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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式 空輸特戰敎育으로 훈센 總理 사로잡다|신동아

韓國式 空輸特戰敎育으로 훈센 總理 사로잡다

캄보디아 特殊戰 部隊 代父 전병만

  • 장인석 jis1029@hanmail.net

    入力 2004-11-08 14: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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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特典同志會 事務總長을 지낸 전병만氏. 서울 石村湖水 周邊의 布帳馬車 撤去에 參與했던 그가 뜻밖에도 캄보디아에서 特殊部隊를 교육시키고 있다. 特戰司에서 배운 特典 敎育을 輸出하며 캄보디아 軍 最高司令官의 顧問으로 活動하고 있는 것이다. 韓國에서 失敗하고 캄보디아에서 成功한 全氏의 드라마틱한 人生 流轉을 公開한다.
    2001年 11月12日 캄보디아의 콤퐁솜(시아누크빌) 海軍基地에서는 ‘네이비 스쿠버 트레이닝 오픈 세리머니’가 열렸다. 콤퐁솜은 首都 프놈펜에서 自動車로 3時間 半 떨어진 距離에 있는 이 나라 最大의 休養地. 이 세리머니는 弱小國 캄보디아에겐 매우 뜻깊은 行事였다.

    스쿠버 트레이닝과 UDT訓鍊

    事實 이 行事는 ‘UDT(Underwater Demolition Team·水中爆破對) 創設式’이라고 해야 옳았다. 캄보디아 海軍의 精銳將校 252名을 選拔해 3個月間 實施한 UDT 프로그램 基礎過程에 對한 이수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캄보디아는 캄보디아軍이 精銳化하는 것을 꺼리는 周邊國과 美國의 눈치를 보느라 이 訓鍊을 ‘스쿠버 트레이닝’이라고 부르게 됐다는 것이 敎育關係者들의 說明이다. UDT 敎育은 스카이다이빙 敎育과 함께 特殊戰 敎育의 最高峯이다. 內戰으로 國力이 弱化된 캄보디아軍이 UDT 敎育을 實施한다면 周邊國의 反撥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런 까닭에 ‘스쿠버 트레이닝 세리머니’ 치고는 매우 巨創했다. 훈센 總理의 오른팔로 莫强한 權力을 휘두르는 總司令官 蓋金얀 大將을 비롯해 中將 3名, 所長 9名, 准將 15名 等 總 1千餘 名의 海軍과 1百餘 名의 民間人들이 參席했다. 民間人 中에는 豫備軍服을 입은 韓國人 敎官과 韓國 經濟人들 20餘 名이 눈에 띄어 이채로웠다. 캄보디아 國營放送을 비롯한 日刊紙 記者 10餘 名도 取材에 熱을 올리고 있었다.

    海軍參謀總長 音섬칸 中將의 祝辭에 이어 敎育隊長이 나와 踏査를 했다. 敎育隊長은 놀랍게도 韓國人이었다. 김종학 敎育隊長은 1950年 生으로 韓國 海軍 UDT 16期. 1970~74年 사이 下士로 勤務했으며, 靑瓦臺에서도 服務한 바 있는 베테랑이다. 潛水協會 副會長, UDT戰友會 副會長을 맡고 있기도 한 金氏는 이番 敎育을 맡으며 캄보디아 軍으로부터 大領 階級을 받았다. 그는 “韓國과 캄보디아가 이番 敎育을 契機로 보다 가까워지길 바란다”며 “캄보디아軍에서 UDT 訓鍊을 시키게 돼 영광스럽다”고 所感을 밝혔다.



    이어 蓋金얀 總司令官의 訓示가 始作됐다. 훈센 總理와 함께 크메르 루즈의 下級將校 出身으로 갖은 苦生을 한 개금얀은 캄보디아軍의 唯一한 4星 將軍이다. 韓國의 合參議長과 비슷한 職責이지만 캄보디아는 軍部獨裁 國家이기 때문에 그의 權力은 莫强하다. 退勤 後 집에 돌아가면 長官 4∼5名이 그를 기다리고 있고, 執務室에서도 그를 만나려는 經濟人과 閣僚들이 줄을 이을 程度라고 한다.

    20餘 分 동안 繼續된 그의 演說은 敎育의 重要性과 韓國에 對한 紹介로 一貫했다. 그는 敎育을 忠實히 받을 것을 强調하면서 韓國人 ‘미스터 前’의 이름을 여러 次例 言及했다. 그는 演說을 마친 後 査閱臺 맨 앞쪽의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뒤의 스리스타 3名을 제치고 다음 자리의 투스타 9名 中 가운데 앉아 있던 民間人 服裝의 韓國人을 옆에 帶同하고 練兵場으로 내려갔다. 韓國人과 査閱을 마친 그는 待機하고 있던 벤츠 슈퍼클래스의 門을 열고 韓國人만 태운 뒤 리셉션場으로 向했다.

    그 韓國人이 바로 캄보디아軍은 勿論 憲兵隊·警護室로부터 ‘恩人’으로 隆崇한 待接을 받고 있는 전병만(49·田炳萬)氏다.

    軍司令官 特別補佐官은 次官級

    3個月 前 개금얀은 全氏의 功勞를 認定해 公式的으로 准將 階級章을 달아주겠다고 提議했다. 全氏가 완곡히 辭讓하자, 개금얀은 그를 總司令官 特別補佐官에 임명했다. 그리고 自身의 집과 쪽門으로 連結된 舍宅을 아주 싼 값으로 提供했다. 舍宅은 建坪만 1千 坪이 넘는 2層 洋屋으로 房이 22個이며, 1層 한가운데 300坪이 넘는 室內體育館이 있다. 1人當 國民所得이 250달러도 안되고 國民 大多數가 房 한 칸짜리 板子집에 살고 있는 캄보디아에서는 想像조차 하기 어려운 大邸宅이다.

    전병만氏를 補佐하는 隨行員 욱잠티(37)氏의 說明에 따르면 總司令官 特別補佐官은 次官級에 該當한다고 한다. ‘미스터 욱’으로 불리는 이 隨行員은 平壤의 김일성종합대학과 醫科大學 等에서 13年間 留學하고 돌아온 醫師이자 캄보디아에서는 몇 안되는 韓國通이다. 平壤 標準말을 能熟하게 驅使하는 미스터 욱은 月 700달러씩 주겠다는 外國企業을 마다하고 蓋金얀의 要請에 따라 月給도 없는 전병만氏의 祕書가 됐다(캄보디아 公務員의 平均 月給이 30달러, 海外留學派로 가장 月給을 많이 받는 캄보디아 오렌지族들이 月 250달러를 받는다). 그는 전병만氏로부터 每月 活動費를 조금씩 받지만, ‘높은’ 사람들과 接觸할 機會가 많아 더 큰 利益이라고 말했다.

    參考로 전병만氏 또한 月給이 없다. 公式的인 支援도 없다. 蓋金얀 將軍의 月給이 300달러, 所長 月給이 100달러라고 한다. 하지만 月給이 200~300달러에 不過한 將軍들 中에는 벤츠나 렉서스·랜드크루즈 같은 高級車를 몰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팔뚝에는 롤렉스는 勿論이고 카르티에 같은 高級時計를 차고 다니는 이도 많다. 이는 캄보디아 軍과 政府의 不淨腐敗가 그만큼 甚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軍의 豫算은 거의 없다고 한다. 將軍이 먹여 살려야 하는 士兵(私兵) 組織이 바로 캄보디아軍이다. 그래서 能力 있는 將軍 밑에는 兵士가 많지만 돈 없는 將軍들은 部下도 없다.

    캄보디아 韓人會 貿易協會長을 맡고 있는 遊說河氏는 “캄보디아에서는 緣줄 없이는 事業할 수가 없다”며 “鳶줄을 제대로 잡고 돈을 써야 일이 進行된다”고 말한다. 때문에 外國 企業人들은 軍과 政府 要職의 人士들과 因緣 맺는 일을 가장 重要視한다. 이 過程에서 巨額의 金品이 오가는 것은 勿論이다. ‘미스터 前’李 月給도 公式的인 支援도 없는 캄보디아에서 慈悲를 들여가며 恩人이 된 理由를 理解하려면, 이러한 캄보디아의 實相을 正確히 알 必要가 있다.

    蓋金얀 將軍은 韓國에서 온 企業人들과 筆者에게 “미스터 전이 없었다면 캄보디아軍은 아직도 어린아이 水準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며 “캄보디아 軍을 精銳化시켜 주고 있는 미스터 前 때문에 韓國에도 各別한 고마움을 느낀다”고 몇 番이고 强調했다. 그는 전병만氏에게 연신 위스키를 부어주며 “원샷”을 連呼했다.

    韓國人 敎官 中의 한 名인 김경환(35)氏는 對北 諜報部隊人 HID 出身. 그는 1年 前 同僚 7名과 함께 캄보디아에서는 最精銳軍이라는 911코만도部隊의 將校 107名에게 6個月間 레인저敎育을 시켰다고 했다. 이날 그의 테이블에 合席한 캄보디아將校들은 레인저敎育을 履修한 敎育生 中 UDT 敎育에 訓鍊助敎로 選拔됐던 人材들.

    김경환氏는 “스쿠버 裝備가 없어 水中敎育을 못시킨 것을 除外하곤 遊擊과 浸透敎育은 다 시켰다”며 “이제 UDT 敎育까지 履修한다면 캄보디아軍 戰力이 크게 向上될 것”이라고 說明했다.

    “前總長(전병만氏를 모두 이렇게 부른다. 特典同志會 初代 事務總長 出身이기 때문이다)의 要請에 따라 後輩들을 이끌고 레인저敎育을 시키러 왔을 때만 해도 正말 이들이 軍人인가 의심스러웠어요. 프랑스의 植民支配를 받아서인지 軍紀가 형편없었어요. 相關 앞에서 차렷 姿勢도 取하지 않는가 하면 담배도 피우는 式이었죠. 캄보디아 內에서는 最精銳로 通하는 코만도部隊 將校들이라는 데도 말이죠. 하지만 얼차려를 주고 繼續 굴렸더니 보름 程度 지나자 눈빛이 달라지더군요.”

    섬에 가둬놓고 훈련시킨 레인저敎育에서 4名이 죽었다. 워낙 基礎體力이 弱한 탓에 訓鍊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훈센 總理를 비롯한 軍 將星과 政府官僚들이 參席한 卒業示範에서 節度 있는 動作과 剛한 軍紀를 선보였다. 그러자 훈센 總理가 敎官들을 불러올려 一一이 손을 잡아주며 크게 致賀했다고 한다. 敎官들 모두 功勞勳章을 받았다. 전병만氏는 다섯番째 勳章을 받았다.

    전병만氏로 말미암아 朴正熙 前大統領의 支持者가 된 훈센 總理는 2001年 11月9∼10日 캄보디아 總理로는 韓國을 처음으로 公式訪問해 김대중 大統領과 頂上會談을 가졌다. 이렇게 된 것도 따지고보면 캄보디아 權力層에 퍼진 ‘韓流(韓流)’ 烈風 탓이라는 게 僑民들의 한결같은 說明이다. 이 韓流 烈風을 일으킨 震源地가 바로 전병만氏. 이러한 烈風은 그가 캄보디아에 첫발을 내디딘 1994年만 해도 아무도 豫測하지 못했다.

    전병만氏는 왜 캄보디아에 왔고, 어떤 目的으로 軍의 精銳化를 돕게 됐을까.

    전병만氏는 慶南 宜寧 出生으로 農事를 짓는 집안의 2男4女 中 次男. 故鄕에는 80歲의 母親이 살고 있다. 高校를 中退한 그는 募兵 3期로 1972年 特戰司에 入隊했다. ‘勇敢하게 살고 싶어서’가 特戰司를 選擇한 理由였다. 第1空輸 旅團에서 跆拳道 選手로 勤務하던 그는 國內에서 스카이다이빙 敎育이 始作되자 1期로 訓鍊을 履修했다. 스카이다이빙은 高空浸透要員들만 받는 敎育이다. 只今도 그렇지만 當時에도 特戰司의 最精銳 멤버로서 自負心이 대단했다고 한다.

    “남들이 그래요. 軍 生活 멋지게 했다고…. 部隊가 있던 金浦 附近에선 저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요. 部隊에서 節 除隊시키지 않으려고 많이 努力했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1年 더 勤務하고 1978年 8月에 中士로 除隊했지요. 商事를 달으라고 했지만 於此彼 將校가 못될 건데 軍生活에 別 未練이 없었어요.”

    나이 50줄에 접어들었지만 그의 몸은 군살 없이 단단하다. 눈매 亦是 普通 매섭지 않아 그가 어떤 履歷을 갖고 살아왔는지를 斟酌케 한다. 故鄕으로 돌아온 그는 建設會社를 運營하는 兄 밑에서 일하려고 했지만 뜻이 맞지 않아 서울로 올라왔다. 特戰司에서 勤務할 때 알던 술집 社長이 支配人으로 와달라고 해서다.

    그러다 海軍提督 出身으로 平素 잘 알고 지내던 함명준氏가 그를 불렀고. 函提督이 學校 先輩인 옥창호 將軍을 도와주라고 해 玉將軍의 祕書로 들어갔다. 옥창호氏는 陸士 8期로 김종필 現 자민련 總裁와 動機. 當時 玉將軍은 江南터미널 刃創빌딩 賃貸業을 하고 있었다. 刃創빌딩은 江南에선 꽤 有名한 靑綠카바레가 入住해 있는 等 大規模 賃貸店鋪여서, 商家 誘致를 둘러싸고 紛糾가 많았다고 한다. 그는 여기서도 新任을 얻어 4年 만에 祕書室長이 됐다. 그때 玉將軍이 로열 프린스 自動車를 사주었을 程度라고 했다.

    “玉將軍 밑에서 일하면서 先輩들과 特典同志會 全國組織을 만들자는 데 意氣가 投合했지요. 當時에는 階級別 地域別로 親睦會 程度로 모였는데, 全國을 돌며 親睦會를 서로 連結하고 轉役者들에게 一一이 連絡해서 1987年 5月永登浦區 新吉洞에 中央本部를 발족시켰어요. 그리고 저보고 初代 事務總長을 맡아달라고 해서 玉將軍을 떠나게 됐지요.”

    “石村湖水 布帳馬車 撤去는 내 作品”

    全氏는 1993年 事務總長職을 그만둘 때까지 特典同志會를 발전시키는 데 큰 功을 세웠다.

    하지만 그는 特戰戰友會 事務總長만 한 것은 아니었다. 安企部의 指示를 받아 右翼테러를 擔當하는 責任者 役割도 했다. 그는 이 部分에 對해선 限死코 말하기를 꺼렸다. 아직도 現職에 있는 사람이 많아 被害를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愛國心 次元에서 合法的으로 했으므로 罪 될 것도 없고 未安한 마음도 없다”고 主張했다.

    그가 右翼테러를 했던 人物이라는 것은 캄보디아 僑民들도 다 아는 얘기다. 몇 年 前 캄보디아에서 그에게 테러를 當했던 D重工業 勞組委員長인 K氏를 偶然히 만났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너무 놀라 할 말을 잊었다는데, 서로 옛일을 잊고 잘 지내자며 和解했다는 게 全氏의 얘기다.

    “한 10年 했으니까 얼마나 많은 事件과 연관있는지 斟酌하실 겁니다. 하지만 다 말할 수는 없고 드러난 것만 말을 하지요. 石村湖水 布帳馬車 撤去를 비롯해 서초동 꽃동네 撤去, 대우중공업 籠城 解散, 현대重工業 籠城 解散, 이거 모두 제가 했습니다. 다른 건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當時 石村湖水 周邊의 布帳馬車는 政府나 檢察에 큰 골칫거리였다. 88올림픽은 다가오는데 湖水 周邊에 布帳馬車가 5000餘 個나 있었기 때문이다. 몇 番이고 團束을 나가고 撤去를 試圖했지만 實效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全氏에게 ‘密命’李 떨어졌다. 그는 5000名을 動員해 이틀 만에 모조리 없앴다.

    그는 當時 辦公費로 月 1000萬원 程度와 件當 手當도 받았다고 한다. 動員 引力에 들어갈 돈으로 一人當 하루 10萬원을 받았다. 當時 公務員 一黨이 2萬2000원이었던 것을 勘案하면 큰 돈이다. 그는 只今도 그렇지만 돈에는 欲心이 없었다고 强調한다.

    “萬一 제가 돈이나 챙기고 部下들에게 짜게 굴었다면 只今 이 자리에 없지요. 저는 한番도 돈을 제 주머니에 넣어본 적이 없어요. 일이 끝나면 남은 돈을 룸살롱 같은 데서 部下들에게 쫙 뿌렸는데, 그 맛 때문에 했다고 할 수 있지요.”

    當時 全氏 밑에는 歸順勇士들度 있었다고 한다. 社會에 適應하지 못해 彷徨하는 이들을 安企部가 데리고 있으라고 붙여준 것이라고 한다. 特需8軍團 出身으로 臨津江을 水營해서 건너온 이영선, 多大浦에서 自爆하려다 手榴彈이 불발돼 붙잡힌 前忠南, 放浪生活하면서 홍콩을 통해 들어온 어성일 等을 親同生처럼 돌봐주었다고 했다.

    “그러다 檢察에 쫓기게 되었습니다. 檢察에선 제가 安企部 指示로 일했다는 걸 모르니까요. 그 過程에서 離婚도 當하고, 勿論 나중에 다 無嫌疑로 處理됐지만 그때 많이 힘들었지요.”

    中古 앰뷸런스로 맺은 因緣

    그는 다시 安企部 理事官級의 指示로 美國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갔다. LA暴動으로 韓人들의 被害가 많이 發生하자 僑民保護 次元에서 特典同志會 組織을 만들 必要가 있다고 判斷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곳에서도 特有의 組織力을 發揮해 1年 만에 特典同志會 美國支部를 設立, 懸板式까지 擧行했다.

    韓國에 돌아온 그는 이番에는 保健福祉部 應急救助團에서 本部長 일을 맡게 됐다. 當時 應急救助團은 非理가 많아 社會的으로 말썽 많은 團體였는데, 組織을 다시 잘 整備해달라는 付託을 받았다. 그러던중 캄보디아에 간 特典同志會 後輩로부터 오래된 것이라도 좋으니 앰뷸런스를 寄贈해줄 수 있냐는 連絡이 왔다.

    “마침 오래된 앰뷸런스 5臺를 마련해 캄보디아에 갔습니다. 그게 1995年일 겁니다. 1994年에도 後輩들 보려고 캄보디아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받은 印象이 좋아서 캄보디아에 關心이 많았어요. 비록 內戰을 겪어 못살지만 그래도 밝게 살아가는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情이 가요. 只今도 그렇지만 正말 캄보디아는 좋은 나랍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淳朴한지 겪어보면 압니다.”

    그때 훈센 總理는 第2受賞이었다. 앰뷸런스가 한 臺도 없던 캄보디아라 그런지 훈센 總理는 施僧해보고 어린애처럼 좋아했다고 한다. 훈센 總理로부터 社嗷訴카 准將을 紹介받았다. 現在 40歲의 젊은 나이로 憲兵司令官(中將)이 된 四五소카는, 當時에는 30代 初盤의 원스타로 훈센 總理가 寵愛하는 인텔리였다.

    “그 四五소카가 跆拳道를 가르쳐달라고 했어요. 그게 因緣의 始作이지요. 그때는 正말 簡單하게 생각했습니다. 6個月間 두 名만 派遣하면 되겠다 싶었지요.”

    캄보디아는 가난한 나라다. 人口 800萬 名 中 3分의 1에 該當하는 250萬 名을 虐殺한 폴포트政權과, 그後 베트남의 支配를 받은 10餘 年間 캄보디아의 國力은 衰退할 대로 衰退했다. 過去 ‘東洋의 파리’라고 불렸던 首都 프놈펜에는 먼지만 자욱했다. 그는 四五소카가 아무런 支援을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 생각은 맞았다. 費用 一切를 全氏가 負擔해야 할 處地였다.

    “特典同志會라는 게 뭡니까. 義理로 뭉친 사람들 아닙니까. 제가 先輩나 後輩 福이 많아요. 그래서 後輩 둘에게 付託했습니다. 먹고 자는 건 解決해주지만 月給은 못 준다고요. 그後로 只今까지 한 60餘 名의 後輩들이 저를 도와서 캄보디아에서 지내다 갔지만 한番도 補償은 해주지 못했어요. 그게 只今도 가장 未安합니다. 제가 只今까지 인터뷰를 하지 않다가 ‘신동아’와 처음으로 하는 理由는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런 後輩들이 있기에 오늘의 제가 있고, 캄보디아가 韓國에 好意를 갖게 됐다는 것을 밝히고 싶어서입니다.”

    그는 인터뷰 途中 後輩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여러 番했다. 그는 後輩들이 캄보디아軍을 돕는 게 어떤 利得을 보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두렵다고도 했다. 後輩들의 善意가 다르게 解釋돼서는 안된다고 그는 再三 强調했다. 하지만 四五소카의 請을 受諾했을 때 軍人들과 親해지면 나중에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漠然한 생각은 들었다고 한다.

    “프놈펜 外郭地域에 房 두 個짜리 집을 얻었어요. 月貰가 250달러 程度 했을 겁니다. 韓國에서 小規模 企業을 하는 분이 費用을 대주기로 했는데, 잘 안됐어요. 그래서 제가 캄보디아에 隨時로 드나들 수밖에 없었어요. 月貰에 食事費며 活動費까지 세 사람 몫이 만만치 않았으니까요.”

    캄보디아에서 가장 規模가 큰 縫製工場(職員이 1萬名)을 經營하는 三桓의 이무수 會長은 그가 現在 살고 있는 집의 月貰(1000달러)를 내주고 있고, 이름을 밝힐 수 없지만 오랫동안 그를 도와준 企業人들도 꽤 있다고 한다.

    그는 憲兵 勤務者 70餘 名에게 2年間 跆拳道를 가르쳤다. 道服 200餘 벌은 韓國의 知人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憲兵隊에서 跆拳道를 가르친다는 所聞이 나자 特典司令官이 만나자는 傳喝이 왔다. 跆拳道를 가르쳐달라는 付託이었다.

    “特戰司라고는 해도 當時에는 軍人이 250餘 名밖에 안됐어요. 모두 인도네시아에서 空輸敎育을 받았는데 電力이 시원치 않았지요. 인도네시아는 우리나라에서 特典敎育을 받은 나라예요. 그걸 나중에 캄보디아軍들이 알고 韓國의 特戰司 實力이 世界的이라는 걸 認定하게 됐지요.”

    高位 官僚 韓國 觀光시켜 줘

    그는 午前엔 憲兵隊, 午後엔 特戰司로 갔다. 特戰司에서는 特功武術을 가르쳤다. 6個月 後 特戰司에서 그동안 배운 武術實力을 示範보였더니 拍手喝采가 터져나왔다. 特戰司令官은 그에게 空輸敎育度 해달라고 付託했다. 警護室長도 當場 警護室 職員들도 가르쳐달라고 哀願했다.

    行本힘 警護室長은 所長으로 훈센의 側近 中 側近. 全氏는 150名의 警護室 職員들을 가르치기 위해 韓國에서 後輩 5名을 招請했다. 全氏의 4年 後輩로 靑瓦臺 警護室에서 勤務한 적이 있는 敎育隊長 金炳昊氏가 그中 한名. 金氏는 世界 警護大會에서 上位 入賞을 한 베테랑이다. 그가 警護示範을 보이자 警護室長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程度였다고 한다.

    “當時에 캄보디아는 北韓과 修交했고, 우리나라와는 修交하지 않은 狀態였지요. 韓國과는 1996年 7月4日에 修交했는데, 本格的으로 關係가 가까워진 것은 올해 4月 駐韓 캄보디아대사관이 門을 연 以後입니다. 北韓軍은 오래 前부터 캄보디아에 들어와서 軍事顧問을 맡고 있었어요. 하지만 제가 敎育을 시키는 것에 對해 全혀 말이 없어요. 民間人 次元에서 하는 거니까 問題될 게 있겠습니까. 駐캄보디아 韓國大使館이나 韓國의 國防部에서도 只今까지 저한테 어떤 言及이나 支援도 해준 적이 없습니다.”

    警護敎育을 竝行하면서 그는 特戰司令官과의 約束대로 空輸敎育을 始作했다. 空輸敎育은 訓鍊場에서 體系的인 프로그램대로 해야 하므로 많은 敎官이 必要하다. 그는 一旦 패러글라이딩과 모터패러글라이딩 敎育을 始作하면서 落下敎育도 도와주기로 했다.

    “처음에 空輸敎育長에 가니 落下傘이 12個밖에 없었어요. 그것도 第2次大戰 때 쓰던 것이었어요. 그래서 落下傘을 30個 寄贈했습니다. 그걸로 敎育하고 있으니 나중에 500個를 사주더군요. 그게 最初의 武器購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後에 스쿠버裝備度 제가 仲介했는데, 萬若 캄보디아의 形便이 좋아진다면 韓國産 武器를 제가 仲介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는 敎育을 끝내고 훈센 總理를 비롯 政府와 軍 高位關係者들이 모인 자리에서 落下 및 패러글라이딩 示範을 보였다. 이때는 駐캄보디아 韓國大使도 參席했다. 또 特別히 韓國에서 特戰司 出身인 徐京錫 將軍이 招請됐다.

    “그때 韓國에서 최명자란 後輩도 招請해 스카이다이빙 示範을 보이게 했지요. 高空다이빙을 처음 본 사람들이, 그것도 女子가 하니까 깜짝 놀랐지요. 훈센 總理가 껴안고 같이 寫眞 찍고 어쩔 줄 몰라했으니까요. 이때 캄보디아 軍人 한 名이 캄보디아기와 太極旗를 나란히 들고 落下했는데, 이게 CNN 放送에 나가는 바람에 좀 問題가 됐지만, 別일 없이 마무리됐어요.”

    氣分이 좋아진 훈센 總理는 徐京錫 將軍에게 勳章을 주면서 韓國에 對해 고맙다고 致賀했다고 한다. 서장군은 나중에 名譽總領事가 됐다. 이때의 落下示範으로 전병만氏는 캄보디아의 有名人士가 됐고, 總司令官 蓋金얀과는 呼兄呼弟하는 사이가 됐다. 全氏보다 한 살 어린 蓋金얀 司令官은 私席에서는 全氏를 ‘兄’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警護室長이 절 보자고 해서 갔더니 韓國엘 가고 싶다고 해요. 拒絶할 수가 있나요. 民間 次元으로 갈 수 있게끔 韓國에서 後援을 받아 幹部까지 夫婦同伴으로 18名을 데리고 왔지요. 蔚山工團을 비롯해 抛撤과 龜尾工團을 見學시켰더니 무척 놀라더라고요. 그後 韓國을 다시 보게 됐고, 저에 對한 好意도 각별해졌지요.”

    韓國을 訪問하고 돌아온 警護室長이 서울에 비하면 방콕은 ‘쓰레기’라고 소문내고 다니자 蓋金얀 將軍도 가고 싶다고 했다. 全氏는 캄보디아 軍部 實勢 10餘 名과 함께 韓國을 訪問해 特戰司에서 示範도 보이고 非公式的으로 國防部長官도 만나게 했다. 그後에도 警察廳 長官 洪論기(중장) 等 警察幹部 16名을 韓國으로 招請해 警察大學을 見學시키고 警察廳長과 서울지방경찰청長도 만나게 해줬다.

    “經費는 韓國의 知人들이 後援해주었지요. 最小限 1人當 500萬원은 듭니다. 飛行機票까지 다 대줘야 하니까요. 그後 캄보디아軍과 高位官僚들 사이에 寒風(韓風)이 불어서 韓國 가보지 못한 사람은 바보 取扱받는 雰圍氣까지 形成됐지요.”

    “씨를 뿌리면 열매는 맺는다”

    그는 레인저敎育과 UDT訓鍊까지 마치면 스카이다이빙 敎育까지 시켜줘야 自身의 할일이 끝날 것이라고 말한다. 高空浸透 敎育까지 마친다면 特殊戰 敎育은 完了하는 셈이고 그렇게 되면 캄보디아軍의 最精銳部隊院은 모두 그의 弟子가 되는 셈이다.

    “敎育이 끝나면 後輩들에게 빚진 것부터 갚을 생각입니다. 蓋金얀 將軍과 훈센 總理의 祕書室長한테는 이미 內諾을 받았습니다. 캄보디아의 수많은 섬 中에서 江이 있는 섬이 3個 있는데, 그中의 하나를 저에게 無償으로 賃貸해 週期로요. 거기에 스쿠버觀光을 할 수 있도록 慰樂團地를 造成해 後輩들과 運營하며 지내고 싶어요.”

    전병만氏는 名銜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影響力이 莫强해지면서 찾는 사람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主로 企業人들이 많은데, 모두 그를 통해 軍部나 政府의 高位官僚들에게 줄을 대려는 사람들이다.

    “캄보디아는 不淨腐敗가 아주 甚해요. 높은 사람이 뒤를 봐주지 않으면 돈은 돈대로 들고 時間은 時間대로 들여도 結局 失敗하고 맙니다. 제가 알기론 只今까지 第一製糖만 제대로 일이 됐고, 다른 企業들은 잘 안된 것으로 압니다.”

    그는 只今까지는 韓國 企業人들을 캄보디아 高位實勢들에게 連結시키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몇 年 前에 韓國의 某 企業人에게 蓋金얀 將軍을 紹介해줬는데, 두 番째 만날 때부터는 全氏를 빼고 혼자서 蓋金얀 將軍을 만나는 것을 알게 되면서 信賴感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가 누굴 紹介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다만 누구를 紹介받았는데 그 라인이 맞는지 물어본다면 그건 제가 確認해줄 수 있어요. 이곳엔 詐欺꾼들도 많이 있어요. 높은 사람 紹介해준다며 커미션만 챙기는 사람들 말입니다. 쓸데없는 일에 휘말려 外貨 浪費하면 結局 우리의 國力損失 아니겠습니까. 캄보디아에서 뭘 하려고 計劃하는 企業人들이 신중했으면 좋겠어요.”

    그는 自身이 助言을 해주어서 일이 잘 成事되면, 苦生하는 敎官들의 副食費를 좀 도와주기만 해도 그로서는 滿足이라고 한다. 프놈펜에서 콤퐁솜까지 그는 一週日에 한두 番씩 腐蝕을 날라다준다. 章程 8名 몫이라 만만치 않은 費用이다. 基礎體力訓鍊이 끝나고 本格的인 技術敎育에 들어가는 1月에는 敎官 10餘 名이 더 必要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아껴도 月 5000달러는 족히 든다. 負擔이 漸漸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캄보디아에 씨를 뿌리면 열매는 반드시 맺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하는 겁니다. 제가 씨를 뿌리면 열매를 누가 먹겠습니까. 다 韓國사람들에게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資源의 報告, 캄보디아

    最近 캄보디아는 美國 次官(借款)을 발板으로 本格的인 經濟開發 꿈에 부풀어 있다. 美國은 그동안 借款 提供을 빌미로 훈센 總理에게 投獄된 크메르 루즈의 高級 將星들을 國際司法裁判所에 回附할 것을 慫慂해왔는데, 훈센 總理가 마침내 美國의 要求를 들어주기로 決定했다는 것이다.

    “캄보디아는 資源의 報告예요. 忠淸北道만한 톤레삽湖水는 ‘물 半 고기 半’입니다. 그곳에서 잡히는 카우라는 大型새우는 世界的으로 알아주는 高級 魚類입니다. 곧 기름도 나온다고 하니 活用價値가 아주 높습니다. 日本만 해도 一年에 數億달러씩 投資합니다. 그러나 캄보디아 사람들은 日本人을 좋아하지 않아요. 韓國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는 헌옷도 좋고 시골에서 버리는 耕耘機도 좋다며 韓國에서 올 일이 있는 사람은 무언가 갖다주었으면 고맙겠다고 덧붙였다.

    “그 代身 제 집을 宿所로 使用하실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호텔보다는 不便하겠지만 그래도 비즈니스를 하려면 제 집이 더 나을 수도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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