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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年 獨島를 最初로 測量한 박병주 先生|新東亞

1953年 獨島를 最初로 測量한 박병주 先生

“우리는 목숨 걸고 獨島를 調査했다”

  • 이정훈│東亞日報 出版局 專門記者 hoon@donga.com │

    入力 2009-01-05 15: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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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政府 指示로 始作된 韓國山岳會의 獨島 調査
    • 平和線 設置로 핫이슈가 된 獨島 領有權 問題
    • 豫告 없이 4年 만에 獨島를 다시 爆擊한 美軍
    • 海上 談判 爲해 巡視船 타고 나온 日本 國會議員
    • 대나무 폴을 들고 巖壁을 탄 韓國山岳會員들
    • 리앙쿠르 때문에 獨島 標石 撤去한 慶北道
    • 獨島에는 포퓰리즘을 上陸시키지 마라
    1953년 독도를 최초로 측량한 박병주 선생

    1953年 10月14日 獨島에 上陸한 韓國山岳會가 人夫들을 시켜 뽑아내는 日本 領土 標柱(標柱).

    지난 몇 달 사이 記者는 ‘週刊東亞’를 통해 慶尙北道가 復元했던 韓國山岳會의 獨島 領土 標石을 慶尙北道가 破壞해버린 事件의 顚末을 報道했다. 그런데 이 問題와 關聯해 慶尙北道는 勿論이고 國民도 알지 못하고 있던 놀라운 事實이 밝혀졌다. 慶尙北道가 復元했다 破壞해버린 이 標石은 韓日會談을 앞둔 政府가 獨島의 實體를 알기 위해 最初로 獨島를 調査하는 過程에서 設置한 것이라는 證據와 證言이 나온 것이다.

    이러한 事實은 當時 獨島에 갔던 박병주(朴炳柱·83, 弘益大 工大 名譽敎授, 都市計劃 專攻) 先生이 2008年 7月 國會 獨島資料室에 寄贈한 資料와 그의 證言을 통해 確認된 것이다. 第2次 世界大戰을 일으켰다 敗亡한 日本이 美軍政을 받다 1952年 4月28日 獨立한 것은 잘 알려진 事實이다. 以後 日本은 더 以上 戰爭을 하지 않는 平和國家임을 證明하기 위해 植民地로 삼았던 韓國을 相對로 國交를 回復하기 위한 會談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다케시마(竹島)는 그들의 固有 領土라고 主張했다. 그런데 日本을 相對로 軍政을 펼친 聯合軍 最高司令部는 1946年 6月22日, 指令 第1033號로 日本 漁民과 日本 漁船의 操業限界線을 設定했다. 聯合軍 最高司令官 이름을 따서 ‘맥아더 라인’으로 불린 이 線 안에 獨島는 包含되지 않았다. 이 指令 第3項에는 ‘日本 船舶과 乘務員은 다케시마 12海里 以內에 接近하지 못한다’고 돼 있었으므로 日本人들은 獨島에 接近할 수 없었다.

    1953년 독도를 최초로 측량한 박병주 선생

    박병주 弘益大 工大 名譽敎授<br>한양대 建築學科 卒業, 홍익대 名譽工學博士<br>釜山工高 土木과 敎師, 홍익대 都市計劃學科 敎授, 弘益大 工大 學長, 弘益工業專門大學長, 홍익대 大學院長 歷任<br>中央都市計劃委員, 測量協會會長, 國土開發硏究院 理事長 歷任

    第2次 世界大戰 直後 韓國도 3年間 美軍의 軍政을 받았다. 그러나 韓國에 있던 美軍은 獨島에 對해 어떤 制約도 加하지 않았기에 韓國 漁民들은 獨島 隣近 海域에서 자유롭게 操業했다. 이러한 現實에 對해 日本의 一部 識者層들은 “다케시마는 日本의 領土”라고 主張했지만, 韓國人들은 美國이 韓國의 獨島 領有權을 認定한 것으로 理解하고 고마워했다.

    이런 가운데 第2次 世界大戰 體制를 끝내고 平和體制로 들어가는 샌프란시스코 講和條約이 締結됐다. 이 條約 發效日인 1952年 4月28日 美國은 日本에 對한 軍政을 끝내니 이로써 맥아더 라인의 效力도 喪失된다. 日本人들은 獨島에 上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자 李承晩 大統領이 對應策을 마련했다.



    日本 獨立 3個月 前인 1952年 1月28日 日本 漁船이 絶對로 넘어와서는 안 되는 ‘平和線(一名 李承晩 라인)’을 宣布하고, 이 線 안에 獨島를 집어넣은 것이다. 그로 인해 韓日會談이 열리면 獨島는 對日(對日)請求權 等과 함께 뜨거운 감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獨島를 갖고 입씨름을 하려면 獨島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當時 韓國은 釜山으로 首都를 옮겨놓고 6·25戰爭을 치르느라 獨島 情報가 全無했다.

    最初로 領土 表紙 設置

    美軍政을 받던 時節 韓國은, 當代의 엘리트들이 모여 있던 朝鮮山岳會를 통해 獨島 領有權을 밝힌 적이 있었다. 朝鮮山岳會 會員 63名이 朝鮮海岸警備隊에서 提供한 軍艦 ‘大戰號(大田號)’를 타고 1947年 8月20日 獨島에 上陸해, 漢字로 ‘朝鮮 慶尙北道 鬱陵郡 南面 獨島’라고 쓴 나무말뚝을 박아놓고 돌아온 것이다.

    1年 後 韓國은 獨立 政府를 세우고 그로부터 3年 後 6·25라는 큰 戰爭을 맞았다. 戰爭 初期 서울을 뺏긴 韓國은 仁川上陸作戰으로 서울을 되찾아 9月28日 還都(還都)했으나, 中共軍의 參戰으로 1951年 1月4日 서울을 내주고 다시 釜山으로 首都를 옮겼다. 그리고 3個月 뒤인 3月15日 韓國 陸軍 1師團이 서울을 財數服했으나 隣近 地域에서 攻防戰이 繼續돼, 1953年 7月27日 休戰할 때까지 繼續 釜山을 首都로 使用했다. 서울路 首都를 다시 옮긴 것은 1953年 8月15日이었다.

    釜山을 數도 삼아 戰爭을 치르던 때 獨立 日本은 韓國의‘뒤통수’를 때렸다. 1952年 6月 日本은 水産靑果 海上保安廳 公務員을 獨島에 上陸시켜 操業 中이던 우리 漁民들을 내쫓고 ‘다케시마는 日本 領土’라는 內容을 담고 있는 標柱(標柱·말뚝)를 박아놓고 돌아간 것이다. 그로 인해 鬱陵島가 발칵 뒤집혔다. 漁民들은 日本의 領土 標柱를 뽑아, 當時 鬱陵島에서 가장 큰 政府機關이던 鬱陵警察署 앞에 갖다놓고 對策 마련을 要求하는 籠城을 벌었다.

    1953년 독도를 최초로 측량한 박병주 선생

    獨島에 上陸해 最初 測量을 했던 1953年 10月의 調査를 위해 그해 7月에 作成한 計劃書. ‘비(秘)’字가 쓰여 있고 外務部·國防部 等이 後援했다고 적혀 있다.

    政府 支援과 豫算으로 獨島 調査

    이러한 事實이 報告되자 平和線을 宣布했던 政府는 對策을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戰爭으로 精神이 없었기에, 1947年 獨島를 調査했던 朝鮮山岳會의 後身 韓國山岳會에 그 일을 맡기기로 했다. 韓國山岳會에 獨島 領有權을 分明히 하는 措置를 取하고 韓日會談에 對備해 獨島를 調査해달라고 한 것이다. 韓國山岳會는 政府로부터 豫算을 支援받아 獨島와 함께 鬱陵島度 調査하기로 하고, 鬱陵島-獨島 學術調査團을 꾸렸다.

    朴 先生이 保管해온 資料 中에는 이 調査에 들어간 豫算을 밝힌 것도 包含돼 있다. 韓國山岳會는 政府 豫算 2957萬9000원에 韓國山岳會 會費 300萬원을 더한 3257萬9000원으로 鬱陵島·獨島 學術調査를 準備했다. 政府에서는 문교부와 外務部 國防部 商工部 公報處가 後援했다. 主題가 主題이니만큼 韓國山岳會는 各 分野 最高 專門家를 投入하려고 했다.

    地質·鑛物·地形·測地·動物·植物·水産·海洋·農學·林學·醫學·歷史·地理·고고(考古)·方言(方言)·民俗·社會經濟·步道(報道)·文人(文人) 等으로 調査班을 만들고, 여기에 韓國山岳會 會員으로 있는 그 分野 專門家를 넣으려고 한 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重要한 것은 獨島의 實體를 보여줄 ‘測地(測地· 測量)反’이었다.

    1952年은 展示인지라 서울에 있던 大學校는 全部 釜山에 내려와 있었다. 韓國山岳會는 後날 建築家로 이름을 날린 서울大 金重業 敎授(建築科, 작고)와 漢陽大 박학재(土木과, 작고) 敎授를 側地盤으로 選拔했다. 그러나 實際 測量에는 서툴렀던 두 敎授는 釜山工高 土木課長 兼 敎師인 박병주氏를 데려가자고 했다.

    測量專門家로 獨島 調査團 參與

    그리하여 朴 先生은 韓國山岳會에 加入해 會員이 되고, 가장 重要한 獨島 測量을 맡게 되었다. 朴 先生은 日本에서 測量技術을 배웠다. 1925年 釜山에서 태어난 그는 日本에 있던 누나의 周旋으로 1941年 도일(渡日)해, 官立 고베(神戶)工業專門學校 夜間部 土木科를 다니면서 낮에는 測量設計會社에서 일했다. 1945年 歸國해서는 철도국에 勤務하며 測量·設計 業務를 遂行하다 1948年 釜山工高 土木과 敎師가 되었다.

    6·25 戰爭이 일어나자 유엔은 國際聯合韓國復興團(UNCRA)을 만들어 다양한 支援을 했다. 이때 UNCRA로부터 最新 測量裝備를 支援받은 곳은 제대로 된 學校施設을 갖고 있던 釜山工高였다(부산공고는 그 後 釜山工業專門學校를 거쳐 부산공업대學이 됐다가 1996年 釜山水産大學과 合倂해 부경대學校가 됐다).

    朴 敎師와 두 敎授는 우연한 일을 契機로 서로 알게 되었다. 1952年 봄 조병옥·場面 博士가 이끄는 忠武公記念事業會는 美國 록펠러財團에서 支援한 돈으로 서울 수유리에 忠武公 李舜臣 記念公園을 만든다는 計劃을 세웠다. 公園을 만들려면 現場 測量부터 해야 한다. 事業會는 金重業-박학재 敎授와 박병주 敎師에게 基礎調査를 맡겼다. 그리하여 세 사람은 警察의 에스코트를 받아가며 民間人 出入禁止 地域이었던 서울 수유리 一帶를 踏査하고 돌아왔다. 이런 因緣이 있었기에 두 敎授는 바로 朴 敎師를 推薦한 것이다.

    約款 27歲에 國家的으로 重要한 獨島를 調査하게 된 것에 朴 敎師는 크게 鼓舞됐으나 바로 苦悶에 빠졌다. 測量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測量 폴(pole)을 잡아줘야 거리와 角度를 잴 수 있는데 敎授들에게 그 일을 付託할 수는 없었다.

    이 苦悶은 우연한 일로 풀렸다. 金重業 敎授가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리는 國際藝術街會議에 參加하게 된 것이다. 金 敎授가 出張을 理由로 不參한다고 하자 朴 敎授도 “그렇다면 나도 빠지겠다”고 해, 朴 敎師는 側地盤 班長이 돼 같은 學校 土木科의 先輩 敎師인 김기발氏를 調査團에 끌어들였다.

    7月에 始作된 調査團 構成은 여러 次例 修正을 거쳐 9月에야 確定됐다. 1947年 朝鮮山岳會의 調査 때 海岸警備隊가 陷穽을 提供했으니 이番에는 海軍이 배를 提供해줄 것으로 期待됐다. 그러나 이때는 戰爭 中이라 海軍은 美軍의 統制를 받고 있었다. 獨島 領有權을 둘러 싼한일 葛藤을 잘 알고 있던 美 軍事顧問團은 海軍에 陷穽을 提供하지 말라고 指示 했다.

    그리하여 교통부 해운국 所屬의 燈臺 巡視船인 ‘진남호(305t)’가 動員돼, 調査團 38名을 싣고 9月17日 午前 10時20分쯤 釜山 魚市場 埠頭를 出發했다. 海軍은 배를 提供하지 않았지만 國防部가 後援하는 行事이니만큼 진남호에 對한 統制를 맡기로 했다. 海軍은 ‘當然히’ 진남호의 前 日程을 美軍에 通報했다.

    “나의 歷史는 記錄되기 始作한다”

    이튿날 아침 진남호는 鬱陵島 道童港에 入港해 鬱陵警察署長의 迎接을 받았다. 그리고 9月22日 새벽 5時30分 道童港을 出港해 獨島로 갔다. 朴 先生은 釜山에서 배를 타자마자 日記 形式으로 메모를 始作했다. 朴 先生이 作成한 9月22日子 메모에는 ‘오늘부터 나의 歷史는 記錄되기 始作한다’라는 文句가 적혀 있었다.

    그의 메모에 따르면 調査團員들이 뱃멀미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다 누군가가 “獨島가 보인다”고 외쳐, 船室에 누워 있던 調査團員들이 甲板으로 올라가 獨島를 구경했다. 그런데 暫時 後 搖亂한 爆音과 함께 戰鬪機 4臺가 날아와 獨島를 爆擊하기 始作했다. 朴 先生의 메모帳에는 ‘獨島에서 2km 떨어진 곳에 배가 到着했을 때 4代의 飛行機가 날아와 獨島를 25番 爆擊해, 우리 배는 午後 12時40分 航路를 돌려 午後 6時쯤 鬱陵島에 到着했다’고 적혀 있었다. 그의 回顧다.

    “戰鬪機로 보이는 飛行機가 떨어뜨린 爆彈이 獨島에 맞으면 큰 불꽃이 튀겼고, 바다에 떨어지면 곧 큰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뱃멀미에 시달리다 獨島가 보인다고 하여 甲板에 올라왔던 우리는 그 光景에 啞然失色했다. 나는 내가 할 일을 깨달았다. 손목時計를 차고 있었지만 흔들리는 배와 멀미, 그리고 爆擊 때문에 時計를 볼 餘裕가 없었다. 마침 홍종인 調査團長이 우리 배의 位置를 確認하라고 했다.

    當時 나는 學校에서 소리를 듣고 거리를 推算하는 陰測(音測)도 講義했으므로, 陰測 能力을 갖고 있었다. 獨島에 爆彈이 떨어져 불꽃이 튀면 精神을 차리고 數字를 셌는데, 20을 세고 나니 ‘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1秒에 셋을 세니, 20을 셌으면 6秒를 넘긴 것이 된다. 소리는 秒速 340m로 이동하니, 6秒면 2040m란 計算이 나온다.

    그리고 羅針盤을 보니 獨島가 北東쪽으로 나오기에 後날 調査團은 獨島 南西方 2km 海域에 進入했을 때 4代의 戰鬪機가 獨島에 25番 爆彈을 떨어뜨리는 것을 目擊했다는 結論을 내리게 되었다.”

    참으로 異常한 일이었다. 海軍은 調査團을 태운 진남호가 언제 獨島에 到着할 것인지를 事前에 美軍에 알렸다. 그런데 진남호가 獨島에 到着할 時間에 正確히 戰鬪機가 날아와 獨島를 爆擊했다. 朴 先生은 “이 爆擊에 놀란 진남호 船長은 卽時 釜山에 있는 海軍本部로 無電을 보냈으나, 應身(應信)李 오지 않았다”고 證言했다.

    爆擊으로 唐慌한 渦中이었지만 朴 敎師는 협각法(夾角法)으로 獨島에서 가장 높은 西道의 높이를 略測(略測)했다. 그는 팔을 쭉 뻗었을 때 自身의 눈에서 손끝까지의 距離가 61cm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손끝에 잡은 볼펜 밑동을 바다가 보이는 데 세우고, 볼펜에 서도 꼭대기가 있는 地點을 表示한 後, 그 높이를 재는 것이다. 높이는 4cm로 나왔다. 그의 팔 길이 61cm가 진남호에서 서도(독도)까지의 距離 2km라면, 볼펜으로 測定한 4cm는 130m라는 計算이 나온다.

    釜山을 떠나기 前 그는 日本 資料에서 獨島 頂上(書道)의 높이가 海拔 115m란 記錄을 본 적이 있었다. 115m와 그가 目測(目測)韓 130m는 얼추 비슷하다. 그는 진남호가 獨島에서 2km쯤 떨어진 곳에서 獨島 爆擊 場面을 目擊했다는 보다 確實한 判斷을 갖게 되었다

    美軍機의 연이은 獨島 爆擊

    6·25戰爭이 한창이던 1952年 9月22日 獨島를 爆擊한 戰鬪機는 어느 나라 所屬이었을까? 韓國과 北韓,日本, 蘇聯 空軍은 한 番도 獨島를 爆擊한 적이 없었고 獨島를 爆擊할 理由도 없다. 그러나 美國 空軍은 달랐다. 現在 美 空軍은 韓國에 7共軍, 日本에 5空軍을 두고 있지만 6·25戰爭 때는 7空軍이 없었다. 6·25戰爭 때는 日本에 있는 5空軍이 日本과 韓半島 作戰을 專擔했다. 이 5空軍이 獨島를 爆擊演習場으로 使用했다.

    日本에 있던 聯合軍司令部는 맥아더 라인이 宣布되고 1年餘가 지난 1947年 9月 獨島를 美 空軍機와 美 海軍旗를 위한 爆擊演習場으로 指定했다. 그리고 1年 뒤인 1948年 6月8日 獨島에서 悽慘한 事故가 일어났다. 오키나와에서 離陸한 美 5共軍 所屬 B-29 編隊가 獨島에서 高空爆擊을 練習해, 18隻의 배를 타고 나와 操業하고 있던 朝鮮人 59名 가운데 14名이 숨지고 네 隻이 沈沒한 것이다.

    그러나 朝鮮은 美軍政을 받고 있었기에 政府 次元의 抗議를 할 수가 없었다. 동아일보를 비롯한 少數 言論이 美軍의 爆擊을 猛烈히 非難했을 뿐이다. 事件 調査와 收拾은 ‘當然히’ 美軍이 맡게 되었다. 操縱士들은 爆彈을 投下하기 前 演習場에 사람이 있는지 確認해야 한다. 그러나 B-29編隊는 高空爆擊을 練習하러 간 것이라 肉眼으로는 獨島에 사람이 들어왔는지 確認하기 어렵다고 主張해, 調査는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當時 韓國人들에게 황소는 只今의 自動車보다 더 貴한 存在였다. 美軍은 犧牲者 遺家族에게 황소 한 마리를 살 수 있는 資金을 賠償하는 것으로 事件을 마무리했다. 賠償을 받았지만 遺族들의 苦痛은 滋甚할 수밖에 없었다. 事件 發生 2年 뒤利子 6·25戰爭 直前인 1950年 6月8日, 조재천 慶北道知事는 ‘獨島遭難(遭難)漁民慰靈碑’를 만들어 獨島로 갖고 가 除幕했다.

    美 空軍機의 獨島 爆擊은 크게 報道된 事件이었기에 많은 사람의 記憶에 남게 되었다. 事件 後遺症이 컸기에 美 空軍은 獨島 爆擊練習을 中斷했다. 美軍機가 獨島를 爆擊하는 소리는 鬱陵島 東便에서도 들을 수 있다. 鬱陵島 住民들에 따르면 美軍은 6·25戰爭 期間 中에도 獨島에서 爆擊練習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박 先生이 當時 鬱陵島 住民들에게 들은 證言 根據).

    日, 獨島를 爆擊演習場으로 提供

    그런데 調査團이 獨島에 가는 날 4年 만에 獨島 爆擊이 이뤄졌다. 戰鬪機 날개에 그려진 國旗를 確認하지 못하고 鬱陵島로 돌아온 調査團은 이 戰鬪機를 ‘國籍不明의 戰鬪機’로 부르기로 했다. 美國과의 關係를 考慮한 것이다. 왜 美軍은 獨島를 다시 爆擊演習場으로 使用한 것일까. 여기에는 美國과 日本의 關係가 作用했다.

    1953년 독도를 최초로 측량한 박병주 선생

    美軍機의 獨島 爆擊으로 慘事가 일어난 지 2年 만인 1950年 6月8日 獨島에 獨島遭難漁民慰靈碑를 세우는 조재천 慶北知事(왼쪽). 이 慰靈碑는 1959年 사라호 颱風으로 流失됐기에 경북도는 2005年 8月15日 새로 만든 慰靈碑를 獨島에 세웠다(오른쪽).

    現在 美國은 韓國과 맺은 韓美行政協定에 따라 美軍을 韓國에 駐屯시키고 있다. 마찬가지로 日本도 美日行政協定을 맺어 美軍의 日本 駐屯을 規定하고 있다. 日本은 獨立하기 直前인 1952年 2月 美日行政協定을 맺었다. 그리고 3個月이 지난 5月23日, 日本 衆議院 外務委員會에서 이러한 問答이 오갔다.

    야마모토 都市나가(山本利壽) 議員이 “다케시마 周邊이 (美軍의 爆擊) 練習地로 指定되면 다케시마를 日本 領土로 確認받기 쉽다는 發想에서 外務省은 다케시마가 練習地로 指定되길 바란다는 얘기가 있는데 事實이냐?”라고 묻자, 이시하라 間이치로(石原幹市郞) 外務省 政務次官은 “大體로 그런 發想에서 다양하게 推進하고 있다”고 答辯한 것이다.

    記者는 이시하라 間이치로 次官의 答辯이 現實化된 物證은 確保하지 못했다. 그러나 心證은 갖고 있는데, 그 根據가 바로 1952年 9月22日의 獨島 爆擊이다. 獨島를 爆擊演習場으로 提供한 日本은 韓國 海軍을 통해 진남호의 日程을 알고 있는 美軍을 움직여 진남호가 獨島에 接近할 때 爆擊을 했다는 얘기다. 蓋然性이 充分한 想像이라고 본다.

    그러나 진남호에 탄 韓國山岳會員들은 日本 衆議院에서 오고간 問答을 알지 못했으므로, 1948年의 獨島 爆擊을 떠올리며 恐怖에 떨다 곧바로 鬱陵島로 돌아왔다. 調査團은 名目上 鬱陵島度 調査하게 돼 있었으므로, 이들은 海軍本部의 指示를 기다리는 동안 鬱陵島를 調査했다. 朴 敎師는 이들을 따라다니며 鬱陵島의 歷史와 自然·産業에 對한 메모를 했는데, 이 메모는 後날 그가 釜山工高 校誌인 ‘鎔鑛爐’에 ‘獨島의 測量’이란 題目으로 獨島·鬱陵島 探査 內容을 發表하는 데 좋은 資料가 되었다.

    그리고 며칠 後 海軍本部는 “모든 措置를 다 해놓았다”며 “다시 獨島로 가라”는 要旨의 無電을 보내왔다. 調査團은 美 5空軍에도 連絡했으니 爆擊 걱정은 하지 말고 獨島 調査를 하고 오라는 뜻으로 理解했다. 그리하여 9月24日 0時 무렵 저동항을 出港해 24日 새벽 獨島 隣近에 到着했는데, 그때 또 난데없이 戰鬪機 3臺가 나타나 獨島를 爆擊했다.

    새벽에, 그것도 모든 措置를 取했다고 해서 安心하고 갔는데 또다시 始作된 獨島 爆擊은 더 큰 두려움을 주었다. 調査團員들은‘이것은 故意的인 妨害다’라는 데 意見을 모았고, ‘이런 狀態에서 獨島 調査는 不可能하다. 언제 또 戰鬪機가 날아와 爆擊할지 모르니 獨島 上陸은 危險하다. 왜 우리 調査를 妨害하는지 알아봐야 한다’며 뱃머리를 돌리기로 決定했다.

    歸航 決定이 내려지자 朴 敎師는 다시 獨島에 올 機會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여기까지 왔는데 獨島를 한 바퀴라도 돌아보고 가자”고 提議해 이를 貫徹시켰다. 진남호가 獨島 周邊을 도는 동안 그는 寫眞機로 獨島를 撮影하고, 재빨리 스케치를 했다. 다음에 獨島에 上陸할 機會가 온다면 어떻게 測量할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獨島를 눈에 익혔다.

    釜山을 出發할 때 韓國山岳會는 獨島에 上陸하면 前面에 한글로 크게 ‘獨島’, 漢字로 작게 ‘獨島’, 알파벳으로 ‘LIAN COURT’라고 새긴 領土 標石을 設置할 計劃이었다. 當時는 漢字를 한글보다 많이 쓸 때인데, 韓國山岳會는 獨島가 韓國 領土임을 分明히 하기 위해 한글을 가장 크게 새긴 標石을 準備했다. 英文 LIANCOURT(리앙쿠르)를 새긴 것은 國際海圖에 리앙쿠르로 表記된 섬이 韓國의 獨島라는 것은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韓國山岳會는 韓國의 獨立性을 强調하기 위해 獨島 調査를 光復節에 할 計劃이었다. 그래서 領土標石 뒷面에 15th, AUG, 1952를 새겨넣었다. 그런데 調査團 構成이 늦어지고 計劃이 여러 次例 變更되는 바람에 光復節을 한 달 넘겨 出港했다. 그리고 爆擊으로 獨島 上陸에 失敗했으므로, 이 標石을 鬱陵警察署에 맡기고 釜山으로 돌아왔다.

    “獨島는 둥그냐 三角形이냐?”

    政府 支援을 받은 만큼 調査團은 10月9日 釜山市議事堂에서 열린 國會 國防·外務委員會에 調査 報告를 하고 事實上 解團(解團)했다. 測地班長인 朴 敎師는 다음과 같은 要旨의 報告文을 만들어 報告했다(박 先生의 메모 參考).

    “우리의 領土인 獨島가 어떻게 생겼느냐? 三角形이나 둥그냐? 크기는 大略 얼마나 되느냐? 이런 質問에 對한 解明이 제가 스케치해 온 이 地形圖입니다. 國籍 不明의 航空機 爆擊 때문에 正確한 測量을 하지 못했습니다만 獨島의 大略的인 面積은 3萬5000餘 坪으로 推定됩니다….”

    報告를 마치자 獨島 情報에 굶주려 있던 國會議員들이 拍手를 쳤다. 調査團長을 맡았던 홍종인 韓國山岳會長도 朴 敎師에게 “當身이 큰 수고를 했소. 陰測과 目測을 해준 德分에 獨島에 對한 報告를 제대로 할 수 있었소”하며 稱讚했다.

    날이 추워지면 누구도 獨島 上陸이 힘들어진다. 獨島 入島(入島)는 날이 풀리는 1953年 初여름에 再開된다. 1952年과 53年 사이의 겨울을 보내는 동안 美軍은 重要한 決定을 내렸다. 1953年 2月27日, 더 以上 獨島를 爆擊演習場으로 使用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4個月이 지난 1953年 6月25日 日本 水産靑果 海上保安廳 公務員이 獨島에 上陸해, 操業하던 우리 漁民을 쫓아내고 또다시 日本 領土 標柱를 세웠다.

    이 消息이 알려지자 海軍은 獨島 周邊으로 艦艇을 출동시켰고 獨島 領有權 다툼은 韓日 間뿐만 아니라 國內에서도 큰 社會이슈가 되었다. 政府는 韓國山岳會에 다시 한番 獨島 調査를 企劃해달라고 付託했다. 그리하여 다시 調査團을 만들게 됐는데, 이때 가장 重要한 役割을 할 側地盤 構成을 놓고 葛藤이 빚어졌다. 韓國山岳會는 세 名의 大學敎授와 朴 敎師로 側地盤을 編成하고, 班長은 金某 敎授에게 맡긴다는 決定을 내렸다.

    이에 朴 敎師는 “獨島 測量은 緻密한 計劃을 세워 短時間에 執行해야 한다. 班長은 지난해 獨島 環境을 눈으로 살피고 온 내가 맡는 것이 效果的이다”라고 主張했다. 그러자 韓國山岳會는 “當身이 同行하지 못하겠다면 測量器械만 빌려달라”고 했다. 朴 敎師는 “그렇게는 못한다”고 버티자 敎授 두 사람이 勇退함으로써 朴 敎師가 班長이 되었다.

    1953년 독도를 최초로 측량한 박병주 선생

    1953年 10月14日 獨島에 上陸한 韓國山岳會가 日本의 領土 標柱를 뽑아내기 前 이 標柱에 太極旗를 묶고 撮影했다. 이 標柱 뒤에 조재천 支社가 세운 獨島遭難漁民慰靈碑가 보인다.

    박병주가 만든 대나무 測量 폴

    缺禮를 무릅써가며 班長을 맡은 朴 敎師는 前年 調査 때 눈여겨본 것을 土臺로 제대로 된 測地 計劃을 樹立하려고 했다. 그는 1952年 調査 때 苦生한 經驗 때문에 同行을 辭讓한 釜山工高의 김기발 敎師 代身 구자원 敎師를 참여시키고, 韓國山岳會에는 바위를 탈 수 있는 隊員들을 支援해달라고 付託했다.

    그리고 길이가 3m쯤 되는 대나무를 數十 個 求해 50cm 間隔으로 빨간色과 흰色을 번갈아 漆한 測量 폴(pole)을 만들었다. 各各의 폴에는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큼지막한 番號版을 붙였다. 그리고 폴 허리춤엔 노끈을 세 가닥씩 매달고, 各各의 노끈 끝엔 땅이나 바위에 박아 넣을 수 있는 못을 매달았다. 一般的인 測量이라면 폴은 助手가 잡고 서 있어야 한다. 그러나 獨島는 險峻한 바위인지라 폴을 잡고 서 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바위를 탈줄 아는 사람이라면 바위틈에 못을 박아 폴을 固定시킬 수 있다.

    바위를 타는 助手들은 變曲點에 폴을 박아놓고 다른 곳으로 移動해 또 폴을 박는다. 朴 敎師는 이렇게 하면 짧은 時間에 많은 곳을 測量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韓國山岳會 側은 漢陽工大 土木과 學生인 이문행氏 等 젊은 會員 다섯 名을 朴 敎師의 助手로 指名해주었다.

    이렇게 構成된 調査隊員 36名은 서울로 首都를 옮긴 뒤인 10月11日, 海軍 905 警備艇(正裝 서덕균 大尉)을 타고 釜山港을 出港해 當日 鬱陵島에 到着해 鬱陵警察署 側으로부터 前 해 맡겨놓았던 領土 標石을 傳해 받아 905艇에 실었다.

    이때 朴 敎師는 “獨島 周邊은 波濤가 너무 세서 軍艦처럼 큰 배는 接岸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東島와 서도 사이의 暗礁바다를 다니는 데도 必要하니 軍艦에 작은 傳馬船을 두 隻 싣고 가자”고 主張해 이를 貫徹시켰다. 10月13日 아침 905定은 鬱陵警察署腸을 태우고 獨島로 出港했다.

    韓國 軍艦 따라붙은 日本 巡視船

    그날 正午 무렵 905定은 獨島에 接近해 傳馬船을 내렸으나 波濤가 너무 세, 鬱陵島로 되돌아왔다. 905情이 鬱陵島로 歸航하고 있을 때 國旗를 올리지 않은 船舶 한 隻이 따라와 나란히 달렸다. 905 艇長인 서 大尉가 旗발을 利用해 旌善(停船) 命令을 내리고 國籍을 밝히라고 하자, 저쪽 배는 日章旗를 올렸다.

    서 大尉는 卽時 總員 戰鬪命令을 내렸다. 瞬息間에 905梃 將兵들이 戰鬪 準備에 들어가면서 緊張이 造成됐다. 저쪽 배는 日本 海上保安廳 所屬 ‘나가라(약 300t)’함인 것으로 밝혔는데, 그 含意 武裝은 905情보다 훨씬 弱했다. 이렇게 對峙한 狀態로 달리다 나가라함이 뒤로 처지며 떨어져 나갔다. 그러자 홍종인 韓國山岳會長이 서 大尉를 불러 情況을 說明하게 했다. 서 大尉의 說明 要旨는 이러했다.

    “日本 巡視船은 自己 政府의 命令으로 다케시마를 巡視하러 왔다고 했다. 이에 우리는 海軍本部를 불러 ‘日本 巡視船이 平和線을 넘었으니 어떤 措置를 取해야 하는지 指示해주기 바란다’라고 물었다. 海軍本部에서는 ‘日本 巡視船이 順應하는 態度를 보이면 無條件 돌려보내라’고 했다. 그래서 ‘無條件 돌아가라’라고 했더니, 巡視船은 ‘歸艦의 安全한 航海를 빕니다’라면서 떨어져 갔다….”

    그러자 鬱陵警察署長이 興奮해서 “日本 巡視船이 平和線을 넘어왔으면 拿捕해야지 왜 돌려보내느냐”고 惹端을 쳤다. 서 大尉는 “우리는 本部 指示를 따를 수밖에 없다”고 抗辯했다. 調査團에는 言論社 記者들도 包含돼 있었다. 홍종인 會長은 事態를 整理한 後 “아마 日本에서도 이 事件을 報道할 것이니 라디오를 켜놓고 들어보자”고 했다. 그날 밤 日本 NHK에서는 이런 放送 內容이 흘러나왔다.

    1953년 독도를 최초로 측량한 박병주 선생

    1953年 10月15日 韓國山岳會가 獨島 자갈마당에 設置한 領土 漂石의 앞面과 뒷面(아래) 오른쪽 位는 2005年 8月15日 경북도가 復元한 標石이고 아래는 2008年7月30日 이 標石을 경북도가 撤去한 後의 모습이다.

    “海上保安廳 所屬 배가 다케시마를 巡察하던 中 重武裝한 韓國 軍艦을 만났다. 海上保安廳 巡視船에는 舊 日本 海軍 對坐 出身인 쓰지 요시노부(·#52937;政信) 大議事(代議士=衆議院)와 外務省 官吏가 타고 있었다. 이들은 韓國 調査團이 다케시마를 調査하러 온다는 消息을 듣고 海上 談判을 하러 海上保安廳 巡視船을 타고 나가 韓國 艦艇을 만난 것인데, 波濤가 거칠어 談判을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두 사람은 16日 다케시마를 視察하려고 다시 한다.…”

    放送을 들은 調査團은 다시 한番 自身들의 任務가 莫重하다는 것을 切感했다. 13日 鬱陵島로 돌아온 調査團은 뱃멀미로 녹초가 되었다. 調査團에 附與된 獨島 調査 航海 時日은 열흘이었으므로 마냥 時間을 보낼 수도 없었다. 이 때문에 14日 새벽 다시 獨島行을 推進했다. 하지만 13日의 航海가 너무 힘들었기에 鬱陵島에서 同乘한 警察署長 等 몇몇은 “가지 않겠다”고 해 搭乘者 數가 줄어들었다.

    10月14日 새벽 1時쯤 鬱陵島를 떠난 905定은 5時30分쯤 獨島 周邊에 到着했다. 그리고 두 隻의 傳馬船을 내려 只今의 東도 자갈마당에 調査團員들을 上陸시켰다. 자갈마당에서 韓國山岳會員들이 가장 먼저 發見한 것은 갈매기와 日本 公務員들이 박아놓은 日本 領土 標柱(標柱), 그리고 1950年 조재천 慶北知事가 設置한 獨島遭難漁民慰靈碑였다.

    獨島에 上陸했던 日本 公務員들은 1947年 朝鮮山岳會가 設置한 領土 말뚝은 撤去했지만, 慰靈碑는 손대지 않은 것이다. 韓國山岳會 獨島調査團의 一員으로 參與한 김한용 寫眞사도 獨島에 上陸했다. 韓國山岳會員들은 먼저 日本 領土 標柱에 太極旗를 묶어 寫眞을 찍은 後 鬱陵島에서 데려간 人夫들을 動員해 이를 뽑아내 905艇에 옮겨 실었다. 김한용氏는 標柱를 뽑아내는 歷史的인 場面을 렌즈에 담았다.

    그때부터 김정태氏를 筆頭로 朴 敎師의 助手들이 대나무 폴을 세 個씩 지고 東島의 바위壁을 타고 오르기 始作했다. 이들은 툭 튀어나온 變曲點에 폴을 박아 세우고 다른 곳으로 移動해 다시 폴을 박았다. 朴 敎師는 자갈마당에 트랜시트(transit·轉鏡儀)를 세우고 스타디아(stadia) 測量法을 使用해 이들이 세운 폴을 보며 거리와 角度를 測定했다.

    1953년 독도를 최초로 측량한 박병주 선생

    1953年 10月14日 獨島 東島에 上陸해 巖壁을 오르며 박병주 先生이 만든 대나무 測量폴을 박아 세우는 韓國山岳會 會員들. 위 寫眞은 獨島를 測量할 때의 박병주 先生.

    獨島 最初 測量

    동도는 西島에 비하면 덜 거칠기에 注意 깊게 발끝을 내디디면 一般人도 頂上으로 올라갈 수 있다. 朴 敎師는 隊員들과 함께 東도 頂上에 올라가 자갈마당에서는 볼 수 없는 頂上 附近도 測量했다. 그러나 자갈마당 反對便으로는 내려가 보지 못했기에 그곳은 正確히 測量하지 못했다. 저녁이 되자 동도 測量을 마감하고 자갈마당으로 내려와 텐트를 치고 野營했다.

    이튿날은 西道를 測量하기로 했다. 먼저 이문행 隊員이 傳馬船을 타고 서도 周圍의 暗礁로 가 폴(函尺)을 세우면 朴 敎師는 角度와 距離를 測量했다. 두 사람은 傳馬船을 타고 서도 周圍를 돌며 測量을 했으나, 난바다를 向한 쪽은 波濤가 너무 세서 測量을 하지 못했다.

    西道의 巖壁은 東島보다 훨씬 거칠고 가팔라‘아차’해서 부딪치면 今方 傷處가 난다.한국산악회 隊員들은 서도 頂上까지 登攀하지 못했기에 그 또한 西島에 對해서는 測量하지 못했다.

    獨島는, 가보면 알겠지만 아주 單純한 바위섬이다. 이러니 鑛物半이나 水産半 等은 今方 調査를 끝내고 閑暇해진다. 側地盤을 除外한 다른 調査班은 다음날 할일이 없었으므로 獨島遭難漁民慰靈碑가 있는 자갈마당에 鬱陵島에서 가져간 獨島 領土 標石을 세웠다.

    1953년 독도를 최초로 측량한 박병주 선생

    1953年 10月14日 밤 作業을 끝내고 獨島 東島의 자갈마당에서 캠프파이어를 하며 野營하는 韓國山岳會(危). 박병주 敎師가 이끄는 側地盤은 傳馬船을 利用해 서도 周邊의 暗礁를 옮겨 다니며 測量했다(아래).

    韓國山岳會는 設立 때부터 英文 이름을 Corean Alpine Club(略稱 CAC)으로 表記했다. 그러나 1952年 獨島 調査는 政府를 代身해서 하는 것이라 誤解가 없도록 Korea를 使用하고, Club은 훨씬 意味가 큰 Association으로 바꿔 쓰기로 했다. 그래서 韓國山岳會의 英文이름을 Korea Alpine Association으로 새겨 넣었다.

    그런데 이 標石을 當初 豫定했던 1952年 8月15日이 아닌 1953年 10月15日 세우게 되었으니 標石 옆面에 1953年 10月15日을 써넣었다. 905定은 海軍本部의 統制를 받는 作戰 陷穽인지라 歸降 날짜가 定해져 있었다. 이 때문에 韓國山岳會는 15日 正午쯤 撤收해야 했다. 朴 敎師는 서도 周邊 暗礁에 對한 測量을 中斷하고 助手들과 함께 905艇에 올랐다.

    그리고 서 大尉에게 獨島 周邊을 近接해 천천히 돌아달라고 해, 자갈마당과 東도 正常에서는 볼 수 없었던 東島의 反對便과 西道의 反對便을 仔細히 스케치하고 寫眞을 찍었다. 이어 협각法과 仰角法(仰角法)을 利用해 서도 높이를 174m로 推定해냈다. 前年보다 높게 나온 것이다. 이러한 資料를 確保한 朴 敎師는 釜山에 돌아와 韓國人 最初의 獨島 地形圖를 만들었다.

    獨島에 上陸해 分野別로 調査를 하고 領土 標石까지 세운 韓國山岳會는 서울 소공동에 있던 서울대齒大 講堂에서 獨島 調査 結果를 發表하게 되었다. 이때 演士로 나간 朴 敎師는 그가 그린 地形圖를 펼쳐 보이며 이러한 要旨의 發表를 했다.

    1953년 독도를 최초로 측량한 박병주 선생

    1953年 10月14日 韓國山岳會에 同行해 歷史的인 寫眞을 찍은 김한용 先生(左). 韓國山岳會의 獨島 標石 設置를 報道한 1953年 10月23日子 日本 아사히 新聞 記事(郵).

    “獨島의 모든 것을 調査하지 못했지만, 지난해보다 훨씬 精密한 調査를 할 수 있었다. 이番 調査에서 밝혀진 獨島 東島의 높이는 99m, 面積은 6萬4000餘 m2(1萬9000餘 坪)이고 서도는 높이 174m, 面積은 9萬5000餘 ㎡(2萬8000餘 坪)이며 暗礁를 더한 總面積은 18萬6000餘 ㎡(5萬6265坪)이다. 지난해 槪略的인 調査에서는 3萬5000坪으로 計算했는데 測量 폴을 세우고 調査해보니 더 넓게 나왔다. 나는 獨島를 最初로 測量한 데 對해 큰 自負心을 느낀다. 이제 우리는 獨島의 地形과 面積 높이 等을 根據 있게 把握할 수 있게 되었다.”

    朴 敎師가 作成한 이 獨島 地形圖는 그때까지 日本에서 나온 어떤 獨島 地形圖보다 훨씬 詳細하고 正確했다. 朴 先生이 作成한 地形圖는 國土地理情報院이 航空寫眞을 利用해 만든 最近 地形圖와 큰 差異가 없다.

    調査團에 參與했던 言論人들은 媒體를 통해 報告를 했다. 調査團長이었던 홍종인氏는 조선일보 主筆이었으므로 조선일보에 ‘獨島에 다녀와서’라는 題目의 시리즈를 4回 실었고, 英字紙인 ‘코리아 타임스’의 정인홍 記者 等도 自己 媒體에 獨島 調査 記事를 실었다.

    調査團이 獨島에서 뽑아 싣고 온 日本의 領土 標柱는 어떻게 되었을까. 朴 先生은 勿論이고 寫眞師로 同行했던 김한용 先生도 “부산대학교 博物館에 傳達한 것으로 안다”라고 證言했다. 이에 對해 記者가 問議하자, 釜山大 博物館은 “우리 博物館은 1960年代에 開館했기에 1953年엔 없었다. 그분들이 標柱를 傳達한 것이 事實이라면 博物館이 아니라 學校 側에 했을 可能性이 높다. 아무튼 博物館 所藏 資料에 그 票木은 없다”라는 答을 보내왔다.

    韓國山岳會가 獨島에 設置한 領土 標石은 어떻게 되었을까. 韓國山岳會의 獨島 調査와 領土 標石 設置는 日本에서도 關心을 끌었기에 아사히신문을 비롯한 日本 媒體도 이에 對한 報道를 했다. 아사히신문 報道에 따르면 韓國이 뽑아간 領土 標柱는 日本이 네 番째로 박아넣은 것이었다. 나가라함에 타고 있던 日本人들은 905情이 獨島를 떠난 後 獨島에 上陸했다.

    1953년 독도를 최초로 측량한 박병주 선생

    1953年 10月 釜山으로 돌아온 박병주 敎師가 作成한 獨島地形圖와 國土地理情報院이 現代的인 技法으로 製作한 只今의 獨島地形圖(아래).

    이들은 韓國이 設置한 領土 標石을 確認해 寫眞을 찍고, 박병주 敎師가 만든 대나무 測量 폴과 김한용氏가 使用한 것으로 보이는 필름桶 等을 收去했다. 日本 側이 上陸한 後 韓國山岳會의 領土 標石은 사라졌다. 이러한 事實은 이듬해(1954年) 봄 獨島에 들어가 獨島를 지킨 獨島義勇守備隊의 證言으로 確認된다.

    韓國山岳會 標石 除去한 日本

    홍순칠氏가 이끈 獨島義勇守備隊는 獨島遭難漁民慰靈碑에 對한 記錄은 남겨두었어도, 韓國山岳會의 領土 表石에 對해서는 全혀 擧論하지 않았다. 韓國이 日本의 領土 標柱를 뽑아갔듯이, 바로 다음날 獨島에 上陸한 日本은 韓國山岳會의 領土 標石을 뽑아간 것이다. 그러나 獨島遭難漁民慰靈碑는 손대지 않았다. 이 慰靈碑는 繼續해서 獨島에 서 있다가 1959年 사라호 颱風 때 流失됐다.

    韓國山岳會의 活動으로 獨島에 對한 槪略的인 情報를 쥐게 된 政府는 이를 土臺로 日本과 기나긴 協商을 벌여 1965年 獨島를 뺏기지 않은 채 日本과 國交를 回復하게 되었다. 韓國은 1953年 韓國山岳會의 活動으로 獨島 領有權을 確認한 뒤 1954年 홍순칠氏가 이끄는 鬱陵島 除隊軍人들이 獨島義勇守備隊를 만들어 獨島에 常住하면서 지키다 1955年 말 警察에 獨島 防禦를 引繼함으로써 完璧하게 獨島 領有權을 지키게 되었다.

    그러나 韓國은 ‘냄비 根性’을 가진 國家다. 일이 터지면 搖亂하게 떠들다가 마무리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며 잊어버린다. 獨島 領有權이 분명해지자 光復과 戰爭 戰後 時期에 있었던 獨島 領有權 다툼의 歷史를 잊어버린 것이다. 1953年 日本이 떼어간 最初의 한글 領土 標石(韓國山岳會 領土 標石)과 1959年 사라호 颱風이 휩쓸고 간 獨島遭難漁民慰靈碑에 對해서는 더 以上 關心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다.

    2005年 2月22日은, 日本 시마네(島根)縣이 獨島를 그들의 領土로 편입시키는 高地를 發表한 지 100周年이 되는 날이다. 그해 시마네縣議會는 2月22日을 다케시마의 날로 決定해 큰 波紋을 일으켰다. 그 直後 記者는 김한용 先生으로부터 1953年 韓國山岳會가 獨島에 上陸해 日本의 領土 標柱를 뽑고 韓國山岳會의 領土 標石을 設置하는 寫眞을 제공받아 ‘週刊東亞’에 公開했다.

    그러나 金 先生은 獨島 調査에 對한 仔細한 內幕을 알지 못했다. 韓國山岳會가 獨島를 調査하게 된 背景과 調査 過程에 關한 이야기는 이番에 만난 박병주 先生이 밝혀줌으로써 記者는 1952年과 53年 間의 緊迫했던 獨島 領有權 다툼을 復元할 수 있었다. 記者가 金 先生 寫眞을 公開한 얼마 後 ‘東亞日報’는 李承晩 大統領 記念館인 이화장에서 1950年 조재천 慶北知事가 獨島遭難漁民慰靈碑를 除幕하는 寫眞을 받아 公開해 亦是 큰 關心을 끌었다.

    1953년 독도를 최초로 측량한 박병주 선생

    韓國山岳會 領土 標石을 撤去해놓고 撤去해도 좋으냐고 물은 慶尙北道의 公文.

    경북도의 ‘얍삽한’ 保身主義

    日本의 다케시마의 날 指定으로 시끄러웠던 2005年의 8月15日은 光復 60周年을 맞는 날이었다. 이날이 다가오자 경북도는 재빨리 韓國山岳會 領土 標石과 獨島遭難漁民慰靈碑를 復元해 獨島에 設置하는 行事를 열었다. 그리고 3年이 지난 2008年 7月30日 獨島에 職員을 보내 그들이 復元한 韓國山岳會 領土 標石을 撤去했다. 撤去 理由는 이 表石에 알파벳 LIANCOURT가 쓰여 있다는 것 單 하나였다.

    2008年 7月 美國 議會圖書館이 獨島를 가리키는 藏書 分類 이름을 獨島에서 리앙쿠르로 바꾸려 한다는 것이 알려지자 國內에서 이를 批判하는 輿論이 높아졌다. 이 論難은 부시 大統領이 나서서 ‘없던 일로 하라’고 指示함으로써 싱겁게 整理되었다.

    그런데 慶北道는 이 論爭의 화살이 2005年 韓國山岳會 領土 標石을 復元한 自身들에게 向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韓國山岳會 標石을 撤去했다. 그리고 700萬원을 들여 LIAN COURT 代身 DOKDO, KOREA를 새긴 標石을 만들어 2009年 中 다시 設置한다는 計劃을 세웠다. 이때 경북도는 큰 失手를 하나 했다.

    1953년 독도를 최초로 측량한 박병주 선생

    韓國山岳會의 英文이름을 바꾸는 것을 前提로 獨島 標石 撤去에 뒤늦게 同意한다는 內容을 담은 韓國山岳會 公文(왼쪽)과 標石 撤去에 同意한 적이 없다고 밝힌 韓國山岳會의 公文(오른쪽).

    이 標石을 부수려면 먼저 韓國山岳會의 同意를 얻는 것이 옳다. 그런데 慶北道는 標石을 부순 다음날(7月31日), ‘標石 文句 中 LIANCOURT는 國際紛爭의 素地가 憂慮돼 變更 設置하고자 하오니 귀 山岳會의 意見을 回信해달라’는 內容의 協助文을 韓國山岳會로 보냈다. 이미 標石을 부숴놓고 ‘意見을 보내달라’는, 앞뒤가 맞지 않는 公文을 보낸 것이다.

    이에 對해 慶北道 擔當 官吏는 “公文을 보내기 前 韓國山岳會 側과 協議해 標石을 撤去하고 새로 設置하는 데 同意를 받았다. 아시다시피 官公署는 決裁받는 데 時間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公文 發送이 늦어져 먼저 標石을 撤去하게 됐다”고 解明했다.

    韓國山岳會 최홍건 會長은 처음 記者와의 通貨에서는 “우리는 理事會를 열어 同意해주었다. 韓國山岳會의 英文은 COREAN ALPINE CLUB이니, KOREA ALPINE ASSOCIATION도 固有 英文으로 바꿨으면 좋겠다는 意見을 보냈다”고 밝혔다. 韓國山岳會는 理事會議錄을 公開한다. 記者는 韓國山岳會의 理事會議錄을 모두 뒤져봤는데 어느 會議錄에도 경북도의 標石 撤去와 變更에 同意한다고 決意하거나 決定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崔 會長이 이끄는 韓國山岳會가 慶北道 公文에 對해 回信을 보낸 것은 事實이었다. 韓國山岳會 回信에는 崔 會長 말처럼 COREAN ALPINE CLUB으로 바꿔달라는 內容이 적혀 있었다. 慶北道 側은 이 回信을 8月21日 接受했다고 밝혔다. 이때는 이미 記者가 ‘週刊東亞’를 통해 “경북도가 韓國山岳會의 同意를 받아 獨島에 있는 最初의 한글 領土 標石 復元물을 LIANCOURT란 글字가 새겨져 있다는 理由 하나만으로 撤去했다”고 報道한 다음이라, 韓國山岳會에서 論難이 일고 있었다.

    그러자 崔 會長이 이끄는 韓國山岳會는 경북도에 ‘왜 慶北道는 우리의 同意도 받지 않고 獨島 領土 標石을 撤去했느냐. 우리는‘주간동아’기사를 통해 경북도가 獨島 標石을 撤去한 事實을 처음 알았다’는 內容의 公文을 9月29日子로 경북도에 보냈다. 崔 會長 側은 DOKDO, KOREA가 들어가는 標石을 새로 製作하는 데는 同意했지만, 旣存 標石을 撤去하는 것銀同意한 적이 없다며 말장난 같은 公文을 보낸 것이다.

    이에 對해 경북도의 關係者는 “우리는 分明히 韓國山岳會의 口頭 同意를 받아 7月30日 이 標石을 撤去했다”라고 主張하고 있다.

    韓國山岳會와 경북도의 다툼은 리앙쿠르라는 單語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리앙쿠르는 國際 海圖에 올라 있는 獨島 이름이지, 日本의 이름이 아니다. 1953年 韓國山岳會는 國際海圖에 리앙쿠르로 돼 있는 것이 韓國의 獨島라며 이 標石을 設置한 것인데, 이들은 거꾸로 解釋해 이 事態를 빚었다.

    獨島 領有權을 鞏固히 하려면 우리는 獨島를 지켜온 歷史를 整理해야 한다. 歷史는 잘한 것은 勿論이고 잘못한 것도 밝혀놓아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되짚어봐도 1953年 韓國山岳會가 리앙쿠르라는 單語가 들어간 한글 標石을 設置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이 表石에는 韓國 最初로 獨島를 測量했다는 歷史的인 背景이 깔려 있는데, 保身主義 때문에 2008年의 경북도와 韓國山岳會는 이 標石을 撤去했다.

    獨島 領有權 問題와 關聯해 우리 社會가 가장 警戒해야 할 것은 獨島 포퓰리즘이다. 問題가 됐다고 해서 自初至終을 살펴보지 않고 歷史를 破壞하는 나라는 바른 길을 갈 수 없다. 이제라도 獨島 領有權 歷史를 바로 세워야 한다.

    ▼獨島 事件 日誌

    1945年 8月15日 韓國, 日本으로부터 光復

    1946年 6月22日 聯合軍司令部, 指令 1033號로 맥아더 라인 宣布

    1947年 8月20日 朝鮮山岳會, 獨島 上陸해 領土 말뚝 設置

    1947年 9月 美軍, 獨島를 美空軍機와 海軍旗의 爆擊演習場으로 指定

    1948年 6月 8日 美空軍 B-29 編隊 獨島 爆擊으로 韓國 漁民 14名 死亡. 以後 美軍 獨島 爆擊 練習을 中斷함

    1948年 8月15일한국, 美軍政 끝내고 獨立政府 세움

    1950年 6月 8日 조재천 慶北知事 獨島에 獨島遭難漁民慰靈碑 세움

    1950年 6月25日 6·25戰爭 勃發

    1950年 6月28日 서울 陷落. 以後 釜山으로 首都를 옮김

    1950年 9月15日 仁川上陸作戰 成功

    1950年 9月28日 서울 收復해 還都(還都)

    1951年 1月 4日 서울 다시 陷落

    1951年 3月15日 서울 財數服

    1952年 1月18日 李承晩 大統領, 平和線 宣布

    1952年 2月 美日行政協定 맺음

    1952年 4月28日 日本, 美軍政 끝내고 獨立

    1952年 5月23日 日本 外務次官, 衆議院에서 獨島를 美軍 練習帳으로 提供하겠다고 밝힘

    1952年 6月末 日本 公務員 獨島 上陸해 日本 領土 標柱(標柱) 세움

    1952年 9月17日 韓國山岳會, 獨島 調査 위해 진남호 타고 釜山 出港

    1952年 9月22日 진남호, 獨島 附近서 美軍機의 獨島 爆擊 目擊하고 鬱陵島로 回航

    1953年 2月27日 美軍, 獨島를 더 以上 爆擊演習場으로 쓰지 않겠다고 밝힘

    1953年 6月25日 日本 公務員, 獨島 上陸해 네 番째로 日本 領土 標柱 세움

    1953年 7月27日 6·25戰爭 停戰

    1953年 8月15日 韓國, 서울로 다시 首都 옮김

    1953年 10月11日 韓國山岳會, 獨島 調査하기 위해 海軍의 905梃 타고 釜山 出港, 鬱陵島 到着

    1953年 10月13日 905梃, 領土 標石과 鬱陵警察署腸을 태우고 獨島로 出港했으나 日記 나빠 回航하다

    日本 巡視船 ‘나가라’함과 遭遇

    1953年 10月14日 韓國山岳會, 905梃 利用해 獨島에 上陸, 各種 調査 作業을 函

    1953年 10月15日 韓國山岳會, 獨島 領土 標石 設置하고 鬱陵島로 撤收

    1953年 10月16日 나가라함 타고 온 日本 公務員. 韓國山岳會 領土 標石 撤去函

    1954年 4月 獨島義勇守備隊 獨島 들어가 常住하며 지킴

    1954年 10月22日김종원 慶北警察局長 獨島 訪問 때 獨島義勇守備隊 허학도 隊員 墜落死

    1955年 12月30日 獨島義勇守備隊, 獨島 防禦를 慶北 警察에 引繼함

    1965年 6月22日 韓日基本條約 締結

    1965年 12月18日 韓日基本條約 發效로 兩國 國交 回復

    2005年 2月22日 日本 시마네縣, ‘다케시마(竹島)의 날’ 制定

    2005年 8月15日 慶北道, 韓國山岳會 領土 標石과 獨島遭難漁民慰靈碑 復元

    2008年 7月30日 慶北道, LIANCOURT라는 單語가 있다고 韓國山岳會 領土 標石 破壞

    포퓰리즘과 獨島

    60周年 光復節 行事에 찢어진 太極旗


    1953년 독도를 최초로 측량한 박병주 선생

    2005年 8月15日 쫙 찢어지면서 케이블을 타고 올라가는 太極旗(危). 허학도 隊員을 비롯해 獨島를 지키다 숨진 이들을 위한 慰靈碑(아래).

    時代에 迎合하는 포퓰리즘은 때로는 剛한 抵抗을 받는다. 光復 60周年인 2005年 8月15日 경북도가 獨島에서 韓國山岳會 領土 標石과 獨島遭難漁民慰靈碑 復元行事를 열때 昨今의 不幸을 豫告하는 듯한 不吉한 兆朕이 나타났다.

    배가 接岸하는 東島의 물洋裝에는 獨島警備隊가 있는 東도 꼭대기까지 物件을 끌어올릴 수있는 케이블이 設置돼 있다. 경북도는 이 케이블을 利用해 超大型 太極旗를 물洋裝에서 동도 正常으로 올리는 이벤트를 進行하기로 했다.

    前날 리허설을 했을 때 大型 太極旗는 케이블을 따라 멋지게 펄럭이며 東도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런데 行事 當日 케이블에 걸어 올렸을 땐 太極旗의 한쪽이 날카로운 바위 끝에 걸렸는지 “쫘악” 찢어지며 위로 올라갔다. 當時 行事場에 있었던 최선웅氏는 “그 모습을 보면서 섬뜩한 느낌과 不吉한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3年 後 경북도는 性急하게 獨島 標石을 撤去했다가 안팎으로 非難받는 處地가 되었다.

    獨島는 獨島義勇守備隊가 지키던 時節에도 포퓰리즘 때문에 事故를 當한 적이 있다. 1954年 10月22日 김종원 慶北警察局長은 颱風이 불 兆朕이 있는데도 警察家族들과 警察樂隊까지 이끌고 無理해서 獨島를 訪問했다가, 氣像이 더 나빠지기 前에 돌아간다고 서둘렀다. 그런데 그는 東도 頂上에 寫眞機를 두고 내려왔다. 그가 “내 寫眞機”하는 바람에 頂上에 있던 허학도 隊員이 寫眞機를 찾아 내려오다 거세지는 바람에 발을 헛디뎌 墜落死했다. 이렇게 犧牲된 허학도 隊員의 殉職費는 獨島警備隊가 있는 東도 頂上 附近에 있다. 포퓰리즘과 獨島는 相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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