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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평통 書記局 ‘이회창 죽이기’ 나섰다|신동아

조평통 書記局 ‘이회창 죽이기’ 나섰다

北韓의 2002 大選 介入 內幕

  • 최영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cyj@donga.com

    入力 2004-09-07 10: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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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韓은 5月 以後 勞動新聞을 動員하여 이회창을 集中 攻擊하고 있다. 6月13日에는 祖國平和統一委員會 書記局 名義로 李會昌 告發狀까지 냈다. 北韓은 왜 韓國言論에도 報道되지 않은 情況까지 들어가며 이회창을 ‘때리는’ 것일까? 潛在的 大選 候補인 박근혜에게 공을 들이는 理由는 무엇일까? 그 속셈을 分析했다.
    5月과 6月 내내 北韓 言論은 시리즈로 한나라당 이회창 候補를 非難하는 記事를 내보내고 있다. 5月17日子 平壤 朝鮮中央通信 報道다.

    ‘리회창이 깨끗한 핏줄을 타고 庶民行步를 걸어온 것처럼 廣告하고 있는 것은 政治 挾雜꾼의 너절한 醜態다 … 里會創意 애비는 日帝 때 日本人도 오르기 힘든 檢察書記 노릇을 하면서 愛國的 獨立運動家를 處刑·虐殺하는 盜賊질을 수많이 敢行했고, 8·15 光復 後에는 親美走狗로 遁甲하여 온갖 惡行을 저질렀다.

    리회창은 잔뼈가 굳기 前부터 日本옷을 입고 日本말을 하며 日本人 行世를 하고 돌아쳤으며 8·15 後에는 美國을 섬기며 美國式 自由民主主義 狂信者로 惡名을 떨쳤다. 리회창은 自己가 法官 出身으로서 法治主義者, 原則主義者로 自處하지만, 職權을 利用하여 수많은 不正腐敗 行爲를 敢行하였다. 그는 그 무슨 後援會요 革新委員會요 하는 것을 만들고 긁어 모은 돈으로 밀資金을 造成하고 不正挾雜 選擧를 치렀으며 豪華住宅을 사들이고 浮華放蕩한 生活을 했다. 리회창은 淸廉潔白한 척하지만 그의 行跡을 들추면 더럽고, 너절하며 惡하기 그지 없다.

    大統領 選擧를 6個月 程度 앞두고 이른바 北韓의 作戰이 始作된 것이다. 北韓의 이런 作戰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1972年 7·4 南北共同聲明으로 南北間에 對話가 始作된 때부터 大選과 總選 等 韓國의 主要 選擧마다 北韓은 有權者들의 選擇에 影響을 미칠 수 있는 直間接的인 試圖를 해왔다. 軍事獨裁政權 時節에 일어난 事件들은 論外로 하더라도 1980年代 後半 以後 그런 試圖는 두드러졌다.

    대한항공 858機 爆破事件



    1987年 大選 直前에 發生한 대한항공 858機 爆破事故를 보자. 爆破犯 김현희는 選擧 하루 前날 서울로 押送되었다. 國內 入國 視點을 두고 論難이 있었으나 結局 이 事件은 執權與黨이던 민정당 노태우 候補가 勝利하는데 決定的인 影響을 끼쳤다.

    1992年 大選 때는 ‘이선실 間諜團’이라 불리는 南朝鮮勞動黨 事件이 大選 政局을 强打했다. 이 事件은 신한국당 김영삼 候補의 當選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評價됐다. 15代 總選을 一週日 남짓 앞둔 1999年 4月4日 北韓은 一方的으로 停戰協定 破棄를 宣言하고 5日부터 7日 사이 每日 數百名의 武裝兵力을 板門店 共同警備區域에 投入해 武力示威를 벌였다. 이른바 板門店武力示威 事件이다.

    當時 與黨이던 신한국당은 遊說現場에서 ‘安定論’을 强調했고 選擧 結果 신한국당은 130席, 국민회의는 79席을 얻는 데 그쳤다. 當時 국민회의는 이 事件을 總選 敗北의 主要 原因으로 꼽았다. 過去 일어난 北風이 北韓의 單獨 挑發이었는지, 아니면 韓國 政府와 交感을 이룬 狀態에서 일어난 것인지 그 內幕은 南北韓의 最高 權力者만이 알겠지만, 적어도 1996年까지만 해도 北韓 變數는 確實하게 먹혀들었다.

    그러나 1997年 大選부터는 事情이 달라지기 始作했다. 1997年의 北風은 좀더 複雜하게 展開되었다. 1次 北風으로 越北한 오익제 前 天道敎 敎領의 김대중 候補 支持 便紙가 論難을 불러 일으켰다. 이 事件은 與黨의 이회창 候補에게 유리한 事件이었다.

    그러나 國民회의側은 한나라당 정재문 議員과 北韓 祖平統 안병수 副委員長이 中國 베이징에서 接觸했다며 맞불 作戰을 폈다. 이 사이에 ‘金大中 X파일 事件’ ‘윤홍준 記者會見 事件’等이 複雜하게 얽히면서 1997年의 北風은 泥田鬪狗의 樣相으로 번졌다. 1997年의 ‘北風’은 選擧에 그다지 影響을 미치지 못하였다. 國民들은 選擧 때마다 痼疾的으로 登場하는 北韓 變數를 冷徹하게 바라보기 始作했다.

    하지만 現政府 들어서도 北風은 그치지 않았다. 2000年 4月10日, 16代 總選 投票日을 사흘 앞두고 政治權은 衝擊에 휩싸였다. 靑瓦臺가 南北頂上會談 開催를 合意했다고 電擊 發表한 것이었다. 民主黨은 頂上會談 發表가 햇볕政策에 對한 批判을 잠재우고 失鄕民과 浮動層을 움직일 수 있는 變數가 될 것으로 期待했을 것이다.

    한나라당은 發表時機를 問題삼으며 選擧用이라고 反撥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結果는 正反對였다. 한나라당이 133席, 民主黨은 115席으로 野黨인 한나라당의 勝利였다. 選擧 後 實施된 輿論調査에서는 頂上會談 發表가 首都圈 一部에서만 민주당 得票要因으로 作用한 것으로 나타났다. 嶺南地域에서는 오히려 이 發表가 逆風으로 作用하여 한나라黨 票를 結集하는 要因이 되었다는 分析이 나왔다.

    오는 12月 大選을 앞두고 어김없이 北韓의 ‘作業’이 始作되고 있다. 12月18日 大選 當日까지 어떤 樣相으로 展開될지는 모르지만, 北韓은 只今까지와는 조금 다른 方式을 쓰고 있다. 只今까지는 테러, 武力示威, 間諜事件 等 突出的인 方法을 썼다면, 올해는 北韓의 官營 媒體를 活用해서 特定 候補를 非難하는 方法을 쓰고 있다.

    또 그 非難은 過去같은 一方的인 黑色宣傳이 아니라, 緻密한 取材를 통해서 나름대로 根據를 條目條目 들이대고 있다. 그 根據도 國民 相當數가 共感할 수 있는 韓國의 大衆媒體이거나 公開된 資料 一色이다. 公開된 資料를 대지 못할 境遇는 6하 原則에 따라 緻密하게 事件을 構成하여 누가 보더라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方式을 取하고 있다.

    北韓의 이런 態度는 選擧戰에서 特定 候補가 相對 候補의 弱點을 물고 늘어지는 것과 같은 手法이다. 이는 國內 日刊紙에서 한창 人氣를 끌었던 ‘大選 候補 檢證 시리즈’와 다를 바가 없다. 다른 點이 있다면 擧論 對象이 한나라당의 이회창 候補에 集中되고 있다는 點.

    좋은 例가 있다. 지난 5月14日과 22日 노무현 候補와 이회창 候補는 各各 관훈討論會에서 패널리스트들의 質問을 받고 南北問題에 對한 見解를 밝혔다. 이 자리에서 김대중 政府의 對北政策을 繼承한다고 公言해온 노무현 候補는 金大統領의 3段階 統一論에 對해 “3段階 統一方案의 內容을 외우지 못하고 있다. 暗記하려고 努力했는데 못 외웠다”고 말했다. 盧候補는 또 北韓의 統一方案인 高麗聯邦制에 對해 “깊이 읽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可能하지 않는데 可能한 것을 前提로 그 土臺 위에서 聯邦制를 解釋하고 매달릴 必要가 있는가”라고 했다.

    알려진 대로 1980年 第6次 勞動黨大會에서 採擇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創立方案은 그 實效性 論難에도 不拘하고 北韓 政權이 펼치는 對南·統一政策의 核心槪念이다. 盧候補는 機會가 있을 때마다 김대중 政權의 햇볕政策과 統一政策을 繼承하겠다고 公言해 왔다. 政策의 基本을 모르면서 무엇을 어떻게 繼承하겠다는 것인지 선뜻 理解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회창 候補는 “6·15 宣言의 原則과 精神을 살릴 것이나, 2項은 그대로 갈 수 없으며 分明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면서 “이 條項을 廢棄해야 한다”고 밝혔다. 李候補는 이에 關한 質問이 繼續 이어지자 “大統領 候補로 나온 사람이 2項을 바로 廢棄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 傲慢한 姿勢로 보이기도 할 것”이라며 ‘廢棄’가 아니라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意味라고 發言을 訂正했다.

    6·15 共同宣言 第2項은 ‘南과 北은 나라의 統一을 위한 南側의 聯合制 提案과 北側의 낮은 段階의 聯邦制 提案이 서로 共通點이 있다고 認定하고 이 方向에서 統一을 志向해 나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李候補는 이 條項을 ‘聯邦制 合意’로 誤解한 듯하다. 李候補가 이처럼 重大한 事案에 對해 한 자리에서 두 말을 한 것은 南北關係에 對한 그의 認識能力을 反映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것은 李候補가 “對北 包容 基調를 維持한다는 點에서 現政府의 햇볕政策과 基調가 같다”고 여러 番 말했지만 南北 사이의 具體的인 交流·協力에 對해 曖昧하게 反應한 것과 脈을 같이한다.

    재미있는 것은 北韓의 反應이다. 北韓 勞動新聞은 5月30日 論評을 통해 李 候補의 6·15 共同宣言 2項과 關聯한 發言을 ‘千秋에 容納 못할 反統一的 妄發’이라고 攻擊했다. 勞動新聞은 “이회창이 北과 남의 統一 方案에 共通點이 있을 수 없다고 全面否定하면서 떠들고 있으니 初步에 初步도 모르는 無知의 表現”이라면서 “事物現象의 기초적인 理致도 모르는 分子가 어떻게 法官 노릇을 했는지 都大體 理解할 수 없다”고 主張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盧候補에 對해서는 한마디도 言及하지 않았다. 관훈討論會에서의 李 候補의 發言은 盧 候補의 發言과 맞물려 있었다. 따라서 盧 候補에 對해서도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고 反應을 보일 法도 한데 一切 言及이 없었다.

    平壤當局은 또 이날 勞動新聞 論評을 통해 6·15 宣言에 對한 旣存의 立場을 뒤집기까지 했다. 問題의 2項이 聯邦制에 南北이 合意했다던 從來의 我田引水格 主張을 完全히 바꾼 것이다. 그들은 이 條項이 “서로의 統一方案의 共通點을 認識한데 기초하여 그것을 積極 살려 統一을 志向해 나가기로 했다는 意味”라고 主張했다. 現 政府와 解釋을 같이 한 것이다.

    祖平統의 李會昌 告發狀

    北韓의 ‘李候補 때리기’는 6月13日 完結版이 나왔다. 祖國平和統一委員會 書記局 名義로 나온 ‘이회창의 反民族的, 反統一的 罪行 告發狀’이 그것이다. A4 10張 分量의 이 告發狀은 이회창 候補의 △過去 法官 時節 行跡 △政界 入門 뒤 行跡 △아들 兵役非理, 豪華빌라 物議, 최규선氏 資金 授受說 等 最近 스캔들을 낱낱이 들추고 있다.

    이 告發狀은 가장 먼저 이회창 候補가 1961年 5·16革命裁判所에 陪席判事로 參加하여 民族日報 조용수 社長에게 死刑判決을 내렸다고 言及하고 있다.

    「日帝統治 時期 檢察書記로 수많은 獨立運動者들을 잡아가두고 處刑하는데 앞장섰던 親日逆賊인 애비 리홍규의 피를 이어받은 리회창은 法官 初年期부터 파쑈 統治의 손발이 되어 無辜한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裁判 處刑하였다 … 민족일보 社長 死刑事件은 그 代表的 失禮의 하나이다 …當時 리회창은 … 民主化와 나라의 平和統一을 主張해 나섰던 民族日報 社長 조용수에게 北(北)政權의 平和統一論을 報道, 煽動하여 反國家的 行爲를 했다(남조선잡지 1997年 10月號)는 謀略과 捏造로 一貫된 判決로 그를 1961年 12月21日 絞首刑에 處하게 하였다」

    告發狀은 또 1981年 光州民主化運動과 關聯한 이회창 候補의 判決을 問題삼고 있다.

    「光州虐殺에 憤怒하고 파쑈 政權을 非難한 것 밖에 없는 成員들에게 强制로 罪를 들씌워 處刑한 것도 다름아닌 리회창이었다. 5共政治法協議會(1997年 當時) 共同代表 박재순은 1次 大法院 判決에서 강우영을 비롯한 4名의 大法官들이 분명하고 確實하게 無罪 趣旨의 判決을 내리고 破棄 還送한 한울회 事件에 對해 2次 大法院 判決에서 有罪判決을 내린 里會窓에 對해 이렇게 憤怒를 터뜨리고 있다(남조선 잡지 1997年 8月號)」

    告發狀은 李 候補의 1982年 釜山美文化院 放火事件 裁判과, 以後 大法官 時節의 裁判을 一一이 擧論했다.

    「大法院 判事라고 거들먹거리던 리회창은 … 문부식과 김은숙을 이 放火事件의 主動人物로, 김현장을 背後操縱者로, 南江原道 原州敎區 敎育院 院長 최기식 新婦를 이들을 숨겨주었다는 嫌疑로, 逮捕 拘束한 것을 비롯하여 … 그들에게 惡名 높은 保安法을 適用하여 死刑을 비롯한 極刑을 宣告하는 蠻行을 敢行하였다 … 그 時期 리회창은 ‘民族統一民主主義 勞動者聯盟事件’(1990年 4月), ‘革命的 勞動者 階級鬪爭同盟事件’(1990年 8月), ‘祖國統一促進그룹事件’(1991年 3月), ‘民族解放活動家그룹事件’(1991年 6月), ‘사로맹仁川委員會事件(1991年 6月), ‘社會主義勞動者聯盟事件’(1991年 9月) 等 수많은 事件들을 造作하고 罪 없는 愛國者와 民主人士들을 無慈悲하게 裁判·處刑하는 犯罪行爲를 거리낌없이 敢行하였다」

    여기서 조평통 書記局이 摘示한 事例들은 ‘없는 일’李 아니라 모두가 이회창 候補가 關聯되었던 事件들이다. 다만 一部는 確認된 것이고, 一部는 李 候補가 積極的으로 參與하지 않아 檢證되지 않은 主張이라고 볼 수 있다.

    告發狀은 이番에는 李 候補의 最近 行步를 辛辣하게 非難하고 있다. 지난 1月 美國을 訪問해 非武裝地帶에서 ‘北의 兵力을 後退配置’’시키고 ‘在來式 武器 減縮’과 ‘大量殺傷武器 開發中斷’을 하라는 美國의 主張을 되풀이해서 上典인 美國으로부터 大統領 자리를 擔保받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또 6·15 頂上會談 直前에도, 會談 自體를 反對했다고 主張했다.

    「歷史的인 平壤相逢을 앞둔 2000年 5月3日 리회창은 代表團에 野黨側 人士들을 網羅시키지 말아 달라고 하면서 北南최高位級會談에 政黨代表가 參加하게 되면 北이 主張해온 諸 政黨, 社會團體 聯席會議 等 統一戰線政策의 一環으로 惡用될 可能性도 있다는 荒唐한 詭辯을 늘어 놓으면서 平壤 相逢 自體를 反對해 나섰다(KBS 第1라디오 2000年 6月1日)」

    마지막으로 告發狀은 李 候補의 스캔들을 集中 擧論하고 있다.

    「安企部 總選資金 募金事件(一名 안풍事件)은 南朝鮮에서 1996年 國會議員 選擧 때 安企部가 政府豫算을 轉用하는 方法으로 造成한 祕密資金을 신한국당選擧資金으로 蕩盡한 大型 不正事件이다. 民主黨은 … “황명수氏에게 拘束領章이 請求되고 … 강삼재 議員이 檢察의 調査를 받을 豫定임에도 議長이었던 리總裁만 몰랐다고 하는 것은 副班長과 줄班長이 敎務室에서 罰을 서고 있는데 班長은 나는 몰라 하는 格이다”고 嘲笑하였다(문화방송 2001年 1月6日)」

    告發狀은 최규선 게이트中 DJ 親姻戚 關聯 部分은 모두 빼버리고 이회창 關聯 疑惑만 擧論하고 있다.

    「지난 4月 南朝鮮에서는 리회창이 巨額의 돈을 받았다는 否定賂物事件이 터졌다. 이 事件은 한때 與野를 제 집처럼 드나들며 활개치던 최규선이 지난해 12月 이른바 訪美活動에 써달라고 리회창에게 2億5000萬원에 達하는 現金을 찔러 준 事件이다. 이에 對해 關聯者들은 최규선氏가 里會創意 訪美日程에 도움을 주었으며 尹汝雋 議員을 통해 2億5000萬원을 주었다고 陳述함으로써 이 賂物事件이 事實임을 正確히 립증했다(기독교방송 2002年 5月7日)」

    豪華 빌라事件도 어김없이 包含되어 있다.

    「리회창은 年間 집貰가 1億원 以上 되는 105坪짜리 最高級 豪華住宅 2채를 지난 4年 동안 空짜로 利用해 왔다. 이것이 暴露되자 리회창은 親戚이 빌려 준 집이라고 區區한 辨明을 늘어놓았지만, 事實은 그의 녀편네가 15億원의 엄청난 돈을 주고 直接 購入한 것이 公開되었다(문화방송 2002年 4月16日)」

    北韓 祖平統의 告發狀을 살펴보면 北韓 勞動黨이 韓國 大選에 候補를 내세워 直接 參與하고 있는 게 아닌가 錯覺할 程度다. 特定 政黨과 候補를 때리는 勞動新聞 報道와 祖平統 告發狀은 與野가 每日 代辯人 論評을 통해 주고받는 政爭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北韓의 大選 介入 戰略은 過去와는 사뭇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嶺南票 蠶食 위해 박근혜 選擇?

    또 눈여겨볼 대목은 박근혜 代表와 關聯한 北韓의 立場이다. 지난 5月 朴代表의 訪北과 關聯해서 여러 가지 推測이 많았다. 特히 한나라당은 “朴代表가 潛在的 大選 候補임을 생각할 때 大選 政局에 어떻게든 介入하려는 新北風 陰謀가 아닌지 疑心스럽다. DJ와 그 繼承者인 민주당 노무현 候補의 路線을 北쪽이 側面支援하려는 意圖인 것 같다”고 論評했다. 反面 민주당은 朴代表의 訪北을 크게 歡迎했다.

    그러나 朴代表의 訪北은 김정일 國防委員長 스스로가 願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金委員長은 지난 2000年 南北頂上會談 때 DJ에게 박근혜 議員이 왜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고, 얼마 뒤 言論社 社長團 訪北 때에도 朴代表를 만나보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재규 統一部 長官이 訪北했을 때도 그런 이야기를 했고, 지난 4月 임동원 特報가 갔을 때도 똑같은 말을 했다고 傳해진다.

    그렇게 만나길 願하던 朴代表가 平壤을 訪問하자 北韓은 最高의 貴賓 待接을 했다. 北京까지 特別機를 보냈고, 6·15 頂上會談 當時 김대중 大統領이 使用했던 百花園招待所를 提供했다. 또 北韓 民族和解協議會가 마련한 歡迎 晩餐에서 對南 部門 實勢들이 大擧 參席해 눈길을 끌었다. 이 날 晩餐에는 김용순 勞動黨 中央위 祕書, 김영대 民族和解協議會 會長, 림동옥 勞動黨 中央위 統一戰線部 第1副部長, 김완수 勞動黨 中央위 副部長, 안경호 祖國平和統一委員會(조평통) 書記局長 等이 參席했다.

    김용순 祕書는 現 政府 出帆 以後 줄곧 임동원 特報의 파트너로 活躍한 人物이며, 림동옥 第1副部長은 1978年부터 對南 業務를 始作해 이 分野에서 잔뼈가 굵은 ‘얼굴 없는 實勢’다. 主로 南北間 經濟交流 業務를 擔當하고 있는 김완수 副部長은 2000年 10月 濟州에서 열린 第3次 南北長官級會談에 戰略遂行 要員으로 參席하는 等 無視할 수 없는 對南專門家 그룹에 屬한다.

    黨 統一戰線部 核心外郭 團體로 政治, 經濟, 社會, 文化 等 分野別 對南業務 機構를 總括하면서 對南 接觸을 試圖하고 있는 祖平統의 안경호 書記局長은 지난 1982年 祖平統 課長부터 始作해 1994年 6月 南北 最高位級 會談을 위한 副總理級 豫備接觸視 北側 代表團長을 맡아온 對南 核心人物이었다. 北側이 朴議員을 ‘女史’로 呼稱하고 ‘重量級’ 人士들을 내보내 禮遇한 點은 그의 訪北을 通한 對內外的 效果에 相當한 期待를 걸고 있음을 의미한다.

    專門家들은 北側이 이처럼 朴議員을 配慮한 것은 南側과의 包括的인 對話를 强調하려는 戰術的인 意圖가 깔려 있다고 본다. 行事를 主管한 김영대 會長은 晩餐 演說에서 “이 자리는 누구든 民族을 위하고 나라의 將來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政見 差異를 넘어 서로의 마음을 합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다시 말해 保守的인 朴議員의 訪北을 통해 그동안 北側에 敵對的이었던 南側 어떤 人士나 團體들도 民族의 將來를 위해 對話 意思를 밝힐 境遇 언제든지 訪北을 許容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傳達하려는 意圖라는 것이다.

    지난 여러 해 동안 北韓의 對外關係 行態를 보면 한가지 패턴을 알 수 있다. 卽 한·美·日 3國과의 關係를 摸索하는 過程에서 北韓은 두 나라 理想과의 關係를 同時에 追求하기보다는, 特定時期에는 한 나라와의 關係 改善에 集中한다는 것이다. 北韓은 1989年 獨逸이 統一되고 蘇聯이 무너진 뒤, 美國과의 關係 改善을 決心하고 이를 위해 于先 南韓과 對話를 摸索했다.

    그 結果 南北은 1991年 基本合意書와 非核化宣言을 採擇했다. 그러나 南北關係가 間諜團 事件 等으로 進展을 보지 못하자, 北韓은 1992年 焦點을 日本에 돌려 가네마루 神을 招請하는 等 日本과의 關係改善을 追求했다.

    이 즈음 國際原子力機構(IAEA)가 北韓 核疑惑을 提起하자, 1993年 3月 北韓은 核擴散禁止條約(NPT)脫退를 宣言하고, 美國과 直接 對話에 들어간다. 1994年 10月 北韓 核問題와 關聯한 제네바合意가 이루어진 뒤, 5年間 北韓은 韓國과 日本을 제쳐놓고 美國과 關係 正常化를 하기 위해 努力했으나 水泡로 돌아갔다.

    2000年 6月 南北頂上會談을 契機로 北韓은 暫時 美國이나 日本보다 韓國과의 關係에 集中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韓國과는 食糧支援과 經濟協力을 위한 最小限의 關係만을 維持하면서 美國과 關係를 改善하는데 外交 努力을 集中했다.

    그래서 北韓이 朴代表에게 最高 貴賓 待遇를 한 것이 朴代表側 解釋처럼 南北關係에 肯定的인 效果를 가져다준다고 보기 어렵다. 北韓은 6·15 頂上會談 席上에서 김정일이 直接 擧論한 約束을 아직까지 지키지 않고 있다. 지난 4月 임동원 特報가 訪北했을 때 받아낸 約束도 감감 無消息이다. 當國間 對話도 이런저런 理由를 들며 應하지 않고 있다.

    專門家들은 北韓當局이 朴代表에게 友好的인 態度를 보이는 데는 속셈이 있다고 指摘한다. 朴代表를 韓國 保守勢力의 代表로 만들어 이회창 候補를 孤立하려는 意圖라는 分析이다. 朴代表가 大統領 候補로 나설 境遇, 嶺南票를 蠶食할 수 있다는 點에서 北으로서는 試圖해볼 만한 作戰이라는 것. 또 朴 代表를 통해서도 現 政府의 對北 政策이 持續될 基盤을 마련할 수도 있다.

    그러나 北韓도 고민스럽다. 南北長官級會談度 열리고, 離散家族 相逢도 이루어지고, 頂上會談도 成事되었다. 北韓이 줄 수 있는 어지간한 衝擊에도 韓國 國民은 이제 動搖하지 않는다. 韓國 國民의 政治意識이 成熟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다가는 逆效果를 내기 十常이다. 이는 2000年 南北頂上會談 發表 때 證明되었다.

    問題는 아직도 우리 政治權이 北韓에게 휘둘린다는 點이다. 北韓이 特定 政黨, 政治勢力과 連帶하여 反對勢力을 非難하고, 또 特定 政黨이 몇몇 言論社와 뜻을 같이해서 北韓을 非難하는 對決構圖는 바람직스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專門家들은 政治權이 南北問題만큼은 與野를 超越해 對處해야 한다고 注文한다. 與黨은 與黨대로 北韓과 聯合해서 이를 選擧 局面에 利用하려는 發想을 바꾸어야 하고, 野黨은 野黨대로 北韓을 非難하면서 反對給付로 票를 얻으려는 試圖를 삼가야 한다는 指摘이다.

    只今 方式대로 나가면 與든 野든 김정일 政權에 발목을 잡힐 수밖에 없다. 이番 大選에서 어느 政權이 執權하든 平和統一을 위해 김정일 政權과 協商을 해야 한다. 與黨일 境遇 自身의 손을 들어준 데 對한 代價를 支拂해야 할 것이고, 野黨일 境遇 協商을 새로 始作하려면 엄청난 費用과 功을 들여야 한다. 그런 惡循環을 다시 되풀이할 必要는 없다는 게 專門家들의 한결같은 指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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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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