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朝鮮의 벨린스키가 되고 싶었다”|신동아

“나는 朝鮮의 벨린스키가 되고 싶었다”

‘빨치산 是認’ 이기형

  • 이소리│ 詩人, 文學in 代表 lsr21@naver.com

    入力 2011-11-22 17:44:00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詩를 통해 反日 獨立精神 일깨워주고 싶어”
    • 時 所在 救하려 南으로 왔다가 길 막혀 빨치산 活動
    • “夢陽 先生 尊敬하지만 그의 祕書는 아니었다”
    • 呂運亨은 戰鬪的 指導者, 韓龍雲은 고요한 指導者
    • 統一國家 가로막는 말은 ‘빨갱이’ ‘親日保守’
    • ‘民族’ 暫時 접고 多文化, 多民族 包容해야
    “나는 조선의 벨린스키가 되고 싶었다”


    日帝强占期를 거쳐 只今까지 이리저리 요동치며 흘러온 굵직굵직한 우리 ‘歷史의 무늬’를 새기고 있는 詩人이 있다. 올해 94歲인 詩人 이기형 先生이 그다. 그가 詩를 쓰게 된 理由는 러시아 리얼리즘 文藝理論을 세운 文藝評論家이자 制定러시아를 무너뜨리는 데 큰 役割을 한 벨린스키(Vissarion Grigol‘evich Belinsky·1811~1848)처럼 “詩나 小說을 통해 反日獨立運動 精神을 사람들에게 심어줘 日制를 하루빨리 무너뜨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韓國 文壇에서 ‘21世紀 마지막 빨치산’ ‘20世紀 歷史의 산 證人’으로 불리는 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가 日帝强占期 때 무엇을 했으며, 누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우리 歷史 흐름을 어떻게 보았는지, 光復 以後부터 6·25戰爭을 거쳐 只今까지 어떤 思想으로 武裝하고 있는지를 제대로 살펴야 한다.

    ‘민주조선’ ‘동신日報’ 等 南北을 가리지 않고 新聞社에서 政治部, 社會部 記者生活을 한 그는 여운형, 박헌영, 金九, 한용운, 林和, 박팔양, 오장환 等 光復 前後 우리나라를 이끈 政治指導者와 뛰어난 文人도 많이 만났다.

    그래서일까? 그는 “夢陽 呂運亨은 徹底한 戰鬪的 指導者요, 萬海 韓龍雲은 고요한 指導者”라고 斷言했다. 박헌영에 對해서는 “박헌영이 李承晩을 조선인민공화국 主席으로 세우려 했다. 判決文을 찬찬히 살펴보니 美國의 앞잡이였던 거 같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判決文은 1955年 12月15日 北韓에서 열린 박헌영의 裁判 判決文이다. 이 判決文에 對해서는 다양한 解釋이 나오는데, 이는 인터뷰 中盤에 具體的으로 살펴보자.



    이 詩人은 또 “統一國家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는 것은 ‘左右翼’ ‘進步 保守’ ‘빨갱이’ ‘共産黨’ ‘親日守舊’란 말들이며, 이런 말들을 버려야 統一이 앞당겨질 수 있다”면서 “8·15 때 光復이 올 줄 그 하루 앞날까지 몰랐듯이 南北統一도 來日 當場 될 수도 있다”고 ‘希望의 끈’을 놓지 않았다.

    ▼ 12歲 때 夜學을 통해 抗日 獨立運動을 알게 됐고, 1933年부터 作家 韓雪野, 史學者 문석준, 獨立運動家 여운형, 詩人 林和 等을 만나 朝鮮獨立을 위해 文學이 할 수 있는 일에 對해 苦悶하기 始作했다고 들었습니다. 當時 滿洲로 가서 獨立軍이 될 수도 있었는데 왜 文學을 工夫했습니까?

    “나는 反日 獨立運動 精神을 사람들에게 鼓吹시켜 다 함께 日帝를 물리치고 싶었어요. 그때 러시아 리얼리즘 文藝理論을 세운 文藝評論家이자 制定러시아를 무너뜨리는 데 큰 役割을 한 벨린스키가 쓴 日本語 評論을 많이 읽었어요. 나도 벨린스키처럼 文學을 통해 朝鮮獨立運動을 하면 日帝를 물리치는 데 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죠. 내가 强制徵用을 避한 學生들과 함께 ‘協同團’을 만든 것도 武裝鬪爭을 통해 日帝를 물리치고 싶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때 協同團 指導者는 故鄕이 나와 같은 염윤구였는데, 山에서는 그를 淸算(靑山)이라 불렀죠(노시인은 當時의 悔恨이 밀려온 듯 暫時 눈을 감았다). 우리나라 文人으로는 林和가 쓴 評論을 愛讀했고 가끔 만나기도 했어요. 只今은 詩나 小說을 통해 統一問題를 자꾸 이야기해서 사람들을 일깨우고 싶어요. 內 市價 南北統一에 도움 되는 滋養分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어요.”

    참으로 神奇했던 選擧를 素材로 첫 詩 發表

    ▼ 1947年에는 ‘민주조선’에 詩를 發表하면서 作品 活動을 始作했죠? 왜 남으로 내려오게 되었나요?

    “나는 北에 있을 때 프리랜서로 活動하기도 했고, ‘민주조선’ ‘勞動新聞’의 政治部, 社會部記者를 했지만 글을 쓰기 위해 그만두었어요. 1947年 ‘민주조선’에 發表한 詩의 題目은 ‘選擧’였는데,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選擧란 걸 해본 적이 없었죠. 選擧를 하니까 참 神奇하기도 해서 그 內容을 詩로 써서 發表했어요. 박팔양 先生이 그때 ‘勞動新聞’ 編輯局長을 맡고 있었는데, 先生이 내 詩를 ‘民衆文化市의 標本’이라며 크게 稱讚했어요. 1950年에는 ‘後方’(當時 戰鬪가 벌어진 곳은 前方, 戰鬪가 일어나지 않는 곳은 後方이라 불렀다고 한다)에서 詩나 小說 素材를 求하려고 (南으로) 내려왔어요. 政治的 立場은 없었고요. 그때는 戰爭 中이라도 民間人들이 南北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는데, 9·28 서울 收復을 하면서 南北이 가로막혔어요. 當時 親舊 2名과 함께 木浦까지 갔다가 井邑을 거쳐 全州로 가는데 警察認知, 軍人인지 언뜻 分揀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어요. 우리는 깜짝 놀라 山으로 올라갔는데, 누군가 山에서 내려오라고 해서 내려가는데 가까이서 보니 美軍이었어요. 美軍들이 無差別 射擊을 해 親舊 2名은 그 자리에서 죽었고요. 나는 多幸히 山자락에 엎드려 고개를 抱玉 파묻고 있어서 銃을 맞지 않았죠. 다음 날 삽을 들고 親舊 2名을 山에 묻었어요. 北으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그냥 山으로 올라갔죠. 산사람(빨치산)들을 만나 함께 지냈죠.”

    ▼ 여운형, 韓龍雲 先生과 자주 만났고, 또 아주 尊敬하는 人物이라고 했는데요. 夢陽과 萬海는 언제 처음 만났나요?

    “나는 그때 朝鮮 靑年 學生들을 指導해줄 만한 有能한 指導者를 찾고 있었어요. 그때 누군가 문석준(史學者)을 紹介했고, 문석준 先生이 1937年에 呂運亨 先生을 紹介해줬어요. 문석준은 日本 東京高等師範學校를 나온 秀才였는데, 우리말로 우리 歷史를 처음 썼던 분이셨죠. 그 原稿는 내가 直接 봤어요. 北韓에서는 8·15 直後에 그 冊을 敎科書로 썼죠.”

    여운형, “뒤에서 부추기는 사람은 指導者 아니다”

    ▼ 夢陽 先生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夢陽 先生이 나를 처음 만나 한 말은 ‘眞正한 指導者는 앞에 서서 大衆을 끌고 가는 사람이다. 뒤에서 부추기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어요. 그때 夢陽 先生이 대단한 鬪士라는 事實을 알았죠. 萬海 先生과 夢陽 先生 差異點은 夢陽 先生은 徹底한 戰鬪的 指導者, 卽 鬪士요, 萬海 先生은 고요한 指導者라 할 수 있어요. 當時 文學靑年이었던 저는 夢陽 先生과 萬海 先生을 몹시 尊敬했어요. 夢陽 先生은 자주 만났고, 萬海 先生은 가끔 만났어요. 사람들이 그 때문에 나더러 夢陽 呂運亨 先生 祕書를 暫時 했다고 그러는데, 그건 事實과 달라요.”

    ‘夢陽 呂運亨 評傳’을 쓰고 夢陽 先生과 자주 交遊했다는 理由로 많은 言論에서 그를 ‘呂運亨의 祕書’로 紹介하지만, 그는 “全혀 아니다”라고 再次 强調했다.

    ▼ 박헌영은 어땠나요?

    “박헌영과도 몇 番 만났죠. 그는 李承晩을 조선인민공화국 主席으로 내세운 人物이었어요. (1955年) 北韓 裁判所 判決文을 보니까 美國의 앞잡이가 틀림없더라고요.”

    이 詩人은 박헌영에 對해서는 主로 判決文을 回顧하면서 그를 記憶했다. 하지만 判決文에 對한 解釋은 다양하다. 정진석 韓國外國語大學校 言論情報學部 名譽敎授는 ‘신동아’ 2010年 2月號 ‘정진석의 言論과 現代史 散策’을 통해 다음과 같이 썼다.

    “1955年 12月15日 열린 박헌영의 裁判은 박헌영이 自身의 經歷과 犯罪事實을 自白하는 順序부터 始作되었다. 박헌영은 自身의 經歷을 陳述하면서 被訴 事實을 모두 是認했다. 1919年 3月 경성고보(경기고등학교)를 卒業한 後에 女性啓蒙雜誌 ‘女子詩論’의 編輯員으로 勤務할 때에 언더우드를 만나면서 美國을 崇拜하는 思想을 품게 되었다고 말했다. 美國에 依存하지 않고는 朝鮮 問題를 解決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世界 問題를 解決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越北 後에는 江東學院과 海州第一印刷所를 利用하여 (美軍政) 夏至가 指令한 대로 南北對立과 不信任, 分裂思想을 造成하는 것과 北韓 黨內에 勢力을 腐蝕하고 擴張하는 犯罪行動을 敢行했다고 말했다.”

    鄭 敎授는 이에 對해 “當時는 김일성을 向한 어떤 勢力의 어떤 挑戰도 許容되지 않던, 金日成이 絶對的 權威를 지닌 神聖한 存在였던 때였다”며 “박헌영 一派의 公判記錄을 ‘美帝國主義 雇傭間諜 박헌영 리승엽 徒黨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政權 顚覆陰謀와 間諜事件 公判文獻’(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最高裁判所 便, 國立出版社, 1956)이라는 題目으로 發行했다. 公判記錄은 北韓이 남로당을 肅淸하면서 對外 宣傳과 함께 對內的으로는 反對派에게 心理的 恐怖心을 불러일으키고 남아있는 同調 勢力을 完全 無力化하는 同時에 無慈悲한 肅淸事實을 正當化하는 宣傳 目的으로 公開한 것”이라고 分析한다. 다시 인터뷰로 돌아가자.

    理念 對立 暫時 접고 合作 이끌어내야 統一

    ▼ 左右翼 或은 進步와 保守의 對立은 60年이 지난 只今도 如前한데요.

    “나는 조선의 벨린스키가 되고 싶었다”

    孫女와 多情한 한때를 보내는 이기형 是認.

    “左右가 너무 팽팽하게 갈라서면 南北統一은 더욱 멀어진다고 봐요. 座니 우니, 進步니 保守니 따지지 말고 合作을 해서 그 힘으로 統一運動을 이끌어 統一國家를 세워야 합니다. 理念 對立은 暫時 접어두고 單一民族, 單一國家를 세우기 위해서는 힘을 합쳐야 해요. 이것이 곧 蒙養哲學이자 내 哲學입니다. 只今도 내 理論의 中心에는 이 哲學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어요.”

    ▼ 統一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左右翼’ ‘進步 保守’ ‘빨갱이’ ‘共産黨’ ‘親日保守’ ‘守舊’ 같은 말들이 統一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봐요. 이제 이런 말을 쓰면 안 돼요. 分裂될 뿐이니까요. 이 말은 우리에게 全혀 맞지 않아요. 이런 말을 자꾸 쓰는 사람은 過去에 저지른 잘못을 숨기기 위해 분열시키려는 意圖예요. 只今은 서로 잘잘못을 뉘우치면서 같이 손잡고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進步的인 사람도 相對方을 親日分子라고 無條件 몰아세우지 말고 讓步하면서 다독여야 해요. 分斷 60餘 年, 참 부끄럽지 않아요? 結局은 進步든 保守든 相對方 弱點을 들추지 말고 長點을 내세워 함께 나아가면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分斷은 永遠히 解決되지 않아요. 그런 時代는 낡아빠진 遺物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 그렇게 되면 곧 統一이 될까요?

    “오늘 이 자리에서 94歲 이기형이 젊은 이소리 詩人을 만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그 自體가 아주 重要한 瞬間이에요. 分斷이 수많은 天才를 죽였죠. 林和度 休戰 直後인 1953年 8月 남로당 中心人物들과 함께 北韓政權의 最高裁判所 軍事裁判部에서 ‘미제間諜’ 嫌疑로 死刑을 宣告받고 처형당했잖아요? 吳章煥度 越北한 뒤 病死했고. 참 가슴 아픈 일이죠. 南北統一은 언제 올지 아무도 몰라요. 光復 前날까지 누가 다음 날 解放될지 알았나요? 南北統一도 그러해요. 來日 當場 될 수도 있고…. 統一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南北이 자꾸 만나야 해요. 民間人이든 政治人이든 藝術人이든 자꾸 만나야죠. 白頭山도 中國을 통하든 어쨌든 자주 가야 합니다. 北韓에 도와줄 게 있다면 道와야죠. 그래야 統一이 앞당겨져요.”

    “詩 한두 篇 發表하고 건방떠는 건 싫어”

    ▼ ‘民族’을 强調하시는데, 요즘은 多文化·多民族 社會라고 하잖아요?

    “맞아요. 民族問題를 暫時 접어두고 다른 民族을 끌어안고 統一國家를 세우는 데 함께 힘을 쏟아야 합니다. 이들에게도 統一에 對해 자주 알려야죠. 그렇다고 ‘民族’을 버리라는 건 아닙니다.”

    ▼ 1947年에 이미 詩人으로 登壇했는데, 1980年부터 文學評論家 백낙청, 詩人 신경림, 金命洙, 李始榮 등을 數없이 찾아가 詩를 보이고 評을 해달라고 했죠? 왜 그러셨나요?

    “나는 내 詩 工夫를 위해 그렇게 熱心히 쫓아다녔어요. 다른 사람들은 ‘내가 詩人이다’ 해서 건방을 떨지만 나는 그런 게 싫어요. 詩 한두 篇 發表해놓고 폼 잡는 건 ‘眞짜 是認’이 아니에요. ‘眞짜 是認’李 되기 위해서는 原稿를 들고 熱心히 뛰어다녀야 해요. 나는 그 때문에 그냥 달려갔어요. 그분들이 귀찮아할 程度로. 詩人 신경림은 첫 詩集 跋文도 썼고, 내 詩에 對해 指摘도 많이 했어요. 하루는 신경림 詩人을 찾아갔더니 밥을 먹고 있어 밖에서 한참 기다리기도 했어요. 그런 過程을 몇 年 거쳐 只今의 詩가 된 거죠. 내가 詩에서 分斷과 統一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 사람들은 내 詩가 抒情性이 不足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어요. 詩人은 多情多感夏至 않고는 詩를 쓸 수 없어요. 情에 겨워 눈물도 흘리고, 憤에 못 이겨 주먹도 휘둘러야죠. 內 市價 眞짜 그러한가 한 篇 들어볼래요?”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그의 詩 ‘그리움’을 읊었다.

    저물녘

    흰 빨래 걷힌 白沙場에 남은

    아스라한 그리움

    시냇물은 三千里를 돌아

    大地를 싹틔우는 四月의 넋이여

    ▼ 좋은 詩는 어떤 時인가요?

    “民族의 運命을 노래하는 詩, 市的 技巧에서의 壓縮, 詩語의 取捨選擇, 內容의 推敲가 잘된 詩가 좋은 詩라고 봐요. 좋은 詩는 內容과 現實이 잘 짜여 있어야 해요. 나도 그런 詩를 쓰고 싶은데, 잘 안 돼요(웃음). 누군가 그런 詩를 쓰기를 바라는데 不幸히도 아직 그런 詩人을 찾지 못했어요. 우리나라 自然을 노래하든 人間을 노래하든 ‘읽고 卒倒해야 할 詩’를 써야죠. 나도 사람들이 넋을 놓을 程度의 그런 詩를 쓰고 싶어요.”

    ▼ 요즈음 젊은 詩人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나는 포스트모더니즘 詩를 쓰는 詩人은 詩人이라고 認定하지 않아요. 요즈음 젊은 詩人 大部分이 그것에 醉해 있는데, 그건 안 돼요. 리얼리즘 詩를 써야죠. 讀者가 醉해 엎어질 程度로. 이게 詩에 對한 저의 主張입니다. 林和가 쓴 詩를 短篇 敍事詩라고 하는데, 그런 短篇 敍事詩나 長篇 敍事詩를 써야 해요. 포스트모더니즘으로는 分斷 狀況을 이야기하지 못해요. 요즘 젊은 詩人들이 엉뚱한 곳에 才能을 消耗하고 있는 거 같아요. 그 才能을 리얼리즘에 쓰면 좋을 듯해요. 抒情詩를 쓰더라도 讀者가 醉해 까무러칠 程度로 써야 해요. 요즘 제가 가장 苦悶하는 것은 示唆(詩史)에 남을 만한 詩를 쓰고 죽는 겁니다. 單 한 篇이라도.”

    ▼ 南北統一이 된다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뭔가요?

    “統一이 되면 우리 食口부터 먼저 찾아야 하지 않겠어요(웃음)? 그 다음에는 林和의 아들인 遠配, 은주를 찾아 만나고 싶어요. 아마 林和의 夫人 地下聯氏는 죽었을 거예요. 김남천 詩人도 만나고 싶고요.”

    ▼ ‘九旬 是認’이신데, 특별한 健康祕訣이 있나요?

    “‘1秒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는 것이 내 健康 守則이에요. 飮食은 김치와 된醬국을 즐겨 먹죠. 이 飮食은 世界 어느 곳에 내놔도 자랑거리가 될 겁니다. 그밖에 뭐 먹을 게 있겠어요?”

    “統一 되면 家族과 林和 아들 만나고 싶어”

    ▼ 詩集을 낼 計劃은 있나요?

    “네. 한두 卷 더 낼 計劃이에요. 한 卷은 이미 原稿를 다 썼고, 나머지 한 卷도 半쯤 準備됐어요. 내 一生이 담긴 自敍傳도 쓰고 싶지만 要塞 氣力이 좀 달려요. 누군가에게 付託하고 싶기도 하지만 내 마음에 들 程度로 文章力이 뛰어난 이가 눈에 잘 띄지 않아요. 出版社 몇 군데서 自敍傳 代筆 이야기도 오갔지만 承諾하지 않았어요.”

    詩人 이기형은 1917年 咸鏡南道 함주에서 태어나 1938年 咸興高普를 卒業했다. 1942年 도쿄 日本大學 藝術部 創作科에서 2年 동안 工夫했다. 1943年부터 1945年까지 ‘地下協同團’ ‘學兵拒否事件’ 等 地下 抗日鬪爭 關聯 嫌疑로 數次 被檢되어 1年餘 獄살이를 했다.

    1945年부터 1947年에는 ‘민주조선’ ‘勞動新聞’ ‘동신日報’ ‘中外信保’ 等 言論社에서 政治部·社會部 記者로 일하며, 金九 先生을 비롯해 李承晩, 박헌영, 김삼룡, 이주하 等을 자주 만났다. 1947年 7月19日 精神的 指導者로 여기던 呂運亨 先生이 암살당하자 그는 公式的인 社會活動을 모두 끊고 以後 33年 동안 蟄居했다.

    6·25戰爭이 터진 1950年에는 ‘後方’(南韓) 사람들 삶을 글로 쓰기 위해 木浦 等地를 떠돌다가 9·28 서울 收復 以後 北韓으로 가지 못하고 빨치산 活動을 하다 逮捕되어 投獄됐다. 그 뒤 구멍가게, 學院講師, 飜譯, 私設學院 運營 等 여러 가지 일을 했다. 1980年 詩人 김규동, 作家 남정현 等을 통해 詩人 신경림, 文學評論家 백낙청 等을 만나 ‘分斷祖國下에서 詩를 쓰지 않겠다’던 생각을 바꾸게 된다. 1980年부터 1990年 中盤까지 在野 民主化 統一運動에 參與했으며, 1989年 詩集 ‘智異山’ 筆禍事件으로 發行人이 拘束되고, 이 詩人은 國家保安法 違反 嫌疑로 不拘束 起訴돼 大法院에서 懲役 1年, 執行猶豫 2年을 宣告받았다. 詩集으로 ‘望鄕’ ‘泄劑’ ‘三千里統一共和國’ 等이, 轉機로는 ‘夢陽 呂運亨’ ‘島山 안창호’가 있다. 現在 韓國作家會議 顧問을 맡고 있다.



    인터뷰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