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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年의 豫言 “自動車와 電子가 融合하는 時代 올 것” [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 ⑥]|新東亞

1993年의 豫言 “自動車와 電子가 融合하는 時代 올 것” [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 ⑥]

三星 任員들이 傳하는 프랑크푸르트 現場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1-01-28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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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벽까지 이어진 講演…무슨 宗敎集團이냐

    • 新經營 宣言 갑자기 나온 게 아니다

    • 三星은 全혀 準備가 안됐다

    2013년 10월 28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린 ‘삼성 신경영 20주년 선포’ 기념 만찬에서 부인 홍라희 당시 리움미술관 관장과 함께 행사장을 나서는 이건희 회장. [삼성전자 제공]

    2013年 10月 28日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린 ‘三星 新經營 20周年 宣布’ 記念 晩餐에서 夫人 홍라희 當時 리움美術館 館長과 함께 行事場을 나서는 李健熙 會長. [三星電子 提供]

    1993年 6月 7日 獨逸 프랑크푸르트 宣言은 여러모로 破格的인 行事였다. 李健熙 會長은 專務級 以上 高位 經營陣들을 飛行機로 실어 나른 뒤 호텔에서 먹이고 재우며 自身의 哲學과 생각을 講演했다. 

    當時 三星物産 유럽本部長으로 會長을 遂行했던 원대연 前 제일모직 社長의 回顧다. 

    “本來 프랑크푸르트로의 任員들 召集은 計劃된 것이 아니었다. 會長은 到着하자마자 유럽 駐在員들과의 對話 때 當身의 주된 關心事였던 複合化와 國際化를 主題로 講演했다. 雰圍氣는 그런대로 和氣靄靄했다. 그런데 講演 主題가 갑자기 ‘質 經營’으로 바뀐 거다. 洗濯機 뚜껑 組立 映像을 보고 衝擊을 받은 거였다. 會長은 映像을 본 다음날 바로 서울에 電話를 걸어 當場 任員들을 召集하라고 指示했고, 서울은 그때부터 북새통이 되어 大擧 飛行機에 오른 것이다.” 

    李健熙 會長은 海外 任員 會議라는 前無後無했던 프랑크푸르트 宣言 行事의 1人 企劃者이자 演出者이며 俳優였다. 자리를 비우면 큰일 나는 줄 알던 時節에 任員 數百餘 名을 모두 비즈니스席에 태워 飛行時間만 12時間이 넘는 프랑크푸르트로 부른 것이다. 長期間 高級 호텔에서 宿泊시키는 것 自體가 누구도 想像할 수 없는 發想인데다 돈이 한두 푼 들어가는 일이 아니다보니 三星 內部에서도 ‘浪費’라는 視線이 支配的이었다. 

    하지만 會長은 長距離 飛行을 便安하게 移動하고 自身이 묵은 호텔과 똑같은 高級 호텔에서 묵으며 敎育을 해야 效果가 극대화될 수 있다며 “모든 것이 投資”라고 밀어붙였다고 한다.




    무슨 宗敎集團이냐

    1993年 新經營 宣言 現場에 있었던 三星맨들의 記憶은 30餘年 가까이 歲月이 흘렀는데도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김광호 前 三星前者 副會長의 말이다. 

    “當時에는 서울에서 濟州 가는 것만도 큰일이었다. 더구나 任員들이 平日에 자리를 뜨면 會社에 큰일 나는 줄 알던 때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 많은 任員들에게 獨逸로 날아오라고 했으니 얼마나 엄청난 일이었겠나. 호텔과 飛行機票도 求하기 힘들었다. 3, 4日 豫想하고 出張 準備를 해갔는데 1週日, 2週日이 지나가니 속옷을 빨아서 호텔 베란다에 널어놓곤 했다. 호텔 側에서도 難處해했다. 準備해간 달러도 떨어져 信用카드를 써야 했는데, 外換 自由化가 이뤄지지 않을 때라 三星카드 本社에 電話해 限度를 늘리느라 아우聲이었다.” 

    갑자기 東洋에서 洋服 차림의 샐러리맨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사람의 講義를 不動姿勢로 앉아 듣는 모습은 外國人들 눈에 얼마나 奇異하게 비쳤을까. 金 前 副會長은 “호텔 側에서 무슨 宗敎集團 아닌가하는 눈초리로 우리를 바라보았다”고 傳한다. 

    當時 歷史的 現場에 參席했던 三星맨들의 말을 綜合해보면 이들은 于先 會長의 瀑布水 같은 말과 厖大한 知識, 未來를 보는 慧眼에 놀랐다고 異口同聲으로 말한다. 

    “잠도 안 주무시고 繼續 演說을 하시는데 갖고 있는 智慧와 知識이 總動員되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저런 厖大한 內容을 알고 계실까 놀라웠다. 게다가 처음 듣는 內容들이 너무 많았다. 只今도 기억나는 말이 앞으로는 自動車가 但只 移動手段이 아니라 電子와 融合하는 電子製品이 될 거라는 말이었다. 實際로 只今 그렇게 되지 않았나. 新經營의 變化와 革新을 보잉 747期에 比喩한 이야기도 記憶에 남는다. 보잉 747期가 離陸할 때 一旦 滑走路를 달려 空中으로 뜨게 되면 不過 몇 分 안에 1萬m까지 확 올라가야 하는데, 萬若 이 時間에 올라가지 못하거나 中間에서 멈추게 되면 墜落하거나 空中爆發 한다면서 三星 新經營度 한番 始作한 以上 方向을 바꿀 수도, 速度를 늦출 수도, 다시 내려올 수도 없다고 하시면서 變化를 督勵했다. 當時 말씀들을 只今 떠올리면 우리가 보는 視野라는 게 얼마나 좁았는지 切切하게 느껴진다. 會長은 20, 30年 後 일어날 일을 미리 당겨서 한 거였다.”(김인 前 SDS 社長) 

    “正말 그렇게 말씀을 잘하시는 줄 몰랐다. 그냥 生放送으로 原稿도 一切 없었다. 다들 氣絶초風했다. 무엇보다 놀란 게 豐富한 常識, 問題에 對한 깊이 있는 分析이었다. 會長의 말은 論理的으로 起承轉結에 맞춰 얘기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日本 얘기 나왔다가 다른 얘기 나왔다가 막 여기저기로 튀는데 脈을 連結해서 보면, 툭툭 던진 조각조각들 하나하나가 寶石 같은 얘기들이었다.”(황영기 前 三星證券 社長) 

    “‘마누라 子息 빼고 다 바꾸라’는 말은 只今이야 平凡하게 들리지만, 當時 現場에선 엄청난 衝擊이었다. ‘저 어른이 얼마나 苦心했으면 저렇게까지 임팩트 있는 말을 던질까’ ‘가슴 속에 얼마나 큰 응어리가 쌓이고 쌓였으면 저런 表現을 할까’ 생각하며 職員들은 共感할 수밖에 없었다.”(허태학 前 에버랜드 社長) 

    “會長은 그때까지만 해도 사내에 出勤도 안하시고 집에서 業務를 봤기 때문에 사내 職員들에게는 ‘人飛杼블 맨(invisible man)’으로 통했다. 더구나 말씀도 語訥했다. 내가 1985年度에 理事가 돼 龍仁硏修院에서 新任 任員 敎育을 받는데 副會長으로 講義를 하신 일이 있었다. 그런데 講義 中間에 말이 막혀 5分 程度 沈默하다가 講義를 끝내버리는 것 아닌가. 性品이 內省的이고 남들 앞에서 말도 잘 하지 못했던 분이 프랑크푸르트에서는 全혀 딴 사람이 되었다. 마치 解脫이라도 한 듯 테이블에 주스 한盞 놓고 새벽 서너 時까지 講演을 이어갔다. 그렇게 3週가 지나고 空港까지 修行을 했는데 顔色이 너무 안 좋아 ‘너무 無理하시면 健康을 해칩니다’라고 했더니 ‘가장 가까운 祕書室 사람도 내가 하는 이야기 半의半도 못 알아듣는다. 前 職員들을 알아듣게 해야 하는데 내가 어떻게 便히 잠을 자겠느냐’며 한숨을 쉬시던 모습이 只今도 생생하다.”(원대연 前 제일모직 社長) 

    “會長은 元來 少數만 모아서 하는 會議를 選好했고 말하기보다는 듣는 스타일이었는데 그날은 마치 신들린 사람 같았다. 쉴 새 없이 새로운 얘기들을, 그것도 資料하나 보지 않고 하셨다. 다들 ‘어느 팀에서 저런 資料들을 만들어 報告한 거야’ 했는데 祕書室 所屬인 우리들도 처음 듣는 內容이라 받아 적기만 했다. 當時 會長 말씀은 先代會長 말씀들을 깔고, 그 위에 本人의 콘텐츠를 얹어 當身의 方式대로 料理를 다시 해서 나온 內容들이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거기에다 日本人 拷問들과 對話를 하면서 얘기했던 것들까지 더해지니 엄청나게 힘이 있는 內容이 된 것 같았다. 結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려면 衝擊療法이 必要하다고 생각하신 것 같았다.”(손욱 前 三星綜合技術院長) 

    김광호 前 三星前者 副會長은 “會長과 新經營 初期에 個人的으로 이야기를 第一 많이 나눈 사람들 中 하나가 내가 아닐까 싶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렇게 오래 말씀하시는 데도 등을 椅子에 기대는 法이 없었다. 어떤 날은 새벽 4~5時가 되어 窓 밖에 東이 훤히 터서야 ‘자, 오늘은 그만’ 하며 일어나셨다. 우리들은 졸음을 참아가며 앉아서 敵느라고 精神이 없었다. 會長은 元來 한番 말門이 터지면 끝이 없는 분이었다. 한番은 서울에서 싱가포르까지 飛行機를 타고 가면서 7時間 동안 쉬지 않고 말씀하신 적도 있었다. 무엇보다 正말 모르는 게 없다고 느낄 程度로 宏壯히 博識했다. 우리가 들어가지 못하는 곳까지 깊이 쑥 들어가 오래 苦悶하고 생각하고 말씀하시니 밑에 사람들은 當할 才幹이 없었다.” 

    美國을 包含해 獨逸 英國 日本 新(新)經營 宣言 日程에 모두 參與했던 박근희 前 三星生命 社長(現 CJ 大韓通運 會長) 말도 비슷하다. 

    “나는 當時 祕書室 財務팀 部長 3年次여서 詳細히는 아니더라도 各 系列社들이 어떤 問題를 갖고 있다는 걸 대충은 알고 있었는데, 會長이 알고 있는 디테일한 內容들은 想像을 超越했다. 저 程度로 알고 계시면 어느 系列社 社長도 當해낼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종렬 前 제일기획 社長은 삼성그룹 祕書室 弘報팀長 等을 지내며, 李健熙 會長이 副會長으로 經營에 參加하던 時節부터 參謀 役割을 했다. 會長의 意中을 가장 仔細히 알고 있는 人物로 꼽힌다. 그는 當時 이 會長의 意中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라며 이렇게 얘기한다. 

    “‘내가 이 組織을 끌고 가야 하는데 이 사람들이 變하질 않는다. 어떻게 해야 變할까. 宏壯히 立體的으로 느껴야 되는데, 이 사람들이 눈으로만 봐서도 안 되고 귀로만 들어서도 안 된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껴야 한다. 그래야 變한다’ 이렇게 생각하신 것 같다. 

    日本에 가셨을 때에도 낮에는 日本의 인프라를 둘러보라고 하고, 一流 會社들도 가보고, 東京 시티홀, 후지 TV도 가서 보라고 했다. 저녁에는 講演하고, 어떤 때는 討論도 시키고 宏壯히 다양하게 했다. 事實 돈으로 計算하면 엄청난 거였다. 會長은 會社를 一流로 만들기 위해서 마치 큰 山을 넘어갈 때 막 드라이브를 거는 것처럼 繼續 몰아갔다. 무슨 불이 붙은 것 같았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잠을 잘 수가 없다. 등골에서 식은땀이 난다. 이래 가지고는 完全히 무너져 내릴 것 같아 견딜 수가 없다.”


    新經營 宣言, 갑자기 나온 게 아니다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 선언 당시의 이건희 회장. [삼성전자 제공]

    1993年 6月 7日 獨逸 프랑크푸르트에서 新經營 宣言 當時의 李健熙 會長. [三星電子 提供]

    李健熙 會長의 新經營 宣言에서 보여준 危機意識이나 메시지는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게 前職 任員들의 한결같은 證言이다. 

    박정옥 前 에스원 代表는 삼성전관(三星SDI 前身)에서 綜合硏究所腸, 三星 祕書室에서 技術팀長 等을 歷任하면서 三星의 技術 發展을 함께한 엔지니어다. 그의 말이다. 

    “1991年에 祕書室 技術팀長으로 發令받고 얼마 안 있어 會長을 直接 대면한 적이 있다. 會長은 幕 副會長이 돼 얼마 지나지 않은 1981年에 말씀하셨던 91個 아이템을 또 다시 말씀하셨다. 그 뒤로 每日 말씀을 듣고 整理하면서 ‘只今 말씀하시는 內容들이 10年 前부터 똑같은 것이었구나’를 새삼 깨닫던 때가 많았다. 副會長 時節부터 그렇게 말했어도 現場에 傳達되지 않았던 거다.”그는 “1993年 프랑크푸르트 新經營 宣言은 平素 목 놓아 强調했던 것의 延長線上이었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마이크론, 디지털, 소프트웨어, 硏究所 基礎技術, 自動化, 캐드(CAD), 캠(CAM), 品質 不良率이야기에서부터 日本, 日本人 拷問(顧問) 이야기 等等을 듣다 보면 아주 一貫되고 緻密했다. 李 會長이 三星을 바꾸려고 했던 것이 1981年부터였다는 것을 돌이켜보면 會長으로서는 無慮 10年餘를 기다려야 했던 거다.” 

    고정웅 하쿠호도제일 代表理事 社長은 이병철 會長에서 李健熙 會長으로 承繼가 이뤄지던 時期에 祕書室에서 勤務했다. 朴 前 代表처럼 이 會長의 副會長 時節과 會長 就任 初期를 記憶하고 있는 그는 “會長은 밤잠을 제대로 자지 않을 程度로 會社의 未來를 위해 苦悶하고 工夫했다”며 이렇게 傳한다. 

    “어떨 땐 一週日씩 밤을 새운 뒤 쉴 새 없이 우리에게 質問을 던지고 當身의 비전을 說明했다. 會長을 至近距離에서 모시고 있는 나 같은 祕書들에겐 苦役이기도 했다. ‘마누라하고 子息만 빼고 다 바꿔보라’는 말도 新經營 宣言 2年 前부터 本人의 哲學과 關聯한 이야기를 밤새워 할 때 말했던 것이었고, 特히 直前 1年에는 集中的으로 말했던 內容이었다. 사람 앞에 나서길 싫어하고 演說에 弱하다던 분이 몇 個月 동안 單 한 番의 막힘도 없이 ‘비전’을 雄辯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그前부터 ‘數千 番’의 리허설이 있었기 때문에 可能했다고 할 수 있다.” 

    當時만 해도 유튜브도 없었고 온라인이 發達되지 않았던 時代여서 會長의 메시지를 國內로 傳達하고 그룹 全體에 傳播하는 일 自體가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프랑크푸르트 語錄들은 서울에 팩스로도 보내지고 테이프에도 모두 錄畫됐다. 6月 24日과 25日 이틀 동안에는 ‘人工衛星’을 利用해 現地에 모인 社長團과의 마라톤 會議內容을 모든 任職員들이 視聽하도록 하게 했다고 한다.


    三星은 全혀 準備가 안됐다

    박근희 前 三星生命 副會長(CJ大韓通運 副會長)은 프랑크푸르트, 런던, 도쿄, 오사카, 후쿠오카를 거치며 會長의 講演을 모두 들었다. 그러면서 이 會長이 처음 會長에 就任할 때처럼 ‘막 會長職에 오르셔서 現實性이 없는 말씀을 하신다’고 置簿하거나 ‘저러시다가 마시겠지’라고 넘길 狀況이 아니라는 걸 漸次 깨닫게 됐다면서 이렇게 回顧한다. 

    “아, ‘이제 完璧하게 그룹을 바꾸려 하시는구나’, ‘이건 뭐 그냥 이렇게 하다 말 일이 아니겠구나’ 생각이 들면서 한便 걱정이 들기 始作했다. 우리 祕書室뿐만 아니라 各 關係者들이 會長님 말씀하시는 걸 果然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걸 누가 해야 하나? 어마어마한 改革 드라이브를 거시는 건데, 우리 組織과 마음가짐이 果然 準備가 되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只今껏 經驗하지 못한 巨大한 變化를 맞닥뜨려야 하는 두려움도 담겼다. 

    “率直히 말해 全혀 準備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면서 ‘萬若 會長님 말씀을 우리가 受容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 亡하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또 한 켠으로는 말씀 內容이 워낙 새로운 것들이 많아 앞으로 그룹에 大混亂이 와서 亡하겠다는 생각까지 할 程度였다. 그런데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 祕書室 팀長이나 當時 社長들도 나처럼 똑같이 생각했을 꺼다. 한마디로 ‘큰일 났구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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