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냥 그저’ 만든 運動歌謠 禁止措置 酷毒할수록 널리 퍼져|신동아

‘그냥 그저’ 만든 運動歌謠 禁止措置 酷毒할수록 널리 퍼져

金敏基 ‘아침이슬’

  • 글·김동률 | 西江大 MOT大學院 敎授 yule@empas.com 寫眞·권태균 | 寫眞作家·신구대 敎授 photocivic@naver.com

    入力 2014-09-19 13:56:00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서울대 美大 1學年生이 히피처럼 時間만 축내며 復學을 기다리다 ‘그냥 그저 作曲’韓 노래. 김민기의 ‘아침이슬’은 그런 노래다. 그러나 이 노래는 1970~80年代를 象徵하는 노래가 됐고 只今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는 노래로 남았다. 大衆에게 사랑받은 最初의 革命家인 셈이다.
    ‘그냥 그저’ 만든 운동가요 금지조치  혹독할수록  널리  퍼져
    모든 藝術은 音樂을 憧憬한다. 쇼펜하우어의 말씀이다. 特히 노래는 그렇다. 노래는 人間의 삶 깊숙이 배어 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人間은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特異하게도 人間은 抵抗할 때도 노래를 부른다. 對象은 主로 君臨하는 勢力이다. 왜냐하면 노래는 어떤 藝術 장르보다 빨리 象徵的인 意味를 傳播하거나 共有할 수 있기 때문이다.

    百濟 武王이 少年 時節에 지어 아이들에게 널리 부르게 했다는 ‘薯童謠’, 1894年 東學革命 때 綠豆將軍 全琫準을 기리는 노래 ‘새야 새야 파랑새야’, 나라 뺏긴 民族의 설움을 달래준 ‘아리랑’까지, 노래는 힘이 세다. 大衆의 哀歡, 抵抗的 이데올로기를 담은 노랫말은 때때로 支配勢力에겐 두려움의 對象이 되기도 한다. 抵抗의 노래는 一般的으로 特定 勢力으로부터는 絶對的인 사랑을 받지만 大衆과는 距離感이 있다. 그러나 例外도 있다. 抵抗의 노래이면서도 運動圈뿐 아니라 大衆에게도 엄청난 사랑을 받은 노래, 바로 ‘아침이슬’이다.

    ‘아침이슬’은 386에게는 하나의 象徵 노래쯤 된다. 그 時節 江村이나 대성리 等 단골 엠티 場所에서는 해가 中天에 있어도 ‘아침이슬’의 가락은 마르지도 사라지지도 않았다. 當局의 禁止措置는 重要하지 않았다.

    노래는 1970~80年代 大學街에서 그렇게 불렸다. 송창식의 ‘고래사냥’도 있지만 아무래도 ‘아침이슬’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아침이슬’을 부르다보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때론 뭔가 불끈하는 것이 솟아오름을 느끼게 된다. 終局에는 목이 메는 特異한 노래다. 이른바 悲壯美의 極致다.

    그러나 노래는 오랫동안 放送 禁止曲으로 묶였다. 歌詞 中 “太陽은 墓地 위에 붉게 타오르고”라는 部分이 厭世的이란 理由였다. 一部에서는 붉은 太陽이 北韓 김일성을 聯想케 한다는 式으로 意味를 擴張하기도 했다.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라는 마지막 句節에 이르면 맘 여린 女學生들이 흐느끼곤 하던 그런 노래다.



    지난 時節, 抵抗 노래의 象徵처럼 돼버린 ‘아침이슬’은 熾烈한 運動性과 歷史性에 비해 意外로 單純한 動機에서 만들어졌다. 지난 30餘 年 동안 숱한 歷史의 現場에서 때로는 行進歌로, 때로는 鎭魂曲으로 불리며 이 땅의 苦痛 받는 많은 이를 慰勞했던 노래의 誕生은 지나치게 맨송맨송하다. 1970年 봄 경기고를 거쳐 當時 서울대 美大 繪畫科 1學年에 다니던 김민기는 이런저런 理由로 落第를 當해 하릴없이 히피처럼 ‘時間만 축내고’ 있었다. 只今은 大學路로 불리는 동숭동 一帶를 맨발로 徘徊하며 紀行을 일삼던 그는 그 時節 風靡했던 實存哲學에 빠져 들었다. 그런 그가 새 學期의 復學을 기다리다가 ‘그냥 그저 作曲’(그의 表現대로)한 것이 ‘아침이슬’이다.

    ‘그냥 그저’ 만든 운동가요 금지조치  혹독할수록  널리  퍼져

    解放區가 된 大學路의 週末 밤 風景, 道路 全體가 人波로 넘쳐난다.



    김민기 作曲, 양희은 노래

    1970年代 韓國 社會의 屈折과 歪曲을 象徵的으로 나타낸 노래의 誕生치고는 지나치게 單純하다. 當時 갖가지 話題를 뿌렸던 김민기는 只今도 本格的인 作曲을 했다기보다는 그저 재미 삼아 만들었다고 强調한다. 굳이 덧붙인다면 自身이 專攻하던 그림의 이미지를 노래로 바꿨을 程度라는 것이 그의 說明이다.

    實際 이 말은 說得力이 있다. 그래서 노래 ‘아침이슬’을 듣거나 함께 부르노라면 “太陽은 墓地 위에 붉게 타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이 하나의 風景畫처럼 눈앞에 떠오른다. 그러나 노래는 作曲도 重要하지만 누가 불렀느냐도 重要하다. ‘아침이슬’은 金敏基 自身이 錄音한 데 이어 그의 서울 재동國民學校 同窓生인 양희은의 맑은 목소리로 錄音된다. 陰鬱하고 抵抗的인 歌辭와는 對照的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부른 노래는 곧바로 1970年代 憂鬱한 時代 情緖를 代辯하는 象徵的인 노래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 ‘아침이슬’은 旣成世代에게 데모, 休學, 大學文化, 동숭동, 學林茶房 等을 떠올리게 한다. 검은色으로 물들인 救濟品 軍服을 입고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兵役問題를 苦悶하며 부르던 그 時節의 代表 노래였다.

    그러나 ‘아침이슬’은 얼마 뒤 10月 維新을 맞아 禁止曲으로 묶여 制度圈에서는 徹底히 외면당했다. 다시 들리게 된 것은 1987年 이른바 ‘6·29 宣言’ 以後다. ‘아침이슬’의 放送禁止 事態는 참으로 戱化的이다. 家事 맨 처음 登場하는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에서 “긴 밤”李 1970年代 當時의 維新政權을 의미한다는 게 나중에 밝혀진 禁止 理由였다.

    ‘그냥 그저’ 만든 운동가요 금지조치  혹독할수록  널리  퍼져

    서울 재동초등학교. 김민기는 ‘아침이슬’을 作曲해 自身의 재동초등학교 同窓인 양희은에게 부르게 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아침이슬’은 1970年에 發表됐고, 유신은 1972年 10月에 宣布됐다. 禁止하기 위해 억지로 갖다 붙인 荒唐한 理由쯤 되겠다. 하지만 이 같은 空白期 속에서도 ‘아침이슬’을 비롯해 金閔箕가 만든 많은 노래는 1970年代를 貫通한다. 民衆의 사랑과 保護 속에 입에서 입으로 傳해져 活火山처럼 번져나갔다. 禁止曲으로 묶인 德分에 오히려 그의 音盤은 天井不知의 高價로 팔렸다. 또 工場의 野遊會나 大學街의 캠프에서 自動的으로 불리던 通過儀禮의 노래였다.

    그러나 ‘韓國의 大衆音樂을 世界 水準으로 올려놓은 曲’으로 讚辭를 받던 그의 노래는 發表되는 족족 放送 禁止되고 판금됐다. 이런 理由로 그가 만든 많은 노래는 一旦 ‘김민기’라는 이름 때문에 오랫동안 發表될 수 없었다. 自然히 그는 自身의 曲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내보냈다. 김민기는 ‘아침이슬’ 發表 以來 1980年代 中盤까지 17年 동안 노래 때문에 連行과 活動禁止를 되풀이당해왔다. 그의 노래 뒤에는 늘 暴壓的인 政權의 彈壓과 그에 맞서는 民衆의 사랑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그는 農村으로, 또 廢墟가 된 炭鑛村으로 자리를 옮기며 노래를 만들어왔다. 1972年 서울대 文理大 新入生 歡迎會 때 부른 ‘꽃피우는 아이’ ‘解放歌’ ‘우리 勝利하리라’ 때문에 이튿날 새벽 일찍 東大門警察署로 잡혀가 苦楚를 겪었고, ‘늙은 軍人의 노래’‘거치른 벌판의 푸르른 솔잎처럼’도 發表하자마자 곧바로 禁止됐다.

    特히 步兵 第12師團에 小銃手로 服務할 當時 停年 2個月을 남겨놓은 늙은 彈藥 擔當 先任下士의 시름을 노래로 옮긴 ‘늙은 軍人의 노래’는 슬픈 노랫말과 悲感 어린 曲調로 한 時代를 風靡하는 노래로 浮上했다.

    만드는 족족 禁止曲

    나 태어난 이 江山에 軍人이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於焉 三十 年/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흙 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靑春/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 내 靑春(…)

    軍 生活이 워낙 險難해 ‘ ‘인제’가면 언제 오나 ‘圓筒’해서 못 살겠네’로 알려진 江原道 麟蹄郡 圓筒에서 軍 生活을 할 때 誕生한 노래다. 停年을 앞둔 先任下士가 막걸리 두 말을 내고 依賴해 만든 曲. 30餘 年 軍 生活을 마감하는 老兵이 吐露한 國防色 制服의 서러움에서 모티프를 얻어 노랫말과 曲을 붙였다고 한다. 兵營에서 暗暗裏에 愛唱되던 이 노래도 곧 禁止曲으로 指定됐지만 오히려 一般人에게까지 急速度로 퍼져나갔다. 陰鬱하고 어려웠던 時代, 江南 룸살롱 淑女들까지 愛唱, 猝富들의 豪華 主席(酒席)에 無言의 反抗을 했으며 民主化에 목마른 東南亞 國家들에 輸出되기도 했다.

    軍 士氣 低下와 군 이미지 失墜를 理由로 禁止됐지만, 노래는 抒情性, 그리고 運動圈 歌謠로는 보기 드문 애잔한 멜로디로 大學街, 在野 運動家, 勞動界의 큰 呼應을 얻으며 오랜 歲月 사랑을 받아왔다. 奇異하게도 禁止 措置가 酷毒할수록 그의 노래는 멀리 그리고 널리 퍼져나갔다. 비록 放送에서 退出되고 音盤 發賣는 禁止됐지만, 이 노래는 가난한 사람들의 벗이 되고 慰勞가 되었다. 좋은 時節에는 잊혔다가 삶이 고통스럽고 時代가 暗鬱하면 먹먹한 가슴으로 부르는 崎嶇한 運命의 노래가 ‘늙은 軍人의 노래’였다. 只今의 잠깐 流行하는 걸 그룹의 댄스 音樂과는 次元이 다르다.

    노랫말에 登場하는 軍人 代身 敎師, 農民, 勞動者 等으로 다양하게 바뀌어 불리면서 民草의 삶의 現場에서 꾸준히 사랑을 받아왔다. 얼마 前 KBS ‘不朽의 名曲’에서 歌手 홍경민이 大型 重唱團과 함께 선보여 큰 呼應을 얻었다. 그날 以後 김민기의 舊닥다리 노래들이 연달아 유튜브에 오르는 等 新世代에게도 리바이벌 붐을 일으켰다.

    또 다른 傳說的인 노래는 ‘工場의 불빛’이다. 이제는 記憶조차 가물가물해진 惡名 높은 동일방직 똥물테러 事件을 素材로 삼았다. ‘工場의 불빛’은 當局의 눈을 避해 隱密히 카세트테이프로 製作됐지만 곧바로 押守당했다. 김민기의 노래는 이처럼 늘 統制를 받았다. 노래를 統制해야 할 必要性은 支配勢力의 統治 正當性이 떨어질 때 더욱 커진다. 우리 노래 歷史에서 日帝强占期와 朴正熙 維新政權 時節, 5共 新軍部 時節 노래에 對한 統制가 極甚했다는 事實이 이를 證明한다. 그래서 禁止曲의 歷史를 훑는 게 곧 우리 社會의 歷史를 들여다보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냥 그저’ 만든 운동가요 금지조치  혹독할수록  널리  퍼져

    동숭동 時節 서울대 本館 建物, 茂盛한 마로니에가 제 무게에 겨운 듯 넓은 잎을 늘어뜨리고 있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眞珠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微笑를 배운다

    太陽은 墓地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試鍊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曠野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微笑를 배운다

    太陽은 墓地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試鍊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曠野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그럼에도 김민기는 남들에게 그러한 일들을 說明하고 또 辨明하는 데 頑剛하게 反撥한다. “노래라는 것은 만들어지면 부르는 사람이 임자지, 作曲者는 徹底히 第3者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持論이다. 그래서 自身의 노래에 對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것 自體를 忌避하다 못해 嫌惡한다. 정작 道가(道家)의 道人 같은 超脫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아침이슬’도 정작 自身은 이한열 君 葬禮式 때 듣고 비로소 그 노래가 가진 엄청난 威力과 歷史性을 깨달았다고 回顧한다. 運柩가 始作되면서 數十萬이 핏발선 눈빛으로 노래를 부를 때 “소름 끼치고 온몸이 떨려와 귀를 막았다”고 當時를 回顧했다.

    金敏基, 그리고 ‘아침이슬’은 1970~80年代 우리 時代의 아픔을 代表하는 無限한 意味를 지닌 이름이고 노래다. 1970年代 以後 只今에 이르기까지 그의 노래를 불러보지 않은 旣成世代가 果然 몇 名이나 있겠는가. 그는 그냥 그렇게 무심하게 노래를 만들었다지만, 그가 만든 노래는 가장 意味 있는 노래가 되어 우리 時代를 貫通한다.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