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民主主義 犧牲해 産業化 성공시킨 獨裁者 朴正熙, 常識과 原則 追求한 進步的 民主主義者 盧武鉉|新東亞

民主主義 犧牲해 産業化 성공시킨 獨裁者 朴正熙, 常識과 原則 追求한 進步的 民主主義者 盧武鉉

  • 김호기│ 延世大 敎授·社會學 kimhoki@yonsei.ac.kr

    入力 2011-11-23 15:10:00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朴正熙와 노무현을 代表하는 時代精神은 産業化와 民主化다. 쿠데타로 權力을 掌握한 朴正熙는 3選改憲과 維新 宣布로 民主主義를 짓밟았다. 하지만 그의 成功的인 經濟政策은 韓國이 先進 産業國家로 발돋움하는 데 주춧돌이 됐다. 進步主義者 노무현은 常識과 原則이 통하는 社會를 建設하기 위해 參與民主主義와 均衡發展을 追求했다. 悲劇的 最後를 맞은 노무현 時代는 끝난 게 아니라 아직 오지 않았다.
    민주주의 희생해 산업화 성공시킨 독재자 박정희, 상식과 원칙 추구한 진보적 민주주의자 노무현
    이企劃을 進行하면서 가졌던 가장 큰 苦悶 中 하나는 知識人의 範圍를 어디까지 둘지였다. 오늘날 知識人이라면 흔히 敎授, 作家, 그리고 言論人 等을 指稱한다. 하지만 朝鮮社會에서 知識人은 大槪 儒學者인 同時에 政治家였다. 現代社會에서 政治家는 知識人이 될 수 있을까. 世界的으로 보면 知識人이 政治를 兼業한 境遇가 없지는 않다. 例를 들어, 체코의 바츨라프 하벨(Vaclav Havel) 大統領이나 브라질의 페르난도 카르도소(Fernando Cardoso) 大統領이 그러하다. 하벨은 作家이기도 했고, 카르도소는 社會學者이기도 했다.

    知識人과 政治家는 事實 重疊되는 領域이 적지 않다. 知識人의 課題 中 하나가 知識 探究를 통해 새로운 비전을 摸索하는 데 있다면, 政治가 亦是 自己 社會 未來에 對한 새로운 비전을 提示해야 한다. 이 點에서 知識과 政治 또는 知識과 權力은 매우 緊密히 關聯돼 있다. 知識은 政治 또는 權力을 위해 奉仕하기도 하지만, 바로 그 權力과 政治를 革新하는 問題틀을 提供하기도 한다. 그 問題틀이 이 企劃에서 다루는 時代精神이기도 하다.

    이제 企劃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우리 現代史에 큰 그늘을 드리운, 如前히 影響力이 至大한 두 名의 政治家를 다뤄보고자 한다. 朴正熙 前 大統領과 노무현 前 大統領이 바로 그들이다. 朴正熙와 노무현은 勿論 知識人이 아니다. 한 사람은 政治家가 되기 前에 軍人이었으며, 다른 한 사람은 辯護士였다. 하지만 이들은 知識人的 性向이 두드러진, 各各 保守的·進步的 知識人들에게 相當한 影響을 미친 政治家들이었다.

    産業化와 民主化의 象徵

    問題的인 이 두 사람을 다루는 理由는 다름 아닌 時代精神에 있다. 光復 以後 우리 社會를 이끌어온 代表的인 두 個의 時代精神은 産業化와 民主化였다. 日帝 植民地로부터 解放된 우리 社會에 附與된 가장 重要한 時代的 課題는 ‘나라 만들기’였다. 이 나라 만들기의 具體的인 目標가 經濟的 産業化와 政治·社會的 民主化였다. 産業主義와 民主主義로 바꾸어 써도 좋은 이 時代精神을 代表한 政治家로는 朴正熙, 盧武鉉, 그리고 김대중 前 大統領을 指目할 수 있다. 朴正熙 時代에 우리 社會 産業化가 本軌道에 올랐으며, 김대중 時代와 노무현 時代에 民主化가 本格化됐다.



    朴正熙가 産業化의 象徵이라면, 김대중과 노무현은 民主化의 象徵이다. 여러 點을 考慮할 때 朴正熙의 政治的 맞手는 김대중일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김대중이 아니라 노무현을 다루고자 한다. 여기서 노무현을 살펴보려는 것은 더없이 劇的인 盧武鉉의 삶이 486世代를 包含해 우리 社會의 젊은 世代에게 如前히 至大한 影響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輿論調査를 보더라도 朴正熙와 노무현은 가장 尊敬받는 大統領으로 손꼽히고 있다. 1960年代 以後 우리 社會에서는 産業化 勢力 代 民主化 勢力, 朴正熙의 時代精神 對 노무현의 時代精神이 맞서왔으며, 知識社會 亦是 이러한 構圖에 對應해왔다. 序論은 이쯤하고, 곧바로 두 사람의 삶과 時代精神, 그리고 政治에 對해 이야기해보겠다.

    朴正熙 時代와 모더니티

    그동안 나는 朴正熙와 그의 時代에 對해 두 番 글로 쓴 적이 있다. 하나는 近代性의 觀點에서 朴正熙 時代를 評價한 것이며(‘한국의 現代性과 社會變動’, 1999), 다른 하나는 朴正熙의 時代精神을 다룬 것이다(‘격동! ‘朴正熙 時代’에 다시 서다’, 월간중앙, 2008). 여기서 朴正熙에 對한 論議는 이 두 글을 參照했다.

    周知하듯이 朴正熙는 産業化 時代를 열고 그것을 强力하게 推進한 政治家였다. 1961年 5·16쿠데타부터 그가 突然 逝去한 1979年까지 朴正熙 時代는 우리 現代史에서 가장 變化가 컸던, 經濟的 모더니티가 激烈하게 進行된 時間이었다. 19年은 決코 짧은 時間이 아니다. 이 期間에 우리 社會는 經濟·社會·文化 等 모든 領域에서 農業社會로부터 工業社會로 바뀌어갔다. 모더니티가 ‘멋진 新世界’라면 우리 歷史에서는 朴正熙 時代에 와서야 사슬 풀린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新世界의 冒險이 始作된 셈이다.

    知識社會 亦是 朴正熙 時代로부터 큰 影響을 받았다. 이른바 ‘御用’과 ‘在野’의 二分法이 登場한 것도 朴正熙 時代였다. 朴正熙 體制에 同意하거나 反對하는 것은 當時 知識社會는 勿論 現在의 知識社會를 가늠하는 重要한 二分法 中 하나다. 우리 知識社會를 主導하는 50代 知識人들 亦是 朴正熙 時代로부터 直接的 影響을 받았다. 例를 들어, 代表的인 進步的 社會學者인 조희연 敎授는 維新體制에 反對하는 示威에 參與해 獄苦를 치른 바 있으며, 1980年代 以後 進步的 知識人運動과 市民運動을 이끌어왔다.

    最近 조희연은 ‘朴正熙와 開發獨裁時代’라는 冊을 통해 朴正熙 時代를 分析하기도 했다. 이 冊은 批判的 觀點에서 朴正熙 時代를 檢討하지만, 새마을運動을 包含해 朴正熙 體制의 肯定的 側面도 積極的으로 注目한다. 조희연의 이러한 兩面的 評價는 朴正熙 時代에 젊은 時節을 보낸 進步的 知識人이 갖는 複合的 內面意識의 一端을 보여주는데, 이는 朴正熙 時代가 그만큼 問題的인 時代였음을 뜻한다.

    朴正熙 個人의 歷史는 드라마틱하다. 1917年 慶北 先山에서 태어난 그는 大邱師範學校를 卒業하고 暫時 先生의 길을 걸었다. 以後 만주군관학교와 日本 陸軍士官學校를 卒業하고 日本 軍人이 되었다. 光復 後 그는 陸軍士官學校의 前身인 朝鮮警備士官學校를 卒業하고 다시 軍人이 돼 김종필, 이후락 等과 함께 1961年 5·16쿠데타를 敢行해 우리 歷史의 前面에 登場했다.

    그동안 5·16을 어떻게 명명해야 할 것인지에 對해 論難이 있었다. 當時 쿠데타 主役들은 5·16을 ‘軍事革命’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支配階級 內의 一部 勢力이 武力 等 非合法的 手段으로 政權을 奪取하는 奇襲的 政治活動’李 쿠데타라면, 5·16은 明白히 쿠데타다. 問題는 쿠데타가 낳은 結果다. 쿠데타에 成功한 朴正熙는 1963年 結局 大統領에 當選됐고, 産業化를 向한 强力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朴正熙 時代는 우리 産業化의 歷史에서 一大 轉換期였다. 具體的으로 1960年에 64%였던 弄·漁民이 1980年에는 31%로 減少했다. 또 重化學工業化가 進行된 1970年代에는 2次 産業이 1次 産業을 凌駕하고 重工業이 輕工業의 比重을 追越하는 先進國型 産業構造를 갖췄다.

    生活水準과 生活樣式 亦是 크게 變했다. 1961年 87달러에 不過했던 1人當 國民總生産(GNP)李 1979年에는 1597달러로 增加해 絶對貧困에서 벗어났다. 더불어 急速한 經濟成長은 아파트·텔레비전 等으로 대표되는 都市的 生活樣式을 普及했고, 팝뮤직·할리우드로 대표되는 美國文化의 流行을 가져오기도 했다.

    ‘國家와 革命과 나’

    個人的 經驗을 돌아봐도 朴正熙 時代는 나의 幼年과 靑少年 時節을 차지한다. 1960年代에 電氣조차 들어오지 않은 시골에서 자랐지만, 都市로 移住해 온 1970年代부터 本格的인 모더니티의 洗禮를 받았다. 京釜高速道路를 타고, 포항제철을 구경하며, 地下鐵 1號線을 타보기도 했다. 同時에 어린 나이였지만 緊急措置와 南北 對立, 民主化運動 等을 目擊하면서 當時 暗鬱한 政治 現實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기도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朴正熙 時代의 이러한 體驗은 나의 社會的, 個人的 正體性의 原形을 이루는 것이기도 했다.

    朴正熙의 咀嚼 ‘國家와 革命과 나’는 그의 時代精神을 集約하고 있다. 이 冊은 1963年 當時 朴正熙 國家再建最高會議 議長의 草稿를 박상길이 整理한 것이다. 박상길에 따르면, 이 冊은 朴正熙의 著作 가운데 哲學에서부터 政治·經濟·社會, 그리고 人生觀에 이르기까지 그의 思想을 가장 正確하게 담고 있다고 한다. 共和黨 大統領候補로 나서기 直前에 씌어진 만큼 이 冊은 朴正熙의 政治哲學과 時代精神을 鮮明하게 보여준다.

    먼저 5·16쿠데타에 對해 朴正熙는 다음과 같이 規定한다. “이 革命은 精神的으로 主體意識의 確立革命이며, 社會的으로 近代化革命이요, 經濟的으로는 産業革命人 同時에, 民族의 中興 創業革命이며, 國家의 再建革命이자 人間改造, 卽 國民改革革命”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革命 理念의 延長線上에 1960年代의 祖國 近代化 戰略이 놓여 있다. 朴正熙는 가난이 自身의 스승이자 恩人이라고 말한다. 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그는 自立經濟를 위한 産業化를 强調한다. 自立經濟 建設은 “革命을 통한 民族國家의 一大 改革과 中興 創業의 成敗 與否를 판가름하는 問題의 全部이며, 그 關鍵”임을 主張한다. 自立經濟에 對한 그의 熱望은 앞서 指摘했듯 19年이라는 짧은 時間에 高度 經濟成長을 이루는 驚異로운 結果를 가져왔다.

    注目할 것은 이 冊에서 朴正熙가 自身의 主要 理念의 하나로 民族主義를 標榜하고 있다는 點이다. 그는 쑨원(孫文)의 中國, 메이지維新의 日本, 케말 파샤의 터키, 가말 압델 나세르의 이집트 等 民族主義가 두드러진 外國 事例들을 比較하고 있다. ‘頹廢한 民族 同意와 國民 精氣를 바로잡기 위하여 淸新한 氣風을 振作한다’는 쿠데타의 公約은 5·16 軍事政府의 民族主義的 志向의 一端을 보여준다.

    現在의 時點에서 朴正熙 時代의 産業化政策을 어떻게 볼 것인지는 如前히 論難거리다. 이와 關聯된 核心 爭點은 經濟的 産業化에 權威主義 政治가 不可避한지의 問題다. 이는 權威主義가 經濟成長에 效率的이라고 해서 民主主義를 留保하고 開發獨裁를 選擇해야 하는지, 經濟成長과 社會安定이 人權과 政治的 自由보다 重要한 것인지의 問題이기도 하다.

    1960年代 當代의 視線에서 보면 朴正熙式 發展 모델은 相當한 支持를 얻고 있었다. 6·25戰爭에 對한 생생한 記憶은 社會安定에 對한 希望을, 보릿고개의 暗鬱한 現實은 經濟成長에 對한 熱望을 낳았으며, 이러한 希望과 熱望은 위로부터의 國家的 動員을 통한 産業化에 有利한 土壤을 提供했다. 個人的 體驗을 돌아봐도 1970年에야 흑백텔레비전을 볼 수 있었던 나는 1979年 大學에 入學할 때는 이미 다양한 文明의 利器를 두루 누리고 있었다.

    問題는 經濟成長에 成功했다고 해서 朴正熙式 모델이 正當化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點이다. 重要한 것은 朴正熙式 모델이 經濟成長과 民主主義를 結合하는 데 果然 얼마나 努力을 기울였는지에 있다. 1969年의 3選 改憲에서 1972年의 10月 維新에 이르는 節次的 民主主義에 對한 否定, 特히 維新體制의 暗鬱한 獨裁는 이 時代가 얼마나 非民主的이었는지를 立證한다.

    朴正熙 時代의 再評價

    朴正熙式 모델은 經濟的 産業化를 위해 政治·社會的 民主化를 희생시켰으며, 이를 正當化하고자 했다. 이 모델은 中央情報部로 대표되는 物理的 暴力에 基盤을 둔 政治的 支配를 劃策했으며, 그 結果로 나타난 沈默의 社會는 朴正熙 時代의 또 다른 自畫像이었다. 要컨대 朴正熙 時代는 그 明暗이 뚜렷한 時代였다. 우리 社會를 農業社會에서 工業社會로 變化시키는 高度成長을 가져온 産業化의 時代였지만, 同時에 政經癒着이 慣行이 되고 人權彈壓이 加해진 權威主義의 時代이기도 했다. 더불어 朴正熙 時代에 뿌리내린 成長至上主義와 軍事文化는 아직까지 우리 社會 深層意識의 一端을 이루고 있다.

    민주주의 희생해 산업화 성공시킨 독재자 박정희, 상식과 원칙 추구한 진보적 민주주의자 노무현

    1978年 湖南線 複線 開通式에 參席한 朴正熙 大統領.

    朴正熙 時代를 어떻게 볼 것인지는 그동안 學術 討論을 비롯해 政治 祕史(秘史), 個人 回顧, 小說化 또는 映畫化 等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照明돼왔다. 朴正熙 個人에 對한 評價 亦是 ‘民族의 英雄’에서 ‘獨裁의 元祖(元祖)’에 이르기까지 多角度로 이뤄져 왔다. 이러한 風景은 個人的 存在로서의 朴正熙는 1979年에 死亡했으나 歷史的 存在로서의 朴正熙는 如前히 우리 社會에 살아 있으며 또 매우 强烈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點을 보여준다.

    發展社會學的 觀點에서 朴正熙 體制는 ‘發展國家(developmental state)’ 또는 ‘開發獨裁’ 體制다. 開發獨裁는 經濟的 開發과 政治的 獨裁가 結合돼 있다는 意味다. 朴正熙는 쿠데타로 權力을 掌握했고, 3選 改憲으로 節次的 民主主義를 毁損했으며, 나아가 1人支配의 維新體制를 만든 獨裁者였다. 하지만 同時에 그는 本格的인 産業化를 摸索했고, 重化學工業化를 推進했으며, 醫療保險을 包含한 福祉國家의 기틀을 마련한 指導者이기도 했다.

    이러한 두 얼굴을 가진 朴正熙였기에 어떤 이들은 如前히 그에 熱狂하는 反面 다른 이들은 그의 時代를 頑强히 否定한다. 내가 注目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듯 朴正熙 體制에 明暗이 뚜렷함에도 朴正熙와 그의 時代에 對한 鄕愁가 끊이지 않는 理由에 對한 質問이다. 왜 우리 社會는 朴正熙 時代를 如前히 그리워하는 걸까?

    이러한 狀況은 最近 우리 社會의 흐름과 無關하지 않다. 社會 兩極化가 强化되고 적지 않은 國民이 社會의 周邊으로 내몰리는 게 우리 社會의 現住所라면, 이러한 삶의 不安定性은 過去에 對한 鄕愁를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바로 그곳에 强力한 리더십으로 象徵化한 朴正熙가 存在한다. 朴正熙式 모델이 옳아서라기보다는 現在의 困窮(困窮)李 過去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盧武鉉과의 만남

    더불어 注目할 것은 朴正熙 時代에 對한 政治的 讀法(讀法)이다. 朴正熙 時代는 32年 前에 마감했다. 하지만 이 時代를 어떻게 볼 것인지의 問題는 最近 政治勢力들의 正當性에 直接的 影響을 미쳐왔다. 朴正熙 時代의 評價에 對해 過度한 二分法이 强調되는 것도, 朴正熙 時代의 過去事에 對한 糾明이 論難이 되는 것도 바로 이런 脈絡이다.

    過剩 政治化한 歷史 解釋은 現在를 過去에 지나치게 묶어두게 한다. 한걸음 물러서서 볼 때, 歷史의 解釋에서 반드시 合意가 必要한 것은 아니다. 歷史를 보는 눈은 復讐(複數)일 수 있다. 이 때문에 열린 討論을 통해 歷史의 敎訓을 이끌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點에서 朴正熙의 리더십을 一方的으로 擁護하거나 朴正熙 時代의 存在 自體를 拒否하는 것은 適切한 歷史 解釋이 아닐 것이다. 30餘 年에 達하는 歲月이 그 傷處를 다스리기에는 짧은 時間일지 모르겠지만, 朴正熙 時代에 對한 더욱 客觀的 評價가 이뤄져야 한다

    朴正熙 時代를 생각하면 언제나 떠오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버지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같은 나이의 아버지 삶을 떠올릴 때가 없지 않다. 只今 내 나이의 아버지는 1970年代 中盤을 사셨다. 當時 일찍 退勤하시는 날이면 아버지와 더러 郊外로 散策을 나가곤 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朴正熙에 對한 이야기를 적잖이 들었는데, 勿論 肯定的인 內容이었다. 日帝强占期에 태어나 光復때부터 初等學校 敎師로 일해오신 아버지는 가난으로부터 벗어나 近代化를 成就하려는 朴正熙의 時代精神에 크게 共感하셨다.

    아버지와 朴正熙에 關한 이야기를 더 以上 나누지 않은 것은 大學에 들어와서부터였다. 張俊河의 ‘돌베개’를 읽고, 황석영의 ‘삼포로 가는 길’을 읽고,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은 나로서는 아버지와 朴正熙에 對해 이야기를 나누는 게 內心 不便할 수밖에 없었다. 時間이 흘러 아버지의 나이가 된 只今 그때 아버지의 審査를 理解하고, 그 險難한 時節을 살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自身을 發見하곤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의 생각에 모두 同意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設令 所望的 事故라 하더라도 朴正熙 時代에 經濟成長과 民主主義는 함께 갔어야 했다. 世界 歷史를 둘러봐도 스칸디나비아 國家들을 包含해 經濟成長과 民主主義가 同時에 追求된 後發 産業化의 事例들이 存在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빵은 더없이 所重하지만, 그렇다고 빵만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産業化 過程 안에는 바로 이런 脈絡에서 民主化의 價値가 胚胎되고, 社會運動이 噴出하기 始作했다. 노무현은 바로 이러한 民主化의 時代精神을 代表하는 政治家였다.

    노무현을 처음 만난 것은 2002年 大選 過程이었다. 當時 노무현 候補 캠프의 한 軸을 이룬 金秉準, 金容益, 성경륭 敎授와 比較的 가까웠던 터라 2003年 盧武鉉 大統領 就任演說 基礎委員으로 參與했고, 政權이 出帆한 後에는 大統領諮問政策企劃委員回 委員으로 일하기도 했다. 몇 番의 만남을 통해 내가 받은 印象에 따르면, 노무현은 더없이 人間的인 사람이었으며, 무엇보다 民主化 勢力으로서의 政治的 自己正體性이 분명하고 民主化의 時代精神을 正確하게 認識하고 있었다.

    민주주의 희생해 산업화 성공시킨 독재자 박정희, 상식과 원칙 추구한 진보적 민주주의자 노무현

    2009年 7月10日 慶南 金海 烽下마을에서 열린 故 盧武鉉 前 大統領 安葬式.

    노무현은 1946年 慶南 金海에서 태어났다. 부산상고를 卒業한 다음, 1975年 司法試驗에 合格해 大田地法 判事를 지냈다. 1978年에 辯護士를 開業한 그는 1980年代에 人權辯護士로 民主化運動에 積極 參與했다. 1987年 6月 抗爭 以後 열린 民主化의 空間 속에서 第13代 國會議員이 됐으며, 第15代 國會議員과 김대중 政府의 海洋水産部 長官을 지냈다.

    盧武鉉의 삶에서 劇的인 轉換은 2002年에 이루어졌다. 그는 새千年民主黨 大統領候補가 됐으며, 한나라당 이회창 候補를 劇的으로 꺾고 第16代 大統領에 當選됐다. 2003年 2月에 出帆한 노무현 政府는 民主化의 巨大한 實驗室을 이뤘다. 2004年 彈劾과 열린우리당의 出帆, 4大 改革立法 推進과 大聯政 提案, 韓美 自由貿易協定(FTA) 締結과 地方選擧·大選의 잇단 敗北, 그리고 2008年 退任과 2009年 悲劇的 逝去로 이어진 그의 삶과 時代는 朴正熙와 마찬가지로 드라마틱했다고 말하는 것 以外에 달리 表現하기 어렵다.

    人權辯護士라는 自身의 삶이 雄辯하듯 盧武鉉의 時代精神은 民主化였다. 이러한 盧武鉉의 時代精神은 노무현 政府가 내건 國政 目標인 ‘國民과 함께하는 民主主義, 더불어 사는 均衡發展社會, 平和와 繁榮의 東北亞時代’에 集約돼 있다. 이 國政 目標는 民主化라는 時代精神을 參與民主主義와 均衡發展으로 具體化하고자 했으며, 또한 우리 社會가 놓여 있는 東北아시아의 地政學(geo-politics) 및 地境學(geo-economics)의 條件을 積極的으로 考慮하고 있었다.

    地方分權과 地域主義 克服

    現在의 時點에서 貸借對照表를 만들어보면, 노무현 時代에는 이 세 가지 國政 領域에서 成功과 挫折이 共存했다. 먼저 參與民主主義 領域에서 노무현 政府는 權力機關의 民主化와 市民社會와의 거버넌스 構築을 摸索했다. 우리 現代史를 돌아볼 때, 權力機關의 民主化를 果敢히 試圖한 盧武鉉과 노무현 政府의 勇氣는 비록 細細한 問題가 없지 않았다 하더라도 높이 評價할 만하다.

    거버넌스의 境遇도 이와 類似하다. 執權 初期 貨物連帶 罷業에서 始作해 새만금防潮堤 建設 論難, 천성산 터널工事 論難 等 相當한 葛藤費用을 支拂했지만, 同時에 國民參與首席室 및 市民社會首席室 設置, 國民大統合連席會議 推進 等에서 볼 수 있듯이 國家와 市民社會 間의 새로운 거버넌스를 構築하는 데 노무현 政府는 작지 않은 努力을 기울였다.

    注目할 것은 노무현 政府가 世界化와 情報社會의 進展에 따른 市民社會의 構造變化에 積極的으로 對應하고자 했다는 點이다. 1987年 民主化 時代가 열린 以後 우리 社會에서는 젊은 世代를 中心으로 個人主義와 自由主義가 成長해왔으며, 이러한 變化는 市民들의 積極的인 政治 參與의 欲求를 增大시켰다. 비록 서투른 部分이 없지 않았지만, 노무현 政府가 이러한 時代的 變化를 읽어내고 이를 國政 運營에 反映하고자 했던 것은 새롭게 評價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노무현 政府는 行政首都 移轉, 公共機關 移轉 等 劃期的인 均衡發展을 推進하고자 했다. 이 均衡發展은 盧武鉉 大統領이 一貫되게 主張해온 地域主義 克服과 密接히 聯關돼 있었는데, 地域主義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經濟·社會的으로 中央 代 地方, 地方 代 地方의 不均衡 發展이 解消돼야 했다.

    均衡發展 政策이 推進되는 一連의 過程이 勿論 順坦한 것은 아니었다. 均衡發展이 首都圈의 退行的 發展을 낳고, 結局 國家競爭力을 弱化시킨다는 反對 論理가 提起됐으며, 이는 政治的 論難을 넘어서 法的 論難으로 飛火되기도 했다. 國土 均衡發展이 ‘政權的 課題’가 아니라 ‘國家的 課題’라는 點에서 行政首都 移轉 論難 等의 이슈들이 過剩 政治化되고 制動이 걸린 것은 決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如何튼 行政首都 移轉을 둘러싼 이러한 過程은 國民的 共感帶 確保를 包含한 輿論 形成이 얼마나 重要한 것인지를 象徵的으로 보여줬다.

    進步主義者 盧武鉉의 FTA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이 東北亞 政策이다. 東北亞 時代 構想의 目標는 美國 中心의 外交政策에서 東北亞 中心의 外交政策으로 轉換을 摸索하려는 데 있었으며, ‘東北亞 均衡者론’은 이러한 問題意識을 端的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如前히 冷戰과 脫冷戰이 交叉하는 東北亞의 現實에서 東北亞 時代의 構想은 相當히 新鮮한 問題意識으로 評價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戰略은 北韓의 核實驗, 中國의 東北工程(東北工程) 等 적지 않은 試鍊에 直面했으며, 特히 2006年 北韓의 核實驗은 對北 包容政策의 限界를 드러나게 했다.

    東北亞 時代論과 聯關해 檢討해볼 것이 韓美 自由貿易協定(FTA)의 推進이었다. 노무현 政府의 視角에서 韓美 自由貿易協定은 韓國 經濟의 對外依存度를 考慮한 一種의 先進通商國家 戰略의 하나로 理解할 수 있다. 肯定的인 視角에서 볼 때, 韓美 自由貿易協定의 目標는 ‘第1次 開放’인 開港(1876)과 ‘第2次 開放’인 朴正熙 政府의 近代化(1960~70年代)를 이은 ‘第3次 開放’을 積極的으로 成就하고자 했던 데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韓美 自由貿易協定은 社會的 合意를 形成하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 論難은 最近까지 繼續되고 있다. 한걸음 물러서서 볼 때, 自由貿易協定의 結果가 農漁民과 自營業者 等을 包含한 社會的 弱者에게 不利할 수밖에 없다는 點에서 充分한 時間을 갖고 國民的 共感帶를 이뤄야 했음에도 노무현 政府는 社會的 合意를 이끌어내는 데 그렇게 成功的이지는 못했다.

    要컨대 노무현 時代는 우리 社會에서 民主化 時代와 世界化 時代가 劇的으로 交叉하는 幕間에 놓여 있었으며, 그렇기에 民主化와 世界化가 衝突하는 緊張과 矛盾들에 내내 대면해 있었다. 世界史的으로 保守의 時代가 絶頂에 다다른 한가운데에서 進步的 價値를 追求해야 했던 것이 노무현 政府의 時代的 條件 또는 宿命이었다. 이러한 構造的 條件을 克服하기 위해 노무현과 노무현 政府는 나름대로 最善을 다하려고 했지만, 執權 當代에는 그렇게 높은 評價를 받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進步의 未來: 다음 世代를 위한 民主主義 敎科書’는 노무현이 大統領을 退任한 다음에 執筆한 冊이다. 이 冊은 未完의 著作이다. 노무현은 2008年 10月 參謀陣과 가까운 學者들에게 進步主義 硏究모임을 提案하고 非公開 硏究 카페를 열었는데, 여기에 自身의 생각과 構想을 올리고 이를 直接 討論하기도 했다. ‘進步의 未來’는 바로 이 內容을 담고 있다. 第1部가 노무현이 直接 作成한 原稿라면, 제2부는 그가 남긴 育成 記錄으로 이뤄져 있다.

    “進步主義에 關한 冊을 만들어보자는 것입니다. …未來의 歷史는 進步主義가 提示하는 方向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韓國에서는 進步와 保守의 問題가 社會的 論爭의 中心 자리를 차지해야 地域主義를 넘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冊의 目次를 보면 노무현의 깊은 苦悶을 엿볼 수 있다. 原稿로 남긴 第1部의 境遇, ‘國家의 役割을 苦悶하자’ ‘保守의 時代, 進步의 時代’ ‘保守의 主張, 進步의 主張’ ‘進步란 무엇인가, 報酬란 무엇인가’ ‘世界는 進步의 時代로 가는가’ ‘韓國은 只今 몇 時인가’가 主要 內容을 이루고 있다. 이어지는 第2部는 생생한 育成을 통해 第1部의 內容을 다양한 角度에서 흥미롭고 說得力 있게 펼쳐 보이고 있다.

    이 冊을 읽으면서 나는 盧武鉉의 時代精神과 政治哲學을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그 核心은 國家의 役割이다. 大統領이 되기 前에 盧武鉉이 苦悶했던 것은 常識과 原則이 통하는 社會였다. 그에 따르면, 激烈한 産業化를 지나오면서 非常識과 反則이 우리 社會를 支配하는 原理가 됐으며, 그 結果 사람이 사람으로 尊重받지 못하고 反則으로서의 特權이 橫行하는 社會가 됐다. 大統領이 된 盧武鉉의 꿈은 常識과 原則이 바로 서는 社會였다.

    5年의 國政運營 經驗은 常識과 原則이 尊重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國家의 役割이 重要하다는 點을 노무현으로 하여금 再發見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成長과 分配, 減稅와 福祉를 둘러싼 論爭, 民營化, 脫規制, 勞動의 柔軟化, 開放, 작은 政府, 이런 論爭이 政府의 役割에 關한 論爭”이라고 指摘하고, 結局 “國家의 役割에 關한 問題는… 우리들의 具體的인 삶을 支配하는 問題이자 政治와 民主主義의 核心的인 議題”라는 見解를 披瀝한다.

    盧武鉉의 마지막 膳物

    盧武鉉이 提示하는 進步의 未來는 새로운 分配와 再分配 政策의 樹立에 있다. 新自由主義가 가져온 社會 兩極化를 解消하기 위해서는 市場의 分配인 勞動領域과 政府의 分配인 福祉領域에 國家가 어떻게 어디까지 介入할 것인지가 問題의 核心이라는 메시지다. 다시 말해, 勞動市場政策과 福祉政策의 再構成이야말로 進步의 時代精神이 堪當해야 할 課題임을 노무현은 힘주어 强調한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自身의 생각을 完成하지 못한 채 노무현은 2009年 5月 突然 이승을 떠났다는 點이다.

    盧武鉉의 豫期치 않은 逝去는 우리 社會에 큰 衝擊을 안겨줬다. 그는 왜 죽음을 選擇해야 했고, 그가 우리 社會에 남긴 遺産은 무엇일까. 盧武鉉의 永訣式이 있던 날 나는 다음과 같은 칼럼을 썼다. 盧武鉉의 삶과 時代精神을 마무리하면서 그 글의 一部를 引用하고 싶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했는가. 外信 報道 하나를 引用하고 싶다.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餈餌퉁은 盧武鉉 前 大統領이 自身에 對한 몰이사냥으로 看做했을 일들을 견뎌내지 못했고, 바로 이 事實 하나만으로도 그가 不法 政治資金을 有用한 政治家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指摘했다. ‘죽은 權力’에 對한 ‘살아 있는 權力’의 攻擊이 더 以上 ‘冊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게 만들었으며, 結局 그가 꿈꿨던 ‘사람 사는 世上’을 突然 下直하게 했다.

    政策을 立案하고 推進하는 行政家로서 노무현은 挫折하고 失敗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脫權威主義를 志向한 中産層과 庶民의 벗으로서 ‘人間 노무현’과 人權, 民主主義, 社會的 弱者 保護라는 ‘時代精神 盧武鉉’은 살아 있었으며, 그는 自身의 肉身을 내던짐으로써 우리 안의 노무현을, 다시 말해 ‘노무현的 價値와 精神’을 再發見하게 하는 마지막 膳物을 안겨주고 떠났다. (…) 그렇다. 노무현 時代는 지나간 것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았다. 죽음으로써 盧武鉉 大統領은 비로소 自身의 時代를 열었다.”

    이제 이 企劃 全體를 마무리하면서 내 생각을 整理해보고자 한다. 지난 1年 동안 이 企劃은 우리 歷史에서의 時代精神과 知識人의 問題를 巨視的으로 살펴봤다. 新羅時代 元曉와 최치원부터 光復 以後 顯在的 知識人들까지 그들의 思想的, 政治的 冒險을 注目함으로써 우리 社會의 새로운 時代精神 摸索에서 敎訓을 얻고자 했다.

    돌아보면 우리 歷史에서 知識人들의 時代精神 探究는 대단히 熾烈했다. 비록 時代的 拘束에 갇혀 있었다 하더라도 그 拘束을 넘어서서 새로운 人間과 社會를 꿈꿨으며, 그것을 具體化하기 위해 獻身했다. 어떤 이들은 人間의 더 많은 自由와 解放을 摸索하고자 했고, 또 어떤 이들은 우리로서의 民族의 意味를 再發見하고자 했으며, 또 다른 이들은 不條理한 社會의 矛盾들을 積極的으로 改革하고자 했다.

    時代精神 探究의 最前線

    人間이란 무엇인가, 韓民族이란 누구인가, 그리고 나와 우리 社會는 어디에 서 있고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對해 이 땅의 知識人들은 끝없이 質問을 던지고 그 答辯을 찾고자 했다. 骨品制에 맞서 싸운 최치원, 民族의 歷史를 體系化한 金富軾과 一然, 儒敎的 改革을 꿈꾼 정몽주·鄭道傳·李滉·李珥, 그 儒敎社會를 革新하고자 했던 朴趾源·朴齊家·정약전·丁若鏞·이건창·최제우, 近代的 民主主義와 民族主義를 摸索한 서재필·申采浩·李光洙, 存在의 意味에 質問을 던진 元曉와 鏡虛, 現代的 産業主義와 民主主義, 人間主義와 生命主義를 追求한 함석헌·장일순·황순원·이영희, 그리고 朴正熙와 노무현에 이르기까지 우리 歷史를 代表하는 知識人과 政治家들은 時代精神 探究의 最前線에서 苦鬪해 왔다.

    時代的 限界에 맞서고 이를 넘어서고자 했던 이들의 思想的 冒險이 주는 重要한 含意는 時代精神 探究에서의 方法과 方向이다. 例를 들어, 鄭道傳과 李珥의 儒敎的 改革論과 朴趾源과 丁若鏞의 實學派 改革論은 朝鮮 社會라는 時代的 條件에 갇혀 있었지만, 現實 問題를 어떻게 診斷하고 國家와 社會, 權力과 國民(百姓)의 關係를 어떤 方向으로 이끌 것인지에 對해 熾烈하게 苦悶하고 解法을 摸索함으로써 如前히 決코 작지 않은 意味를 안겨주고 있다.

    顯在的 觀點에서 볼 때 21世紀 우리 社會 未來를 이끌 새로운 時代精神은 單數가 아니라 復讐가 될 수도 있다. 咸錫憲과 盧武鉉의 民主主義, 朴正熙의 産業主義, 李寧熙의 民族主義, 장일순의 生命主義, 황순원의 人間主義 亦是 모두 所重한 出發點으로서의 意味를 갖는다. 眞正한 知識人이라면 우리 過去에 對한 批判的 省察을 통해 새로운 未來를 위한 價値를 鑄繰하고 그 프로그램을 具體化하는 데 最善을 다해야 할 것이다. 지난 1年間 進行된 우리 歷史의 時代精神 探究에서 내가 얻은 結論은 세 가지다.

    첫째, 生産的인 自己 不正이 要求된다. 새로운 時代精神을 摸索하기 위해서 知識人은 懷疑的 接近을 통해 自己 社會 問題를 批判的으로 分析하고 解剖해야 한다. 무릇 모든 存在가 自己 껍데기를 스스로 깨고 나올 때 成熟해지듯이 自己 社會의 現在를 冷徹히 評價하고 省察하는 것은 時代精神 探究의 一次的 條件이다. 自身이 선 자리를 正確히 認識할 때 가야 할 길의 方向이 보이는 法이다.

    둘째, 代案 摸索에 熾烈해야 한다. 時代가 주는 構造的 强制가 클수록, 그 經路依存性이 堅固할수록 새로운 代案의 摸索은 決코 쉽지 않은 課題일 것이다. 그러나 代案이 不在하다면 會議와 反省은 結局 自己 否定으로 歸結될 可能性이 높다. 歷史가 더 나은 삶을 向한 進化를 뜻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進化를 위해 個人과 社會가 어떻게 變化해야 하는지에 對한 새로운 代案과 비전의 摸索은 時代精神 探究에서 또 하나의 條件이다.

    민주주의 희생해 산업화 성공시킨 독재자 박정희, 상식과 원칙 추구한 진보적 민주주의자 노무현
    김호기

    1960年 京畿道 洋酒 出生

    연세대 社會學科 卒業

    獨逸 빌레펠트臺 社會學 博士

    美國 UCLA 社會學科 房文學者

    韓國政治社會學會 副會長

    美國 스탠퍼드대 亞太硏究所 Korea Democracy Project 共同編輯人

    著書: ‘韓國 市民社會의 省察’ 等 多數


    셋째, 改革과 革新이 重要하다. 더 나은 未來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改革과 革新이 不可避하다. 境遇에 따라서 그 改革과 革新은 安定을 重視하는 保守的인 것일 수도 있고, 變化를 重視하는 進步的 것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歷史가 改革과 革新을 要求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回避하거나 拒否할 境遇 그 社會는 結局 後退할 수밖에 없다는 點이다. 自己 社會의 未來를 위한 改革과 革新의 프로그램들을 具體化하는 것이야말로 自己 時代에 맞서는 知識人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重大한 責務라고 나는 생각한다.

    朴正熙는 누구인가

    1917年 慶北 선산 胎生. 1979年 逝去. 만주군관학교, 日本陸軍士官學校, 朝鮮警備士官學校(陸士 前身) 卒業. 1961年 5·16쿠데타 主役. 1972年 10月維新 斷行. 1963年부터 1979年까지 大統領 在任. ‘民族의 英雄’에서 ‘獨裁의 元祖’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評價가 이뤄지고 있음. ‘國家와 革命과 나’ 等의 著書가 있음.

    노무현은 누구인가

    1946年 慶南 金海 胎生. 2009年 逝去. 부산상고 卒業. 司法試驗에 合格해 辯護士로 活動. 國會議員, 海洋水産部 長官 等을 거쳐 2003年 大統領에 就任. 2009年 逝去. 執權 當時 숱한 論難의 한가운데에 있던 노무현 政府는 김대중 政府와 함께 民主化 時代를 代表하는 政府로 評價되고 있음. ‘進步의 未來’ 等의 著書가 있음.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