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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刑囚 심종성의 ‘프리즌 브레이크’|新東亞

死刑囚 심종성의 ‘프리즌 브레이크’

“零下 20度! 잔인무쌍한 殺人者는 뭘 먹고 어디 숨었는고?”

  • 電縫管 韓國科學技術院(KAIST) 敎授·國文學 junbg@kaist.ac.kr

    入力 2007-05-03 10: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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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밤中에 남의 집에 뛰어들어 强盜 殺人을 저지른 無道한 犯罪者가 裁判을 받으러 法院에 나왔다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矯導官과 警察, 憲兵에 步兵까지 延人員 1萬餘 名이 動員된 史上 最大의 追跡에도 痕跡 하나 나오지 않자 當局은 困境에 빠진다. 長劍을 들고 脫走한 死刑囚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사람들의 恐怖心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가고, 言論의 叱咤는 極으로 치닫는데….
    사형수 심종성의 ‘프리즌 브레이크’

    1933年 1月 심종성이 脫走한 直後 警察들에게 配布된 그의 手配寫眞(작은 寫眞)과‘ ‘別乾坤’ 1933年 4月號에 실린 ‘罪와 벌과 人生 : 脫獄囚 심종성과 共犯 김봉주의 犯罪 裏面 飛火’ 記事.

    1931年 10月26日 새벽 3時, 平壤 선교리에서 精肉店을 겸한 雜貨商을 經營하는 임극환은 商店에 딸린 집에서 愛妾 안태준과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邊두리 裏面道路의 맨 끝 집이라 周圍는 漆黑같이 어두웠고 人跡 또한 드물었다.

    “쨍쨍!”

    늦가을 寒氣가 을씨년스러운 쥐 죽은 듯 고요한 距離에 짧고 차가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임극환은 새벽하늘을 가르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雜貨店 뒷門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미처 電燈불을 켜기도 前에 누군가가 寢室 미닫이門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周圍가 어두워 怪漢의 正體는 分揀하기 어려웠지만,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 두 個는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매끈하게 빠진 日本도 한 자루와 짧고 굵은 食道 한 자루였다. 임극환은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떨며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悲鳴을 가까스로 참았다. 잠결에 殺氣를 느꼈는지 뒤늦게 안태준이 눈을 떴다.

    “으악!”

    안태준이 無意識的으로 悲鳴을 지르자 食道를 든 怪漢이 달려들어 안태준의 입을 틀어막았다. 怪漢이 制止해도 안태준은 악을 쓰고 몸을 비틀며 거세게 抵抗했다. 愛妾이 逢變을 當하자 이부자리에 앉아 떨고 있던 林劇圜이 無意識的으로 벌떡 일어났다. 이番엔 日本刀를 든 怪漢이 임극환을 때려눕혔다. 怪漢들은 두 사람을 돌아눕히고는 등에 올라타 鐵絲로 兩손을 동여맸다. 反抗하면 뒤통수든 等이든 마구 후려쳤다. 夫婦는 兩손을 完全히 결박당한 後에야 비로소 抵抗을 멈췄다.



    夫婦를 制壓한 두 怪漢은 손電燈을 켜고 집안을 뒤졌다. 現金은 임劇換衣 紙匣에 든 3원20錢밖에 없었다. 장사하는 집에 現金이 그것밖에 없을 理 없었지만 아무리 때리고 脅迫해도 임극환은 끝내 現金을 숨겨둔 場所를 일러주지 않았다. 두 怪漢이 임극환과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안태준은 食道를 든 怪漢을 有心히 뜯어보았다. 周圍가 어두워 흐릿하게 輪廓만 보였지만, 分明 익은 얼굴이었다. 윽박지르는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어보니 分明히 ‘그’였다. 食道를 든 怪漢의 停滯가 ‘그’인 것을 알아차리자, 兩손을 결박당한 後 줄곧 沈默을 지키던 안태준은 理性을 잃고 高喊을 질렀다.

    “네가 이런 일을 또 하고도 無事할 줄 아느냐? 풀려나면 가만두지 않겠다.”

    안태준이 소리치자 두 怪漢의 눈빛에는 突然 殺氣가 돌았다. 食칼을 든 怪漢은 憤怒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안태준에게 다가가서 鐵絲로 목을 감고 힘껏 잡아당겼다.

    “오냐. 네가 아직 精神을 못 차린 게로구나. 누가 이기는지 어디 한番 해보자.”

    食칼 든 怪漢이 안태준의 목을 조르는 동안 日本刀를 든 怪漢이 같은 方法으로 임劇換衣 목을 졸랐다. 鐵絲로 목을 졸린 夫婦가 몸을 뒤척이며 살려고 발버둥치자, 두 怪漢은 손으로는 鐵絲를 힘껏 당기면서 발로는 夫婦의 가슴과 배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寢室은 瞬息間에 夫婦의 코와 입에서 흘러나온 시뻘건 鮮血로 흥건히 젖었다. 夫婦는 한참이 지나서야 숨이 멎었다.

    3원20錢을 위한 殺人

    사형수 심종성의 ‘프리즌 브레이크’

    1931年 10月 殺人 嫌疑로 逮捕된 直後의 심종성과 김봉주.

    임劇圜 夫婦를 殘忍하게 殺害한 後 두 怪漢은 집과 商店을 샅샅이 뒤져 쇠고기, 옷가지, 담배 等 돈 나갈 만한 物件은 죄다 끌어 모았다. 140點이나 되는 物件을 훔쳐 커다란 褓따리 두 個에 가득 채웠건만 부피만 컸지 實속이 없었다. 强奪한 物件을 다 합쳐봐야 100원에도 못 미쳤다. 平凡한 月給쟁이 두 달値 月給에 該當하는 100원은 두 사람의 목숨과 맞바꿀 만큼 큰돈이 아니었다. 怪漢들은 부엌에 내려가 饌欌에 놓여 있던 떡을 배불리 먹은 後에야 褓따리를 한 짐씩 짊어지고 悠悠히 犯行 現場을 빠져나왔다.

    두 怪漢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느긋하게 平壤 中心街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大同敎를 건너 派出所 앞을 지날 때, 마침 巡査가 다가와서 물었다. 巡査는 험상궂게 생긴 두 사내가 꼭두새벽에 커다란 褓따리를 지고 가는 것을 미심쩍게 여겼다.

    “등에 진 것은 웬 짐이냐?”

    “아, 이거요. 移徙짐이에요.”

    巡査는 꼭두새벽에 男子 둘이서 移徙한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어수룩하지 않았다. 褓따리를 풀어볼 것을 要請하자 아니나 다를까 두 怪漢은 褓따리를 집어던지고 줄行廊을 놓았다. 巡査는 곧장 追跡해 食칼을 들고 侵入했던 怪漢을 붙잡았다. 日本刀를 들고 侵入한 怪漢은 同僚가 逮捕된 틈을 타 가까스로 脫出했다. 派出所로 連行해 問招하니 怪漢은 順順히 犯行을 自白했다.

    붙잡힌 怪漢은 强盜前科 3犯인 심종성이라는 者다. 그의 自白에 依해 當日 午前 共犯인 평양부內 臺찰리에 사는 殺人 前科者 김봉주마저 逮捕했다. 그와 同時에 平壤地方法院 검사국에서는 卽時 檢査가 出動하여 現場 檢證을 했다. 死體는 當日 午後 慈惠醫院으로 보내 剖檢에 들어갔다. (‘東亞日報’ 1931年 10月27日子)


    김봉주는 共犯인 심종성이 檢擧되는 光景을 目睹하고도 自己 집으로 돌아가 천연덕스럽게 자고 있다가 情報 蒐集次 出動한 景觀에게 逮捕됐다. 景觀은 김봉주의 大膽無雙한 行動에 犯人을 거저 잡고도 어이가 없어 혀를 내둘렀다. 檢事가 現場檢證에 나섰을 때, 血痕이 狼藉한 犯行 現場은 피 냄새가 코를 찔렀고, 消息을 듣고 달려온 안태준의 어머니가 외동딸의 죽음을 원통해하며 大聲痛哭해 피와 哭聲이 狼藉한 殺風景을 이루었다.

    犯人이 自白한 犯行은 이番 殺人强盜 外에 江도 네 건, 强盜 未遂 다섯 件, 竊盜 다섯 件이 있다. 김봉주는 殺人暴行强姦罪로 無期懲役을 宣告받고 京城刑務所에서 服役하다가 銀錢(恩典)을 입어 12年으로 減刑돼 昨年 6月에 假出獄한 자요, 심종성은 强盜罪로 懲役 7年을 宣告받고 亦是 京城刑務所에 服役하다가 今年 1月 假出獄한 자다. 京城刑務所에서 服役할 때 出獄한 後에는 强盜團을 組織하여 돈벌이를 하자는 約束을 맺었다가 심종성이 假出獄한 後 履行한 것이다.

    今年 6月 김봉주와 심종성은 龍岡郡 진지동 金融組合을 襲擊할 計劃을 세웠다가 毛의 途中 發覺돼 警察의 問招를 받았으나 證據不充分으로 釋放되었다. 둘은 한 番의 失敗에 屈하지 않고 刑務所 동무 두 名에게 10月27日 밤 寒天金融組合을 襲擊하자는 便紙를 發送하는 한便 남산정에 사는 간수 이와모토(岩本)의 집에 대낮에 侵入해 襲擊에 使用할 日本刀를 竊取했다. 그러나 하루 前날 임劇圜 夫婦를 殺害한 嫌疑로 逮捕되는 바람에 寒天金融組合 襲擊 計劃은 未遂로 돌아갔다. (‘朝鮮日報’ 1931年 10月28日子)


    一週日 後 심종성과 김봉주는 强盜殺人竊盜罪로 豫審에 回附됐고, 豫審에서 有罪가 認定돼 公判에 回附됐다. 이듬해 12月 平壤地方法院은 假出獄 期間에 無辜한 夫婦를 殘酷하게 殺害한 심종성과 김봉주에게 나란히 死刑을 宣告했다. 두 被告人은 犯行事實은 認定하지만 死刑은 지나치다고 卽刻 抗訴했다.

    死刑囚 脫走

    심종성과 김봉주의 抗訴審 公判은 1933年 1月16日 午前 平壤覆審法院에서 열렸다. 심종성은 집에서 差入해준 흰 저고리, 검정 바지 차림에 짚신을 신고 法廷에 나타났다.

    改正 直後 심종성은 裁判長에게 官選 辯護士를 믿을 수 없어 다른 辯護士를 選任하겠으니 公判을 延期해달라고 要請했다. 뚱딴지 같은 要求였다. 심종성이 死刑을 宣告받은 것은 辯護士가 無能했기 때문이 아니라 罪質이 나빴기 때문이다. 强盜前科 3犯이 假出獄 期間에 겨우 現金 3원20錢, 物品 100원어치를 强奪하려고 善良한 良民 두 사람을 極惡無道하게 殺害했는데 情狀參酌의 餘地가 있을 理 없었다. 裁判長은 꺼림칙했지만 被告人의 목숨이 달린 公判인지라 심종성의 要請을 받아들여 公判을 21日로 延期하고 廢井을 宣言했다.

    사형수 심종성의 ‘프리즌 브레이크’

    임劇圜 夫婦를 殺害하고 逃走하던 심종성과 김봉주가 警察의 檢問을 받고 逮捕된 平壤 大同敎의 當時 風景.

    午後 12時30分, 公判이 싱겁게 끝나자 平壤刑務所에서 被告人을 護送해온 무라카미(村上) 看守部長은 朝鮮人 간수 한 名과 함께 심종성과 김봉주를 裁判所 構內 留置場으로 데리고 갔다. 規定에 따라 두 被告人은 刑務所에서 護送車輛이 올 때까지 捕繩과 手匣에 묶인 채로 各其 딴 房에 誘致됐다. 두 被告人을 誘致한 後 朝鮮人 看守는 다른 被告人을 데리러 裁判所로 돌아가고, 무라카미 看守部長 혼자 남아 留置場을 지켰다.

    얼마 後 무라카미 看守部長은 用便을 보러 化粧室에 갔다. 쪼그리고 앉을 때 거치적거리는 長劍은 허리춤에서 풀어 冊床과 壁面이 마주친 곳에 세워두었다. 볼일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看守生活 22年間 늘 그랬던 것처럼 冊床 앞에 멍하니 앉아 未決囚 護送車輛을 기다렸다.

    午後 2時30分, 護送車輛이 到着했다. 무라카미 看守部長은 열쇠 뭉치를 꺼내들고 刑務所로 돌려보낼 被告人들이 監禁된 留置場 鐵門을 次例로 열었다. 심종성이 監禁된 留置場 門에 열쇠를 꽂자 열쇠가 헛돌았다. 굳게 잠겨 있어야 할 자물쇠가 풀려 있었다. 무라카미 看守部長은 무언가 대단히 잘못됐음을 直感했다. 설마 하는 希望을 품고 묵직한 鐵門을 열어젖히자 마지막 期待는 無慘히 사라졌다. 留置場 안에 들어 있어야 할 死刑囚 심종성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무라카미 看守部長은 罪囚가 脫走한 卽時 發見하지 못하고 午後 2時 半頃 罪囚를 監獄으로 돌려보내려고 留置場을 열어보았을 때 비로소 罪囚가 없는 것을 發見했다. 그때도 설마 脫走野 하지 않았겠지 하는 期待로 或是 다른 看守가 刑務所로 돌려보낸 것은 아닌지 調査했더니 罪囚는 刑務所에도 없었다. 裁判所로 派遣된 7名의 看守는 그때서야 비로소 脫走한 罪囚를 허둥대며 찾아 나섰다. (‘東亞日報’ 1933年 1月17日子)


    심종성을 찾느라 裁判所 留置場이 벌집 쑤셔놓은 듯 소란스러워졌을 때 무라카미 看守部長은 ‘아차’ 하며 허리춤을 더듬었다. 허리춤에 차고 있어야 할 長劍이 없었다. 記憶을 더듬어 앉아 있던 冊床 周圍를 뒤져보았지만 長劍은 그곳에도 없었다. 무라카미 看守部長이 化粧室에 가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에 死刑囚 심종성은 留置場을 빠져나와 看守의 長劍을 훔쳐 脫走한 것이었다.

    무라카미 看守部長이 大驚失色하여 刑務所에 急報瑕疵 刑務所 當局은 卽時 간수 全部를 非常召集하여 搜索에 나서는 한便 심종성의 脫走 事實을 平壤警察署와 帶同警察署에 通報했다. 午後 네 時 두 警察署에 非常이 걸렸다. 警察은 평양부內 全域에 물샐틈없는 警戒網을 치고 檢擧에 注力했다. 늦은 밤까지 景觀과 看守 떼거리가 東西南北으로 몰려다녀 평양부內는 때 아닌 緊張이 高調되었다. (‘朝鮮日報’ 1933年 1月18日子)


    看守와 巡査가 警戒網 構築을 끝냈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脫走한 時間이 正確지 않아 脫走犯이 警戒網 안쪽에 있을지 이미 빠져나갔을지 壯談하기 어려웠다. 두 팔이 捕繩에 묶이고 兩손에 手匣을 찬 심종성이 어떻게 바깥쪽에서 자물쇠로 굳게 잠근 刑務所 門을 열었는지, 어떻게 森嚴한 警戒를 뚫고 裁判所를 빠져나갔는지, 어디로 逃走했는지 모든 게 五里霧中이었다.

    死刑囚가 脫走한 것도 問題였지만, 富民의 安全이 더 問題였다. 1月 平安道 氣溫은 零下 20℃를 오르내렸다. 가벼운 홑옷 차림으로 땡錢 한 푼 없이 매서운 平安道 酷寒을 뚫고 逃走하자면 民家에 侵入해 掠奪과 竊盜를 일삼을 게 분명했다. 더욱이 捕繩에 묶이고 手匣을 찼다곤 하나 심종성의 손에는 무시무시한 長劍이 들려 있었다. 現金 3원20錢을 强奪하려고 無辜한 夫婦를 殘忍하게 殺害한 前歷에 비춰보면 長劍을 든 심종성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脫走犯에 對한 刑務所의 搜査權은 收監者가 脫走한 지 48時間만 認定됐다. 失墜된 名譽를 回復하려면 刑務所 當局은 어떻게든 48時間 안에 脫走犯을 檢擧해야만 했다. 平壤刑務所 데라카와(寺川) 所長은 심종성이 脫走한 것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하더라도 期必코 刑務所가 主軸이 돼 脫走犯을 逮捕해야 한다며 看守들을 督勵했다. 所長의 指示에 따라 刑務所에는 最少 人員만 남고, 나머지 200餘 看守는 48時間 동안 잠 한숨 자지 못한 채 흩날리는 눈발을 헤치며 脫走犯을 追跡했다.

    춤추는 大搜査線

    사형수 심종성의 ‘프리즌 브레이크’

    심종성 脫走 事件의 發源地인 平壤覆審法院.

    심종성의 脫走 事實이 밝혀진 지 10時間이 지난 1月17日 午前 12時30分, 平壤刑務所 看守 200餘 名, 平壤警察署와 帶同警察署 巡査 300餘 名, 步兵 77聯隊 所屬 憲兵隊 20餘 名 等 都合 500餘 名의 軍警 合同搜査臺는 脫走犯의 蹤跡을 찾아 奔走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좀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해 焦燥해하던 그때, 平壤驛前派出所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20代 後半의 사내가 나타났다.

    “서성리 鐵道 건널목을 건너다가 큰칼을 가진 强盜를 만나 現金 3원을 강탈당하고 그 者가 휘두른 칼에 맞아 負傷했소이다.”

    負傷한 사내는 험상궂게 생긴 强度가 長劍을 휘두르며 돈을 强奪한 後 창광산 쪽으로 달아났다고 提報했다. 심종성이 脫走한 後 처음 들어온 消息이었다. 被害者가 나타나자 搜査는 俄然 活氣를 띠었다. 搜査本部는 서성리로 搜査隊를 派遣하는 한便 창광산을 管轄하는 步兵 77聯隊에 兵力支援을 要請했다. 서성리로 出動한 搜査隊는 鐵길 옆에서 脫走犯이 신었을 것으로 推定되는 짚신 한 짝을 發見하는 凱歌를 올렸다.

    새벽 5時, 刑務所 看守와 警察 500餘 名, 步兵 77聯隊 所屬 軍人 400餘 名 等 都合 900餘 名의 武裝 軍警이 창광산 周圍를 에워쌌다. ‘第1次 脫走犯 심종성 逮捕作戰’은 77聯隊 나카지마(中島) 聯隊長이 直接 나와 指揮했다. 900餘 軍警이 山 아래에서 頂上까지 샅샅이 훑어 올라갔으나 脫走犯은 痕跡도 보이지 않았다. 꼭두새벽 창광산 頂上에서 900餘 名의 軍警이 모여 對策을 熟議하고 있을 때 平壤逆轉派出所에서 急報가 날아왔다.

    脫走犯의 칼에 맞았다는 사내는 大同郡 용산면에 居住하는 스물여덟 살 석문옥으로 그날 밤 平壤逆轉 ‘사랑市場’에서 漫醉하도록 술을 먹고 지나가는 行人과 싸웠는데, 맞아서 피투성이가 된 것을 精神異常과 一種 好奇心으로 헛告發을 한 것으로 判明되었다. (‘朝鮮日報’ 1933年 1月18日子)


    같은 時間 裁判所 構內 留置場에서 또 한 짝의 짚신이 發見됐다. 어느 쪽이 脫走犯이 신었던 짚신인지, 果然 脫走犯이 신었던 짚신이 맞기나 韓紙 斷言하기 어려웠다. 900餘 名의 軍警合同 搜査隊는 醉客의 거짓 提報로 零下 20℃ 酷寒의 창광산 頂上에서 虛脫하게 아침을 맞았다.

    1月17日, 脫走 이틀째. 아침 일찍 搜査隊를 태운 平壤警察署 트럭 한 代價 심종성의 故鄕인 平安南道 平原郡을 向해 出動했다. 搜査隊는 一家親知 집을 家家戶戶 찾아다니며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구석이 發見되면 닥치는 대로 檢擧해 警察署에 가두고 問招했다. 戶口調査로 특별한 端緖를 찾지 못한 搜査隊는 故鄕 마을에서 無期限 潛伏勤務에 들어갔다.

    平壤警察署와 帶同警察署는 一般 事務를 中斷한 채 심종성의 寫眞 1000餘 張을 印刷해 全 隊員에게 나눠주고 脫走犯 搜索에 總力을 기울였다. 심종성이 평양부內에 潛伏했을 것으로 判斷하고 창광산 附近 서성리, 巖井, 평천리 方面을 搜索했다. 500餘 名의 武裝 軍警이 搜索 地域을 동그랗게 둘러싸고 샅샅이 뒤졌으나 조그만 端緖 하나 찾지 못하고 하루를 보냈다.

    1月18日, 脫走 사흘째. 搜査權이 消滅되는 午後 3時까지 脫走犯을 檢擧하기 위해 200餘 平壤刑務所 看守는 주먹밥으로 虛飢를 달래가며 이틀 밤을 꼬박 새웠다. 500名의 武裝 軍警은 牡丹峯을 에워싸고 搜索 作戰을 展開했지만 亦是 失敗로 돌아갔다.

    搜査 活動은 18日에도 毅然하게 繼續되어 犯人의 親戚 關係者 20餘 好意 家宅 搜索을 하는 同時에 평양부內外의 빈집이란 빈집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샅샅이 搜索했다. 이와 同時에 平壤에서 犯人의 故鄕인 平原까지 約 60里 되는 街頭에 警察官을 配置하여 搜索했지만 犯人의 蹤跡은 杳然했다. 午後 3時 脫走犯 搜査에 나섰던 200餘 看守들은 搜査權이 喪失되어 搜査에서 손을 떼고 平壤刑務所로 돌아갔다. (‘東亞日報’ 1933年 1月19日子)


    脫走한 지 50餘 時間이나 지나도록 심종성이 밥 한 술 못 먹고 零下 20℃의 추위에 노숙하고 있을 理 없었다. 必是 어디선가 누군가의 집에 숨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看守들이 刑務所로 돌아가자, 搜査本部는 脫走犯이 未決監에 있을 때 한 房에 있다가 釋放된 38名의 行跡을 追跡하고 심종성의 親戚 多數가 모여 사는 中和郡 상원읍으로 搜査隊를 트럭 두 臺에 나눠 태워 보내는 等 搜査 範圍를 大幅 擴大했다.

    刑務所의 搜査權이 消滅된 直後, 서성리에 사는 梁氏와 金氏가 搜査本部에 찾아왔다. 심종성이 脫走하던 16日 午後 창광산에서 나무를 하던 中 灰色 바지에 흰 저고리를 입고 빡빡 깎은 머리에 帽子도 쓰지 않고 팔짱을 끼고 山을 넘어가는 험상궂게 생긴 사내를 보았다는 提報였다. 梁氏와 金氏가 보았다는 사내가 脫走犯 심종성이었다면, 심종성은 아직 평양부內 某處에서 隱遁하고 있을 蓋然性이 컸다. 搜査本部는 심종성이 평양부內에 숨어 있는지 北으로 逃走했는지 南으로 逃走했는지조차 把握하지 못한 채 사흘째 밤도 꼬박 지새웠다.

    沈默의 行進

    사형수 심종성의 ‘프리즌 브레이크’

    主犯 심종성을 찾기 위해 步兵 400餘 名, 憲兵 20餘 名이 動員됐던 平壤 步兵 第77聯隊 司令部.

    1月19日, 脫走 나흘째. 300餘 名의 軍警 合同搜査代가 平壤을 中心으로 隣近 地域을 샅샅이 뒤졌지만 脫走犯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平原郡, 大同郡, 中和郡, 上元郡 等地로 出動했던 搜査隊는 脈없이 돌아와 “아무것도 없다”는 簡單한 報告만 되풀이했다.

    언제까지고 一般 事務를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 이틀間 全面 中斷했던 一般 事務를 再開했다. 脫走犯 搜査는 司法高等係 刑事와 非番인 景觀을 中心으로 進行했다. 나흘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脫走犯은 이미 道의 境界를 넘었을 수도 있었다. 平安南道 警察部는 隣接한 平安北道와 黃海道, 甚至於 京城에까지 脫走犯 手配를 要請했다.

    칼을 들고 달아난 死刑囚, 殺人强盜犯 심종성은 어디로 갔나! 바람처럼 사라진 그가 畢竟 어디서 强盜질을 하거나 아무 집에나 들어가 먹을 것을 强奪할 것이라는 期待는 完全히 무너졌다. 칼 가진 凶漢은 이미 84時間이나 어디론가 沈默의 行進을 繼續하고 있다.

    날개가 없으매 하늘에 오르지 못할 것이요, 남다른 才幹이 없으매 땅속에 꺼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景觀, 간수, 憲兵, 軍隊가 總動員된 1000名이 넘는 搜査班이 평양부內 家家戶戶 찾아다니며 搜索하고, 그의 住所地인 平壤에서 故鄕인 平原까지 幅으로 60里 길이로 100里에 達하는 넓은 搜査網을 펼쳤으나 쥐는커녕 이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할 그물에 그는 걸리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어찌나 怜悧한지 平凡한 脫走犯처럼 親族을 찾는 일도 없었다. 평양부內外에 居住하는 그의 親族은 20餘 戶. 逃走 事實이 알려진 卽時 武裝 警官들이 20餘 戶 親戚집을 徹夜로 지키며 그가 오기만 기다렸으나, 그는 이 그물 속으로도 기어들지 않았다.

    零下 20度를 오르내리는 추위! 殺人强盜犯에다 性品이 잔인무쌍하고 얼굴조차 험상궂게 생긴 심종성은 只今까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신고 어디에 숨었는고.

    그가 들고 뛴 칼로 언제 누구의 목숨을 해칠지 모르니 그야말로 날개 가진 猛虎를 벌판이 아니라 길거리에 내놓은 셈이어서, 富民의 恐怖는 絶頂에 達했고 濃厚해 가는 府外 脫出說은 隣近 農村까지 不安에 떨게 할 形便이다. (‘東亞日報’ 1933年 1月20日子)


    1月20日, 脫走 닷새째. 事件은 漸漸 迷宮에 빠졌다. 심종성이 여태껏 捕繩에 묶이고 手匣을 차고 있을 理 없을 텐데, 심종성은 勿論 捕繩과 手匣조차 蹤跡이 杳然했다. 심종성이 손톱만한 痕跡도 남기지 않고 닷새째 沈默의 行進을 繼續하자 다양한 推測이 提起됐다.

    첫째, 隱匿說. 어떤 者가 심종성을 祕密裏에 隱匿해두고 搜査가 멈추기를 기다려 멀리 逃亡시키려 한다. 둘째, 洞社說. 심종성이 脫走해 山으로 들로 허둥지둥 달아나다가 어느 곳에서 同死했다. 셋째, 自殺說. 逮捕되면 死刑은 떼어놓은 堂上이므로 심종성은 處地를 悲觀해 이미 自殺했다….

    脫走犯이 100時間이 넘도록 꼬리가 잡히지 않은 것은 犯罪 史上 類例 없는 일이었다. 이대로 가다가 初有의 脫走 成功者가 나타날지도 몰랐다. 搜査 展望을 묻는 質問에 平壤警察署 後루카와 署長은 이렇게 答했다.

    “아직 아무런 端緖도 못 얻었소. 18日 밤부터는 持久戰을 始作했소. 搜査를 始作한 지 70~80時間이 지났어도 端緖가 없다는 것은 疑訝한 일이지만 잡을 自信은 있소. 다만 時日이 짧을지 吉地가 問題요. 可能한 限 速히 逮捕해 富民 여러분의 不安을 떨쳐내려고 最善의 努力을 다하고 있으니 지켜봐 주시오.” (‘朝鮮日報’ 1933年 1月21日子)


    1月21日, 脫走 엿새째. 심종성이 脫走한 지 벌써 120餘 時間이 흘렀다. 그동안 搜査本部는 창광산과 牡丹峯 包圍 搜査, 不內外 빈집 搜査, 下水道 搜査, 一家親知 連行搜査 等 생각할 수 있는 搜査技法은 죄다 試圖했지만, 脫走犯을 逮捕하기는커녕 조그만 端緖 하나 찾지 못했다. 이날도 平壤警察署 武裝 搜査班은 普通江邊에 散在한 貧民部落을 搜索했으나 아무런 成果도 얻지 못했다. 帶同警察署 亦是 武裝 搜査隊를 트럭에 가득 태우고 심종성의 故鄕인 平原郡에 派遣해, 沈氏 集姓村 60餘 號와 隣近 村落은 勿論 山間에 있는 獨立家屋까지 一一이 搜査했으나 별다른 所得이 없었다.

    발로 뛰는 搜査가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안, 諜報活動이 成果를 내기 始作한 것이 그나마 多幸이었다. 平安南道 警察部는 심종성이 開城에 潛入해 刑務所 同僚 金某의 房에 숨어 지내는 듯하다는 諜報를 入手하고 個性警察署에 嚴密히 搜査해줄 것을 要請했다.

    平安南道 警察部의 要請을 받은 個性警察署 나가타(永田) 署長은 四法界 刑事를 불러놓고 심종성의 寫眞을 보여주면서 祕密裏에 搜査方針을 協議했다. 나가타 署長의 指示를 받은 刑事隊는 곧 開城府內 各 方面으로 活動을 開始해 심종성의 侵入 與否를 嚴密히 搜査하고 있다. (‘東亞日報’ 1933年 1月23日子)


    사형수 심종성의 ‘프리즌 브레이크’

    500餘 名의 武裝 軍警이 에워싸고 脫走犯 搜索作戰을 벌였던 牡丹峯 一帶.

    1月22日, 脫走 이레째. 平安南道 警察部는 심종성이 故鄕인 平原郡 덕산면 方面으로 逃走했다는 또 다른 諜報를 入手했다. 平安南道 警察部 兆(趙) 保安課長은 武裝 警官 100餘 名을 引率하고 덕산면으로 달려가 삼정리에 搜査本部를 設置한 後 目擊者를 探問했다. 때마침 九峯山에서 토끼잡이를 하던 少年 6名이 手配 寫眞의 심종성과 똑같이 생긴 어른을 山속에서 보았다고 提報했다. 搜査隊는 九峯山을 물샐틈없이 에워싸고 ‘第2次 脫走犯 심종성 逮捕作戰’에 突入했다. 九峯山 周圍에 警戒網을 完成했을 때 날이 저물어 本格的인 搜索作戰은 다음날로 延期했다.

    158時間 만의 檢擧

    1月23日, 脫走 여드레째. 아침부터 九峯山 周圍에는 戰雲이 감돌았다. 平安南道 警察部 兆 保安課長 以下 100餘 名의 警官은 지난밤 零下 20℃의 酷寒을 견디며 山기슭에서 노숙했다. 날이 밝자 武裝 搜査隊는 本格的인 搜索에 나섰다.

    午後 1時, 여드레 동안 巧妙히 자취를 감췄던 脫走犯이 드디어 꼬리를 잡혔다. 搜査隊는 山 밑에 숨어 있던 ‘怪漢’을 發見하고 卽時 逮捕했다. ‘怪漢’은 부들부들 떨 뿐 별다른 抵抗은 하지 않았다. 어디다 내다버렸는지 脫走할 때 들고 나간 長劍은 몸에 지니고 있지 않았다. 搜査隊는 手匣을 채우는 것으로는 安心이 안 돼 온몸을 밧줄로 동여맸다. 100餘 名 武裝 警官은 九峯山 아래에서 萬歲를 부르며 千辛萬苦 끝에 脫走犯을 逮捕한 感激을 나눴다. 午後 6時 ‘怪漢’을 앞세우고 意氣揚揚하게 平原警察署로 돌아오니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平原警察署 留置場에는 세 時間 前 약전리에서 逮捕된 眞짜 심종성이 코를 골고 자고 있었다. 이 橫厄에 걸렸던 사람은 平原郡 한천면에 사는 玄文乙이다. 그는 九峯山을 사기 위해 이틀 동안 九峯山 周圍를 徘徊하다가 年齡과 引上이 심종성과 비슷한 關係로 이런 逢變을 當했다. (‘東亞日報’ 1933年 1月26日子)


    1月23日 午前 條 保安課長이 이끄는 搜査隊가 九峯山 周圍에서 脫走犯 逮捕作戰을 벌이는 동안, 平原郡 약전리에서는 또 다른 逮捕作戰이 進行됐다. 여드레 동안 蹤跡이 杳然하던 심종성은 그날 아침 突然 平原郡 중교리에 사는 外三寸 안윤겸의 집에 나타나 밥을 請했다. 안윤겸이 躊躇하는 氣色을 보이자 심종성은 부엌으로 들어가 솥에서 끓고 있는 설익은 밥을 몇 숟가락 퍼먹고 집을 빠져나왔다.

    안윤겸의 아내, 곧 심종성의 外叔母는 조카가 脫走한 여드레 동안 警察이 隨時로 찾아와 調査하는 바람에 한時도 마음 便할 날이 없었다. 自己 손으로 차려준 것은 아니지만 심종성이 自己 집 밥을 먹고 달아났다는 事實이 알려지면 어떤 逢變을 當할지 알 수 없었다. 안윤겸의 아내는 심종성이 사라진 卽時 이웃에 사는 임병섭 巡査 집에 찾아가 그 夫人에게 그날 아침 일어난 일을 일러줬다.

    임병섭 巡査는 平原警察署의 指示에 따라 심종성이 脫走한 直後부터 줄곧 안윤겸의 집을 監視했는데, 아침食事를 하려고 暫時 自己 집에 간 사이 심종성이 나타났다 사라진 것이었다. 이야기를 건네들은 임병섭의 아내는 곧장 아침食事를 하고 있던 男便에게 달려가 消息을 傳했다. 임병섭 巡査는 밥床을 물리고 곧바로 뛰쳐나가 심종성의 行方을 追跡했다. 혼자서 심종성을 追跡하던 임병섭 巡査는 심종성이 長劍을 지니고 있다는 事實을 記憶해내고 平原警察署로 달려가 支援을 要請했다.

    午前 8時 임병섭 巡査로부터 심종성이 나타났다는 報告를 받은 平原警察署는 卽時 平安南道 警察部에 報告했다. 平安南道 警察部는 卽時 平壤大洞警察署와 警察部 保安과 景觀으로 組織한 搜査隊 80餘 名을 트럭에 가득 태우고 脫走犯이 出現한 平原郡 약전리로 출동시켰다. 안윤겸의 집에서 설익은 밥을 먹고 사라진 심종성은 午前 9時 같은 마을 이명원의 집에 또다시 나타나 飮食을 强奪해 먹고 平原郡 解消면 方向으로 달아났다. 중교리에 到着한 搜査隊는 이명원의 提報에 따라 달아난 심종성을 뒤쫓았다. 搜査隊는 午前 10時 平原郡 약전리 길 위에서 심종성을 만났다. (‘朝鮮日報’ 1933年 1月24日子)


    80餘 名 武裝 警官을 길 위에서 遭遇한 심종성은 悲壯한 表情을 지으며 가슴에 품고 있던 長劍을 꺼내들었다. 심종성이 長劍을 미친 듯 휘두르자 數的으로 優位에 있는 搜査臺도 섣불리 다가갈 수 없었다. 더욱이 對峙支店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5日場이 서 있었다. 섣불리 밀어붙였다가 심종성이 場터로 뛰어들기라도 하면 無辜한 良民이 被害를 當할 수 있었다. 搜査隊는 심종성에게 武器를 버리고 自首할 것을 勸했다. 심종성은 長劍을 휘둘러 空氣를 가르는 것으로 對答을 代身했다.

    緊張된 對峙狀態가 한 時間 남짓 흘렀을 때, ‘탕탕’ 하는 銃聲이 울려 퍼졌다. 景觀이 쏜 銃알은 심종성의 왼쪽 발목에 正確히 命中했다. 심종성은 ‘으악’하는 외마디 悲鳴을 지르며 차가운 길바닥에 쓰러졌다. 延人員 1萬名의 警官이 動員되고 平安部民 全體를 밤마다 恐怖에 떨게 했던 심종성의 脫走劇은 158時間 만에 終焉을 告했다.

    심종성은 逮捕될 때 防寒帽를 쓰고 검정色 덧저고리와 灰色 바지 위에 다시 흰 바지를 덧입었고 朝鮮버선에 짚신을 신고 있었다. 零下 20度나 되는 추운 밤을 8日 間이나 露宿한 關係로 온몸에 銅像을 입어 發音도 분명치 않았다. 平原警察署에 留置된 狀態로 治療 中인데 銃傷과 銅像이 어느 程度 回復되면 平壤으로 護送되리라 한다. (‘朝鮮日報’ 1933年 1月26日子)


    銃擊으로 발목에 傷處를 입은 심종성은 簡單한 治療를 받은 後 午後 3時 平原警察署 留置場에 인치됐다. 여드레 동안 배고픔과 추위로 인한 肉體的 苦痛과 景觀의 追跡을 따돌리려는 精神的 苦痛으로 몹시 지친 듯 심종성은 銅像과 銃傷의 苦痛에도 아랑곳없이 留置場에 들어오자마자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졌다.

    午後 8時, 平安南道 警察部 管(關) 警婦歌 심종성을 깨워 問招를 開始했다. 심종성은 總 맞은 자리의 아픔을 呼訴하면서 消毒을 잘 해주지 않아 더 아프다고 問招하는 景觀에게 成火를 해댔다. 더구나 1年餘 만에 먹어본 담배의 새로운 香臭에 醉한 듯 連方 담배를 달라고 졸라서 담배를 얻어 피우며 留置場에 벌떡 드러누운 채 問招를 받았다. (‘東亞日報’ 1933年 1月26日子)


    심종성은 1年2個月間의 未決囚 生活보다 8日間의 脫走犯 生活이 더 고생스러웠는지 몸이 衰弱해져 印象조차 變할 程度였고, 발은 얼어서 썩어들어갈 地境이었다. 그래도 意識만은 또렷해 逃走過程을 묻는 대로 고분고분 答辯했다.

    苦難의 行軍

    時間을 앞으로 돌려 1月16日 午後 12時30分, 公判期日을 21日로 演技하는 것으로 抗訴審 公判이 끝나자 심종성은 平壤刑務所에서 未決囚 護送車輛이 올 때까지 裁判所 構內에 있는 留置場에 인치됐다. 심종성이 留置場 안으로 들어가자 護送 看守는 묵직한 鐵門을 닫고 자물쇠를 잠갔다.

    그런데 그 ‘철컥’ 자물쇠 잠그는 소리가 예전 服役期間 7年 동안 들었던, 이番에도 1年2個月째 數千, 數萬番 듣고 있는 자물쇠 소리와는 分明 달랐다. 심종성은 精神이 번쩍 들었다. 어쩌면 千載一遇의 機會가 찾아왔는지도 몰랐다.

    쇠窓살이 쳐진 조그만 窓 틈으로 밖을 엿보니, 門 앞을 지키고 앉아 있던 日本人 看守가 저고리를 벗고 長劍을 풀고 遑急히 化粧室로 갔다. 심종성은 機會를 놓치지 않고 或是나 하는 마음에 鐵門을 조용히 밀어보았다. 鐵門은 힘없이 열렸다. ‘옳거니!’ 뛸 듯이 기뻤지만 심종성은 덤비지 않고 沈着하게 鐵門을 빠져나왔다. 四方을 살핀 後 捕繩에 묶이고 手匣을 찬 채 看守가 풀어놓은 長劍을 들고 留置場을 빠져나왔다. 點心時間이라서 그런지 留置場 周圍에 看守와 警察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裁判所 南門을 빠져나와 同情(東町)과 鐵道沿邊을 거쳐 平南街道로 들어섰다.

    심종성은 大同郡 남兄弟山面까지 쉬지 않고 달려갔다. 어느 山속으로 들어간 後에야 비로소 自己 몸을 拘束하는 捕繩을 애써서 풀어버리고 手匣을 돌에 쳐서 깨뜨렸다. 그때서야 平壤에서는 景觀이 非常召集 되고 搜査網을 펼쳐놓았다. 이미 20里 밖 山속에 있는 심종성을 部內에서 警官과 憲兵, 軍隊까지 1000名이 아니라 1萬 名이 찾아 나섰던들 發見할 재주가 없었다. (‘東亞日報’ 1933年 1月26日子)

    해가 저물자 精神없이 도망치느라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몹시 추웠다. 零下 20℃의 寒氣는 皮膚를 뚫고 뼛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게다가 배가 고팠다. 온終日 뛰어다녔지만 아침밥을 먹은 뒤로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심종성은 차디찬 山속에서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밤이 새도록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山을 돌고 돌았다. 山을 돌면서 생각했다.

    ‘내가 왜 뛰쳐나와 이 苦生을 할까.’

    ‘이제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까.’

    1月17日, 밤새 걸어 겨우 凍死(凍死)를 免한 심종성은 날이 밝자 大同郡 禁制面 장현리로 내려왔다. 길거리에 엿장수의 엿板이 놓여 있었다. 하루를 꼬박 굶은 심종성은 2원어치나 되는 엿板을 통째로 훔쳐 허기진 배를 채우면서 江西郡 태面 第村里로 들어갔다. 그날밤도 밤새도록 걸어서 가까스로 動詞를 免했다.

    1月18日, 하루 終日 걸어서 平原郡 청산면 청용리로 들어갔다. 빈 방앗間이 있어 사흘 만에 새우잠을 請할 수 있었다. 방앗間이라고 춥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얼어 죽을 念慮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感之德之였다.

    1月19日, 圓蟲産을 넘어서 ‘訴求地’라는 村落에 들어가 漢學頃이라는 住民의 집을 찾아갔다.

    漢學京義 조카 염중식은 思想事件에 連累돼 平壤刑務所에 收監된 狀態로 豫審을 받고 있었다. 심종성은 같은 監房에서 지내던 염중식에게 訴求지에 사는 外三寸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심종성은 漢學頃에게 自己도 염중식과 같은 事件으로 收監되었다가 最近 出獄했노라고 속이고 그 집에서 묵었다. 사흘째 엿만 먹고 延命하던 심종성은 16日 아침밥을 먹은 以後 近 90時間 만에 따뜻한 밥을 먹고, 薰薰한 房안에서 이불을 덥고 잤다. (‘東亞日報’ 1933年 1月26日子)


    1月21日, 아침밥을 든든히 챙겨먹고 이틀 동안 지내던 訴求地 漢學京義 집을 떠났다. 漢學警은 길을 떠나는 조카의 親舊에게 操心해서 가라며 옷가지, 버선, 防寒帽 等을 챙겨주었다.

    定處 없이 발길 닫는 대로 걸었다. 걷다보니 故鄕 가는 길이었다. 그날밤은 喪輿를 놓아두는 喪輿집에서 잤다. 奸邪한 게 사람의 마음이라고 이틀 따뜻한 구들에서 자고 나니 溫氣 없는 한데서는 잠들기 어려웠다.

    1月22日, 하루 終日 걷다가 밭 가운데 무너진 園頭幕에 불을 놓고 그 옆에서 밤을 새웠다. 故鄕이 코앞이었다. 一家親戚도 보고 싶고, 親舊들도 만나고 싶었다.

    1月23日, 故鄕 마을 용호리로 가서 아침 8時 外三寸 안윤겸의 집을 찾아갔다. 어릴 적 그처럼 잘해주던 外三寸이었건만 脫走犯이 된 조카가 찾아오자 낯빛을 붉혔다. 밥을 달라고 해도 도리질치며 難色을 표했다. 그냥 나오려는데 부엌에서 구수한 밥 짓는 냄새가 났다. 솥뚜껑을 열어 설익은 밥을 몇 숟가락 퍼먹고 外三寸 집을 나왔다.

    잔뜩 굶주린 배에 穀氣가 若干 들어가니 배가 고파 견딜 수 없었다. 아무 집에나 뛰어들어 밥을 달라고 要求했다. 손에 든 長劍을 보았는지 主人은 順順히 밥을 차려왔다. 48時間 만에 밥을 배불리 먹고 이명원의 집에서 나왔다. 解消면 方向으로 定處없이 걷는데 약전리 附近에서 搜査隊가 들이닥쳤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칼을 휘둘렀지만 날아오는 銃알 앞에서는 束手無策이었다. 왼쪽 발목에 銃을 맞고 쓰러지자 數十名의 巡査가 달려들었다. 비로소 끝이었다.

    1891年 平安南道 平原郡에서 태어난 심종성은 脫走 當時 마흔세 살이었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膝下에서 자랐는데, 넉넉지는 않았으나 먹고 살기가 힘들 程度는 아니었다.

    심종성은 天性的으로 賭博을 좋아해 자나깨나 노름에 미쳐 살았다. 賭博犯으로 警察에 붙들린 것이 凶惡한 殺人者가 된 첫걸음이었다. 賭博을 해도 普通사람과 달리 10원이면 10원, 100원이면 100원 주머니에 있는 대로 한꺼번에 다 걸어 잃으면 잃고 따면 따는 특별한 性格의 所有者였다. 多少 있던 財産은 賭博으로 全部 消費해 버리고 차차 困窮해지자 自然 竊盜질을 常習的으로 하게 되고 甚至於 强盜질까지 하게 되었다. (‘罪와 벌과 人生’, ‘別乾坤’ 1933年 4月號)


    심종성에겐 안태준이란 열네 살 年下의 妾이 있었다. 안태준은 정숙지 못한 女子여서 같은 洞네 사는 열 살 年上의 임극환이란 社內와도 情을 통했다. 勿論 임극환에게도 아내가 있었다. 안태준은 임극환과 永遠히 달콤한 生活을 꾸려가려 심종성이 强度짓 한 것을 警察에 密告했다. 심종성이 警察에 逮捕되자 안태준은 남은 세간과 집을 팔아 임극환과 함께 평양부內 선교리로 옮겨와서 수肉과 술장사를 하며 재미나게 살았다. 反面 심종성은 幹部(間夫·샛書房)를 둔 妾의 申告 탓에 强盜罪로 7年型을 宣告받았다.

    7年間의 獄苦를 마치고 出獄한 심종성은 變心한 妾이 自己를 監獄에 처넣고 선교리에 와서 산다는 말을 들었다. 分代로 하면 當場에 연놈을 뜯어먹어도 시원치 않겠지만, 오직 입과 배가 元帥라 꾹 참고 좋은 말로 自己의 어려운 形便을 하소연하며 임극환에게 얼마間 돈을 좀 달라고 請했다. 醜惡하기 짝이 없는 임극환은 심종성의 要求를 單칼에 拒絶했다. (‘罪와 벌과 人生’, ‘別乾坤’ 1933年 4月號)


    달리 살아갈 道理가 全혀 없는 심종성이 再次 三次 請求했지만 임극환은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심종성은 憤을 이기지 못하고 監獄에서 오랫동안 사귄 김봉주를 찾아가 鬱憤을 털어놓았다. 김봉주度 女子의 變心 때문에 나름대로 傷處가 깊은 사내였다. 김봉주는 1893年生으로 심종성보다 두 살 아래였다. 敎育을 받지 못한 심종성과 달리 김봉주는 中學을 나온 인텔리 靑年이었다. 한때는 江原道에서 普通學校 訓導로 일했다.

    그때만 해도 只今과 달라 女敎員이 흔치 않았다. 젊은 두 男女는 어느 틈엔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어찌 믿을 수 있으랴. 깊은 땅 속에 뿌리내린 꽃도 열흘이 못 되어 시들거늘, 깊지 못한 계집의 가슴에 피었던 사랑의 꽃이야 얼마나 갈 것이랴. 愛人의 變心. 每日 만나는 어제의 親舊요 同僚는 오늘의 硯滴이 되었다. 김봉주는 너무나 깊이 失望하고 너무나 强烈히 嫉妬한 나머지 마침내 硯滴을 찔러죽이고 變하기 쉬운 계집의 貞操를 强制로 빼앗아 버리고 말았다. (‘심종성 共犯 死刑囚 김봉주’, ‘東亞日報’ 1933年 1月28日子)


    김봉주는 殺人暴行强姦罪로 無期懲役을 宣告받고 12年으로 減刑돼 1930年 6月 假出獄했다. 變心한 愛人 때문에 敎師에서 一介 殺人 前科者로 轉落한 김봉주는 심종성의 하소연에 깊이 同情했다. 結局 두 사람은 林劇換衣 집에 가서 强制로라도 돈을 빼앗자고 意氣投合했다.

    1931年 10月26日 새벽 3時, 심종성과 김봉주는 食道와 日本刀를 들고 임劇換衣 집에 潛入했다. 임劇圜 夫婦를 結縛하고 現金 3원20錢과 貴重品을 챙겨 逃走하려 했다. 결박당하고 절도 光景을 지켜보던 안태준은, 前 男便이자 當場에는 凶器를 든 强盜인 심종성에게 “네가 이런 일을 또 하고 無事할 줄 아느냐? 풀려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안태준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심종성은 마음속에서 葛藤이 생겼다.

    ‘안태준이 누구냐? 일찍이 男便인 나를 警察에 告發해 懲役을 시킨 女子가 아니냐? 잊을 수 없는 怨讐 사이가 된 只今에 와서 안태준이 무엇이 未安해 告發을 躊躇하랴! 안 되겠다. 뒷일을 위해.’

    심종성은 성큼성큼 안태준에게 다가가 목을 힘껏 졸랐다.

    “오냐. 네가 아직 精神을 못 차린 게로구나. 누가 이기는지 어디 한番 해보자.”

    초라한 最後

    사형수 심종성의 ‘프리즌 브레이크’
    電縫管

    1971年 釜山 出生

    서울대 國文科 卒業, 同 大學 席·博士(國文學)

    서울大, 亞州大, 한신大, 漢城大, 덕성여대에서 講義

    現 韓國科學技術院 人文社會 科學部 敎授

    著書 및 論文 : ‘1930年代 韓國 都市的 抒情詩 硏究’ ‘黃金狂時代’ ‘경성기淡’ 等


    심종성은 逮捕된 지 이틀 後인 1月25日 平壤警察署로 護送됐다. 여드레 동안의 굶주림을 報償받기라도 하려는 듯 엄청난 量의 밥을 먹어치웠고, 그러면서도 平壤警察署 留置場은 밥맛이 없다고 투정을 부렸다. 발목에 輕微한 銃傷을 입었을 따름이지만 警察에서건 檢察에서건 甚至於 法廷에서조차 아파서 앉아 있을 수 없다고 벌렁 드러누워 新聞을 받았다. 警察과 檢察이 여러 次例 脫走經路 檢證에 나섰지만 심종성이 脫走 途中에 내다버린 手匣, 捕繩, 짚신 等은 끝내 發見되지 않았다.

    여드레 동안의 脫走 行脚으로 심종성에게는 旣存의 强盜殺人竊盜罪에다 逃走罪와 엿 2원어치를 훔친 竊盜罪가 追加됐다. 하지만 두 事案을 追加로 起訴하면 1審裁判부터 다시 열어야 했다. 檢査는 追加로 起訴하든 起訴하지 않든 裁判 結果가 死刑이긴 마찬가지라는 理由에서 逃走竊盜罪에 對해 起訴猶豫 處分을 내렸다.

    2月20日 午前 11時, 심종성과 김봉주는 平壤覆審法院 刑事法廷에서 하쿠다케(百武) 裁判長 心理, 요코다(橫田) 檢事 立會로 公所公判 審理를 받았다. 被告人 심종성은 傷處에 差度가 없어 그대로 자리에 누운 채 審理를 받아 法廷이 생긴 以來 첫 番째 記錄을 세웠다. 이미 死刑을 覺悟했는지 서슴지 않고 逃走하던 經路를 說明했다. 선교리 임劇圜 夫婦 殺害 事件에 이르러서는 被告人 두 名이 殺害의 責任을 서로에게 轉嫁하고자 言爭을 벌였다. 이로 미루어 두 被告人은 아직도 死刑을 면해 보려는 실낱같은 希望을 품고 있는 듯도 보였다. 요코다 檢事는 두 被告人에게 1審과 같이 死刑을 求刑했다. (‘朝鮮日報’ 1933年 2月3日子)


    심종성과 김봉주는 2月27日 平壤覆審法院에서 나란히 死刑을 宣告받았고, 5月8日 高等法院에서 上告마저 棄却해 6月27日 刑場의 이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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