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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판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장수옥·鐵仙女 夫婦|新東亞

韓國판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장수옥·鐵仙女 夫婦

“우리가 싸우면 둘 中 하나는 죽을 거예요”

  • 組成式 동아일보 新東亞 記者 mairso2@donga.com / 寫眞·조영철 記者

    入力 2005-08-29 13: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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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簇只(足技)의 達人과 內功 高手의 結合
    • 跆拳道, 合氣道, 誘導, 복싱의 長點에 呼吸法 加味
    • “마음 가는 곳에 발이 가 있다”
    • 장풍처럼 펼쳐지는 坪數(平手)의 可恐할 威力
    • 力拔山氣蓋世(力拔山氣蓋世)의 內功武術
    • ‘怪力의 미니스커트’와 海兵隊員의 맞짱
    한국판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장수옥·철선녀 부부
    푸른잔디밭에 道服을 입은 세 사람이 섰다. 팽팽한 緊張이 흐른다. 男子가 둘, 女子가 하나다. 師弟間인 두 男子 中 머리가 벗겨진 사람과 女子는 夫婦다. 세 사람은 寫眞撮影을 위해 簡單한 武術示範에 들어갔다.

    먼저 夫婦間 示範. 男子가 女子를 向해 政權을 내지르자 女子가 주먹을 쳐내며 男子의 팔목을 꺾어버린다. 다음은 女子와 弟子. 마주선 狀態에서 女子가 氣合소리와 함께 弟子의 兩 허벅지를 부여잡고 어깨로 가슴팍을 밀어 넘어뜨린다. 마치 럭비의 태클 動作과 같다. ‘손쓸 겨를도 없다’는 말은 이런 境遇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夫人은 記者를 相對로도 같은 示範을 보였는데, 허벅지를 壓迫하는 팔심이 무시무시했다. 千斤 쇳덩어리가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이어 스승과 弟子의 示範. 若干 距離를 둔 狀態에서 스승이 弟子를 向해 몸을 날린다. 虛空으로 솟구친 後 두 발을 가위처럼 使用해 弟子의 목을 휘감아 돌리자 弟子는 옆으로 나동그라진다. 보는 이가 아찔할 程度로 危險한 動作이다. 다음은 下端 돌려차기. 낮게 구부린 姿勢에서 스승의 發이 컴퍼스처럼 圓을 그리자 다리에 打擊을 입은 弟子의 몸이 空中으로 튕겨진다. 돌아가는 발은 보이지 않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示範을 보인 夫婦는 장수옥(57) 大寒特功武術協會 總裁와 ‘鐵仙女(鐵扇女)’라는 別名으로 널리 알려진 김단화(58)氏. 結婚 前 두 사람은 서로 다른 武術을 硏磨했다. 張 總裁의 武術이 外供이라면 鐵仙女의 武術은 內功이다. 張 總裁는 25年間 靑瓦臺 警護室 武術事犯을 지냈고, 鐵仙女는 處女 時節 內功武術의 最高 實力者로 通했다. 特功武術은 바로 張 總裁의 獨自的인 外功過 鐵仙女가 修鍊한 內功이 합쳐져 完成된 것이다.

    軍 特殊部隊와 靑瓦臺 警護室을 中心으로 傳播된 特功武術은 어떠한 武術보다 實戰的인 武術로 評價받고 있다. 打擊氣를 中心으로 하되 잡기와 꺾기, 태클 等 實戰에서 要緊하게 쓰이는 온갖 技術을 담고 있는 까닭이다. 全國에 200餘 個의 圖章이 있으며 正式科目으로 가르치는 大學도 늘고 있다. 軍人을 包含해 그동안 特功武術을 배운 사람은 50萬名에 이른다고 한다.



    特功武術協會의 올해 主要 事業目標는 中國 進出. 지난 5月 中國 옌지에 圖章을 세운 것이 그 信號彈이다. 앞으로 2年 안에 中國에 200個의 圖章을 세운다는 野心 찬 計劃이다. 이를 위해 오는 9月 張 總裁가 直接 示範團을 이끌고 中國에 건너갈 豫定이다.

    特功武術의 中國 進出에 맞춰 張 總裁 夫婦의 武術人生을 照明했다. 따로따로 날을 잡아 張 總裁 인터뷰는 서울 신영동에 있는 特功武術協會 事務室에서, 鐵仙女 인터뷰는 구기동 自宅에서 進行했다. 그리고 鐵仙女를 인터뷰한 날 夫婦의 武術示範 場面을 撮影했다.

    1部 ‘簇只(足技)의 達人’ 장수옥

    武術人들이 大體로 그렇듯 장수옥 總裁도 눈매가 날카롭고 눈썹이 짙은 强靭한 風貌다. 신장 169㎝의 크지 않은 體軀지만 가슴은 바위처럼 단단해 보이고 배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 검은 武術服을 입은 그가 朴正熙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等 歷代 大統領과 握手하는 場面을 담은 寫眞들이 事務室 壁을 裝飾하고 있다. 젊을 때 寫眞을 보니 只今보다 더 날카롭고 날렵하다.

    그는 自身의 武術人生 이야기를 들려주기 前에 外供과 內功의 差異點부터 說明했다. 그에 따르면 外供은 外的인 힘, 곧 筋肉의 힘에서 나오는 것으로 一般 格鬪技 武術이 이에 該當한다. 反面 內功은 內的인 힘, 곧 氣(氣)를 모아 發散하는 것이다. 內功은 겉으로는 傷處를 입히지 않지만 속으로는 外供보다 더 致命的인 負傷을 입힌다.

    “內功 攻擊을 받으면 겉보기엔 아무 異常이 없어요. 그런데 속이 메슥거리거나 吐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게 經驗者들의 共通된 얘기예요. 靑瓦臺 警護室에 처음 들어갔을 때 차지철 室長 앞에서 내공을 선보인 적이 있습니다. 武術 有段者인 警護室 職員 한 名에게 防護服을 입힌 狀態에서 坪數(平手)를 펼쳤는데, 갈비뼈가 부러져 國軍統合病院에 入院했습니다. 나중에 느낌을 물어보니 몸이 空中에 뜬 것처럼 머리가 멍하고 속이 不便하고 몹시 不快했다고 하더군요.”

    “모든 武術의 基本은 陸上”

    한국판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장수옥·철선녀 부부

    ‘簇只의 達人’ 장수옥 總裁의 젊은 時節 告祝次期(왼쪽)와 날아차기.

    坪數는 손바닥으로 相對方의 急所나 穴을 攻擊하는 것으로 長風을 聯想케 한다. 靑瓦臺 警護室 武術事犯으로 在職時 그는 이처럼 徹底하게 實技 爲主로 職員들을 훈련시켰다. 警護室 職員들은 武術이라면 다들 한가락씩 한다. 밖에 나가면 누구라도 體育館 事犯을 하기에 不足함이 없는 實力을 갖추고 있다. 그런 實力者들을 가르치고 制壓하기 위해서는 完璧한 示範을 보여야 한다.

    처음에 警護室 職員들은 特功武術에 對해 拒否感을 나타냈다. 그때껏 自身들이 硏磨해온 跆拳道나 合氣道, 柔道, 劍道와 比較해 ‘뿌리가 없는 武術’이라며 얕잡아본 것. 하지만 時間이 흐르면서 이들은 特功武術이 가진 實戰性의 魅力에 빠져들었고, 나중에는 特功武術의 傳播者로 나서게 됐다.

    2002年 3月 靑瓦臺 警護室에서 退職한 張 總裁는 自敍傳을 펴냈다. ‘大統領 警護員들의 永遠한 師傅’라는 冊 題目은 바로 그에게서 特功武術을 배운 警護室 弟子들이 붙인 것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全北 金堤. 4남1女 中 둘째아들이었다. 初等學校를 다닐 때부터 運動에 素質을 보였다.

    “모든 武術의 基本은 陸上입니다. 어떠한 運動도 달리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돼요. 그만큼 基礎體力이 튼튼해야 한다는 거죠. 내 境遇 體力만큼은 타고난 것 같습니다. 달리기를 하면 늘 1等을 했고, 提起를 차면 200m 트랙을 한 바퀴 도는 동안 한番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았습니다. 蹴球도 잘했고요. 또 싸움이 붙으면 먼저 때리고 재빨리 도망치는 재주가 뛰어났어요. 그래서 웬만해선 맞지 않았죠.”

    그의 特技 中 하나인 告祝次期(뛰어차기)는 初等學校 時節부터 硏磨한 技術이다. 겨울에 그는 親舊들과 함께 敎師(校舍) 처마 밑에 매달린 고드름 따기 놀이를 즐겼다. 다른 아이들은 펄쩍 뛰어서 손으로 따냈지만 그는 발로 차서 떨어뜨렸다. 그 程度로 몸놀림이 가볍고 날렵했다.

    卒業 後 집에서 4㎞ 떨어진 이리中學校에 들어갔다. ‘村놈’이라고 무시당하기 싫었던 그는 아이들과 이틀이 멀다하고 주먹다짐을 벌였다. 그토록 자주 싸움을 했지만 그의 記憶에 맞은 적은 거의 없다. 워낙 눈이 빠르고 몸이 敏捷해 相對가 그를 맞히기가 힘들었다는 것.

    그가 本格的으로 運動을 始作한 契機는 再修生 時節 서울에서 야바위꾼한테 얻어맞은 事件이다. 中3 時節 그는 서울에 있는 某 高等學校를 目標로 熱心히 工夫했으나 落榜했다. 그대로 주저앉기엔 自尊心이 許諾지 않았다. 서울로 올라간 그는 親戚집에 얹혀살면서 入試學院에 다녔다. 어느 날 偶然히 서울驛 附近에 갔다가 야바위꾼들에게 걸려들어 갖고 있던 돈을 몽땅 잃었다. 돈을 돌려달라고 要求하자 周邊에 있던 바람잡이들이 골목 안쪽으로 끌고 가선 흠씬 두들겨 팼다. 復讐心에 불탄 少年 장수옥은 그때부터 武術을 배워야겠다고 決心했다.

    처음 始作한 것은 跆拳道였다. 跆拳道를 어느 程度 배운 다음에는 合氣道 道場에 다녔다. 合氣道에 한창 재미를 붙일 무렵 父親이 집으로 불러내렸다. 이듬해 이리上告(現 益山 제일고)에 들어간 그는 合氣道張에 登錄을 했다. 授業이 끝나면 곧바로 道場으로 달려갔고, 圖章을 마치고 집에 와서도 道服으로 갈아입고 隣近 初等學校 運動場에 가서 발차기 練習을 했다. 한마디로 運動에 미쳤던 것이다.

    그의 運動方式은 基礎體力 訓鍊과 技術訓鍊을 竝行하는 것이었다. 먼저 運動場을 數十 바퀴 도는 것으로 下體를 鍛鍊한 다음 나무를 相對로 발차기 練習을 했다. 돌려차기와 膾축차기를 集中 硏磨하고, 나무를 차고 가지 위까지 뛰어오르는 訓鍊을 反復했다.

    집에 들어갈 때는 大門을 利用하지 않고 늘 담을 뛰어넘었다. 그의 발차기 技術 中 가장 돋보이는 告祝차기는 이런 日常的인 訓鍊을 통해 完成된 것이다. 그의 告祝次期 最高 記錄은 3m70cm. 쪼그려 앉은 姿勢에서 空中으로 솟구쳐 二重 점프를 해 目標物을 발로 차는 高難度 技術이다.

    그는 圖章을 다닌 지 1年 만에 3段을 땄다. 高校 2學年이 되면서는 修鍊生들을 가르칠 程度로 實力이 急成長했다. 放學 때면 大學生들이 塗裝에 와서 그에게 배우기도 했다. 3學年 때는 4段을 따고 正式으로 師範 任命狀을 받았다.

    몰매 맞으며 護身術 익혀

    한국판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장수옥·철선녀 부부

    장수옥 總裁는 高手들을 찾아다니며 하나 둘 익힌 技術을 自身의 專攻인 合氣道에 椄木했다.

    學生 時節 누구나 그렇지만 運動을 하면 폼을 재게 마련이다. 益山 市內엔 깡牌가 많았다. 그 中에서도 서울의 鳴動에 該當하는 英正統이라는 繁華街는 暴力組織의 主 活動舞臺였다. 날로 느는 運動實力에 號基가 發動한 그는 가방 밖으로 道服의 검은 띠를 늘어뜨린 채 英正統을 누비고 다녔다. 圖章에서 익힌 實力을 實戰에서 써먹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暴力組織과 衝突이 잦았고 맞기도 많이 맞았다. 1對 1의 싸움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하지만 暴力組織과의 싸움에서는 혼자 여러 名을 相對해야 하는 境遇가 많아 맞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몰매를 맞으면서 그가 攄得한 理致 中 하나는 맞을 때는 숨을 안 쉬어야 한다는 것. 숨만 잘 調節하면 아무리 맞아도 죽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또 精神만 바짝 차리면 어떤 危機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았다. 그의 이러한 實戰 體驗은 뒷날 特功武術을 創案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그 時節 記憶에 남아 있는 事件 한 토막.

    “益山驛 附近 三南劇場 골목에서 몰매를 맞을 때는 내 人生이 끝나는 줄 알았어요. 거리를 걷고 있는데 웬 녀석이 妊娠한 女子를 괴롭히고 있는 거예요. 이런 일을 막지 못한다면 運動을 해서 뭣하냐는 생각에 달려들었지요. 그러자 어디에 있었는지 7~8名의 牌거리가 몰려나와 나를 에워쌌습니다. 하나같이 덩치들이라 밀릴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사람은 스스로 發見을 못해서 그렇지 누구나 潛在的으로 護身術을 갖추고 있습니다. 到底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담벼락에 몰려 몰매를 맞으면서 奇拔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앞에 있는 녀석의 가슴을 발로 차서 쓰러뜨린 다음 그 놈 等을 딛고 담을 넘어 도망쳤습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成長했습니다. 成長이라는 게 다른 게 아니라 肝덩이가 커진 거지요.”

    卒業 後 그는 直接 圖章을 차렸다. 작은아버지가 運營하는 鐵工所 한쪽을 빌려 만든 허름한 圖章이었다. 어느 날 한 暴力組織에서 사람을 보내 만나자고 했다. 하도 懇曲하게 要請하기에 가봤더니 구두도 벗겨주고 劇場에도 空짜로 들어가게 해주는 等 ‘좋은 點’李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組織에선 그에게 中間보스 자리를 提議했다.

    그는 暫時 誘惑에 흔들리기도 했지만 집에 돌아와 곰곰 생각해보고 나서 그 길은 自身의 길이 아니라고 判斷하고 그들과 接觸을 끊었다. 거기엔 아이들을 가르치는 武術 指導者라는 責任感이 强하게 作用했다. 또 뱀대가리가 될지언정 龍꼬리가 되고 싶지 않다는 傲氣도 發動했다. 그 世界에서 先輩들을 제치고 보스가 되려면 數十年은 걸릴 터였다. 그는 아무에게도 머리 숙이고 싶지 않았다.

    武術 高手들을 찾아나서다

    그가 天生配匹人 鐵仙女를 알게 된 것은 益山市 송학동에 새로 體育館 門을 연 1970年 가을이다. 某 週刊雜誌에 仁王山에서 武術을 硏磨한 處女가 이로 鐵絲를 끊고 주먹으로 바윗돌을 부수는 怪力을 發揮한다는 記事가 실렸다. 記事에 따르면 그 女子는 映畫俳優 못지않은 美貌를 갖췄다고 했다. ‘最高의 武術人’이라는 自負心을 갖고 있던 그는 女子와 겨루고 싶어 當場 서울로 올라갔다.

    當時 장수옥이라는 이름은 武術界에서 꽤 알려져 있었다. 特히 ‘簇只(발차기 技術)에 關한 限 大韓民國 最高’라는 坪이 따라다녔다. 그는 自身의 實力을 評價받고 새로운 武術을 배우고 싶어 武術 高手라고 알려진 사람들은 거의 다 찾아다니며 挑戰을 請했다.

    하지만 對決이 벌어진 적은 別로 없다. 大部分의 高手가 自身의 特技를 說明하기만 하고 實戰은 꺼린 탓이다. 예컨대 仁川에 中國 武術人 十八技(十八技) 固守가 있다고 해서 찾아간 적이 있다. 立會人이 必要할 듯싶어 다른 圖章의 館長과 함께 寫眞機를 들고 찾아가 한手 가르쳐줄 것을 要請했다. 하지만 그가 말만 앞세우고 겨루기에는 도무지 應하지 않아 實力對決은 霧散됐다.

    그렇지만 所得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高手들을 쫓아다니며 하나 둘씩 보고 익힌 技術을 自身의 專攻인 合氣道에 椄木함으로써 全天候 綜合武術人 特功武術의 土臺를 마련한 것이다. 張 總裁가 안 해본 武術은 거의 없다. 柔道와 레슬링, 太極拳, 당랑권, 甚至於 拳鬪까지 익혔다. 拳鬪에서는 빠른 발놀림을 배웠다.

    當時 鐵仙女는 鍾路 團成社 近處 백궁빌딩에 있는 圖章에서 修鍊하고 있었다. 益山에서 올라간 張 總裁는 挑戰狀을 내밀었다. 하지만 鐵仙女 옆에는 內功武術의 代價인 淸算巨事가 있었다. 뒷날 國仙徒를 創始한 淸算巨事는 日本 TV에 出演하는 等 한창 有名稅를 타는 鐵仙女를 徹底하게 保護했다. 안 만나주는 데야 別수없었다. 張 總裁는 鐵仙女의 이름을 가슴에 새긴 채 하릴없이 益山으로 내려왔다.

    그의 ‘꿈’李 實現되는 데는 2年이 채 안 걸렸다. 어느 날 新聞에 아르헨티나 武術 示範團을 募集한다는 公告가 났다. 그는 記事를 보자마자 서울로 올라와 參加申請을 했다. 審査에 通過한 後 示範團 參加者 모임에 나가보니 거기에 철仙女가 앉아 있는 게 아닌가.

    한국판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장수옥·철선녀 부부

    鐵仙女 김단화氏는 仁王山에서 淸算居士에게 內功武術을 익혔다.

    2部 ‘怪力의 미니스커트’ 鐵仙女

    鐵仙女 김단화氏는 2002年 男便 장수옥氏가 靑瓦臺 警護室 事犯職을 그만둘 때까지 10年間 特功武術協會 會長을 지냈다. 公職者이던 男便 代身 協會를 이끈 것이다. 男便이 돌아온 後로는 協會 副會長을 맡고 있다.

    젊은 時節 寫眞을 보면 그가 왜 뭇 男子들에게 人氣가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예쁘장한 얼굴에 군살이라곤 없는 날씬한 몸매. 게다가 本人의 主張대로라면 歌手 윤복희보다 먼저 미니스커트를 입었을 程度로 멋을 낼 줄 아는 女子였다. 그런 멋쟁이 處女가 이마로 松板을 擊破하고 가슴에 情을 갖다 대고 해머로 쳐도 끄떡없는 怪力을 發揮했으니, 男子들, 特히 武術깨나 하는 男子들의 가슴이 설렐 만도 했으리라.

    特功武術協會 總裁室엔 1979年 6月 靑瓦臺 示範을 끝낸 金氏를 朴正熙 大統領이 激勵하는 寫眞이 걸려 있다. 當時 朴 大統領은 그의 손을 잡으며 “웬 女子가 이렇게 힘이 세?” 하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비록 結婚해 아이를 낳은 몸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펄펄 날았다.

    그로부터 26年이 지난 只今, 그는 還甲을 바라본다. 서글서글한 눈매는 如前하지만 몸집은 處女 때보다 두 倍假量 불어났다. 오랜 內功 修鍊의 影響인지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그는 朴正熙 전두환 노태우 前職 大統領 앞에서 男便과 함께 펼친 示範을 비롯해 모두 일곱 次例 靑瓦臺에서 武術 示範을 보였다.

    “結婚하고 運動을 그만둔 내가 다시 道服을 입은 것은 純全히 男便을 위해서였어요. 男便의 武術示範에 내가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죠. 靑瓦臺 示範을 보인 後 나한테도 警護室에 들어오라는 提議가 있었어요. 하지만 拒絶했어요. 나는 오로지 男便 뒷바라지를 하겠다고. 男便을 위해 나는 빠져야 한다고. TV 出演도 警護室에 있는 男便 때문에 制約을 받았어요. 하지만 男便이 實力을 인정받아 警護室 武術事犯이 된 것으로 제 삶은 成功한 셈이에요.”

    金氏의 故鄕은 大邱. 大家族이었다. 6男4女 中 셋째딸로, 全體 順序로는 여섯째다. 基督敎 집안에서 자라났지만 佛敎도 가까이 했다. 어릴 때부터 ‘부처님 오신 날’엔 꼭 절에 갔다. 生日이 初八日人 陰曆 4月8日이라는 奇緣 때문이었다.

    “너는 工夫 많이 하면 短命한다”

    高等學校를 卒業하기 前까지 運動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素質을 나타낸 쪽은 音樂과 舞踊이었다. 비록 歌手가 되지는 못했지만 音盤 吹入도 했다. 高校 卒業 後 ‘大學은 男子들이 于先 가야 한다’는 父母의 方針에 따라 進學을 抛棄했다. 周易에 훤했던 父親은 “四柱를 보면, 너는 工夫를 많이 하면 短命한다”고 했다.

    大學 꿈을 접은 그는 뭔가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절을 찾아 나섰다가 偶然히 淸算擧事를 알게 됐다. 北漢山 도선사에 있는 청담스님을 통해서였다. 淸算巨事는, 절에 있긴 했지만 金氏의 表現대로라면 運輸(雲水)하는 스님이었다. 말 그대로 구름처럼 물처럼 떠도는….

    “因緣이라는 게 참 무서운 것 같아요. 내 生日이 初八日이잖아요. 게다가 이름이 佛敎와 關聯된 것 같아요. 붉을 單(丹)字에 고루 禍(和)字, ‘丹田의 힘을 고르게 한다’는 뜻으로 아버지가 健康한 몸을 가지라고 지어준 이름이지요. 청담스님이 내 이름을 듣더니 대뜸 ‘丹田의 힘을 모아 고르게 퍼뜨린다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布敎하는 것을 뜻한다’며 ‘너는 이름부터 佛敎와 因緣이 있다’고 하더군요.”

    金氏는 처음 ‘先生님(淸算擧事)’을 만날 때만 해도 運動이라는 건 해본 적이 없었고 丹田이 뭔지도 몰랐다고 한다. 그렇지만 淸算巨事가 ‘하겠냐’ 물었을 때 조금도 躊躇하지 않고 ‘하겠다’고 對答했다. 그것이 出發이었다.

    “내 몸에 氣質이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 10男妹가 모두 ‘통뼈’로 몸이 단단했어요. 軍 出身인 아버지는 劍道 有段者였고, 첫째오빠는 跆拳道, 둘째오빠는 力道 選手였지요. 淸算居士에게 運動을 배우기 始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몸에 엄청난 힘이 생겨나더군요. 배우는 速度도 빨랐고요.”

    元來 淸算擧事에게는 두 名의 男子 弟子가 있었다. 淸算巨事는 이들을 데리고 公演하곤 했다. 그런데 平素 公演 興行을 위해서는 女子 修鍊生이 必要하다고 생각하던 次에 金氏가 제 발로 찾아왔던 것이다.

    金氏는 仁王山에 있는 三王史라는 절에서 修鍊을 始作했다. 淸算巨事가 가르치는 內功武術의 基本은 呼吸法이었다. 呼吸法의 基礎는 흡(吸), 지(止,) 號(呼) 3段階. 卽 5秒間 들이마시고 5秒間 中止하고 5秒間 내쉬는 것이다. 그렇게 6個月間 丹田呼吸과 坐禪만 했다. 6個月이 지나자 어느 程度 呼吸의 原理를 깨우치게 됐다.



    金氏가 淸算擧事로부터 배운 內功은 借力(借力)과 비슷하다. 借力에는 約(藥)借力, 桐(銅借力, 수(水)借力, 精神(精神)借力이 있다. 藥茶力은 虎狼이뼈, 動車力은 쇳가루, 數次力은 藥水를 먹고 힘을 내는 것이고, 精神借力은 氣를 모으는 것이다. 金氏의 內功은 精神借力에 가깝다.

    “내가 道에 通達한 사람은 아니지만, 오랜 修鍊을 통해 氣를 모아 힘을 發散하는 方法은 알아요. 基本은 呼吸이에요. 意識이 있는 곳에 氣가 있습니다. 意識을 갖고 하는 內功運動이므로 精神集中이 이뤄지지 않으면 안 돼요. 소(小)宇宙체인 내 몸의 모든 機能이 원활해질 때 呼吸도 되고 힘도 나옵니다. 알고 보면 簡單한 理致인데 그 理致를 깨닫는 過程이 宏壯히 힘들어요. 그런데 修鍊을 오래 하다 보면 어느 瞬間 깨닫게 되고 힘을 自由自在로 쓰게 됩니다.”

    金氏는 記者에게 自身의 팔뚝을 만져보라고 하더니 ‘으랏’ 하고 氣合을 넣었다. 사람의 팔이 아니라 쇠뭉치 같다. 허벅지도 마찬가지다. 송곳으로 찔러도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딴딴한 筋肉. 딱 한 番 筋肉强化 運動을 한 적이 있는데, 運動을 하는 瞬間 內功의 氣가 모아지는 바람에 여간해 빠지지 않는 鋼鐵 筋肉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나는 싸울 때 無條件 잡고 싸워요. 相對에게 距離를 주지 않고 딱 잡고 못 움직이게 하고는 박치기를 한다든지 해서 한放에 보내는 거죠. 急所를 다 아는 데다 워낙 파워가 있으니….”

    鐵仙女는 淸算居士가 지어준 一種의 號다. 글字 그대로 ‘쇠負債를 펼치는 女子’라는 뜻이다. 男子 弟子 둘은 各各 新歷史(神力士), 태歷史(太力士)로 불렸다. 鐵仙女가 어느 水準에 오르자 淸算巨事는 그를 舞臺에 세웠다. 예쁘장한 얼굴, 가냘픈 몸매에서 뿜어져 나오는 怪力. 鐵仙女가 登場하기만 하면 公演場은 후끈 달아올랐다.

    1970年 日本 TV放送社 關係者가 所聞을 듣고 韓國을 찾아와 鐵仙女를 만났다. 그는 鐵仙女의 妙技 몇 가지를 보고 푹 빠져버렸다. 그의 周旋으로 鐵仙女는 日本 TV 쇼 프로그램에 出演했다. 記者는 鐵仙女를 인터뷰하기 前 特功武術協會 事務室에서 當時 放送을 錄畫한 비디오테이프를 봤다. 7㎝ 두께 松板을 이마로 擊破하기, 가슴에 징 박고 해머로 치기, 가슴에 세 겹으로 바윗덩어리 올리고 해머로 내리쳐 부수기, 兩팔에 감은 廣木을 서로 反對쪽으로 달리는 오토바이 2代에 連結해 끌어당기기 等 무시무시하고 아슬아슬한 場面이 담겨 있었다.

    鐵仙女가 日本에서 돌아온 後 몇몇 週刊雜誌가 ‘鐵船(鐵線) 끊고 바윗돌 부수는 怪力의 아가씨’ ‘仁王山에서 내려온 怪力의 미니스커트’ 따위의 題目으로 그에 關한 記事를 다뤘다.

    1971年 12月 鐵仙女는 派越將兵 演藝人慰問公演에 參加했다. 한 달 동안 베트남에 머물며 全 部隊를 돌았는데 박치기 示範만 스물아홉 次例나 했다고 한다. 慰問公演團 中 철仙女를 비롯한 女子들은 公演할 때를 빼곤 房에 거의 갇혀 지내다시피 했다. 部隊側에서 房門을 밖에서 자물쇠로 잠근 것. 그 前의 慰問公演에서 有名歌手 金某氏 等 一部 女子 演藝人들이 ‘事故’를 當하거나 스캔들로 物議를 빚어 類似한 事態를 防止하기 위한 措置였다고 한다.

    當時 逸話 한 가지. 어느 날 밤 公演을 마친 鐵仙女를 部隊長이 찾았다. 낮에 본 公演이 印象 깊었다며 茶 한盞 하자며 自身의 官用車를 보냈다. 그런데 한 30分을 달렸는데도 部隊長 官舍가 나타나지 않았다.

    地理도 모르는 데다 깜깜한 밤이라 鐵仙女는 車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문득 異常한 생각이 들어 運轉兵을 다그쳤다. 怯을 주기 위해 일부러 거칠게 말했다.

    “야, 너 낮에 내 公演 봤어?”

    “못 봤습니다.”

    “그것도 안 보고 뭐 했어, 임마. 只今 어디로 가는 거야. 나 도로 데려다줘, 임마.”

    그 瞬間, 꽝 소리와 함께 그는 車밖으로 나가떨어졌다. 差가 나무를 들이받은 것이다. 精神을 차려보니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衝突 瞬間 車 앞琉璃에 부딪친 것이다.

    한국판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장수옥·철선녀 부부

    還甲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기운이 넘치는 철仙女 김단화氏가 태클 示範을 보이고 있다.

    事緣은 이랬다. 鐵仙女가 묵던 宿所에서 部隊長 官舍까지는 가까운 距離였다. 그런데 運轉兵이 問題였다. 술을 마신 狀態에서 運轉대를 잡았던 것. 그는 車에 탄 미니스커트 차림의 鐵仙女를 보자 그만 넋이 나가 部隊長 官舍로 가지 않고 領內를 하염없이 돌았다. 그러다 鐵仙女가 갑자기 걸걸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자 놀라 運轉대를 놓친 것이다.

    얘기를 들려주는 鐵仙女도 記者도 拍掌大笑했다. 베트남에 到着한 지 一週日 만에 일어난 事故였다. 鐵仙女는 周邊의 挽留를 뿌리치고 이마를 꿰맨 狀態에서 繼續 舞臺에 섰다. 그 바람에 이마의 傷處가 오랫동안 아물지 않았다.

    鐵仙女가 武術을 硏磨한 期間은 約 5年. 배우면서 舞臺에 서고 舞臺에 서면서 배웠다. 公演中 더러 失手도 했다. 머리로 받든 주먹으로 치든 擊破가 이뤄지지 않으면 엄청난 苦痛이 따른다. 자칫 머리가 깨지거나 손뼈가 부러지기 쉽다. 大田 公演에서는 蠹政(頭頂)擊破, 卽 머리로 松板을 들이받았는데 깨지지 않아 한 10分間 恐慌狀態에 빠진 적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에 再試圖, 期於코 成功했다. 光州 公演에서는 가슴에 정을 대고 해머로 치는 示範을 보이다 情이 튕겨져 하마터면 얼굴에 큰 傷處를 입을 뻔했다. 大邱 公演에서는 팔에 감은 廣木이 오토바이 체인에 휘감기는 바람에 몸이 끌려가는 危險한 瞬間이 演出되기도 했다.

    버스 안의 無差別 毆打

    그 時節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은 鐵仙女는 男子들과 많이 싸웠다. 自身의 表現대로라면 “그때는 싸움하느라 바빴다”고 한다. 是非를 거는 男子가 있으면 도망가는 게 아니라 “야, 이리 따라와 봐” 하고 소리를 질러 機先을 制壓하거나 박치기로 혼내줬다.

    그 時節의 몇 가지 逸話. 한番은 洞네에서 休暇 나온 海兵隊 兵士와 大판 붙었다. 술에 醉한 海兵이 집적거리기에 거친 말로 應酬했다가 先制攻擊을 當했다. 뺨을 얻어맞았는데, 턱이 틀어질 程度의 强打였다. 곧바로 反擊에 나선 鐵仙女는 박치기로 海兵의 얼굴을 뭉개고는 옆에 쌓여 있던 煉炭재로 無差別 攻擊했다. 그런 다음 全速力으로 내뺐다. 海兵이 뒤에서 辱을 하면서 따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게거품을 문 그는 鐵仙女를 찾아 온 洞네를 헤맸다. 鐵仙女는 海兵이 休暇를 끝내고 部隊로 復歸할 때까지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아는 美粧院에 서 숨어 지냈다.

    버스 안에서 싸운 적도 있다. 座席에 앉아 가는데 옆에 앉은 靑年이 자꾸 몸을 기대왔다. 느낌이 異常해 고개를 돌려보니 異常한 짓을 하는 게 아닌가. 鐵仙女는 窓쪽에 앉은 狀態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靑年을 窓쪽으로 밀어붙이고는 주먹과 발로 닥치는 대로 加擊했다. 키가 長대 같은 靑年 하나가 다가와 그女의 팔을 잡으며 “아가씨, 그만해” 하며 말리지 않았더라면 무슨 事故가 났을지 모를 일이었다. ‘變態 靑年’은 結局 다음 停車場에서 쫓기듯 내려야 했다.

    美貌에 武術을 兼備한 鐵仙女 周邊엔 男子가 들끓었다. 하지만 콧대 높은 鐵仙女는 웬만한 男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르헨티나 武術 示範團에 合流해달라는 要請을 받았다. 最終 選拔된 사람은 그를 包含해 모두 여덟 名. 그中 한 男子가 눈길을 끌었다. 다른 男子들은 모두 그女에게 잘 보이려 애를 썼는데 그는 關心없다는 듯 默默히 演習에만 沒頭했다. 示範團 中 實力이 가장 뛰어났는데, 特히 발차기가 一品이었다.

    3部 世界 最强 特功武術의 誕生

    “萬若 우리가 싸운다면 둘 中 하나가 죽거나 그 길로 夫婦生活이 끝날 거예요. 結婚할 때 이 사람에게 말했죠. ‘平生 내 얼굴에 손대지 말라’고. 그 約束을 이제껏 지켰어요.”(철선녀)

    “只今도 집사람은 ‘當身도 射程距離 안에 들어오면 나한테 안 된다’고 해요. 內功의 威力이죠. 하지만 事情거리 밖에선 나한테 안 되죠. 싸움에 關한 限 여간해선 內功이 外供을 當할 수 없죠.”(장수옥 總裁)

    1972年 아르헨티나 示範團 一員으로 만난 두 사람은 정작 아르헨티나에는 가지 않았다. 張 總裁가 스물넷, 鐵仙女가 스물다섯. 木石인 줄만 알았던 두 武術人의 가슴에 聯政이 싹텄다. 어느새 外國行은 關心 밖으로 밀려났다.

    “몇몇 雜誌社에서 이 사람을 撮影하러왔는데, 이 사람이 굳이 나한테 姿勢를 잡아달라고 付託하더라고요. 어느 날 내가 이 사람을 茶房으로 불러냈어요. ‘示範團에서 우리 둘의 比重이 80%를 차지하는 것 같은데 굳이 아르헨티나까지 갈 必要 있겠냐’고 했더니 이 사람도 同意하더라고요. 그때 이미 내 아내로 取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이 사람이 하는 內功을 꼭 배워 내 武術의 境地를 넓히겠다는 欲心도 있었고요.”(장 總裁)

    한국판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장수옥·철선녀 부부

    張 總裁의 下端 돌려차기에 相對의 몸이 空中으로 튕겨 오른다.

    “웬만한 男子는 男子로 보이지도 않았어요. 運動하는 男子들도 別로 안 좋아했죠. 조금 한다 하면 ‘똥폼’이나 재려 해서. 그런데 이 사람은 實力이 뛰어난데도 誇示도 안 하고 自己 할일만 하더라고요. 시골 出身이라 그런지 純眞하고 寡默했어요. 運動도 깨끗했죠. 그런 點이 맘에 들었습니다.”(철선녀)

    어느 비 오는 날 張 總裁는 鐵仙女와 같이 雨傘을 쓰고 걷다가 瞬間的으로 끌어안았다. 女子는 아무런 抵抗 없이 가슴에 쏙 들어와 안겼다. 불길이 일어나는 瞬間이었다. 以後 두 사람은 本格的으로 데이트를 즐겼고 結婚을 約束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兩家의 反對가 만만찮았다. 大邱 土박이인 鐵仙女의 家族들은 “全羅道놈이, 돈이 있냐, 얼굴이 잘생겼냐” 하며 못마땅해했다. 張 總裁 집안에서는 “何必이면 運動한 女子냐” “都市에서 자라난 女子가 시골 와서 어떻게 살겠냐”며 反對했다.

    “야가, 校(敎)가 틀리네”

    張 總裁는 鐵仙女의 손목을 잡아끌고 故鄕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鐵仙女는 張 總裁 어머니에게 人事하다가 重大한 失手(?)를 저질렀다. 절을 올린다는 게 無心코 兩 손바닥을 위로 하는 佛敎式으로 했던 것. 瞬間 어머니의 表情이 싹 바뀌었다.

    “야가, 校(敎)가 틀리네.”

    찬바람 나게 돌아앉은 어머니는 “니들 結婚은 絶對로 안 된다”고 宣言하고는 다락房에 올라가 禁食祈禱에 들어갔다.

    하지만 鐵仙女도 지지 않았다. 어머니가 다락房에서 내려오기 前까지는 서울로 올라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孝子인 張 總裁도 이때만큼은 不孝子를 自請했다.

    “平生 제 얼굴 보지 않으려면 알아서 하세요. 다른 건 다 讓步해도 이것만은 讓步 못해요.”

    結局 어머니는 一週日 만에 다락에서 내려왔고, 鐵仙女를 받아들였다.

    鐵仙女의 媤집살이는 酷毒한 것이었다. 뒷바라지해야 할 食口가 열두 名이나 됐다. 媤할머니, 媤父母, 媤아주버니 內外, 조카 둘, 媤同生 둘…. 게다가 그토록 좋아하던 運動도 그만둬야 했다. 하지만 鐵仙女는 힘든 내色 한番 하지 않았다. 宗敎도 媤어머니를 따라 基督敎로 바꾸고는 熱心히 信仰生活을 했다.

    “率直히 석 달 살고는 도망쳐 나오고 싶었어요. 하지만 참았죠. 절에서 坐禪하면서 忍耐하는 法을 배웠잖아요. 아무리 힘든 媤집살이도 新郞이 좋으면 다 하게 돼 있어요. 男子는 하늘이고 女子는 땅이에요. 男便을 하늘과 같이 섬겨야 한다고 배웠고 그대로 實踐했습니다. 내 性質도 普通이 아닌데 이 사람은 揮發油더라고요. 完全히 잡혀 살았죠. 이제 나이 먹어 補償을 받고 있어요. 이 사람이 只今 나한테 얼마나 잘하는데요.”

    마치 武俠誌에 나오는 얘기처럼 철仙女를 아내로 받아들인 後 張 總裁의 武術은 日就月將했다. 어떤 冊에서 하루 中 새벽 1~3時가 가장 空氣가 맑으며 그때 運動하면 效果가 높다는 글을 읽고 나서는 2年間 每日 그 時刻에 鐵仙女가 가르쳐준 呼吸法을 硏磨했다.

    內功으로 氣를 모은 後 발차기를 하자 技術이 더욱 向上됐다. 特히 告祝차기와 더불어 그의 2代 발차기人 膾축차기가 놀랄 程度로 發展했다. 마주선 狀態에선 어느 누구도 그의 膾축차기를 손으로 막을 수가 없었다. 손이 올라가는 것보다 발이 돌아가는 것이 더 빨랐기 때문이다. 그의 表現대로라면 실로 “마음 가는 곳에 발이 가 있는” 境地였다. 鐵仙女가 “그게 바로 內功”이라고 기뻐했다. 男便에게 언젠가 機會가 찾아올 것이라는 希望을 갖고 있던 그는 男便의 體力管理에 무척 神經을 썼다. 甚至於 夫婦關係를 한 後에도 體力을 테스트한다며 男便에게 발차기와 팔 굽혀펴기를 시켰다.

    武術實力은 늘었지만, 生活은 초라했다. 시골에서 體育館을 運營해 그 많은 食口를 먹여 살리자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힘쓰는 運動을 많이 한 철仙女는 고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돼지고기 한番 제대로 먹을 形便이 못했다. 아이를 낳자 生活苦는 더욱 심해졌다.

    뭔가 突破口를 찾을 무렵 平素 알고 지내던 職業軍人이 獨逸에 가서 鑛夫를 하라고 勸했다. 斡旋料를 주면 自身이 힘을 써서 獨逸行을 周旋하겠다고 했다. 張 總裁 夫婦는 體育館을 整理하기로 決心했다. 一旦 서울로 올라가 待機하다가 비자가 나오는 대로 獨逸로 간다는 計劃이었다.

    “이렇게 예쁜 딸을 어떻게 죽여…”

    한국판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장수옥·철선녀 부부

    空中으로 뛰어오른 張 總裁가 두 발로 相對의 목을 휘감아 돌리고 있다.

    1975年 가을, 두 사람은 서울로 올라왔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獨逸行 約束은 詐欺였다. 艱辛히 斡旋者를 찾아내 돈은 거의 돌려받았지만 앞날이 漠漠했다. 京畿道 光明으로 가 沐浴湯 3層을 빌려 體育館을 차렸다. 시골에서 갓 올라온 사람이 運營하는, 형편없이 規模가 작은 塗裝에 修鍊生이 몰릴 理 없었다. 그 渦中에 또 詐欺를 當했다. 이番엔 圖章 修鍊生이었다. 建築設計士였는데, 돈을 빌려서는 그대로 潛跡해버렸다. 仁川 一帶를 싹 뒤져 두 달 만에 찾아낸 그는 ‘훔친’ 돈으로 政府(情婦)와 살림을 차린 狀態였다.

    그해 겨울, 寒波가 몰아닥치자 水道管이 터졌다. 물이 없어 밥도 제대로 해먹지 못했다. 더욱 悲慘한 것은 딸아이가 뜨개질바늘에 목이 찔렸는데 病院 갈 돈이 없다는 事實이었다. 武術實力으로는 두 사람 다 어디 가도 待接받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現實은 正反對였다.

    “親舊들이 女子 있는 술집에 데려가서 술을 사주더라고요. 술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하라면서. 그런데 體育館 매트 바꾸게 돈 좀 빌려달라고 하자 안 빌려주는 거예요. 돌아오는 길에 엄청 울었습니다. 社會가 우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더 살아 뭐 하겠나 싶어 自殺할 생각까지 했어요.”

    張 總裁는 갖고 있던 日本刀를 기름으로 닦았다. 屋上에 올라가 아내와 딸을 죽이고 割腹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아내도 同意했다. 決行하기 前 마지막 食事를 했다. 飯饌도 없이 찬물에 밥을 말아먹는데, 아내가 “地境이 좀 봐요” 했다. 딸 地境이가 엄마 젖을 빨고 있는데,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아내가 말했다.

    “나는 죽는 게 두렵지 않아. 그런데 이렇게 예쁜 우리 딸을 어떻게 죽여….”

    1977年 張 總裁 夫婦는 體育館을 팔고 서울에서 집값이 가장 싼 洞네 中 하나이던 화곡동으로 移徙했다. 이듬해 봄 철仙女는 “어머님 祈禱가 맘에 걸린다”며 張 總裁에게 神學校에 들어갈 것을 勸했다.

    “이 사람을 牧師 만드는 게 어머님 꿈이었죠. ‘順從이 祭祀보다 낫다’는 聖經 말씀을 꺼내며 男便을 說得했어요. 男便은 마지못해 神學校에 들어가긴 했는데 몹시 힘들어하더라고요. 그런데 夜間 神學校를 다닌 지 한 달 만에 우리 家族에게 빛이 찾아들었어요. 606部隊에서 連絡이 온 거예요.”

    606部隊는 靑瓦臺 警護室 所屬 特殊部隊였다. 그때 606部隊에서 連絡이 오지 않았다면 張 總裁는 어쩌면 홍콩에 건너가 映畫俳優가 됐을지도 모른다. 606部隊에 앞서 이소룡의 後繼者를 찾는 홍콩 映畫製作社에서 그를 찾아와 카메라테스트까지 했기 때문이다.

    “워커힐호텔 잔디밭에서 팬티만 입고 示範을 보였어요. 映畫社 關係者들은 洽足해하면서 내가 出演하는 시나리오를 만들어 오겠다며 돌아갔어요. 出演契約書에 사인까지 했어요. 그 直後 아내의 不安感(?)을 달랠 目的으로 精管手術을 했습니다. 606部隊에서 찾아왔을 때는 실밥을 막 뽑은 狀態였어요.”

    “우리 애들, 最强으로 만들어달라”

    베레모를 쓰고 찾아온 軍人들은 그를 지프에 태워 金浦空港 內 軍部隊로 데려갔다. 練兵場에 到着하자 道服을 입은 軍人 30名假量이 그를 에워쌌다. 606部隊는 當時 차지철 警護室長의 指示로 만들어진 國內 最初의 對테러 特殊部隊였다. 特戰司에서 選拔된 이들은 하나같이 體格이 健壯하고 武術實力이 뛰어났다.

    部隊長이 나타나 張 總裁에게 가장 뛰어난 武術實力을 갖춘 部隊員과의 對鍊을 要請했다. 精管手術 餘波로 몸 狀態가 좋지 않았지만 張 總裁는 ‘하늘이 준 機會’로 여기고 對鍊을 받아들였다. 部隊員이 돌려차기를 하는 瞬間 그의 명치를 向해 가볍게 坪數를 날렸다. 部隊員은 呻吟을 내며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拍手가 터졌다. 部隊長이 숨 가쁘게 말했다.

    “來日부터 當場 우리 애들 훈련시켜 주시오. 訓鍊받다 몇 놈 죽어도 상관없으니 無條件 最强으로 만들어주시오.”

    606部隊 武術事犯이 된 그는 이듬해인 1979年 6月 靑瓦臺 演武館 朴正熙 大統領 앞에서 部隊員들과 더불어 그동안 갈고 닦은 特功武術을 선보였다. 이때 鐵仙女도 參加해 特技인 松板 두情擊破 示範을 보였다. 示範이 끝난 뒤 朴 大統領은 두 사람과 握手를 나누며 激勵했다. 慶尙道 出身인 듯한 한 出入記者가 눈이 휘둥그레져 鐵仙女에게 물었다.

    “올게 몇 살입니꺼?”

    한국판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장수옥·철선녀 부부

    “숨을 거두는 瞬間까지 道服을 입겠다”는 鐵仙女 夫婦의 表情이 幸福해 보인다

    그뒤 1年 더 張 總裁는 606部隊를 指導했다. 特功武術이 짧은 期間에 軍內에 널리 普及된 데는 606部隊 出身 軍人들의 功이 컸다. 1980年 10月 張 總裁는 警護室 武術事犯으로 任命돼 靑瓦臺에 入城했다. 軍 出身으로 平素 武術에 關心이 많던 전두환 노태우 두 大統領은 子息들까지 特功武術을 배우게 했다.

    特功武術은 跆拳道의 발차기, 柔道의 落法, 合氣道의 꺾기, 護身術 等 여러 武術의 長點에 鐵仙女의 內工法을 加味한 것으로 技術과 對象에 따라 세 種類로 나뉜다. 첫째가 軍 武術. 戰場에서 써먹어야 하므로 實戰的인 攻擊술, 卽 短期間에 相對에게 致命的인 負傷을 입히는 技術이 中心이다. 둘째는 警護 武術. 警護의 基本은 攻擊이 아니라 防禦다. 따라서 相對의 攻擊을 效果的으로 遮斷하는 데 焦點을 맞춘 防禦 技術이 主軸이다. 잡기, 꺾기, 急所 價格 等 近接 制壓技術이 發達해 있다. 셋째는 一般人을 對象으로 한 體育館 武術. 어떠한 狀況에서도 適用 可能한 다양한 技術로 構成돼 있다. 軍 武術과 警護 武術은 體育館 武術의 갖가지 技術 中 가장 實戰的인 技術만 추린 셈이다.

    그런데 特功武術의 長點을 克明하게 보여주는 것은 亦是 철仙女가 傳授한 內功 技術이다. 예컨대 주먹 지르기를 할 때 外供의 觀點에서는 어깨와 팔의 筋肉을 단련시켜 그 힘으로 價格을 한다. 하지만 特功武術에서는 筋肉의 힘으로 주먹을 지르지 않는다. 다른 格鬪技와 달리 손끝이 아니라 아랫배에 힘이 들어간다. 丹田의 힘을 키우면 筋肉을 使用한 破壞力과는 比較되지 않을 程度로 强力한 힘이 손끝에서 펼쳐진다. 張 總裁가 즐기는 坪數가 바로 그 原理를 利用한 것이다. 손바닥으로 치지만 內功이 실린 힘이므로 주먹으로 치는 것보다 훨씬 强力한 힘을 發揮한다.

    “내 나이 40萬 돼도 天下를 죽이겠어”

    張 總裁는 記者의 끈질긴 要請에 協會 事務室에서 簡單한 坪數 示範을 보였다. 瞬間的으로 몸을 돌리며 坪數를 날렸는데 “氣分 나쁘지 않을 程度로만 해달라”는 記者의 付託을 勘案해서인지 슬쩍 갖다대기만 했다. 그런데도 속이 꽝 울리는 듯한 묵직한 重壓感이 밀려왔다.

    이소룡의 절권도나 최영의의 極盡가라테도 實戰性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武術이다. 요즘 한창 人氣인 이종격投機度 마찬가지다. 張 總裁에게 “特功武術과 붙으면 어떨까요?”라고 물었더니 “싸움은 相對的인 것이고 緊張하지 않고 제 實力을 發揮하는 것이 重要하다”는 原論的인 答辯이 돌아왔다. 몇몇 特功武術 有段者가 國內 이종격投機大會에 參加했는데, 이긴 적도 있고 진 적도 있다고 한다. 진 選手의 境遇 링에 올라간 瞬間 몸이 굳어 實力의 折半도 發揮하지 못했다는 것.

    現在 特功武術 有段者의 20%가 女性이다. 鐵仙女는 “요즘은 女子가 運動하면 갈 데가 많다”며 “앞으로 中國市場이 開拓되면 女子 事犯이 많이 進出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特功武術을 배우면 血液循環이 잘 되고 여간해선 病에 걸리지 않는다. 每事에 肯定的인 마음을 갖게 돼 늘 즐겁다”고 愉快한 表情으로 말했다. 1男1女를 뒀는데, 재즈를 專攻한 딸 地境氏는 特功武術 2段, 協會 總括室長을 맡고 있는 아들 銀昔氏는 5段이다.

    張 總裁 夫婦는 中國에서 特功武術이 活性化되면 그곳에 武林원(武林院)을 짓는 方案도 檢討하고 있다. 그들이 構想하는 武林원은 各 流派의 元老 高手들이 居住하며 武藝를 論하고 武術의 發展方案을 꾀하는 一種의 武術 아카데미다. 하지만 이 計劃은 流動的이다. 與件이 되면 國內에 武林원을 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숨을 거두는 瞬間까지 道服을 입겠다”고 입을 맞춘 듯 말하는 두 사람의 表情이 幸福해 보였다. 鐵仙女가 주먹을 쥐고 말했다.

    “아유, 只今 내 나이가 40萬 돼도 天下를 죽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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