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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命運動 期數 도법 스님의 快刀亂淡|新東亞

生命運動 期數 도법 스님의 快刀亂淡

가장 힘든 게 女子 생각 萬날 하고 싶지만 얽매이진 않아

  • 組成式 記者│mairso2@donga.com

    入力 2011-11-22 16: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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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 쓴다고 無視當한 법정 스님
    • 이웃 苦痛 外面하는 나 홀로 修行은 必要 없어
    •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性慾 自體는 問題 안 돼
    • 봉은사 事態에 外壓은 없었다
    • 禪房에서 죽어라 參禪해도 깨달음 오지 않더라
    • 삶과 죽음은 바람 부는 바다와 같은 것
    생명운동 기수 도법 스님의 쾌도난담
    農事일하다 막 돌아온 것 같은 차림이다. 밀짚帽子를 벗자 싱그러운 중머리가 나타난다. 還甲이 지났는데, 동안(童顔)이다. 눈이 크고 귀가 야무지게 생겼다. 눈瞳子가 또랑또랑하다. 입이 아니라 눈이 말하는 것처럼. 단단한 구릿빛 얼굴 筋肉이 微笑 지을 때마다 스르르 풀어진다. 正坐한 그에게서 綠茶 香氣가 풍긴다.

    도법 스님(62)은 平凡한 중이 아니다. 節에 앉아 施主돈 세거나 參禪한다고 골房에 처박혀 있는 中이 아니다. 그는 社會運動을 하는 中이다. 具體的으로 表現하면 生命平和運動이다. 1999年부터 그가 이끄는 인드라網生命共同體는 佛敎界의 代表的인 社會運動組織이다. 智異山 實相寺가 據點이다. 本部는 서울 牧童에 있다. 農業에 基盤을 둔 그의 生命平和運動은 都市와 시골을 똑같이 重要視한다. 그는 2004年부터 生命平和의 旗幟를 내걸고 5年 동안 托鉢巡禮를 했다. 支持者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曹溪宗에서 ‘救援投手’로 通한다. 1998年 宗團 暴力事態 때 總務院長權限代行으로 活躍했다. 지난해 曹溪宗은 봉은사 事態와 4大江 事業을 둘러싼 葛藤으로 內紛에 빠졌다. 그해 6月 그는 曹溪宗 화쟁(和諍)委員會 委員長을 맡아 宗團의 紛爭을 收拾하는 데 앞장섰다. 1年 뒤인 지난 6月 結成된 ‘自省과 刷新 結社 推進本部’ 本部長도 그의 몫이었다. 이는 화쟁委員會와 民族共同體推進本部, 宗敎平和委員會를 합친 機構로 曹溪宗 改革의 總司令塔이라 할 만하다.

    골치 아픈 宗團 改革 얘기를 하려고 그를 만난 건 아니다. 중에게 감투가 뭐 대수랴. 널리 알려진 歸農運動을 새삼 紹介하려는 것도 아니다. 삶의 고단함과 찰거머리와 같은 欲望, 存在의 危機, 世上의 危機에 對한 그의 高見을 듣고 싶었다. 解法을 찾기보다는 慰勞를 받고 싶어서였는지 모른다. 삶에서 慰勞만큼 따뜻한 것도 없으니. 인터뷰는 木洞 인드라網生命共同體 事務室에서 進行됐다.

    10月29日 인드라網生命共同體는 서울 陽川區 양천公園에서 ‘2011 가을한마당’ 祝祭를 벌였다. 이 行事는 ‘都市와 農村이 만나 希望을 만들다’라는 口號를 내걸었다. 秋收感謝祭, 歸農歸村 알림마당, 親環境農産物 알림마당, 우리文化 體驗마당, 公演마당 等이 主要 프로그램이었다.



    韓國 佛敎 傳統은 멍에

    ▼ 요즘 하루 日課가 어떻게 되십니까.

    “제가 하는 일이 佛敎的 代案과 社會的 代案을 찾는 겁니다. 佛敎的인 게 인드라網生命共同體이고 社會的인 게 마을共同體입니다. 마을共同體 運動은 主로 實相寺에서 해요. 實相寺 住持는 따로 있고요. 普通 새벽 4時에 일어나 遂行時間을 갖고 나머지 時間엔 사람 만나고 講義하고 會議하고 그러죠.”

    ▼ 牧童에 자리 잡은 것도 都市共同體 運動과 關聯된 건가요?

    “都市와 農村이 만나 하나가 되는 運動이죠. 이런 運動이 佛敎 쪽에는 인드라網밖에 없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에요.”

    ▼ 曹溪宗 화쟁委員長에 이어 自淨과 刷新 結社 推進本部長度 맡으셨는데요.

    “제가 그동안 해온 一과 脈이 닿아 있어 提案을 받아들였어요. 그것 때문에 서울에 자주 와요.”

    ▼ 여러 일을 同時에 하려면 眞짜 바쁘실 것 같아요.

    “實務 보는 親舊들이 따로 있어요. 저는 母子 노릇, 바람잡이 노릇하는 거죠. 누구를 만난다든지 講演을 한다든지…. 혼자 모든 걸 할 수는 없죠.”

    ▼ 스님이 하는 일은 修行을 重視하는 傳統的 佛敎와 方向이 다르죠?

    “나는 내가 하는 게 眞짜 修行이고 眞짜 佛敎라고 생각해요.”

    ▼ 왜 그렇죠?

    “韓國 佛敎가 자랑스러운 代案으로 얘기하는 게 高麗時代 普照國師 知訥의 淨慧結社예요. 最近엔 聖哲 스님의 鳳巖寺 結社를 例로 들지요. 그런데 둘 다 山中에서 孤高하게 遂行 잘하자는 얘기예요. 出家者 中心이에요. 그런데 부처님이 하신 佛敎는 그게 아니에요. 遂行 잘하는 건 當然한 거고요. 부처님은 當身 自身과 佛敎 集團의 利益을 위해 佛敎를 하지 않았어요. 衆生과 世上의 安樂과 幸福을 위해 佛敎는 存在하고 自身도 그걸 위해 一生을 바치고 있다고 말씀하셨죠. 그런 것을 제대로 繼承하는 게 眞짜 佛敎라는 생각에서 이런 運動을 해온 겁니다.”

    社會運動을 熱心히 하는 스님에게는 이런 是非가 따라붙는다. 넌 都大體 修行은 언제 하느냐고. 이 質問을 던지자 도법 스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넘겼다.

    “當然하죠. 旣成 佛敎 쪽에서는 다들 그런 생각을 하죠. 제가 법정 스님을, 그 분이 20代일 때부터 알았어요. 모시고 살기도 하고 奉仕도 했죠. 30, 40年 前 法定 스님은 절집에서 全혀 評價받지 못했습니다. 무슨 修行者가 글을 쓰냐고. 글 쓰는 사람이 무슨 修行者냐고. 그런데 이제 와선 最高의 修行者로 評價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佛敎도 變하고 佛敎에 對한 社會的 要求도 變한 겁니다.”

    그는 ‘韓國 佛敎의 傳統’을 ‘멍에’라고 규정지었다.

    “오늘날 韓國 佛敎가 傳統으로 생각하는 것은 朝鮮朝 500年 동안에 굳어진 거예요. 벗어야 할 멍에입니다. 숨어서 살아남아야 하는 條件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건데 그것을 마치 대단히 所重한 傳統처럼 여기는 겁니다. 生存을 위해서는 隱遁해야 했고 내면적이고 靜的이어야 했죠.”

    達磨와 元曉

    ▼ 社會參與的이고 實踐的인 面을 强調하시는 거죠?

    “저는 現實을 떠난 宗敎는 있을 수 없다고 봐요. 現實을 떠난 遂行이 무슨 必要가 있겠는가. 삶과 遂行은 決코 分離될 수 없는 거죠. 分離되는 것은 眞짜 佛敎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得道를 했다는 高僧들은 大部分 俗世와 떨어져 遂行했지요?

    “代表的으로 對比되는 人物이 達磨 禪師와 元曉 大使입니다. 元曉는 千村萬落(千村萬落)을 누비면서 民衆과 함께했던 人物이고, 達磨 禪師는 小林窟이라는 人跡이 끊긴 深山幽谷에 들어가 面壁坐禪(面壁坐禪)했던 人物이지요. 어떤 게 眞짜 佛敎냐 하고 하나를 選擇할 問題는 아닙니다. 時代狀況에 따라 다른 거죠. 狀況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變할 수 있다고 봅니다. 부처님이 每日 卓拔했습니다. 門前乞食한 거죠. 그게 바로 現場이지 않습니까. 마을 間에 싸움이 나자 말리러 달려갔습니다. 나라 間에 戰爭이 벌어지면 戰爭 말리러 갔습니다. 殺人魔가 나타나 온 社會가 不安과 恐怖에 떨자 殺人魔를 直接 說得하러 찾아가기도 합니다. 늘 現場에 있었지요. 그렇지만 부처님에게 그런 모습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조용히 숲 속에서 坐禪하고 冥想하는 모습도 있죠. 遂行해야 할 때도 있고 現場에 있어야 할 때도 있는 겁니다.”

    인드라網生命共同體는 그가 强調하는 ‘現場 隨行’의 結晶體라 할 만하다. 會員 數 1000餘 名의 이 團體는 全國 곳곳에서 歸農運動, 生活協同組合運動, 代案敎育運動, 生命環境運動, 生態共同體運動을 펼치고 있다.

    ▼ 前에 한 言論 인터뷰에서 선(禪) 修行者들의 問題點을 批判했던데요. 共同體的 삶은 돌보지 않고 個人 修行만 하는 게 問題라는 거죠?

    “個人 遂行도 잘하면 좋다고 봐요. 그런데 世上과 分離된 個人 遂行이라는 게 있을 수 있느냐는 거죠. 여기 個人 遂行을 잘하는 훌륭한 분이 있습니다. 그 옆에서 누군가가 어떤 일로 몹시 고통스러워합니다. 고통스럽고 不幸한 存在가 곁에 있는데 혼자 遂行 잘해서 평화롭고 幸福하다면 그게 眞짜 바람직한 平和와 幸福인가? 난 이 물음에 對한 答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웃의 苦痛에 아랑곳없이 홀로 평화로움을 맛보는 게 훌륭한 遂行이라면 그런 遂行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修行이 正말 重要할까요? 옆에서 죽거나 말거나.”

    ▼ 大部分의 스님에게 遂行이란 自己 깨달음을 위한 것이잖아요?

    “그렇죠. 그게 가장 훌륭한 일이라 생각하고 人生을 걸죠. 그런데 저는 疑心이 들어요. 부처님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러니 물고 늘어지는 거죠. 그게 眞짜라고 하는데 잘못 알고 있다, 錯覺하고 있다는 거죠. 거기에 對한 應答만 나올 수 있다면 저는 智異山 아니라 히말라야에 들어가도 좋다고 봐요.”

    스스로를 속이고 世上을 속이고

    생명운동 기수 도법 스님의 쾌도난담

    도법 스님은 世上과 分離된 個人 遂行을 批判했다.

    ▼ 禪 遂行하는 분들이 거기에 對해 答을 못하나요?

    “못해. 먼 後날 天地開闢하면 깨달음이 이뤄지고 그러면 다 解決된다는 式이거든요. 佛敎는 極樂世界를 얘기하고 基督敎는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그러면 佛敎 2600年 歷史와 基督敎 2000年 歷史에서 極樂世界와 하나님 나라가 實現됐는가. 如前히 다음과 未來를 얘기하고 있지 않은가. 이건 곤란하지 않은가. 只今 살면서 이런 問題에 對한 解答이 나오고 希望이 提示돼야지, 손에 잡히지도 않고 檢證할 수도 없는 죽은 後의 먼 後날을 얘기하는 건 곤란하다는 거죠. 우리 스스로를 속이는 거고 世上을 속이는 거죠.”

    화끈하고 시원시원하다. 에두르지 않고 곧바로 말한다. 그럴듯한 美辭麗句로 包裝하지 않고 날것을 드러낸다.

    ▼ 우리 社會가 많은 問題點을 안고 있지요. 社會的·經濟的 兩極化 現象이 심해지고 未來에 對한 不安感이 漸漸 커집니다. 經濟 水準은 높아지는데 왜 이렇게 사는 게 팍팍해지는 걸까요?

    “本質的으로는 世界觀과 價値意識의 問題라고 봅니다. 實體論的, 二元論的 世界觀을 갖다보니 나만 따로, 우리끼리만 따로 사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그걸 追求해요. 所有 價値를 中心으로 삼을 거냐, 存在 價値를 中心으로 삼을 거냐에 따라 삶의 길이 달라져요. 二元論的 世界觀과 所有 價値가 얼마나 나쁘고 危險한지 깨달아야 해요. 同時에 關係論的 世界觀과 存在 價値가 우리의 살길이라는 確信이 必要합니다. 經典에 이런 比喩가 나옵니다. 뒤에서 殺人强盜가 막 쫓아오니 나 살려라 하고 도망갑니다. 앞에 泰山 같은 불구덩이가 있어요. 타 죽게 생겼으니 얼른 避한다는 것이 물에 빠졌어요. 結局 물에 빠져 죽었지요. 불에 타 죽으나 물에 빠져 죽으나 結果는 같죠. 根本에 對한 바로잡음이 없으면 惡循環이 되풀이되지요. 오늘날 우리 社會도 마찬가지예요. 根本을 바로잡기 위한 努力은 뒷전으로 밀어내고 臨時處方만 繼續합니다. 問題가 옮겨 다닐 뿐이죠. 解決은 안 되고.”

    그는 著書 ‘그물코 人生 그물코 사랑’에서 富者와 1等을 虛構라고 斷定했다. 富者는 經濟成長을, 1等은 競爭力을 象徵한다.

    ▼ 經濟成長을 안 하면 나라가 자꾸 뒤처지겠죠. 個人的으로는 競爭에서 뒤지면 社會에서 견디기 힘들죠. 이런 問題가 個人이 世界觀을 바꾼다고 解決될까요?

    “個人도 努力하고 社會도 努力해야죠. 우리가 地球村이라는 말을 씁니다. 地球가 한 마을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면 敵對關係가 없어야죠. 더불어 살아야 할 좋은 이웃이고 同伴者죠. 그런데 우리는 地球村이라는 말을 쓰면서 敵對的으로 競爭하고 對立하고 싸우잖아요. 이미 이뤄진 現實을 제대로 認識해야 합니다. 그런데 過去의 思考方式으로 現實을 보고 있어요. 例를 들어봅시다. 韓國이 競爭力을 强化해 日本을 攻擊해 무너뜨렸어요. 美國은 急激히 經濟가 衰退했어요. 그럴 때 우리나라는 괜찮을 수 있을까요?”

    ▼ 影響을 받겠죠.

    “美國 依存度가 매우 높잖아요. 致命的인 影響을 받게 되죠. 世界市民이라 하면서도 實際로는 그냥 우리나라 國民으로만 생각하는 게 問題예요. 내가 直面한 地球村 現實을 直視해야 합니다.”

    나와 너

    ▼ 資本主義 經濟體制가 限界에 이르렀다는 診斷도 있습니다. 資本主義가 가장 發達했다는 美國에서 最近 벌어지는 示威는 자못 深刻합니다. 戰爭과 테러 威脅이 갈수록 커지고요.

    “自然災殃이 가장 큰 威脅이에요.”

    ▼ 이래저래 人類의 終末이 오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옵니다.

    “이대로 繼續 가면 안 그렇겠습니까. 그래서 解答이라고 내놓은 게 持續可能 發展 社會이잖아요. 持續이 可能하려면 먼저 自然生態的 價値를 根幹으로 삼아야죠. 두 番째로 서로를 同伴者로 認定해 協力해야 합니다. 이웃四寸과 품앗이 槪念이죠. 크게는 國家이고 작게는 마을이죠.”

    ▼ 個人보다 國家가 더 어려운 것 같아요. 集團利己主義가 表出되니까.

    “個人도 集團도 다 利己主義 一色입니다. 이것을 벗어나지 않고는 人類의 終末이든 文明의 終末이든 最惡의 狀況을 避할 수 없다고 봅니다. 經濟的으로 풍요로워지고 政治社會的으로 民主主義가 實現됐으면 當然히 평화롭고 幸福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只今 正反對로 나타나고 있지요. 그걸 우리는 生命 危機, 平和 危機라고 해요.”

    ▼ 佛敎에는 終末論的 世界觀이 없지요?

    “末世論이 있죠.”

    ▼ 基督敎의 末世論과는 다르죠?

    “循環秩序로 說明하죠. 興亡盛衰의 原理. 基督敎와는 좀 다르죠. 興하면 亡하고 亡하면 다시 일어나고.”

    ▼ 그럼 佛敎的 世界觀에서는 只今의 文明이 亡한 다음 또 다른 世界가 열리는 건가요?

    “當然하지요. 어제가 있어 오늘이 있고 오늘이 있어 來日이 있는 거죠.”

    ▼ 基督敎에서는 完全히 끝난다고 말하잖아요?

    “거기는 언제 始作해 언제 끝난다고 하죠. 問題는 그 過程이에요. 우리가 主體的으로 잘 準備하면 苦痛과 悲劇을 줄이면서 새로운 未來를 만들 수 있어요. 그런데 잘못된 世界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苦痛과 悲劇을 끝없이 擴大시키면서 悲劇的인 未來로 나아가게 되는 거죠.”

    ▼ 많은 사람이 마음의 平和를 찾습니다. 幸福은 가까운 데 있다고 하지만, 막상 生活 속에서 그걸 느끼기란 쉽지 않습니다. 좋은 가르침을 받을 때는 깨달은 것 같다가도 日常으로 돌아오면 다시 元狀態로 돌아갑니다.

    “無知와 錯覺 때문이죠. 世上에서 가장 貴한 存在가, 가장 偉大한 存在, 가장 價値 있는 存在가 뭐겠습니까. 바로 只今의 나 自身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事實을 모르고 있어요. 얼마나 完成된 存在인지. 나라는 存在를 不完全한 問題덩어리라고 생각하죠. 어딘가 完成된 게 있을 거라고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人間 存在 自體가 대단한 겁니다. 天下를 다 뒤져도 여기 現存하는 나 自身보다 貴한 것은 없죠. 存在하는 것만으로 無限한 自負心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너도 그런 거죠. 그 存在 價値에 눈뜬다면 돈이 있든 없든 서울대를 나왔든 말든 거룩한 存在가 되는 겁니다. 그런 대단한 存在가 내 親舊로 내 이웃으로 있다는 건 얼마나 氣分 좋은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 事實을 모르는 거죠. 無知하니까 錯覺하는 거고. 그래서 이에 對한 佛敎의 對答은 ‘天上天下 唯我獨尊(天上天下 唯我獨尊)’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 이 딱 두 마디예요. ‘天上天下 唯我獨尊’은 世上에 나의 存在價値보다 더 貴한 건 없다는 뜻이고요. ‘삼계개고 아당안지’는 온 世上 生命들이 苦痛에 시달리고 있으니 내가 最善을 다해 그들을 苦痛에서 벗어나도록 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삶이 평화로운 거죠.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너의 安樂과 幸福은 關心 없죠. 오로지 나의 安樂, 우리의 安樂만 찾죠. 國家라는 이름으로 우리끼리, 宗敎라는 이름으로 우리끼리, 家族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끼리. 그러니 싸움밖에 할 게 없는 거죠. 싸우면서 平和를 누릴 수 없는 건 當然하죠.”

    生命 欲求가 利己的 欲求로

    생명운동 기수 도법 스님의 쾌도난담

    宇宙 秩序를 表現한 것이라며 도법 스님이 내보인 그림.

    張皇한 形而上學的인 얘기가 展開된다. 하지만 지루하지 않다. 그다지 어렵지도 않다. 무릇 큰 가르침이란 알기 쉽게 說明돼야 하는 法.

    그가 “簡單하게 說明할 수 있는 祕法이 있다”며 누런 천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꼭 古代 象形文字 같다. 上段 左右에 원 두 個가 配置돼 있고 맨 아래에 사람 模樣의 形象이 자리 잡고 있다. 사람 머리 左右와 上段에 數學的 記號 같은 게 그려져 있다. 그의 說明에 따르면 왼쪽 원이 太陽, 오른쪽 원이 달이다. 사람 머리 위의 화살標 模樣이 나무, 卽 植物이다. 왼쪽 形象은 새와 물고기의 組合이다. 오른쪽은 네 발 달린 짐승이다.

    “宇宙 森羅萬象을 아주 單純化해서 事實的으로 描寫한 거죠. 하나밖에 없는 내 生命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普通 내 生命은 내 안에, 네 生命은 네 안에 있다고 생각하죠. 그러니 나와 너가 利己的인 關係가 되는 겁니다. 너 없어도 나 혼자 잘살 수 있어. 더 極端的으로 가면, 너 없애고 나만 살자. 只今 이런 極端的인 競爭論理가 판치잖아요. 그런데 이 世上에 따로따로 存在하는 生命은 없습니다. 그건 우리의 觀念일 뿐이죠. 實相에 對한 無知와 錯覺입니다. 具體的으로 보죠. 太陽 없이 내 生命이 存在할 수 있는가. 낱낱의 存在는 그물코처럼 얽혀 있죠. 그물코처럼 서로 依存하고 影響과 도움을 주고받죠. 그것이 佛敎의 인드라網 世界觀입니다. 물이 곧 내 生命이고 숲이 곧 내 生命입니다. 새와 물고기가 便 갈라서 우리끼리 살겠다고 할 수 있나요? 더불어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서로의 存在價値를 認定하고 配慮하고 協力하고 나누고 살아야죠. 그걸 佛敎에서는 慈悲라 하고, 基督敎에서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는 거죠.”

    ▼ 人間의 本能的 欲望, 이를테면 食慾, 性慾, 所有慾, 名譽慾, 誇示欲 따위는 어느 程度까지 統制가 돼야 합니까. 無條件 禁慾한다고 解決될 일이 아니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生存 欲求와 利己的 欲求는 다릅니다. 우린 이걸 混同해요. 生存 欲求는 善惡으로 評價할 수 없습니다. 虎狼이는 토끼를 잡아먹고 살도록 돼 있어요. 그걸 두고 惡한 놈이라 할 수 없지요. 一種의 生命 欲求로 利己的 欲求와는 다르죠. 虎狼이가 토끼를 잡아 쌓아놓는 것 봤습니까. 生存 欲求는 生存 問題만 解決되면 끝나요. 토끼가 널려 있어도 손 안 댑니다. 그런데 利己的 欲求는 자꾸 쌓아놓는 거죠. 우리의 問題는 生存 欲求가 아니라 利己的 欲求죠. 이건 人間에게만 있는 問題라고 해도 過言이 아닙니다. 生存 欲求는 正當한 것으로 認定하고 尊重해야 하지만, 利己的 欲求는 끊임없이 管理하고 다듬고 創造的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 性慾은 뭔가요?

    “生存 欲求죠. 生命 欲求이고. 그런데 人間에게선 그것이 所有慾으로 나타나죠. 人間이 利己的 欲求로 造作하고 있어요.”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 스님도 人間이니 그런 欲望이 있겠죠?

    “當然하죠. 맨날 X質하고 싶죠. 그것이 避할 일입니까.”

    웃음을 꾹 누르며 質問을 이어갔다.

    ▼ 가장 힘든 게 뭡니까.

    “女子 생각이죠.”

    ▼ 술·담배 하는 스님도 많죠?

    “얼마든지 있죠.”

    ▼ 그런 行爲는 理解할 만한 건가요?

    “人間的으로는 理解할 수 있죠. 그렇지만 政黨하거나 괜찮다고 할 순 없죠. 어떤 殺人行爲가 理解된다고 해서 그것이 正當化될 순 없잖아요? 한두 番 失手할 순 있지만 그것이 常習化되고 慣性이 되는 건 안 되죠.”

    ▼ 스님들 中에는 俗世를 다 겪어봐야 한다며….

    “그건 自己 合理化인데 옳지 않다고 봅니다. 要石 公主와 戀愛한 元曉가 性慾의 監獄에 갇혀 살았는가. 거기에 支配받았는가. 그렇지 않다는 거죠. 술을 먹었지만 늘 술을 못 먹어 戰戰兢兢했던가. 絶對 아닙니다. (欲望에서) 자유로우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差異입니다.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性慾도 괜찮다고 봅니다.”

    ▼ 얽매이지 않는다는 거죠?

    “그렇죠. 勿論 沒廉恥해서 자유로운 것과는 달라요. 正말로 자유로운 사람은 女性과 어떤 必要나 狀況에 依해 性關係를 가졌다 하더라도 거기에 매이지도 않거니와 女性에게 傷處도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게 잘 안 되죠.”

    생명운동 기수 도법 스님의 쾌도난담

    인드라網生命共同體 職員들과 함께.

    ▼ 스님도 그런 經驗이 있습니까.

    “있죠. 술도 먹어봤고. 그렇지만 나는 그런 걸 안 하는 쪽을 選擇했기 때문에 過誤도 있고 誤謬도 있었던 걸 부끄러워하고 未安해하고 克服하려 하죠. 사람이 別 수 있겠어요? 다 그만그만하죠.”

    나는 “스님 얘기를 들으니 속이 다 시원해진다”며 그예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 性的인 欲望이 그만큼 참기 힘들다는 거죠?

    “가장 힘들죠. 生命 欲求의 하나인데. 食慾 못지않죠.”

    ▼ 스님도 거기서 完全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거죠?

    “그렇죠. 다만 끊임없이 그것에서 자유로워지도록 애쓰는 거죠. 그리고 그건 에너지예요. 이 에너지가 昇華되도록 努力해야죠. 母性愛는 子息에게만 作動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昇華되면 내 子息만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게도 나타나죠. 그걸 우린 人類의 母性愛라고 表現합니다. 觀世音菩薩의 慈悲가 그것이죠.”

    명진 스님의 勇氣

    1998年 曹溪宗은 總務院長 選擧를 둘러싸고 大規模 暴力事態에 휩싸였다. 송월주 總務院長의 3線 出馬가 葛藤의 씨앗이었다. 總務院에 反旗를 든 勢力은 淨化改革會議를 組織해 宗權을 奪取하려고 나섰다. 그 過程에 暴力輩까지 動員됐다. 當時 越州 스님이 辭退한 後 總務院長權限代行을 맡았던 이가 바로 도법 스님이다. 宗團 紛糾는 結局 淨化改革會議 側의 敗北로 끝났다.

    ▼ 曹溪宗은 그間 숱한 暴力事態를 빚어왔습니다. 暴力을 휘두르면서 부처님 뜻을 내세웠지요. 根本的으로 遂行이 안 돼서 그런 건가요?

    “遂行까지 얘기할 것도 없어요. 온갖 利己心이죠. 所有慾, 權力慾….”

    ▼ 佛敎를 이끌어가는 指導者級 스님들조차 그 模樣이니….

    “그래서 저는 韓國 佛敎가 잘못됐다고 보는 겁니다. 常識的으로도 理解되지 않는 일이 막 벌어졌잖아요. 그래도 只今은 많이 다듬어졌죠.”

    ▼ 現 政府에서는 봉은사 事態가 시끄러웠죠?

    “아슬아슬했죠. 그런데 저는 그것이 예전과 다른 모습이라고 봐요. 옛날 같으면 物理的 衝突이 빚어졌을 일이거든요. 若干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對話로 마무리 지었어요. 執行部가 빌미를 提供했죠. 좀 더 意見을 收斂하고 論議했어야 했는데, 그런 點에서 좀 거칠었죠. 명진 스님도 좀 더 세련된 方式으로 對應하면 좋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봉은사가 直營査察로 指定되는 데 外壓은 없었다는 겁니다.”

    ▼ 명진 스님은 스님인지 政治人인지 모를 程度로 言行이 거칠더군요.

    “명진 스님은 그게 修行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요.”

    ▼ 過激한 言行이요?

    “勇氣죠. 權力 앞에 卑屈하지 않고 堂堂하게 맞선다는.”

    ▼ 佛敎界가 現 政府를 많이 批判했죠?

    “宗敎 偏向이 問題가 됐지요.”

    ▼ 4大江 事業도 批判하지 않나요?

    “佛敎市民運動 次元에서 反對한 거죠. 水經 스님을 中心으로. 宗團에선 中立的 態度를 取해왔습니다.”

    ▼ 水經 스님이 同志 아니었습니까.

    “다 同志예요. 명진 스님도.”

    ▼ 只今은 가는 길이 달라진 건가요?

    “아직도 同志라 할 수 있어요. 다만 本質的인 差異點은 있지요. 水經 스님은 主로 環境 問題, 명진 스님은 民主主義와 社會正義 問題에 關心이 깊었죠. 저는 代案運動을 해왔고. 두 사람은 色깔이 분명하고 나는 灰色分子죠. 하하.”

    無知와 錯覺

    1949年 濟州에서 遺腹子(遺腹子)로 태어난 그는 17歲 때 금산사에서 出嫁했다. 특별한 契機는 없었다. 어머니가 받아온 四柱八字에 따라 決定됐을 뿐이다. 막내는 머리 깎을 八字라는. 그는 3兄弟 中 막내였다.

    “스무 살까지는 主體的인 생각을 못했어요. 시키는 대로 雰圍氣 따라 行動했을 뿐입니다. 중이 된 것도 그래요.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절에 들어가선 別 葛藤 없이 맞춰 살았다. 스무 살 때 人便을 통해 어머니가 危篤하다는 連絡이 왔다. 只今은 融通性이 있지만, 그때만 해도 중이 되면 世俗과의 因緣을 斷絶했다. 그는 어머니 消息을 갖고 온 사람을 아예 만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같이 遂行하던 중이 이를 알고 나무랐다. 아무리 中이라도 죽음을 앞둔 어머니에게 그런 行動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訓戒였다. 나이는 같지만 言行이 어른스럽고 똑똑한 中이었다.

    “그 얘길 듣는 瞬間 都大體 죽음이 뭐냐는 疑問이 들더군요. 그 問題意識이 衝擊的으로 다가왔어요. 죽음은 모든 것과의 斷絶이고 喪失이고 끝이라는 생각. 그때부터 主體的으로 나의 人生을 苦悶했습니다. 나는 왜 태어난 건가. 왜 죽는 건가. 태어나기 以前의 나는 뭔가. 죽은 다음의 나는 또 뭔가. 매우 原初的인 苦惱가 始作된 거죠. 그렇게 오늘까지 흘러온 겁니다.”

    그는 10年假量 參禪을 했다.

    ▼ 어떤 깨달음을 얻었습니까.

    “存在 理由에 對한 原初的인 問題意識을 갖고 몸부림쳤어요. 그 問題를 안 풀고는 삶의 意味를 가질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海印寺에 가 살면서 聖哲 스님도 뵙고 법정 스님도 모시게 된 거죠. 그런데 經典을 봐도 法門을 들어봐도 結論은 같더라고요. 參禪해서 깨달아야 한다는. 그래서 經典 때려치우고 善防으로 가서 參禪을 始作했죠. 그런데 해도해도 안 돼요. 冊이나 法文대로라면 잘돼야 하는데 안 되는 거예요. 대단히 失望스럽고 挫折感이 컸죠. 그런데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다른 사람도 別수 없더라고요. 先輩도 親舊도. 어른이라고 큰소리치는 分도. 말씀 들어봐도 別로 魅力的이지도 않고. 聖哲 스님에게도 그다지 끌리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그분이 훌륭하지 않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어쨌든 그러다보니 善防에 對한 懷疑가 생겼습니다. 善防 사람들이 正直하지도 성실하지도 않더라고요. 잘 안 되면 그걸 率直히 認定하고 함께 對話도 하고 討論도 하면서 새로운 길을 摸索해야 하는데, 다들 뭔가 되는 것처럼 謹嚴한 모습만 보이는 겁니다. 말 안 해도 보면 다 알잖아요. 그 風土에 挫折해 善防을 나왔죠. 나가서 내 方式대로 해보자고. 그렇게 내 마음 소리에 따라 갈之字로 왔다 갔다 하면서 여기까지 온 거죠.”

    ▼ 이런 얘기 하면 佛敎 威信 떨어뜨린다고 다른 스님들이 싫어하겠죠?

    “난 佛敎界에 지킬 威信이란 게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그런 것을 다 걷어내고 꺼내는 게 威信을 살리는 일이라 생각하죠. 그러니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죠.”

    ▼ 부처도 한때 結婚했는데 스님은 平生 사랑한 女子가 없나요?

    “난 그런 感情은 없더라고요. 血緣에 對한 程度 많지 않고요. X하고 싶고 좋은 女子 보면 자고 싶긴 하지만 戀情(戀情)을 갖고 女子를 對한 적은 없어요.”

    ▼ 聯政이라는 게 엄청나게 끊기 어렵죠?

    “그렇다고 하는데 난 없었어요. 그런 面에서 중 八字가 딱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고.”

    ▼ 타고난 體質이신가 보네요.

    “性慾 때문에 힘들고 人間的인 感情에 몸부림도 치지만 戀愛 感情 때문에 힘든 적은 없었어요.”

    마지막으로 愚問(愚問)을 던졌다. 삶과 죽음이 뭐냐고.

    “태어나면 기뻐하고 죽으면 울지요. 그것도 無知와 錯覺의 産物이죠.”

    ▼ 스님들도 高僧 돌아가시면 울던데요.

    생명운동 기수 도법 스님의 쾌도난담
    “그게 다 無知와 錯覺입니다. 태어남과 죽음은 같습니다. 태어나기 以前의 아이에게 가장 安全하고 따뜻하고 便安했던 곳은 어머니 배 속이에요. 完全한 未知의 世界입니다. 거기 왜 가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죠. 아이에게 태어남은 어머니 배 속의 모든 것과 斷絶하는 겁니다. 當然히 不安과 恐怖를 느끼죠. 斷絶되니 슬픔도 느끼고. 죽음도 마찬가지예요. 삶에서 이뤄진 모든 것과의 斷絶이고 喪失이지 않습니까. 아픔과 슬픔이고 不安과 恐怖지요. 그런데 事實 우리가 생각하는 삶과 죽음은 없는 거예요. 生命活動의 現象일 뿐이죠. 波濤 치는 바다처럼. 바람이라는 條件이 사라지면 波濤도 사라집니다. 波濤가 일면 좋은 거고 사라지면 나쁜 거라 할 수 있겠는가. 이건 그냥 바다라는 한 生命이 活動하는 現象일 뿐이죠. 生과 사는 그런 거라고요. 그걸 아픔과 슬픔으로, 不安과 恐怖로 對하는 것은 삶과 죽음의 實相에 對한 無知와 錯覺에 따른 觀念이라는 거죠. 우리는 거기에 支配를 받고 拘束을 받고 있어요. 그것에 눈뜨게 하는 게 佛敎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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