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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1萬 時間 工夫’에 挑戰하는 喜悅|新東亞

다시 ‘1萬 時間 工夫’에 挑戰하는 喜悅

이초식 高麗大 名譽敎授(哲學)

  • 入力 2004-11-16 13: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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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빠져든 論理經驗主義의 魅力은 眞理에 對해 論爭하기에 앞서 참이라고 主張하는 말의 意味부터 分明히 하자는 데 있다. 假令 有神論·無神論 論爭에서 ‘臣’의 意味가 다르면 생각이 같아도 意見이 다르다. 따라서 ‘擬人化한 神’은 없다는 無神論과 ‘自然의 調和를 可能케 하는 存在로서의 神이 있다’고 믿는 有神論은 共存할 수도 있다.
    누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을 복되게 생각하며 感謝해 할까. 돈이 많은 사람이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까, 이 땅에 태어났기에 서로 만나 幸福을 期約하며 結婚하는 젊은 夫婦들일까, 어린이와 老人, 그리고 그밖에 保護와 惠澤을 많이 받은 階層일까, 아니면 억세게 運이 좋은 사람들일까. 都大體 우리 中에 몇 퍼센트나 이 땅에 태어난 것을 복되게 생각할까.

    요사이 뜬금없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자주 한다. 무거운 責任이 따르는 36年間의 大學講壇 生活을 끝내고 새로운 自由의 世上에 直面하니 過去를 되돌아보게 되고 옛 스승과 親舊들이 떠오르기 때문인 것 같다.

    이 땅에 태어나 복된 理由

    1947年 初等學校 6學年 國語敎科書에 ‘自由의 種’이라는 詩가 실려 있었다. ‘自由의 鐘이 울렸다’로 始作해서 ‘이 땅에 태어난 복된 우리’로 끝맺었던 것으로 記憶한다. 擔任先生님은 이 詩로 示範授業을 하셨다. 奬學士들人 듯한 外部 손님들이 授業을 參觀했다. 先生님은 나이도 지긋하고 大汎하며 所信 있는 분이라 豫行演習 같은 것은 하지 않고 그저 平素의 國語時間처럼 授業을 이끌어가셨다.

    授業은 順調롭게 進行됐다. 授業 마지막 무렵에 先生님은 “質問할 것이 있는 사람은 質問하라”고 하셨다. 나는 ‘이 땅에 태어난 복된 우리’라는 대목에서 왠지 憤怒 같은 熱氣를 느꼈고, 이를 참지 못해 손을 들고 일어나 激昂된 목소리로 따져물었다.



    “先生님, 이 땅에 태어난 것이 복되다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植民地 百姓으로 태어나 온갖 差別待遇를 받았고, 하고 싶은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다가 겨우 解放이 되고 나선 南北으로 허리가 잘려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고, 큰 犯罪를 저지른 犯人처럼 몰래 38線을 넘어야 하게 된 것도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인데 복되다는 말씀입니까? 이 땅에 태어난 것은 刑罰이지 決코 복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先生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當時 나는 平壤에서 海州로 越南하다 잡혀 이른바 ‘38監獄’이란 것도 구경했고, 艱辛히 풀려나서 漁船 고기桶 속에 숨어 北側 警備隊가 銃을 쏴대는 바다를 지나 越南하긴 했으나 開城에서 收容所 生活을 해야 했다. 그런 旅程을 마친 지 不過 3, 4個月쯤 된 때였다.

    나의 唐突한 質問에 對해 先生님은 너그럽게 理解하는 表情으로 이런 말씀을 해주신 것으로 記憶한다.

    “勿論 너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지. 우리보다 좋은 條件을 갖춘 나라에서 태어났으면 더 幸福하고 우리보다 못한 處地의 나라에서 태어났으면 우리보다 더 不幸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果然 그럴까? 아무리 좋은 條件에서도 不幸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나쁜 條件에서도 感謝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 그러니 이 詩처럼 우리가 幸福해지려면 우리가 福 받았다고 믿고 그렇게 생각할 만한 까닭들을 찾아보는 게 좋을 거야.”

    當時는 先生님의 그런 말씀이 納得되지 않았으나, 그後 半世紀 以上을 보내고 난 오늘에 이르러 回顧해 보니 이 땅에 태어난 것이 복되게 여겨지는 까닭을 무척 많이 發見하게 된다. 解放 後 混亂期에 虛送歲月하지 않도록 사랑의 채찍으로 嚴히 가르쳐주신 初等學校 6學年 擔任先生님, 韓國戰爭 當時 釜山 松都 뒷山에 天幕을 쳐놓고 學生들을 모아 熱心히 가르치신 여러 先生님들, 서울收復 全 地域別로 訓育所를 마련해 가르치시고 英國軍이 駐屯해 있던 敎師의 한 모퉁이를 얻어 砲聲이 들리는 敎室에서 心血을 기울여 가르치신 先生님들의 勞苦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나는 存在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분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내가 哲學科를 選擇하게 된 것은 哲學敎授 生活을 하려던 게 아니라 내가 몸 받쳐 섬기고 싶은 宗敎의 聖職者가 되기 위해서였다. 나는 尊敬하던 牧師님에게 “神學校에 가는 것이 어떻겠냐”며 相談을 請했다. 그러자 牧師님은 “나의 가장 큰 弱點은 내가 牧師라는 事實”이라며 내게 哲學 工夫를 하라고 勸했다. “哲學科를 卒業하고도 神學을 하고 싶으면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다”는 忠告였다.

    神學 豫備學問으로 哲學 選擇

    나는 그분의 忠告가 契機가 되어 哲學科를 志望했고 그後 哲學敎授로서 한平生을 보내게 된 것을 생각하면 이미 故人이 된 지 오래인 그분에게 깊이 感謝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젊어서 苦生은 金을 주고도 못산다는 말처럼 내 젊은 時節의 苦生은 참으로 所重한 밑천이 되었다. 動亂 當時 나는 나이가 모자라 軍隊에 가진 못했으나 고달픈 ‘生活前線’에서 暫時나마 다양한 장사經驗을 쌓았다. 水原-南陽-司講을 맴도는 場돌뱅이, 溫陽-天安-城안-둔포를 거쳐 다시 溫陽으로 回歸하는 ‘양키物件’ 長壽, 구포-삼량진-昌原을 오가는 汽車에 無賃乘車해 金海 배를 파는 장사, 釜山 道떼기 市場에서 땅콩을 사와서 영주동 골목에서 파는 장사 等의 經歷은 내게 삶에 對한 自信感을 갖게 했다.

    그때도 哲學을 하면 배가 고프다고들 했지만 나는 아직 철학하다 굶어 죽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當時 나는 大學을 못 나와도 얼마든지 잘살 수 있다는 생각에 旣往이면 하고 싶은 工夫나 마음껏 해보자는 心算으로 哲學科를 支援했다. 내가 神學을 하기 위한 豫備學問으로 哲學科를 擇했다가 神學과는 距離가 멀게 느껴지는 科學哲學과 論理學, 特히 確率과 意思決定 問題에 關心을 두게 된 것은 바로 韓國戰爭 當時 장사經驗에서 얻은 삶의 方式이 크게 作用한 것 같다.

    大學을 卒業한 後 3年 程度의 無給助敎와 時間講師 生活을 끝내고 1965年에 運 좋게 서울교육대학의 專任講師가 되었다. 軍服務를 마치고 無給助敎를 始作했을 때는 ‘칸트도 10餘 年間 家庭敎師 生活을 했고 스피노자도 平生 眼鏡알을 갈며 哲學을 했으니 나도 長期間 家庭敎師 等 私敎育으로 生計를 돌보며 工夫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意外로 빨리 時間講師 生活을 淸算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바라던 專任講師가 되고 보니 한便 기쁘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허전했다. 哲學으로 밥벌이를 하다니 소피스트가 따로 없구나. 나는 소피스트野, 그것도 애송이 末端 소피스트….

    이런 自畫像을 그리며 苦悶하다가 贖罪하는 뜻으로 學生들과 哲學冊을 함께 읽기로 했다. 放學 때 哲學冊을 읽을 學生들을 찾는다고 揭示板에 써붙이니 여러 學生들이 모였다. 當時 敎育大學은 2年 過程이었므로 課題物이 많았고 學生들은 成績順으로 發令을 받게 되므로 學校 成績에 매우 敏感했다. 그래서 學點 따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哲學工夫를 하겠다는 學生이 있을까 疑訝해 했는데, 哲學에 對한 學生들의 熱氣가 대단했다. 學生들은 스스로 ‘서울교육대학 哲學硏究會’라는 동아리를 發足했고, 그後에는 ‘서울교육대학 哲學同門會’도 만들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30餘 年間 꾸준히 工夫해 오고 있다.

    서울敎大에서 ‘敎育’을 배우다

    나의 敎壇生活에서 보람이 컸던 일을 꼽으라고 하면 서울敎大 哲學硏究會에서 學生들과 함께 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家庭敎師 노릇도 10年 가까이 했는데, 그때 가르친 弟子들은 돈을 주고 받는 것으로 ‘計算’李 깨끗하게 끝났다. 그런데 돈도 안 받고 學點도 안 주며 바쁜 時間을 빼앗은 哲學硏究會 弟子들과는 30年이 넘도록 ‘關係精算’李 잘 안되어 요즘도 가끔씩 만나고 있다.

    오늘날엔 敎育을 장사에 比喩해 ‘消費者 爲主의 敎育’이니 ‘잘 팔릴 수 있는 敎育’이니 하는 말을 거침없이 하고 있다. 나는 바로 이 ‘敎育壯士’야말로 우리 社會와 敎職者들이 熟考해야 할 重大事라고 생각한다. 敎育은 壯士라고 할 수 있어도 特殊한 장사이며, 敎育者는 勞動者라 하더라도 특수한 勞動者임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百貨店 店員이라면 손님에게 物件을 주고 物件값을 받으면 그만이지만, 知識이나 人格이라는 商品을 사고팔 때는 그렇게 單純하지가 않다. 돈 外에도 무엇인가가 오가는 것이다. 바로 그 ‘무엇’ 때문에 尊敬하고, 잘되기를 바라고, 애를 태우기도 하는 것이다.

    賃金鬪爭을 하는 가까운 弟子 敎師들에게 “나라면 賃金鬪爭을 하지 않는다”고 말해 주고 싶다. 그것은 損害보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敎師의 賃金鬪爭은 이겨도 損害고 지면 더욱 큰 손해기 때문이다. 이기면 돈은 좀더 받는 代身 그 돈보다 더 큰 ‘그 무엇’을 잃기 때문이고, 지면 돈도 더 못 받고 그 큰 ‘무엇’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의 價値를 영(零)으로 評價하는 사람들은 이기면 得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겠으나 나는 ‘그 무엇’에 큰 比重을 두므로 그렇게 믿는다.

    이 機會에 學父母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요즘 學父母들은 敎師보다 學識도 많고 가진 것도 많다보니 無心코 先生님들을 輕蔑하는 言辭나 行動을 하기 쉽다. 敎師라는 職業은 權威 없이는 任務를 제대로 遂行할 수 없으므로 敎師의 權威를 無視하고 輕蔑하는 態度는 良質의 敎育을 스스로 抛棄하는 結果를 招來한다. 初等學校 先生님이 弟子들에게 人事하는 法을 가르쳐서 人事를 받듯이, 아직 名譽敎授職을 가진 사람으로서 매우 거북하지만 “全國의 學父母들이여, 先生님을 믿고 尊敬하십시오”라고 付託드리고 싶다.

    敎師들 中에는 믿을 수 없고 존경스럽지 못한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믿고 尊敬해야 한다. 學父母들이 모두 自身을 하늘같이 믿고 사랑하는 子女를 맡겼으며 그들로부터 尊敬의 視線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때 그 어떤 敎師도 아이들을 疏忽히 對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敎師들에게는 醫師들이 醫療奉仕를 하듯이 돈을 안 받고 가르치는 ‘敎育奉仕’를 꼭 해보기를 勸한다. 나는 그것이 크게 得이 되는 壯士라고 믿기 때문에 앞으로 그런 길을 摸索해 보고 싶다.

    서울敎大에서 보낸 12年의 敎壇生活은 經驗이 不足해 서투른 것도 많고 失手도 많이 했으나 學生들이 哲學에 목말라하며 熱情的으로 學問을 受容했기 때문에 다른 職業에서는 좀처럼 느껴보지 못할 흐뭇한 보람을 맛볼 수 있었다. 學生들의 빛나는 눈瞳子를 보면서 나는 ‘아! 敎育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한두 番이 아니었다. 나는 서울敎大에서 敎育을 배웠고 建國大學校를 거쳐 고려대학교에 이르러 비로소 硏究生活의 참맛을 알게 됐다고 할 수 있다.

    20年에 걸친 나의 高麗大學校 時節은 硏究生活의 黃金期였다. 내가 고려대로 간 1980年代 고려대에 學生示威가 그치지 않던 混亂期였는데 어째서 硏究生活의 黃金期라고 하냐는 斑紋이 있을 수 있다. 當時의 社會的 與件은 敎授들의 硏究生活을 여러 面에서 妨害했으나 고려대 當局은 敎授들을 保護하고 硏究에 沒頭하도록 울타리 노릇을 해줬다.

    同僚 敎授로부터 고려대에서 나와 같은 專攻의 敎授를 求한다는 얘기를 듣고 지나가는 말처럼 “그럼 내가 가볼까?”라고 말한 지 1週日 後에 고려대 關係者에게서 “哲學科 敎授 全員의 同意를 얻었으니 總長 面談을 하러 오라”는 通告를 받고 고려대학교로 옮기게 됐다. 나는 그 以前에 여러 大學에 出講한 經驗은 있었으나 고려대에서 講義한 적은 없었고 哲學科 敎授님들도 많이 알고 있지 못한 處地였다. 그렇지만 고려대에 對한 첫印象은 아주 흡족스러웠다.

    學期가 始作된 지 얼마 안됐을 때였다. 同僚敎授 한 분이 “이게 우리 學校 農場에서 栽培한 것이니 한番 맛보시라”면서 버섯을 膳物했다. 그분은 當時 學校 行政을 맡아 내가 고려대로 오는 데 힘을 써주신 분인데, 그 以前에는 나와 安眠島 없던 터였다. 나는 얼김에 膳物을 받아들고 唐慌했다. 내가 그분께 膳物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분이 먼저 내게 膳物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膳物을 하는 것보다 그 분이 ‘앞으로 수고 많이 해달라’는 뜻으로 내게 膳物하는 ‘그림’이 더 멋있게 보였다.

    나는 고려대에서 過去의 敎育·硏究經歷을 모두 인정받아 높은 號俸의 正敎授로 任命됐다. 또한 當時 다른 學校에서는 처음엔 1年으로 契約했다가 다음 番에는 5年을 契約했는데, 고려대에서는 처음에는 3年, 다음에는 10年을 契約하는 破格을 보였다.

    그래서 敎授 待接을 제대로 받았다고 느끼던 次에 同僚敎授의 따뜻한 마음을 읽게 되니 흐뭇하지 않을 수 없었다. 亦是 큰 人物을 많이 輩出한 學校는 뭔가 다른 데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當時 고려대 敎務手帖을 보면 다른 大學들과는 달리 敎員 大部分이 正敎授였으며 專任講師나 조敎授는 몇 안되었다. 職位와 號俸은 財政과도 直結된다. 그 時節은 敎授 任命의 계약제가 敎授들을 威脅하고 支配하는 道具로 惡用되기 쉬운 때였다. 따라서 高麗大가 號俸策定과 契約問題에 그처럼 誠意를 보인 것은 ‘學校는 最善을 다해 財政을 支援하고 身分을 保障해줄 테니 자유로이 硏究에만 沒頭하라’는 뜻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생각하면 學校에 對해 고맙다는 생각보다 무거운 責任感을 갖게 된다. 强制로 出勤簿에 圖章을 찍게 하고 昇進과 계약제를 들이밀며 直接, 間接으로 威脅할 때 느끼는 責任感과는 質이 달랐다.

    假令 文科大學 敎授들에게 論文을 强要하는 게 요즘은 當然한 것이 되고 있으나 이것은 좀 생각해 볼 問題라고 본다. 論文을 强要하면 論文은 나올 것이며 一定한 水準의 敎授를 確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式의 學校 運營으로는 規格化한 中間 크기 程度의 고기를 낚을 수는 있어도 大魚를 낚을 수는 없다.

    過去의 學校 運營者들이 進級과 계약제를 요즘처럼 活用할 줄 몰랐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들이 나름대로 많은 投資를 하고 統制를 풀어 自身을 攻擊하는 自由까지 附與했을 때는 무엇인가 크게 바라보는 것이 있었을 것이고, 참고 기다리는 道場도 있었을 것이다. 敎育者들에게 自由와 自律을 期待할 수 없다고 보고 他律的인 制裁와 支配를 통해 바로잡으려는 것은 眞正한 敎育을 抛棄하는 結果를 招來하므로 自己 무덤을 파는 格이다.

    “젊은 敎授는 집에 가서 工夫나 해”

    激烈한 示威로 學生과 警察이 팽팽하게 對峙하고 있을 때였다. 그 時節 다른 大學들은 學生들의 示威 兆朕이 있으면 敎授들을 待機시키거나 때로는 “어느 敎授는 어디에서 示威를 막으라”고 場所까지 定해 주기도 했다. 그때 敎授 休憩室에 많은 敎授들이 모여 있었는데, 어느 盧(老)敎授가 젊은 敎授들에게 “學校는 補職敎授와 늙은이들이 맡을 것이니 當身네들은 모두 집에 가서 工夫나 하라”고 했다. “젊은 敎授들은 자칫하면 學生으로 誤認될 지도 모르니 뒷門으로 나가되, 或是 카메라에 찍힐지도 모르니 웃거나 弄談 같은 것은 하지 말고 悲壯한 表情을 지으라”고 해서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學生들이 決코 해서는 안되는 示威를 한다고 判斷됐을 때 示威를 막기 위해 몇 次例 自發的으로 나선 적이 있었지만, 그런 學校 雰圍氣 때문에 示威가 있을 때는 곧바로 歸家하는 것이 내 習慣이었다.

    고려대 哲學과는 다른 學科에 비해 示威에 決코 消極的이지 않았다. 示威에 積極 參與하는 學生들 中에는 나와 意見이 다른 學生들이 많았으나 그들은 敎授인 나에 對해 깍듯이 禮儀를 지켰으며, 師弟間의 두터운 情에도 變함이 없어 硏究室에 찾아온 그들과 많은 이야기를 虛心坦懷하게 나누곤 했다.

    當局은 學生示威가 左傾化하고 그것이 自生的인 데 그치지 않고 北쪽에 追從하는 것으로 疑心했고, 學生들은 “우리를 터무니없이 빨갱이로 몰고 있다”며 反駁하는 攻防戰이 거듭됐다. 그때 나는 學生들에게 이런 忠告를 건네곤 했다.

    “자네들이 共産黨 陋名을 벗는 것은 어렵지 않다. 大學 揭示板에 南쪽의 軍事獨裁를 打倒하자는 大字報를 열 番 써 붙일 때 한 番 만이라도 ‘우리는 모든 獨裁政權을 打倒하고자 하며, 그것은 南쪽 獨裁에 限定되지 않고 北쪽의 獨裁에도 該當된다’는 內容의 大字報를 붙여봐라. 그리고 이쪽 獨裁者를 誹謗하는 것과 같은 語法으로 北쪽 獨裁者도 誹謗한다면 너희들을 어떻게 빨갱이로 몰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忠告가 實現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獨裁를 打倒하자, 人權을 尊重하고 擁護하자, 北韓 同胞도 우리와 같은 同胞니 憎惡하지 말자, 하루速히 統一을 하자는 學生들의 主張에 對해 反對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重要한 것은 一貫性 있게, 그리고 偏向되지 않게 主張하는 일인 듯하다. 北韓問題 硏究가 나의 專攻은 아니지만, 나는 北韓이 故鄕이며 그곳에는 아직도 一家 親戚들이 많이 살고 있을 것으로 推定되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北韓에 對한 關心이 크다.

    劣惡한 處地에서 苦痛받는 많은 사람들의 苦痛을 덜어주고 勞動者들이 제대로 待接받도록 힘쓰는 것은 正義感에 불타는 젊은이들이 할 수 있는 일로 讚揚할 만하다. 하지만 北韓 同胞를 우리처럼 생각한다면 蔚山 勞動者와 仁川 勞動者들의 處遇 改善을 돕듯이 咸興 勞動者와 南浦 勞動者들의 權益도 言及해야 할 것이며, 釜山과 光州 敎員들의 敎權을 생각하듯이 義州와 元山 敎員들의 敎權도 열 番에 한 番쯤은 擁護하고 나서야 衡平에 맞을 것이다.

    論理經驗主義의 魅力

    나는 지난 20年間 여러가지 惡條件에서도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保護받을 수 있어 比較的 좋은 硏究環境을 가질 수 있었으나, 이에 副應하는 硏究成果를 내지 못해 只今도 빚을 진 느낌이다. 언젠가 그 빚을 갚아보고 싶다. 그래서 停年退任式章에서 “앞으로 健康이 許諾하는 限 于先 1萬 時間 工夫를 해보겠다”고 했고, 只今도 그 約束을 지키기 위해 努力하고 있다.

    1萬 時間을 생각하게 된 것은 操縱士인 中學校 때 親舊가 우리나라에서 最初로 飛行時間 1萬 時間을 突破했다는 事實이 기억나서 그 親舊가 하늘에서 보낸 時間만큼을 冊床에서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1萬 時間이면 얼마나 될까? 音樂을 專攻한 내 親舊는 “이제 나이가 나이니만큼 工夫도 ‘아다지오(Adagio)’로 쉬엄쉬엄 해야 한다”고 助言했다. 그래서 대충 株當 20時間씩 工夫한다고 家庭하니 1年(50週)에 1000時間을 工夫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1萬 時間을 工夫하려면 10年이 걸리는 셈이다.

    나의 有限性을 考慮할 때 내가 할 工夫는 그동안 해왔듯 科學哲學과 連結된 科學技術學에 寄與하고 論理敎育을 硏究, 開發하는 方向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내가 科學哲學과 論理學에 關心을 두게 된 것은 學部 3學年 때부터다. 앞서 言及했듯이 나는 牧會者가 되기 위한 豫備課程으로 哲學을 選擇했기 때문에 學部 初期에는 實存哲學과 老莊哲學 等에 心醉했으며, 現代文明 批判의 哲學的 性向에 끌렸다. 하지만 哲學社 工夫를 통해 다양한 哲學的 性向을 알게 된 後에는 科學의 基礎를 새롭게 確立하려는 論理經驗主義와 現實을 開拓하려는 프래그머티즘에 關心을 갖게 되었다.

    우리가 科學技術이 뒤떨어져 植民地 生活을 했고, 그로 인해 그때껏 後進國 身世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現實이라면 科學技術文明에 對한 哲學的 事由도 그 否定的인 側面을 暴露하고 排斥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 本質을 糾明하고 이를 우리의 삶에 맞도록 再構成하는 哲學이 要求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當時 우리 哲學界에서는 赤字(嫡子) 取扱을 받지 못했던 이 分野의 글들을 읽기 始作했다. 論理經驗主義 哲學에서는 새로 開發된 記號論理를 哲學함의 道具로 使用하므로 이 論理를 모르면 그 分野의 哲學冊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論理工夫를 해봤더니 高等學校 時節 數學에 趣味가 있던 터라 내 適性에도 맞았다.

    論理經驗主義의 魅力은 眞理에 關해 論爭하기에 앞서 참이라고 主張하는 말의 意味부터 分明히 하자는 데 있다. 哲學史에서의 다양한 論議나 日常生活에서의 論爭에서 서로 참이라고 主張하고 아니라고 反駁하는데, 이때 서로 主張하는 意味가 다르면 論爭의 成果를 얻기 어렵다. 假令 有神論과 無神論 論爭에서 ‘있다는 神’과 ‘없다는 申’의 意味가 서로 다르면 서로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意見이 다른 것으로 錯覺할 수 있다. ‘擬人化한 神은 없다’는 無神論과 ‘自然의 調和를 可能케 하는 存在로서의 神이 있다’고 믿는 有神論이 共存할 수도 있는 것이다.

    論理經驗主義의 認識的 意味 基準과 그에 依據한 反(反)形而上學的인 主張들은 지난 半世紀 동안 日常言語學派나 프래그머티즘과 結付되면서 여러가지 批判의 對象이 됐으며, 나도 哲學을 科學의 論理에 限定시키는 데에는 問題가 있다고 보게 됐다. 科學硏究는 科學의 論理와 科學的 知識理論뿐만 아니라 科學의 歷史學과 社會學 및 政策學 等으로 擴張돼야 하고, 따라서 앞으로 技術哲學을 本格的으로 다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環境과 生活을 변화시키는 것은 技術을 媒介로 하기 때문에 技術에 對한 哲學的 吟味는 1970年代부터 나의 關心을 끌었다.

    記號論理를 機械工學的으로 應用한 컴퓨터가 우리나라에 導入된 것은 1970年代 初로 記憶된다. 1971年에는 앞으로 컴퓨터 知識이 必要할 것으로 생각되어 生産性本部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밍 講座를 몇 달 동안 聽講했다. 鉛筆로 종이 위에서만 풀어보며 想像해 오던 記號論理가 컴퓨터를 통해 力動的인 結果를 나타내는 것을 보고 크게 感動해 이 길을 좀더 파고들고 싶었으나, 이미 敎育大學에서 道德敎育을 擔當하는 敎授職에 있었으므로 實踐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科學哲學과 技術哲學을 바탕으로 해서 人間의 頭腦를 模倣한 컴퓨터와 컴퓨터를 통해 人間의 認知活動을 硏究하는 데에는 持續的인 關心을 가져왔으며, 컴퓨터科學, 神經科學, 認知心理學, 言語學, 論理學, 哲學 分野의 學者들이 모여 認知科學(Cognitive Science)에 關해 學際的인 硏究를 하는 學會活動에도 積極的으로 參與한 바 있다. 그렇게 해서 얻은 結果를 1993年 ‘人工知能의 哲學’이라는 冊으로 發表했다. 또한 科學哲學, 科學史, 科學社會學, 科學言論學, 科學管理學을 統合 運營하는 科學學 協同過程이 高麗大 大學院에 設置되면서 지난 6年 동안은 이 일에 注力했으며, 그 延長線上에서 現在 韓國科學技術學硏究會를 책임지고 있다.

    筆者가 서울敎大에서 道德敎育을 擔當하면서, 그리고 學生들과 哲學冊을 읽는 동아리 모임을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우리의 敎育에 哲學敎育이 없어서는 안된다는 點이다. 누구보다 學生들이 哲學工夫를 切實하게 要求했으며, 敎育의 根本을 새롭게 하고 활기차게 하기 위해서는 知的 欲求가 强한 어린 時節부터 水準에 맞게 哲學敎育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交代 出身의 많은 現職敎師들도 이에 同感, 哲學同門會를 硏究會 모임처럼 자주 갖고 苦悶하면서 어린이 哲學敎育의 모델을 摸索했다. 그러던중 1980年代 初에 우리가 注目한 것이 美國 어린이哲學開發院의 哲學敎育 理論書 및 그와 連結된 어린이用 敎材와 敎師用 指針서였다.

    한便 韓國哲學會를 비롯한 哲學界에서는 高等學校 哲學敎育 問題를 本格的으로 論議하기 始作했다. 그래서 나도 哲學敎育, 特히 論理敎育을 基盤으로 한 哲學敎育의 硏究開發에 關與하지 않을 수 없어 1990年 中盤부터 韓國哲學敎育아카데미의 責任을 맡게 됐다.

    이런 事情 때문에 내게 남은 工夫時間은 科學哲學을 基盤으로 한 科學技術學科 哲學敎育을 志向하는 論理敎育 分野에 割愛해야 할 것 같다. 이를 서울敎大 哲學會에서 쓰던 標語로 巨創하게 말해보면 ‘人間敎育에 依한 人間革命’을 이룩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람이 달라지는 人間革命이 切實히 要望되며, 그것은 哲學的 人間敎育에 依해서 可能할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人間敎育은 科學技術의 發達과 더불어 날마다 變해가는 社會 안에서 遂行돼야 하므로 科學技術 一般에 關한 基礎知識을 隨伴해야 할 것이다.

    오래 공들여 만들어진 땅

    뿐만 아니라 人間敎育이 志向하는 人間像은 스스로 判斷하고 決斷하여 行動하는 自主的인 人間이므로 늘어나는 科學情報들을 그저 蓄積하기만 해서는 안될 것이며, 科學情報를 自身의 삶을 改善하는 데 主體的으로 活用할 수 있는 論理的 思考 訓鍊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人間敎育에서 論理敎育은 必須的이라고 하겠다.

    筆者가 살아오면서 이런 일을 했고 저런 일을 해보고자 하는 것은 모두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만날 수 없었을 사람들로부터 큰 身世를 졌기 때문이다. 나의 父母와 家族, 親戚들의 보살핌은 勿論이고, 學校 및 學會의 同僚와 先後輩 敎授들의 도움을 누구보다도 많이 받아 늘 感謝한 마음을 가져왔다. 게다가 나는 弟子 福도 많아서 나보다 卓越한 能力을 지닌 弟子들과 學問을 討論하며 山河를 즐길 수 있어 기쁘다. 그런 優秀한 弟子들이 職場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彷徨하는 것을 보면 무척 안타깝다. 國家의 將來를 위해서도 이런 優秀한 人材를 適所에 配置하지 못하는 것은 큰 損失로 여겨진다.

    ‘이 땅에 태어났다’고 했을 때 只今까지는 ‘이 땅’을 人間關係의 母胎로서만 이야기했는데, 韓半島라는 이 땅이 다른 땅과 區別되는 特色에도 注目할 必要가 있다.

    高等學校 共通科學 敎材에 地質時代를 實感나게 理解할 수 있도록 地球의 나이 46億年을 1年으로 換算해 人類가 出現한 時點이 언제인지를 알아보라는 問題가 있다. 그러면 1時間이 約 52萬5000年에 該當하니 人類의 誕生時點을 100萬年 以前으로 잡는다 해도 地球가 1月1日에 出發해 現在 12月31日 子正에 이르렀다고 假定하면 人類가 出現한 것은 12月31日 밤 10時가 지난 時點이 된다. 이렇듯 人類의 出現은 地球의 次元에서 보면 極히 最近의 일이다. 일찍이 京畿道 漣川 全谷里에 살았던 電氣 舊石器人들은 겨우 5, 6分 前에 出現했고, 우리의 ‘半萬年 歷史’도 40秒 前부터 始作됐으며, 사람의 한 平生 70年은 고작 0.5秒 程度다.

    그러나 서울 사람들이 즐겨 찾는 道峯山 冠岳山 佛巖山 等地의 花崗巖은 1億6000萬年에서 2億年 前의 것이라고 하니 12月 中旬 程度에 生成된 셈이다.

    뿐만 아니라 韓半島는 바닷속에 있었던 證據를 많이 지니고 있으며, 現在의 形態로 現在의 位置에 있게 된 것은 2億年 前 頃으로 推定된다. 韓半島는 크기는 작지만 世界的으로도 보기 드물게 20億∼30億年 前의 地層에서부터 古生代, 中生代, 新生代에 이르는 地層들을 모두 갖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高貴한 땅에 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그처럼 오랫동안 공들여 만들어진 땅이 바로 이 韓半島다. 잃어버린 땅을 되찾는 일도 重要하고 되찾은 땅을 잘 가꾸는 일도 時急하지만, 그에 앞서 땅의 잃어버린 意味를 되찾는 일이 더욱 重要할 것 같다. 땅의 意味를 모르면 땅을 되찾아 가꾼다는 것이 오히려 땅을 망치는 危險한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땅의 開墾과 保存을 비롯한 環境問題가 오늘날 우리 社會의 主要 關心事가 된 것은 歡迎할 일이나 그것은 近視眼的 利害打算의 誘惑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이고, 環境問題가 政治的 鬪爭의 手段으로 誤用돼서도 안될 것이다. 環境問題는 우리 世代에만 限定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올 世代와 地球人 모두의 問題이므로 깊고 폭넓은 哲學的 熟考가 必要하다. 何如間 그런 熟考가 후세인들이 ‘이 땅에 태어난 복된 우리’라는 歸結에 이르는 方向으로 進行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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