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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與政府 安保政策의 ‘보이지 않는 손’ 황병무 敎授 인터뷰|新東亞

參與政府 安保政策의 ‘보이지 않는 손’ 황병무 敎授 인터뷰

“이상희 長官은 國防部 文民化 逆走行하고 있다”

  • 이정훈 東亞日報 出版局 專門記者 hoon@donga.com

    入力 2008-07-09 18: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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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核 實驗 後 조용히 軍 首腦部 交替한 參與政府
    • 北核 實驗은 參與政府 禮訪外交의 大失敗
    • 北韓 急變時 美軍 北韓 進入은 絶對 막아야
    • 作戒 5029 作成 둘러싼 韓美 葛藤 內幕
    • 中國도 北韓 急變事態視 軍事力 投入 어렵다
    • 北韓 急變時 特戰司 投入→찰리選 部隊 投入
    • 合參, 行政司令部에서 電球(戰區)司令部로 轉換
    • 安保政策을 對北政策 밑에 놓은 것은 盧 政府 잘못
    참여정부 안보정책의 ‘보이지 않는 손’ 황병무 교수 인터뷰

    ● 1939年 全北 高敞 出生<br>● 서울대 外交學科 卒業, 美國 UC 리버사이드 博士(政治學)<br>● 陸士 敎官, 國防大 敎授, 韓國國際政治學會長 歷任<br>● 著書 : ‘新 中國軍事론’ ‘韓國 安保의 領域, 爭點, 政策’ 等

    ‘左派 大統領’이라는 소리를 들은 盧武鉉 大統領이 이끈 ‘參與政府’ 5年은 安保 問題로 내내 시끄러웠다. 展示作戰統制權(戰作權) 還收와 韓美聯合司 解體 推進, 北核 實驗과 2次 南北頂上會談, 大規模 減軍(減軍)을 前提로 한 軍 構造調整 着手 等等 굵직한 일들이 推進됐고 그때마다 많은 論難이 일었다.

    參與政府 時節 많은 사람이 外交·國防·統一部 長官 자리를 거쳐 갔다. 이들은 重要한 일을 했지만 參與政府 全體의 安保戰略을 꿰는 일은 하지 못했다. 이러한 點에서 注目할 사람이 황병무(黃炳茂·69) 國防大 名譽敎授다. 黃 敎授는 參與政府 中期인 2005年 4月부터 大統領 直屬 國防發展諮問委員會 委員長을 맡아 盧 政府의 國防政策을 調律했다.

    盧 大統領, 國防改革 强力히 要求

    中國軍 專門家이기도 한 黃 敎授는 한 손에 쥐기 힘든 參與政府 安保政策의 흐름을 說明하고자 했다. 參與政府의 安保政策은 北韓 核實驗을 許容했다는 點에서 成功的이었다고 보기 힘들다. 많은 論難을 일으켰던 參與政府의 安保政策을 點檢하고, 그 敎訓을 얻기 위해 그와 論爭的인 인터뷰를 가졌다.

    ▼ 盧武鉉 大統領이 當選되자 어떤 人物을 國防長官에 임명할지 關心이 쏠렸습니다. 盧 大統領은 在任 5年 동안 내내 左派 大統領으로 몰렸는데, 그는 어떤 基準으로 初代 國防長官을 뽑으려고 했습니까.



    “첫째, 軍을 改革하려는 마인드가 있어야 한다. 둘째, 韓美關係를 重視한다. 셋째, 群心(軍心)을 確保해야 한다. 넷째, 國防運營의 效率性을 높이는 方案을 갖고 있어야 한다였습니다. 當選者 時節 盧 大統領은 다른 部處 長官은 e메일로 薦擧를 받았으나 國防長官만큼은 專門性을 갖춰야 한다고 보고 推薦人團을 構成해 推薦하게 했습니다. 네 가지 條件 가운데 特히 重視한 것이 改革 마인드였습니다.

    이런 過程을 거쳐 任命된 人物이 조영길 長官이었습니다. 曺 長官은 1年 남짓 在職하고 2004年 7月, 大統領國防補佐官을 하던 海軍 中將 出身의 윤광웅氏에게 바통을 넘겼습니다. 그런데 2005年 5月 尹 長官은 盧 大統領에게 國防中期計劃을 報告하는 자리에서 戰作權 轉換 等은 擧論했으나 國防改革에 關해서는 言及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盧 大統領은 갑자기 ‘不過 4萬餘 名을 줄이는 것이 國防改革의 核心이냐?’라며 叱責性 發言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2005年 9月 國防部가 軍 構造 改革을 骨子로 한 國防改革 草案을 만들어 報告했습니다. 盧 大統領의 國防館(觀)은 한마디로 國防改革을 하겠다는 것으로 集約할 수 있습니다.”

    ▼ 國防補佐官을 하던 윤광웅氏를 國防長官에 앉힌 것 自體가 ‘노무현式 國防改革을 하겠다’는 意志의 表明이었죠. 尹 長官 任命을 契機로 靑瓦臺의 國防擔當體制가 바뀌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尹 長官을 임명할 때 靑瓦臺에서는 文民 國防長官 任命을 深度 있게 論議했습니다. 尹氏가 國防長官이 된 後 國防補佐官은 公席으로 있다가 廢止되고, 2005年 4月初 저를 委員長으로 한 16名의 大統領 直屬 國防發展諮問委員會가 만들어졌습니다. 諮問위는 大統領을 自問하고, 國防部가 만드는 改革案을 檢證하고 國民的 合意를 導出하는 方案을 摸索하는 것이 主任務였습니다. 委員 가운데 現役 軍人은 없었고 豫備役 軍人은 7名(陸軍 出身 3名, 海軍·海兵隊 出身 2名, 空軍 出身 2名)이 있었습니다.

    盧 大統領은 委員會에 ‘國防改革은 君만 하는 게 아니라, 政府가 하는 國政課題다. 이 改革은 3軍 合意를 이뤄 國會를 包含한 國民 同意를 받아가며 해야 하는 課題다. 3個 政府에 걸쳐 推進할 長期計劃이니, 2020年을 目標 達成 年度로 定해놓고 法制化하라’는 指針을 줬습니다.”

    國防部 文民化, MB 政府에서 더 後退

    참여정부 안보정책의 ‘보이지 않는 손’ 황병무 교수 인터뷰

    2005年 4月 盧武鉉 大統領(왼쪽)으로부터 國防發展諮問委員會 委員長 任命狀을 받는 황병무 敎授.

    ▼ 盧 政府 國防改革의 한 軸이 國防部 文民化였는데, 盧 政府는 이를 實現하지 못했습니다.

    “盧 大統領은 國防部는 軍事機關이 아니라 政府機關이라는 確固한 意志를 갖고 있었습니다. 國家政策 밑에 政府政策이 있고, 그 아래에 國防政策과 3軍政策이 있다는 것이 盧 大統領의 視角이었습니다. 國防部는 文民 中心으로 國防政策의 作成과 執行을 擔當하고, 合參의 軍事政策을 國家政策과 連結시키고, 各郡의 利害關係를 調整해 3軍 均衡發展을 圖謀하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軍은 戰鬪에만 專念하게 하자는 것이었지요.

    1990年 改正된 國軍組織法 8兆엔 ‘國防部 長官은 大統領의 命을 받아 (中略) 合參議長과 各軍 總長을 指揮 監督한다’라고 돼 있는데, 이는 文民 國防長官이 大統領이 定한 政府政策에 따라 合參과 各軍을 指揮 統制하라는 意味입니다. 그러나 이 法精神은 實現되지 못했습니다. 國防部를 문민화하는 改革은 文(文)李 무(武)를 길들이는 것으로 誤解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 軍의 抵抗이 만만찮겠지만 國防部 文民化는 꼭 이뤄야 할 課題입니다. 美國과 NATO 國家의 國防部는 말할 것도 없고, 日本의 防衛省度 꼭 軍人이 와야 하는 자리를 除外하고는 全部 民間人이 맡아서 運營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國會의 同意를 받아 國防部의 文民化를 法制化한 겁니다.”

    ▼ 그런데 李明博 政府의 이상희 初代 國防長官은 反對로 가고 있습니다. 過去 國防部는 軍人, 그 中에서도 陸軍이 獨食해 ‘六房部’라는 非難을 받았습니다. 이상희 長官은 國防部를 六房部로 만들어가고 있어요. 그는 ‘國防部의 文民化를 再檢討하겠다’고까지 했는데 法治主義 國家에서 法令을 無視하고 이렇게 나가도 되는 건가요.

    “與野 合意를 거쳐 2006年 12月28日 法律 第8097號로 制定된 ‘國防改革에 關한 法律’ 第11條 ①項엔 ‘國防部 長官은 現役 軍人의 專門性이 要求되는 職位를 除外한 國防部 職位에 軍人이 아닌 公務員의 比率이 年次的으로 擴大될 수 있도록 人事管理를 하여야 한다’라고 돼 있고, 大統領令인 이 法 施行令 第7條 ①項에는 ‘國防部 長官은 法 第11條에 따라 軍人이 아닌 公務員의 比率을 擴大해 (中略) 2009年까지 100分의 70 以上을 目標로 한다’라고 돼 있습니다.

    國防部의 16個 局長級 補職 가운데 軍事補佐官, 電力政策館, 動員企劃館, 郡守管理官, 政策企劃官은 專門性을 要求하는 것이라 軍人이 現役을 補任하고, 나머지는 民間人을 앉힌다는 것이 애初의 決定이었습니다.”

    ▼ 그런데 再檢討를 하겠다고 했으니 이 長官은 이 法令을 避해가는 길을 찾아내겠다는 것 아닙니까.

    “言論 報道에 따르면 이 長官과 主로 陸軍에 敵(籍)을 둔 것으로 보이는 現役 軍人들은 ‘現役이 軍 政策 決定過程에 參與하지 못한다’는 理由를 내걸며 이를 바꾸려 한답니다. 이렇게 하려면 ‘國防部 長官은 民間 人力의 活用 擴大를 위한 細部 計劃을 樹立하여 施行하여야 한다’라고 돼 있는 이 法 施行令 8兆 ③港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只今은 民主化, 情報化 時代인지라 이 條項의 改正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 國防部를 문민화하려면 長官부터 民間人을 앉혀야 하는 것 아닌가요? 美國은 轉役 後 10年이 지나야 國防長官에 就任할 수 있게 했기에 豫備役 將星이 國防部 長官을 맡는 일이 거의 없죠.

    “大將이나 中將으로 轉役한 사람이 바로 國防部 長官에 就任하니 그의 ‘탈(脫)군인화’가 未洽해 國防部에서는 그의 人脈이 活性化합니다. 이런 狀態에서는 國防部의 文民化와 공정한 人事가 이뤄지기 어렵죠. 그래서 國防部 長官 就任 時期를 轉役 後 10年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7年, 5年, 3年으로 할 것이냐를 놓고 檢討했지만, 이를 明文化하면 大統領의 人事權에 負擔을 줄 수 있어 明文化하지 못했습니다.”

    ▼ 美國이 公開席上에서 하는 말과 實務者들끼리 만나서 하는 말에 큰 差異가 있군요. 노무현 政府는 實益도 없는 北韓과의 頂上會談을 推進함으로써 左派政府로 指目됐는데, 美國은 韓國의 安保 弱點을 잡고 强하게 밀어붙이는군요. 그런데 美國이 던진 MD 問題는 우리도 前向的으로 檢討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日本이 參與했는데 우리가 빠진다는 것은 長期的으로 보면 不利한 狀況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MD는 北韓과 中國의 미사일 發射에 對備하자는 것인데 우리는 두 나라와 너무 가까이 있어 MD에 參與해도 實益이 적습니다. 北韓과 中國이 쏘는 미사일을 막으려면 우리는 高層(Upper Tier)防禦가 아닌 底層(Lower Tier)防禦를 해야 합니다. 底層防禦는 패트리어트 PAC-3로 할 수 있는 것이라 MD의 核心이 아닙니다. 우리가 MD에 參與해 高層防禦를 해주면 美國과 日本은 아주 좋아하겠지요. 高層防禦를 위해서는 X 밴드 레이더 等을 購入해야 하는데 여기에 10兆원 以上의 돈이 들어가요. 이 때문에 우리 軍은 MD 參與에 實益이 없다는 判斷을 내린 것으로 압니다.”

    ▼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1번 이지스 驅逐艦인 世宗大王함에 彈道彈 邀擊이 可能한 SM-3를 搭載하지 않고, 速度가 느린 對艦(對艦)미사일과 戰鬪機만 邀擊하는 SM-2를 搭載한 것은 問題가 있습니다. SM-3는 底層防禦用 미사일인데 김대중 政府는 이것도 MD를 構成하는 武器라며 購入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對艦미사일 防禦 體系를 選擇할 것이냐 地域防衛 미사일 體系를 選擇할 것이냐는 作戰上의 選擇이기에 앞서 政治的인 選擇이라고 생각합니다. MD 參與 與否는 매우 銳敏한 問題라서 現 政府에서도 愼重히 檢討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參與政府 安保政策의 功過

    ▼ 金大中-노무현 政府는 10年間 北韓에 많은 것을 퍼줬지만 北은 非核化가 아니라 核實驗으로 應對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政策을 推進했던 사람들은 全혀 責任을 지지 않고 있어요.

    “어느 政府의 政策에도 功過(功過)는 함께 있습니다. 北核 實驗을 막지 못한 것에 對한 批判은 謙虛히 受容해야겠지만, 南北 間 緊張을 緩和시키고 民間交流를 擴大시켜, 北韓을 변화시킬 수 있는 與件을 만들고, 信賴를 構築할 수 있는 政治的 努力을 했다는 點은 높은 點數를 주고 싶습니다.

    參與政府는 和解와 協力政策을 北韓을 非核化하는 政策에 연계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參與政府 對北政策은 輿論 主導層의 支持를 받지 못했고, 美國과의 對北共助度 삐걱대는 境遇가 많았습니다.

    또한 和解와 協力을 强調하다 보니 國防政策을 和解와 協力 政策 밑에 둔 것은 아닌가, 反省하게 됩니다. 바로 이 問題 때문에 軍의 士氣가 떨어졌고 參與政府가 推進한 國防改革은 保守層의 反撥을 샀습니다. 西海의 和解·協力地帶는 그럴 만한 與件과 時期가 造成돼야 可能한 일입니다. 그前까지는 軍은 國民을 위해 存在하는 것이니 NLL(北方限界線)을 지켜내야 합니다. NLL을 지키다 犧牲된 軍人에게 國家는 正當한 禮遇를 해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습니다.

    우리 軍은 北韓과의 軍事力을 客觀的으로 比較할 수 있기에 우리가 ‘優勢 均衡’을 維持하고 있다고 判斷했습니다. 그러나 豫備役과 輿論主導層은 核과 長距離 미사일로 대표되는 ‘北韓의 非對稱 戰力의 威脅’과 ‘韓半島 戰場(戰場)의 特殊性’을 내세워 이러한 評價를 外面했습니다. 그래서 對北 防衛에 ‘充分性’을 가질 수 있는 電力이 오히려 安保不安感을 招來했습니다. 軍事力은 抑制와 防衛를 하는 基本이고, 外交力을 支援하는 힘이며, 經濟發展의 安全瓣입니다. 向後 政府는 이러한 것을 알고 잘 活用해야 합니다.”

    ▼ 參與政府가 만든 國防改革案이 成功的으로 推進되려면 李明博 政府의 國防改革 리더십도 重要한 機能을 해야 할 텐데요.

    “그렇습니다. 國防改革은 軍뿐만 아니라 國家의 課題입니다. 3代 政權이 持續的으로 推進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軍 統帥權者가 强力한 改革意志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國會는 超黨的이고 樵軍(超軍)的인 姿勢로 立法과 豫算을 支援해야 합니다.

    國防部는 過去 政權이 이루지 못한 軍 構造 調整이 計劃대로 推進되도록 構造調整의 主對象인 陸軍의 自發的 參與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國民의 理解와 支持 없이, 兵營 訓鍊만으로 强한 軍隊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國民이 國防의 基盤임을 알고 國防情報를 國民에게 알려 國民을 國防 發電의 同伴者로 삼아야 합니다. 國防部는 ‘軍의 特殊性과 效率性’을 强調하는 닫힌 機關이 아니라 열린 機關을 志向해야 합니다.”

    北核 實驗 때문에 文民長官 任命 못해

    참여정부 안보정책의 ‘보이지 않는 손’ 황병무 교수 인터뷰

    2·13合意에 따라 北韓이 作成한 核目錄을 가지고 지난 5月8日 板門店을 거쳐 韓國으로 오는 性 金 美 國務部 韓國 課長(가운데).

    ▼ 軍人들은 野戰에서 本部로, 本部에서 野戰으로 잦은 補職 移動을 하는데 이들에 對한 人事權은 各軍 總長이 行使합니다. 人事 循環에 따라 國防部에 勤務하는 現役은 人事權을 쥔 자군(自軍) 總長을 의식하게 되니 國防이라는 큰 目標보다는 자군의 利益이라는 작은 目標에 集中하게 됩니다. 그래서 國防部는 絶對 多數를 차지한 陸軍의 利益을 代辯하는 機關이 되는 거죠. 이러한 問題點 때문에 美國 유럽 日本 等 先進國의 國防部는 特定 軍에 치우치지 않고 오랫동안 國防 分野를 硏究해온 民間人들이 이끌고 있습니다. 軍人들이 國防部를 이끄는 나라는 中國이나 北韓 等 社會主義 國家뿐인 것 같습니다.

    “이상희 長官 얘기가 나왔으니 한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그분이 陸士 生徒이던 때부터 알고 지냈습니다. 國防改革 2020을 만들 때 그는 軍 構造調整을 擔當한 合參議長이었으니 우리 軍을 어떤 正體性을 가진 軍隊로 발전시켜야 하는지 잘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轉役 後 1年餘 만에 國防長官에 任命됐기에 몸에 밴 軍事文化에서 자유롭지 못할 수 있다고 봅니다.

    軍의 基本 價値는 戰鬪에서 勝利하는 것입니다. 이상희 長官은 國防運營의 文民 基盤을 擴大해 軍이 戰鬪 任務에 專念할 수 있는 與件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軍은 크게 戰鬪 分野와 戰鬪勤務支援 分野로 나뉩니다. 電車나 戰鬪機 陷穽 같은 裝備를 ‘整備’하고 戰鬪物資를 대주는 ‘普及’이 代表的인 戰鬪勤務支援 分野입니다. 韓國軍은 이러한 分野까지 現役들이 다 하고 있지만 美軍을 비롯한 先進國 軍隊에서는 民間이 맡고 있습니다.

    軍人들은 民間이 들어와 戰鬪勤務支援分野를 맡으면 效率性이 떨어진다고 합니다만 戰鬪를 除外한 分野에서는 民間의 競爭力이 훨씬 더 높은 게 現實 아닙니까. 戰鬪機를 製作한 民間 技術者들이 戰鬪機를 整備하는 게 낫겠습니까, 軍에서 키운 整備兵이 整備하는 게 낫겠습니까.”

    ▼ 盧 政府는 ‘和解와 協力’이라는 對北政策과 함께 國防改革을 推進했지만 2006年 10月9日 北核 實驗으로 찬물을 뒤집어썼습니다. 그래서 北核 實驗 한 달도 안된 11月1日 外交·安保 關聯 長官 全員을 交替하며 金章洙氏를 國防長官에 指名했는데 이는 盧 政府가 對北 認識을 잘못했다고 自認(自認)한게 아닙니까.

    “北核 實驗으로 國家指導部는 큰 衝擊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盧 大統領은 就任 後 처음으로 前職 大統領을 招請해 意見을 듣고, 김만복 國精院長, 송민순 外交通商部 長官, 金章洙 國防長官, 李在汀 統一長官 指名하고 백종천氏를 安保室長으로 임명했습니다. 參與政府는 北韓이 核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모든 外交的 努力을 기울였는데 北韓이 核實驗을 했으니 外交·安保에 失敗한 것으로 보고 長官들을 交替한 것입니다.”

    ▼ 北核 實驗은 우리 軍 首腦部의 大規模 交替도 불러왔지요.

    “金章洙 陸軍總長이 國防長官이 되면서 11月15日, 隊長이 補任되는 9個 補職 가운데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은 空軍參謀總長을 除外한 8個 자리가 모두 바뀌었습니다. 大腸에서 補職만 바뀐 이는 3軍 司令官을 하다 合參議長이 된 김관진氏와 1軍 司令官을 하다 韓美聯合司 副司令官이 된 金炳官氏뿐이고, 陸·海軍 總長과 陸軍의 1·2·3軍 司令官의 5個 자리는 中將이 大將으로 進級하면서 補任됐습니다. 大將을 步臨하기로 한 合參 次長에는 海軍 中將을 새로 임명했습니다.”

    ▼ 그러나 盧 政府는 北核 實驗에 따른 軍 首腦部 人事라고 說明하지 않았습니다.

    “2006年 10月 末의 韓美安保長官會談에서 戰作權 轉換 問題를 결정짓기로 했고, 이것이 끝난 後 長官과 軍 首腦部를 交替한 것이기에, 北核 實驗과는 聯關이 없는 것으로 비칠 수 있었지요.”

    ‘所望的 思考’

    ▼ 盧 政府의 對北 判斷은 正말 安易했습니다. 北核 實驗 3個月 前인 2006年 7月4日, 北韓은 미사일을 무더기로 發射함으로써 盧 政府의 對北政策에 關心이 없다는 사인을 보냈는데도 이를 無視했어요.

    “合參은 北韓의 미사일 發射를 武力示威라고 判斷했으나 政府는 그 意味를 縮小하고자 했던 게 事實입니다. 政府의 判斷이 安易했다는 것은 10月9日 北韓이 核實驗을 함으로써 證明된 것이니까요. 當時 政府는 美國과의 協調를 鞏固히 해서 北韓이 核實驗을 못하게 하는 것보다는 北韓도 參席하는 6者會談에서 北韓을 說得하겠다는 데에 比重을 뒀습니다.

    참여정부 안보정책의 ‘보이지 않는 손’ 황병무 교수 인터뷰

    中國 단둥에 있는 抗美援朝展 記念塔. 黃 敎授는 美軍이 介入하지 않으면 中國軍도 北韓 急變事態에 介入하기 어려울 것으로 본다.

    情報 業務를 하면서 가장 危險한 것이 ‘wishful thinking’, 우리말로는 ‘所望的(所望的) 思考’를 하는 것입니다. 蒐集해서 分析된 情報를 보고 客觀的인 判斷을 해야 하는데,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所望 때문에 情報를 믿지 않으려 하다보면, 그런 所望에 맞는 情報만 注目하게 돼 結局은 ‘intelligence failure(情報의 失敗)’가 빚어집니다.

    미사일 發射 뒤인 8月, 민주당 조성태 議員은 大統領을 만나 ‘北韓이 核實驗을 할 것이다’라고 直言했습니다. 저도 9月에 송민순 安保室長을 만나 斷定的으로 ‘北韓이 核實驗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7·4 미사일 發射는 北韓이 美國의 對北 協商戰略을 柔軟化하려고 하는 것으로 봤습니다. 그럼에도 美國은 戰略 變化를 하지 않았기에 北韓은 다시 挑戰할 것이고, 다시 挑戰한다면 그것은 核實驗밖에 없다고 본 겁니다. 그러나 安保 官僚들은 그럴 可能性이 稀薄하다며 아무 對策도 마련해놓고 있지 않다가 當했습니다.”

    ▼ 그런 騷動을 치르고 2007年 2月의 6者會談에서 나온 것이 2·13合입습니다. 2·13合意는 2005年에 나온 9·19共同聲明 履行을 위한 初期 措置와 對北支援 分擔을 主 內容으로 합니다. 北核 實驗 以後에 나왔다는 點에서 2·13合意는 北의 核實驗 意圖가 먹혀든, 一種의 ‘敗北文書’ 같습니다.

    “2·13合意는 現在 잘 進行되고 있는데, 이는 北韓이 모든 核施設의 稼動을 中斷하는 ‘凍結’을 하고, 이러한 施設을 ‘申告’하며, 이 施設을 ‘廢棄’한다는 게 核心입니다. 그리고 北韓이 만들어놓은 武器級 플루토늄은 申告한다는 것입니다. 北核 實驗은 北韓을 非核化하려는 路程에 큰 障礙物을 만들었고, 韓美日 共助에도 큰 어려움을 줬습니다. 北韓 核施設을 不能化하고 武器級 플루토늄을 搬出한다고 하더라도 北韓은 粗雜한 水準의 核武器를 갖고 있을 可能性이 높습니다. 이것을 찾아내 除去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北韓은 關聯局을 相對로, 그들이 保有한 粗雜한 水準의 核武器 除去 問題를 軍縮 問題로 끌고 가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北韓을 核 保有國으로 認定해야 하는 狀況이 招來됩니다. 벌써 워싱턴에서는 北韓이 保有한 粗雜한 核武器 除去는 美-北 修交 以後에 할 수 있다는 見解가 나오고 있습니다.

    不吉한 未來를 暗示하는 兆朕은 北核實驗 防止라는 豫防外交 失敗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敎訓을 國民과 政府는 뼈저리게 느껴야 합니다. 北核 禮訪外交에 失敗한 代價는 李明博 政府가 치르게 될 것이 때문입니다. 이와 類似한 事例의 再發을 막으려면 政府는 國家安保會議(NSC) 傘下에 國家 威脅을 豫測하고 그 威脅을 效果的으로 管理하는 것을 目的으로 한 ‘情報調整委員會’를 둬야 합니다.

    北核 實驗 禮訪外交가 失敗한 데엔 韓美 間의 情報共助가 원활하지 못한 것도 한몫을 했습니다. 韓國과 美國, 韓國과 中國 사이의 情報 交流가 不實하면 北韓 非核化를 위한 關聯國들의 戰略에 虛點이 생깁니다. 北韓 非核化를 위한 周邊國과의 對北 情報交流 方案도 時急히 講究돼야 합니다.”

    DJ의 忠告는 適切했다

    ▼ 2·13合意는 實益이 적은 것인데도 盧 政府는 이를 土臺로 第2次 南北頂上會談을 推進했습니다. 勿論 美國은 反對했고요. 盧 政府의 安易한 對北 認識이 美國과 衝突을 일으킨 事件으로는 2007年 9月7日 濠洲 시드니 APEC 때 韓美頂上會談이 擧論됩니다. 이 자리에서 盧 大統領은 北韓을 非核化하려면 平和協定을 맺어야 한다고 主張했고, 부시 大統領은 北韓이 먼저 核을 抛棄해야 한다고 主張해 葛藤이 빚어졌죠.

    “參與政府가 그러한 判斷을 한 데는 美國의 態度 變化도 影響을 끼쳤습니다. 北核 實驗 直後인 2006年 10月14日 유엔 安保理는 對北 制裁案人 ‘決定文 第1718號’를 發表했지만, 그해 11月7日의 美國 中間選擧에서 對北强勁策을 維持해온 共和黨이 敗北했습니다. 그러자 美國은 北韓의 意圖를 把握하기 위해 對話 쪽으로 對北 政策을 轉換합니다.

    參與政府는 이러한 雰圍氣에 便乘해 6者會談을 다시 살려야 한다고 主張했고 美國은 6者會談을 包含하는 對北 綜合 프로그램을 만들자고 했습니다. 北韓의 行動에 對해서는 行動으로 對應하자는 것이었죠. 北韓이 核을 廢棄하면 그에 合當한 補償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制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열린 6者會談에서 나온 것이 2·13合意였습니다. 參與政府로서는 어떻게든 對話를 통해 北核을 抛棄시키는 쪽으로 끌고 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2次 南北頂上會談을 推進한 것으로 압니다.”

    ▼ 參與政府가 北核 實驗에도 不拘하고 北韓과의 對話로 轉換한 데는 金大中 前 大統領의 役割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金 前 大統領이 北核 問題에 對한 對話를 ‘放棄’하면 事態가 더욱 어려워진다고 助言한 것은 事實입니다.”

    참여정부 안보정책의 ‘보이지 않는 손’ 황병무 교수 인터뷰
    ▼ 그러한 忠告를 왜 받아들였을까요.

    “北核 實驗 後 北韓과 對話를 하지 않았다면 어떤 結果가 나왔을까요. 結局은 對決로 가는 것인데, 對決로 갔으면 韓半島 危機는 高調돼 經濟가 더욱 어려워지지 않았겠습니까. 힘으로 한꺼번에 모든 것을 解決하자는 包括案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現實에서 쉽게 適用할 수 없다는 限界가 있습니다. 2·13合意가 있었기에 北核 施設을 廢棄시킬 수 있는 端緖가 열렸고 그로 인해 韓半島 危機가 어느 程度 解消됐습니다.”

    ▼ 美國은 2·13合意를 履行하는 過程에서 北韓이 抽出한 것으로 보이는 高濃縮 우라늄 問題와 北韓-시리아의 核 커넥션 問題는 北韓이 抽出한 플루토늄의 正確한 申告와 分離해서 다루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北核 問題는 長期化하고 解決 展望이 밝지 않을 거라는 얘깁니다. 李明博 政府도 結局은 北核 問題 解決을 南北關係 改善과 어떻게 병행시킬 것이냐란 問題에 逢着할 것입니다. 李明博 政府는 對北政策의 基調를 ‘非核, 開放 3000’으로 잡았는데, 이는 盧 政府가 設定했던 目標와 方向에서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李明博 政府는 前任 政府가 犯한 施行錯誤를 最少化해서 目標를 達成하길 바랍니다.”

    美國의 北 攻襲 막으려 이라크 派兵

    ▼ 展示作戰統制權 還收를 參與政府는 ‘戰作權 轉換’이라고 表現했지요. 戰作權 轉換을 包含한 韓美同盟 問題로 話題를 바꿔보겠습니다. 參與政府는 反美(反美) 코드를 갖고 있었기에 前作戰 轉換을 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參與政府가 反美였다고 보진 않습니다. 다만 美國의 政策에 끌려가지 않고 自己 목소리를 내려고 한 것은 事實입니다. 부시 政府 出帆 直後인 2002年과 2003年, 美國은 一方主義에 젖어서 ‘壓迫을 하면 相對는 變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北韓에 軍事行動을 包含한 모든 行動을 할 수 있다는 意味로 ‘all options on the table’을 擧論했고, 北韓에 對한 攻襲을 檢討했습니다.

    反面 參與政府는 北核 問題를 解決하지 못하더라도 韓半島에 戰爭의 기운이 높아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봤습니다. 이것이 對美戰略의 基本 틀이다 보니 韓美關係는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죠. 美國은 無條件 따라오라는 式이었으니 韓美 首腦 사이엔 信賴가 形成되지 않고 緊張이 돌았습니다.

    美國은 그들의 世界戰略에 따라 駐韓美軍을 活用하고 同盟國인 韓國의 도움을 받고자 했습니다. 부시 政府 初期 美國은 駐韓美軍의 一部를 빼내 이라크로 보내고, 韓國에는 이라크 派兵을 要求하며, 北核 問題에 對해서는 强勁하게 나간다는 態度를 보였습니다. 이에 對해 盧 大統領은 ‘韓國軍의 이라크 派兵은 受容할 수 있다. 하지만 對北 問題 主導權은 우리가 쥐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美國이 主導權을 쥐면 北韓 攻襲을 檢討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韓半島의 緊張이 높아져 우리가 끌려가는 狀況이 招來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 美國이 北韓 攻襲을 決定한다면 韓半島는 展示(戰時)가 될 것이고, 展示가 되면 美軍 隊長이 指揮하는 韓美聯合司가 美軍과 韓國軍 作戰部隊를 作戰統制하게 됩니다. 全面戰이 일어날 수도 있는 狀況인데, 全面戰에 對備한 聯合司의 作戰計劃이 5027이지요.

    “盧 政府가 이라크에 韓國軍을 派兵하되, 對北 問題에 對한 美國의 一方主義에 끌려가지 않겠다고 한 것은 잘한 決定으로 봅니다. 윤영관 外交長官과 이 問題를 論議한 적이 있는데, 尹 長官이 ‘美國이 北韓에 武力을 쓰겠느냐’고 물었을 때 저는 ‘中國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니 어려울 것이다’라고 答했습니다. 美國이 北韓을 때려도 北核 問題는 解決되지 않고 韓半島의 緊張만 高調된다면 우리 經濟만 어려워진다고 봤습니다. 尹 長官이 美國에 가서 파월 國務長官을 만나 비슷한 이야기를 했답니다. 그러자 파월 長官은 대뜸 ‘韓國軍의 이라크 派兵과 美國의 對北政策 變化를 맞바꾸려는 것이냐’며 火를 냈다고 합니다. 尹 長官이 우리 意志를 美國에 傳達하느라 많이 苦生했습니다.”

    戰作權 轉換 推進 背景

    ▼ 美國의 攻襲 等으로 韓半島에 戰時狀況이 만들어지는 것을 避하기 위해 展示에 聯合司가 行使하기로 돼 있는 作戰統制權을 가져오려고 했죠. 이것이 國民에게는 韓美同盟을 瓦解시키는 것으로 비치기도 했습니다.

    “1970年代 初 우리는 2個 師團 플러스의 兵力을 베트남에 派兵해놓고 있었는데, 美國은 ‘괌 독트린’에 따라 駐韓美 7師團을 一方的으로 撤收시켰습니다. 이에 정일권 總理는 ‘7師團을 撤收시키면 總理 以下 全 國務委員이 辭退하겠다. 駐韓美軍 駐屯費의 一部를 韓國이 負擔하겠다’는 發表까지 했지만 美國은 그냥 밀어붙였습니다. 여기서 놀란 朴正熙 政府는 白곰 미사일(NHK-1)과 核武器 開發로 달려갔습니다.

    노태우 政府 初期인 1989年 美國 議會는 3段階로 駐韓美地上軍을 完全 撤收시키고 1997年에는 韓美聯合司를 解體한다는 넌-워너 修正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리고 駐韓美軍 一部를 撤收시켰는데, 1992年 1次 北核危機가 터짐으로써 넌-워너 修正案의 執行이 停止됐습니다. 그때만 해도 이 停止가 永遠한지 一時的인지 確認할 수 없었기에, 1994年 末 平時作戰統制權은 韓國軍 合參이 行使한다는 平作卷 還收 措置가 이뤄진 것입니다.

    1970年代 初의 7師團 哲秀와 1989年의 넌-워너 修正案 制定은 美國의 世界 戰略이 바뀐 데서 나왔습니다. 參與政府 初期 美國은 ‘Global Posture Review (GPR)’라는 ‘美軍의 世界 再配置 戰略’을 만들었습니다. 美國은 世界戰略을 定한 後 韓半島를 바라보지만, 우리는 韓半島가 全部이다 보니 美國의 戰略 變化에 휘둘리게 됩니다. 이렇게 돼서는 안 되겠다 해서 나온 것이 戰作權 轉換입니다.

    그러나 北韓과의 對峙를 考慮해 우리의 能力을 最大로 끌어올린 後 戰作權을 轉換하기로 했습니다. 美國은 2009年 戰作權을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조영길 長官 時節 國防部는 2010年쯤이면 戰作權을 轉換해도 된다고 보았고, 2005年의 國防部는 2012年이 適切하다고 報告했기에 이를 受容했습니다. 이러한 判斷은 國防部 實務者들이 合意해서 導出한 것입니다.

    하지만 美國과 協議를 통해 轉換 時機와 節次를 定하는 것과, 轉換 後 어떠한 共同防衛體制를 만드느냐 하는 問題가 남았습니다. 國民, 特히 保守勢力의 理解와 協助를 어떻게 받아낼 것이냐도 重要한 問題였고요. 盧 大統領은 國民의 理解를 求하는 過程에서 陣痛은 不可避하다고 봤지만 이 陣痛이 豫想보다 컸습니다. 對國民 弘報를 제대로 하지 못해 陣痛이 컸다는 點에 對해서는 아쉽게 생각합니다.”

    ▼ 靑瓦臺의 指示로 國防部가 戰作權을 還收한 것이기에 國民은 盧 政府의 安保意識을 猛非難했습니다. 安保 問題는 對國民 弘報의 成敗로 決定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戰作權 轉換은 韓美聯合軍의 戰爭勝利 能力이라는 ‘效率性’과 韓國 防衛는 우리가 主導해야 한다는 ‘正體性’이 結合돼 推進된 것입니다. 그런데 保守 陣營은 效率性에만 注目해 ‘美國이 2009年에 戰作權을 가져가라고 했다’는 것이 알려지자 無條件 反對 목소리부터 냈습니다. 一部는 統一 以後에 戰作權을 가져와야 한다고까지 主張했습니다. 그들은 戰作權 轉換이 歷史的 흐름이고, 南北關係와 國際舞臺에서 우리의 行動 自由를 擴大시켜준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國防能力이 向上됐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中國, 美 地上軍 投入에 敏感

    ▼ 現實的으로는 北韓의 全面 南侵보다는 北韓에서 急變事態가 일어났을 때의 軍事的 對應 問題가 論議의 焦點으로 떠올랐습니다. 많은 國民은 ‘東北工程’ 等으로 歷史的 緣故權을 主張하는 中國이 北韓 急變事態視 中國軍을 개입시킬 것이라고 봅니다. 北韓에 進入한 中國軍은 親中(親中) 政府를 세운 다음에야 撤收할 것이므로 南北統一은 멀어질 것이라는 視角이죠. 그래서 많은 이가 北韓 急變事態가 일어나면 ‘韓國軍은 美軍과 함께 北韓 安定化를 위해 北韓에 進入하는 것이 좋다’며 聯合司 作戒 5029 作成을 支持했습니다. 그런데 戰作權 還收가 일어나면 聯合司는 解體될 수밖에 없으니 北韓 急變事態視 韓國軍은 單獨으로 北韓에 進入하려는 中國軍에 맞서야 한다는 負擔이 생깁니다.

    “反對의 境遇를 생각해봅시다. 韓美聯合司가 北韓에 韓美 兩國軍을 投入한다면 中國과 러시아가 緊張할 수밖에 없습니다. 特히 中國은 美軍이 休戰線 以北으로 올라온다면 自己들도 軍事的 對應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韓半島의 緊張은 더욱 高調돼 統一은 더욱 멀어집니다.

    6·25戰爭 때 中國이 抗美援朝(抗美援朝) 參戰을 決定하면서 注目한 것은 美 地上軍이 38線 以北으로 올라오느냐였습니다. 韓國軍이 仁川上陸作戰 以後 38線을 넘은 1950年 10月1日,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유엔軍이 38線 以北으로 進擊하면 中國軍도 介入한다’는 聲明을 發表했습니다. 다음날 저우언라이는 美國과 통할 수 있는 週中 印度大使 파니카를 불러 같은 內容을 傳達합니다. 이때 派니카가 ‘韓國軍의 北進을 어떻게 보느냐’라고 묻자 저우언라이는 ‘그것은 그들(韓民族)의 問題’라고 했다는 有名한 逸話가 있습니다. 中國은 韓國軍과 美空軍機가 38線 以北으로 올라와 作戰하는 것은 容認해도 地上軍이 올라오는 것은 默過하지 않았습니다.”

    中國軍, 北韓 急變事態 介入 어렵다

    ▼ 萬一 韓國軍이 單獨으로 北韓 急變事態에 介入하면 中國은 어떻게 나올까요.

    “北韓 急變事態가 發生했을 때 우리는 ‘不介入 宣言’을 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憲法上 北韓은 우리의 領土이지만, 유엔에 別途 加入한 國家이기 때문입니다. 北韓에서 일어난 內紛은 北韓 스스로 解決할 수 있도록 ‘善意(善意)의 觀望’을 하는 것이 바람직해요. 萬一 介入하게 된다면 美國, 中國과 充分히 事前協議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介入이 ‘洞네싸움’을 일으키는 口實이 되지 않도록 注意해야 해요. 우리는 北韓 治安狀況을 바로잡고 北韓 住民들로 하여금 自治政府를 세우게 하는 平和維持作戰을 한다는 것을 目標로 介入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行動을 하기 前, 다시 말해 우리가 善意의 觀望을 하고 있는데 中國이 軍事的으로 北韓에 介入한다면, 이는 美國에 對한 重大한 挑戰이 될 것입니다. 中國軍의 介入은 美軍의 投入을 불러올 것이므로, ‘洞네싸움’의 原因을 提供한 中國은 國際的으로 매우 不利한 狀況에 놓이게 됩니다. 周邊國들은 이러한 中國을 敵對視할 것이므로 中國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습니다. 中國軍이 韓國軍을 攻擊한다면 이는 美國에 對한 挑戰이 되므로 中國은 美國과 對立해야 합니다. 周邊國뿐만 아니라 美國 等 西方國家를 敵으로 만들고 中國이 평화롭게 存在할 수 있겠습니까.”

    ▼ 韓國이 美軍이라는 外勢를 끌어들이지 않고 北韓 急變事態 終熄이라는 平和 目的 實現을 위해 韓國軍을 投入한다면, 中國은 北韓에 軍事力을 投入할 名分을 찾기 힘들 것입니다. 韓國軍이 들어가 北韓 治安을 安定시키고, 北韓 住民들로 하여금 選擧라고 하는 民主節次로 自治政府를 세우게 한 後 그 政府가 韓國과의 統一을 決意한다면 이것이야말로 中國이 介入하지 못하는 平和統一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方法을 찾아가는 것이 賢明한 選擇입니다. 北韓 急變事態를 契機로 한 統一은 우리 힘으로 해야 합니다. 戰時에 稼動되는 韓美聯合司의 作戰計劃으로 北韓 急變事態에 對應해 統一을 이루려 하는 것은 危險한 選擇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作戒는 韓國軍 合參에서 세워야 합니다.”

    平時作戰으로 北 急變事態 介入해야

    ▼ 北韓 急變事態 때 韓國軍이 들어가면 北韓의 一部 軍部隊가 中國으로 건너가 亡命政府를 세우거나 中國을 根據地로 한 게릴라전을 펼치진 않을까요.

    “只今 中國은 中國으로 건너온 脫北者들을 亡命者로 待遇하지 않고 ‘祕法越境者(非法越境者)’로 判斷해 잡아들이는 족족 北韓으로 送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活用해야죠. ‘過去 中國이 脫北者를 亡命者로 處理하지 않았듯 只今 發生한 脫北者도 亡命者가 아니다. 北韓은 빠르게 安定되고 있으니 그들을 돌려보내라’는 要求를 外交的으로 해야 합니다. 國家라는 게 뭡니까. 唯一하게 武力을 가질 수 있는 組織입니다. 中國은 自國 內에 武力을 갖춘 또 다른 組織이 稼動하는 것을 願치 않을 것입니다. 北韓軍 一部가 公式的으로 中國에 게릴라전 本據地를 만든다는 것은 現實的으로는 不可能해요.”

    ▼ 北韓 急變事態視 中國의 介入을 避하려면 우리는 平和統一을 志向해야 합니다. 따라서 合參은 이 作戰을 戰時作戰이 아닌 平時作戰 槪念으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1999年 濠洲軍은 동티모르 事態에 介入했지만 當時 濠洲는 展示를 宣布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式으로 北韓 急變事態에 介入해야 하지 않을까요.

    “美國의 安保官僚들이 北韓 急變事態에 對備한 韓美 共同作界를 만들자고 한 것은, 韓美 間의 役割分擔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北韓 急變事態視 美軍은 核과 미사일을 中心으로 한 北韓의 大量殺傷武器(WMD)를 安全하게 確保하고, 韓國軍은 人道主義的 支援活動을 펼쳐 北韓을 早期에 안정시키는 것을 强調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努力은 北韓에 새로운 政治狀況을 만들고 中國 等 周邊國을 刺戟하는 結果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韓美 共同作戒 作成을 前提로 한 韓美聯合司의 役割은 變化해야 한다고 봅니다.”

    ▼ 戰作權 還收의 大前提는 充分한 抑制力을 發揮할 수 있는 段階까지 國防力을 强化한 後 推進하라는 것입니다. 國防力을 增强시키려면 人件費 支出을 줄여야 하는데, 그러려면 兵力을 줄여야 합니다. 美軍은 職業軍人制를 擇하고 있어서인지 戰鬪와 訓鍊 以外의 分野에는 現役을 쓰지 않습니다. 反面 韓國軍은 義務兵制라 그런지 當番兵 宿所病 運轉兵 行政兵 理髮兵 테니스病 炊事兵 等 戰鬪와 無關한 分野에 現役을 配置하고 있습니다.

    “兵力減縮의 核心은 部隊 數를 줄이는 構造調整입니다. 그래서 國防改革에 關한 法律 第25條 ①港에 ‘國軍의 常備兵力 規模는 (中略) 2020年까지 50萬名 水準을 目標로 한다’라고 해놓은 것입니다. 애初 國防部 안은 ‘目標’가 아닌 ‘漕艇’이었는데, 國會 國防委 審議에서 目標로 變更됐어요. 35萬名으로 줄이자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結局 50萬으로 決定했습니다. 盧 大統領은 이 決定에 매우 만족해했죠.”

    感君恩 하되 前歷은 增强

    ▼ 우리 軍은 戰鬪勤務支援 分野에 現役을 多數 配置해 浪費하고 있을 뿐 아니라 軍 構造를 放漫하게 가져감으로써, 下體는 弱하고 머리가 큰 ‘假分數’ 軍隊를 만들었습니다. 美 陸軍은 50萬 兵力으로 10個 師團을 運營하는데, 韓國 陸軍은 비슷한 兵力으로 47個 師團을 運營하고 있으니 虛弱 體質일 수밖에 없습니다.

    “兵士는 적은데 師團이 많으면 좋은 것은 將校들입니다. 豫備軍이 入所해야 完篇(完編)李 되는 體制로는 有事時 迅速한 作戰을 펼치기 어려우니 우리도 美 陸軍처럼 完全한 完篇師團 體制로 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2007年 1段階로 3個 動員師團과 後方에 있는 2個 軍團司令部를 解體했습니다. 2015年까지 2段階로 動員師團을 中心으로 한 13個 師團과 軍團 1個를 더 解體합니다. 그리고 目標年度인 2020年까지의 3段階에서는 7個 師團과 1個 軍團, 그리고 한 個 軍司令部를 解體해 最終的으로 23個 師團-6個 軍團 體制를 構成하고자 합니다. 海兵隊의 2個 師團은 그대로 存置하니 地上軍 師團은 25個가 되는 셈입니다. 兵力은 줄이되 前歷은 1.7倍 增强시킨다는 것이 國防改革의 目標입니다.”

    ▼ 韓國처럼 좁은 電球(戰區)에서 세 個의 野戰軍을 運營하는 것은 理解하기 어렵죠. 陸軍은 하루 빨리 1軍과 3軍을 統合해 共通 補職 자리를 줄여야 합니다. 只今 通信과 交通이 얼마나 發展했습니까. 그런데도 6·25 直後에 決定된 軍團과 師團의 作戰區域이 只今도 通用되고 있습니다.

    “2007年 11月 陸軍은 2軍司令部를 第2作戰司令部(2作詞)로 改編했으니, 남은 것은 1軍과 3軍을 統合해 地上作戰司令部(地作司)를 만드는 것입니다. 地作司로의 統合은 安保 與件을 勘案해 構造調整의 마지막 段階에서 합니다. 2020年 6個로 줄어드는 軍團은, 作戰區域을 갖는 地域群團 4個와 作戰區域을 갖지 않는 機動軍團 2個로 再編될 것입니다. 4個 地域軍團은 只今의 野戰軍司令部人 1, 3軍司令部보다 若干 작은 作戰區域을 擔當하는 소(小)野戰軍 司令部 機能을 할 것입니다.

    地域軍團은 前方地域에서 軸選別 主軸 제대로 發展됩니다. 이 軍團의 監視 打擊 機動 能力은 顯著히 增加하고 作戰區域度 現在 軍團보다 7倍 程度 넓어집니다. 機密 事項이라 詳細히 說明하진 못합니다만 未來 師團의 作戰 能力과 作戰區域度 顯著히 增加합니다.”

    北韓 急變事態視 特戰司 投入

    ▼ 北韓 急變事態가 일어나 韓國軍을 投入한다면 40萬으로 줄어든 地上軍으로는 北韓 地域 民政作戰을 圓滑히 遂行하지 못할 것이라는 指摘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DMZ 바로 南쪽에 있는 알파선(第1線)과 브라補選(第2線)에 있는 常備部隊는 北韓 安定化를 위해 出動시키기 어렵겠지요. 北韓 安定化를 위한 民政作戰에는 그 後方에 있는 部隊가 出動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部隊로는 陸軍 特戰司를 꼽을 수 있습니다. 正規 師團을 출동시킨다면 動員豫備軍을 動員해 動員師團을 만들어, 이 部隊가 移動한 자리를 메울 수 있습니다.”

    ▼ 特戰司는 너무 剛하지 않나요. 北韓 急變事態에 對한 軍事作戰은 ‘무트와’(MOOTWA·Military Operation Other Than War, 戰爭 以外의 軍事作戰)여야 하지 않습니까.

    “全面戰이라는 正規展에 나서는 것이 正規師團과 軍團이고, 非(非)正規展에 投入하는 것이 特戰司입니다. 이라크의 쿠르드 地域에 가 있는 자이툰部隊가 民政作戰 部隊인데, 자이툰의 主力이 바로 特戰司 隸下 大隊들입니다.

    急變事態는 北韓 全域에서 發生하기보다는 都市를 中心으로 한 地域에서 일어납니다. 따라서 線(線)을 重視하는 正規師團보다는 點(點)을 中心으로 地域을 確保하는 特殊戰 部隊가 더 效果的일 수 있습니다. 特殊戰 部隊는 高空落下를 비롯한 다양한 方法으로 아주 迅速히 進出할 수 있습니다.”

    ▼ 北韓 地域에서 MOOTWA를 펼칠 때 압록-豆滿江을 따라 劃定된 한·中 國境線 防禦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 部隊를 압록-豆滿江 地域으로 進出시키면 美軍이 參與하지 않았다 해도 韓中 間의 緊張이 高調될 텐데요.

    “그것은 政治的으로 풀어가야 합니다. 앞서 指摘했듯, 中國은 北韓 安定化를 위해 들어온 韓國軍에 投降을 拒否한 北韓軍이, 武裝한 채로 中國으로 건너오는 것을 매우 警戒할 것입니다. 中國이 압록-豆滿江에 中國軍을 配置해 이들을 索出해 韓國에 넘겨주도록 政治的 妥協을 보아야 합니다.”

    ▼ 北韓 急變事態視 日本의 介入 問題에 對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그것은 絶對로 안 됩니다. 中國軍과 美軍이 우리 問題에 介入하지 못하게 하듯이, 日本軍도 우리 問題에 介入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中國은 淸日戰爭의 記憶이 있어서, 日本 軍事力이 韓半島에 들어오는 것에 對해서는, 美軍이 休戰線 以北으로 올라오는 것만큼이나 銳敏하게 反應할 수 있습니다.”

    ▼ 1999年 동티모르 事態 때는 濠洲가 多國籍軍 構成을 主張하면서 먼저 介入했습니다. 이에 韓國과 日本 等이 呼應해 軍隊를 派兵했죠. 유엔이 이러한 軍事力 投入을 承認한 것은 多國籍軍 司令部가 構成돼 동티모르 地域을 안정시키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그리고 多國籍軍이 유엔 平和維持軍으로 轉換됐지요. 北韓 急變事態 때도 먼저 韓國軍이 多國籍軍 構成을 要求하며 北韓 安定化를 위해 들어가고, 이어 美國이나 日本, 中國을 除外한 나라의 軍隊가 들어가면 어떨까요. 그리하여 北韓이 安定되고 유엔이 이 部隊를 유엔 平和維持軍으로 移轉한다면, 그때는 美軍이나 日本 自衛隊나 中國軍도 北韓에 들어와 平和維持活動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러나 유엔의 承認이 있더라도 强大國의 軍隊가 北韓에 들어오면 政治的인 問題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對處해야 합니다. 民政 作戰의 核心은 民心을 얻는 것이니 民政作戰 敎理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 다시 軍 構造調整으로 話題를 돌려보죠. 海軍 構造는 어떻게 바뀝니까.

    “現在 3個인 艦隊司令部에 潛水艦隊司令部, 航空司令部, 機動艦隊司令部를 더해 韓半島 前海域을 監視하고 打擊할 수 있게 할 겁니다. 代身 3個 艦隊社 隸下의 傳單은 없애 傳單 數는 4個로 줄입니다.”

    ▼ 機動艦隊 創設에 對해서는 論難이 많았지요.

    “제가 反對했습니다. 海軍에 機動艦隊를 만들어 싱가포르 옆의 말라카 海峽까지 갈 것이냐, 臺灣과 필리핀 사이의 바시 海峽까지 갈 것이냐를 따져 물었더니, 答을 못하더군요. 3個 海域 艦隊司令部로 海域防禦는 되니까 機動部隊는 艦隊가 아닌 傳單(機動戰團)으로 하자는 것이 제 主張이었습니다.”

    ▼ 海兵隊는 白翎島에 있는 6旅團을 없앤다고 하는데, 戰略圖書인 白翎島 駐屯 部隊를 없애도 되는 건가요.

    “海兵隊 6旅團 解體는 南北關係 改善을 前提로 하기에 마지막 段階에서 決定됩니다. 代身 海兵隊는 浦項에 있는 1師團 隸下 1個 連帶를 主軸으로 上陸旅團을 만듭니다. 海兵隊는 헬기旅團을 創設해 公知(空地) 機動部隊가 되겠다며 操縱士와 헬기를 要求했지만, 明快한 結論을 내지 못 했습니다.”

    ▼ 空軍은 2個 戰鬪社, 9個 戰鬪飛行團 體制 그대로 갑니까.

    “그렇습니다. 空軍은 構造變化보다는 質(質) 改善을 要求했습니다. 空軍은 空中優勢와 精密打擊을 위해 高-中-저 槪念으로 500餘 臺의 作戰氣를 가져야 한다고 했는데, 老朽한 作戰機가 많아 苦悶하고 있었습니다. 오래된 戰鬪機는 附屬品을 求할 수 없어 維持費用이 많이 들기에 退役시키는 것이 낫습니다. 作戰機 數를 420餘 대로 줄이고 代身 早期警報統制機와 空中給油機 等을 確保할 豫定입니다.”

    空中-情報 前歷은 美軍이 主導

    ▼ 韓美同盟 問題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戰作權을 還收해 韓國軍 合參이 韓國軍 前 作戰部隊를 指揮하게 되면 한미연합사는 解體되는데, 이 境遇 美8軍은 어떻게 됩니까.

    “現在 美8軍은 有事時 結成되는 韓美聯合司의 地上構成軍司令部를 支援하는 行政司令部 機能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韓國軍 合參이 前作戰을 가져가 韓國軍 週(主) 作戒를 만들면, 美軍은 美軍臺로 有事時 韓國軍을 支援하는 電球(戰區)司令部를 만들고 支援 作戒를 만듭니다.

    이렇게 되면 美8軍은 美國 戰區司令部 밑의 地上戰鬪司令部 機能을 합니다. 美8軍은 하와이로 옮겨가더라도, 作戰 遂行 組織을 둬, 有事時 韓半島로 展開되는 美 地上軍 部隊를 指揮하는 最高 地上軍 戰鬪部隊의 機能을 할 것입니다. 美軍은 地上 戰鬪司令部로 8軍, 海軍 戰鬪司令部로 7艦隊, 空軍 戰鬪司令部로 7空軍을 指定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美軍 戰鬪部隊와 韓國의 地作司, 해作詞, 공작사가 協助를 합니다. 卽 韓美 合參끼리는 MCM을 통해 戰略對話를 하고, 韓國 合參은 韓國軍을 支援하는 美國의 韓國 戰區支援司令部와 協助합니다. 그리고 韓國軍 地作司·해作詞·공작사는 美軍의 美 地上戰鬪司令部(8軍), 海軍戰鬪司令部(7艦隊), 空軍戰鬪司令部(7共軍)와 協助하는 것입니다.”

    ▼ 그런 시스템을 언제까지 構成합니까.

    “2007年 1月 韓美 兩國이 合意한 戰作權 轉換을 위한 履行計劃書에는 우리 合參이 韓半島 電球 作戰을 指揮 統制할 수 있도록, 하루빨리 韓美聯合司 水準의 戰鬪參謀組織을 編成한다는 內容이 있습니다. 2009年 初까지 이러한 編成을 完了하고 2009年 末에는 駐韓美軍司令部와 함께 韓國軍 朱雀界를 完成할 計劃입니다. 이 作戰計劃에 具體的인 美 增員戰力 規模와 展開日程, 그리고 作戰司 以下 祭臺의 指揮關係를 整理합니다.

    여기서 分明히 밝혀둘 게 있습니다. 聯合司가 解體돼도 韓半島 有事時 作動하는 駐韓美軍의 作戒에는 美 增援軍의 規模와 展開日程이 包含된다는 事實입니다. 2010年부터는 새로 만든 作戒에 따라 戰區級 練習을 펼쳐 作戒를 檢證해봅니다. 그리고 不足한 點을 補完해 2011年 말까지 韓美軍事協助 機構의 完全한 運用能力을 갖춥니다.”

    ▼ 平作權만 있는 韓國 合參은 事實上 行政司令部입니다. 이러한 合參에 戰作權을 준다는 것은 自己 作戒를 가진 戰區司令部로 만들겠다는 것이지요. 韓國軍 合參이 完全한 作戒를 만들어 運用하려면 補完해야 할 電力이 적지 않습니다.

    “그것을 Bridging Capability, 卽 橋梁電力이라고 하는데, 이 橋梁電力은 2012年까지 메우기로 했습니다.”

    合參의 陸軍 獨走도 制御

    ▼ 그렇다 해도 公衆 情報戰力은 絶對的으로 不足합니다. 軍事衛星은 勿論이고 U-2 같은 高空偵察機와 EP-3 같은 海軍 偵察機가 없는 韓國軍으로서는 美軍만큼 廣帶域의 情報를 蒐集할 수 없습니다.

    “公衆 情報作戰에서의 美軍 主導는 當分間 認定해야 합니다. 韓半島 電球에서 韓美 兩國軍은 ‘共同情報센터’를 設置해 ISR(情報, 監視, 偵察)이라고 하는 情報資産을 統合 運營합니다. 그리고 ‘統合航空宇宙作戰센터’를 만들어 韓美 空中電力度 統合運營합니다. 이 센터는 韓國 空軍이 能力을 갖출 때까지 美 空軍이 主導하고 韓國 合參議長의 指針을 받기로 했습니다. 이러한 體制는 美國의 尖端 航空宇宙前歷을 利用해 戰爭을 抑制하고 戰爭이 勃發하면 必勝을 保障하기 위한 措置입니다.”

    ▼ 非效率的인 兵力 配置를 줄이는 것과 함께 推進해야 할 것이 3軍의 均衡發展입니다. 合同性을 强化해 統合戰力을 發揮하려면 國防部의 ‘陸방부화’와 함께 合參의 陸軍化도 막아야 합니다.

    “3軍 均衡發展 이야기가 나오면 3軍을 하나로 묶자는 ‘統合軍’ 主張과 따로 運營하자는 ‘合同軍’ 主張이 對立합니다. 諮問委員 가운데 一部는 國軍總長이 陸海空軍을 統合 指揮하는 統合軍을 만들어야 한다고 主張했지만, 統一이 이뤄질 때까지는 3軍 間의 合意를 尊重하는 合同軍 體制를 維持하기로 했습니다.

    各軍은 各軍本部를 維持하되 前歷運營만큼은 合同性을 基盤으로 한 統合性을 追求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國防改革法 施行令 第11條에 合同性委員會를 設置한다는 內容을 넣었습니다. 이 委員會는 合同戰鬪發展에 關聯된 主要 案件을 審議합니다. 그리고 이 法 19兆 3項과 施行令 10兆 2項에 따라 ‘合同 特技’制를 導入합니다. 合參이나 聯合, 合同部隊에 勤務하는 將校는 이 特技를 가져야 하고, 이들에 對한 人事도 各軍이 아닌 合參에서 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合參議長이 이끄는 合參의 힘이 莫强해집니다. 따라서 合參 補職을 3軍이 어떻게 나눠 갖느냐가 問題가 됩니다. 合參 職位 가운데는 ‘海上作戰課長’처럼 特定 軍(海軍)李 맡아야 하는 ‘必須職位’가 있고, 3군에서 누가 맡아도 되는 ‘合同職位’가 있습니다. 施行令은 18兆 2項에 必須職位 數를 最少化하라고 規定해놓았습니다. 合參의 共通職位는 陸海空軍이 2代 1對 1의 比率로 맡는다는 原則을 세웠습니다.

    國防部 直轄部隊 指揮官은 特定群 將校가 3回 連續해서 보임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陸海空軍이 3代 1對 1의 比率로 돌아가면서 指揮官을 맡기로 했습니다. 施行令에는 合同性을 强化하는 條項이 6個나 들어가 있습니다. 合同性 强化는 合同槪念서 作成과 네트워크 中心의 合同戰場 運營體系 作成에도 반드시 反映하도록 했습니다.”

    ▼ 國防改革을 法制化하면 政權이 交替되더라도 繼續 推進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改革을 하다 보면 그 內容을 바꿔야 할 部分도 나올 텐데요.

    “改革法은 3年마다 改革 成果와 安保環境을 評價해 修正, 補完하도록 돼 있습니다. 그리고 軍 構造를 調整하려면 階級別, 兵科別, 職位別 空席(空席)을 再調整해야 한다는 點을 꼭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앞으로는 3軍 總長과 防衛事業廳長度 國會의 人事聽聞會를 거쳐 임명해야 합니다.”

    ▼ 戰力增强과 國防改革을 完遂하는 2020年까지 必要한 豫算을 確保할 수 있겠습니까.

    “實現 可能한 所要財源 確保計劃을 세워놓았습니다. 2006~2020年의 15年間 年平均 實質 經濟成長率이 4.8%로 展望됩니다. 같은 期間 年平均 物價上昇率은 2.3%일 것으로 推定되니, 둘을 더한 經常成長率은 7.1%입니다. 이 期間 사이의 年平均 政府 財政 增加率은 7.1%로 豫想됩니다. 그런데 國防費 增加率은 6.2%로 推定되니 充分히 負擔할 수 있습니다.”

    ▼ 增加率로 보면 그럴지 몰라도 絶對 金額으로 따져보면 다른 結果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1991~2005年 15年間의 年平均 國防豫算은 13兆6000餘億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直前年度人 1990年의 國防豫算은 6兆6000餘億원이었습니다. 15年間의 年平均 國防豫算은 直前年度 國防豫算의 2倍가 좀 넘습니다.

    2006~2020年 15年間의 年平均 國防豫算은 41兆4000餘億원으로 展望됩니다. 그런데 그 直前年度人 2005年의 國防豫算이 20兆8000餘億원이었습니다. 亦是 2倍 남짓한 規模지요. 1991~2005年은 國防費 增加率이 相對的으로 낮은 때였습니다. 그러한 때의 國防費를 負擔한 우리가 類似한 比率의 國防費 增加를 要求하는 2006~2020年의 負擔을 堪耐하지 못하겠습니까.”

    電力增强 豫算 마련 可能

    ▼ 그러한 計算에 따른다면 2006~2020年의 國防費 總額은 621兆원에 達합니다. 엄청난 金額이지요. 노무현 政府는 GDP 對比 國防費 比率을 3%로 올리겠다고 해서 最近에는 國防費 增加率이 매우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軍備競爭을 일으키는 것으로 理解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GDP 對比 國防費는 日本이 1.0%, 臺灣이 2.5%, 美國이 3.9%, 中國이 3.7%, 러시아가 4.4%입니다. 그런데 分斷된 韓國이 노무현 政府時節 2.4%를 記錄했다는 것은 軍備競爭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를 3%臺로 올린다 해도 美國, 中國, 러시아와 比較하면 如前히 낮은 數値입니다.

    2001~2005年 5年間 政府 財政增加率은 7.9%로 多少 높은 便이었습니다. 2006~2010年 5年間은 橋梁電力 增强이 時急하니 國防費 增加率을 높게 잡아서 年平均 9.9%로 했습니다. 그리고 2011~2015年 사이엔 年平均 7.8%로 하고, 戰力增强이 事實上 完了되는 2015~2020年엔 1.0%로 떨어뜨려서 15年 平均 6.2%를 이루자는 것입니다.”

    ▼ 過去 京釜高速電鐵(KTX) 事業은 始作은 微弱하게 했으나 中間에 變更을 해서 크게 키웠습니다. 戰力增强事業은 反對로 初期에는 9.9%의 增加率로 가다가 뒤로 갈수록 떨어지는데, 이렇게 될 수가 있을까요? 後半期에도 如前히 높은 增加率을 보이지 않겠습니까?

    “2006~2010年의 1段階에서는 軍 專門人力을 補充하고 進行 中인 事業을 繼續하며, 軍 構造 調整에 따른 所要全力을 마련해야 하니 9.9%로 높게 잡혔습니다. 國防改革의 核心은 ‘先(先) 電力增强, 後(後) 構造調整’입니다. 1軍과 3軍을 統合해 地作司를 만드는 等의 期間部隊 解體는 ‘後 構造調整’에 該當되므로 初期에 軍事費 增加率이 높은 것입니다. 期間部隊를 解體할 때는 國防費 增加率이 크게 떨어질 것입니다.”

    ▼ 이러한 國防改革에 對해 美國은 어떤 反應을 보였습니까.

    “國防改革案이 完成된 後 저는 特使 資格으로 美國을 訪問해 마이클 그린 白堊館 동아태 擔當 選任補佐官, 빅터 차 國家安保會議(NSC) 아시아 擔當 局長, 最近 駐韓美大使로 指名된 캐슬린 스티븐스 國務部 동아태 副次官補 等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우리의 國防改革 趣旨와 方向에 共感했습니다.

    그때 마이클 그린 選任補佐官은 MD(미사일 防禦體系) 같은 韓美同盟 强化 方案이 없어 아쉽다고 했고, 빅터 차 局長은 美國의 對北戰略과 韓國의 對北戰略이 共助되지 않은 狀態에서 韓國이 核을 가진 北韓과 共助한다면 美國은 駐韓美軍 問題를 再檢討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스티븐스는 駐韓美軍 役割을 韓半島에 局限하지 말고 東北亞 平和를 위한 것으로 擴大하자고 했습니다. 駐韓美軍의 戰略的 柔軟性을 내비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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