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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내려온 者 ‘새벽별 (Chorbon, 卒本)’에 터 잡다|신동아

現職 外交官이 쓴 韓中 5000年

하늘에서 내려온 者 ‘새벽별 (Chorbon, 卒本)’에 터 잡다

東漢 vs 夫餘族·선비帝國

  • 백범흠 | 駐프랑크푸르트 總領事, 政治學博士

    入力 2016-11-03 17:5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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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扶餘는 東아시아 歷史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扶餘에서 高句麗가 나왔고, 高句麗가 백제를 孕胎했으며, 백제는 왜(倭)와 連結된다. 扶餘는 494年 高句麗에 依해 滅亡하기까지 700餘 年間 이어지는데…
    한(漢)과 朝鮮의 葛藤이 尖銳化하던 紀元前 2~3世紀 ‘檀君(檀君)’, 卽 ‘텡그리 賃金’의 나라 濁里國(?離國)에서 떨어져 나와 南下한 一團의 무리가 滿洲 땅 쑹화(松花)江 流域 창춘(長春) 地域의 濊族(濊族)을 吸收해 附與를 建國했다.



    ‘텡그리’ 信奉한 扶餘

    ‘濁里’는 ‘텡리 또는 텡그리(Tengri, 하느님)’를 音借한 것으로 夫餘의 源流는 ‘하늘의 神(하느님)’ 텡그리를 信奉하는 不足이다. 扶餘는 勿論 附與를 起源으로 한 高句麗도 ‘하늘의 神’을 섬겼다는 것은 高句麗의 始祖 追慕(鄒牟)의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려온 해모수(解慕漱)로 알려진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여기서 ‘害(解)’는 音借로 우리말 ‘害(太陽, 太陽)’를 뜻한다.

    夫餘의 主流를 形成한 部族이 外部에서 移住해왔다는 事實은 夫餘 建國說話 ‘東明聖王(東明聖王) 이야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卽, 동명성왕 說話는 南部 시베리아-北몽골·北滿洲 一帶에 居住하던 部族의 南下 事實을 反映한 것이다. 扶餘는 紀元前 107年 漢나라에 滅亡당한 朝鮮보다 東아시아 歷史에 더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扶餘에서 高句麗가 나왔고, 高句麗에서 百濟가 孕胎됐으며, 백제는 왜(倭)와 連結된다.

    선양(瀋陽)과 창춘 사이에 錦江 流域의 ‘扶餘(扶餘)’와 똑같은 이름의 都市 ‘푸위(扶餘)’가 있다. 왜 錦江 流域 附與로부터 北쪽으로 1600㎞ 넘게 떨어진 쑹화(松花)江 流域에 扶餘라는 都市가 하나 더 있는 걸까.



    江原 江陵(江陵)과 慶南 咸陽(咸陽)은 統一新羅 以後 中國 후베이(湖北)省 장링(江陵)과 산시(陝西)省 셴양(咸陽)에서 이름을 딴 것으로 보이는 데 비해 錦江 流域 扶餘는 後날 夫餘族의 源流가 되는 濁里國 出身의 한 무리가 南部 시베리아 一帶를 出發해 쑹화江과 鴨綠江, 漢江을 거쳐 錦江 流域까지 數千㎞에 걸친 民族 移動의 結果로 생겨났음이 分明하다. 夫餘族이 滿洲 쑹화江 流域과 錦江 流域에 各其 ‘扶餘’라는 이름의 都市를 남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民族 形成에 至大한 影響을 미친 扶餘는 어떤 나라였을까.

    三國志 魏志 동이전에 따르면 扶餘는 ‘初期에는 오랫동안 어느 나라에도 敗해본 적이 없다 한다.’ 高句麗가 隆盛하기 始作한 3世紀 中葉 以前까지 扶餘는 滿洲 地域 最强國이었다. 2世紀頃 扶餘는 보기(步騎) 7萬~8萬을 動員해 다링허(大凌河) 流域으로 進出해 冬寒軍(東漢軍)과 싸울 程度였다. 扶餘는 494年 高句麗 文咨王(文咨王)에게 滅亡하기까지 高句麗, 모용선非(慕容鮮卑), 挹婁(?婁) 等과 싸워가면서 700餘 年間 나라를 維持했다.

    나라가 滅亡한 5世紀 以後 扶餘의 支配層 大部分은 高句麗 地域으로 移住했다. 殘留한 扶餘人들은 오늘날의 하얼빈(哈爾濱)을 中心으로 몽골系 不足과 힘을 합쳐 ‘두幕루(豆莫婁)’를 세웠다. 두幕루는 300餘 年間 나라를 이어가다가 726年 渤海 2代王 대무예(大武藝)에게 滅亡당했다. 夫餘의 痕跡은 쑹화江 上流의 白金步-漢書2期 文化 및 지린(吉林) 一帶 西端山 文化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便, 韓武帝(漢武帝)의 攻擊的 對外政策은 北方의 匈奴는 勿論, 東邦의 선비(鮮卑)와 藝脈(濊貊), 西方의 저·江(?羌), 月池(月氏), 南方의 月(越) 等 隣近 不足에 큰 影響을 줬다. 文化와 文化, 不足과 部族이 混化(混化)했으며, 發展이 뒤처지던 다양한 部族이 漢나라와 匈奴에 刺戟받아 스스로 나라를 세우는 等 새로운 世界가 열렸다.

    特히 滿洲와 韓半島에서 이러한 傾向이 두드러졌다. 紀元前 1世紀 附與를 離脫한 一團의 무리가 ‘하늘에서 내려온 者(解慕漱)의 아들’로 알려진 追慕를 指導者로 랴오닝(遼寧)省 東南部 鴨綠江 中流 地域으로 南下해 原住民을 吸收한 後 卒本(Chorbon, ‘새벽별’이라는 뜻의 古代 터키語)을 根據로 高句麗를 세웠다. 高句麗의 首都가 ‘Chorbon’으로 불렸다는 것은 高句麗에 투르크적 要素가 包含됐음을 뜻한다.


    100個의 나루, 百濟

    高句麗가 國家 體制를 갖추는 過程에서 소서노(召西奴)와 沸流(沸流), 온조(溫祚)가 이끄는 海上 連繫 勢力이 離脫했다. 이들은 西海 뱃길을 타고 내려가 漢江 下流 서울 一帶를 占據하고 ‘100個의 나루(港口)를 가진 나라’라는 뜻의 百濟(百濟)를 세웠다.

    高句麗와 백제는 建國 以後 곧 東아시아 國際社會에 頭角을 드러냈다. 高句麗와 백제 建國을 전후해 洛東江 左岸, 오늘날의 慶州 地域에는 新羅(新羅), 洛東江 右岸, 오늘날의 金海 地域 等에는 가야(伽耶)가 出現했다. 新羅나 伽倻의 建國 모두 北方에서 南下한 不足과 限界(韓係) 原住民이 混化한 結果였다.

    無題의 曾孫子인 先制(宣帝)는 武帝가 남긴 否定的 遺産, 卽 深刻한 經濟難을 克服하고 匈奴에 攻勢를 取하는 等 中興의 時代를 열었다.

    匈奴는 한나라君의 잇단 攻擊, 不純한 氣候에 따른 起亞(饑餓), 鮮于 繼承 問題가 겹친 끝에 紀元前 55年頃 桐·西로 分裂했다. 東部를 代表하는 浩瀚野(呼韓耶) 선우가 漢나라에 降伏하는 等 匈奴는 存亡의 危機에 내몰렸다. 西部를 代表하는 질지(?支) 선우는 脫出口를 찾아 北쪽의 精靈(투르크족의 한 갈래)과 西쪽의 見困(투르크족의 한 갈래로 키르기스人의 祖上)을 征服했다.

    또한 카자흐스탄 東南部 일리江 流域의 康居(투르크족의 한 갈래)를 服屬시킨 後 오손(투르크족의 한 갈래)을 合倂해 키르키스의 秋(Chu)姜으로부터 우즈베키스탄 西部 아랄해에 이르는 大帝國을 建設했다.

    徐匈奴는 紀元前 41年 秋江과 탈라스江 사이에 큰 城을 쌓았다. 徐匈奴에 對한 한나라의 攻擊은 執拗했다. 漢나라와 洞匈奴 聯合軍 7萬餘 名이 城을 에워싸고 激烈히 攻擊해왔다. 끝내 性은 陷落되고 질지, 鮮于 等 徐匈奴 指導部 1500餘 名이 殺害당했다. 漢나라도 先帝를 마지막으로 衰退期에 접어들었다. 先制의 아들이자 儒敎的 理想主義者인 원제(元帝)와 放蕩한 快樂主義者 성제(成帝)를 거치면서 爛熟期(爛熟期)의 頹落을 經驗하고, 紀元後 8年 外戚 汪茫(王莽)의 新(新)에 나라를 簒奪당하고 말았다.



    高句麗와 ‘하구려’

    한나라를 빼앗은 汪茫은 不足한 正統性을 補完하고자 ‘儒敎的 理想主義에 立脚해 西周(西周)에서 施行됐다’는 井田制(井田制)를 導入하는 한便, ‘한나라의 모든 것’을 否定하는 方向으로 나아갔다. 旣存의 政府 機關名과 指名 또한 거의 다 바꿨다. 甚至於 外國人 高句麗를 ‘하구려(下句麗)’라고 부르기도 했다. 王莽錢(王莽錢)을 導入하는 等 貨幣改革을 實施했으며 王土思想(王土思想)에 立脚해 土地와 奴婢의 賣買를 禁하고, 소금과 철, 술을 비롯한 重要 産物乙모두 政府 統制下에 뒀다.

    王莽의 섣부른 經濟·社會改革은 經濟難을 加重시켰으며, 豪族(豪族)은 勿論 그가 保護하려던 小商人과 農民도 不滿을 품게 했다. 王莽의 失敗는 以前 王朝(王朝)의 것은 덮어놓고 不正한 데서 出發했다. 過度한 理想論은 이에 기름을 부었다.

    農民의 不滿은 ‘綠林적(綠林賊)의 亂’ ‘적미(赤眉)의 난’ 等 全國 規模의 叛亂으로 이어졌다. 汪茫은 王邑(王邑)과 엄우(嚴尤) 等에게 40萬 大軍을 줘 막 國家 體系를 갖추기 始作한 갱時祭(更始帝) 幽玄(劉玄)의 綠林 叛亂軍을 討伐하게 했다. 攻擊 目標는 綠林君의 將帥 王蜂(王鳳)과 有數(劉秀)가 守備隊將으로 있던 허난省 所在 곤陽性(昆陽城)이었다.

    有數는 13期(騎)만 거느리고 包圍된 곤養成에서 가까스로 脫出하는 데 成功했다. 有數는 性 附近에서 救援兵 7000名을 모아 다시 곤陽性으로 向했다. 有數의 卓越한 指揮와 兵士들의 一當百 戰鬪力 等에 힘입어 綠林軍은 곤陽性 戰鬪에서 신나라 40萬 大軍을 壞滅시켰다. 이 戰鬪로 인해 신나라는 事實上 滅亡했다. 이때가 紀元後 23年이다.

    勝勢를 탄 갱時祭軍은 新나라의 首都 洛陽(뤄양)을 占領한 데 이어 長安(시안)도 손에 넣고, 새 政權의 都邑으로 삼았다. 갱時祭 幽玄은 流水를 警戒했다. 幽玄은 冀州(冀州)와 柳州(幽州) 卽, 허베이 地域이 安定되지 않았다는 理由로 流水를 허베이 地域에 派遣했다. 幽玄과 그의 側近들은 有數가 사라지자 權力에 陶醉했다.



    ‘得隴望蜀(得?望蜀)’의 由來

    有數의 軍隊가 허베이 地域을 떠돌 무렵 漢나라 성제의 아들이라고 主張하는 왕랑이 이끄는 勢力이 黃河 中下流에 면한 한단(邯鄲)을 中心으로 蜂起했다. 왕랑의 勢力은 急激히 불어났다.

    有數는 허베이 地域의 最强者가 鎭靜王 柳孃이라고 判斷한 後 그에게 接近했다. 有數는 다리를 놓아 柳孃의 姪女인 곽성通을 아내로 맞이했다. 有數는 柳孃을 後援者로 두면서 그가 거느리던 10萬 大軍을 確保했다. 有數의 人品과 能力을 눈여겨보던 어양(漁陽), 상곡(上谷) 等의 强力한 軍隊를 保有한 地方官들이 麾下에 모여들었다. 結局 有數는 왕랑을 손쉽게 擊破했다. 어양은 只今의 베이징市 一圓, 상곡은 산시省 北部 一帶로 匈奴, 선비, 扶餘, 高句麗 等 北方 民族 나라들에 接한 곳이다.

    幽玄은 왕랑이 除去된 것에 기뻐하기보다 有數의 勢力이 커진 것에 不安을 느꼈다. 有數의 軍隊는 地方 豪族과 옛 한나라 官吏의 軍隊까지 吸收해 數十萬 名에 肉薄했다. 有數는 紀元後 25年 光武帝(光武帝)로 登極했다. 이제 天下 霸權의 向方은 流水와 갱時祭 幽玄, 그리고 番숭(樊崇)李 主導하는 敵美軍으로 좁혀졌다. 光武帝 有數는 遊絃을 壓迫했으며 勢가 不利해진 幽玄은 적美軍에 投降했다. 有數는 敵美軍과 天下를 건 一戰을 準備했으나 거듭된 旱魃과 飢餓로 因해 烏合之卒이 돼버린 적美軍은 紀元後 27年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劉秀에게 降伏했다.

    有數는 敵美軍의 降伏을 받은 後 讀者 政權을 樹立하고 있던 간쑤省 東南部 롱(?)의 外孝(??)와 燭(蜀)의 公孫述(公孫述) 勢力을 滅했다. ‘한 가지를 이루고 나면 또 한 가지를 바라는 人間의 끝없는 欲望’을 意味하는, 卽 弄을 얻고도 滿足할 줄 모르고 또 鏃을 노린다는 뜻의 ‘得隴望蜀(得?望蜀)’이라는 말이 여기서 생겨났다. 어쨌거나 光武帝 有數의 한나라, 卽 動한(東漢)이 紀元後 36年 모든 敵對 勢力을 制壓하고 中國을 再(再)統一한 것이다.


    高句麗의 베이징 侵攻

    유수군과 갱時祭 幽玄群, 적美軍, 왕랑群 等이 얽히고설킨 內戰이 持續됐지만 弱化될 대로 弱化된 匈奴는 큰 威脅이 되지 못했다. 匈奴가 弱化되고, 漢나라 滅亡에 이은 新나라 王莽 政權의 實情으로 인해 20餘 年間이나 內戰이 持續되는 等 中原이 混亂에 빠져들자 滿洲와 韓半島에서 새로 일어난 扶餘, 高句麗, 백제, 新羅, 伽倻 等은 自己들끼리는 勿論, 한족과 선비·烏桓族, 倭族 等과도 存亡을 건 戰爭을 벌였다.

    特히 高句麗는 建國 初期부터 東濊와 沃沮 等 隣近 不足은 勿論 動한 等 外部 勢力에 對해 攻擊的인 政策을 取했다. 5大 모본왕(慕本王)은 紀元後 49年 冬寒이 아직 安定되지 않은 틈을 노려 선비·烏桓族 騎兵과 함께 멀리까지 휘몰아 쫓아가 將星 以南의 북평, 어양, 상곡, 진양 等을 侵攻·掠奪하는 等 凍寒에 對해 積極的 攻勢를 펼쳤다. 後漢書 光武帝 本紀에 따르면 ‘모본왕이 紀元後 49年 북평, 어양, 상곡, 太原(진양)을 侵攻했다’고 한다. 三國史記度 ‘모본왕이 49年 長壽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 어양, 상곡, 太原을 襲擊했다”고 記錄한다.

    북평, 어양은 오늘날의 베이징·허베이 一帶, 진양(太原)은 산시(山西)省 聖徒(省都) 타이위안(太原)시다. 한족과 北方 民族이 混居하던 베이징과 타이위안 一帶는 언제나 北方 民族의 作戰 範圍 안에 들어가 있었다. 高句麗가 初期부터 다링허와 롼虛 流域을 넘어 베이징과 타이위안 等 中國 乃至(內地) 깊숙이 軍士를 보낸 것을 특별한 일로 볼 必要가 없는 것이다.

    有數가 王莽 時代의 混亂을 收拾한 끝에 再建한 冬寒은 一種의 豪族聯合體制(豪族聯合體制) 國家였다. 有數는 故鄕 허난省 난양(南陽) 隣近 出身인 음(陰), 等(鄧), 來(來), 量(梁)氏와 허베이省 鎭靜(眞定) 出身 有(劉), 곽(郭)氏 等 豪族의 協助에 힘입어 冬寒을 創建하는 데 成功했다.

    冬寒은 ‘난양 劉氏 會長’ 밑에 豪族이 持分을 가진 ‘豪族 株式會社’ 形態의 나라였다. 冬寒은 光武帝에 이어 命題(明帝)와 章帝(章帝) 때까지는 隆盛했으며, 匈奴에 對해 攻擊的인 政策을 取했다. 章帝를 繼承한 話題(和帝)도 高句麗와 匈奴 等 北方 民族에 對한 攻擊을 繼續했다.

    東漢의 政治 工作과 深刻한 旱魃이 惹起한 內戰 탓에 洞匈奴는 紀元後 48年 南·北으로 分裂했다.



    匈奴, 카스피海 거쳐 유럽으로

    北匈奴가 再起하자 冬寒은 紀元後 73年 두고(竇固)와 勁兵(耿秉)을 시켜 匈奴 征伐을 再開했다.

    冬寒은 班超(班超)를 시켜 실크로드를 掌握하게 하는 等 通商路를 망가뜨리는 方法으로 北匈奴의 經濟力을 枯渴시켜 나갔다. 冬寒은 또한 85年 南匈奴, 精靈, 선비·烏桓을 使嗾해 北匈奴를 攻擊게 했다. 北匈奴는 외몽골 戰鬪에서 남匈奴 聯合軍에 大敗했으며, 20萬 名 以上이 南匈奴에 降伏했다. 87年 선비의 攻擊을 받은 北匈奴는 또다시 敗北했다. 91年 서몽골 알타이산 附近에서 遊牧하던 北匈奴는 東漢의 大將軍 두헌(竇憲)의 攻擊을 받아 勢力을 거의 잃고, 殘餘 10餘萬 號가 선비에 合流했다.

    또한 단석괴(檀石槐)가 몽골을 中心으로 선비帝國(鮮卑帝國)을 세우자 몽골 地域에서 匈奴의 存在는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선비에 降伏하지 않은 北匈奴 本流는 키르키스 탈라스江 流域의 同族들과 合流해 舒川(西遷)했다. 이들은 아랄해와 카스피해, 南部 러시아(키흐차크) 平原을 거쳐 4世紀 무렵에는 훈族의 모습으로 로마 東北部 邊境에 모습을 드러냈다.

    南匈奴는 남천(南遷)했다. 韓紙(漢地)로 移住한 남匈奴는 산시(山西), 산시(陝西), 간쑤(甘肅), 닝샤(寧夏) 等地에 자리 잡았다. 이들은 動한 말과 三國時代, 西秦(西晉)을 거쳐, 5號 16國 時代에 民族 最後의 불꽃을 피웠다. 이들은 司馬懿(司馬懿)의 孫子 司馬炎이 세운 西進을 멸망시키고 中國 內地에 한(漢), 前趙(前趙), 後趙(後趙), 下(夏), 北凉(北凉) 等을 세웠다.

    話題 以後 劉氏 皇室은 繼續 弱化되고, 外戚을 包含한 豪族 勢力은 强化됐다. 等(鄧), 廉(閻), 量(梁)氏 等 外戚이 得勢하면서 冬寒은 求心力보다는 遠心力이 더 剛하게 作用하는 나라가 됐다. 幼少年이던 姪娣(質帝)는 外戚 出身 權臣 陽氣(梁冀)에게 毒殺당했다. 姪娣를 이은 丸劑(桓帝) 時期에 이르러서는 陽氣를 打倒하는 데 主導的 役割을 한 宦官(宦官)李 豪族을 凌駕하는 權力 集團이 됐으며, 丸劑를 이은 영제(靈帝) 때는 이들이 國家權力을 掌握했다.

    영제는 십상시(十常侍)를 包含한 宦官에게 絶對的으로 依存했다. 甚至於 宦官 張孃을 아버지, 宦官 條蟲을 어머니라 부르기도 했다. 십상시를 비롯한 宦官들은 親姻戚을 大擧 管理로 起用했으며, 收奪과 貪虐(貪虐)으로 날을 지새웠다. 宦官들의 行態는 一般 百姓뿐 아니라 豪族들의 利益 또한 深刻하게 侵奪하는 것이었다.

    東漢의 豪族과 士大夫 官僚들이 십상시를 包含한 宦官을 얼마나 憎惡했는지는 이民族인 强族(羌族) 群團을 背景으로 한 西凉 軍閥 童濯(董卓) 執權 初期 豪族 等이 그를 全幅 支持한 데서도 알 수 있다. 豪族이 動한 調整에 등을 돌림으로써 東漢의 支配 體制는 뿌리째 흔들리기 始作했다.


    투르크-몽골系 ‘선비帝國’

    話題 以後 冬寒이 크게 弱化되자 匈奴를 代身한 高句麗와 선비 等 北方 民族이 隨時로 冬寒을 侵攻했다.

    眼眥(安帝)는 高句麗의 거듭된 侵攻에 對應해 121年 유주刺史(幽州刺史) 風圜으로 하여금 高句麗를 先攻하게 했다. 風換銀 요동태수 采風, 現도태수 搖光과 함께 3萬 聯合軍을 動員해 高句麗를 攻擊했다. 태조왕(太祖王)의 아우 水星(나중 차대왕으로 登極)은 冬寒軍에 包圍당한 藝脈性을 救援하러 가던 中 이미 城이 陷落됐다는 消息을 듣자 降伏하는 척해 風圜을 放心하게 한 後 藝脈性 奪還에 나섰다. 誘引策에 걸려든 風換銀 高句麗軍의 埋伏攻擊에 大敗하고 달아나다가 藝脈城을 빼앗기고 도망쳐 오던 采風과 만났다. 風환과 采風은 요서 要수현(遼燧縣)으로 後退해 反擊을 準備했다. 태조왕은 선비 兵士 8000名을 包含한 精銳軍을 이끌고 水星의 部隊에 合流했다. 태조왕이 指揮한 高句麗軍은 卽刻 攻勢를 取해 桐韓君을 大破했다. 采風은 戰死하고 搖光은 달아났으며, 유주刺史 風圜은 나중에 搖動의 6個 縣을 넘겨주는 條件으로 高句麗와 和親條約을 맺었다.  

    匈奴가 弱化되자 투르크-몽골系 선비가 興氣(興起)해 匈奴의 빈 자리를 메웠다. 선비족 族長 단석괴(137~181)는 2世紀 中葉 只今의 內몽골自治區 首都 후허하오터(呼和活特) 西쪽 彈閑散(彈汗山, 텡그리칸의 山이라는 뜻)을 中心으로 軍隊를 모아 南쪽으로는 東漢의 變更을 攻掠하고 北쪽으로는 南시베리아의 투르크系 不足 精靈(丁零)의 侵攻을 沮止했다. 또한 그는 東쪽으로는 附與, 西쪽으로는 汚損을 制壓하는 等 匈奴가 다스리던 땅 거의 全部를 平定해 東西 5600㎞, 南北 2800㎞에 達하는 강대한 선비帝國을 세웠다.

    단석괴는 156年 將星 以南의 운중을 攻擊했으며, 158年 以後에도 허베이省, 산시(山西)省 地域과 요동 地域을 끊임없이 攻擊했다. 단석괴는 나라를 3部로 나눈 後 各部에 大人을 둬 다스리게 했다. △우북평(베이징 東쪽) 移動 扶餘, 藝脈 接境 地域의 愚問部(宇文部)와 單付(段部)를 包含한 20餘 個 部를 東部 △우북평 李曙 상곡 地域 毛用部(慕容部) 等을 中部 △상곡 李曙 拓跋部(拓跋部) 等을 西部로 나눴다.



    황건君의 蜂起

    元來 남匈奴 一派인 愚問部는 後날 托鉢선비의 北緯(北魏)를 代身해 北周(北周)를 建國하고, 산둥의 北齊(北齊)를 멸망시켜 華北을 統一함으로써, 그 뒤를 이은 수(隋)가 西晉(西晉) 以後 350年 만에 다시 中國을 統一할 基盤을 構築했다. 선비 勢力의 負傷(浮上)에 威脅을 느낀 動한 調整은 177年 오환교位(烏丸校尉) 下肉, 선비中郞將 田案, 匈奴中郞將 狀民 等으로 하여금 3萬~4萬 名의 動한-남흉노 聯合軍을 指揮해 산시省 北部 안門(雁門)에서 長城을 넘어 선비君을 攻擊했지만, 단석괴의 戰略에 말려 大敗하고 兵士 大部分을 잃고 말았다.

    단석괴가 死亡한 後 선비足 聯盟은 곧 瓦解됐다. 愚問部, 毛用部, 拓跋部, 單付, 毒發付, 걸腹部, 毒姑婦, 下欄部, 乙佛部 等 많은 선비不足은 離合集散하면서 各自 生存의 길을 찾아 나섰다.

    宦官의 跋扈라는 內憂(內憂)와 단석괴가 惹起한 外換(外患)에 시달리던 冬寒은 分裂과 混亂에 빠져들었다. 영제가 在位하던 184年 道敎 系統의 太平道 敎主(敎主) 長角(張角)의 主導로 허베이 거록(鉅鹿)에서 始作된 황건君의 蜂起는 허베이와 허난, 산둥 地域 大部分을 휩쓸어 動한 統治 體制와 經濟·社會秩序를 붕괴시켰다.



    位(魏) 燭(蜀) 오(吳)의 定立

    農民 抵抗運動 性格을 지닌 황건君의 蜂起는 뿌리째 흔들리던 動한 政權의 마지막 숨筒을 끊어놓았다. 長角 3兄弟가 死亡한 後에도 황건君의 蜂起는 이어졌다. 長角 追從者들은 動한 支配層의 收奪에 憤怒한 農民들을 이끌고 動한 政權에 對한 抵抗을 持續했다.

    冬寒은 混亂을 더해갔으며 그 틈을 타 曹操, 劉備, 손책·孫權, 元素, 元述, 공손찬, 유장, 馬등, 旅抱 等의 軍閥이 豪族(豪族)과 塞外民族(塞外民族)의 武力을 背景으로 새 秩序 構築을 위한 逐鹿戰(逐鹿戰)에 뛰어들었다. 이 中 曹操, 劉備, 孫權 3人만 나라를 創業하는 데 成功했다.

     東漢의 政治·經濟 中心地는 首都 洛陽이 位置한 荒墟 中流의 허난으로 산시(陝西)와 산둥이 各其 部中心(副中心)을 形成했다. 간쑤 南東部와 산시 西部, 충칭-쓰촨(巴·蜀), 창장(長江) 以南 地域은 各其 티베트系 저·江(?·羌)과 東南亞系 무릉만(武陵蠻), 墓(苗), 月(越) 等 異民族이 散在했다.

    또한 산시(山西), 산시(陝西), 오르도스, 간쑤, 닝샤, 허베이 等에는 한족과 匈奴·갈, 선비·烏桓 等 여러 民族이 混居했다. 曹操의 위(魏), 劉備의 燭(蜀), 孫權의 오(吳)가 荒墟와 창장 上流, 창장 中下流를 中心으로 分列·定立한 것도 이 같은 中國의 地理 및 社會·文化的 差異에서 起因한 것이다.

    曹操가 위나라를 建國한 220年을 전후한 때 中國 人口는 約 1400萬 名으로 황건君의 蜂起가 發生하기 以前의 3分의 1 程度로 줄어 있었다. 內亂 渦中에 많은 百姓이 죽임을 當하거나 政府의 行政力이 미치지 못하는 奧地로 숨어든 것이다. 廣大한 領土와 人口를 가진 中國은 人口密度가 지나치게 낮아지면 中央集權的 統治體制가 무너져 分裂로 이어지는 傾向을 보였다. 황건群 蜂起 以後 나타난 三國時代와 唐나라 時代 황소(黃巢)의 난 以後 찾아온 5代 10國 時代가 代表的이다.



    백 犯 흠

    ● 1962年 慶北 醴泉 出生
    ● 연세대 新聞放送學科 卒業, 政治學博士
    ● 駐中國大使館 總領事
    ● 現 駐프랑크푸르트總領事館 總領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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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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