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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悲劇이 ‘文學의 女王’ 된 祕密|新東亞

배철현 敎授의 比喩로 說得하라

그리스 悲劇이 ‘文學의 女王’ 된 祕密

‘오이디푸스 렉스’와 카타르시스

  • 배철현 | 서울대 宗敎學科 敎授 baech@snu.ac.kr

    入力 2016-11-03 17:5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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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 렉스’를 舞臺에 올린 건 2500年 前이다. 그러나 只今도 觀客은 이 作品을 보고 카타르시스를 經驗한다. 이건 魔術이다. 아테네에 우뚝 선 파르테논 神殿이나 미켈란젤로의 시스틴 聖堂 聖火처럼 아름다운 實存이다. 이 아름다움을 만드는 祕訣은 무엇인가.

    1. 悲劇, 文學의 女王

    人間은 오래前부터 理性, 感情, 感性을 文學作品으로 남겼다. 紀元前 5世紀 아테네 黃金時代에 登場한 悲劇 作品은 文學의 女王이었고, 오늘날에도 그 王座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悲劇은 神話, 傳說, 敍事詩의 主題를 選別해 圓形劇場의 아테네人들에게 들려준 드라마다. 드라마는 ‘舞臺’라는 특별한 場所에서 公演을 통해 再現된 表現 方式이다. ‘drama’라는 單語는 ‘하다’라는 意味를 지닌 古代 그리스어 ‘drao’의 名詞形으로, 굳이 飜譯하자면 ‘行爲’라는 뜻이다.

    드라마는 劇作家의 意圖를 理解한 俳優에 依해 聽衆 앞의 舞臺에서 再現된다. 드라마는 劇作家, 俳優, 오케스트라, 觀客, 그리고 作品을 支援하는 後援者와 製作陣이 한데 어울려 만드는 共同 作業이다. 敍事詩나 抒情詩에서는 登場人物이 韻律이 담긴 ‘노래’로 自身의 意思를 傳達하지만, 그리스 悲劇에선 俳優가 極重 人物 或은 觀客과 ‘말’로 疏通한다. ‘俳優’를 그리스어로 ‘휘포크리테스(hypocrites)’라고 하는데, 이는 ‘舞臺에서 假面을 쓰고(hypo) 다른 俳優, 觀客과 適切한 말을 選擇하고 判斷해 말하는(crites) 사람’이란 意味다. ‘僞善者’를 뜻하는 英語 ‘hypocrite’와는 다른 意味다.

    왜 우리는 아직도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나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旅行’과 같은 드라마에 熱狂하는가. 特히 古代 그리스 悲劇 作品을 記錄한  古典 그리스어를 모르면서도 時空間的으로 2500年이나 지난 只今, 왜 우리는 그들의 作品을 읽고 感動을 받는가. 古代 그리스 悲劇들, 特히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作品이 아직도 舞臺에 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理由는 簡單하다. 이 作品들이 後代 作品에 비해 卓越하기 때문이다.

    新聞에 ‘悲劇’ 或은 ‘悲劇的’이란 말이 자주 登場한다. 特히 9·11테러 以後 끊임없이 일어나는 테러 事件과 最近 韓國 社會를 뒤흔드는 獵奇的인 犯罪를 보고 우리는 ‘悲劇’이란 單語를 使用한다. 9·11과 같은 끔찍한 事件은 古代 그리스 劇作家들이 使用하는 ‘悲劇’이란 單語와 같은 意味일까. 古代 그리스 劇作家 소포클레스는 想像할 수도 없는 끔찍한 事件을 舞臺에 올려 아테네人들을 苦悶하게 만들긴 했다.



     2. 소포클레스

    그리스 最初의 悲劇作家 아이스킬로스보다 30歲 어리고 에우리피데스보다 15歲 많은 소포클레스는 아테네 近處 콜壘누스 마을에서 紀元前 495年 태어나 거의 90年間 살았다. 그의 아버지 小筆루스는 上流層 知識人으로 音樂과 詩, 레슬링을 즐겼다. 소포클레스는 아버지로부터 藝術的 感性을 이어받아 16歲 때 살라미스 戰爭을 祝賀하는 公演에서 合唱隊를 이끌었다. 플라톤이 記錄한 그의 語錄엔 이런 句節도 있다. “老年이 나를 欲情(술과 女人)으로부터 건져내 얼마나 感謝한가!” 그는 젊은 時節 철없는 富者집 아들처럼 放蕩하게 生活했던 것이다.

    그가 當時 最高의 悲劇作家로 登極하게 된 歷史的인 事件이 있었다. 아이스킬로스는 最初의 悲劇作家日 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 羨望의 對象으로, 그의 名聲을 빼앗을 수 있는 悲劇作家는 없었다. 그러나 소포클레스는 한 悲劇 競演에서 勝利하면서 一躍 最高의 悲劇作家로 登極한다.

    그 過程에 政治指導者 키몬(Cimon)이 있었다. 키몬은 마라톤 戰爭 勝利의 主役인 밀티아데스(Miltiades)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紀元前 490年에 일어난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마라톤 戰爭에서 頭角을 나타냈다. 紀元前 480年 페르시아 帝國이 살라미스 戰爭을 통해 그리스 周邊 海上權을 掌握하려 하자 페르시아 植民政策을 拒否한 에게海 都市들을 糾合해 아리스테이데스(Aristedes)와 함께 새로운 政治·軍事 組織을 創設했다. 이것이 델로스 同盟으로, 키몬은 紀元前 463年까지 이 同盟의 指導者였다. 그는 紀元前 475年 自身의 正統性을 세우기 위해 아테네를 創建한 神話的 存在인 테세우스의 ‘뼈’를 스퀼로스 섬에서 아테네로 가져왔다. 아테네는 온통 祝祭 雰圍氣였고 새로운 指導者와 知識人에 對한 渴望이 高調됐다.

    소포클레스는 紀元前 468年 처음으로 아이스킬로스와의 悲劇 競演에서 競爭해 勝利했다. 이 競演의 勝者 選定 過程은 過去와는 다른 方式으로 進行됐다. 元來는 제비뽑기로 審査委員을 選出하는 것이 慣例였지만, 그때만큼은 키몬과 다른 政治指導者들이 直接 소포클레스를 優勝者로 뽑았다. 政治指導者들의 後援을 잃고 悲劇 競演에서 진 아이스킬로스는 시실리로 移住했다.



     3. 오이디푸스 렉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렉스(Oedipus Rex)’를 最高의 悲劇 作品으로 꼽았다. ‘오이디푸스 렉스’는 라틴語 名稱으로 ‘오이디푸스 王’이란 意味다. 學者들은 ‘오이디푸스 렉스’라는 라틴語 題目을 더 選好한다. 이 悲劇은 다른 悲劇들이 그렇듯이 그리스 神話를 基盤으로 創作됐다. 소포클레스는 歷史 以前 時代를 背景으로 하는 神話的인 事件을 紀元前 5世紀 아테네에 맞게 再解釋했다.

    未來를 正確하게 豫測하기로 이름난 델피 神殿의 女司祭가 수수께끼와 같은 豫言을 한다. 테베라는 都市의 王 라이오스와 王妃 이오카스테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自身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結婚한다는 끔찍하고도 反人倫的인 內容이었다. 태어난 아이는 怪物이기 때문에 테베는 그 아이를 殺害해야만 支撐할 수 있다.


    5. 아리스토텔레스 ‘侍學’

    아리스토텔레스는 文學의 構造를 다룬 冊 ‘侍學’에서 ‘오이디푸스 렉스’를 仔細히 다룬다. 그는 ‘오이디푸스 렉스’에서 다른 悲劇과 不可抗力的인 自然災害가 惹起하는 끔찍한 事件들을 比較한다. 그는 우리를 일깨우는 逆說로 說明한다. 萬一 내가 方今 ‘오이디푸스 렉스’ 演劇을 보고 나왔다고 假定해보자. 어떤 사람이 내게 “演劇이 재미있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演劇의 內容이 極端的이며 내 삶의 原則인 道德과 倫理를 破壞하기 때문에 不便했습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結婚한다는 事實은 不便함을 넘어 혐오스럽습니다. 當身이 재미를 느끼길 願한다면, 다음엔 鬪牛 競技場에 가보십시오.”

    悲劇은 事實 悲劇이 다루는 主題나 人物에 關한 內容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悲劇에서 重要한 點은 悲劇의 內容이 아니라 悲劇에 對한 觀客의 反應이다. 우리에게 影響을 주고 審美的인 快感을 주는 것은 무엇이 表現됐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表現됐는가, 卽 ‘플롯(plot)’이다. 우리가 悲劇에서 즐기는 것은 暴力, 殺人, 近親相姦과 같은 慣行的인 事件들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再現됐는지다. 悲劇의 內容이 五感을 통해 이것을 본 人間에게  傳達돼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미메시스(mimesis)’ 卽 ‘흉내’라고 定義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이디푸스 렉스’와 같은 演劇을 悲劇으로 만드는 要素를 說明한다. 悲劇에는 ‘事故’ 卽 갑자기 일어나는 豫想하지 못한 內容이 없다. 悲劇이 進行되면서, 信託이나 占쟁이가 登場해 앞으로 일어날 事件을 미리 暗示한다. 悲劇에 나오는 人物과 事件들은 이미 豫見된 內容이다. 演劇이 進行되면서, 그 當時엔 볼 수 없지만, 나중에 그 事件의 緣由를 깨닫는다. 우리가 悲劇에서 보는 事件들은 “必然的이고 可能한” 일들이다. 悲劇에서 일어난 事件들은 반드시 일어나야 할 事件들이다. 그러나 實際로 일어나게 될 事件들은 너무 끔찍하다. 主人公인 信託이나 占쟁이가 豫言한 內容의 化身이다.

    悲劇의 主人公은 崇高한 人格을 지닌 貴族이나 王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奴隸나 女性이 悲劇 作品의 主人公일 수 없다고 主張한다. 實際로 이오카스테 王妃가 목을 매는 場面이나 오이디푸스가 自身의 눈을 핀으로 찌르는 場面은 舞臺에서 再現하지 않는다. 悲劇에서 重要한 內容은 主人公의 缺陷으로 인한 事件의 結果다.

    프랑스 劇作家 張 아누이(Jean Anouilh·1910~1987)는 소포클레스의 다른 作品 ‘안티고네’를 脚色해 舞臺에 올렸다. 그는 ‘안티고네’의 構成을 ‘機械’라고 表現했다. 이 悲劇 作品의 登場人物, 對話 內容, 事件의 展開와 結末은 모두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움직이는 스위스 時計와도 같다. 스위스 時計의 시침, 分針, 秒針처럼 悲劇 作品을 한瞬間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原動力은 무엇인가. 무엇이 悲劇的인 人間을 만드는가.



    6. 하마르티아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原動力을 主人公의 性格에서 찾았다. 主人公의 어떤 傾向이 모든 事件을 觸發하고 悲劇的인 結果를 招來하는 端初라는 것이다. 그는 이 端初를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hamartia)’라고 불렀다.

    ‘하마르티아’의 글字 그대로의 意味는 ‘화살이 과녁을 맞히지 못하고 빗나가다’ ‘길을 잃고 헤매다’이다. 하마르티아는 主人公이 지닌 性格으로, 幸運을 不運으로 惡化시키는 主人公의 欠이다. 이 欠의 原因은 생각이 미치지 못한 知的 限界인 無識, 瞬間的 判斷의 失手, 自身의 固有한 性格에서 나오는 失手이자 罪(罪)다. 하마르티아는 悲劇的인 結末을 必然的으로 惹起하는 主人公의 內的인 에토스(ethos)다.

    오이디푸스는 自身의 憤怒를 참지 못한 나머지 갈림길에서 ‘낯선 者’인 自身의 아버지를 殺害한다. 이것이 오이디푸스의 하마르티아다. 그의 判斷 失手는 悲劇이라는 커다란 機械를 作動시킨다. 마치 브레이크 페달이 故障 나 絶壁 아래로 떨어지게 誘導한 自動車의 缺陷과 같은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自身의 하마르티아 탓에 破局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는 觀客들은 舞臺 위의 오이디푸스를 自身과 同一視하며 恐怖와 憐憫을 同時에 느낀다. 周圍에서 일어나는 一般的인 事件들과는 달리, 悲劇에서는 觀客들이 悲劇의 蓋然性으로부터 衝擊을 받는다. 自身도 모르게 오이디푸스처럼 괴로워하고 울기도 한다.



    7. 카타르시스

    觀客은 自身이 主人公과 같은 悲劇을 맞이할 수 있다는 恐怖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그런 悲劇的인 오이디푸스를 보고 憐憫을 느끼기도 한다. 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觀客의 感情을 ‘祖山(早産)으로 낳은 아기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産母의 感情’과 類似하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恐怖와 憐憫을 느낀 觀客이 마침내 到達하는 感情的 平原을 ‘카타르시스’라고 일컫는다.

    카타르시스를 飜譯할 만한 適當한 單語는 없다. 우리가 只今 막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나 ‘오이디푸스 렉스’ 悲劇을 觀覽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想像해보자. 우리는 暗鬱하고 沈潛하다. 舞臺 위에서 일어난 事件이 너무 끔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便으론 異常하리만큼 感情的으로 高揚되고 平穩해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平穩한 狀態, 卽 그 끔찍한 事件이 적어도 이 時間에 내게 일어나진 않으리라는 安堵感을 카타르시스라고 말한다.

    그리스어 ‘카타르시스’는 普通 ‘淨化’라고 飜譯된다. 그러나 더 根本的인 意味는 ‘恐怖라는 感情에서 벗어나 마음속에서 그것이 除去된 狀態’다. 그것은 마치 몸속에서 不純物을 빼내기 위해 藥을 먹고 그 不純物을 除去한 後 갖는 安堵感이다.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 렉스’를 舞臺에 올린 지 2500年이 지났지만, 오늘날 우리도 그 作品을 보고 나면 똑같은 카타르시스를 經驗한다. 이건 魔術이다. ‘오이디푸스 렉스’에는, 아테네에 우뚝 서 있는 파르테논 神殿이나 미켈란젤로의 시스틴 聖堂 聖火처럼, 우리 안에 存在하지만 우리가 알지 못한 深淵에서 샘솟는 純粹한 눈물, 바로 그것을 膳賜하는 崇高한 아름다움이 있다. 人間의 知識이 幾何級數的으로 厖大하게 늘어나고 있지만, 自身을 찾아보거나 생각해본 적 없는 우리에게 이 作品은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우리를 人間으로 만드는가’를 苦悶하게 만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대로 悲劇은 人間의 가장 崇高한 藝術인 것 같다.



    倍 철 現

    古代 오리엔트 言語와 文明에 魅了돼 美國 하버드대에서 古典文獻學으로 博士學位를 받았다. 現在 서울대 宗敎學科 敎授로 在職하며 未來革新學校 件名院에서도 가르친다. 最近 著書로는 ‘神의 偉大한 質問’ ‘人間의 偉大한 質問’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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