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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紅燈街와 네바다 賣淫窟|新東亞

암스테르담 紅燈街와 네바다 賣淫窟

世界의 公娼

  • 권삼윤 <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入力 2005-04-11 15: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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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에도 公娼(公娼)을 許容해야 할까. 公娼이 未成年者 淪落과 性犯罪를 豫防한다는 支持論과, 實質的 ‘公人 賣春地域’인 社倉(私娼)도 모자라 公娼을 만든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反論이 팽팽하다. 그렇다면 이미 오래 前에 淪落街를 合法化한 나라들의 事情은 어떨까. 그들의 經驗에서 배울 수 있는 智慧는 없을까.
    現代社會를 象徵하는 키워드 中의 하나가 ‘性(性)’이라는 데 異議를 提起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誠意 平等에 對한 談論, 女性 쿼터制 要求, 性戱弄 禁止의 法制化, 離婚의 急激한 增加, 賣買春과 未成年者 關聯 性犯罪의 持續的 擴散, 猥褻과 藝術의 境界를 오가는 表現物의 汎濫, 女性의 身體를 利用한 廣告의 洪水 等 이제 性을 排除하고는 政治도, 經濟도, 文化藝術도 論할 수가 없는 現實이다.

    그러다 보니 ‘保護해야 할 性’의 限界는 果然 어디까지인가 하는 論難도 끊임없이 提起된다. 誠意 日常化가 性 談論의 日常化를 부추기는 것이다.

    이런 雰圍氣를 反映하듯 最近 우리 社會 一角에서는 公娼(公娼) 制度 導入을 眞摯하게 檢討해야 한다는 主張까지 일고 있다. 特히 이 問題는 서울 종암警察署長으로 在職하면서 ‘未成年 賣春과의 戰爭’을 벌인 바 있는 김강자 서울警察廳 防犯課長이 大學生을 對象으로 한 特別講演에서 공창제가 “歪曲된 性文化와 各種 性犯罪, 未成年者 淪落을 剔抉할 수 있는 效果的인 代案”이라는 個人 意見을 開陳한 것이 契機가 되어 더욱 注目을 받고 있다.

    勿論 이에 對한 反論도 만만찮다. 靑少年保護委員會 委員長을 지낸 강지원 서울高檢 檢事는 “社倉은 司法 團束에서 除外된 實質的인 公認 賣春 地域이다. 그런데도 賣春을 縮小하는 方案을 놔두고 섣불리 公娼 制度를 主張하는 것은 (行政) 便宜主義的인 發想이다”고 主張한다.

    賣春은 一夫一妻制의 産物?



    姓은 삶의 重要한 部分이다. 태어나는 것도 그렇거니와 삶의 大部分을 男女가 만나 꾸려가기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누구도 이 問題에서 例外가 되지 않는다. 各自는 제 나름의 性에 關한 意識과 態度, 方式이 있으므로 暴力을 隨伴하지 않는 限 어느 한 가지 方式이 옳다, 그르다고 斷定하기란 쉽지 않다.

    性은 元來 種族 繁殖과 關聯된 것이라 本能的인 要素가 剛하다. 賣春과 淪落은 一夫一妻制가 定着되는 過程에 派生한 것이라는 側面이 있다.

    이에 對해 “一夫一妻制가 定着된 것이 언제 일인데 只今까지 그 餘波가 미친다는 말이냐”고 反問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一夫一妻制가 男女平等의 社會로 나아가기 위해 人間의 本能을 統制하는 制度라는 事實을 떠올린다면 아마 首肯할 수 있을 것이다(인류는 이미 群婚制, 一夫多妻制, 一妻多夫制 等을 經驗했고 이中 一部는 只今도 남아 있다). 그래도 理解가 되지 않는다면 TV 動物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發情期 수컷들이 마음에 드는 암컷을 차지하려고 벌이는 殘忍한 爭奪戰을 눈여겨보라.

    姓은 이렇게 本能的 要素가 剛하게 支配하기에 理性과 論理의 世界에서 한 발짝 벗어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解決策을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때그때 地域 社會가 나름의 制度와 方式으로 根絶하려 했던 賣春이 只今까지 끈質지게 支撐해오는 것은 바로 이런 理由 때문이다.

    그러므로 筆者는 이 글에서 공창제 導入이 必要하냐 아니냐를 主張할 생각은 없다. 筆者에겐 그것을 論할 만한 專門知識과 能力도 없다. 공창제 論議가 觸發된 時點에서 그間 世界 여러 나라를 旅行하며 이 問題와 關聯해 보고 느낀 바를 통해 우리 社會가 앞으로 이에 關해 무언가 決定을 내려야 한다면 이런 것들도 한番 짚어볼 必要가 있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공창제 導入을 主張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理由를 댄다.

    하나는 우리의 法體系가 現實을 제대로 反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賣買春이 實際로 行해지는데도 默認하고 있으니 그럴 바에야 政府가 賣買春을 合法化해 管理함으로써 ‘奴隸 淪落’으로 轉落한 淪落女들의 人權을 保護하는 게 오히려 車線의 方案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男性들의 性慾을 法的으로 統制할 수 없는 以上 그들에게 性慾을 排出할 場所를 合法的으로 提供하는 代身 다른 地域에서 일어나는 類似 行爲를 뿌리뽑아 未成年者를 保護하고 同時에 公衆 衛生保健 狀態도 改善하자는 것이다.

    김강자 課長도 어느 인터뷰에서 “私娼街에서 救出된 열네 살짜리 少女가 性病으로 눈瞳子가 누렇게 變하고 性器가 문드러진 것을 본 瞬間 확 돌아버릴 것 같았다”고 한 적이 있다.

    實際로 그런 狀況이라면 公公然한 現實이 돼버린 淪落行爲를 놓고 違法이다 아니다를 따지는 것보다는 어떻게 하는 것이 淪落女에게 人權을 찾아줄 수 있는 길인지를 먼저 묻는 게 順序이리라. 삶과 죽음을 오가는 게 當場의 現實인데 다른 무엇이 그에 앞설 수 있단 말인가. 過去에 우리가 ‘종3’(서울 鍾路3街에 있었던 私娼街)을 없앴다지만 그 結果 種3流의 私娼街가 서울 外郭과 首都圈 곳곳으로 擴散됐다는 事實을 認定한다면 이러한 主張은 充分히 檢討해볼 만한 價値가 있다.

    그렇지만 그에 앞서 考慮해야 할 것들도 있다. 世界 大部分의 나라에 社倉이 現實的으로 存在하는데도 大部分 이를 默認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事實이다. 賣春을 合法化한 곳은 네덜란드나 美國의 네바다州 等 極히 一部에 不過하다. 왜 수많은 나라와 都市가 合法化를 躊躇하는 것일까. 合法化의 效果를 몰라서일까, 아니면 그것이 自己네 나라와 地域의 이미지에 否定的인 影響을 끼치기 때문일까.

    勿論 그것이 理由의 全部는 아닐 것이다. 네덜란드가 賣春을 合法化했다고 해서 우리가 네덜란드에 對해 否定的인 이미지를 갖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筆者가 보기에는 많은 나라가 이렇듯 어정쩡한 態度를 堅持하는 것은 合法化만으로는 問題가 解決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듯하다.

    아무튼 네덜란드는 工廠에 對해 아주 떳떳하다. 筆者는 그 理由가 이 나라의 獨特한 歷史와 文化에 있다고 생각한다. 事實 네덜란드는 좀 特異한 나라다. 國土의 25%가 海水面보다 낮아 ‘國土亂’에 시달려온 탓에 이들은 17世紀 以來 바다 멀리 나가 植民地 經營과 貿易으로 먹고사는 問題를 解決해왔다. 장사의 要諦는 個人의 自由와 營利 追求다. 그래서 이들도 自由와 營利 追求를 무엇보다 앞세웠고 또 그것을 위해 鬪爭해 왔던 것이다.

    그것은 必然的으로 開拓과 進步의 意志를 부추겼다. 英國 出身의 淸敎徒들이 新大陸을 向해 떠났던 곳도 네덜란드였고, 國際法과 海洋法의 母胎가 된 ‘戰爭과 平和의 法’의 著者도 이 나라 出身의 그로티우스였으며, 19世紀 末 아르누보 建築의 旗幟를 올린 이도 네덜란드 建築家 리트펠트 슈뢰더였다. 이들은 모든 面에서 進步的인 性向의 民族이었다.

    王宮과 市廳 옆이 紅燈街

    主로 外地로 移動하는 生活은 그들로 하여금 거리의 女子를 찾게 만들었고 性에 對해서도 自然 開放的인 態度를 갖게 했다. 紅燈街가 主로 港口都市에, 그리고 新興 工業都市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本格的인 工廠이 海上植民地 經營과 貿易으로 繁昌했던 古代 그리스에서 始作됐다는 點도 이를 證明한다. 當時 아테네의 外港 피레우스에는 毒方式(cell) 오두幕집이 많았는데, 그곳이 大槪 그런 場所로 利用됐다.

    네덜란드人들의 이처럼 開放的이고 進步的인 性向은 世界 最初로 軟性(軟性) 痲藥의 使用과 販賣를 許容하게 만들었고, 安樂死 認定에서도 先驅的인(?) 態度를 取하게 했다. 또한 이들은 結婚보다 同居를 더 選好한다. 形式보다는 內容을 優先하는 것이다. 自己 딸이 다른 사내와 同居한다는 事實을 스스럼없이 남들 앞에서 이야기해도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다. 모든 것을 個人의 選擇에 맡길 뿐 國家나 制度가 그에 對해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는 것이 이 나라의 文化다. 娼女를 찾는 것도 私生活로 보기 때문에 工廠에 對해서도 그렇게 떳떳한 것이다.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은 運河의 都市다. 有名한 ‘紅燈街(Red Light District)’도 運河를 끼고 있다. 한밤에 冶한 불빛이 運河 周邊의 水面에 어리면 그것만으로도 좋은 볼거리가 된다. 實際로 그곳은 堂堂한 觀光名所이기도 하다. 이 都市를 찾는 觀光客이라면 用務가 없어도 好奇心에 이 地域을 한番쯤 徘徊한다. 놀라운 것은 그 地域이 王宮과 市廳 近處라는 事實이다. 서울로 따지면 鍾路 1街쯤 되는 位置에서 버젓이 賣春이 行해지는 것이다.

    어떤 業所는 ‘이곳을 지나면 視聽입니다. 더 以上 이런 집은 없습니다(De Laaste Pomp voor Het Stadhuis)’라는 看板을 내걸고 한 사람의 손님이라도 더 붙들어 보려고 애쓴다. 그렇지만 그 業所를 지나면 또 그런 看板을 건 業所가 나타난다. 서로 ‘援助’ 看板을 내걸고 ‘오리지널 싸움’을 벌이는 우리네 飮食店들을 떠올리게 해 웃음을 자아냈다.

    그런 집에서는 으레 얇은 옷을 걸친 女人들이 稀微한 불빛의 窓門 너머로 마치 팬터마임 俳優처럼 特異한 몸짓을 지으며 지나가는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動한 사내들은 門 앞에서 흥정을 한 다음 안으로 들어간다. 業所 周邊에는 섹스에 도움을 주는 各種 機構와 藥品, 포르노 비디오와 冊子를 파는 가게도 櫛比하다. 그곳에는 性에 對해 保守的인 東洋人으로선 좀처럼 理解하기 힘든 物件도 많다. 新奇해서가 아니라 뭐 저런 것까지 動員해가면서 그 일을 치러야 하나 하는 생각에 憫惘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에선 軟性 痲藥도 去來된다. 섹스와 포르노, 거기에다 痲藥까지 넘쳐나다 보니 性에 對해 꽤 자유롭다는 西유럽에서도 으뜸가는 ‘聖域(聖域)’이자 ‘聖域(性域)’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먼 外地에서 온 觀光客들도 많이 찾지만 顧客의 主流는 이웃 프랑스나 獨逸에서 온 遠征팀들이다. 國境이 없어져 버린 只今 이들을 統制할 마땅한 方法이 없는 다른 EU(유럽聯合) 國家들은 네덜란드 政府를 向해 “그래도 痲藥은 안 돼!”라고 抗議해보지만 네덜란드에서는 “다 알면서 무슨 소리냐”며 코방귀를 뀔 뿐이다.

    이곳이 紅燈街로 자리잡은 것은 約 100年 前의 일이다. 암스테르담 市價 賣春과 呼客 行爲를 할 수 있는 一定 空間을 提供하는 代身 衛生管理를 徹底히 하면서 자연스럽게 定着된 것이다. 市 當局은 賣春行爲가 不法이라며 根絶 一邊倒로 나가기보다는 一定 地域 안에서 性慾을 解消할 수 있게 하고 또 그 일을 통해 가난한 女性들이 生計를 꾸려갈 수 있게 함으로써 淪落街가 住居地域으로 擴散되는 것을 막고 性病의 傳染도 豫防할 수 있다고 봤다.

    實際로 그들은 이처럼 合法的인 紅燈街가 있어 이웃 나라에 비해 性 犯罪率이 낮다고 자랑하기도 한다. 또한 네덜란드 成人의 折半은 賣春婦를 親舊로 갖는 데 對해 全혀 拒否感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며, 75%는 賣春을 職業으로 認定해야 한다는 見解를 갖고 있다는 調査結果도 있다. 이런 事情이라면 암스테르담의 工廠은 나름대로 成果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공창제를 導入해야 한다는 主張을 펴는 이들도 이런 事例에서 힘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서구화한 삶의 方式과 性文化에 제법 익숙한 것은 事實이지만 아직은 그들의 性文化를 그대로 모델로 삼기에는 問題가 있다. 大部分의 사람들은 性이 아무리 重要하다 해도 내놓고 즐겨야 할 對象으로는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社會는 性에 對해서만큼은 如前히 保守的인 態度를 堅持하고 있는 게 現實이다.

    勿論 性에 對한 意識이나 態度는 固定된 것이 아니라 可變的인 屬性을 가지고 있으므로 歲月이 좀더 흐른다면 只今의 그들처럼 開放的인 態度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남는 問題는 但只 公娼을 認定한다고 해서 許可된 淪落 地域 內에서의 衛生水準과 淪落女의 人權 狀況이 解決될 수 있느냐 하는 것으로 歸着된다.

    이에 對해 分明히 ‘아니오’라고 말해주는 冊이 올해 5月 美國에서 出刊됐다. 問題의 書籍 ‘賣淫窟 머스탱 랜値와 女人들(Brothel; Mustang Ranch and its Women)’의 著者는 하버드대 醫大 出身의 女醫師 알렉사 알버트. 그女는 이 冊을 쓰기 위해 3年 동안 끈질기게 네바다 공창협會를 採根해 許諾을 받고 네바다州 라스베이거스의 ‘머스탱 랜치’라는 賣淫窟에 머물면서 淪落女의 衛生狀態 等에 對해 調査를 벌였다.

    그女가 調査作業에 投入한 時間은 無慮 6年이었는데, 그 가운데 6個月을 淪落女들과 同苦同樂했다. 그들이 왜 그곳으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어떤 生活을 하고 있으며, 性關係時 콘돔은 着用하는지 等을 現場에서 調査한 後 그女가 내린 結論은 “賣春을 合法化한 地域에서도 淪落女들은 罪囚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調査期間 동안 그女는 醫師가 아닌 學生의 姿勢로 眞摯하게 이 問題에 穿鑿했던 만큼 그냥 흘려들을 얘기는 아니다.

    ‘人權 先進國’이라는 美國, 그곳에서도 唯一하게 工廠이 許容된 네바다州(이곳은 賭博, 離婚 等에 對해서도 進步的인 態度를 갖고 있다)에서도 淪落女들이 自身의 自由意志를 무시당한 채 罪囚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다른 나라 淪落女의 事情은 말하지 않아도 斟酌할 만하다.

    우리가 이 冊에서 찾아낼 수 있는 示唆點은 淪落女의 人權과 衛生水準의 向上은 공창만으로 解決되지 않으며 그것을 위한 別途의 對策과 努力이 뒤따라야 所期의 成果를 거둘 수 있다는 事實이다. 이는 分明 우리에게 負擔으로 作用할 것이다.

    工廠에 ‘公正去來’는 없다

    또 賣春의 構造가 그리 簡單치 않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賣春은 특별한 知識이나 技術 없이도 可能한 生計手段으로 認識돼 있다. 實際로 그런 理由로 많은 女性들이 그 길로 들어섰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이 淪落女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事實이 다시 한 番 밝혀진 것이다.

    특별한 知識이나 技術이 必要없는 勞動은 經濟學的으로 말한다면 ‘競爭力’이 없는 勞動이다. 몸이 財産이라고 하지만 世上의 折半이 女性이라는 點을 考慮할 때 賣春은 ‘完全 競爭市場’ 狀態가 될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時間과 努力을 投入해 水準 높은 敎育과 技術을 習得하려는 것은 市場이나 雇用主와의 關係에서 유리한 位置에 서기 위해서인데, 그저 몸 하나만 갖고서 돈과 市場을 움켜쥔 抱主와 맞설 수는 없는 일이다.

    이른바 ‘정글의 法則’이 가장 리얼하게 適用되는 賣春市場에서 ‘公正去來’를 要求하는 것은 純眞한 생각이라는 것을 이 冊은 새삼 일깨워준 셈이다.

    윤락녀들을 向해 “멀쩡한 몸 가지고 먹고 살 일이 그것뿐이더냐”, “너희는 그런 事情도 모르고 그 길로 들어섰느냐” “한 瞬間 잘못 생각해 그 길로 빠졌다 해도 ‘이게 아니다’ 싶으면 어떻게든 빠져 나올 생각을 했어야지” 하는 式으로 나무랄 수도 없다. 그런 理性的인 타이름이 實際로는 그들에게 別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힘들고 더딘 일이 되겠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그 길로 빠지지 않게끔 社會·經濟·文化的 條件을 갖추는 일이 더 時急하다.

    몇 年 前 ILO(國際勞動機構)도 “勞動者와 使用者 間의 ‘말로만의 平等’보다 더 重要한 것은 平等을 實質的으로 이룰 수 있는 敎育의 機會를 充分히 提供하는 것”이라는 見解를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罪囚 取扱받는 淪落女들에게 ‘人權, 人權’ 하고 외치는 것보다는 그들이 正말 自身의 人權을 主張하고 또 그걸 지킬 수 있는 社會的 與件을 스스로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 優先돼야 한다.

    筆者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直接的인 契機는 스칸디나비아 國家들을 旅行하면서 觀察한 그들의 프리섹스 文化였다.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等이 屬해 있는 스칸디나비아 帝國은 네덜란드 못지않게 性이 開放된 곳이다. ‘프리섹스’란 말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곳에는 工廠은 말할 것도 없고 社倉度 눈에 띄지 않는다. 프리섹스의 故鄕이라고 해서 性 關係가 亂雜하고 ‘거리의 女性’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라는 ‘期待’는 보기 좋게 깨졌다. 스톡홀름에 사는 한 僑民은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오래 前 스톡홀름의 한 가게에서 거리의 女子를 두고 營業하려 한 적이 있었는데, 開店하자마자 門前 成市를 이뤘다. 顧客들이 몰려든 게 아니라 自身들을 冒瀆했다면서 市民들, 特히 女性들이 몰려와 거세게 抗議했기 때문이다. 結局 主人은 門도 열어보지 못하고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는 아무도 그 일을 하려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스칸디나비아에 ‘愛情 없는 性關係는 없다’는 얘기다. 그들이 말하는 프리섹스란 無節制한 男女間의 性關係가 아니라 人間 對 人間으로 맺는 關係를 뜻한다. 프리섹스의 ‘프리(free)’란 ‘자유롭다’의 뜻이 아니라 ‘없다’는 뜻이다. 이때 ‘없다’는 것은 性差別이 없다는 意味다. 그들은 實際로 家庭에서나 職場에서 男子다, 女子다 하며 따지지 않는다. 性의 差異를 差別이나 保護의 口實로 삼기보다는 價値의 多樣性 次元에서 理解한다. 이런 그들에게서 ‘男子니까 私娼街를 찾아도 되지’ 하는 態度는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女性의 職業 가운데 무당과 함께 가장 歷史가 오래되었다는 賣春이 盛行하는 理由가 萬一 가난 때문이라고 한다면 賣春은 스칸디나비아 땅에 발붙일 수가 없다. 밥을 굶는다든지 몸이 아파도 病院에 가지 못한다든지, 돈이 없어 아이를 學校에 보내지 못할 만큼 事情이 어려운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 問題는 ‘福祉의 天國’답게 이미 오래 前에 社會保障制度로 解決했기 때문이다.

    性을 사려는 理由는 異性의 肉體가 그리워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異性에게 사랑을 느낄 때에만 關係를 갖는 便이라 그럴 蓋然性도 적다. 그런 段階에 이르기 위해서는 얼마間의 時間이 必要할 테니 말이다. 衝動的인 性의 本能을 그들은 그런 사랑의 態度로 節制해낸다.

    人間事를 支配하는 세 가지 要素를 들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돈과 權力과 性이라고 할 것이다. 筆者도 같은 생각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그리 簡單하게 생각할 것들이 아니다. 人間의 永遠한 宿題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잘 다루면 幸福과 繁榮을 가져다주지만 잘못 다루면 個人과 社會를 모두 망치는 독과 같은 存在이기 때문이다. 이에 對한 解答을 그 社會가 어떻게 마련해내느냐 하는 것이 바로 文化이고 文明인 것이다.

    그런 意味에서 性에 對한 意識과 態度에 많은 變化가 일고 있는 요즘 우리가 그에 對한 社會的 裝置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하는 問題는 이 分野에 從事하는 몇몇 사람들에게만 맡겨둘 만큼 한가로운 事案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머리를 짜내고 짜내 短期的. 長期的 代案을 찾아봐야 할 우리 모두의 問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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