 個國 1年 만에 聽取率 1位

個國 1年이 채 안 된 1964年 2月 하루 17回로 定時 뉴스를 늘려 速報와 後續 報道를 强化했다. 每日 午後 9時에 編成한‘라디오 夕刊’은 男女 進行者가 서로 主로 받는 形式으로 記者가 錄音器를 들고 담아 온 現場의 소리도 追加하고 뉴스와 뉴스 사이에 音樂도 넣었다. 단조롭게 뉴스 原稿를 읽던 틀을 깬 새로운 포맷이었다. 1964年 公報部 調査에서 33.5%의 聽取率로 全國 放送인 KBS를 除外하고 首都圈 聽取率 1位를 차지했다.

1963 04.25 ~ 1964 06.28 韓國 最初 다큐멘터리 드라마 ‘여명 80年’

個國 첫날인 1963年 4月 25日부터 月~金曜日 20分間 放送됐다. 김경옥 劇本 오사량 演出로 甲申政變부터 8·15解放까지 韓國近代史를 다뤘다. 愛情物 爲主의 라디오 드라마 文法을 따르지 않은, 國內 다큐멘터리 드라마의 嚆矢로 評價받는다. 登場 延人員 4000餘 名에 實際 人物들의 錄音 證言도 揷入했다. 徹底한 資料蒐集과 歷史考證으로 有名했다. 1964年 6月 28日 306回로 마무리되자마자 6卷 分量의 實錄 小說로 만들어져 韓國出版文化賞 著作賞을 受賞했다.

1964 09.19 보이는 라디오 ‘미도파 스튜디오’와 韓國 最初 DJ 최동욱 PD

1964年 9月 19日 서울 中心街 鳴動 미도파百貨店 1層에 스튜디오를 開設했다. 聽取者가 放送實況을 直接 볼 수 있는, ‘보이는 라디오’의 元祖格이었다. 최동욱 DJ가 電話 申請曲을 卽席에서 받아 音樂을 들려주는 進行을 直接 선보이기도 했다. 최동욱은 1963年 4月 28日부터 放送된 ‘탑튠쇼’ 擔當 프로듀서였다. 팝송을 紹介하는 ‘탑튠쇼’ 는 元來 아나운서가 原稿를 읽는 形式이었는데 최동욱 프로듀서가 1964年 가을부터 直接 아나韻싱과 믹싱을 도맡아 國內 放送 DJ時代 첫 番째 門을 열었다.

1965 08.13 放送아카데미즘 追求 放送調査硏究室 發足

1965年 8月 13日 放送局長 直屬機構로 調査硏究室이 設置됐다. 최창봉 放送部長이 初代 調査硏究室長을 兼任했다. 自體硏究地 ‘月刊리포트’를 創刊해 聽取率 分析, 프로그램 硏究 및 評價, 商業放送 스폰서 現況, 外國放送에 關한 情報와 放送製作 傾向 을 실었다. 後에 ‘調査硏究’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優秀 프로그램 選定과 鏢槍으로 放送의 質을 높이는데 寄與했다. 1972年 10月 1日 廢止됐고 一部 機能이 東亞日報社 심의실로 移管됐다.

1965 12.06 하루 21時間 放送과 民間放送 最初 對北放送

1965年 12月 6日부터 하루 19時間 放送에서 21時間 放送으로 深夜放送(자정~새벽 2時)을 始作했다. 1966年 1月 25日 새벽 1時 30分부터 30分間 北韓同胞를 위한 特別 프로그램 ‘서울의 愛人’을 編成했다. 民間放送으로서는 最初의 對北放送이었다.‘서울의 愛人’李 聲價를 높이자 다른 民間放送들도 다투어 對北放送을 編成했다. 1969年 2月 ‘自由의 구름다리’라는 타이틀로 民放合同 對北 프로그램까지 만들었다.

1966 03.21 國內 첫 마라톤 實況中繼

1966年 3月 21日 第37回 東亞마라톤 풀코스 實況 中繼로 東亞放送 技術陣의 力量을 誇示했다. 서울 南山과 仁川自由公園(當時 만국공원)에 中繼所를 設置하고 高性能 中繼車 2臺를 現場에 投入했다.중계요원들의 緻密한 事前準備와 充分한 豫行演習으로 코스의 特徵과 景氣狀況을 密度 있게 傳達했다.‘내리막 코스’ ‘오르막 코스’‘주폭(走幅)’ 等 쉽고 適切한 中繼用語를 使用했다. 이 用語들은 只今도 마라톤 中繼에서 쓰인다.

1968 04.25 出力 50kW로 增强… 더 멀리 全國으로

동아방송은 10㎾ 낮은 出力 탓으로 서울, 京畿를 中心으로 限定된 地域에서 聽取가 可能했다. 個國부터 釜山과 光州 地方局 設置를 出願했고 1965年에는 FM 放送國, 1967年에는 TV 放送局 設立 許可願을 냈으나 拒否當했다. 旣存 周波數 1230 kHz 를 790kHz로 變更해 1966年 12月 4日‘맑은 放送’을 實現한 뒤 可聽地域을 擴大하기 위해 出力 增强을 서둘렀다. 個國 5周年 記念일 새벽 5時 50㎾의 强力하고 鮮明한 電波가 全國으로 送出됐다.

1968 10.02 長壽 프로그램‘愉快한 應接室’

音樂과 토크가 어우러진 公開放送 ‘愉快한 應接室’李 1968年 10月 2日 第1回 放送文化大賞 最優秀賞을 受賞했다. 高品格 娛樂 프로그램임을 立證했다. 1963年 個國부터 1980年 弊國까지 繼續된 最長壽 프로그램이다. 전영우 아나운서가 줄곧 MC를 맡았으며 梁柱東 博士 같은 碩學과 知識人들이 固定 出演해 眞摯하고도 愉快한 이야기 褓따리를 풀어냄으로써 健全한 웃음을 膳賜했다.

1969 07.08 ‘鸚鵡새事件’ 關聯 6名 全員 無罪 確定

‘鸚鵡새’는 每日 밤 5分間 不條理한 社會 現象을 날카롭게 指摘하는 칼럼 프로그램. 1964年 6月 4日‘韓日協定 反對 學生示威 煽動’理由로 최창봉 放送部長 等 職員 6名이 拘束됐다. 이 事件은 1969年 7月 8日 無罪가 宣告됐는데, 5年만의 當然한 歸結이었다.그러나 동아방송이 받은 傷處는 컸다. 朴正熙 政權과의 緊張關係로 地方局의 設置와 TV, FM 等의 許可 申請이 번번히 拒否當했고 維新政權時節 ‘廣告彈壓’으로 이어졌다.

1969 10.31 DBS 뉴스 쇼, 앵커시스템 嚆矢

버라이어티‘뉴스 쇼’는 3選 改憲을 위한 國民投票를 사흘 앞둔 1969年 10月 31日 午前 8時 誕生했다. 이 프로그램은 1971年 12月 國家非常事態 宣布로 突然 中斷됐다가 1974年 4月 1日 다시 復活했다. 編輯局 部·次長이 30分間 進行해 라디오 뉴스 스타일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다. 오프닝 이슈에 이어 主要 뉴스, 電話 인터뷰, 特派員 코너, 生活情報와 日氣豫報로 다양하게 엮었다. 取材記者 個個人의 個性과 分析力이 돋보이는 報道는 政治·社會的 激動期에 時代의 證人을 自任했다.

1975 01.08 放送廣告 무더기 解約 事態

1972年 10月 維新體制로 規制措置가 잇따랐다. 緊急措置의 여러 制約은 그동안 쌓아 올린 ‘뉴스는 東亞’라는 名聲을 威脅했다. 1974年 12月 동아일보 廣告彈壓事態가 터지고 무더기 廣告 解約은 東亞방송에도 波及됐다. 1975年 1月 8日 報道 프로그램의 廣告가 모두 解約됐고 1976年 4月 1日에야 艱辛히 本來 狀態를 되찾았다. 그러나 TBC에 聽取率 1位 자리를 넘겨준 것은 勿論 2位 高手라는 目標조차 지키기가 쉽지 않을 만큼 동아방송의 試鍊은 酷毒했다.

1976 海外 報道 强化

1976年부터 海外 報道를 强化했다. 全國 放送網을 갖고 있지 못한 東亞방송으로서는 海外뉴스 强化가 限界를 脫皮하는 脫出口였다. 1976年 3月 1日 新設된‘외신 氣象圖’는 主要 外信 報道와 함께 深層解說을 生放送 對談으로 곁들였다. 1976年 9月과 1977年 1月의 AP AFP 受信機를 設置했고, 1977年 4月 海外部, 1978年 海外特派員第, 1979年 4月 ‘世界의 表情’을 新設했다. 日曜日마다 20分씩 放送된 ‘世界의 表情’은 國內 放送史上 처음 特派員들의 現地報告 錄音으로 構成됐다.

1976 깊고 넓게…방송문화 先導‘DBS 리포트’

‘DBS 리포트’는 錄音 構成 方式의 深層報道 프로그램. 1963年 個國부터 1980年 弊國까지 18年間 繼續 放送됐다. 初盤에는 國內 深層 取材에 注力했으나 1976年부터 舞臺를 世界로 넓혔다. 1977年 12月 放送한 ‘아메리카 移民 80年’은 第5回 韓國放送大賞과 放送倫理委員會賞을 同時에 殊常했다. 라디오의 深層報道 力量을 誇示하면서 放送文化를 先導했다.

1980 11.30 强制 廢房, 歷史 속으로 지다

1980年 서울의 봄을 맞이한 동아방송은 地方局과 TV國 設置를 위해 奔走히 움직였다. 그러나 이 같은 努力은 1980年 11月 15日 전두환 新軍部의 放送 統廢合 發表로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었다. “只今까지 여러분께서는 大韓民國 서울에서 放送해드린 DBS 東亞放送을 들으셨습니다. 1963年 4月25日 새벽 5時 周波數 1230㎑ 出力 10㎾로 첫 電波를 發射한 以來 18年 동안 聽取者 여러분과 喜怒哀樂을 함께했던 저희 東亞放送이 이제 告別의 帳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동아방송을 愛聽해 주신 聽取者 여러분께 뜨거운 感謝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 安寧히 계십시오. 여기는 東亞방송입니다. HLKJ.” 1980年 11月 30日 밤 12時. 戒嚴司令部의 檢閱로 放送中斷 理由에 對해 아무 具體的인 說明도 없는 告別辭로 電波를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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