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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北 永川에서 田園生活 강신성일|新東亞

慶北 永川에서 田園生活 강신성일

七旬에도 愛人 밝히는 저 對策 없는‘주책’허나 어쩌랴, 그래서 더 귀여운 것을…

  • 이혜민│東亞日報 新東亞 記者 behappy@donga.com│

    入力 2009-01-07 14: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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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는 얼마나 할 豫定입니까?” 洋초에 불을 붙이며 往年의 대스타 강신성일(72)李 점잖게 묻는다. 疲困한지 눈밑 그늘이 짙다. 눈치껏 只今 午後 2시니 6時면 끝날 것 같다고 하자 말린 보이茶 잎을 떼내며 다시 묻는다. “그럼 어떤 主題로 얘기하고 싶습니까?” 永川 生活을 듣고 싶다고 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보이茶를 건네곤 말門을 연다. 質問 하나에 答辯 한 時間. 기둥(주제)에서 줄기를 뻗어내곤 잎을 피운다.
    • 기둥으로 돌아가자고 하면 잎 보듬느라 餘念이 없다. 저녁때가 되자 달曆을 짚으며 말한다. “미쓰 리, 시리즈로 하는 건 어때요? 내 얘기는 한 番 해서 끝낼 게 아닌데…. 어제 일을 오래해서 오늘은 더 못하겠는데, 그럼 낼 모레나 다시 내려오는 건 어때요?” 七旬 熱情이 ‘미쓰 리’ 발목을 잡는다. 인터뷰는 이튿날 밤 8時까지 繼續됐다.
    경북 영천에서 전원생활 강신성일
    집뒤 醬독臺 옆 빨랫줄. 티셔츠, 바지, 洋襪, 삼각팬티가 바람에 흔들린다. 옷마다 집게로 固定시켜놓았는데, 洋襪은 집게 하나로 한 雙씩 붙들어 맸다. 빨래 걷어 오겠다고 가서는 그 자리에서 洋襪과 팬티를 딱紙 접듯 개고 있다.

    신성일 보러 온 사람 네댓이 빨랫줄 한 字 뒤 울타리 너머에 鼠銑 쑥덕댄다.

    “어머, 天下의 신성일이 빨래를 다 개네, 많이 해본 솜씬데.”

    “그러게, 밥은 혼자 어찌 해먹나 몰라. 女子가 같이 사는 거 아냐?”

    담 代身 무릎 높이 대나무울타리를 쳐놓은 탓일까. 속닥이는 말이 그에게도 들린다.



    往年의 스타가 자못 퉁명스럽게 말한다.

    “觀覽하는 데도 時間 넘으면 門 닫아요,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이만들 가세요.”

    코끼리 보듯 강신성일 보던 사람들이 툴툴대며 발길을 돌린다.

    “뭐야, 放送에선 언제든 오라고 해놓고, 오니까 茶도 한盞 안 주고. 지가 뭐 대수야?”

    강신성일은 眉間을 찌푸린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여기 오는 사람마다 男子가 밥을 어떻게 해먹고 사는지 궁금해들 하는데, 왜 못해요, 왜. 아궁이에 불 땔 때야 男子가 부엌일하면 體面이 아닐 수도 있지만 只今은 얼마나 便해. 封止 카레 封止 미역국 等 데워 먹는 것도 많고. 요즘엔 쌀에 돌도 없어. 世上 바뀌면 適應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난 飮食은 안 가려도 사람은 가려. 每日같이 오는 사람들 보면 火가 나. 왔으면 人事나 하지, 얘기하는 것 들었지요? 내가 듣는 거 뻔히 알면서 신성일, 신성일 막 부르고. 난 無識이 가장 큰 罪라고 봐요….”

    사람들이 配慮心이 不足하다 熱을 내다 난데없이 베드신 얘기를 꺼낸다.

    “난 베드신 찍을 때마다 바지 안에 水泳服 입고 갔어. 相對 俳優에게 ‘그냥 水泳服 입었다 생각하고 便安하게 延期하라’ 한 거지요. 그렇게 相對 俳優를 配慮해서 그랬는지 映畫 찍을 機會가 많이 왔어요. 요즘은 우리 때하고 달리 全羅(全裸)로 한다는데 부럽긴 부럽지.(웃음)

    93.1 MHz

    配慮가 重要한 건 映畫 찍다 알게 됐지요. 撮影하는데 相對方 생각 안 해주면 힘들어지거든.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걸 몰라. 일 보는 사람 뒤에 바짝 붙어선 지퍼 열고 있질 않나, 食堂에서 시끄럽게 소리 지르질 않나…. 于先 交通秩序부터 잘 지켜 버릇해야 해요. 그거 잘 지키면 다른 法 지키는 건 問題도 아니야. 法 잘 지키는 사람들이 配慮 안 하고 살겠어요?”

    映畫는 現實보다 아름답다. 背景音樂이 있어서다. 그의 現在가 映畫처럼 빛나는 것도 그 背景音樂 德分이다.

    경북 영천에서 전원생활 강신성일

    빨래 걷고 있는 모습이 便安해 보인다.

    “나는 音樂이 좋아요. 映畫 ‘out of africa’主題曲인 모차르트 클라리넷 協奏曲 같은. 그래서 좋은 音樂 나오는 FM 93.1(MHz)을 늘 크게 틀어놓지요. 廣告도 없으니 얼마나 좋아요. 이웃들이 처음엔 시끄럽다고 소리 줄여달라 하더니, 이제는 도리어 더 크게 틀어달라고 해요. 들어보니 좋다는 걸 느낀 거죠. 어때, 音樂 들으니 좋죠? 새벽에 撤收(강아지) 데리고 散策할 때는 소리를 더 높여요. 이런 게 다 사는 재미잖소.”

    音樂 얘기를 하니 싱글벙글 웃는다. 元祖 꽃美男이란 말이 無色하지 않다.

    ‘星一家 ’라고 씌어 있는 사람만한 바위가 入口에 놓인 집은 이렇게 생겼다. 집이 鄭 中央에 있다면 집 바로 아래엔 작은 蓮못이 있다. 집 왼便 잔디밭 園頭幕 옆에는 苗木이 자라고 있고, 개울 흐르는 돌다리를 건너 오른便으로 가면 黃金붕어가 사는 큰 蓮못이 보인다. 눈을 더 오른쪽으로 돌리면 圓을 그리며 걷는 말 두 匹이 보인다. 豐山개 세 마리도 보인다. 順한 두 마리는 볕 쬐며 낮잠 자고 있고, 집 기둥에 묶인 개는 애달프게 主人만 바라본다.

    더 그림 같은 건 韓屋이다. 그가 자랑, 자랑, 자랑하는 韓屋이다.

    “李 집 참 곱지 않아요? 端雅한 女人네 같아. 다른 데 가 봐도 이렇게 좋은 집이 없어. 앞에는 江이 있고 뒤에는 山이 있고. 나무도 좋잖우. 이 집 지을 때 쓴 나무가 五臺山 金剛松이에요. 翁이 있는 것 보이지요? 風水命理學 하는 사람이 보고는 그러대요. 實로 貴한 소나무가 氣를 쏟아주고 있다고.”

    直四角形으로 생긴 韓屋 左右에는 各各 안房과 손님房이 있다. 안房 뒤에는 부엌이, 손님房 뒤에는 손님用 化粧室이 있다. 부엌은 혼자 使用하기에 딱 알맞아 보인다. 외진 데 살아 寂寂하겠다 물으니 興奮을 가라앉히며 말한다. 그래도 씩씩대는 소리가 난다.

    “난 너무너무 바빠. 個, 말 밥 주고 똥 치우면 時間이 후딱 지나가요. 定員은 아직 完成되지 않아 손이 많이 가거든. 바위도 나르고 해야 하니 일이 많죠. 게다가 난 여기 周邊 쓰레기도 다 줍거든. 아무도 안 치우니 누가 하겠어요 내가 하지. 韓屋에서 살아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韓屋, 그게 참 손이 많이 가요. 하루라도 안 치우면 무당벌레들이 막 나오거든.”

    그는 對話 途中 불쑥불쑥 나갔다 들어왔다. 쉬러 가는가 싶었는데 말똥 치러, 개 뼈다귀湯 駐러, 빨래 개러, 電話 받으러, 그렇게도 바쁘게 돌아다녔다.

    트위스트 金의 純情

    “애들(강아지들)李 참 順해. 저거 봐, 撤收하고 白頭가 싸우면 딤프가 白頭 보고 막 뭐라고 짖잖아, 싸우지 말라고. 自己네끼린 오누이라 통하거든. 白頭랑 撤收 콧등 봐요. 싸움 많이 하는 놈들이라 콧등이 성할 날이 없어. 허허”

    경북 영천에서 전원생활 강신성일
    主人이 自己 얘기 하는 걸 아는지 딤프가 와선 主人 어깨에 얼굴을 비빈다. 그러곤 베자루를 들여다보곤 입맛을 다시려던 찰라, 굵은 바리톤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손으로 個 등짝을 철썩 때리며) 이 눔아! 먹지 마! 이 눔, 저리 가! ”

    그는 周邊에 사람이 많다. 이렇게 田園에서 한가로이 살 수 있는 것도 그 德分이다.

    “집은 내 힘으로, 아니, 내 親舊들 힘으로 지었지. 監獄에서 갓 나온 내가 돈이 어디 있겠어요. 追徵金도 親舊들이 다 내줬는데. 親舊들이 後援金 내줘서 이 땅도 살 수 있었지. 그래서 이 집이 더 고맙죠,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게. 저 園頭幕도 누가 와선 뚝딱 지어줬고, 개하고 말도 누가 다 줬어요. 白頭는 김정일 委員長이 故(故) 정주영 會長에게 준 걸 정몽준 會長이 새끼 받아 다시 그 새끼를 내게 준 거고. 흙 모자라 苦悶이었는데 마침 집 앞 工場에서 흙 處分을 苦悶하고 있기에 싸게 解決 봤어요.

    한 10餘 年 前부터 나하고 엄앵란이 하고는 주머니 干涉 안 하고 살아. 絶對 서로 被害 안 주기로 했거든요. 내가 政治를 해서 그런지 엄앵란은 ‘中國 때年(되년)’이야. 이 집 지을 때도 10원 한 張 안 보태더라고. 내가 장난으로 그럽니다, 돈 3億 가져오면 大門 열어주겠다고.”

    그를 13年間 補佐해온‘비서실장’도 그들 가운데 하나다. ‘라디오스타’에서 박중훈을 떠받드는 安聖基보다 한 手 위다. 말이 끝날 때마다 “네, 議員님, 네 議員님” 하며 깍듯하게 對한다. 出所를 默默히 기다렸던 그는 요즘에는 新聞 챙기기, 飼料調達, 飮食配達, 淸掃 같은 살림을 도울 뿐 아니라 大邱國際뮤직페스티벌(DIMF) 祕書室長 業務도 한다. 그에게서 언뜻 신성일을 닮고 싶어하던 트위스트 金의 純情(映畫 ‘맨발의 靑春’)이 보인다.

    “監獄에 있을 때 윤정희 백건우 夫婦가 와선 ‘베토벤의 삶과 音樂世界’란 冊을 주더라고요. 베토벤의 삶을 보면 견디는 데 도움이 될까 싶다면서 읽다 보니 베토벤 멋지데요. 그래서 一旦 머리 스타일부터 닮자 싶어, 驚訝(딸)한테 嚴 女史 자주 가는 二村洞 美容室 豫約해두라 했어요. 出所한 날 그렇게 가서 파마한 거고.

    事實 東洋 사람한테는 生머리가 안 어울려요. 生머리는 막 갈라져. 뒷머리 숱이 없어서 뒷모습도 영 안 살고. 그런데 파마는 머리만 감으면 바로 스타일이 사니 얼마나 좋아요. 난 女子도 굵게 웨이브 넣은 게 좋아 보여. 政治 할 때는 젊어 보이라고 나흘에 한 番씩 染色했는데, 요즘은 얼마나 자유롭고 便한지 몰라. 흰머리가 얼마나 멋져.”

    白髮의 파마머리, 大邱國際뮤직페스티벌 理事長이라는 요즘 職銜에 잘 어울리는 外樣이다.

    “뭘 해서든 너는 넘어설 거야”

    신성일은 데뷔作 ‘로맨스빠빠’에서 막내아들 바른이로 나와 “내게 돈과 時間과 自由를 달라”고 외쳤다. 말이 씨가 됐는지 바람은 現實이 됐다. “映畫에서 그 臺詞를 몇 番이나 하시더니 結局 所願 이루셨네요” 하자, 剛한 눈매가 瞬息間에 초콜릿처럼 부드러워진다. 마음을 武裝 解除시키는 微笑다. 時間은 映畫 데뷔 時節로 거슬러 올라갔다.

    “난 그저 熱心히 工夫하는 模範生이었어요.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믿질 않는데, 수창초등학교 다닐 때는 甲乙病(수優美) 中 匣만 받았어요. 어머니가 그 德에 字母會長도 하셨고. 그러니 名門인 경북중, 경북고를 수월하게 다녔지. 딱紙 치고 구슬치기 같은 건 關心 없었어요. 學校에 남아서 工夫하다 가는 게 좋았지. 그때도 自尊心이 엄청 세서 아무리 추워도 外할머니가 기워주신 洋襪을 아예 벗고 다녔어요. 猖披한 것보단 추운 게 나았거든. 工夫도 그랬어요, 自尊心 때문이었단 말이지.”

    그랬던 그가 變했다. 어머니의 家出이 新聞1面에 報道된 뒤부터다. 얼마 前 繼走가 逃亡 가 世間의 話題가 됐던 江南 富裕層들의 契모임 多福會처럼 큰 ‘算筒’(桂)의 契主였던 어머니는 資金이 돌지 않자 홀로 夜半逃走했다.

    경북 영천에서 전원생활 강신성일

    永川에서 近似한 韓屋 짓고 즐거이 산다.

    “사람들이 와서 節 길에서 질질 끌고 다녔어요. 엄마 있는 데 말하라고. 난 正말 몰랐어요, 서울에 있다는 所聞만 들었지. 兄 둘은 나가 살고 있을 때라 女同生과 저만 解決하면 됐죠. 그런데 方法이 마땅칠 않아 姨母네서 얹혀살았는데 어찌나 눈치가 보이던지.

    불현듯 어머니가 契돈 代身 받아 運營하던 藥局하고 冊房이 생각나데요. 사람들이 이거 있는 줄은 모르니 돈 되는 것만 處分하면 먹고살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비싼 冊들 챙겨서는 洞네에서 病院 하시는 醫師 先生님한테 사주십사 付託드렸어요. 欣快히 도와주시는데, 어찌나 고마운지. 그걸로 어렵게 1學期를 버틴 거라….”

    登錄金 걱정하다 工夫에 손을 놓게 됐으면서도 서울대 相對를 가겠다는 꿈은 놓지 않았다. 當時에 뚜렷한 꿈은 없었다. 法大 가면 判事, 建築과 가면 建築도, 醫大 가면 整形外科 醫師를 하는 게 좋겠다 싶었다. 그땐 돈 벌고 싶은 마음에 거푸 2年間 서울대 相對에 願書를 냈다. 結果는 不合格. 그는 空軍少尉人 兄의 水原 官舍와 서울을 오가며 살길을 찾는다. 그때의 그는, 룸펜처럼 이렇게 되뇌지 않았을까.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 分明히 알고 있는 게 있어, 난 바보다, 바보.”(映畫 ‘休日’ 中에서)

    “3個月 程度 鍾路에서 胡떡장사를 했는데, 잘 안돼 바로 접었어요. 그러곤 먹고살 窮理하며 서울 여기저기를 어슬렁댔죠. 돈 없어 못 가는 財數學院 周邊도 기웃대고. 그러다 忠武路1街에서 偶然히 高等學校 同窓 손示向을 만났어요. 이 親舊가 ‘검은 掌匣 낀 손’이란 노래로 幕 스타가 된 때였는데, 내 등을 툭툭 치고 지나가데요. 正말 氣分 나빴지요. 別일 아닐 수도 있는데 萎縮됐던 때라 그런지 傲氣가 납디다. ‘넌 노래 잘해서 歌手 됐지? 난 사람들에게 얼굴 잘났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으니 뭘 해서든 너 以上으로는 돼볼 테니 두고 봐라.’다짐하고 고개를 드는데 마침 韓國俳優專門學院 看板이 보입디다.”

    俳優 學院費는 再修學院費보다 쌌다. 이 길밖에 없다 싶어 그랬는지 예전처럼 熱心히 工夫했다. 只今 생각해도 대단한 김기영, 이진순, 양광남 같은 巨匠들에게 “配役을 맡으면 그 人物에 徹底히 同化돼라”는 스타니슬라프스키 俳優修業을 받았고, 팬터마임을 익혔다.

    그때 배운 사람 觀察하는 態度는 只今도 간직하고 있다. 구부리고 가는 사람의 마음은 어떨지, 저 옷을 입은 사람의 職業은 뭘지 늘 觀察하던 것이 어느새 習慣이 되고 演技하는 滋養分이 됐다. 學院에 다니는 동안 엑스트라 자리가 여럿 들어왔지만 生涯 첫 데뷔를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았다.

    “언젠가 뭘 하긴 할 거야. 해내긴 할 거야.” (映畫 ‘5仁義乾達’ 中에서)

    新 星 一

    新필름에서 첫 俳優生活을 始作한 건 크나큰 幸運이었다. 願書도 내지 않고, 新필름 新人俳優를 뽑는 國際放送局 周邊을 어슬렁대다 拔擢된 것이다.

    “率直히 凡常치는 않은 人物이지. 野望에 불타는 눈이고.”

    스스로도 認定하나 보다. 하긴 지나치게 謙遜하면 非好感이다. 新필름 代表 신상옥 監督이 “너, 나하고 5年 苦生해볼래? 그럼 來日 아침부터 나와” 한마디 하자, 다음날 事務室 사람들이 모여 이름 짓기에 汨沒했다. 새로울 新(新), 별 性(星), 한 일(一). 새로운 별 하나. 그날부터 강신영은 신성일이 됐다.

    별다른 役割이 없던 그는 電話 받는 일을 自處한다. 當時 映畫社에는 내로라는 記者, 評論家, 시나리오 作家가 건 電話도 시큰둥하게 받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달랐다. 한 通을 받아도 깍듯하게 받았다.

    “한마디로 애살이 많았지. 그래서 그랬는지 ‘로맨스 빠빠’로 데뷔했을 때 記者들이 好評해줬어요. 出演陣 中 第一 막내인 나를 도리어 比重 있게 다뤄줬습니다. 電話 案內한 德을 좀 봤지요.(웃음)”

    新필름을 그만두는 건 冒險이었다. 初짜가 課長級 月給인 5萬원을 받기란 쉽지 않은 때였다. 月給을 제대로 주는 건 新필름이 唯一했을 때다. 그러나 그그에게 어울릴 만한 靑春物이 없었다. 映畫를 못 찍으니 渴症이 났다.

    “그때 안 나왔더라면 二智고잉(easygoing)韓 놈이 됐을 거예요. 多幸히 나오자마자 다른 會社가 같은 金額으로 月給을 맞춰 주데요. 얼마 지나지 않아 演技 잘한다면서 곱절을 주기도 하고. 그때 演技 잘하려고 出演 豫定이 잡힌 드라마하고 비슷한 ‘굿바이 어게인’을 얼마나 봤는지 몰라. 앤터니 파킨스하고 잉그리드 버그만 나오는 거였는데.”

    그렇게 하나둘 靑春物을 찍자 人氣가 올라갔다. 映畫 ‘맨발의 靑春’李 頂點이었다. 어딜 가나 사람들이 몰렸다. 엄앵란과 約婚을 發表한 뒤에는 호텔에 머물 수가 없을 程度였다. 팬레터도 많이 왔지만 關心이 없어 제대로 읽지도 않았단다. 예쁜 俳優를 보는 것만으로도 時間이 모자랐다는 것이다. 勿論 팬레터에 답장한 적도 없다. 美國에 머물던 愛人에게 安否를 傳할 때만 便紙를 썼다. 그래도 또렷이 기억나는 건 ‘신성일 아이’를 업고 왔다는 女人과 ‘한番 털자(한번 싸움 붙자)’고 이리에서부터 올라온 靑年이다.

    “女人은 嚴 女史한테 된통 혼나서 갔고, 靑年은 나를 兄님으로 모시겠다고 하곤 갔어요. (웃음) 내가 가장 感動的으로 記憶하고 있는 팬은 고은아氏예요. 나랑 映畫 찍으며 그러대요. 學窓時節에 冊 보다 先生님들한테 많이 혼났다고. 왜냐 물으니 그 안에 제 寫眞을 두곤 그렇게 아껴 보고 그랬대요. 아마 그 程度가 우리 時節의 가장 애틋한 愛情表現日 것 같은데….”

    ‘무비 스타’

    映畫는 신나는 놀이였다. 撮影場에 愛人을 데리고 가면 더 재미있었다. 愛人을 女俳優의 親舊라고 하곤 앉혀놓고 그랬다.

    “난 映畫가 좋았어요. 난 스티븐 스필버그 監督 말에 同意해요. 映畫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재미예요. 재미있는 映畫를 재미있게 찍던 時節이니 幸福했지. 재미있게 찍으려면 일에 熱中해야 해요. 俳優는 自己自身에게 熱中해야 하는데, 무엇보다 스타일에 神經 써야 해요. 난 ‘맨발醫靑春’ 찍을 때도 검은 점퍼 입은 트위스트 金하고 對比돼야 한다 싶어 흰色 가죽점퍼를 입었어요. 그거 찾느라 이태원市場을 얼마나 뒤졌는지 몰라. 勿論 映畫 開封된 後에 그 옷이 엄청 히트 했지.”

    結婚하고부터는 美軍部隊에서 物件 빼오는 아줌마 物件을 고르곤 했다. 이것도 모자라면 美國 쇼핑몰 冊子 600쪽을 샅샅이 뒤져 注文해 郵便으로 받았다. 化粧도 잊지 않았다. 俳優를 가리키는 數많은 單語가 있지만,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무비스타’다. 그는, 그러니까 무비스타라는 말에 걸맞은 스타일로 살고 싶었다.

    “映畫가 뜨는 건 스타 때문이잖아요. 난 엄앵란 신성일이 무비스타의 始初라고 보는데, 그래서인지 무비스타로 불리는 게 좋아요.”

    映畫俳優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觀察力으로 먹고사는 건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機 때문이다. 人氣를 얻는다는 것 程度가 特異하달까. 다만 멜로映畫의 定石이 勸善懲惡이다 보니 그 亦是 ‘정의롭고 率直하게 살아야 한다’는 雰圍氣가 몸에 뱄다. 映畫에서처럼 삶에서도 사랑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았다. 그렇게 그의 人生이 채워졌다. 갑자기 그에게 俳優란 무엇인지가 궁금해졌다.

    “내게 俳優란 하늘에서 준 機會였어요. 韓國에서 가장 主人公을 많이 한 배우고, 數十萬 觀客도 動員하고. 그렇지만 누구나 人生에 屈曲은 있지 않겠어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고, 責任을 미룰 수도 없으니 누구를 탓해. 힘들어도 내 자리 지키는 게 最善이라 봐요.”

    後輩들의 尊敬을 받지 않느냐고 물으니 “그런 後輩 본 적 없다”고 答한다. 참, 率直한 男子다. ‘무비스타’라는 存在感에 對한 愛情. 그건 어쩌면 改名(改名)까지 하며 國會議員이 됐지만 2年間의 監獄 生活을 거치면서 생각이 바뀐 탓도 있을 것이다.

    “난 政治가 싫어요. 72年 人生에서 4年 政治 한 사람을 政治人이라 부를 수 있나? 나는 文化藝術人으로서 政治 물에 暫時 들어갔다 왔을 뿐이에요. 그런데 (政治)해 보고나니 藝術 하길 잘했다 싶어. 藝術家는 사람에게 기쁨을 줘서 그런지 많은 사랑을 받는데, 政治人들 中에는 사랑받는 사람이 別로 없잖우. 政治는 속여야 하지만 藝術은 眞實해야 成功하지.”

    경북 영천에서 전원생활 강신성일

    그에게 말 두 弼은 더없이 所重한 親舊다.

    1.31坪짜리 獨房

    政治는 그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갔다. “政治는 矯導所 담牆을 넘나드는 거라더니, 正말 아찔한 瞬間이 있더라”고 한다. 自身에게 주어졌던 굴레를 그는 如前히 認定하지 못하는 듯했다.

    “面會 온 사람들 보기 좋으라고 가까스로 火를 눌렀지, 왜 치밀어 오르는 게 없겠어요. 내가 무슨 罪를 졌나 싶기만 하고. 난 分明 政治後援金을 받았는데 저쪽에선 賂物로 본 거잖아. 다 解釋上의 差異야. 난 分明 基金 만들려고 領收證 써가면서 받은 돈인데, 그걸 갖고 5年刑을 때리니 火가 안 나나. 그래도 2年만 살고 나온 걸 보면 어느 程度 理解해준 게 아닌가 싶어.

    矯導所를 옮길 때마다 收監者들에게 앙케트 調査를 해요. ‘檢査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 있나, 判事를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든 적 있나’, 그런 걸 물어. 監獄에서 그 생각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矯導官이 하도 事情事情하니까 다들 아니라고 체크하는 거지. 그래도 난 그 칸 보곤 그냥 비워뒀어요,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래도 짧지 않은 收監生活은 그에게 相當한 마음의 餘裕를 許諾한 模樣이다. 休息이랄 수는 없는 時間이지만 冊도 많이 읽었단다. 스타일 빼면 屍體인 往年의 大俳優는 矯導所 안에서도 運動에 힘을 쏟았다고. 그래서 50代 初盤 程度로밖에 안 보였다고 자랑을 이어나간다.

    “주먹들도 나한테 와서는 ‘尊敬합니다 兄님’ 그럽디다. 난 뭐 오는 사람은 恒時 拒否하지 않으니까. 性格이 워낙 肯定的이라 어딜 가나 最高로 適應 잘해요. 獨房은 내가 自處해서 간 거였거든, 矯導所長이 必要한 게 뭐냐고 묻기에 ‘女子’라고 答해줬지. 껄껄 웃으면서 그건 안 된대.

    암만 그래도 1.31坪짜리 獨房에 혼자 앉아 있으면 當然히 고생스럽지. 그 추운데서 자면 뼛속까지 시렵더라고요. 그래도 마음 다스릴 수 있었던 건 아침마다 ‘般若心經’을 읽은 덕이지 싶어요. 그러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火도 누그러지고. 그렇게 便하게 마음먹으니 사람들이 ‘罪囚服을 입어도 멋지다’고 하더라고.”

    “나, 한나라당에서는 進步였어요”

    돌이켜보면, 그의 記憶 속에서 政治와의 첫 因緣은 1970年으로 거슬러 오른다. 平素 映畫界와 親分이 두터웠던 김상현 前 議員이 DJ와 함께 신성일 엄앵란 夫婦를 찾아와 政治를 하자고 說得했다. 全盛期가 끝나가던 映畫市場에서 脫出할 方法을 꿈꾸던 그는 선뜻 應했지만, 아내는 생각이 달랐다. 아내는 親分있는 軍 高位人士에게 付託해 그를 怯주게 했다.

    “政治 하면 空軍에 있던 兄님, 事業하는 兄님, 다 다칠 수 있다는 거요. 家族들한테 해가 갈 수 있다는데 덜컥 怯이 났지. 그때 政治 했으면 아마도 얼마 못 가 監獄에 갔을 거예요. 10月 遺臣이 그 直後였으니까. 김상현 前 議員이 ‘그럼 記者會見 때 花環이나 보내달라’고 請하기에 보내줬더니, DJ가 美國 워싱턴을 돌며 募金活動 하러 갔을 때 葉書를 보냈습디다, ‘新 同志 花環 고마웠소. 다시 만날 때까지 健康하시오’ 라고요.”

    數十 年 時間이 지나 國會議員이 된 것은, 앞서도 얘기했지만 ‘文化界 人士’ 資格으로서였다. 그런데 막상 政治를 해보니 國會議員은 簡單한 자리가 아니었다. 恒常 손님이 들끓었고, 電話가 끊이지 않고, 現場에 내려가는 것은 想像하기도 어려울 程度로 바빴다. 그렇게 全혀 다른 環境에서 헉헉대며 4年을 보낸 뒤, 그는 2004年 選擧에서 公薦을 받지 못했다.

    “사람들이 ‘한나라당은 老人堂’이라고 한다고 해서 60歲 以上은 公薦에서 排除한다는 가이드라인이 있었어요. 只今 생각해도 理解가 안 돼요. 내가 그때 67歲였거든. 物理的인 나이가 무슨 相關이야. 그 무렵 강재섭 代表는 나만 보면 避해다녔어요.

    나는 한나라당에서는 進步的인 便이었어요. 徹底하게 保守的인 사람들만 모인 韓國禮銃 같은 데는 그前부터도 行事에 잘 안 나갔어요. 禮銃이 뭐예요, 예전 공화당 時節에 政治 行事場에 사람들 動員할 必要가 있을 때나 모이던 사람들 아니요? 그래서 민예총이 만들어진 거고.나도 禮銃이 더 있을 必要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난 大邱 國會議員으로 大邱유니버시아드大會 ‘運營基金 造成法’ 만들고 그랬어요. 當時 大邱는 負債만 3兆였거든. 그때 그法案 안 만들었으면 大會 못 치렀어. 그만하면 잘한 거 아니요?”

    뒤늦은 이야기지만, 收監生活을 하는 동안 그는 熱局地와 三國志,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電氣를 읽었다. 그리고 政治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過程에서 犧牲됐는지, 위에서 던진 돌 하나에 얼마나 많은 이가 다치는지도 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地域區를 管理하는 것과 公薦을 維持하는 것은 別個라는 韓國 政治에 對해서도 다시 생각했고, 찍을 사람이 없으면 無效票를 찍어야 할 텐데 政黨만 보고 無條件 圖章을 내미는 現實에 對해서도 다시 생각했다.

    그리고 갑자기, 그 모든 생각이 부질없다 느껴졌다. 그렇게 그는 멀고 먼 길을 돌았다. “鄭순이는 宜當 내게로 돌아와야지. 내가 그리워한 만큼 정순이度 나를 그리워했던 거야”를 되뇌던 ‘三日天下’ 主人公처럼.

    경북 영천에서 전원생활 강신성일

    熱情的으로 인터뷰에 應해준 무비스타.

    愛人은 아내와 달라

    映畫에 다시 挑戰할 생각은 없느냐 묻자 斷乎하게 ‘아니’라고 말한다.영화 접은 지 오래됐다는 것이다.

    “바라기는 하지만 자리가 없어요. 希望事項만으로 다시 映畫를 한다면 蠻勇이에요. 난 至毒한 實利主義者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요즘 映畫界에 對한 評을 한마디 請했다. 一抹의 苦心도 없이 줄줄이 쏟아져 나온다. 높은 개런티를 要求하는 俳優, 필름 浪費하는 監督, 俳優 保護하지 않는 製作社가 도마에 오른다. 그래도 後輩들 얘기할 땐 表情이 한결 便하다.

    “전지현도 괜찮고, 이미숙은 濃艶한 演技를 잘하지. 문소리는 成長過程을 눈여겨봐야 하고. 全度姸度 좋고. 설경구度 正말 괜찮은 俳優라고 봐요. 俳優인 척 않는, 眞짜 俳優인 사람이 많아져야 해요. ‘尺’ 하는 사람들은 오래 못 버티거든.”

    그는 워낙 女俳優를 좋아하는 듯했다. 正確히 말하면 女子를 좋아하는 듯했다. “아내는 愛人하고 캐릭터가 完全히 달라. 어떻게 다른지는 說明할 수 없는데 달라”하고 말을 또 이어나간다. “아내는 푸근하고 愛人은 섹시한가” 물으니 반가운 웃음을 지으며 正確한 말이라 答한다.

    “愛人은 濃艶한 빨간 薔薇 같아요. 女人은 40代 初盤부터 50代 初盤까지가 가장 아름답잖아요. 꽃잎도 女子의 S라인처럼 肉感的이고. 꽃봉오리도 그렇고. 그 香氣 하며. 난 肉感的인 女子가 좋아요. 監獄 獨房에 있을 때도 샤라포바, 이신바예바 寫眞 붙여놓고 土曜日마다 야릇한 想像에 빠지곤 했지. 그동안 살아오면서 愛人이 대여섯 名 있었는데, 다 S라인이요. 그것도 아주 完璧한 S라인. 섹스파트너로서의 愛人은 健康하게 살기 위해서도 꼭 必要한 存在라 봐요. 그래서 난 홀로 있는 이 밤이 좋아요. 愛人한테 마음껏 電話할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주책이라 말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老俳優, 慇懃히 귀엽다. 그렇지 않은가. 나이가 들어도 이만큼 귀여울 수 있는 건 分明 祝福이라는 생각이 든다.

    “난 나이 든 게 좋아요. 박완서 先生도 그러셨다는데, 나이 먹은 게 資産이라고. 靑春을 잘 지냈기 때문에 老年도 이만큼 살 수 있는 거겠지. 젊을 때 잘난 체를 해도 좋지. 크게 覺醒하고 人間 되면 되니까. 젊어서 점잖으면 안 돼요. 젊은이가 ‘젊지 않다’는 건 잘못된 거니까. 그러니 그때 熱心히 살면 老年도 즐거울 겁니다. 난 스스로도 내가 잘살았다 싶어요. 그러니 앞으로도 난 幸福할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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