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卒業 20年, 경북고 68回 최영철 記者의 ‘同門見聞錄’|新東亞

卒業 20年, 경북고 68回 최영철 記者의 ‘同門見聞錄’

“保守·進步 아우르며 人材 排出, 劃一의 잣대로 裁斷하지 말라!”

  • 최영철 동아일보 新東亞 記者 ftdog@donga.com

    入力 2007-05-04 13: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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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平準化 10年, 舊校舍 마지막 世代 ‘꼴통 68回’의 4錢5期

    試驗보다 ‘뺑뺑이’로 경북고 들어가기가 더 힘들다?

    ‘警告 中의 警告’ 58回 파워…政府 高位職만 13名

    ‘母校를 빛낸 同門’, 이효상, 盧泰愚, 신현확, 李承燁 順

    同門 記念植樹 50餘 그루 中 ‘盧泰愚 나무’만 죽은 事緣



    80年代 中盤 學番, ‘경북고 出身’ 理由만으로 린치

    1987年 노태우 候補 支持 모임 뒤엎은 肝 큰 後輩들

    2·28, 4·19, 6·3, 인혁당, 서울의 봄 運動圈 主役

    YS, DJ 政府 公職者들, “모이면 다 죽는다”


    졸업 20년, 경북고 68회 최영철 기자의 ‘同門견문록’
    어김없이 찾아온 또 한 番의 봄. 유난히 高校 同期들로부터 連絡이 잦고 모임도 많다. 動機會 總務로부터 一週日에 한 番 꼴로 文字 메시지가 날아온다.

    ‘5月12日 卒業 20周年 홈커밍데이, 20萬원 納付 希望’

    메시지를 본 瞬間 절로 長歎息이 흘러나온다.

    “아! 벌써 卒業 20年이라니….”

    正말 오랜만에 나간 動機會 자리. 話題는 홈커밍데이로 모아진다. 總務가 記者의 무심함을 탓하며 쏘아붙인다.

    “넌 同門會도 잘 안 나오고 職業 멀쩡하니까 50萬원은 내야지. 動機와 先生님 모두 特級 호텔로 모신다. 家族도 全部.”

    卒業 20周年 母校 訪問과 謝恩會 行事 豫算이 6000萬원에 가깝단다. 좀더 따지려드니 總務가 한마디로 뭉개버린다.

    “잔소리 말고 빨리 좀 내라~잉? 無條件 50萬원으로 잡아놓는다.”

    動機會側은 이참에 1億원을 모아 行事를 하고, 남는 돈으로 動機 基金을 만든다는 計劃이다. 20年 만의 母校 訪問을 앞둔 同期들의 愛校心은 하늘을 찌를 듯하다. 새삼 ‘내가 참 대단한 學校를 나왔구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母校가 지난해 個校 90周年을 맞았다는 事實을 新聞을 통해서야 알게 된 ‘沒廉恥한 同門’은 갑자기 自身이 왜 이토록 母校와 恩師를 外面하고 살았는지 疑問이 든다.

    지난 4月9日 이른 새벽, 高校 卒業 後 20年 1個月餘 만에 母校로 向하는 取材 길에 올랐다. 記者는 1984年 3月2日 大邱 경북고등학교에 入學해 1987年 2月24日 卒業했다. 卒業回數, 卽 騎手는 68回. 이 學校는 태어난 해와 卒業回數가 같다. 假令 1948年에 태어난 한나라당 강재섭 代表委員은 48回 卒業生이다. 우리 나이로 8살에 初等學校에 들어가 中·高等學校 6年을 異常 없이 마쳤다면 生年과 卒業回數는 正確하게 一致한다. 記者는 1968年生이다.

    졸업 20년, 경북고 68회 최영철 기자의 ‘同門견문록’

    경북고 68回인 記者(오른쪽 원)의 3學年4班 動機 卒業 寫眞. 원 왼쪽이 班長이었던 권재한群.

    경북고는 서울의 江南처럼 ‘大邱의 8學群’으로 불리는 大邱 수성구 황금동에 자리잡고 있다. 서울 四大門 안에 있던 경기고와 서울高價 江南圈으로 옮겼듯, 慶北高度 1985年 大邱 한복판인 中區 대봉동에서 只今의 황금동 敎師로 移轉했다. 記者가 屬한 68回는 경북고의 歷史로 보면 1974年 高校 入試 平準化(俗稱 ‘뺑뺑이’) 以後 10年次이자 75年 歷史의 대봉동 校庭을 經驗한 마지막 旗手이다. ‘비 새고, 쥐 노는’ 敎師(校舍)에서 3年을 보낸 非平準化 先輩들과 校正에 關한 限 같은 記憶을 共有한 마지막 旗手인 셈이다.

    ‘황금고 2回 卒業生’

    68回 卒業生들은 1學年을 마친 1985年 1月 대봉동 敎師에서 황금동 敎師로 移徙짐을 直接 싸고, 새로운 學校를 가꾼 主人公이다. 그래서인지 神敎師에 對한 同期들의 愛情은 각별하다. 動機 中 一部는 自身을 ‘황금고 2回 卒業生’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대구역에 내려 택시를 타고 20分쯤 달리자 눈에 익은 길이 視野에 들어온다. 시원하게 펼쳐진 往復 8~10車線 道路, 分明 경북고로 가는 길이다. 20餘 年 前, 滿員버스에 시달리며 隣近 대구여고 女學生들과 즐거움(?)을 나누던 追憶의 길. 그 길을 따라 記者의 記憶도 現在와 過去를 넘나든다.

    이 길은 新作路가 생긴 1985年 當時 경북고 學生 外에는 通行 人口가 거의 없어 많은 地域 高校로부터 부러움을 샀다. 事實 그 길은 경북고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 1985年 대봉동 敎師에서 황금동 現在의 敎師로 移轉할 때 이 길도 完工됐는데, 1983年 경북고 出身의 5共 權力實勢였던 노태우 當時 內務部 長官(32回)의 指示로 當初 計劃보다 2倍 以上 넓어졌다고 傳해진다. 事實關係가 어떻든 이 길 德分에 경북고를 둘러싼 황금동 隣近 地域은 以後 大邱市內 最高價의 아파트村이 들어설 발板을 마련했다.

    1984年 1月. 高入 聯合考査가 끝나고 配置 結果가 알려지자 父母님은 크게 失望하신 듯 慰勞의 말을 건넸다.

    “너 어쩔래? 工夫 안 시키는 公立學校에 들어가서….”

    그 무렵 경북고는 華麗한 名聲과 달리 서울對 進學 實績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는 事實이 아니었다. 正確하게 말하자면 경북고의 進學 成績이 下落한 게 아니라 덕원고, 경신고와 같은 新興 私立高校의 成跡이 日就月將하고 있었다는 게 옳다. 더욱이 경북고에 對한 一部 學父母의 失望感은 非平準化 時代의 경북고와 比較했기에 빚어진 것이기도 하다. 빛이 크면 그늘도 큰 法. 嶺南圈 秀才들이 모두 모여들었던 選拔集團과 大邱·慶北 地域의 온갖 張三李四(張三李四)를 모아둔 平準化 世代의 進學成跡을 어떻게 水平 比較할 수 있겠는가.

    ‘경북고 80年史’(1996年 發行)에 나온 1970年代 경북고 出身 學生의 서울대 進學 記錄을 보면 입이 딱 벌어진다. 非平準化 마지막 世代인 53~58回(71~76學番)의 서울대 進學者 平均은 年 135名. 平準化 直前 旗手인 57回, 58回(75, 76學番)에서는 各各 152名과 153名이 서울대에 進學했다. 特히 湖南地域을 除外하면 全國 唯一의 非平準化 選拔集團이었던 58回는 同門 體育行事 때도 ‘警告 中의 警告’라는 懸垂幕을 내걸 만큼 自負心이 대단하다. 自身들은 大邱·慶北이 아니라 全國에서 모인 秀才라는 뜻에서다. 이 騎手는 現在 靑瓦臺를 비롯한 政府 各 部處에 書記官級 以上(大部分이 廳長, 局長級)만 13名이 布陣해 있다.

    경북고 入學은 로또?

    이에 反해 1980年代의 ‘平準化 경북고’는 오히려 옛 名聲 때문에 損害를 봤다. 大邱地域 高校 中 경북고만은 特定 學群 없이 大邱뿐 아니라 慶北 全 地域에서 學生들을 募集했기 때문이다. 경북고의 平準化 效果를 大邱·慶北 全域의 學生들에게 公平하게 나눠주자는 趣旨였다. 따라서 한 班 學生의 折半은 大邱 出身이고 나머지는 慶北 出身이었다. 大邱地域 出身 學生들은 慶北地域 出身들을 ‘村놈’이라 불렀다.

    大邱·慶北地域 全體 中學校에서 學生을 募集하다보니 같은 中學校 出身이 2名 以上 경북고에 配定되면 運이 좋다는 말이 나올 程度였다. 그만큼 경북고는 平準化 以後에도 學父母들 사이에 人氣가 좋았다. 그래서 平準化 世代 사이에선 “뺑뺑이(抽籤)로 警告 들어가기가 試驗 봐서 들어가기보다 確率的으로 더 힘들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在京 68回 경북고 同期會長人 권석후(삼성생명 勤務, 在學 當時 總學生會長)의 回顧談이다.

    비록 湖南 偏重 人事가 있었다고 하지만 YS政權의 설움에서 벗어난 경북고 出身들은 DJ政權 들어 조금씩 기지개를 켠다. DJ政權은 地域按排 次元에서 경북고 出身들을 要所要所에 起用했다. 事實 ‘地域按排’라는 말보다는 ‘TK 民心 달래기와 具色 맞추기 人事’라고 하는 게 옳다. 경북고 出身은 아니지만 當時 農林部 次官이던 김동태(64·星州農高 出身)氏는 2000年 16代 國會議員選擧에 故鄕인 慶北 星州에서 민주당 候補로 ‘防彈 出馬’를 했다 慘敗한 後 1年8個月 만에 農林部 長官으로 돌아와 ‘國民의 政府’와 行步를 같이했다.

    當時 경북고 出身은 檢察總長을 2名이나 輩出했다. 박순용(44回)·이명재(42回)氏가 그들. 支廳長級 以上 幹部들도 京畿高(58名)에 이어 경북고가 28名으로 많았고 中央部處 1~3級 高位職 公務員 中에서도 경북고는 경기고에 이어 2位를 記錄했다. 1級 以上은 경기고 出身이 21名이고 이어 18名이 경북고 出身.

    記者는 동아일보에 入社하기 前인 2000年 初 연합뉴스의 經歷記者 面接을 치렀다. 當時 연합뉴스 社長은 한겨레신문 論說委員 出身의 金鍾哲(63)氏였다. 金 社長은 面接 時間의 折半을 記者의 出身 高校에 對해서만 이야기했다. 異常한 面接이었다. 假令 이런 式이었다.

    “경북고 出身이면 ○○○ 記者 잘 알겠네. 그럼 술도 많이 먹겠고. 그래서야 取材를 제대로 할 수 있겠나….”

    DJ 政權 아래 경북고 出身들의 苦楚를 뼈아프게 代理體驗한 面接이었다.

    너섬, 仁寺洞, 光化門포럼

    對句市廳에 到着해 現在 室·局長級 中에 경북고 出身이 몇 名인지 알아봤다. 取材 結果는 놀라웠다. 김범일 市場과 權寧世 行政 副市長(52回)을 除外하고 경북고 出身은 單 한 名도 없었다. 隔世之感이 일었다. ‘東亞日報’ 對句市廳 出入記者인 정용균 次長은 “大邱地域 記者生活 20餘 年에 이런 일은 처음 봤다”고 했다. 大邱地域에서도 이제 경북고 外의 人材 풀(pool)李 多樣化된다는 傍證이다.

    그런가 하면 노무현 政府는 5, 6共과는 比較가 되지 않지만 靑瓦臺와 檢察에서 경북고 出身을 重用했다. 이 地域의 民心이 反(反)노무현 情緖의 核心을 이루고 있는 것과는 對照的이다. 아마도 노무현 政權의 政治的 基盤 一部가 예전부터 이 地域에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盧 大統領의 司試 17回 動機인 정상명(48回)氏가 檢察總長이 됐고, 大邱高檢長(권재진·53回)과 釜山地檢長(金台鉉·55回), 濟州地檢長(정진영·58回)李 경북고 出身이다. 全體 檢事數字는 2006年 4月 現在 1992年의 73名보다 折半 以上이 줄어든 31名이다. 1位인 경기고 出身 檢事 數字도 38名에 不過하다. 1990年 以後 外國語高와 私立 名門高의 負傷으로 司試 合格者 出身高校가 多樣化 됐기 때문이다.

    行政府 3級 以上(檢査, 軍人, 國家情報院 除外) 公職者도 京畿高(69名)에 이어 경북고 出身(48名)李 2位를 다린다. 경북고 同門들에 따르면 現在 中央部處 書記官級 以上 公務員 中에는 80餘 名의 同門이 在職 中인 것으로 確認됐다.

    쥐 죽은 듯 보내야 했던 YS 政權과 DJ 政權 時節, 경북고 出身 公職者들은 同門會조차 꺼려야 했다. 한 高位職 同門은 “누구도 모이자는 말을 한 적이 없고, 또 모일 雰圍氣도 아니었다. 모이면 모두 죽는다는 式이었다”고 털어놨다.

    이런 雰圍氣는 DJ 政權 末期부터 사라져간다. 서울 汝矣島 政街와 金融圈을 中心으로 한 同門모임人 ‘너섬 포럼’이 만들어지고, 노무현 政府 들어서는 四大門안 官家와 言論 政界 靑瓦臺를 中心으로 한 ‘인사동 포럼’ ‘光化門 포럼’ 等의 同門 모임이 만들어졌기 때문. 이들 모임의 特徵은 政治的 性向에 求愛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도 말은 하지 않지만 屈曲의 歲月을 보내온 만큼 ‘政治가 끼어들면 모임 自體가 없어질 것’임을 同門 모두가 알기 때문일 터이다.

    同門과 同窓

    뜬금없는 人事 不滿이나 로비性 發言을 하는 同門이 間或 있지만, 그럴 境遇 바로 制止當하거나 外面받는다. 2005年 8月 서울 인사동에 있었던 仁寺洞 포럼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中央部處의 高位職 先輩 한 사람이 醉氣가 올라 同席한 李在鎔 當時 環境部 長官 앞에서 人事 不利益에 對해 눈물로 呼訴했지만 先輩들은 하나같이 外面하는 雰圍氣였다.

    記者는 最近 同門會에 갈 때마다 潺潺한 感動을 받는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政治權 先後輩가 어우러져, 또 在野團體 出身과 이들을 억누르던 警察 高位官僚 先後輩들이 웃으며 옛날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李明博系와 박근혜系로 나뉘어 으르렁거리는 한나라당 議員(13名)과 그 補佐官들도 私席에서 만나면 허물없는 同門일 뿐이다. 그들에겐 서로 손가락질하던 過去도, 現在의 다툼도 “未安하이”라는 한마디로 모두 풀린다. 3年 동안 한솥밥을 먹었다는 共通된 經驗이 政治的 見解差와 相反된 利害關係를 和解의 雰圍氣로 녹여버린다. 이것이 같은 門(門)을 드나들며 배우고, 같은 窓(窓)을 통해 世上을 바라봤던 同門과 同窓의 意味다.

    경북고의 過去와 現在에 對한 崔再源 辯護士(68回)의 날카로운 分析으로 이 글을 맺는다.

    “5·16軍事政變 以後 30年 동안 政權의 中心이 大邱·慶北에 있었고, 경북고는 그 時代가 要求하는 高級 人材풀의 任務를 다했다. 거기에 屬했든 거기에 抗拒했든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였다. 잘못이 있다면 時代에 있다. 同門 集團도 하나의 社會다. 社會는 左派, 右派, 中道, 政治的 無見解子 等 온갖 構成員이 섞인 ‘雜穀밥’이다. 慶北高度 그렇다. 경북고 同門會는 私的 經驗을 같이 한 모임일 따름이다. 그 다양한 構成員을 但只 같은 學校를 나왔다는 理由로 罵倒하고 하나의 이미지로 規定하려 한다면 그 또한 劃一主義高 獨裁다. 同門은 안 보면 보고 싶은 愛人 같은 集團이다. 그 以上도 以下도 아니다.”

    졸업 20년, 경북고 68회 최영철 기자의 ‘同門견문록’

    경북고의 옛 대봉동 敎師와 그곳으로부터 옮겨온 느티나무.

    “聯合考査 成績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學校에서 電話를 받은 어머니가 펄쩍 뛰며 기뻐해 내가 或 聯合考査 首席이라도 했는가 하고 생각했다. 알고보니 어머니는 내가 경북고에 配定된 事實을 通報받고 좋아하신 것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내로라하는 先輩들을 둔 學校에 入學하게 된 것을 나보다 더 기뻐했다.”

    動機 中 首席入學의 榮光을 누린 권재한은 父母님의 反應을 이렇게 記憶한다.

    “아이고 잘됐다, 니는 福을 타고 暖氣라. 거가 얼마나 좋은 學校지 니 아나. 硬膏가 大邱, 아니 全國에서 最高 학굔기라. 先輩들이 이 나라 기둥李禔.”

    그는 1993年 行政考試 財經職에 合格한 後 農林部 協同組合課長을 거쳐 美國 硏修 길에 올라있다. 그는 “父母님은 내가 行試에 合格했을 때보다 警告에 首席 入學한 것을 더 기뻐한 것 같다”고 했다.

    택시가 아파트村을 헤치고 황금동으로 들어가자 멀리 경북고의 붉은色 本館 建物과 그 꼭대기에 자리잡은 ‘百(白) 삼선’의 學校 象徵物이 눈에 들어왔다. 白色 삼선…. 非平準化 先輩들이 그것 때문에 한없는 自負心을 느꼈다면, 平準化 世代들은 그것 때문에 學窓時節 내내 주눅이 든 채 살아야 했다. ‘警告’라 하면 서울·京畿地域에서는 京畿高, 釜山·慶南圈에서는 경남고를 의미하지만 大邱·慶北地域에서는 경북고가 ‘警告’다.

    경북고는 1900年에 設立된 第1高普 경기고와 1909年에 設立된 第2高普 平壤高에 이어 1916年에 設立된 第3高普로 옛 校服과 校帽에 새겨진 ‘百 삼선’은 바로 이 順序를 象徵한다. 경기고는 白色 線이 하나였다. 백 三選은 아직도 本館 建物 위에 學校의 象徵物로 鮮明하게 남아 있으며, 現在의 在學生 校服 소매에도 그려져 있다. 當時 校帽의 백 三選은 秀才의 象徵이자 出世를 保障하는 徵標였다. 只今은 大邱 경신고(地方 高校 中 2005, 2006年 서울對 最多 進學) 同門들이 自身들이 ‘警告’라고 우기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져 경북고 同門들을 憤怒케 하고 있지만.

    택시가 경북고 正門 앞에 다다르자 가슴이 콩닥거렸다. 담牆 너머 運動場 가장자리에는 樹齡이 足히 70年은 넘어 보이는 느티나무들이 겨우내 감춰둔 軟草綠 이파리를 쏟아내며 校庭을 물들이고 있었다. 今方이라도 꽃망울을 터뜨릴 듯 물오른 木蓮의 꽃봉오리.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 벚꽃, 진달래….

    나무들이 품은 歷史

    그런데 느티나무는 어디에선가 많이 본 듯하다. 그렇다. 그 느티나무들은 황금동으로 移徙 올 때 대봉동 敎師에서 우리와 함께 온 同志들이었다. 當時 이종률 校長(1978年 第6代 慶北道敎育監)은 이들 나무에 온갖 功을 들였다.

    “경북고의 歷史는 곧 校庭에 있는 나무가 말한다. 나무를 가꾸는 것은 곧 母校의 歷史를 가꾸는 것이다.”

    우리는 熱心히 물을 주고, 거름도 줬다. 대봉동 敎師에서 황금동 敎師로 移徙하면서 當時에는 보기 드문 大型 起重機가 動員된 記憶도 있다. 當時 돈으로 나무 以前에만 1億원이 들었다고 하니 경북고 東門의 나무 사랑이 어느 程度인지 斟酌할 수 있다. 移徙하고 얼마 안돼 느티나무 몇 그루가 枯死(枯死)하자 校長先生님은 學生들을 甚하게 다그쳤다.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대봉동 敎師에서도 그랬듯, 여름 땡볕 아래 敎鍊 授業의 좋은 避難處가 되었다. 오랜 期間 慶北道敎育監을 지낸 이종률 先生님의 경북고 校長 赴任은 當時 경북고의 位相과 總同門會의 威力을 보여주는 事例 中 하나다.

    졸업 20년, 경북고 68회 최영철 기자의 ‘同門견문록’

    경북고 校庭에 있는 노태우 前 大統領 記念植樹.

    校門에 들어서니 本館으로 오르는 兩쪽 篇으로 樹齡 20餘 年 안팎의 四철목 群落이 모습을 드러낸다. 韓國 社會를 들었다 놓았다 하던 大先輩들이 學校 移轉을 記念해 심은 나무들. 20年 歲月 동안 나무들은 몰라보게 자라 있었다. 나무를 심은 先輩의 騎手와 이름이 둥치 앞 작은 돌에 彫刻되어 있다. 그 때 미리 連絡을 받은 경북고 윤진보 交感이 반갑게 記者를 맞았다. 尹 校監은 51回 卒業生이다.

    校門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가장 왼쪽의 나무는 이효상(경북고 4回, 1989年 작고)씨가 심은 것. 한 時代를 風靡한 詩人이자 作家, 敎育者, 學者, 그리고 朴正熙 政權을 떠받치던 政治權力의 核. 그의 삶은 한 마디로 ‘風雲’에 휩싸인 삶이었다. 6·7·9·10代 國會議員과 國會議長을 지내며 공화당을 이끈 核心 政治勢力이었던 그. 그의 둘째아들이 最近 樞機卿 物望에 올랐던 天主敎 大邱大敎區의 이문희(35回) 大主敎이다. 李孝祥氏는 경북고 同窓會地인 ‘硬脈저널’이 2002年 11月 同門 438名을 對象으로 한 設問調査에서 母校를 빛낸 同門 1位(45.65%)에 올랐다. 다음이 노태우 前 大統領(32回), 3位는 신현확 前 國務總理(20回), 4位는 ‘國民打者’ 李承燁(78回)이었다.

    記念植樹 동산은 길게 펼쳐져 있다. 記者가 履歷을 대충 斟酌할 수 있는 人士의 이름만 羅列해도 20名이 훌쩍 넘어갔다. 정희택(19回, 前 監査院長, 11代 민정당 國會議員), 徐相箕(45回, 現 國會議員), 박철언(41回, 13·14·15代 國會議員), 서동권(33回, 前 檢察總長, 安企部長), 金東喆(38回, 辯護士, 前 大邱地檢長), 김용철(26回, 前 大法院長), 김복동(33回, 前 陸軍士官學校長, 14·15代 國會議員), 손제석(31回, 前 문교부 長官), 최재호(16回, 前 大法官), 김준성(20回, 前 經濟企劃院 長官, 現 履修그룹 名譽會長), 신현확(20回, 前 總理), 朴浚圭(25回, 前 國會議長, 9線 國會議員), 이영창(34回, 14代 國會議員, 前 治安本部長), 金星坤(15回, 4·6·7·8代 國會議員, 쌍용그룹 김석원 會長이 아버지를 追慕해 記念植樹), 문희갑(37回, 12·13代 國會議員, 前 大邱市長), 홍희흠(34回, 前 대구은행長), 김연조(37回, 前 중앙종금 社長), 조근해(38回, 前 空軍參謀總長), 정해창(37回, 前 法務部 長官), 김만제(34回, 前 經濟副總理, 16代 國會議員)…. 記念植樹를 한 時點이 1984~92年이라 그런지 그 무렵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의 이름이 主로 눈에 띄었다.

    ‘TK 마피아’

    경북고의 名聲은 主로 1960年 中盤부터 1992年까지 形成됐다. 大統領(盧泰愚)을 비롯해 國務總理, 國會議長(3名), 大法院長 等 3部 首長, 副總理 6名, 長官 37名, 國會議員은 157名을 輩出했다. 그中에는 9線을 한 議員(박준규)도 있고 6線(김수한)의 議員도 있다. 5線은 강재섭, 4線은 이효상, 金星坤 等. 法曹界는 판·檢事 辯護士를 통틀어 또는 各各을 分離해도 경기고에 이어 不動의 2位를 固守해왔다. 同門 法曹人數 380名. 現職 判·檢査 110名에 辯護士만 200名이다. 檢察總長만 7名이 輩出됐다.

    記念植樹 동산 맨 위 本館 建物 맞은便 花壇에는 3坪 남짓한 空間에 노태우 前 大統領의 記念植樹 花壇이 따로 造成돼 있다. 學校 關係者에게 들으니 以前 當時 심은 나무가 죽어 다시 심었단다. 學校 안에서도 位置가 가장 좋은 곳인데, 土質이 別로 좋지 않아 나무가 잘 자라지 못한다고 했다. 記念植樹 中 唯一하게 노태우 前 大統領이 심은 나무만 죽었다. 경북고는 歷史觀에도 ‘學校를 빛낸 同門들’이란 코너에 노태우 前 大統領의 空間을 따로 만들어 그 治績을 써 놓았다. 서울올림픽의 成功的 開催와 韓半島의 非核化에 關한 共同宣言, 1987年 6·29宣言을 통해 權威主義 時代를 淸算한 것 等을 꼽았다.

    1961年 5·16軍事政變에서 1990年代 初 김영삼 政權이 들어서기 前까지 卒業回數(生年)로 따져 30回 後半부터 40回 後半까지의 경북고 卒業生들은 學校의 人脈과 이름 德을 톡톡히 본 世代다. 이효상·신현확·박준규氏의 경북고 파워는 政界의 主流를 이뤘고, 法曹·行政府·警察 그 어느 곳에서나 경북고 出身은 出世街道를 달렸다. 노태우 大統領 在任 時節인 第13代 國會議員 中 경북고 出身은 12代 때보다 2倍(16名)나 늘었고, 1990年에는 大檢察廳 中央搜査1課長, 서울地檢의 公安 1部長, 刑事 1部長, 特需 1部長 等 核心 要職이 모두 경북고 出身이었을 程度.

    이 때부터 경북고는 ‘TK 마피아’란 소리를 듣기 始作한다. 또 서울對 法大, 陸史와 함께 ‘曺國 亡國和 3個校’로 경북고의 이름이 오르내린 것도 이 時期다. 하지만 경북고 歷史를 제대로 살펴보면 이는 斷面만 본 데서 비롯된 誤解라는 事實을 알 수 있다.

    “너희들은 아직 世上을 몰라”

    졸업 20년, 경북고 68회 최영철 기자의 ‘同門견문록’

    同門 設問調査 結果 ‘母校를 빛낸 同門’ 1位에 오른 李孝祥氏(왼쪽)와 박준규氏. 校庭의 記念植樹 동산에 있는 標識石들(왼쪽부터 이효상, 신현확, 박철언).

    1980年代 中盤 學番 中 特히 1987年을 大學에서 보낸 많은 경북고 同門은 노태우 前 大統領 때문에 갖은 苦楚를 겪었다. 民主化 抗爭이 한창이던 1987年 고려대 1學年이었던 記者는 再(在)고려대 경북고 同門會를 알리는 傳單紙가 校內 곳곳에서 찢겨 나가는 光景을 目擊했다. 붙이고 또 붙여도 亦是 몇 時間이 안돼 찢어져 人便을 통해 알음알음으로 모여야 했다. 同期들끼리 모여 술을 마시다 경북고 出身이라는 理由만으로 學友들에게 두들겨맞은 일도 있었다.

    그해 6·29宣言이 있고 나서 노태우 민정당 代表委員이 次期 大統領候補로 選定된 지 얼마 後였다. 고려대 行政學科 황대일 先輩(65回, 現 聯合뉴스 次長)로부터 急한 連絡이 왔다. 當時 노태우 大統領候補 캠프에 있던 경북고 先輩들로부터 在京(在京) 경북고 出身 大學生을 모두 모으라는 指示가 있었다고 했다. 모임 場所인 연세대 앞 高級 韓牛食堂 ‘新村가든’으로 가기 前, 黃 先輩와 우리는 “이는 不法選擧運動이며 더구나 노태우 候補는 大統領이 되어서는 안 될 人物이니 모임 自體를 뒤엎어버리자”고 決意하고 行事場으로 向했다.

    行事場에는 경북고 出身 연세대生과 서울大生, 서강대生들이 나와 있었다. 서울대에서는 當初 모임 參席 自體를 拒否하려다 代表團만 參與해 自身들의 뜻을 傳達했다. ‘노태우 候補 支持나 運動員 參與는 不可하다’는 것이었다. 行事가 무르익으면서 우리는 作戰대로 노태우 候補에 對한 批判을 쏟아내기 始作했고, 結局 모임은 跛行으로 끝이 났다. 그 때 노태우 캠프에 있던 先輩들이 던진 말은 아직도 記憶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너희들이 아직 어려 世上을 모른다. 언젠가 기대고 依支해야 할 先輩들이 必要하다는 事實을 切實하게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오늘 뼈아픈 失手를 했다. 머지않아 後悔할 날이 올 것이다.”

    先輩들이 건넨 모임의 食代와 活動費(?)를 물리친 탓에 그해 財經 경북고 大學生 同門들은 下宿費와 自炊房 月貰를 못내 끙끙거린 記憶을 갖고 있다. 이 事件이 있고 얼마 後 在京 大學生 同門會 次元에서 各 大學別로 ‘노태우 候補 경북고 除名運動’이 擴散됐다. 自身의 高校 先輩를 同門에서 除名하라며 피켓을 들고 學校 안을 도는 場面이 演出된 것이다.

    當時 一角에선 盧 候補가 대구공고를 다니다 學校長 推薦으로 경북고에 編入했기 때문에 正統 先輩로 볼 수 없다는 主張도 일었다. 그러나 이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論理다. 轉學을 와 卒業했다고 先輩가 아니라면 同門에서 除名해야 할 사람이 數百名은 넘을 터. 盧 候補에 對한 拒否感은 光州民主化運動 彈壓과 軍部獨裁에 對한 當時 學生들의 反抗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게 옳다.

    一名 ‘新村가든’ 事件은 또 다른 紛亂을 가져왔다. 노태우 候補 캠프의 先輩들이 서울대, 古代, 連帶, 西江大 在學生만 後輩로 認定해 다른 大學 在學生은 부르지도 않았기 때문. 그들의 論理는 그 ‘以下’의 大學에 다니는 學生은 非平準化 時期라면 경북고에 들어올 能力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反撥은 불 보듯했다. 非平準化 世代와 平準化 世代를 나눠서 同門會를 따로 해야 한다는 主張이 나올 程度였다.

    政治판은 稚氣어린 後輩들의 생각과는 全혀 다른 樣相으로 돌아갔다. 5·6共 時節 경북고의 威勢는 하늘을 찔렀다. 期數別로 列擧해야 할 程度로 要職이 경북고 出身들로 채워졌다. 市中에는 “경북고 出身은 電話 한 通으로 民願을 解決한다”는 말이 나돌았다. 5共 時節엔 김만제 副總理 兼 經濟企劃院 長官, 정해창 法務部 長官, 정호용 內務部 長官(32回, 13·14代 國會議員), 사공일 재무부 長官(39回, 고려대 夕座敎授), 김윤환 大統領 祕書室長(32回, 10·11·13·14代 國會議員, 신한국당 代表委員) 等이, 6共에서는 노태우 大統領을 起點으로 박철언 政務 第1長官, 서동권 安企部長, 이종구 國防部 長官(35回), 서영택 國稅廳長(38回, 前 建設部 長官), 김우현 治安本部長(34回, 前 慶北道知事) 等이 實勢를 이뤘다.

    古代 인촌墓所 ‘줄빠따’ 事件

    1987年은 政治的 民主化뿐 아니라 社會文化의 民主化에도 轉換點이 된 해였다. 記者는 高等學校 時節에도 經驗하지 못한 同門 毆打를 大學에서 經驗했다. 所謂 ‘87年 古代 인촌墓所 줄빠따 事件’이 그것이다. 80學番 移轉 先輩들로부터 “同門會 參席率이 低調하다”며 全體 召集令이 떨어졌고, 가랑비가 오는 中에 경북고 出身 古代 在學生 全體가 박달나무 몽둥이로 매를 맞았다.

    졸업 20년, 경북고 68회 최영철 기자의 ‘同門견문록’

    事緣 많은 경북고 大講堂. 그 앞으로 先輩들의 記念植樹 동산이 펼쳐져 있다.

    ‘줄빠따’는 옛 軍隊에서 비롯된 것으로 第一 古參으로부터 期數別로 한 臺씩 늘어나 막내는 ‘죽도록’ 맞는 毆打 方式. 當時 1學年 막내였던 우리 同期들은 ‘줄初喪’이 豫想되는 狀況이었다. 그러나 이날 事件은 中間 期數 先輩들이 “우리들까지만 맞고 後輩들은 때리지 않겠다”고 叛亂을 일으킴으로써 一段落됐다.

    그後 벌어진 會食 자리에서 경북고 出身 古代 同門會는 傳統的으로 내려오던 ‘줄빠따’를 永遠히 없애기로 다짐했고, 그 約束은 現在까지 지켜지고 있다. 當時 先輩의 指示로 박달나무 몽둥이를 求해왔던 김진우(高麗大 時間講師)는 아직도 動機, 先輩들로부터 辱을 먹고 있다. 너무 크고 튼튼한 몽둥이를 求해왔기 때문이다.

    경북고의 이름 德을 보지 못했다고 主張하는 世代는 386世代뿐만이 아니다. 이른바 ‘緊急措置 세대’라고 불리는 70年代 學番(50~59回)들도 “비록 386世代들만큼 苦楚를 겪지는 않았지만, 좋은 經驗은 別로 못했다”고 主張한다. 緊急措置 世代가 社會生活을 旺盛하게 하던 40代 때 YS 政權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法曹界와 行政府에서 이른바 ‘경북고 大虐殺’이 일어난 時期다. 경남고와 부산고 出身이 躍進하고 경북고 出身은 人事에서 繼續 밀려났다.

    “人事할 先輩가 없다”

    ‘文民政府’는 當時 김영삼 大統領의 母校인 경남고 人脈의 獨舞臺라 해도 過言이 아니었다. 金 大統領은 1995年 9月 경남고 後輩인 金綺秀氏를 檢察總長에 임명한 後 法務長官에 自身의 경남고 2年 先輩인 안우만氏를 앉힌 것을 비롯해 警察廳長에 박일룡氏, 國稅廳長에 추경석氏, 司正祕書官에 배재욱氏를 임명했다. 事情(司正)의 核心라인이 모두 경남고 出身으로 交替된 것. ‘皇太子’ 賢哲氏가 卒業한 경복고 出身도 躍進했다. 경복고 出身으로는 이한동 國會副議長, 이원종 大統領政務首席, 김덕룡 政務 第1長官, 金綺秀 大統領隨行室長 等이 있었다. YS 政權 때 行政考試에 合格한 先後輩, 同期들의 얘기는 當時 實相을 赤裸裸하게 드러낸다.

    “元來 合格하고 配置를 받으면 高等學校 先輩인 部處 局長, 課長에게 人事를 하는 게 慣例였는데, 우리 때는 人事하러 갈 先輩가 없는 境遇가 許多했다. 部處 黨 5, 6名씩 있던 國·課長級 先輩들이 全部 어디로 갔는지 한꺼번에 사라졌다.”

    1990年代 中盤이면 50回臺 騎手가 40代 中盤으로 접어들어 課長級, 進級이 빠른 사람은 局長級에 앉아 있어야 正常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경북고 史上 가장 熾烈한 入試를 치렀고 考試 合格率道 가장 높은 旗手였다. 그러나 정작 ‘도움’이 必要할 때 先輩들은 그들 앞에 없었다. 軍에서도 하나회 退出로 경북고 出身이 沒落하면서 進級에서 줄줄이 疏外됐다. 50回臺 旗手 中 한 先輩는 술자리에서 後輩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警告를 나와 陸士를 卒業하면 超高速 進級이 保障됐다. 별 하나 따는 것은 問題가 아니었는데, 50回 以後로는 하나會 때문에 거의 中領도 못 되고 옷을 벗는다.”

    그래도 國會는 YS 政權이 들어서기 前인 1992年 14代 總選이 치러져 禍를 면했다. 경북고 出身 國會議員은 13代와 마찬가지로 16名이었다. 이른바 ‘TK 情緖’로 일컫는 民心이 反映됐고, 大邱·慶北의 國會議員 出馬者 大部分이 경북고 先後輩들이기에 可能한 일이었다. 이런 防禦的 TK 民心은 15代(18名), 16代(16名), 17代(15名)까지 경북고 出身 國會議員의 數字가 줄어들지 않게 하는 原動力이 되고 있다. 경북고 同門들 사이에선 “YS가 ‘우리가 남이가’ 하고 TK 民心을 回游해 大統領이 된 後 TK 情緖를 代表하는 경북고 出身을 兎死狗烹했다”는 不滿이 터져나왔다.

    ‘꼴통 68回’, 龍 되다

    有名 先輩들의 記念植樹 동산 옆에는 경북고의 자랑거리인 大講堂이 있다. 스탠드와 홀을 합치면 全校生이 들어갈 수 있는 넓은 講堂이다. 學校 移轉 後 이곳을 처음으로 使用한 同期들은 講堂과 關聯해 저마다 事緣을 안고 있다. 그곳은 全校生이 一週日에 1~2時間씩 劍道를 배우던 場所이기도 하다. 劍道가 교기(校技)라 全國體典 매스게임에서 劍道 품세 示範을 보이던 경북고 學生들은 좀 誇張해서 ‘雨傘 하나만 들면 무서울 게 없다’고 할 만큼 劍道에 對한 自負心이 强했다.

    졸업 20년, 경북고 68회 최영철 기자의 ‘同門견문록’

    경북고와 陸士 同期이자 切親한 親舊 사이였던 노태우 前 大統領과 정호용 前 議員.

    講堂과 關聯해서는 잊지 못할 記憶이 또 있다. 每學期 이어진 先輩들의 特講이 바로 그것. 第4代 總同窓會長人 조창희(16回, 前 判事) 辯護士와 當時 문희갑 經濟企劃院 次官의 演說이 特히 記憶에 남는다.

    “工夫해야 합니다. 先輩들이 쌓아놓은 빛나는 傳統을 後輩들이 무너뜨리면 됩니까. 歷史의 수레바퀴를 先輩들은 앞에서 끌고 後輩들은 뒤에서 밀어야 합니다. 우리 學校는 祖國 近代化의 役軍이자 엘리트 排出의 産室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끄는 先輩는 있는데 뒤에서 미는 後輩가 없어서야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當時 2學年이던 우리에게 學校側이 이렇게 ‘남다른’ 配慮를 한 것은 우리 同期들의 學歷이 워낙 뒤떨어져 뭔가 刺戟劑가 必要했기 때문이었다. 1學年 때 全國體典 매스게임 練習을 하느라 거의 8個月 동안 工夫를 손에서 놓았던 우리는 同門 全體가 認定하는 ‘꼴통 期數’였다. 日射病으로 쓰러져가며 練習한 매스게임은 動機들에게는 더없는 親和의 場(場)李 됐지만 이를 契機로 많은 動機가 ‘飯(反)全斗煥主義者’가 됐다. 꽃샘추위가 싸늘한 봄부터 始作해 여름 땡볕과 가을 찬 바람을 이기며 練習한 매스게임이 전두환 大統領에게 單 5分間 보여주기 위한 ‘要式性 行事’였다는 事實을 알게 되자 高等學校 1學年 어린 마음에도 憤怒가 일었다. 그 餘波로 우리의 模擬考査 成跡은 大邱市內 高校 中 밑바닥을 헤맸다.

    이런 일도 있었다. 模擬考査 成跡 平均이 2次 人文系高보다 낮게 나오자 校長先生님이 우리 學年 全體를 한 사람도 빠짐없이 講堂에 모아놓고 “너희들, 都大體 어떻게 하면 工夫를 하겠냐”며 學生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어 校監先生님, 敎務部長, 2學年 擔任先生님과 班長들이 次例로 꿇어앉았고 結局 2學年 全體 學生이 꿇어앉았다. 校長先生님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30分쯤 靜寂이 흐른 뒤 講堂은 눈물바다가 됐다.

    以後 同期들은 變했다. 夜間 自律學習 志願者도 늘었고, 圖書館을 利用하는 學生도 늘었다. 3學年에 올라가면서 同期들의 學歷은 大邱 最高로 올라섰다. 人文系 首席은 늘 우리 차지였다. 그해 大學入試에서 서울대 15名 等 50餘 名의 動機가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에 合格했다.

    그리고 이 꼴통 汽水에서 學力考査(只今의 修能) 文科 首席도 나왔고 司法考試 首席合格者(황승화·法務法人 地平 辯護士, 斜視 38回)도 輩出됐다. 會計士로는 三逸會計法人 最年少 理事 권세호(美國 硏修 中)가 있고, 같은 騎手 財經考試 合格者 中 最年少로 書記官을 달고 課長 進級을 한 권재한度 빠뜨릴 수 없다. 1987年 카이스트 最年少 合格과 1990年代 最年少 博士도 우리 同期 中에서 나왔다(김성원). 現在 證券街 10代 애널리스트로 活躍하는 정승교度 同期同窓이다. 動機 中 司法試驗 合格者가 6名 나왔고, 在京 行試에 4名, 外務考試에 1名이 合格했다.

    꼴통 期數 出身이라 그런지 第34回 司法試驗에서 首席 合格한 황승화는 新聞 인터뷰에선 “權力에 흔들리지 않는 칼날 檢事가 되겠다”고 하고는 運動圈 出身 辯護士가 많은 로펌인 地平에 들어갔다. 그가 펴낸 民法서, 判例集은 司試 準備生과 法學徒들에게 읽히고 있다. 또 권두섭 動機는 민주노총 所屬 辯護士가 됐다. 現在는 韓美 FTA 反對 陣營에 理論的, 法的 論理를 提供하는 브레인으로 뛰고 있다.

    요즘도 同期들끼리 모이면 2學年 때 들은 大先輩들의 特講을 話題로 삼곤 한다. 그럴 때면 웃으면서 이렇게들 얘기한다.

    “우리는 뒤에서 熱心히 미는 것 같은데, 앞에서 끌어준다던 先輩들은 다 어데 갔노? 이제 先輩들 名聲 먹고 사는 時代는 끝난 기라.”

    事緣 많은 講堂을 나와 2學年 때 記者가 工夫했던 敎室로 向했다. 2學年 1班 敎室은 1學年 敎室로 바뀌어 있었다. 只今 後輩들은 校服 소매에 둘러진 백 三線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22年 後輩인 90回(2學年, 1990年生) 學生을 붙잡고 물었더니 對答이 傑作이다.

    90回 曰 “白色 삼선 폼 나잖아요”

    “1學年 땐 쪽 팔렸는데 요즘은 삼선 넣는 게 流行이에요. 폼 나잖아요.”

    아마 有名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의 삼선 패션이 流行한 것을 의미하는 듯했다. 그들에겐 백 三線보다는 校服의 패션 스타일이 關心事다. 世上은 變했다. 敎室을 둘러보다 2學年 때 擔任인 황대근 先生님이 늘 하시던 말씀이 기억났다.

    졸업 20년, 경북고 68회 최영철 기자의 ‘同門견문록’

    경북고 野球部가 各種 大會에서 받은 트로피들. 1967年 以後 優勝만 35回.

    “넌 하는 짓이 삐딱한 게 記者질 하면 딱 맞겠다.”

    先生님은 家庭通信文에도 그렇게 쓰셨다. ‘批判精神이 透徹해 將來 記者가 어울림.’ 學窓時節, 正말 萬事가 뒤틀리고 삐딱했다. 卒業 20年이 넘어 告白하는 事實이지만 2學年 夜間 自律學習 時間에 學校 全體를 停電으로 몰아넣은 張本人이 바로 記者다. 半强制的인 夜間自律 學習이 얼마나 싫었던지…. 庶務室 옆에 있던 콘센트 박스에서 퓨즈를 빼냄으로써 모든 動機의 歸家를 2時間 앞당겼지만 그 結果는 一波萬波였다. 이 일로 無知莫知하게 魂이 난 當時 2學年 班長들에게 未安할 따름이다. 黃 先生님은 學生의 特技를 잘 찾아주는 것으로 有名했는데, 文科班에 있던 金成願을 理科로 前科시킴으로써 後日 카이스트 最年少 合格과 最年少 博士의 榮光을 안겨주었다.

    黃 先生님의 말씀대로 ‘批判精神이 남달랐던’ 惡童은 1992年 9月 ‘영남일보’ 記者가 됐다. 收拾敎育을 받을 때인 그해 12月, 記者는 14代 大統領選擧 現場에 있었다. 投票 當日 민주당 大邱市支部에서 開票狀況을 스케치하던 記者는 경북고 出身이라는 理由로 김대중 候補 支持者들에게 時體말로 맞아 죽을 뻔했다. 김영삼 候補의 當選이 確定되자 그들은 “이 모든 게 경북고 出身들이 퍼뜨린 TK 情緖 때문이다. 特히 制度圈 言論이 도와주지 않아 그렇다”며 什器들을 마구 던지기 始作했다.

    收拾을 마치고 社會部로 配置됐는데, 部長이 高等學校 先輩였다. 競爭枝의 社會部長도 先輩, 編輯局長도 先輩였다. 地域新聞과 放送의 局長 中 折半 假量이 경북고 出身이었다. 次長級度 3名中 1名은 高校 先輩였다. 當時 大邱市長은 李義翊(40回, 15代 國會議員)氏. 그 後로 大邱市長은 現在의 김범일 市場(50回, 前 山林廳長)에 이르기까지 民選 市長 出帆 直前인 1995年 3~6月 석 달을 除外하곤 경북고 出身이 아닌 적이 한番도 없었다.

    또 14代 國會議員(1992~96年)은 大邱地域 地域區 議員 10名 全員이 경북고 出身이었다. 以後 15·16·17代 國會議員 中 大邱地域 出身은 總 10~12個의 地域區 中 2個 地域만 除外하고 모두 경북고 卒業生이었다(박근혜 議員 除外). 大邱市長選擧에선 每番 高校 先後輩間의 對決이 벌어졌고, 國會議員選擧도 樣相은 비슷했다. 지난해 大邱市長選擧에서 한나라당 김범일 候補와 겨룬 열린우리당 李在鎔(現 國民健康保險公團 理事長, 前 環境部 長官) 候補도 경북고 出身(54回)이다.

    경북고 出身 記者의 隘路

    또한 慶北大 醫大의 50代 中盤 以上 敎授 大部分이 경북고 出身이며 이런 現象은 윗代로 올라갈수록 더하다. 1960~70年代 中盤까지 경북고를 나와 서울로 進學하지 않은 이過半 優秀 學生 大部分이 慶北大 醫大에 들어가면서 생긴 現象이다. 그래서 1990年代 初盤까지 慶北大 醫大는 ‘경북고 同窓會’라는 말이 나왔다.

    狀況이 이렇다보니 大邱에서의 記者 生活은 苦難의 連續이었다. 主로 批判記事를 쓰는 社會部 記者로서 그 對象이 경북고 先輩일 可能性이 컸기 때문이다. 大邱 西部圈 警察署를 出入하던 1994年 무렵에는 當時 大邱市 西區 地域區의 정호용 議員(민자당)을 찾아갔다 된통 魂이 나기도 했다. ‘정호용 議員이 私組織을 만들어 不法 選擧運動을 하고 있다’는 提報를 받은 記者는 마침 地域區에 내려와 있던 鄭 議員을 만나러 事務室로 갔다. 鄭 議員은 1979年 12·12쿠데타의 主役으로 노태우 前 大統領과 陸士, 경북고 動機(32回)다. 김윤환 前 議員과 ‘TK 師團의 金庫지기’로 불리던 李源朝 前 議員(13·14代 國會議員. 지난 3月3日 別世)도 이들과 같은 騎手의 親舊들이다.

    워낙 敏感한 政治的 事案이라 鄭 議員과 記者 間에 오랜 時間 舌戰이 오갔다. 그때 補佐官이 들어와 귓속말로 鄭 議員에게 뭔가를 傳했다. 듣고 난 鄭 議員은 대뜸 “崔 記者 警告 나왔다매. 68回라꼬? 이거, 새까만 後輩가 先輩한테 버릇없이 이래도 되는 거야” 하고 쏘아붙였다. 瞬間 얼어붙는 듯했다.

    “議員님 왜 이러십니까. 저는 只今 新聞社를 代表해 나왔지 高校 後輩로서 찾아온 게 아닙니다.”

    鄭 議員은 다리를 꼬고 소파 뒤로 푹 눌러앉더니 이렇게 말했다. 영락없이 將軍이 副官에게 꾸지람을 하는 模樣새였다.

    “야 이, XX. 넌 임마, 先後輩도 없고 父母兄弟도 없냐. 이거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야. 當場 꺼져.”

    이러저런 辱을 더 얻어먹고 取材를 抛棄한 채 新聞社로 돌아와 先輩들에게 씩씩거리며 그날 겪은 일을 들려줬더니 慰勞는커녕 “넌 힘센 學校 나와서 좋겠다. 왜 가만있는 先輩를 건드리냐”며 이죽거렸다. 그런데 鄭 議員에 對한 提報는 거짓으로 드러났고, 記者는 鄭 議員側에 그날의 ‘無禮’를 깍듯하게 謝過했다. 좀 抑鬱하긴 했지만 ‘경북고 天下’의 大邱에선 다른 方法이 없었다.

    졸업 20년, 경북고 68회 최영철 기자의 ‘同門견문록’

    경북고 校庭에 있는 2·28大邱學生義擧 記念造形物.

    對句市廳 取材는 더 어려웠다. 1996年 末 建設 關聯 非理를 取材할 때였다. 外換危機가 오기 直前이었다. 大邱地域 建設會社들은 資金 回轉의 어려움을 打開하기 위해 갖은 꼼수를 쓰고 있었다. 關聯 證據를 모으고 確認 取材에 들어갔을 때 大邱市의 擔當 局長이 高校 先輩임을 알게 됐다. 當時 大邱市 副市長도 先輩였고 局長級의 90%가 高校 先輩들이었다. 시치미를 뚝 떼고 取材에 들어가는데, 擔當局長은 “後輩님 왜 이러십니까. 그 會社 社長도, 專務도 다 先後輩 사이인데 先輩 죽일 일 있어요? 자 다시 한番 생각하시지요”라고 했다. 相對便은 이미 記者에 對한 身上把握을 마친 狀態였다. 그래도 取材를 繼續하자 時間이 흐르면서 對話는 自然스럽게 尊待말에서 막말로 變했다. 그가 마지막에 한 말은 “너 繼續 이러면 大邱市內에 있는 公職 先輩들 얼굴은 다 보는 줄 알아”였다.

    會社로 돌아오니 여러 高校 先輩들을 通해 ‘로비’가 들어왔다. 結局 그 會社는 記事를 내보내기도 前에 不渡가 났다. 只今도 이름만 대면 다 아는 大邱 屈指의 建設業體였다.

    違和感 造成한 ‘서울대 入試班’

    記者 生活을 하면서 同期들 때문에 놀랄 일이 많았는데, 1993年 서울대를 다니다 防衛兵으로 服務 中이던 李某氏의 政府 部處(國防部 包含) 해킹 事件은 큰 衝擊이었다. 當時 聯合通信 記事를 받아 본 記者는 눈을 疑心했다. 被疑者의 이름과 나이가 當時 서울대를 다니다 入隊한 高校 同期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取材를 始作했으나 當時 國家安全企劃部는 徹底히 이를 막고 나섰다. “國家機密 事項이 漏泄된다”는 게 理由였다. 後日 그 動機는 戰果를 抹消하고 國家情報院에 들어갔다. 政府 사이트를 제집 드나들 듯하던 해커가 只今은 ‘사이버 戰爭’의 最一線에서 國家 機密을 지키는 把守꾼으로 變身한 것이다.

    1學年 建物을 두리번거리다 化粧室에 들어가니 1學年 때의 氣막힌 해프닝이 떠올랐다. 只今과 같은 水洗式 化粧室 文化에선 想像도 못할 事緣이다. 採便檢査가 있는 날 볼일을 못 봐 當日 아침에 親舊 한 名이 여러 級友의 것을 책임지던 일은 많은 이가 經驗한 追憶의 한 場面. 하지만 우리의 境遇는 獵奇的이었다. 當時 副室長이던 권재한軍은 級友들에게 採便封套 나눠주는 것을 깜빡했다. 그러다 ‘納期日’을 맞자 그는 在來式 化粧室에 가서 大便을 直接 퍼올린 後 60名 가까운 한 班 學生 全體의 採便封套에 各各 조금씩 담아 提出했다. 德分에 그 해 權君의 班 學生 中 많은 數가 영문도 모르고 驅蟲劑를 먹어야 했다.

    敎室이 있는 建物을 나와 點心을 먹으려고 校內 食堂으로 向했다. 元來는 學生들이 宿食할 生活修鍊館으로 만들어졌지만 우리 同期들에겐 아픈 傷處가 있는 곳이다. 學校側은 3學年 때 動機 中 全校 30等까지를 이곳에 合宿시키며 放課後 따로 工夫를 하게 했다. 一名 ‘서울대班’이었다. 그런데 豫期치 못한 問題가 發生했다. 上位圈 學生들이다보니 갈수록 競爭이 심해져 잠을 자지 않는 學生이 늘어갔던 것. 다음날 授業時間에 조는 學生의 大部分은 ‘서울대班’ 學生들이었다.

    또한 寄宿舍에 못 들어간 親舊들과의 違和感은 敎室 안팎에서 갖가지 不祥事를 빚어냈다. 結局 記者를 비롯한 몇몇 學生은 寄宿舍 生活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學校 關係者는 “寄宿舍 制度는 當時 많은 問題點이 생겨 1987年부터 廢止됐다”고 傳했다. 現在 生活修鍊館은 校內食堂과 洋弓選手들의 合宿所로 쓰이고 있다. 경북고 洋弓部는 最近 全國大會를 席卷하고 있다.

    옛 寄宿舍 뒤便에는 ‘高請願’이라는 蓮못이 들어서 있다. 記者가 卒業하고 2年 後에 생겼다는데 雅淡하고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1學年 때 대봉동 敎師에도 조그마한 蓮못이 있었는데 누군가 校長先生님이 기르던 觀賞用 잉어를 몰래 잡아 구워먹었다가 온 學校가 발칵 뒤집어진 일이 있다. 23年이 흘렀지만 아직도 ‘犯人’은 밝혀지지 않았다.

    蓮못을 돌아 개나리, 진달래가 반기는 野球場으로 갔다. 學窓時節 프로野球 三星 라이온즈팀은 專用 訓鍊場이 없어 이곳에 와서 練習을 했다. 當時 李萬洙 選手가 最高의 스타였는데 練習으로 쳐도 種種 공이 學校 담牆을 넘어갔다. 그래서 親舊들은 三星 라이온즈가 오면 담牆 뒤에서 기다렸다 공을 주워 親舊들에게 팔았다.

    이곳은 ‘國民打者’ 이승엽을 길러낸 곳이기도 하다. 이승엽은 記者의 꼭 10年 後輩다. 1985年 當時만 해도 全國에서 大運動場 外에 專用 野球場을 따로 가진 學校는 경북고밖에 없었다. 황금동 경북고 申敎師는 웬만한 專門大學보다 컸다.

    경북고에는 여러 가지 징크스가 있었는데 野球 成績이 좋으면 그해 入試 成跡도 좋다는 게 그中 하나. 例를 들어 全國 4冠王(靑龍, 鳳凰, 黃金獅子, 全國體典)을 達成했던 1981年엔 無慮 60 餘 名의 先輩가 서울로 上京했다. 全國 高校 中 所謂 名門大 進學率 1位였다. 成俊(63回) SK 와이번스 코치, 류중일(64回) 三星라이온즈 코치가 그 때 活躍하던 選手들이다.

    경북고의 또 다른 本流는 ‘進步’

    대봉동 敎師에서 옮겨온 느티나무를 따라 걷다보니 예전에 보지 못한 造形物이 하나 눈에 띈다. 2·28大邱學生義擧 記念塔으로, 1960年 4·19革命의 導火線이 된 大邱地域 高等學生들의 示威를 記念하기 세운 것이다. 一般人은 경북고를, 保守 旣得權層을 代表하고 旣成 權力을 뒷받침하는 學校로만 보는 傾向이 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2·28學生運動의 前衛 그룹은 경북고 學生들이었다.

    이들은 後에 韓日會談反對運動(6·3 抗爭)의 主役이 된다. 2·28學生義擧 當時 前衛의 人物은 조해녕(42回, 前 大邱市長), 박영조(43回, 대구대 敎授), 박삼옥(43回, 昌原經綸公團 理事長), 김헌출(前 釜山新港灣 代表理事長), 안택수(43回, 現 한나라당 議員), 金永培(43回, 前 랜덤하우스中央 代表理事), 홍승재(43回, 前 쌍용그룹 專務理事) 等이다. 1960年 4月 서울대 文理大에 다니던 潤飾(39回, 前 國會議員), 이수정(39回, 前 文化部 長官)은 4·19의 횃불이 된 ‘서울大 4·19 宣言文’ 作成을 主導했다.

    또한 1964年 3月 韓日屈辱會談 反對鬪爭으로 始作된 6·3抗爭의 先鋒에는 김중태(40回, 環境團體 綠色물결 代表, 歷史問題 執筆家), 현승일(41回, 前 한나라당 國會議員, 全 국민대 總長), 서정복(38回, 前 4月革命回 會長) 等이 있었고, 이원재(40回), 송진혁(42回)과 성유보 박삼옥 박용환 김헌출 박영조 안삼환 임종률 等 43回 騎手도 先輩들을 도와 猛烈하게 學生運動을 벌여나갔다.

    1960年代 學生運動과 革新系는 事實 경북고 人脈이 主導했다 해도 過言이 아니다. 當時 學生運動을 主導한 서울대 文理大에 경북고 出身이 大擧 布陣해 있었다. 6·3 當時 서울對 非運動圈 멤버들 中에도 同參한 人物이 있다. 박철언, 정정길(42回, 現 울산대 總長, 前 서울대 大學院長)이 그들이다. 박철언氏는 以後 考試에 合格해 檢事가 됐다.

    이런 運動圈의 歷史는 1970年代로 이어져 김문수 京畿知事(51回, 前 國會議員)는 企業에 僞裝就業을 敢行해 勞動運動圈 最初로 勞組를 設立하는 主人公이 됐다. 金文洙 知事는 知事選擧 때 경북중 同期이자 親舊인 진대제 前 情報通信部 長官(51回, 경기고 出身)과 맞붙었다. 當時 두 사람은 네거티브 選擧運動을 一切 하지 않은 것으로 有名하다. 또 1974年 인혁당 事件에 聯關돼 抑鬱하게 死刑된 여정남(43回, 前 慶北大 總學生會長)氏도 경북고 出身이다.

    열린우리당 김부겸 議員(56回)은 서울大 政治學科 在學 中 1978年 緊急措置 9號에 反對해 싸우다 實刑을 살았고, 以後 1980年 ‘서울의 봄’ 當時 學生運動 指導部로 活動하다 5·17 戒嚴令 違反으로 拘束, 서울대에서 除籍되는 아픔을 겪었다. 當時 戒嚴 鎭壓軍의 指導部에는 金 議員의 高校 23~4年 先輩인 盧泰愚·정호용·김복동氏가 있었다. 同門이지만 서로 가는 길은 너무나 달랐다. 경북고 同門 中에선 흔한 일이었다. 1970~80年代 경북고 運動圈은 先輩들이 治安本部長이거나 安企部長일 때 이들 機關에 붙잡혀 들어가 苦楚를 겪은 境遇가 許多했다.

    記者는 YS 政權 때인 1993~94年 大邱에서 이런 光景을 자주 目擊했는데, 當時 大邱市長은 李義翊(40回), 조해녕(42回)氏였다. 그런데 環境 問題로 對句市廳 앞에서 示威를 하는 現場에는 停學 前 環境運動聯合 共同代表(40回, 現 市民의 모임 참길回 代表)가 있었다. 정 代表는 大邱 運動圈의 代父로 불리는 人物로 그 밑에는 前 環境部 長官 이재용氏가 大邱環境運動聯合 執行委員長으로 있었고, 大邱經實聯 事務處長 민영창(56回, 國民苦衷處理委員會 調査2局長, 韓國勞動黨 事件으로 拘束)氏도 있었다.

    두 市場은 “市場 물러가라”는 口號가 度를 넘어가면 한番씩 視聽 1層으로 내려와 停學 代表를 마주하며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한 名은 정 代表의 動機고 한 名은 後輩였기에 서로를 너무 잘 알았다. 特히 조 市長은 2·28 學生義擧의 ‘盲腸’으로 運動圈으로 쳐도 정 代表의 後輩다. 이렇듯 大邱의 地方 行政府 리더들도 大槪 경북고 出身이지만 그 反對便에 선 市民團體의 首長도 경북고 同門인 境遇가 많았다.

    DJ 政權의 경북고 出身 ‘防彈 人事’

    경북고 正門을 빠져나온 記者는 對句市廳에 가기 위해 택시에 올랐다. 가는 길에 20層 ‘영남일보’ 建物이 오른쪽으로 視野에 들어왔다. 記者는 IMF 外換危機를 거쳐 김대중 政府 時節인 2000年 6月 ‘영남일보’를 떠나 ‘東亞日報’에 經歷記者로 들어왔다. 故鄕인 大邱를 떠나 서울로 올라온 것이다.

    當時엔 湖南의 傳統 名門高들이 躍進하고 있었다. 광주고, 광주일고, 전주고, 목포고가 바로 그들로 이정빈 外交通商部 長官, 안정남 國稅廳長, 양성철 駐美大使, 김태정 法務長官, 朴柱宣 大統領法務祕書官 等은 광주고, 이기호 靑瓦臺經濟首席, 신광옥 前 靑瓦臺民政首席, 김대웅 大檢 中搜部長 等은 광주일고, 진념 財經部 長官과 오홍근 國政弘報處長, 한광옥 민주당 代表(전주고 全身 全州 北中) 等은 전주고 人脈이다. 또 신승남 檢察總長은 목포고, 권노갑 前 민주당 最高委員은 목포상고 出身. 全國 79個 主要 公企業體腸 中 광주고(9名), 광주일고(8名), 전주고(5名), 목포고(2名)가 24名(30.4%)을 차지했다. 경북고 出身은 單 2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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