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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老齒-映畫的 實踐의 可能性|동아新春文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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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老齒-映畫的 實踐의 可能性

by   최철훈

  • 作品專門
  • 審査評
  • 當選所感
  • 1. 映畫를 통한 ‘捕捉’은 可能한가?

    社會는 重層的인 構造를 가지므로 表面에 드러난 現象을 觀察하는 것만으로는 現象의 根源的 作用方式이나 通時的 構造에 對해 把握하기 쉽지 않다. 우리는 주어진 現象 밑으로 겹겹이 쌓여 相互作用하는 多層의 審級들을 綿密하고 緻密하게 解體-再組立하는 過程을 통해서 現象의 얼개를 多少間 推測해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最初로 現象이 觀察者의 視野에 捕捉된 以後, 여러 次例 現象을 展示 및 齋殿視하는 일만으로는 底邊의 原因을 把握할 수 없고 甚至於 的確한 原因 分析에 毁謗을 놓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現象을 展示하는 일 自體가 쓸모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現象은 展示를 통해 비로소 現象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現象-展示-現象의 循環을 통해 ‘말해진 것’으로서의 現象은 ‘말함’으로서의 現象으로 끊임없이 轉換된다.

    現象-展示는 장르的으로 보면 다큐멘터리와 親密하다. 다큐멘터리의 有用함은 ‘視野에로의 捕捉’이라는 그 機能的 特殊性에 起因한다. 勿論 이 ‘捕捉’은 그 안에 ‘戰時’를 胚胎하고 있는 ‘捕捉-展示’로서의 ‘捕捉’이다. 다큐멘터리 製作者의 役割이란 이런 것이다. 時空間에 피어있는 온갖 現象들 가운데 특정한 現象을 選擇하기-현상을 둘러싼 外物과의 境界를 定하고 現象과 얽혀있는 外物을 보기 좋게 除去하기-현상에 固有한 이름을 附與하고 展示用 프레임에 맞게 크기를 裁斷하기-관객이 드나드는 길목에 展示하고 觀客으로부터 外面받기. 다큐멘터리는 ‘捕捉’을 통해 日常으로부터 現象을 救出한다.

    그렇다면 픽션-映畫(以下 ‘映畫’)를 통한 ‘捕捉’은 可能한가? 映畫는 裁斷된 時空間에서 벌어지는 虛構의 事件을 프레임에 담는다. 映畫는 現象을 捕捉하지도 않고 捕捉된 現象을 展示하지도 않는다. 映畫는 現象을 模倣한다. 다큐멘터리가 捕捉해내는 데 失敗한 이미지를 再現해내고 다큐멘터리가 밀고 들어가지 못하는 領域을 想像的으로 構築한다. 이때 映畫가 構築하는 것은 ‘日常’이다. 다큐멘터리가 捕捉한 現象에서 마디마디 끊어져 있거나 一部가 脫却된 個人의 內密한 日常을 模倣을 통해 變容시켜 再組立함으로써 映畫는 現象으로부터 다시금 日常을 救出한다. 이제 日常은 ‘事態’의 地位를 獲得한다. 켄 老齒의 映畫는 ‘日常’을 ‘事態’로 지양시키는 끊임없는 試圖라고 要約될 수 있다.

    켄 老齒는 ‘보여주기’를 통해 日常을 再現한다. 日傭職 建築勞動者, 美化員, 失職者, 未婚母, 移民勞動者, 鐵道勞動者, 宅配技士의 至極히 平凡한 日常을 時間의 흐름에 따라 記述한다. 大部分의 쇼트가 登場人物의 일터와 일, 집과 家族, 食事와 對話를 보여주고 있을 程度로 켄 老齒의 日常에 對한 사랑은 至極하다. 켄 老齒의 映畫에서 葛藤은 이러한 日常의 持續이 깨지게 되는 時點에, 旣存의 日常을 維持하고자 하는 中心人物의 心理的 反作用으로서 提示된다. 집에 찾아와서 行悖를 부린 債權者를 찾아가 다투다 失手로 죽게 만들거나(레이닝 스톤, 1999), 失業給與 相談職員의 官僚的 態度에 火가 나 建物 外壁에 페인트로 迅速한 行政處理를 促求하는 글을 쓰거나(나, 다니엘 블레이크, 2016), 學業을 疏忽히 하고 停學을 當한 아들이 自身의 車 키를 숨겼다고 疑心해 뺨을 때리는(미안해요, 리키, 2019) 事件들은 모두 日常的 生存權을 威脅받은 個人이 取하는 一種의 反射作用이다.

    經營 效率化라는 名目으로 하루아침에 解雇 通報를 받고(네비게이터, 2001), 굶고 있는 家族을 먹여 살리고 동생을 就職시키기 위해 男子에게 몸을 파는(빵과 薔薇, 2002) ‘日常’은 映畫의 플롯 上에서 決코 ‘葛藤’이나 ‘危機’로서의 地位를 얻지 못한다. 켄 老齒의 主人公들은 숨 쉬듯이 生存에 對해 危機感을 느끼다가 到底히 견딜 수 없는 瞬間에 고통스럽게 숨을 참는 方式으로 自身을 向한 日常의 威脅에 反射的 抵抗을 드러낸다. 그러나 아들 셉의 뺨을 때린다고 리키의 빚이 줄어들 理 있겠는가(미안해요, 리키). 持續할 수 없는 숨 참기의 苦痛은 結局 主人公들을 다시 숨 쉬게 만들고 日常의 危機 속으로 그들을 몰아낸다.

    켄 老齒가 ‘보여주기’를 통해 意圖하는 最終的인 目標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보여주기’를 통해 드러난 人物들의 삶의 本質的 變革일 것이다. 그런데 켄 老齒는 <빵과 薔薇> 以後로는 그 目標에 對해 거의 말하지 않는다. 特히 最近 製作한 <나, 다니엘 블레이크>나 <未安해요, 리키>에서 그는 變革의 方向性에 對해서도, 變革의 可能性에 對해서도 沈默으로 一貫한다. 오히려 ‘當身이 選擇한 삶이 아니냐’며 苦痛받는 主人公에게 責任을 물을 뿐이다(미안해요, 리키). 다니엘은 結局 疾病 補助金을 받지 못한 채 心臟痲痹로 死亡하며(나, 다니엘 블레이크), 리키는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宅配 일을 하러 出勤한다(미안해요, 리키). 조금도 나아진 것은 없다. 켄 老齒는 우리에게 但只 보여주기만 한다.

    이러한 ‘보여주기’는 觀客의 ‘보기’와 對應한다. 본다는 것은 事態로부터 距離를 두고 벗어나 있음을 前提한다. 映畫가 觀客을 事態의 바깥으로 밀어내고 但只 ‘보기만 하라’고 指示할 때, 觀客이 끊임없이 겪게 되는 것은 바로 外部人-됨이다. 事態와 어떠한 接點도 없이 事態의 바깥에 存在하는 觀客은 映畫를 보는 것으로부터 어떠한 政治性도 志向性도 理念性度 獲得하지 못한다. 映畫가 提供하는 것은 오로지 事態뿐이기 때문이다. 켄 老齒는 映畫를 통해 觀客을 觀客(觀客)으로서 呼名할 뿐 다른 그 무엇으로도 呼名하지 않는다. 觀客은 그저 B-13이라는 座席番號로, 또는 abc123라는 ID로 指稱된다.

    한便, 主人公과 類似한 社會的 位置에서 삶의 危機를 겪는 觀客은 主人公의 삶에 感情移入함으로써 同質感을 느끼기도 한다. 自身이 映畫가 보여주는 事態의 當事者일 수도 있음을 豫感하면서 스스로 事態의 안에 들어가 있다고 錯覺하는 이 觀客은 그 瞬間 當事者性을 獲得하게 되는데, 말하자면 內部人-됨이다. 이때, 觀客은 事態의 바깥에 놓인 外部人의 位置에서 內部人으로 事態를 經驗하게 되는 狀況的 矛盾을 겪게 된다. 矛盾을 解消하고자 발버둥치는 觀客은 이내 ‘보기’가 自身에게는 애시당초 成立不可能한 前提였음을 깨닫게 되고, 自身이 處한 矛盾으로부터 ‘보기’의 不可能性을 演繹해낸다. 決코 事態의 外部人일 수 없는 當事者的 個人은 끊임없이 外部人의 位置로 밀려나는 狀況에서 벗어나기 위해, ‘보기’를 中斷하고 事態의 안으로 ‘들어가’ 이를 直接 마주하려는 解體-再組立의 欲求를 느끼게 된다. 이로써 켄 老齒는 呼名하지 않음으로써 呼名하는 意圖된 아이러니를 이끌어 낼 뿐 아니라 짝으로서의 ‘보기’를 잃어버린 ‘보여주기’는 더 以上 ‘보여주기’로 머무르지 않게 된다.

    2. 再現된 患部에는 苦痛이 있는가?

    켄 老齒는 映畫를 통해 삶을 變容敵으로 再現한다. 여기서 우리는 재현의 有效性에 對해 苦悶하지 않을 수 없는데, 말하자면 ‘再現된 患部에는 苦痛이 있는가’하는 問題이다. 넘어져서 살갗이 벗겨진 皮膚를 模寫한다고 해서 그 벗겨진 살갗에 깃든 苦痛까지 베껴낼 수는 없다. 勿論 그 再現된 患部를 보는 사람은 間接的인 苦痛을 느낄 수도 있다. 外傷 患者의 寫眞이나 映像을 보면서 그 苦痛을 想像할 수 있듯이 말이다. 그렇지만 外傷 患者의 寫眞이나 映像은 再現된 患部가 아니라 眞짜 患部를 映像技術로 複製한 ‘複製된 患部’이고 再現된 患部는 胎生的으로 거짓인 患部이므로 둘에 對한 觀察者의 間接感覺을 同一한 方式으로 解釋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다큐멘터리와 映畫의 再現 方式에 對한 問題提起이기도 하다.

    模倣은 眞實을 담지할 수 있는가? 얼마나 眞實과 가까울 수 있는가? 映畫가 日常을 再現하는 方式은 決코 眞實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리 實在를 反映한다고 하더라도 演技와 小品과 人工照明에 依해 만들어진 虛構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映畫에 늘 따라붙는 質問은 虛構를 통해 眞實을 暴露하는 것의 有效性이다. 이러한 質問은 脫-隱蔽된 眞實을 그 實證 不可能性을 트집잡아 재-은폐한다. 그려진 三角形은 三角形이 아니며 그려지지 않은 三角形은 存在하지 않으므로 三角形의 內角의 合이 直角 두 個와 같다는 것은 決코 實證할 수 없다는 主張과 全혀 다르지 않은 方式으로 映畫의 眞實性-寫實性-은 그 有效性을 疑心받는다.

    設令 이러한 詭辯的 質問을 못 들은 척 넘겨버린다고 하더라도, 이 時代의 觀客들은 映畫 속 主人公의 連續된 日常이 크레딧이 끝남과 同時에 ‘파티’와 ‘인터뷰’로 突變한다는 事實을 안다. 리키 役의 크리스 히親은 더 以上 하루 100파운드 남짓을 버는 宅配技士가 아니다. 그는 켄 老齒 監督의 選擇을 받았다는 履歷을 가지고 엔터테인먼트 産業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케이티는 더 以上 돈이 없어 生理帶를 훔치는 未婚母가 아닌 드레스를 입고 인터뷰에 應하는 헤일리 스콰이어로 살아갈 것이다. 觀客은 이 事實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처럼 觀客이 再現된 患部의 非-存在性을 認識할 때, 映畫的 敍事는 寫實性을 잃고 만다. 리키가 더 以上 리키가 아니라 크리스 히親任을, 케이티가 더 以上 케이티가 아니라 헤일리 스콰이어임을 認識할 때, 觀客은 人物의 實在性을 否定하고 나아가 敍事의 實在性마저 否定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 地點에서, 內部人으로 呼名된 觀客의 介入이 始作된다. ‘보기’가 再現된 患部를 非-存在로 명명할 때, ‘들어가기’는 虛構性이 暴露된 敍事가 빠져나간 자리에 內部人-된-관객의 實存을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再現된 患部가 除去된 자리에는 생생하게 力動하는 內部人-된-관객의 患部가 드러난다. 크리스 히親李 빠져나간 리키는 韓國의 200萬 特殊雇傭勞動者 觀客의 內部人-됨으로 生氣를 얻고 헤일리 스콰이어의 케이티는 이제 2萬 名의 未婚母 觀客의 삶으로 다시 빚어져 只今-여기의 케이티로 實在한다.

    再現된 患部는 그 虛構性으로 인해 不正되지만, 그것이 不正된 자리에 그러한 患部를 몸에 지닌 內部人-된-관객의 證言과 悲鳴을 채워 넣음으로써 再現된 患部는 複製된 映像이 提示하는 ‘複製된 患部’보다 더욱 事實的인 患部-性을 獲得하게 된다. 켄 老齒의 作業은 이러한 不正의 辨證法을 통해 ‘再現된 苦痛’의 存在性을 確保하는 데 成功한다. 여기까지 到達하면 ‘再現된 患部가 果然 有效한 보여주기인가’ 하는 물음은 더는 問題가 되지 않는다.

    3. 二重의 遮斷壁

    켄 老齒의 映畫에는 外部人으로서의 觀客을 投射하는 人物들이 반드시 配置되어 있다. 이들은 主人公의 아픔에 共感하면서 主人公에게 感情的 慰勞를 건넨다. 雇傭센터에 訪問한 다니엘이 複雜한 申請 節次에 어지러움을 呼訴하자 멀리서 다가와 물을 건네는 앤이나(나, 다니엘 블레이크), 도움이 많이 必要한 老人을 追加 手當 없이 더 돌봐주면서도 原則과 現實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애비에게 괜찮냐며 말을 건네는 버스停留場의 老年 女性(未安해요, 리키)이 이런 사람들이다. 이들은 內部人-됨에 失敗한 觀客이 그저 ‘보기’로서 主人公의 삶을 觀察할 때 外部人-된-관객의 마음속에 생겨나는 同情과 憐憫을 投射한 存在들로서 觀客을 代身해 主人公과 接觸한다.

    그러나 이러한 外部人的 人物들은 決코 內部人-됨에 成功하지 못하고 限界를 맞닥뜨린다. 다니엘의 인터넷 使用을 돕던 앤은 民願人에게 過度한 도움을 提供하지 말라는 上司의 制止로 인해 더는 다니엘을 돕지 못하고 자리로 돌아가 버리고(나, 다니엘 블레이크), 애비에게 말을 건넸던 老年 女性은 自身이 탈 버스가 오자 애비를 두고 떠난다(미안해요, 리키). 이들은 實質的으로 다니엘과 애비에게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고 課題는 다시금 오롯이 다니엘과 애비에게 남겨지게 된다.

    이와 같은 裝置는 外部人-된-관객과 內部人-된-관객 사이에 二重의 遮斷壁을 세운다. 첫째는 敍事 內에 外部人的 人物을 配置함으로써 外部人-된-관객이 敍事 內로 ‘들어가려는’ 試圖를 遮斷한다. 內部人-된-관객은 主人公에게 感情移入하고 그들의 삶으로부터 當事者性을 獲得함으로써 敍事 內로 ‘들어가는’ 反面, 外部人-된-관객은 이러한 當事者性을 獲得하는데 失敗한 탓에 自身이 느끼는 憐憫과 憤怒의 感情을 解消할 다른 手段을 찾게 된다.
    萬若 敍事 內에 外部人的 人物이 存在하지 않는다면 外部人-된-관객은 이를 敍事 外的으로 解消하고자 하는 欲求를 느끼게 되고 이는 映畫의 바깥에서 內部人-된-관객에 對한 同情과 憐憫으로 나타나거나 또는 이를 둘러싼 社會制度에 對한 憤怒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外部人-된-관객은 結局 內部人-된-관객과 階級的 利益을 달리하는 者들이기에 그들의 憐憫이나 憤怒가 實踐的 變革을 惹起하는 最終 局面이 오면 그들은 必然的으로 階級的 利益에 따라 內部人-된-관객과는 相反된 選擇을 할 수 밖에 없다. 그 結果, 變化는 遲延되고 動力은 喪失된다. 켄 老齒는 이런 狀況을 너무나도 많이 겪어왔기에 敍事 內에 外部人的 人物을 配置시킴으로써 外部人-된-관객의 憐憫과 憤怒를 그 人物을 통해서 解消시켜 버린다. 卽, 外部人-된-관객이 하고 싶은 말과 行動을 敍事 內의 外部人的 人物이 代身하게 만들어 外部人-된-관객이 憤怒를 누그러뜨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微笑짓게 한다.

    外部人-된-관객의 內部人-된-관객 方向으로의 接近을 遮斷한 뒤, 켄 老齒는 敍事 내 外部人的 人物의 介入이 主人公의 삶을 바꾸는 데 失敗하게 만들어버림으로써 主人公에 對한 外部로부터의 도움의 可能性을 一掃한다. 이것이 바로 두 番째 遮斷壁이다. 이는 內部人-된-관객이 外部人-된-관객에게 도움을 要請하거나 몸을 依託하고 協力을 바람으로써 變化를 이끌어 낼 수 없음을 뜻한다. 켄 老齒는 이렇게 二重의 遮斷壁을 세움으로써 外部人-된-관객과 內部人-된-관객 사이의 接觸을 兩方向에서 모두 끊어버린다. 그리고 內部人-된-관객으로 하여금 오로지 依支하고 協力할 수 있는 이는 自身과 같은 階級的 利益을 가진 ‘當事者들’ 뿐임을 認識하게 만든다.

    二重의 遮斷壁은 ‘보여주기’라는 戰略을 擇한 켄 老齒의 敍事 傳達方式과도 脈絡을 같이 한다. ‘보여주기’와 ‘二重의 遮斷壁’이 結合한 자리에는 숨겨진 마지막 遮斷壁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것은 主人公과 內部人-된-관객 사이의 遮斷壁이다. 再現된 患部가 除去된 자리에 內部人-됨을 통해 自身의 患部를 드러낸 內部人-된-관객은 이제 主人公의 자리가 비어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主人公에게 感情移入함으로써 當事者性을 獲得한 觀客은 主人公이 떠난 자리에 自己 自身이 들어앉아 있음을 보게 된다. 이때, ‘보여주기’는 主人公이 떠난 자리에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다. 未來도 提示하지 않고 希望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 內部人-된-관객이 받아 안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內部人-된-관객은 敍事가 사라진 자리에서 自身의 患部를 直視한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오직 나의 患部로서.

    4. 映畫的 實踐의 可能性

    켄 老齒는 本人의 政治的 立場에 對한 映畫的 實踐의 可能性을 念頭에 두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아니, 언뜻 보기에는 그렇게 보인다. 現象의 背面을 積極的으로 스크린에 등장시키지 않음으로써 映畫는 二重의 敗北를 겪는데 이에 對해 켄 老齒가 取하는 措置라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二重의 敗北란 첫째는 映畫의 內的 敗北이다. 켄 老齒의 映畫에서는 登場人物의 삶이 敍事的으로 어떠한 變化도 겪지 못하고 그 狀態 그대로 原點으로 돌아가서는 다시 이어진다. 밥은 失職者로 登場해서 映畫가 끝날 때까지 제대로 된 職場을 求하지 못한다(레이닝 스톤). 다니엘은 映畫 初盤에 疾病 補助金 申請이 棄却되었다는 便紙를 받았는데 後半部까지 疾病 補助金을 받지 못한 채 結局 心臟痲痹로 死亡하고, 케이티는 제대로 된 職業을 갖지 못한 未婚母로 살아간다(나, 다니엘 블레이크). 리키는 빚을 내서 運送用 밴을 購入해 熱心히 일하는데, 일 때문에 家庭에 不和를 일으키고 몸을 다치면서도 돈을 벌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밴을 몰고 일을 나간다(미안해요, 리키).

    두 番째는 映畫의 外的 敗北이다. 映畫가 開封하고 宅配技士의 勞動環境이나 社會 制度가 바뀐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事實이 이를 말해준다. 映畫를 통해 敍事 內의 내러티브的 승리도 成就하지 못하고 敍事 外部의 媒體-實踐的 승리도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事實에서 承認되는 二重의 敗北는 켄 老齒의 映畫가 果然 實踐의 可能性을 膽智하고 있는지 疑問을 품게 만든다. 實踐의 可能性이 胚胎되어 있지 않은 映畫라면 그 映畫를 통해 그는 果然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애初에 무엇을 하려고 했는가?

    켄 老齒는 끊임없이 敗北를 만들어내는 監督이다. 그는 最善을 다해서 敗北를 創造해낸다. 數百 名의 스탭이 主人公 몇 名을 이中, 三重으로 敗北하게 만들기 위해 人生을 걸고 時間을 쏟는다. 켄 老齒는 있는 힘을 다해 主人公을 넘어뜨린다. 主人公이 屬한 家庭과 階層과 社會를 넘어뜨린다. 最善을 다해서 臟器 말을 定해진 位置에 가져다 놓고 넘어뜨리는 作業. 켄 老齒의 映畫는 多分히 意圖的으로 이러한 作業-넘어뜨림-을 遂行한다. 말이 決코 바로 설 수 없는 울퉁불퉁한 말판으로 그것을 있는 힘을 다해 끌고 와 바로 그 자리에 넘어뜨리는 것. 넘어짐을 記憶하고 記錄하는 일. 그 자리, 그 瞬間을 記憶하는 일. 켄 老齒는 말을 넘어뜨려 놓음으로써 ‘다시 세울 수 있음’을 불러낸다. 말을 끌고 와 넘어뜨리는 過程은 언젠가 그 자리에서 말을 다시 바로 세울 수 있음을 內包한다. 卽 ‘다시 일으킴’을 ‘넘어뜨림’의 안티-테제로 召喚해 ‘넘어뜨림’의 內部에 트로이 木馬처럼 심어놓는 것이다.

    映畫는 다시 일으킴을 意圖的으로 猶豫함으로써 每番 말이 넘어진 자리와 時間을 말판에 새긴다. 넘어진 말을 통해 觀察者가 언젠가 말판의 울퉁불퉁함을 認識해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繼續 말을 갖고 와서 넘어뜨리고 그것을 바로 세우려는 試圖를 遲延시킨다. 말을 바로 세우려는 試圖는 말판의 울퉁불퉁함을 隱蔽하고 ‘다시 일으킴’의 失敗를 말을 바로 세우려는 者의 個人的 敗北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켄 老齒는 말을 바로 세우려 하지 않는다. 繼續해서 새롭게 넘어뜨릴 뿐이다. 넘어뜨림으로써 말판의 울퉁불퉁함을 사람들에게 暴露하고자 한다. 그리고 누구도 함부로 말판을 뒤집어엎거나 숨길 수 없도록 그 자리에 있는 그대로 남겨 둔다.

    4. 켄老齒를 記憶하기

    켄 老齒의 映畫的 實踐은 完結的이지 않다. 이것은 그가 스스로 英雄이 되기를 拒否한다는 뜻이고, 連帶的 實踐의 希望을 품고 있다는 뜻이며, 누군가 울퉁불퉁한 말판을 고쳐서 말을 일으킬 수 있는 자리를 만들게 될 것이라고 깊게 確信하고 있다는 뜻이다. 켄 老齒는 映畫를 통해 自身의 實踐이 그의 世代를 넘어 以後 世代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믿음은 每番 最善을 다해 말을 넘어뜨리는 그의 映畫作業을 통해 분명하게 읽어낼 수 있다.

    켄 老齒와 그의 映畫를 사랑하는 觀客으로서 해야할 일은 한가지다. 그를 記憶하는 것. 그가 넘어뜨린 말을 記憶하는 것. ‘內部人-됨’을 통해 말판으로 ‘들어가서’ 그 空間과 그 時間에 나 自身을 넘어뜨리는 것. 내가 넘어져 있음을 記憶해내는 것. ‘다시 세울 수 있음’을 記憶해내는 것. ‘外部人-된-관객’은 遮斷壁 너머로 ‘보기’만 할 뿐이고 ‘內部人-된-관객’은 自身의 患部를 드러내놓고 죄다 ‘넘어져’ 있을 뿐이라는 事實을 記憶해내는 것. ‘다시 일으킴’이란 곧 ‘스스로 다시 일어남’이자 ‘스스로 다시 일어나자고 소리침’이며 ‘內部人-된-관객-들’의 ‘다같이 다시 일어남’임을 記憶할 것.

    21世紀 韓國 社會에서 無數한 ‘넘어짐’이 目擊된다. 雇傭不安, 劣惡한 勤務環境, 過度한 勞動時間으로 곳곳에 必然的인 絶望이 도사리고 있다. 죄다 ‘넘어져’ 있는 곳에서 自身이 넘어져 있다는 事實조차 認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잘리고 베이고 치이고 쓰러지고 사라지는 삶을 겪어낸다.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는 다시 일어나자고 소리쳐야 한다. 다시 일어나자고 소리치려면 내가 넘어져 있다는 것을 認定해야 한다. 내가 暫時 쭈그려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져 버렸음을 알기 위해서는 피가 흐르는 患部를 直視해야 한다.

    켄 老齒를 記憶한다. 그가 넘어뜨린 말들이 다시 일으켜 세워지는 날이, 그의 希望과 確信이 現實이 되는 그날이 멀지 않았음을 敢히 豫感해본다.
    최철훈

    최철훈

    1991年 釜山 出生

    서울대 電氣情報工學部 卒業

  • 김시무 映畫評論家(國際映畫批評家聯盟 韓國本部 會長)

    ‘켄 老齒-映畫的 實踐의 可能性’을 읽고 느낌이 왔다. 모처럼 제대로 된 批評을 만난 것 같았다. 다큐멘터리는 現象-展示, 卽 現象을 통해서 現實을 드러내는 것이 可能한 장르라고 한다면 픽션映畫(劇映畫)는 現象을 模倣한다. 켄 老齒 監督은 逆說的이게도 劇映畫를 通해서 現象-展示를 追求해 왔다. 그렇다면 어떻게 映畫的 實踐이 可能한가. 그는 보여주기를 통해서 日常을 再現하고, 再現된 患部를 통해 苦痛을 보여주려 한다. 이를 위해서는 二重의 遮斷 壁이 必要하다. 監督은 量子의 觀客 사이에 遮斷 壁을 設置해 主人公의 삶에 介入하는 것을 막는다. 그리하여 그의 映畫는 두 番의 敗北를 거칠 수밖에 없다.

    켄 老齒의 映畫에서 遮斷 壁 內의 登場人物들은 願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첫 番째 敗北다. 또 그의 映畫가 再現하고 있는 外的 現實은 如前히 바뀐 것이 없다. 遮斷 壁 너머의 觀客은 그저 傍觀만 할 뿐이다. 두 番째 敗北다. 이처럼 映畫的 實踐은 늘 未完으로 남는다.

    그렇다면 왜 그는 映畫를 만들고 있는 것일까. 그는 二重의 遮斷 壁 속에서 失敗를, 卽 無數한 넘어짐을 記錄하고 그저 暴露할 뿐이다. 그리하여 그의 映畫를 사랑하는 觀客이 해야 할 일은 한 가지인데, 그를 記憶하는 것이다. 이처럼 要約할 수 있는 評者의 글에서 본 審査者는 켄 老齒의 映畫的 實踐에 對한 새로운 解釋을 읽을 수 있었다. 이밖에도 映畫 ‘미나리’와 ‘노매드랜드’ 等을 다룬 몇 篇의 뛰어난 평문들度 있었으나 이 글의 緻密性을 넘어서기에는 多少 不足했다고 判斷했다.


  • 최철훈

    최철훈

    1991年 釜山 出生

    서울대 電氣情報工學部 卒業

    돌이 던져졌다
    물결이 일렁였고
    그것을 잠재우기 위해
    어리석게도 나는
    슬픔을 떠올렸다

    映畫는 各自의 方式으로 時代를 反映한다. 나는 켄 老齒의 方式이 좋았다. 좋아서 더 봤고 더 읽었다. 읽다 보니 쓰고 싶어졌다. 쓰는 瞬間엔 호기로웠고 쓴 끝은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原稿를 보냈다. 그건 켄 老齒를 記憶하기 위한 나만의 작은 意識(儀式)이었다.

    當選 消息은 잔잔한 물 위에 던져진 조약돌처럼 나의 日常에 달려와 부딪쳤다. 미처 對備하지 못한 부딪침이라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달라진 것은 없다. 나의 日常은 變함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日常 속에서 나는 켄 老齒의 映畫가 남겨준 課題를 하나씩 풀어갈 것이다.

    拙稿를 손에 쥐고 漠漠하다 여기셨을 審査委員의 勞苦에 感謝드린다. 眞珠알 같은 瞬間을 함께한 親舊와 不敏한 弟子를 참고 기다려주시는 先生님께도 感謝드린다. 무엇보다도 언제나 내 삶을 應援해주시는 父母님께 깊이 感謝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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