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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宇中과의 對話’ 펴낸 신장섭 싱가포르臺 敎授|新東亞

‘金宇中과의 對話’ 펴낸 신장섭 싱가포르臺 敎授

“大宇는 先進國 ‘사다리 걷어차기’에 當했다”
“GE 잭 웰치 같은 者는 經營人도 아니다”(김우중)

  • 송홍근 記者 │carrot@donga.com

    入力 2014-09-19 17: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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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待遇車 스토리는 韓國 經濟의 悲劇
    • 外換危機 때 모라토리엄 宣言했어야
    • 當時 官僚들, 좀 삐딱하게 보면 ‘賣國奴 노릇’
    • 金, 北韓·中國·프랑스·베트남 旅券으로 世界 누벼
    • 金, 新義州特區 長官 맡아달라 提案 받아
    ‘김우중과의 대화’ 펴낸 신장섭 싱가포르대 교수
    신장섭 싱가포르國立大 敎授가 8月 26日 펴낸 ‘金宇中과의 對話 : 아직도 世上은 넓고 할일은 많다’는 對話體로 構成한 역사서이자 經營書다. 新興國에서 誕生한 最大 多國籍企業 大宇의 興亡을 그 總帥이던 金宇中 前 會長의 입을 빌려 敍述했다.

    1999年 대우그룹 解體는 當時 世界 歷史上 最大 規模 企業의 破産으로 記錄됐다. 開發途上國에서 태어나 世界로 나아간 이 多國籍企業은 1997年 東아시아를 打擊韓 金融危機 渦中에 沒落했다.

    “Catch-Up 實行家와 解釋家”

    9月 2日 서울 中區 韓國金融硏究院에서 만난 申 敎授는 ‘정사(正史)’와 ‘野史(野史)’라는 낱말을 使用하면서 大宇의 沒落과 1997年 外換危機 以後 韓國 經濟를 說明했다. “野史와 情事가 뒤바뀌었다”는 게 그의 主張이다.

    “外換危機 以前까지는 내 見解가 情事였는데 只今은 야사다. 成長動力을 되찾으려면 情事와 野史가 元來 位置로 되돌아가야 한다.”



    ‘金宇中과의 對話’는 發刊되자마자 言論의 注目을 받았다. 金 前 會長이 15年 沈默을 깨고 목소리를 내서다. 言論은 “無理한 擴張 經營으로 負債가 늘어나 市場에 依해 무너졌다”와 “다른 處方을 提示하면서 官僚에게 맞서다 本보기로 解體됐다”는 主張의 對立에 注目했다. 申 敎授는 “冊의 焦點이 照明받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했다. 韓國 經濟의 方向과 關聯한 重要한 論爭을 담았는데 그에 對한 論議가 거의 없는 게 아쉽다는 뜻이다.

    지난 일을 回顧할 때 잘한 일은 許容되는 範圍에서 돋보이게 말하고, 잘못한 일은 말하지 않거나 合理化하는 게 사람 心理다. 金 前 會長도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 對話와 資料를 取捨選擇해 冊으로 엮은 사람 또한 情報를 處理해 結果物을 만드는 過程에서 自身의 所信이나 믿음을 投影하게 마련이다.

    經濟學者로서 著者의 性向을 把握하면 ‘金宇中과의 對話’의 行間을 더욱 수월하게 읽을 수 있다. 申 敎授는 主流 經濟學(新古典學派)에서 비켜선 學者다. ‘보이지 않는 손’(自由市場)보다 産業政策, 産業金融 같은 國家와 民間의 協力을 强調한다.

    申 敎授는 韓國 經濟가 先進國을 ‘캐치업(Catch-Up·따라잡기)’하는 過程을 20世紀 後半의 日本, 19世紀 後半의 유럽과 比較한 硏究로 學者로서의 이름을 알렸다. 韓國의 半導體·鐵鋼産業을 틀로 삼아 制度와 技術이 캐치업에 어떻게 影響을 미쳤는지 考察하기도 했다.

    그는 ‘金宇中과의 對話’를 ‘캐치업의 實行家(Practitioner of catch-up)’와 ‘캐치업의 解析家(Interpreter of catch-up)’의 만남으로 規定했다. 그에게 金 前 會長은 漢江의 奇跡을 이룬 創業 1世代의 한 名이면서 “世界를 經營한 民族主義者”지만, 많은 사람에게 經濟的 被害를 안긴 中犯罪人이기도 하다. 2006年 法院은 粉飾會計 等의 嫌疑로 金 前 會長에게 懲役 8年6個月과 追徵金 17兆9253億 원을 宣告했다. 그룹 解體 後 大宇 系列社에 公的資金으로 投入한 國民 稅金이 30兆 원에 達한다. ‘金宇中과의 對話’에 담긴 視角이 論爭的日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非主流 經濟學者’의 金宇中論

    ▼ 世界 經濟學界에서 非主流다.

    “非主流? 맞다. 非主流라 하지 말고 革新的 經濟學者라고 해달라. 非主流가 革新的일 수 있다.”

    申 敎授는 學者로서의 性向이 장하준 英國 케임브리지對 敎授와 비슷하다. 2002年 張 敎授와 함께 ‘Restructuring Korea Inc.’(2002, ‘株式會社 韓國의 構造調整’)라는 題目의 冊을 出刊한 적도 있다.

    “‘Restructuring Korea Inc.’에서 가장 잘못된 構造調整 事例로 꼽은 것이 大宇車였다. 韓國 經濟가 IMF(國際通貨基金) 歷史에서 가장 成功的으로 構造調整을 完遂했다는 主張이 只今껏 正史의 位置에 있다. 나는 1998年부터 一貫되게 IMF 프로그램을 批判해왔다. 韓國의 低成長과 兩極化는 모두 當時 잘못된 構造調整의 産物이다. 우리는 ‘Restructu

    ring Korea Inc.’를 쓰면서 低成長 時代가 오리라 豫測했다. 經濟學者로서 豫測이 들어맞은 데 自負心을 느끼지만, 韓國 經濟가 나빠진 것이 안타깝다. 더 늦기 前에 經濟 發展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申 敎授(80學番)는 張 敎授(82學番)의 서울대 經濟學科 2年 先輩다. 申 敎授가 2學年을 마치고 入隊해 두 사람은 3, 4學年을 함께 다녔다. 申 敎授는 大學을 卒業하고 ‘每日經濟’에 入社해 14年 동안 記者, 論說委員으로 일했다.

    “1998~99年 IMF 構造調整 프로그램을 海外에서 가장 積極的으로 批判한 사람이 張 敎授라면 國內에서 가장 積極的으로 批判한 사람이 ‘每日經濟’ 論說委員이던 나다. 經濟學界에서 나와 생각이 가장 비슷한 經濟學者가 장하준이다. 1999年 留學을 떠나면서 學校를 決定할 때 張 敎授에게 助言을 請했다. 張 敎授는 博士學位를 받기 前인데도 能力을 認定받아 敎授로 拔擢됐다. 張 敎授가 케임브리지對 敎授로서 처음 가르친 學生이 나다. 先輩에서 後輩도 아니고 弟子로 두 段階 降等된 셈이다. ‘韓國 經濟의 問題點은 크지 않았다. IMF 構造調整이 잘못됐다’는 데 意見을 같이했다. 英國과 싱가포르에서 함께 冊을 쓸 수 있었던 까닭이다.”

    張 敎授가 쓴 冊과 關聯한 英美圈 書評에서 ‘provocative(挑發的인)’ ‘contrarian(異端的인)’ 같은 單語를 찾아볼 수 있다. 主流 經濟學을 批判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23 things that they don’t tell you about Capitalism)’는 ‘(主流 經濟學 탓에) 世界經濟는 滿身瘡痍가 되었다’는 文章으로 始作한다.

    1999年 待遇車, 2009年 GM

    申 敎授는 1998年부터 韓國의 官僚들이 IMF 프로그램에 따라 構造調整을 잘못하면서 韓國 經濟가 망가졌다고 여긴다. ‘金宇中과의 對話’는 대우그룹과 GM을 比較하는 것으로 始作한다. 冊의 첫 대목을 要約해 紹介하면 다음과 같다.

    ‘新興國 出身 世界 最大 多國籍企業으로 떠오른 대우그룹은 1997年부터 벌어진 아시아 金融危機 소용돌이 속에서 沒落했다. 當時 韓國 政府는 大宇가 新興市場에서 積極的으로 벌인 自動車 投資를 不實로 斷定하고 流動性을 支援해 살리기보다 대우그룹을 解體하는 길을 擇했다. 反面 世界 最大 自動車會社인 GM은 2008年부터 始作된 世界 金融危機 渦中에 倒産 危機를 맞았지만 2009年 美國 政府가 引受하고 流動性을 無制限 供給해줬다. GM은 이 過程에서 ‘政府自動車會社(Government Motors)’라는 汚名을 얻었지만 不過 4年 만에 回生했다. 政府도 投入資金의 80%假量을 回收했다.”

    申 敎授는 9月 2日 인터뷰에서 이렇게 敷衍했다.

    “美國은 2008年 金融危機 때 韓國과 正反對로 했다. 韓國은 金利를 30%로 올렸는데, 美國은 0% 가까이로 낮췄다. 量的緩和에도 나섰다. 大麻(大馬)는 不辭(不死)했다. 政府 돈이 들어간 GM, 씨티銀行, AIG 等의 經營陣도 바뀌지 않았다. 노벨經濟學賞을 받은 조지프 스티글리츠 美國 컬럼비아대 敎授는 이를 ‘더블 스탠더드(Double Standard)’라고 批判한다. 나는 그것을 싱글 스탠더드(Single Standard)라고 規定한다. 잣대가 ‘先進國의 利益’ 單 하나이기 때문이다. 新興國이 金融危機를 겪으면 構造調整을 强要해 歇값에 資産을 買入하고, 自身들이 金融危機를 겪으면 政府가 支援해 企業을 살린다.”

    外換危機 때 韓國에 要求한 프로그램대로라면 GM도 대우차처럼 整理됐어야 한다는 것.

    “이헌재(김대중 政府 때 金融監督院 院長, 財政經濟部 長官), 강봉균(김대중 政府 때 大統領經濟首席祕書官, 財政經濟部 長官) 때려잡자고 冊을 낸 게 아니다. 大宇가 他殺이냐, 自殺이냐는 論爭만 報道됐는데, 解體 15年 後 過去 일을 하소연하는 것에 누가 關心을 갖겠나. 經濟 官僚들이 待遇를 죽일 意圖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것은 韓國 經濟와 關聯해 極히 一部分의 얘기다. 金融危機를 어떻게 克服할 것인지와 關聯해 官僚들과 金 前 會長의 哲學이 完全히 달랐고, 解法을 놓고 對決했으며, 結果的으로 누구 말이 옳았는지가 重要하다.”

    ▼ 金 前 會長을 어떻게 만났나.

    “2010年 여름 金 前 會長 側近에게서 電話가 왔다. 金 前 會長이 내가 쓴 冊, 칼럼을 흥미롭게 읽는다면서 한番 만나보고 싶어 한다고 했다. 캐치업을 硏究하는 學者로서 마다할 理由가 없었다. 그는 唯一하게 生存한 創業 1世代 아닌가. 이틀에 걸쳐 15時間 동안 對話했는데, 살면서 한 사람과 그렇게 集中的으로 얘기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두 사람이 經濟 發展 過程과 國際金融市場을 들여다보는 視角이 비슷했다. ‘先進國 하는 짓을 봐라, 속아서 當한 것’이라고 一貫되게 批判해왔는데, 金 前 會長의 생각도 類似했다. 그後 서울, 하노이 等에서 20次例 넘게 만나 150時間 넘게 對話했다. 對話 內容을 冊으로 내기로 合意한 뒤 方向과 關聯한 意見 다툼이 생겨 접기로 한 적도 있다.”

    ▼ 大宇는 世界經營을 모토로 過度한 擴張 投資를 벌이다 不實이 쌓여 沒落했다는 게, 申 敎授 表現대로라면 情事(正史)다.

    “外換危機 以後의 韓國만큼 負債를 줄이고, 多角化를 없애고, 公正去來法을 强化한 나라가 없다. 先進國을 캐치업하려면 부채가 생길 수밖에 없다. 資本이 蓄積된 先進國과 狀況이 다르다. 빠르게 成長해 先進國을 따라잡으려면 빚을 내야 한다. 負債 比率이 決코 높은 水準이 아니었다. 프랑스, 이탈리아 企業의 負債 比率이 1980年代 後半 360%假量이었다. 外換危機 當時 韓國이 그와 비슷했다. 이헌재 氏는 200% 以下로 負債 比率을 낮출 것을 要求했는데, 나는 그 政策을 ‘IMF 플러스’라고 부른다. 當時 日本 企業의 負債比率이 200% 水準이었는데, 1年 半 만에 日本 水準으로 負債 比率을 낮추라는 건 그 사이에 日本만큼 先進國이 되라는 것과 똑같은 얘기다.

    1998年 上半期 30大 그룹 中 16個가 倒産했다. 黑字不渡가 많았다. 힘없는 企業은 바로 쓰러졌다. 大宇는 그나마 信用이 있어 短資會社에서 資金을 調達해 버텨갔다. 韓國은 外債를 調達해 政府가 産業金融을 통해 民族企業을 育成하는 方式으로 經濟를 발전시켰다. 그게 우리의 競爭力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캐치업을 할 수 없었다. 負債比率을 200%로 낮추라니까 資産을 歇값에 내다팔지 않았나. 2008年 GM의 事例에서 보듯 先進國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政府가 企業에 돈을 더 支援했다.”

    後發國의 不均衡 成長

    ‘김우중과의 대화’ 펴낸 신장섭 싱가포르대 교수

    8月 26日 서울 永登浦區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待遇特別포럼에 參席한 金宇中 前 大宇그룹 會長이 人事말 途中 눈물을 흘렸다. 그는 “大宇의 功過를 評價해달라”고 말했다.

    ▼ 蓄積된 資本을 大企業에 몰아준 不均衡 成長戰略과 그로 인한 放漫한 擴張 經營이 限界에 다다랐던 건 아닌가.

    “世界 어디에도 ‘均衡 成長’을 한 나라가 없다. 後發國은 不均衡 成長을 해야만 캐치업이 可能하다. 또한 企業이 여러 分野에 同時 投資해야 競爭에서 이길 수 있다.”

    ▼ 그래도 1990年代 中盤은 不均衡 成長 모델을 버려야 할 時期가 아니었을까.

    “財閥이 不均衡 成長으로 컸는데, 그 過程에서 中小企業이 다 죽었나? 日本과 比較하면 中小企業 成長 速度가 더딜 수밖에 없었다. 日本이 成長할 때는 周邊에 部品을 調達할 곳이 없으니 直接 다 해야 했다. 韓國은 事情이 달랐다. 先發走者인 日本이 存在하는 狀況이라 組立 生産부터 始作할 수밖에 없었다. 日本 部品을 들여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情事와 野史가 바뀌었다는 主張은 具體的으로 무슨 뜻인가.

    “政府와 民間이 協力해 輸出 主導 工業化로 經濟 發展에 成功했다는 것이 外換危機 以前의 情事였다. 內需 市場에서 뭘 해보려고 했다면 中南美처럼 됐으리라는 說明이 따라붙었다. 그런데 外換危機 以後에는 政府와 民間의 協力을 政經癒着, 腐敗로 看做했으며 그 탓에 負債 管理를 제대로 안 해 不實이 쌓였고 뼈를 깎는 構造調整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政事가 됐다. 官僚들이 새 情事에 따라 IMF 프로그램보다 한발 더 나간 IMF 플러스 經濟 政策을 짰다.

    이 理論은 그에 앞선 韓國 經濟의 奇跡을 說明하지 못한다. 構造的 問題가 있었다면 어떻게 經濟 奇跡을 이뤘겠나. 뒤도 說明하지 못한다. 1998年 以後의 對處가 옳았다면 그다음에 經濟가 좋아져야 하는데 오히려 低成長에 빠졌다. 構造調整論이 가장 힘이 셌을 때 構造調整을 等閑視한다는 理由로 亡한 代表的인 韓國 企業이 待遇다. 結局 대우차는 GM에 거의 空짜로 넘어갔다. 그로 인해 韓國은 IMF에서 빌린 돈과 비슷한 規模인 210億 달러 以上의 損失을 봤다. 대우차 投資의 열매는 GM이 다 가져갔다.”

    그는 GM이 中國에서 成功한 過程을 다룬 마이클 던의 冊 ‘美國 바퀴, 中國 道路’의 한 대목을 紹介했다.

    ‘상하이GM의 成功에는 GM大宇가 큰 도움이 됐다. 韓國에서 開發한 뷰익 엑셀은 中國 市場에서 상하이GM 賣出의 70%를 차지했다. 中國에서 4年 以上 勤務한 GM의 한 任員은 ‘GM大宇 引受가 없었다면 상하이GM이 이렇게 成功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確認해줬다.’

    申 敎授의 主張을 더 들어보자.

    “대우차가 空짜나 다름없이 GM에 넘어간 스토리는 韓國 經濟의 悲劇이다. 대우차는 新興市場을 보고 선(先)투자를 했다. 大宇는 1978年 GM과 合作해 自動車 事業을 始作했는데, GM은 韓國을 內需 下請 基地로만 봤다. 大宇 쪽에서 돈을 더 投資해 輸出用인 르망을 製作했는데 GM이 美國에서 잘 안 팔아줬다. 金 前 會長은 대우조선에서 티코를 만들어 成功한 것에 自信感을 얻었고, 1992年 GM과 訣別했다. 金 前 會長은 티코를 製作하면서 50萬 臺를 生産하면 單價가 半으로 줄어든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4~5個 車種 都合 200萬 臺 生産 規模를 갖춰야 規模의 經濟를 이룰 수 있었기에 先投資에 나섰다. 라노스, 누비라, 레간자 세 가지모델을 갖추고 막 팔기 始作할 때 外換危機가 닥쳤다.

    外換危機 때도 대우차 任員들은 돈벼락 맞을 일만 남았다고 여겼다. 換率이 달러當 800원臺에서 1600원臺로 치솟으면서 快哉를 불렀다. 1998年 南美, 東유럽에선 대우차가 占有率 1位를 記錄한 國家도 있다. 品質이 떨어진다는 批判에도 價格 對比 競爭力을 갖췄던 것이다. 現代車, 기아차가 外換危機 以後 成長한 것을 보라. 結局 대우차의 投資로 떼돈을 번 건 GM이었다. 資産을 빨리 팔아 外國 資本을 誘致하는 게 愛國하는 것이라는 얘기는 只今 되돌아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韓國GM은 現在 內需 市場만을 겨냥한 下請 基地로 轉落하지 않았나.”

    ▼ 金 前 會長이 김대중(DJ) 前 大統領을 怨望하나.

    “끝까지 DJ는 아니란다. 늘 DJ를 辯護한다. DJ는 金 前 會長과 官僚들의 180度 다른 意見을 모두 傾聽했던 것 같다.”

    申 敎授는 1998年 5月 金 前 會長이 司法硏修院生을 相對로 講演한 資料를 引用하면서 說明을 이어갔다. 當時 講演 內容을 要約하면 이렇다.

    “늘 DJ를 辯護했다”

    ‘只今 IMF 體制가 形式上으로는 國際 金融機關이 우리나라를 돕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面에서 얘기하면 돕는 것이 아니라 管理體制로 바꿔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體制가 오래가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없다. (…) 只今은 大企業만 없으면 IMF 體制도 안 왔을 것이라는 認識이 있다. 내가 보기에는 競爭하기 골치 아프니까 (韓國) 大企業을 없애자는 게 先進國 企業의 생각인 것 같다. 只今 IMF와 先進國이 繼續해서 얘기하는 것은 우리나라 大企業을 줄이라는 것이다. 先進國이 바라는 쪽으로 만들어진 理論이라고 본다.’

    장하준 敎授式 表現으로 하면 先進國들이 ‘사다리 걷어차기’에 나섰다고 金 前 會長이 認識한 것이다.

    “金 前 會長은 構造調整을 先進國이 願하는 것을 더 받아내기 위한 手段으로 봤다. 이 講演은 大宇의 流動性 危機 以前에 한 것으로 金 前 會長이 自信感이 넘칠 때다. ‘韓國에 生産施設이 1兆 달러 蓄積돼 있다. 아시아만 經濟危機日 뿐 世界經濟는 괜찮다. 換率이 이 程度면 每年 500億 달러 黑字가 可能하다’는 게 그의 主張이었다. ‘每年 500億 달러 貿易黑字 達成을 통한 2年 內 IMF 體制 早期脫出론’이 그것이다. 그는 또 ‘일을 안 한다, IMF가 하라는 대로만 한다, 能力 없으면 물러나야 한다’면서 官僚들을 批判했다. 1998年 韓國의 貿易黑字가 416億 달러였는데 그中 대우가 낸 貿易黑字가 3分의 1人 143億 달러다. 年初 政府의 貿易收支 黑字 豫想値는 28億 달러였다. 結果的으로 누구의 얘기가 맞았는가.”

    ▼ 金 前 會長의 解法이 옳았다고 假定하더라도 官僚들 또한 나라가 잘되라고 政策을 樹立했을 것이다.

    “金 前 會長이 開拓한 곳은 新興市場이다. 러시아, 中南美, 아프리카 等 金融危機가 頻發한 곳이다. IMF 프로그램을 導入하면 어떻게 되는지 皮膚로 體驗했다. DJ는 兩쪽 얘기를 다 들어보려고 했다. 金宇中 1人이 事實上 經濟官僚 全體와 對立했다. DJ는 金 前 會長을 便들祈禱 했다.

    當時 官僚들이 韓國 經濟를 망치려고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自己들 主張이 國家를 위해 옳은 것이라고 믿고 싸운 것으로 본다. 아주 善意로 解釋하면 構造調整이 외길이라고 믿었고, 그와 다른 方向으로 가는 待遇를 몰아세워 市場에 警告를 주려 한 것 같다. 輸出金融에 숨筒을 틔워주지 않고, 大宇를 相對로 端子 調達 規制, 會社債 規制를 次例로 施行했다. 大宇 쪽에서는 ‘미운털이 박혔으니 本보기를 보여주려고 企劃 解體한 것’이라고 여긴다. 官僚들이 DJ에게 大宇의 負債가 늘어난 것과 關聯해 虛僞報告를 하기도 했다. 알면서 그랬다면 企劃 解體이고 몰랐다면 無能한 것이다.

    信念에 따라 愛國한 것이겠지만, 삐딱하게 보면 賣國奴 노릇을 한 것이다. 韓國의 資産이 歇값에 外國으로 넘어갔고 低成長이 이어졌다. 大宇의 다른 系列社들은 워크아웃海 살렸는데, 대우차는 GM이 가져가서 큰 成功을 거둔다. 金 前 會長은 大企業이 投資를 繼續했으면 오래 前에 1人當 所得 3萬~4萬 달러가 됐을 것이라고 主張한다. 外換危機 以後 글로벌 스탠더드를 따라야 한다는 게 定說로 擡頭됐고, 實際로 그렇게 하면서 더는 캐치업을 못하고 先進國과 똑같이 低成長하게 된 것이다. 低成長, 兩極化가 繼續되는 것은 當時의 잘못된 處方 때문이다. 製造業 基盤이 그때 많이 弱化됐다. 金融 亦是 産業金融이 아닌 家計金融에 置重하게 됐다.”

    金大中, 北韓, 政治經濟學

    ▼ 官僚들이 待遇를 企劃 解體했다는 것은 常識的으로 說得力이 弱하지 않나. 當時엔 政府가 待遇를 도울 餘力도 없었던 것 같고.

    “대우차와 대우차에 投資한 ㈜大宇 外의 다른 會社는 問題가 없었다. 대우차의 輸出金融이 막힌 것이 核心인데, 1998年 上半期에 輸出金融을 안 해준 것은 못 해줬다고 볼 수도 있으나 下半期는 論難의 餘地가 있다. 어쩔 수 없이 못 도와줬느냐, 企劃 解體냐의 結論은 留保的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 거짓말하는 것이다. 앞으로 밝혀내야 한다. 어떻게 政府 官僚들이 그럴 수 있었겠느냐는 質問에는 ‘世上에 많은 일이 常識과 어긋나게 벌어진다’는 點을 말하고 싶다.”

    ▼ 當時 事情을 잘 아는 DJ가 世上을 떴으니 金 前 會長이 뒤늦게 任意대로 主張하는 건 아닌가.

    “DJ가 살아 있어도 팩트는 똑같다. 1998年 11月 빌 클린턴 美國 大統領이 韓國을 訪問해 ‘5大 그룹 改革이 不振하다’고 DJ에게 直接 言及한다. 美國, 北韓과 關聯한 DJ의 政治經濟學度 考慮할 必要가 있다고 본다. 햇볕政策이 잘되려면 美國의 支援이 必要했다.”

    ▼ 더 나아가 노벨賞 受賞 같은 바람과….

    “노벨賞까지는 아니더라도 南北問題와 關聯한 어떤 蓋然性이 있었다고 본다. 金融危機를 어느 程度 解決한 狀況에서 DJ가 治績으로 삼고자 한 것은 南北關係였다. 官僚들의 얘기를 듣고 ‘김우중이 나를 속였나?’ 하고 여겼을 수도 있다.”

    金 前 회장은 “어떻게 破廉恥한 雜犯이랑 나를 같이 取扱하느냐”고 申 敎授에게 恨歎했다고 한다. “DJ가 있을 때 韓國에 돌아와 제대로 얘기하고 對策을 마련해야 했다”고도 했다고 한다.

    ▼ 天文學的 規模의 粉飾會計가 있었다. 대우차 會社債에 投資한 個人이 입은 損失도 엄청났다.

    “大宇의 海外 네트워크에서도 損害 본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나. 金 前 會長은 根本的인 잘못이 自身이 아니라 政府 政策과 國際 環境에 있었다고 여기는 터라 未安해하면서도 답답해한다. 23兆 원의 追徵金은 懲罰的인 것이라고 法院이 宣告하면서 밝혔다. 個人的으로 利得을 取한 것이 아닌데 懲罰的으로 追徵한다고.”

    ▼ 外換危機 때 韓國은 어떻게 했어야 한다고 보나.

    “모라토리엄(債務支拂猶豫)을 宣言하고 負債를 調整하는 게 나았다. 金融危機의 責任이 韓國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國際金融市場이 負擔을 나눠 져야 했다.”

    ▼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모델’은 어떻게 評價하나.

    “資本統制를 통해 돈이 갑자기 빠져나가는 것을 막은 말레이시아의 選擇이 옳았다. 스티글리츠 敎授의 말을 빌리면 構造調整은 앉아 있는 사람 椅子를 갑자기 뺀 後 手術 받으라고 要求하는 것이다.”

    마하티르 前 말레이시아 總理는 올해 6月 韓國을 訪問해 “돌이켜보면 外換危機 當時 우리가 選擇한 政策이 옳았다. 2008年 世界 金融危機가 터지니 當時 우리가 썼던 政策을 美國이 따라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고 回顧했다.

    ▼ 外換危機 以後 株主資本主義가 注目받았다.

    “金 前 會長이 GE의 잭 웰치를 두고 그런 사람을 어떻게 經營人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詰難하더라. 사람 잘라서 一時的으로 收益 올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고려대 장하성 敎授가 株主資本主義를 强調하는데, 四寸인 장하준 敎授와 그 部分을 놓고 論爭한 적도 있다더라. 外換危機 때 ‘整理解雇 하면 안 된다’고 主張한 唯一한 財閥 總帥가 金宇中이다. 韓國이 캐치업에 成功한 것은 金宇中 같은 企業人이 國家의 利益을 念頭에 두고 企業을 運營했기 때문이다.”

    “追徵金 避하려 冊 냈느냐고?”

    ▼ 金 前 會長의 꿈이 大統領이었다고….

    “그 얘기는 안 하는 게 좋겠다. 꿈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具體的인 액션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내가 言及할 事案이 아니다.”

    ▼ 金 前 會長은 冊 出刊 以後 言論報道를 챙겨 보나.

    “新聞을 熱心히 읽는다. 只今도 10個國 以上의 換率을 每日 確認한다. 反應을 注意 깊게 보는 便이다. 言論이 ‘企劃 解體냐’ ‘그렇지 않으냐’에만 注目하면서 나와 金 前 會長이 冊에 담은 建設的 메시지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

    ▼ 追徵金을 謀免해보려고 冊을 낸 게 아니냐는 視角도 있더라.

    (金 前 會長은 夫人과 子女 名義로 國內外에 相當한 財産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納付한 追徵金은 法院이 賦課한 額數의 0.5% 水準이다.)

    “謀免할 수도 없는 金額이다. 事實은 지난해 여름 冊이 完成됐다. ‘全斗煥法’李 이슈日 때다. 金 前 會長이 전두환과 엮이기 싫다면서 發刊을 미루자고 했다. 나는 그냥 내자고 했다. 只今 冊을 내야 오히려 誤解를 덜 받는다고 말했다. 나야 거리낄 게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지만 金 前 會長은 家族의 財産이 걸렸다. 家族 財産은 大宇가 亡하기 前 贈與한 것으로 判決이 났다.”

    ▼ 2008年 美國發 金融危機 以後 主流 經濟學에 批判的인 人士들의 主張이 過去보다 힘을 얻었다.

    “우리의 主張이 立證됐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사람이 아직은 아니라고 말한다. 世(勢)가 커지는 狀況이라고 하겠다. 逆轉이 되면 좋겠다.”

    ▼ 사람의 記憶은 本人에게 유리한 쪽으로 歪曲되기도 한다.

    “어떤 冊이든 主觀的이다. 對話體를 選擇한 理由는 15年 동안 金 前 會長의 反對 쪽 사람들 얘기는 數없이 反復됐는데, 大宇 쪽 見解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 韓國 經濟가 어떻게 바뀌면 只今보다 나아지리라고 보나.

    “經濟成長의 基本은 投資다. 企業의 投資를 북돋우는 構造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金融이 밀어줘야 하는데 産業金融이 弱化했다. 産業金融을 키워야 한다. 過去처럼 政府가 銀行에 壓力을 行使해 企業에 貸出하라고 하지는 못한다. 산업은행 같은 곳의 役割을 强化해야 한다. 그런데 앞선 政府에선 産業銀行마저 民營化하려 했다. 産業金融을 늘리는 銀行에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

    김우중의 北韓 飛火

    金日成 說得해 頂上會談 合意 北은 ‘朝鮮 旅券’ 만들어줘


    ‘김우중과의 대화’ 펴낸 신장섭 싱가포르대 교수

    1992年 1月 北韓을 訪問한 金宇中 當時 大宇그룹 會長(앞줄 왼쪽에서 네 番째)李 金日成(金 會長 오른쪽 옆)을 面談한 後 記念撮影을 했다.

    -金 前 會長에게 들은 北韓 關聯 祕話가 있다면.

    “北韓 關聯 內容은 仔細히 說明하기 어렵다. 2002年 김정일이 新義州 特區 開發에 나섰을 때 金 前 會長에게 兩鬢(네덜란드 國籍 華僑)에 앞서 新義州 特區 長官職을 提案했다.”

    -再起의 발板이 됐을 法도 한데 왜 長官職을 拒絶했나.

    “南浦工團을 運營해보니 北韓 안에서 事業해서는 別 展望이 없다고 確信했다고 한다. 電氣, 石油가 제대로 供給되지 않는 데다 사람들이 마음대로 醫師 表現도 못해 企業 運營에 勝算이 없다고 判斷했다는 것이다. 金 前 會長은 中國 東北3省에 韓國 企業이 進出해 北韓 勤勞者를 데려와 生産하는 形態가 解法이라고 여겼다. 中國의 땅, 北韓의 人力, 韓國의 資本과 技術이 投入된 工業團地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自己 살길만 찾았다면 新義州 特區 長官職을 再起의 발板으로 利用하려 했을 거다.”

    -처음에 北韓과 어떻게 連結됐나.

    “전두환 政府 末期 프랑스 大統領 補佐官이 北韓에 함께 가자고 提案하면서다. 政權이 바뀌고 노태우 大統領에게 自身이 맡아보겠다고 直接 提案해 特使 資格으로 訪北하기 始作했다. 大統領 特使 官印이 찍힌 任命狀을 받고 그것을 北韓에 提示하고 活動했다. 中國에서 北韓 旅券, 中國 旅券을 利用해 北韓에 들어갔다. 이 분이 재주가 普通이 아니다. 與圈이 數도 없이 많다. 韓國, 프랑스, 베트남, 中國, 北韓….”

    -1992年 ㈜大宇의 南浦 合營 事業이 南北 分斷史에서 첫 經濟協力이다. 金 前 會長은 北韓에서 主로 어떤 일을 했나.

    “金永三 政府 任期 末까지 北韓에 出入했다. 金日成을 20餘 次例 만났다. 1992年 南北基本合意書 締結과 盧泰愚-김일성 頂上會談이 成事 直前까지 가는 데도 關與했다. 盧 大統領은 頂上會談에 同意해놓고 만나는 것은 망설였다고 한다. 김영삼 大統領 때는 特使는 아니었지만 김영삼-김일성 頂上會談 合意에도 寄與했다고 한다(1994년 7月 김일성 死亡으로 頂上會談은 成事되지 않았다). 지미 카터 前 美國 大統領이 頂上會談을 仲裁하기에 앞서 自身이 김일성을 說得했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南北關係를 어떻게든 잘 풀어보려고 했는데 金正日은 생각이 달랐다고 한다.”

    -또 어떤 일을 했나.

    “韓國의 國家安全企劃部(現 國家情報院)와 北韓의 國家安全保衛部 兩쪽을 다 도와줬다고도 했다.”

    -1992年 金 前 會長과 함께 訪北한 한 在美同胞는 김정일이 金 前 會長을 떨떠름하게 여겼다고 하더라. 김일성 앞에서 金 前 會長이 英國의 리보가 어떻고 金利가 어떻고 張皇하게 說明하면서 잘난 척을 했다면서.

    “김일성이 南韓 情勢와 關聯해선 自身보다도 훨씬 잘 알고 있는데, 國際 情勢를 잘 몰라 이런저런 說明을 仔細하게 해줬다는 게 金 前 會長의 說明이다. 몰라서 가르쳐주는 것이었을 텐데, 自己 자랑 한다고 여겼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쨌거나 김일성은 金 前 會長을 信賴했다고 한다.”

    -앞서의 人事는 김정일이 金 前 會長의 食卓 매너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도 말했다. 남들이 커피 몇 모금 마실 時間에 후다닥 飮食을 비워버리는 것을 싫어했다더라.

    “大宇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설렁湯 집에 여럿이 가 第一 먼저 나온 설렁湯을 金 前 會長 앞에 두면 딴 사람 설렁湯이 나오기 前에 다 먹고 일어났다고 하더라.”

    -金日成을 통해 北韓 開發 關聯 事業을 獨占하려다 김정일의 反對로 霧散됐다고도 들었다.

    “獨占? 들어간 곳이 待遇밖에 없는데…. 確認해본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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