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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改革’에도 살아남은 中世 英國의 宗敎藝術魂|新東亞

핏빛 ‘改革’에도 살아남은 中世 英國의 宗敎藝術魂

英國 켄트州 캔터베리

  • 글·寫眞 조인숙 | 建築士事務所 다리建築 代表

    入力 2015-04-23 16: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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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草書의 ‘캔터베리 이야기’로 우리 귀에 익숙한 캔터베리엔 피비린내 나는 헨리 8歲의 宗敎改革이 끝내 삼키지 못한 中世 英國의 痕跡이 相當 部分 남아 있다. 로만 가톨릭, 도미니칸, 프란치스코 等 여러 가톨릭 宗派가 캔터베리로 흘러들었고, 聖堂과 修道院 等 遺跡을 남겼다. 옛 로마인들의 무덤이었다는 언덕에서 캔터베리 聖堂을 바라본다. 英國의 겨울은 陰散하지만 아름답다.
    英國 東南部 켄트 州 스타偶語(Stour) 江邊에는 캔터베리(Canterbury)라는 小都市가 있다. 캔터베리는 제프리 草書가 14世紀 末에 쓴 英文學의 傑作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로, 1972年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가 直接 出演하며 製作한 同名의 映畫로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 1月 켄트大學校에서 主管한 世界遺産 關聯 콘퍼런스에 參席한 것은 무엇보다 콘퍼런스 內容이 重要해서였다. 하지만 世界遺産都市 캔터베리에서, 게다가 大聖堂 境內 호텔(Cathedral Lodge)에서 콘퍼런스가 열린다는 데 對한 好奇心이 컸던 게 事實이다. 英國의 겨울은 特有의 잿빛 大氣에 낮보다 밤이 긴 陰散한 시즌이다. 꽃 피고 새 지저귀는 때였으면 더 아름다웠을 테지만, 險한 季節을 直接 體驗하는 것도 決코 나쁘지 않았다.

    몰아치는 비바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캔터베리 隣近 마을 도버(Dover)에서 딜(Deal)을 거쳐 샌드위치(Sandwich)까지 海岸가 性(城館, Castle)과 歷史마을을 탐방했고, 파버샴에 있는 英國에서 가장 오래된 麥酒會社 셰퍼드 앤드 님므(Shepheard and Neame near Faversham)도 訪問했다. 하지만 紙面 事情上 世界遺産都市 캔터베리를 集中 紹介한다.

    캔터베리 大聖堂

    Cathedral and Metropolitical Church of Christ at Canterbury




    캔터베리 大聖堂은 英國聖公會의 總本山으로 잉글랜드 地方에서 가장 오래된 基督敎 施設 中 하나다. 公式 名稱은 ‘캔터베리 크라이스트처치 주교좌 大聖堂’. 처음 建築이 始作된 때는 597年이라지만 只今은 當時의 모습이 全無하다. 以後의 聖堂 建立은 上梓 記事와 같이 大略 5段階로 區分된다.

    聖堂은 애初에 로만 가톨릭이었으나 英國聖公會로 宗派가 變更된 뒤 1070年 봉헌돼 1834年 最終 改築된 것으로 看做된다. 時間의 痕跡이 쌓이면서 로마네스크와 고딕 建築이 경이롭게 混合된 建築物이 됐다. 東쪽 로마네스크 樣式의 地下墓室과 初期 고딕 樣式을 代表하는 12世紀 聖歌隊席, 14世紀 新郞(身廊·nave, 敎會堂의 內部 中央 部分), 中世 스테인드글라스 等이 代表的인 建築遺産이다.

    캔터베리 大聖堂과 亦是 캔터베리에 있는 세인트 마틴 敎會, 세인트 五車스틴 修道院 遺跡 세 곳이 1988年 유네스코 世界遺産 目錄에 登載됐다. 이 세 記念物은 宗敎改革 以前 英國 基督敎의 里程標이자 大英帝國 宗敎史의 象徵이기도 하다. 이들 記念物은 世界遺産 登載 當時 뛰어난 普遍的 價値(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判斷하는 評價 基準 中 (i) (ii) (vi)를 충족시킨 것으로 認定됐다. 그 具體的인 內容은 이렇다.

    (i) 캔터베리 大聖堂, 特히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는 東쪽 區域은 獨特한 藝術的 創作品이다.

    (ii) 세인트 五車스틴 베네딕트회 修道院이 求心點이 되어 中世 英國 王室에 決定的인 影響을 주면서 同時에 켄트와 노섬브리아(Nothumbria) 警戒 너머까지 基督敎가 퍼져나갔다.

    (vi) 위 세 곳의 建築遺産은 類型 遺産으로 앵글로-색슨 王國에 基督敎를 紹介한 歷史와 直接的으로 緊密하게 連結돼 있다.

    世界遺産 登載를 契機로 캔터베리 大聖堂은 한때 ‘危險에 處한 遺産 目錄’에 記錄될 뻔한 危機를 克服하고 大大的인 募金이 이뤄져 維持·管理를 다시 할 수 있게 됐다. 東南쪽 翼廊(翼廊·transept, 十字形 敎會堂의 팔에 該當하는 部分)은 只今도 補修 中이다.

    나는 콘퍼런스 마지막 날 午後에 ‘이븐송(Evensong)’이라는 저녁 미사에 參席하기 위해 保守 中인 翼廊에 設置된 臨時 通行路를 거쳐 聖堂 內部로 들어갔다. 禮拜堂에는 여러 番 들어갔지만 이븐송 參席은 처음이었다. 聖歌隊 合唱 德分에 大聖堂 空間의 規模를 훨씬 잘 느낄 수 있었다. 다만 撮影이 禁止돼 아쉬웠다.

    핏빛 ‘개혁’에도 살아남은 중세 영국의 종교예술혼


    세인트 五車스틴 修道院, 세인트 마틴 敎會

    St. Augustine’s Abbey, St. Martin’s Church


    세인트 五車스틴 修道院은 아마도 現在 캔터베리 大聖堂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있었을 것으로 推定되는데, 現在 保存되어 있는 部分은 하나도 없다. 세인트 五車스틴 修道院 遺跡만이 캔터베리 大聖堂과 세인트 마틴 敎會의 사이에 남아 있다. 세인트 五車스틴 修道院은 베네딕트회 修道院으로 598年 設立돼 使徒 베드로와 바울에게 奉獻됐다. 英國 베네딕트회의 眞正한 發祥地인 初期 施設은 노르만族 侵入 以後 978年 復元됐지만, 1538年 헨리 8世가 修道會 共同體를 解散시킨 以後 修道會 建物들은 事實上 모두 사라졌다.

    세인트 마틴 敎會는 都市 城壁 外郭에 있는데, 英國에서 가장 오래된 敎區 敎會이자 現在까지 그대로 使用되고 있는 汎(汎)英語圈 最初의 敎會다. 세인트 마틴 敎會의 大部分은 8世紀 以前에 建築됐다.

    이 敎會는 敎皇 그레고리우스 1歲가 켄트의 색슨 王國에 基督敎를 傳播하기 위해 로마에서 아우구스티누스 修道士를 보낸 597年 以前에는 켄트의 베르타 王妃(Bertha of Kent) 個人 채플이었다. 베르타 王妃는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 基督敎를 普及하는 데 크게 貢獻했다는 理由로 聖者로 推戴됐다. 에델베르트 王(Athelberht of Kent)과 베르타 王妃의 銅像이 城壁과 세인트 五車스틴 修道院 入口 사이의 定員(Lady Wootton’s Green)에 놓여 있다. 나는 처음 봤을 때 왜 修道院 앞에 女人像을 세워놓았나 疑訝했었다.

    캔터베리에서 머물 宿所를 定할 때 이 都市에 對한 事前 知識 없이 인터넷을 통해 그저 大衆交通施設에서 가까운 곳을 擇했다. 캔터베리 汽車驛은 同役과 西域이 있다. 地圖上으로는 西쪽 汽車驛에서 걸을 만한 거리라는 點에 着眼해 집 한 채를 빌렸다. 大聖堂 境內의 호텔보다 低廉하면서 居室과 부엌 等까지 갖춰 덜 답답할 것 같아서였다. ‘코티지(cottage)’라고 해서 田園風의 英國式 住宅을 想像했는데, 都市 地域이라 그런지 여러 家口가 줄지어 있는 2層짜리 聯立住宅 로하우스 中 한 채였다. 그래도 작은 뒷마당이 있어 快適했다.

    이 宿所는 블랙프라이어즈 가(Blackfriars street)에 있었다. 地名의 意味가 궁금해서 이리저리 踏査하다가 새로운 事實을 알게 됐다. 캔터베리 블랙프라이어즈는 오래前 켄트 地域의 도미니칸 宗派였다. 1237年 헨리 2歲가 도미니칸 宗派에 敎會와 修道院을 지을 땅을 하사했는데 바로 그 땅이 내가 우연하게 擇한 宿所가 있는 洞네였다.

    이들 도미니칸 宗派는 16世紀에 宗敎彈壓을 받아 敎區의 株 建物軍이 織物工場으로 바뀌고 나머지 建物들도 그 後 徐徐히 滅失됐다. 스타偶語 江 東쪽에 있던 當時 食堂 建物은 아직 남아 있으나, 그 建物도 17世紀 後半에서 20世紀 初盤까지 集會用 施設로 使用되다가 以後 倉庫로 쓰였다. 現在는 한 私立學校의 展示場으로 使用되고 있다.

    화이트프라이어즈 쇼핑센터

    Whitefriars Canterbury


    都市 東南쪽에는 ‘화이트프라이어즈’라는 커다란 쇼핑센터가 있다. 이곳도 元來는 修道院이었는데 16世紀 헨리 8世에 依해 解散됐다. 그 後 個人 所有로 넘어가 아름다운 庭園과 果樹園으로 使用되다가 19世紀 末에 學校로 使用됐으나 第2次 世界大戰 때 爆擊으로 거의 破壞됐다. 1950~1970年 商業 및 業務用으로 開發됐지만 그다지 成功的이지 못했는데, 1990年代 들어서는 考古學 發掘 및 歷史 保存에 좀 더 萬全을 期하면서 새로운 商業的 要求에 副應하는 開發을 하게 됐다. 1999年에 工事를 始作해 2005年 9月 켄트 州 東쪽에서는 最大 規模인 쇼핑센터로 完工됐다. 高層建物이 아니다 뿐이지, 城郭都市 안쪽조차 開發 要求에 副應하는 것은 서울이나 캔터베리나 마찬가지다.

    그레이프라이어즈 채플, 프란치스칸 庭園

    Greyfriars Chapel · Fransciscan Garden


    城郭 안 西南쪽에서는 오래된 住居地를 發見할 수 있다. 이 住居地를 지나 스타偶語 江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 예쁘게 다듬어진 골목길과 아름다운 庭園이 펼쳐진다. 그레이프라이어즈 채플과 프란치스칸 庭園이다. 잉글랜드 最初의 프란치스코 宗派가 캔터베리에 처음 到着한 것은 1224年. 아시시의 프란치스코(San Franscisco d’Assisi·1181~1226)가 살아 있을 때의 일이다. 이들은 1267年부터 1235年까지 敎皇에게 땅을 얻어 建物들을 지었다.

    핏빛 ‘개혁’에도 살아남은 중세 영국의 종교예술혼

    캔터베리 大聖堂의 代表的 建築遺産人 中世 스테인드글라스.

    그러나 프란치스코 宗派는 1538年 亦是 헨리 8世에 依해 强制 解散됐고 修道士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約 430年 後 되돌아온 프란치스코 修道士들은 이스트 브리지에 定着해 이곳 病院 및 마을에서 敎區 活動을 했다. 現在 唯一하게 남은 建物인 그레이프라이어즈 채플의 元來 用途는 正確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방앗間이었을 것으로 推定된다. 後날 英國으로 亡命한 프랑스 改新敎徒 위그노(The Huguenots)에게 宿所로 提供됐고, 19世紀에는 車(茶) 庭園으로, 20世紀에는 마켓 가든으로 活用됐다. 1959年 敎區에 賣却돼 2003年부터는 英國 프란치스칸 修道士들의 禮拜所로 使用되고 있다. 定員을 通過하는 길은 快適한 步行路로 造景이 잘 돼 있다.

    修道士들은 宗派마다 服裝이 다르다. 크게 4個 宗派(Friars-four great orders)가 있는데, 于先 도미니칸 宗派는 해빗(Habits)이라는 白色 系列 修道服 위에 검정色 카파(cappa·소매 없는 外套)를 걸치므로 블랙프라이어즈(The Domnicans, black)라고 한다. 칼멜 修道會는 흰色 카파를 걸치므로 화이트 프라이어즈(The Camelites, white), 프란치스칸들은 灰色 카파를 걸치므로 그레이 프라이어즈(The Franciscans, grey)라고 한다. 비슷한 해빗을 입는 語거스티니안 프라이어즈(The Augustinians)와도 區分한다.

    우리나라 佛敎界 스님들이 灰色 長衫(長衫) 위에 걸쳐 입는 長方形의 歌詞(袈裟)를 떠올리면 理解가 쉽다. 曹溪宗 스님들은 赤褐色 家事, 태고종 스님들은 高麗時代부터 내려오는 붉은 洪歌詞를 입는다.

    핏빛 ‘개혁’에도 살아남은 중세 영국의 종교예술혼

    프리메이슨리 博物館에서 自願奉仕를 하는 石工 出身 匠人들.

    프리메이슨리 博物館

    Kent Museum of Freemasonry


    프란치스칸 庭園에서 西쪽 門 方向으로 걷다보면 프리메이슨리 博物館이 나온다. 好奇心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結局은 프리메이슨리 심볼이 새겨진 셔츠龍 커프링크스(cufflinks)를 한 세트 사서 只今도 愛用한다.

    프리메이슨理는 宗敎나 政治로부터 자유로운 慈善團體로 世界에서 가장 오래되고 規模가 큰 組織 中 하나다. 會員 個個人에게 水準 높은 人格을 要求하고 本人이 프리메이슨리 會員임을 公開的으로 드러내는 것이 規則이라고 한다. 애初 中世 유럽에서 聖堂이나 敎會를 짓던 石工들의 길드에 依해 組織됐으나 後날 어느 程度 位置에 있는 사람들이 親睦을 圖謀하는 社交클럽과 같은 形態로 發展했다. 프리메이슨리 象徵物 中에 컴퍼스와 者가 있는데, 이것이 프리메이슨理가 石工 길드에서 出發했다는 事實을 나타낸다고 한다. 컴퍼스는 眞理를, 直角자는 道德을, 亦是 象徵物인 흙손과 몽둥이는 各各 結束과 友愛, 知識과 智慧를 象徵한다고 한다.

    博物館은 1933年 地域 丈人에 依해 開館됐는데, 只今껏 끊임없이 修正, 補完, 改善되고 있으며 自願奉仕로 運營된다고 한다. 스스로를 石工 出身이라고 밝히는 匠人들이 展示物들을 仔細하게 紹介해줬다. 博物館에는 石工이 使用하는 各種 道具와 그림 여러 點이 展示돼 있다.

    캔터베리 城郭, 캔터베리 性, 데인 존 마운드

    Canterbury City Walls, Canterbury Castle, Dane John Mound


    캔터베리 最初의 城郭은 3世紀頃 로마인들이 建立했으며 約 130에이커의 땅을 에워쌌다고 한다. 130에이커는 53ha 程度니 昌德宮 面積(56ha)보다 若干 작은 規模다. 城郭 높이는 大槪 2.25m이고 首席과 모르타르로 築造했다. 城郭은 土담 위에 約 6m 높이로 建立되고 그 周邊에 垓子(垓字)를 두른 것으로 알려졌다. 城門은 애初에 5個였는데 現在까지 남은 것은 序文(西門, West Gate) 하나다. 城郭都市 서울은 西쪽 敦義門이 헐린 反面 캔터베리는 唯一하게 序文만 남았다. 이 序文은 잉글랜드에 남아 있는 가장 規模가 큰 城門(城門)이라고 한다.

    普通 建築이나 文化財 關聯 콘퍼런스에는 踏査 日程이 包含돼 있기 마련인데, 이番 콘퍼런스는 世界遺産 保存 關聯 法規에 關한 小規模 專門家 會議여서 公式 踏査 日程이 없었다. 參席者도 建築家와 法曹人이 半半이었다. 따라서 틈날 때마다 都市를 걷다보니 어떤 곳은 아주 새벽에, 또 어떤 곳은 저녁에 들르게 됐다. 어쩌면 가장 먼저 찾아봤어야 할 性觀 施設인 牙城(牙城, keep)을 런던으로 떠나는 아침에야 놓칠세라 찾았다. 牙城은 石造로 된 中心 塔으로 中世 西유럽 城 안에 지어진 要塞化한 塔을 말한다.

    캔터베리 姓은 로체스터 性, 도버 性과 함께 헨리 1歲(1068~1135) 때 建立된 켄트 地域 3代 오리지널 성관 中 하나다. 이 세 성관 모두 下스팅 戰鬪(Battle of Hastings, 1066) 後 도버에서 런던까지의 로마 길 위에 建立됐는데, 이 重要한 經路를 保護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性(Castle)과 宮殿(Palace)의 差異는 要塞냐 아니냐에 있다. 要塞化했으면 性이다.

    데인 존 마운드(Dane John Mound)는 元來 1~4世紀頃 로마인들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었다. 11世紀 노르만에 占領됐을 當時 中心 塔이 木造인 모트-앤-베일리로 築造됐다가 12世紀 무렵 木造를 허물고 石造로 다시 만든 것이 只今까지 남아 있다. 모트-앤-베일리란 높이 쌓은 흙 위에 木造나 石造로 된 中心塔(keep)을 세운 모트(Motte) 部分과, 垓子나 말뚝으로 에워싸인 空間인 베일리(bailey, enclosed courtyard)가 함께 造成되는 要塞의 構造를 뜻한다.

    데인 존 마운드는 1790~1803年 當時 所有者가 城壁 南東쪽에 造成했는데, 얼마 안 돼 캔터베리 市가 所有하고 管理하게 됐다. ‘데인 존’이란 이름은 아마도 요새를 意味하는 돈존(donjon)을 現地 發音으로 적은 것으로 推定된다.

    이 높은 언덕에서 캔터베리 大聖堂을 바라본다. 그리고 라임나무로 우거진 樹木 터널을 通過해 화이트프라이어즈 쇼핑몰과 버터마켓을 거쳐 블랙프라이어즈 가로 되돌아온다. 캔터베리의 마지막 아침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핏빛 ‘개혁’에도 살아남은 중세 영국의 종교예술혼

    主 出入口에서 바라본 캔터베리 大聖堂.

    핏빛 ‘개혁’에도 살아남은 중세 영국의 종교예술혼
    핏빛 ‘개혁’에도 살아남은 중세 영국의 종교예술혼
    핏빛 ‘개혁’에도 살아남은 중세 영국의 종교예술혼
    1 1~4世紀 로마인들의 무덤으로 알려진 데인 존 마운드.

    2 캔터베리 大聖堂의 크라이스트 處置 게이트. 現在 訪問客 主 出入口로 쓰인다.

    3 Lady Wootton‘s Green에서 바라본 캔터베리 城郭과 캔터베리 大聖堂.

    4 세인트 五車스틴 修道院 遺跡.

    핏빛 ‘개혁’에도 살아남은 중세 영국의 종교예술혼
    핏빛 ‘개혁’에도 살아남은 중세 영국의 종교예술혼
    5 프란치스코 宗派가 세운 그레이프라이어즈 채플.

    6 캔터베리 大聖堂 내 新郞(nave)의 天障.

    7 데인 존 마운드에서 바라본 캔터베리 大聖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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