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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분당·天安 멀티캠퍼스로 뜬다|신동아

서울·분당·天安 멀티캠퍼스로 뜬다

  • 곽對中·自由寄稿家가 bitdori21@kebi.com

    入力 2004-11-08 13: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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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국대는 1990年代에 두 番의 危機를 겪었다. 1993年 ‘단국대 入試書類 廢棄事件’과 1998年의 學校法人 不渡事態가 바로 그것이다. 단국대는 두 次例의 危機를 成功的으로 克服하고 분당에 제3캠퍼스 建立을 推進하는 等 再跳躍에 나서고 있다.
    1998年 3月7日, 檀國大學校는 綜合大學으로는 처음으로 學校法人 不渡事態를 맞았다. 이른바 ‘國家의 不渡’라 불린 IMF 救濟金融 事態로 숱한 企業들이 危機에 處하고 온 나라가 들썩이던 때에 단국대의 不渡는 斷然 話題였다.

    ‘이제는 學校도 부도나는 時代’라는 題目으로 言論에 크게 報道됐다. 學校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固定觀念을 무너뜨린 事件이었다. 一部에서는 다른 大學 10餘 군데도 不渡가 豫想된다며 完全히 門을 닫는 大學도 생겨날 것이라고 展望했다.

    不渡 以後 不實大學의 代名詞格이 돼버린 檀國大學校로서는 이런 불명예스러운 記憶이 사람들의 腦裏에서 하루 빨리 잊혀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로부터 4年. 當場이라도 門을 닫게 될 듯 洶洶한 所聞의 對象이던 단국대는 如前히 ‘健在해’ 있다.

    “不渡(不渡)요? 제가 入學할 때 그런 報道로 마음이 뒤숭숭하긴 했지만 只今껏 우리 學校가 ‘不渡 危機에 놓인 大學’이라고 느껴 본 적이 없었습니다.”

    卒業을 앞둔 經營學 專攻 채민下(22)氏는 지난 4年間의 大學生活을 이렇게 回顧했다.



    단국대는 오히려 危機를 機會로 만들면서 그동안 캠퍼스를 하나 더 늘렸다. 1999年 大學綜合評價 10個 部門 優秀 및 最優秀 大學으로 選定되고 2000年 敎育改革 優秀大學으로 選定 되는 等 各種 大學評價에서도 눈에 띄는 成果를 거뒀다.

    단국대의 校名(校名)은 檀君의 ‘單(檀)’과 愛國의 ‘국(國)’을 따 만든 이름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단국대는 ‘民族史學(民族私學)’을 自任하고 있다. 단국대의 歷史는 解放 以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단국대의 設立者는 日帝時代 獨立運動을 財政的으로 後援했던 박기홍 先生의 夫人인 惠堂(惠堂) 조희재(趙喜在) 女史와 獨立運動家 犯情(梵亭) 杖刑(張炯) 先生이다.

    日帝時代 滿洲에서 ‘北路군정서’ 所屬으로 獨立運動을 한 犯情 先生은 解放 以後 歸國해 ‘國民同志回’ 會長으로 推戴되기도 했으나, 極甚한 政局混亂을 보고 自身의 餘生을 人材養成에 두기로 決心한다. 白凡 金九 先生 亦是 犯情 先生의 이같은 意志에 同調해 政界보다 敎育界에서 愛國의 길을 實踐하라고 激勵했다고 한다.

    民族史學 檀國大學校

    犯情 先生은 나라를 이끌 人材를 養成하기 위해 大學設立을 推進했고, 조희재 女史가 100萬 坪의 土地를 財團 設立에 必要한 基本資産으로 寄附했다. 大學의 이름은 統一 以後 南北이 함께 共有할 수 있는 同質性人 ‘檀君의 子孫’이라는 點을 念頭에 두어 ‘檀國(檀國)’이라고 했고 敎育理念은 救國(救國) ·自主(自主)·自立(自立)을 내세웠다. 大學의 象徵도 檀君說話에 登場하는 ‘곰’으로 定했다.

    이른바 ‘국대안(國大案) 波動(美軍政廳이 여러 國立專門學校들을 統廢合해 서울대학교를 발족시킨다는 構想에 對한 反對運動)’으로 敎育界가 큰 混亂을 겪고 있는 가운데, 宣敎師들의 支援 없이 純粹한 民族 財源으로 設立하는 大學이 誕生했다는 消息은 全國 學生들의 歡迎을 받았다.

    檀國大學校는 올해로 開校 55周年을 맞는다. 1990年代 들어 檀國大學校는 크게 두 番의 危機를 겪었다. 하나는 1993年 이른바 ‘단국대 入試書類 廢棄事件’이고 다른 하나는 1998年의 學校法人 不渡事態다. 1993年의 事件은 最小 4年間 保管하게 되어 있는 入試關聯 書類 3年値를 任意로 廢棄한 事件이다.

    當時 敎育部는 이 事件이 不正入學 非理를 감추기 위한 것이라고 判斷하고 特別監査를 實施했다. 監査 結果 不正入學 事例를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學校法人이 1707億원의 負債를 지고 있다는 事實을 밝혀냈다. 學校法人이 一定金額 以上의 돈을 끌어 쓰려면 敎育部의 承認을 받아야 하는데 이를 無視하고 不法的으로 財産을 借入한 것을 發見한 것이다.

    “한 해에도 數百億 원의 財産을 運用하는데 어떻게 그때마다 番番이 敎育部의 承認을 받습니까. 거기다 우리 大學財團의 境遇 資産(資産)의 大部分이 不動産입니다. 敎育法上 大學은 財産도 마음대로 處分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結局 특별한 收入源이 없는 大學이 學校를 運營하자면 어떻게든 方道를 求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檀國大 法人關係者의 말이다.

    結局 이 事件으로 20餘 年間 總長을 맡아왔던 장충식(張忠植) 總長이 자리에서 물러났고 財團理事長을 비롯한 任員陣도 모두 解任되면서 官選理事가 派遣됐다. 現在 學校法人 단국대學의 장충식 理事長은 1993年의 事件에 對해 이렇게 말한다.

    “大學病院 建立 等 無理한 擴張經營度 한 理由였겠지만 政權에게 미운털이 박힌 것이 더 根本的인 原因이었던 것 같습니다. 1992年 大選을 앞두고 大統領 候補側에서 政治資金支援을 要請한 적이 있었습니다. 軍事政權 時節에도 이러한 일은 없었고 大學의 財産을 政治資金으로 隱密히 내놓는다는 것은 敎育者로서 絶對로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해 斷乎히 拒絶했습니다. 結局 政權이 바뀌자마자 監査가 始作되더군요.

    派遣된 官選理事가 ‘學校를 亡하게 하기 위해 왔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느낀 慘澹함은 말로 表現하기도 힘듭니다. 萬若 그때 政治資金을 支援했더라면 그 德澤에 어느 程度 大學이 發展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런 提議를 拒絶해 危機에 處하게 된 것을 後悔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事件으로 삼성그룹으로의 引繼 計劃이 霧散돼 學校 發展의 土臺를 마련할 수 있는 絶好의 機會를 놓친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官選理事가 派遣되면서 빚은 繼續 쌓여갔고 大學은 結局 不渡事態로 치달았다는 것이 長이社長의 說明이다.

    흔히들 改革은 리스크(risk)를 同伴한다고 하지만 代替로 大部分의 改革作業은 危險이 적고 成功 可能性이 높은 方案을 찾아 이뤄진다. 그런데 단국대의 歷史를 훑어보면 發見되는 特徵이 하나 있다. 다른 이들이 꺼려하는 日課 리스크가 많은 일에 果敢히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첫째로는 天安캠퍼스의 建立을 들 수 있다. 天安에 大學을 세우게 된 背景도 흥미롭다. 단국대는 政府에서 새마을 運動을 始作하기 以前부터 앞장서 農村奉仕活動을 해온 것으로 有名하다. 단국대가 奉仕活動을 始作한 곳은 忠南 靑陽郡 장곡마을. 當時만 해도 全國에서 가장 가난한 마을 中 하나였다. 唐詩 總長이던 長이社長은 學生들과 함께 서울과 靑陽 사이를 오가며 우리나라의 敎育, 文化施設이 서울에 지나치게 偏重돼 있음을 切感했다고 한다. 그래서 構想한 게 大學의 分校(分校)를 地域에 設立하는 것이었다.

    天安캠퍼스에 對한 長이社長의 說明이다.

    “天安地域 人士들을 만나 ‘天安에 大學을 세우겠다’고 하니까 모두 웃더군요.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馬)은 濟州島로 보내라는 옛말도 있는데,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것이었죠. 오히려 地域에 반듯한 大學이 있어야 人材가 養成되고, 그래야 地域이 發展할 수 있다고 說得했습니다. 요즘에는 地域에 大學을 세운다고 하면 住民들의 絶對的 支持를 받겠지만 當時에는 住民을 理解 시키고 說得하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단국대 天安캠퍼스가 세워진 것은 1978年. 우리나라 大學으로서는 最初의 地方캠퍼스 建立이었다. 단국대 天安캠퍼스를 始作으로, 只今 天安에는 10餘 個의 大學이 들어서 大學村(大學村)을 形成하고 있다. 天安캠퍼스의 建立은 天安地域의 景氣活性化에도 도움을 주었고, 단국대가 在學生 2萬餘 名의 巨大 綜合大學으로 成長하는 발板이 됐다. 現在 단국대는 敎授·學生 數, 各種 施設 等 學校 規模面에서 全國 10位圈 안에 들어 있다.

    天安 檀國大病院의 建立도 危險을 무릅쓰고 進行된 것이다. 1989年 着工해 1994年 開院한 檀國大病院은 2萬7100坪의 敷地에 延建坪 1萬9674坪의 規模로 600病床을 갖춘 忠南 最大의 醫療機關이다. 이 病院을 建立할 當時에는 財團 內部의 反對意見이 거셌다고 한다.

    首都圈에 病院을 세우면 큰 收益을 올릴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地方에 세우려 하냐는 것이었다. 病院을 建立하는 데 所要된 1800億원의 豫算이 1990年代 들어 大學財政을 위태롭게 한 主犯으로 指目되기도 했다.

    長이社長은 病院에 對해서도 “大學이 돈을 벌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잘라 말했다. “단국대學의 設立理念은 民族敎育과 國家復興에 있지 財産增殖에 있지 않다”는 게 그의 說明이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간다”

    損益을 따지지 않는 이러한 愚直한 모습은 ‘東洋學(東洋學)硏究所’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70年 設立된 東洋學 硏究所는 韓國文化를 中心으로 東洋文化 全般을 硏究하는 곳이다. 檀國大 東洋學硏究所의 活動 中 特記할 만한 것이 ‘한한(漢韓)대사전’ 編纂事業이다. 1977年부터 始作된 閑閑大辭典 編纂 作業은 2006年 完刊을 目標로 現在도 進行中이다.

    總 15卷으로 完成될 大辭典 中 2001年 12月 現在 世上에 빛을 본 것은 4卷. 아직도 17名의 專門要員과 外部 人力이 背馳돼 原稿의 主席·校閱·윤문·矯正 作業에 餘念이 없다. 15卷이 모두 出版될 때까지 所要되는 豫算은 120億원 程度.

    이 辭典이 完成되면 6萬餘 個의 漢字와 50萬餘 個의 語彙를 收錄한 世界 最大의 漢字辭典이 誕生하게 된다. 한두 달 만에 論文 한 篇, 冊 한 卷을 뚝딱 만들어내는 世上에 冊 하나를 내놓는 데 100億이 넘는 豫算을 投資하고 延人員 數萬 名을 動員했다고 하면 쉽게 理解가 되지 않는다.

    “閑閑大辭典 亦是 經濟性만을 따지는 사람은 ‘부질없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閑閑大辭典엔 損益計算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重要한 價値가 있습니다. 우리 民族文化의 胎盤이 漢字로 記錄돼 있음에도 이를 解讀하는 專門人力이 크게 不足합니다. 그나마 남아 있는 學者들이 他界하면 이를 繼承, 發展시킬 길이 없어집니다. 이분들이 살아계실 때 어떻게든 資料를 綜合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석(一石) 이희승(李熙昇) 博士를 비롯한 大學者들을 모셔왔습니다. 莫大한 豫算과 人員이 投入되더라도 民族을 위해 언젠가는 꼭 必要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김승국(金承國) 總長의 說明이다.

    남들이 쉽게 가려고 하지 않는 길을 開拓하려는 精神은 大學 運動部의 歷史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단국대는 다른 大學이 크게 關心을 갖지 않는 非人氣 種目의 팀을 꽤 많이 만들었다. 現在 大學最强으로 君臨하고 있는 럭비部가 1955年에 創團됐고, 테니스 복싱 體操 調整 스키 氷上 씨름 等이 단국대가 지난 50年 동안 育成해온 種目이다.

    學校의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는 人氣種目을 育成하면서 無理한 스카우트로 口舌數에 오르는 이른바 名門 私立大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다. 特히 冬季스포츠에 對한 關心이 全無하던 1970年代 中盤 誕生한 氷上部는 韓國 스피드스케이팅을 中興시키는 데 크게 寄與했다는 評價를 받고 있다. 1987年 世界選手權大會에서 優勝을 차지한 배기태를 비롯해 나윤수, 김기훈, 이준호 等이 檀國大 出身이다.

    國內 唯一의 몽골語學과

    단국대에 設置된 專攻學科 中 가장 눈에 띄는 것이 特殊敎育學科와 몽골語學科다. 단국대는 1971年부터 特殊敎育學科를 設置, 障礙兒童의 敎育을 擔當하는 特殊敎師를 養成해왔다. 現在까지 1600餘 名의 卒業生을 輩出했는데 卒業生들은 障礙人學校, 社會福祉施設 等에서 障礙人을 위해 獻身하고 있다.

    1997年에는 特殊敎育大學院을 韓國 最初로 新設해 韓國의 特殊敎育을 先導할 特殊敎師와 專門家를 多角的이고 體系的인 方法으로 養成하고 있다. 몽골語學科는 歷史的·人種的으로 우리民族과 같은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몽골에 對한 關心이 不足한 것을 念慮한 長이社長의 提案으로 만들어진 學科다. 現在 國內에서 몽골語學科가 設置된 大學은 檀國大뿐이다.

    스포츠科學 分野도 단국대가 意欲的으로 育成하고 있는 學問 分野다. 단국대가 스포츠科學에 關心을 갖게 된 것은 1986年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年 서울올림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誘致한 國家는 ‘스포츠 科學 세미나’를 열게 돼있었는데 當時로서는 이를 擔當할 硏究센터나 大學이 없었다.

    各種 大會의 成績에만 關心이 있었지 選手와 指導者를 養成하고 管理하는 데는 큰 關心이 없었던 때였다. 더구나 스포츠마케팅이나 生活體育, 스포츠醫學分野는 不毛地나 다름없었다. 長이社長이 서울올림픽 組織委員을 맡고 있어 이러한 役割을 할 學校로 단국대가 選定됐고 이때부터 스포츠科學 分野에 對한 集中的인 投資를 始作했다.

    現在 天安캠퍼스에 있는 스포츠科學部는 生活體育學 專攻, 運動處方學 專攻, 스포츠經營學 專攻으로 細分되어 있으며, 2000年 3月에는 스포츠마케팅, 스포츠醫學, 레저指導 等을 다루는 스포츠科學大學院이 門을 열었다.

    大學들이 ‘世界化’를 旗幟로 내걸면서 世界의 有數大學들과 姊妹結緣 맺기에 바쁜 때에 단국대學은 다른 大學들이 疏忽하기 쉬운 中南美 國家들과의 結緣에 큰 힘을 쏟고 있는 것도 特色 있는 部分 中 하나다. 韓國과 中南美 15個國을 잇는 다리가 되자는 趣旨로 推進하고 있는 이 事業은 中南美의 文化를 理解하는 것을 一次的 目標로 삼고 있다.

    2000年에는 ‘文學을 통해 본 中南美’라는 主題로 每月 1∼2個國을 選定해 年中 中南美文學에 對한 發表·討論會를 開催했고 지난해에는 ‘音樂과 춤을 통해 본 中南美’라는 主題로 15個國 大使(大使)를 每月 한 名씩 招請해 講演會를 열었다.

    1993年과 1998年 두 次例 危機에 處했을 當時 단국대에 對한 여러가지 陰害性 所聞이 나돌았다. ‘서울캠퍼스를 모두 處分할 것이다’ ‘檀國大病院을 外國企業에 賣却할 計劃이다’ ‘新(新)캠퍼스도 白紙化될 것이다’라는 所聞이었다.

    그러나 所聞은 但只 所聞이었을 뿐이었고 단국대는 構成員들이 한데 뭉쳐 危機를 克服했다. 敎授, 學生, 敎職員이 自發的으로 舊敎(救校)協議會를 構成해 誠金을 모으는가 하면 總學生會 幹部들이 奉仕奬學金을 返納했다. 全職員이 받은 月給을 學校에 되돌려주기도 했다.

    다른 大學으로 자리를 옮긴 敎授들이 誠金을 보내왔고 甚至於는 學校 앞에서 語學用 테이프를 販賣하는 가게 主人이 舊敎資金을 갖고 學校를 찾기도 했다. 學軍團 出身으로 軍服務中 숨진 한 卒業生의 아버지가 “나라를 위해 죽은 아들도 단국대의 正常化를 바랄 것”이라며 誠金을 내놓기도 했다.

    檀國大 構成員들은 危機를 克服하면서 學校에 對한 믿음과 愛情이 더욱 커졌다고 한결같이 말한다.

    現在 단국대는 京畿道 龍仁에 새 캠퍼스를 造成中이다. 行政區域上으로는 용인시에 位置해 있지만 분당 新都市와 隣接해 檀國大에선 새캠퍼스를 ‘盆唐캠퍼스’라고 부른다. 서울에서 30分 距離, 總 33萬 坪의 敷地에 들어서는 이 超大型 캠퍼스는 단국대의 宿願事業이다.

    盆唐캠퍼스가 完工되면 國內 最初로 서울, 盆唐, 天安 3個의 캠퍼스를 거느린 이른바 ‘멀티캠퍼스’로 거듭나는 것이다. 盆唐캠퍼스에는 東洋學, 尖端工學, 言論文化, 外國語系列, 特殊敎育學科를 移轉해 특성화할 計劃이고 天安캠퍼스를 의·치대, 生命工學界熱, 創業保育센터를 中心으로 한 生命工學의 메카로 造成할 計劃이다. 한便 서울캠퍼스는 大學院 中心으로 轉換해 特殊大學院과 社會敎育院을 入住시킬 豫定이다.

    金總長은 大學의 未來에 對한 剛한 慈心感을 내비쳤다.

    “우리 大學은 建學過程에서 볼 수 있듯이 獨立運動에 獻身했던 先覺者들이 民族人材를 養成하겠다는 一念으로 논밭을 팔아 만든 大學입니다. 世上이 워낙 刻薄해 正直하고 純粹하게 말하면 잘 믿지 않는 傾向이 있지만, 우리 大學은 ‘사람을 잘 키우는 것’이 가장 크고 唯一한 目標입니다. 盆唐캠퍼스 建立도 大學의 몸집 부풀리기가 아니라 21世紀 새로운 跳躍을 위해서 後學들에게 꼭 必要한 배움의 터전을 마련하는 過程입니다. 온갖 危機에도 단국대는 그 設立精神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意志가 앞으로 跳躍의 발板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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