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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力層 脫北者들이 傳하는 ‘김정일 네 番째 夫人’의 眞實|新東亞

權力層 脫北者들이 傳하는 ‘김정일 네 番째 夫人’의 眞實

“言論에 난 寫眞은 다른 사람, 眞짜 김옥은 바로 이 女子”

  • 황일도 동아일보 新東亞 記者 shamora@donga.com

    入力 2006-08-28 1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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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最近 김정일 北韓 國防委員長의 새 夫人이 됐다는 女性에 對한 報道가 쏟아졌다. 그러나 言論에 報道된 2000年 美國 訪問 當時 撮影 寫眞을 본 脫北 高位層 人士들은 “그女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이들과 金 委員長의 料理師였던 日本人 후지모토 겐지氏가 ‘眞짜 김옥’이라고 指目한 寫眞을 北韓 公式 寫眞集 속에서 찾아 公開한다. 權力層 脫北者들이 말하는 김옥과 高永喜 사이의 逸話, 그리고 後繼構圖의 새로운 變數가 될 김옥 아들의 實體.
    권력층 탈북자들이 전하는 ‘김정일 네 번째 부인’의 진실

    1992年 平壤에서 發刊된 寫眞集 ‘우리의 指導者’에 실린 寫眞 속의 女人. 脫北 高位人士들과 후지모토 겐지氏는 이 女人이 김옥이라고 斷言한다. 이 寫眞은 김정일이 共和國 創建記念 行事 準備狀況을 視察하던 1988年 撮影된 것이다. 脫北 人士들은 “김옥이 김정일의 눈에 들어 곁에서 일하게 된 直後인 듯하다”고 말했다.

    始作은 ‘聯合뉴스’였다. 7月23日 ‘聯合뉴스’는 “김정일 委員長이 祕書 出身의 김옥氏를 새 夫人으로 맞아 함께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報道했다. 平壤音樂舞踊大學에서 피아노를 專攻한 김옥氏는 1980年代 初부터 金 委員長의 夫人 高永喜氏가 死亡할 때까지 金 委員長의 技術書記로 일했고, 2004年 高氏가 死亡한 以後 事實上 네 番째 퍼스트레이디가 됐다는 內容이었다. 大部分의 日刊紙와 TV 뉴스는 이 記事를 引用 報道했다.

    金 委員長의 周邊에 이러한 女性이 있다는 事實이 처음 알려진 것은 아니다. 數年 前부터 關聯 當局者들 사이에는 김정일 委員長 옆에 ‘옥이 祕書’ 或은 ‘옥희 祕書’라는 女人이 있으며, 金 委員長의 寵愛를 받아 黨 幹部들조차 無視할 수 없을 만큼 ‘權力 위의 權力’으로 君臨하고 있다는 消息이 傳해졌다(‘신동아’ 2005年 8月號 ‘김일성 死亡 直前 父子 暗鬪 120時間’ 參照).

    그럼에도 ‘聯合뉴스’의 報道가 意味 있었던 것은 두 가지 理由에서다. 于先 김옥이 지난 1月 金 委員長의 中國訪問에 同行해 金 委員長의 夫人 資格으로 相當한 待遇를 받았으며, 후진타오 中國 主席과도 人事를 나눴다는 內容이다. 2月 日本의 ‘슈칸겐다이(週刊現代)’가 이러한 內容을 記事化했지만, 煽情性이 剛한 媒體의 特性上 專門家들은 이에 큰 意味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公信力 있는 媒體가 이를 다시 報道하자 狀況이 달라졌다. 單純히 ‘愛人이 있다’는 것과 ‘새로운 퍼스트레이디가 됐다’는 것은 全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聯合뉴스’가 김옥이라며 얼굴寫眞을 公開한 것도 記事 價値를 높인 要因이었다. 該當 記事는 “김옥은 2000年 照明錄 國防委員會 第1副委員長이 워싱턴을 訪問했을 때도 國防委員會 課長 職銜으로 同行했다”면서 當時 撮影된 寫眞 속의 女人 한 名을 김옥으로 指目했다. MBC 亦是 當時 撮影된 資料畵面 속에서 같은 얼굴의 女人을 찾아내 放送에 公開했다.

    1990年代 後半 以後 北韓을 脫出한 高位官吏들은 누구나 김옥이라는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정작 그女의 얼굴을 아는 이는 極히 드물다. 金 委員長이 開催하는 파티에나 모습을 드러냈던 까닭에 直接 그女의 얼굴을 본 사람은 權力機關 最上層部 程度로 制限됐기 때문이다. 情報當局者가 “北韓을 벗어난 사람 가운데 그女를 直接 본 이는 아마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할 程度다. 한마디로 김옥의 얼굴寫眞 報道는 韓國에서뿐 아니라 北韓에서도 ‘特種’이라고 할 만한 消息이었다.



    그러나 問題는, 2000年 以後 平壤에서 빠져나와 國內外에 머물고 있는 權力層 脫北者들이 “李 얼굴은 김옥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事實이다. ‘聯合뉴스’ 記事는 김옥이 “美人이라기보다는 귀여운 스타일”이라고 傳하고 있지만, 實際로는 대단한 美人이라는 것. 高位官僚 出身의 脫北者들 中에서도 김옥을 直接 봤다는 사람은 極히 드물다. 代身 파티에서 찍은 寫眞 等을 통해 間接的으로 얼굴을 알게 됐다는 境遇가 大部分이다.

    “會談場의 女人은 平凡한 隨行員”

    ‘신동아’가 接觸한 그中의 한 脫北官僚는 興味롭게도 “北韓에서 나온 公式資料에 그女의 寫眞이 실린 적이 있다”고 말했다. 問題의 寫眞集은 1992年 平壤 등대사에서 出版된 ‘우리의 指導者’라는 259쪽 分量의 冊子로, 김정일 委員長의 現地視察 活動 等을 담은 寫眞이 빼곡하게 실려 있다. 그 가운데 한 寫眞의 구석에, 全혀 意圖하지 않았지만, 김옥의 얼굴이 조그맣게 실렸다는 것이다.

    ‘신동아’가 統一部 北韓資料센터에서 찾아낸 問題의 寫眞集 속 女性은 ‘聯合뉴스’나 MBC가 公開한 寫眞의 女性과는 생김새가 다르다. 寫眞集의 寫眞은 1988年 撮影된 것으로 2000年의 寫眞과 12年의 時間差가 있으나, 이를 勘案해도 同一人이라고 보기 어렵다.

    反面 김옥의 얼굴을 알고 있다는 權力層 出身 脫北者들은 ‘신동아’가 提示한 寫眞을 보고 “이 女子가 김옥이 맞다”고 말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13年間 金 委員長의 料理師로 일하다 2001年 脫出한 日本人 料理師 후지모토 겐지氏도 最近 出刊된 새 著書에서 이 寫眞을 提示하며 金 委員長의 새로운 女人인 ‘옥이 同志’라고 指稱하고 있다는 事實이다.

    그렇다면 2000年 寫眞의 女人은 누구일까. ‘聯合뉴스’는 當時 이 女人이 ‘김선옥’이라는 假名과 國防委員會 課長 職銜을 썼다고 報道했다. 이 會談에 陪席했던 前職 美 國務部 關係者는 “平凡한 隨行員이라고 생각했지 특별한 徵候는 없었다. 그 女人이 金 委員長의 愛人이라는 報道가 나온 後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다른 이들에게서 特別待遇를 받는 걸 본 記憶이 없다”고 말했다. 이 關係者는 “平凡한 隨行員이라면 會談 테이블에 앉을 理가 없지 않냐”는 質問에 “會談場에 온 모든 北側 關係者는 다 테이블에 앉았다. 워낙 數가 적었기 때문에 區分할 必要가 없었다”고 答했다.

    또 다른 美國側 會談 參席者는 “會談 테이블에서 이 女人이 會談代表들을 위해 資料를 챙기고 건네주던 모습을 記憶한다”며 “最近 나온 記事대로라면 이때도 이미 相當히 힘있는 人事였을 텐데, 그런 雜務를 했을 理는 없지 않을까 싶다”는 意見을 내놓았다.

    “언젠가 將軍님 곁에 가겠다”

    權力層 出身 脫北者들은 最近 쏟아져 나온 김옥 關聯 報道에 적지 않은 誤謬가 있다고 指摘했다. 代表的인 것이 ‘技術書記’라는 그女의 役割. 脫北 官僚들은 김옥은 技術書記가 아니라, 金 委員長이 起居하는 主要 招待所를 管掌하는 業務를 맡고 있었다고 傳했다. 公式的으로는 中央黨 組織指導部 5과 所屬으로, 金 委員長의 公式日程 以外에 나머지 쉬는 時間의 日程을 짜는 役割을 한다는 것이다(호위요원이나 打字手, 交換員 等 김정일 周邊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은 5科에 所屬돼 있다). 金 委員長이 現地 視察을 할 때는 먼저 그날 묵을 宿所에 가서 準備狀況을 點檢하는 式이다.

    金 委員長이 個人的으로 使用하는 돈의 出納業務度 그女가 擔當한다. 후지모토 겐지氏는 2003年 出刊된 自身의 첫 番째 冊에서 2001年 4月 中旬 金 委員長이 日本에 다녀올 수 있겠느냐고 自身에게 묻길래 갈 수 있다고 對答하자 “김창선(書記室 副部長)에게 航空券을 準備하라고 指示하고, 서기 玉李氏에게는 내게 1萬5000달러를 내주라고 指示했다”고 밝힌 바 있다.

    權力層 出身 脫北者들은 “平壤에는 김옥에 對해 많은 이야기가 돌고 있다”고 傳한다. 서울에서 演藝人에 對해 수군거리는 것과 恰似하다는 것. 이들이 傳하는 김옥에 關한 이야기를 整理하면 다음과 같다.

    1964年生인 김옥은 平壤 禽獸中學校와 金星高等中學校(金星制1高等中學校의 前身)를 卒業했다. 現在는 ‘金星學院’으로 다시 이름이 바뀐 金星制1高等中學校는 萬景臺少年學生宮殿의 附屬學校로, 文化藝術分野에 才能이 있는 學生들을 選拔, 育成하는 學校로 有名했다. 平凡한 집안 出身인 김옥은 高等中學校 時節부터 出世慾이 强해 “언젠가 꼭 將軍님 곁에 가겠다”고 말하고 다녔고, 이 때문에 親舊들로부터 놀림을 當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

    권력층 탈북자들이 전하는 ‘김정일 네 번째 부인’의 진실

    7月23日 ‘聯合뉴스’가 對北 消息通을 引用해 김옥이라고 報道한 寫眞. 2000年 10月 照明錄 北韓 國防委員會 第1副委員長이 特使 資格으로 美國을 訪問해 윌리엄 코언 美 國防長官과 接見했을 當時 同行한 김옥이 會談場 테이블에 앉은 모습을 찍은 것이라는 說明이었다.(좌) 같은 날 MBC가 이때 放送用 카메라에 捕捉됐다며 公開한 資料 畵面.(郵)

    學校를 卒業한 後인 1985年에는 갓 創立된 王財産輕音樂團에 選拔됐다. 王財産輕音樂團은 보천보輕音樂團과 함께 金 委員長의 寵愛를 받는 樂團으로, 每年 한 次例씩 各 學校를 돌며 人物이나 實力이 빼어난 女學生들을 新入團員으로 選拔하는 것으로 傳해진다. 그女가 王財産輕音樂團에서 피아노를 擔當했다는 데에는 異見이 없으나, 平壤音樂舞踊大學에서 피아노를 專攻으로 卒業했다는 報道에 對해서는 意見이 엇갈린다. 一旦 王財産輕音樂團에 選拔된 것이 1985年이라면, 大學을 卒業했다고 하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輕音樂團에서 活動하던 그女가 金 委員長의 눈에 든 것은 1980年代 後半으로 傳해졌다. 美貌에 유난히 豁達한 性格을 兼備한 그女는, 다른 사람들은 敢히 입을 熱氣조차 두려워하는 金 委員長 앞에서도 붙임性 있게 自己 意思를 表現해 好感을 샀다는 것이다. 한 脫北 人士가 傳하는 逸話다.

    “音樂에 造詣가 있는 金 委員長은 輕音樂團이 파티에서 演奏를 하면 中間에 끊고 ‘이 曲은 이렇게 바꿔보면 어떤가’ 하고 曲을 고치는 境遇가 往往 있다. 參席者들이 모두 바꾼 게 훨씬 낫다며 極讚하는 것은 물어보나마나다. 이런 일을 두고 ‘타고난 令監으로 音樂的 地圖를…’ 운운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옥은 달랐다. 아무래도 曲을 바꾸려면 피아노 演奏者가 가장 먼저 따라가줘야 하는데, 바뀐 音樂에 對해 ‘이건 이래서 樂曲構成에 안 맞는다’고 입바른 소리를 했다는 것이다. 委員長은 그런 唐突한 김옥에 놀랐고, 그래서 끌렸다. 어쩌면 김옥은 그렇게 하는 것이 委員長 눈에 드는 길임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以後 金 委員長은 김옥을 自身의 周邊에서 일하게 했고, 現地視察 때 데리고 나가기도 했다. ‘우리의 指導者’에 실린 寫眞은 바로 이 무렵에 撮影된 것으로 보인다. 후지모토氏는 著書에서 寫眞 속의 女人이 누구나 달게 돼 있는 김일성 배지를 달지 않고 있음을 指摘했다. 이때 이미 그 程度는 無視할 수 있을 程度로 金 委員長의 寵愛를 받은 듯 하다는 뜻이다. 寫眞集이 發刊된 1992年까지는 그女가 只今처럼 ‘有名人士’가 아니었기 때문에 公式 寫眞集의 구석에 실린 寫眞이 無心결에 公開된 것으로 推測할 수 있다.

    그女가 中央黨의 祕書나 部長級 最高位 幹部들조차 ‘옥이 同志’라고 부를 程度로 位相이 높아진 것은 1990年代 中盤부터의 일이다. 北韓에서 ‘同志’는 上級者에게 쓰는 말이다. 下級者나 同級者에게는 ‘동무’라는 呼稱을 使用한다. 김옥은 金 委員長과는 20年 넘게 나이 差異가 나지만 걸핏하면 半말을 하고 거리낌없이 神經質을 부릴 程度로 親密한 關係였다고 한다. 金 委員長은 그럴 때마다 ‘귀여운 모습’을 鑑賞하듯 웃으며 즐거워했다는 것. 平壤의 最高權力者들이 그女에게 敬稱을 쓰는 理由는 勿論 金 委員長과의 이런 關係 때문일 것이다.

    후지모토氏가 傳하는 逸話는 더욱 具體的이다. 김옥을 처음 본 것은 1987年 무렵 金 委員長의 招待所에서였는데, 高永喜의 指定席에 그女가 앉아 프랑스製 高級食器에 담긴 飮食을 먹고 있었다는 것이다. 以後 그女는 高永喜가 參席하지 않는 자리에서 金 委員長의 肝臟藥을 챙겨주는 等 아내 노릇을 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가끔 食事자리에서 金 委員長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던 그女는 金英淑, 성혜림, 高永喜 等 ‘先輩’들과는 달리 글래머는 아니지만 愛嬌가 많은 스타일이었다고 후지모토氏는 回顧한다.

    김옥의 아들, 있나 없나

    김옥에 對해 후지모토氏와 權力層 出身 脫北者들이 傳하는 內容은 大同小異하지만, 한 가지 地點에서는 크게 엇갈린다. 후지모토氏는 著書에서 “김옥에게는 아이가 없으며 이는 後繼者 問題를 둘러싸고 葛藤이 생길 것을 念慮한 高永喜가 許諾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德分에 生前의 高永喜와 김옥은 姊妹처럼 切親한 關係를 維持했으며 高永喜의 아들들도 김옥을 잘 따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몇몇 脫北人事는 “김옥에게는 1990年代 初盤에 낳은 金 委員長의 아들이 있다”고 傳했다.

    김옥에게 아들이 있다고 主張하는 脫北 人士들은, 自然히 高永喜와 김옥이 사이가 좋았다는 후지모토氏의 이야기도 事實과 다르다고 말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高永喜의 健康이 나빠진 것이 김옥 때문이라는 所聞이 있을 程度로 關係가 안 좋았다는 것이다. 特히 高永喜는 金 委員長과 關係가 圓滿하지 않은 동생 김경희를 찾아가 ‘바람난 男便’에 對한 怨望을 吐露하곤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사이가 나빠지자 金 委員長은 1990年代 後半 김옥에게 마카오에 있는 別莊을 膳賜해 가끔씩 ‘被害 있을 수 있도록’ 配慮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數年 前 “金 委員長에게 ‘정일선’이라는 愛人이 있으며, 그 아들과 함께 가끔 마카오 別莊에 나타난다”는 一部 報道의 主人公은 실은 김옥이라는 것. ‘정일선’이라는 假名은 北韓의 로열패밀리들이 海外에 나갈 때 外交官 旅券에 자주 使用하는 假名이라는 說明이다. 當時 一部 言論은 “정일선에게는 金 委員長과의 사이에서 난 ‘김한솔’이라는 열 살 內外의 아들이 있으며, 이 아이는 마카오의 外國人學校에 在學 中”이라고 報道한 바 있다.

    “私生活이 곧 政治”

    金 委員長에게 또 다른 아들이 있다면, 더욱이 現在로서는 唯一한 妻 役割을 하고 있는 김옥이 낳은 아들이 있다면, 이는 北韓의 後繼構圖와 關聯해 사뭇 重要한 意味를 갖는다. 金 委員長의 次男인 김정철과 셋째 김정운이 長男인 김정남을 제치고 後繼者에 擧論되기 始作한 決定的인 理由는 親어머니인 高永喜의 存在 때문이었다. 高永喜가 死亡한 只今 10代 初盤이라는 김옥의 아들이 將次 後繼者 競爭에 同參하게 될 可能性을 排除하기 어렵다.

    김옥의 아들이 後繼者 物望에 오르기 위해서는 먼저 김옥의 퍼스트레이디 役割이 굳어져야 할 것이다. 脫北 高位人士들은 김옥이 高永喜가 病床에 누운 2002年 以後로는 마카오 別莊에 자주 가지 않게 됐다고 말한다. 올해 初 金 委員長의 中國 訪問에 同行한 것도 高永喜가 死亡했기 때문에 可能한 일이었으며, 以前에는 한 番도 金 委員長과 함께 海外旅行을 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金 委員長의 1月 訪中(訪中)은 高永喜가 死亡한 以後 첫 海外巡訪이었다. 向後 그의 海外 巡訪길에 關心이 集中되는 理由다.

    金 委員長의 私生活에 對한 우리側 情報當局의 情報蒐集 能力은 김대중 政府 以後 相當部分 弱化됐다는 것이 大體的인 評價다. 한 關係者는 “햇볕政策 以後 北韓 高位層의 自尊心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次元에서 私生活 問題는 主要情報로 取扱하지 않는 便이다. 報告書에 그런 部分을 强調하거나 意味를 두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雰圍氣가 있다. 위에서 그렇게 받아들이면 밑에서도 關聯 諜報에 鈍感해지게 마련”이라고 傳했다. 그러면서 이 關係者는 “最高指導者의 私生活이 곧 政治變動의 原因이 되는 北韓 體制의 特性을 勘案하면 이 같은 傾向에는 問題가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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