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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 만든 共同宣言文 草案 없었다”|주간동아

週刊東亞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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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 만든 共同宣言文 草案 없었다”

우리側 當初 豫想은 ‘共同聲明’ 水準…南北 合意 內容 北韓 專門家들조차 “期待 以上”

  • 入力 2005-07-12 11: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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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서 만든 공동선언문 초안 없었다”
    말 타니까 犬馬(牽馬) 잡히고 싶다는 말이 있다. 歷史的인 6·15 南北 共同宣言, 一名 ‘平壤宣言’에 南北 두 頂上이 署名한 지 보름餘가 지난 只今의 狀況이 그렇다. 그러나 4月10日 南北韓 當局이 頂上會談 開催 合意 事實을 公表한 뒤 김대중 大統領이 平壤으로 出發하기 前까지 두 달 동안 北韓 專門家들이 頂上會談에 걸었던 期待와 要求 水準에 견주면 그 成果는 期待 以上이었다. 事實 55年 동안 對立과 反目으로 얼룩진 南北關係에 비추어 南北의 두 頂上이 만나는 것만으로도 큰 意義가 있다는 것이 이들의 共通된 意見이었다.

    6·15 共同宣言文 가운데 統一의 原則과 方案을 담은 第1, 2項에 對한 是非도 마찬가지다. 是非의 根源은 두 項에 담긴 ‘자주’와 ‘낮은 段階의 聯邦制’라는 表現이다. 要컨대 北韓이 그동안 ‘自主的’이라는 用語를 外勢 排除, 卽 美軍 撤收 槪念으로 解釋해왔음에 비추어 北韓側 戰略에 말려들었다는 것이 是非의 核心이다. 또 우리側이 北韓의 讓步로 看做한 ‘낮은 段階의 聯邦制’라는 表現도 北韓側이 80年 高麗聯邦制 統一方案을 公表한 以後 내비친 ‘느슨한 聯邦制’라는 表現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主張이다. 또 이같은 是非에 根據해 한나라당과 保守層 一角에서는 頂上會談의 成果를 慇懃히 貶下하고 있는 것이 事實이다.

    그런 가운데 金大統領 特別隨行員으로 會談 進行過程을 가까이서 지켜본 이종석 博士(世宗硏究所 硏究委員·南北韓關係硏究室長)가 이같은 ‘誤解’의 原因과 背景을 昭詳히 밝혀 注目된다. 이종석 硏究委員은 세종연구소(所長 김달중)가 6月30日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開催한 第5次 國家戰略 포럼(頂上會談 以後 南北關係 改善戰略)에서 頂上會談 成果의 本質을 歪曲하거나 副次的인 施行錯誤를 浮刻시키려는 一部 雰圍氣는 김대중 政府가 克服해야 할 障壁이라고 主張했다.

    이종석 硏究委員에 따르면, 이같은 ‘誤解’의 出發은 우리側 會談 戰略과 現場의 雰圍氣를 모르기 때문에 비롯됐다는 것. 李硏究委員은 “이番 頂上會談은 戰略的으로 準備되었지만, 實際로는 戰術的으로 對應되었다. 4時間 동안의 頂上會談을 통해 너무 많은 얘기가 오갔기에 그 內容은 理論 中心이 아니라, 現場에서 統一方案에서의 外交權 問題 等 核心問題 中心으로 論議가 이루어졌음을 理解할 必要가 있다”고 말했다.

    李硏究委員의 發言에서 注目되는 事實은 우리側이 처음부터 共同宣言을 念頭에 두고 그 ‘草案’을 準備해간 것이 아니라는 點이다. 卽 一部에서는 “元來의 우리側 草案에 들어 있던 緊張緩和나 平和體制 構築 問題가 最終 合意文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問題삼고 있으나 當初에 ‘우리側 草案’이 없었다는 것이다. 李硏究委員은 “서울에서 만들어간 (共同宣言文) 草案은 存在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勿論 草案이 없었다고 해서 會談의 戰略`-`戰術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當初 우리側은 平壤에 가면서 共同宣言보다는 한 段階 낮은 共同聲明을 念頭에 두었다. 그리고 우리側 戰略은 北韓側이 우리側에 頂上會談을 提案하는 重要한 契機가 된 ‘韓半島 平和와 統一을 向한 南北 和解協力 宣言’, 卽 베를린 宣言에서 우리側이 北側에 提案한 內容을 共同聲明에 담는다는 것이었다.



    6月14日 3時 金大統領이 김정일 國防委員長과의 2次 單獨會談에 臨할 때까지도 우리側 會談 戰略은 베를린 宣言 4個項을 土臺로 두 頂上이 署名한 共同聲明을 發表하는 것이었다. 베를린 宣言의 核心 內容은 △南北 輕俠을 통한 北韓經濟 回復 支援 △韓半島 冷戰 終熄과 南北韓 平和共存 △離散家族 問題의 解決 △南北 當國 間 對話 推進 等 4個項이다. 그런데 두 頂上은 4時間 동안의 마라톤 會議에서 너무 많이 속 깊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래서 베를린 宣言을 담은 共同宣言文 3, 4, 5項 外에 統一의 原則과 方案을 담은 1, 2項을 追加하게 됐다는 것. 그러나 節次上의 誤解 素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두 頂上이 大略的인 原則에 合意하고 會議를 끝낸 것은 저녁 7時 무렵. 共同宣言文 作成을 둘러싼 實質的인 밀고 당기기는 이때부터 始作되었다. 임동원 特報와 김용순 祕書를 中心으로 兩쪽 實務팀이 本格的인 文件 折衝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그 무렵 박선숙 副代辯人은 베를린 宣言을 土臺로 緊張 緩和 等 4個項의 合意事項을 平壤 프레스센터가 設置된 고려호텔에서 發表했다. 會談이 끝난 뒤 結果가 “잘 되었다”는 박준영 代辯人의 말을 듣고서였다. 勿論 合意文이 나오기 前이었다.

    그러나 이종석 硏究委員에 따르면, 임동원 國精院長과 김보현 5局長(現 3次長)李 ‘우리側 草案’을 作成하기 始作한 時點은 頂上會談이 끝나고 난 뒤인 7時頃부터였다. 그리고 이 草案을 가지고 임동원 院長-김용순 祕書 間의 折衝이 始作되었고, 두 사람이 合意한 ‘折衝 草案’을 金祕書가 晩餐場의 김정일 委員長에게 내민 때가 9時20分쯤이었다.

    金委員長은 이 文件을 5分 동안 읽어본 뒤 金祕書에게 數次例 귓속말로 指示했다. 暫時 뒤 金祕書는 書類를 金大統領 옆에 있던 林院長에게 傳達했고, 林院長은 이를 金大統領에게 報告했다. 金大統領은 書類를 훑어본 뒤 손으로 몇 군데의 修正을 指示했다. 以後 밤 9時30分께 兩 頂上의 意見이 加味된 書類를 받은 文件 作成팀의 마지막 作業이 始作됐고 두 頂上의 署名(手票)만 남겨둔 最終 合意文이 作成된 時刻은 10時50分쯤이었다.

    李硏究委員은 “會談에 直接 參與한 것은 아니지만 現地에서 會談 戰略팀을 諮問했기 때문에 우리側 草案의 內容을 正確히 알고 있다”면서 “우리側 草案이 會談 以後 北韓의 主張에 따라 바뀐 것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南北 頂上이 史上 처음으로 統一方案의 共通性을 認定한 것은 오히려 北韓이 現實의 變化를 受容하여 旣存의 高麗民主聯邦制를 修正한 것을 意味한다”고 主張했다. 그는 또 共同宣言文에는 反映되지 않았지만 平和體制 및 駐韓美軍 問題에 對해서도 相當한 進展이 있었음을 暗示했다.

    “平和 問題와 關聯해 두 頂上은 많은 論議를 하고 相當部分에서 認識의 共有를 이뤄냈지만 共同宣言에 明記된 것은 原則과 方向 程度에 그쳤다. 相當部分이 省略된 것이다. 省略은 서로 意見開陳에 그친 事案과, 認識의 共有가 이뤄졌어도 韓半島 周邊의 力學 關係나 北韓 內部事情이 考慮되어야 할 境遇에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南側이 眞摯하게 說明한 核-미사일 問題가 電子(前者)라면 北側의 認識 變化가 確認된 駐韓美軍 問題 等이 後者(後者)로 보인다.”

    이종석 博士는 “정작 平壤에서 돌아와 韓國 社會에 불어닥친 ‘김정일 쇼크’를 보고 衝擊받았다”면서 “北韓은 變했지만 오히려 우리는 變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想像했던 김정일 國防委員長의 모습과 눈앞에 나타난 그의 모습의 差異 때문에 커다란 混亂을 느꼈다면, 그것은 김정일 委員長의 變化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그만큼 그를 잘못 보고 있었다는 뜻도 된다. 卽 相對方의 變化를 要求해온 우리가 정작 그 變化를 느끼지 못할 만큼 變化하지 않은 것이다. 이제 우리도 南北 平和共存의 時代를 열기 위해서 變化가 必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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