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巫俗과 女色에 빠진 王 許任 鍼法이 살리다!|신동아

巫俗과 女色에 빠진 王 許任 鍼法이 살리다!

광해군 平生 따라다닌 狂症(狂症)

  • 이상곤│甲山韓醫院 院長·韓醫學 博士

    入力 2013-01-21 15: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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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속과 여색에 빠진 왕 허임 침법이 살리다!

    映畫 ‘光害, 王이 된 男子’에서 俳優 이병헌이 演技한 광해군. 映畫의 內容과 달리 醫學的 史料를 통해 만난 그는 意外로 小心하고 恒常 不安해하는 ‘普通사람’이었다.

    健康은 어떤 祕訣에 依해 獲得되는 게 아니라 常識的 水準의 智慧를 實踐에 옮김으로써 만들어나가는 行爲의 産物이다. 醫學에 精通한 醫師보다 ‘醫學’이라는 單語조차 들어보지 못한 시골 할머니나 僻地 할아버지가 더 健康하게 長壽하는 게 그 證據다. 잘 씹되 모자란 듯 먹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늘 걸어 다니고 農事를 통해 끊임없이 몸을 놀리며, 작은 것에 滿足하고 걱정거리는 쉬 잊어버리는 그들, 健康할 수밖에 없다. 오랜 歲月 代를 물려 몸으로 習得한 智慧를 日常으로 만든 것이다.

    大多數의 사람이 그들보다 長壽하지 못하는 것은 이런 習得된 智慧를 누구나 아는 ‘귀찮은 知識’으로 置簿하고 훨씬 적은 努力으로 훨씬 쉽게 健康해지려 하는 까닭이다. 게으름은 東西洋 醫學을 莫論하고 健康과 長壽의 最大 敵이다.

    속이 불처럼 타다

    지난해 ‘光害, 王이 된 男子’라는 映畫가 觀客몰이를 했다. 재미와 더불어 獨特한 想像力이 觀客을 사로잡았지만 歷史學徒는 飼料와는 距離가 먼 內容 때문에 不便해했던 게 事實이다. 健康 側面도 마찬가지다. 映畫는 광해군 離婚(李琿·1575~1641)을 아주 健康한 男性으로 表現했지만 醫師의 눈에 그의 實際 삶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自身의 健康을 巫俗에 맡기고 女色을 탐하면서 攝生에는 게을렀다.

    仁穆大妃를 廢位하고 영창大君을 죽이는 等 廢謀殺制(廢母殺弟)의 罪를 저지른 悖倫의 王, 仁祖反正에 依해 廢位된 王. 그의 삶에 巨創한 무엇이 있을 것 같지만 醫學的 史料를 통해 만난 그는 意外로 小心하고 늘 不安해하는 ‘普通사람’이었다.



    ‘朝鮮王朝實錄’(以下 實錄)은 光海君의 健康에 뭔가 큰 問題點이 있음을 卽位年(1608)부터 記錄했다. 仁穆大妃의 광해군 챙기기가 그 실마리다. 그女가 藥房에 내린 敎書에는 光海君의 實相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主上이 지난番부터 寢食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들었지만 미처 詳細히 알아보지 못했는데 어제 問安할 때 親히 본 卽, 精神이 예전과 달라 昏迷한 듯하고 너무 甚하게 야위었다. 수라도 하루 동안에 한 番이나 두 番쯤 드시는데 겨우 한두 수저만 드신다. 주무시는 것도 2~4時間에 不過하니 어찌 이처럼 안타깝고 切迫한 일이 있겠는가.”

    光海君 自身도 여러 番 自身의 健康에 對해 診斷을 내렸다. 卽位 2年 後 領議政 漢陰 李德馨(1561~1613)과 만난 자리였다.

    “어려서부터 熱이 많았고, 이것이 쌓여 火症이 나타났으니 이는 조석 間에 생긴 病이 아니다. 恒時 蔚熱症(鬱熱症)을 앓아 자주 競演을 열지 못했다.”

    火症(火症)과 心疾(心疾)은 實錄(光海君日記) 記錄上 光海君이 가장 자주 吐露한 疾病이다. 卽位 3年 領議政에 오른 이원익(1547~1634)李 “王의 健康이 좋지 않아 書類 決裁가 늦어지고 있다”고 걱정한 대목을 봐도 光海君의 健康에 큰 問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光海君이 말한 心疾과 火症은 身體 內部에 熱이 올라 속이 답답하고 괴로운 症狀을 말한다. 韓醫學 觀點에서 보면 鬱熱症은 눈에도 異常을 誘發한다. 光海君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앓고 있는 病이 眼疾이고 보면 더더욱 보는 것을 멈추고 조용히 調攝해야 마땅하다. 眼疾 增稅가 아침에는 덜했다가 낮에는 甚해지니 나 亦是 안타깝기 그지없다.”

    예부터 눈이 나쁘면 쇠肝을 먹는 것도 看過 눈이 서로 連結돼 있음을 말해준다. 肝炎이 심해지면 눈에 黃疸이 먼저 오는 것과 같은 理致다. 韓醫學에서 눈은 元來 불이 지나는 通路 機能을 한다. 어두운 밤 고양이의 눈이 파랗게 불타오르듯 보이는 것도 같은 脈絡이다. 事物을 捕捉하는 視力은 모두 불의 作用에 依한 것이다. 花甁은 불의 通路에 불을 더해 안(眼) 神經을 위축시킨다. ‘東醫寶鑑’은 눈의 病理를 이렇게 說明한다.

    ‘間에 禍가 있으면 피가 뜨겁고 氣가 위로 치솟아 오르므로 血脈이 통하지 않게 된다. 肝의 熱을 내리면 五臟이 安定되어 눈의 여러 가지 症狀이 回復된다.’

    18歲 어린 나이에…

    光海君의 健康에 빨간 불이 켜진 決定打는 壬辰倭亂이었다. 1592年 4月 13日 釜山에 上陸한 倭軍이 破竹之勢로 北上하자 宣祖는 4月 29日 열여덟 살 둘째 아들 離婚을 世子로 冊封한다. 5月 20日 平壤에 머물면서 “世子 魂은 熟成하며 어질고 효성스러움이 四方에 널리 알려졌다. 王位를 물려줄 計劃은 오래前에 決定하였거니와 軍國의 大權을 總括토록 하며 臨時로 國事를 다스리게 하노니 무릇 官職을 내리고 賞罰을 施行하는 일을 便宜에 따라 決斷해서 하게 하노라”(난중잡록, 조경남)고 闡明한다. 調整을 나눠(分朝) 光海君은 戰爭을 遂行하게 하고 本人은 日本軍에 쫓겨 搖動으로 건너가기로 決斷을 내린 것이다.

    光海君은 1592年 6月 14日부터 分組를 이끌고 平安道 黃海道 咸鏡道 江原道 地域을 옮겨 다니며 흩어진 民心을 收拾했다. 義兵을 募集하고 戰鬪를 督勵하며 軍糧과 말먹이를 蒐集하고 運搬하는 等 活潑한 活動을 벌였다. 그가 分組를 끌고 다닌 地域은 險峻한 山岳과 고개를 넘는 일이어서 擧動도 힘들었을 뿐 아니라 倭軍과 멀지 않은 地域이어서 心理的 壓迫感 또한 만만치 않았다.

    무속과 여색에 빠진 왕 허임 침법이 살리다!

    光海君은 壬辰倭亂으로 불탄 昌慶宮을 重建해놓고도 “宮內의 大造殿이 어둡고 幽靈이 나올 것 같다(幽暗不便)”며 가기를 꺼렸다.

    宣祖 時代 主婦 벼슬을 지냈다고 알려진 유대조(兪大造)가 올린 上疏(光海君日記)는 山岳地域에서 光海君과 함께 보낸 露宿生活을 이렇게 記錄하고 있다.

    “그때 山길이 險峻하여 日百里 길에 사람 하나 없었는데, 나무를 베어 땅에 박고 풀을 얹어 지붕을 하여 露宿하였으니 光武帝가 부엌에서 옷을 말린 때에도 이런 困難은 없었습니다. 山을 넘고 물을 건너고 비를 맞으면서 끝내 모두 穩全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고생스러웠습니다. 險難한 山川을 지나느라 하루도 便히 지내지 못하였습니다.”

    苦生이 얼마나 甚했던지 光海君은 그 後遺症으로 1593年 봄과 여름 동안 海州에 머물며 繼續 病席에 누워 있어야 했다. 九重宮闕에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던 王손에겐 山길을 걷는 것 自體가 苦役이었다. ‘東醫寶鑑’은 이런 疾病을 ‘勞倦(勞倦)’으로 規定한다. 努力하고 힘써서 疲勞한 病이라는 뜻으로, 그 原因과 病理를 이렇게 說明한다.

    “精神的으로나 肉體的으로 疲勞하면 몸의 元氣가 줄어들게 된다. 飮食物의 氣(氣)가 不足해 上草(上焦·心臟의 아래, 胃腸의 윗部分)가 막히고 下焦(下焦·위의 아래, 膀胱 윗部分)가 통하지 못해 속이 더워지면서 가슴속에서 熱이 난다. 火가 旺盛하면 비토(脾土·지라)를 억누른다. 비(脾)는 팔다리를 主管하기 때문에 勞困하고 熱이 나며 힘없이 動作하고 말을 겨우 한다. 움직이면 숨이 차고 저절로 땀이 나고 가슴이 답답하며 不安하다. 이런 데는 마땅히 마음을 安定하고 조용히 앉아 기운을 돋운 다음 달고 性質이 찬 藥으로 火熱을 내리고 신맛으로 흩어진 氣를 거둬들이며 性質이 따뜻한 藥으로 中焦(中焦·僞裝 附近)의 氣를 調節해야 한다.”

    壬辰倭亂 後 벌어진 王位 繼承 問題는 엎친 데 덮친 格으로 光海君에게 心理的 壓迫을 더했다. 1608年 先祖의 病勢가 심해지면서 북인 政權의 領袖이자 對北(大北)派였던 鄭仁弘은 光海君에게 王位를 넘겨주라고 建議하는 한便, 영창大君을 支持하는 小북(小北)派 領議政 柳永慶을 攻擊한다. 宣祖는 유영경에게 힘을 실어준 後 問安을 드리러 온 光海君을 門前薄待한다. 甚至於 더 以上 王世子 問安을 운운하지 말고 다시 오지도 말라고 警告한다. 16年 공들여온 王世子 자리가 무너질 듯한 喪失感에, 光海君은 結局 피를 吐하며 쓰러지고 만다. 엄청난 心理的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보듯, 光海君은 卽位에 이르기까지 精神, 肉體 兩面에 걸쳐 極度의 疲勞感과 不安感을 안고 살았다.

    ‘왕이 女色과 놀기를 좋아해…’

    卽位 後에도 光海君의 健康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競演조차 제대로 열지 못했다. 內聖外王(內聖外王)을 위한 王의 工夫 度量이자 現實 政治의 討論場이었던 競演을 거르는 回數가 많아지면서 그는 臣下들과 漸漸 멀어져갔다. 卽位 2年 承政院은 여러 次例에 걸쳐 競演 再開를 要請했지만 光海君은 ‘나의 健康이 回復되면 말을 하겠다. 于先 기다리라’‘근간에 感氣가 걸려서 마땅히 調理하고 卽時 할 것’‘내가 비록 病을 참고 견디며 競演을 열고자 하나 萬若 이른 아침에 擧動하면 더 아플까 念慮되니 조금 미뤄서 瑕疵’는 말로 競演을 避해갔다.

    오랜 戰亂과 王位 繼承 暗鬪 속에서 光海君의 몸과 精神은 날로 衰弱해갔지만 그는 스스로 體力 回復을 위한 意志를 보여주지 못했다. 實錄은 이런 光海君을 冷笑的으로 記錄했다. 君主로서 健康을 되찾기 위해 模範을 보이는 代身, 女色에 執着하고 儒敎 社會에선 淫祀(淫事)인 巫俗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을 集中的으로 描寫했다. 出發은 尙宮 金介屎였다. 實錄은 誹謗(秘方)이란 말로 女色을 耽溺한 光海君을 非難한다.

    ‘金 尙宮은 이름이 開始로서 나이가 차서도 容貌가 피지 않았는데, 凶惡하고 약았으며 計巧(計巧)가 많았다. 春宮(春宮·東宮)의 옛 侍女로서 王妃에게 揀擇이 되어야 (王의) 잠자리에 들 수 있었는데 誹謗으로 갑자기 사랑을 얻었다.’

    實錄은 幻視 이봉정의 입을 빌려 王의 女性 遍歷을 까발린다.

    ‘王이 卽位한 以來로 競演을 오랫동안 廢하고 一般 公使의 裁決度 태만해서 매양 決裁의 날을 넘겼다. 더러 밤에 들이려 하면 王이 恒常 침內(寢內)에 있었기 때문에 宦侍들度 뵈올 수가 없었다.’ ‘왕이 女色과 놀기를 좋아해 매양 寵姬(寵姬) 서너 名을 데리고 後援을 노닐었다. 그러다가 꽃나무와 물 바위 等에 이르면 밤낮이 다하도록 지칠 줄 몰랐다.’

    光海君은 各種 藥材와 攝生으로 몸을 돌보는 代身 巫俗에 執着함으로써 健康을 回復할 機會를 잃었다. 當時 性理學을 信奉하는 士大夫들은 푸닥거리를 통해 疾病을 治療하는 것을 儒敎에 對한 挑戰으로 여겼다. 무당이 儒學의 聖地인 漢陽 都城 안으로 들어오는 것조차 싫어했다.

    近代 以前의 疾病 治療는 病의 原因과 本質을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決定됐다. 疾病을 神의 處罰로 여기면 罪를 悔改해야 했고, 鬼神이 들어 病이 생겼다고 보면 鬼神을 쫓아야 했다. 非文明 世界에선 巫俗人이 곧 醫師였다. 光海君이 오랜 疾病으로 힘들어하던 卽位 3年의 記錄을 보면 그가 巫俗에 얼마나 心醉했는지 알 수 있다.

    무속과 여색에 빠진 왕 허임 침법이 살리다!

    光海君은 女色에 執着하고 巫俗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尙宮 金介屎는 온갖 誹謗으로 光海君을 寢室로 끌어들였고 政治的 最側近이 됐다.

    ‘이때 上(上·賃金)李 儒敎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左도(左道)에 甚히 迷惑했다. 命課學(命科學)과 占術에 能한 정사륜, 還俗한 中 이응두 等이 宮中에 進出해 像을 모셨는데 寵愛를 한 몸에 받았고 信任이 두터웠다. 賞은 한결같이 조금이라도 움직일 일이 있으면 길凶이나 금기만 따지는 그들의 말만 들었다. 照會를 하러 停電으로 옮기는 일조차 이들의 말을 따랐다. 甚至於 鬼神을 섬기고 福을 비는 일이라면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居處를 새 大闕로 옮길 때에는 每日 淫祀를 하느라 북소리 장구소리가 大闕 밖으로 흘러넘쳤다. 都城 百姓들이 말하기를 죽어서 鬼神이 되면 水剌間의 飮食을 실컷 먹겠다고 했다.’

    巫俗과 詛呪가 부른 病

    王妃에 對한 記錄은 巫俗과 더욱 密接하다.

    ‘尙宮 金氏(開始)가 王妃(廢妃 劉氏)를 甚하게 投棄해 怨讐처럼 對했다. 그러다 宮中에 詛呪가 크게 일어나 凶惡한 物件이 (王妃의) 寢室에 가득했다. 王妃가 病이 들자 議員들은 邪惡한 鬼神으로 인한 것이라고 했다.’

    寵愛를 받은 무당 福童의 記錄은 光海君의 疾病觀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證據다.

    ‘福童이 詛呪를 한 것 때문에 國文을 當하였는데, 宮에 들어가 詛呪한 物件을 파내고 祈禱를 하기에 이르러 오히려 王에게 寵愛를 받았다.… 王이 그에게 셀 수도 없는 수많은 賞을 내리니 한 달 남짓 만에 權勢가 朝野를 흔들었다.’

    광해군 5年 대북파가 永昌大君 및 反對派 勢力을 除去하기 위해 일으킨 癸丑獄事와 이 事件을 背景으로 벌어진 ‘廢母살제’에도 巫俗과 詛呪가 亂舞했다. 宣祖의 正妃인 의인왕후 朴氏가 所生 없이 죽고 繼妃인 仁穆大妃가 영창大君을 낳자 光海君을 支持하는 對北과 영창大君을 支持하는 小북 사이에 王位 繼承 暗鬪가 벌어졌다. 1607年(宣祖 40年) 겨울 宣祖가 앓아누웠을 때 宮中에선 先祖의 臥病이 죽은 의인왕후 朴氏의 탓이라는 所聞들이 흘러나왔다. 記錄에는 仁穆大妃의 手下 나인들이 의인왕후가 묻힌 穆陵으로 사람을 보내 呪術을 거는 行動을 했다고 적고 있다. 義人王后의 四寸 박동량은 詛呪와 關聯해 實錄에서 이렇게 證言했다.

    무속과 여색에 빠진 왕 허임 침법이 살리다!

    宣祖 및 의인왕후 朴氏, 繼妃 人牧王后 金氏가 묻힌 京畿 구리시 東九陵 內 穆陵. 仁穆大妃는 先祖의 臥病이 죽은 의인왕후 탓이라며 手下 나인을 시켜 穆陵에 詛呪를 걸었지만 그女 또한 그곳에 묻혔다.

    “仁穆大妃의 아버지 金悌男의 사람들은 先祖가 疾病에 시달리게 된 理由를 의인왕후에게서 찾고 있다. 數十餘 名이 妖妄한 무당들과 잇따라 穆陵에 가 詛呪하는 일을 大大的으로 벌였다.…이 일이 말할 수 없는 곳(仁穆大妃)과 關聯이 되어 있어 더 以上 따지지 못했다.”

    癸丑獄事 以後 卽位 7年, 光海君은 倭亂으로 불탄 昌慶宮을 重建해놓고도 “宮內의 大造殿이 어둡고 幽靈이 나올 것 같다(幽暗不便)”며 가기를 꺼렸다. 도망가듯 다른 宮闕로 자주 옮겨 다니곤 했다. 이 때문인지 光海君은 새 宮闕을 짓는 데 國力을 浪費하며 百姓들을 괴롭혔다. 及其也 光海君 9年 成均館 儒生들은 全國 角度 儒生들에게 돌린 通文에서 “仁穆大妃가 義人王后의 靈魂을 詛呪했으며 영창大君을 王位에 올리기 위해 여우 뼈와 木人을 宮中에 묻고 무당을 끌어들여 빌었다. 詛呪를 數年 동안 繼續했고 닭, 개, 염소, 돼지 等의 온몸을 宮中에 던져 賃金을 해치려 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仁穆大妃를 擁護한 西人의 仁祖反正이 成功한 以後 記錄은 反對로 光海君을 攻擊하고 있다. “父王의 무덤을 파헤치고 詛呪로 仁穆大妃를 해치려 했으며 鬼魅(鬼魅)를 宮中으로 몰아넣어 疾病을 퍼뜨리려 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眞實인지는 알 수 없지만 當時 온갖 呪術이 總動員된 前代未聞의 드라마가 펼쳐진 것만큼은 事實로 보인다.

    疾病觀(觀)은 어떤 醫學體系에서든 治療에 中心的인 役割을 한다. 朝鮮의 醫療體系에서 留學과 巫俗은 나름의 治癒體系를 갖고 있었다. 儒學은 具體的인 몸의 治癒 問題를 마음과 結合시키고 敬虔하게 마음을 닦는 修養論에 集中했다. 巫俗은 人間의 感情을 儀禮를 통해 안심시키면서 感情을 달래주는 側面이 剛했다. 前者가 요즘 말로 ‘힐링’이라면 後者는 胃弱(僞藥)效果, 卽 플라시보 效果에 比喩된다.

    이런 脈絡에서 보면 光海君의 疾病觀이 巫俗에 傾倒된 데는 理由가 있어 보인다. 兄弟 間의 王位爭奪戰과 不可抗力的으로 일어난 壬辰倭亂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가 겪은 心身의 疲勞와 苦痛은 醫藥이 쉽게 治癒할 수 없는 領域에 있었다. 어떻게 보면 自身에게 加해진 엄청난 心的 負擔을 힐링과 마인드컨트롤로 克服하려고 발버둥친 것이라고 解釋할 수도 있다. 西人들과 仁穆大妃가 보내는 露骨的인 嫉視와 詛呪는 王位에 오른 後에도 그를 恐怖와 不安으로 몰아넣었을 터. 그의 病은 갈수록 깊어만 갔다.

    朝鮮 最高의 鍼醫 許任

    무속과 여색에 빠진 왕 허임 침법이 살리다!

    壬辰倭亂, 女色과 呪術 執着, 廢位 等의 受難 속에서도 光海君이 67歲까지 산 것은 朝鮮 最高의 鍼醫였던 許任과 그의 保社 鍼法 德分이었다.

    卽位 10年 光海君은 “내가 平素부터 火症이 많은데 요즈음 上疏와 차자(箚子·간단한 書式의 上疏文)가 煩雜하게 올라와 狂症(狂症)이 생겨 살펴볼 수가 없다”고 告白한다. 自身의 疾病을 火症을 넘어 狂症에 이르고 있다고 自家 診斷한 것. 仁祖反正으로 王位에서 쫓겨난 以後 67歲에 世上을 떠날 때까지 繼續되는 不安症과 그릇된 疾病官은 그의 心身을 괴롭혔다.

    그래도 光海君이 還甲이 훨씬 넘은 나이까지 長壽한 것은 침의 威力 때문이다. 그는 巫俗으로 마음을 진정시키는 한便 寢具 治療에 매달렸다. 그의 곁엔 朝鮮 最高의 침의(鍼醫) 許任이 있었다. 許任은 壬辰倭亂 때 光海君과 더불어 分組活動을 하면서 生命을 같이한 戰友였다. 各 記錄에 朝鮮의 名醫로 이름을 올린 그는 先祖를 침으로 治療한 공으로 商人 出身임에도 語의(御醫)와 府使까지 지냈으며, 中國과 日本에서 오늘날까지 그 眞價를 인정받는 ‘鍼灸經驗方’의 著者이기도 하다. 光海君 卽位 2年의 記錄은 그가 얼마나 대단한 鍼醫였는지를 드러낸다.

    “鍼醫 許任이 全羅道 羅州에 가 있는데 위에서 傳敎를 내려 올라오도록 재촉한 것이 한두 番이 아닌데도 傲慢하게 집에 있으면서 命을 따를 생각이 없습니다. 軍部를 無視한 罪를 懲戒하여야 하니 鞠問하도록 命하소서.”

    이뿐만 아니다. 광해군 6年에는 司諫院이 아뢴다.

    “어제 임금께서 ‘來日 鍼醫들은 일찍 들어오라’는 分付를 하였습니다. 許任은 마땅히 大闕門이 열리기를 기다려 急히 들어와야 하는데도 製造들이 모두 모여 여러 番 재촉한 然後에야 느릿느릿 들어왔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경악스러워하니 그가 賃金을 無視하고 泰然하게 自己 便利한 대로 한 罪는 嚴하게 懲戒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 次例 司諫院의 要請이 있었지만 그의 行動은 아무런 制約을 받지 않는다. 한술 더 떠 許任은 治療를 잘한 功勞로 가자(嫁資), 卽 褒賞金까지 받는다.

    朝鮮時代 不世出의 名義이자 義城(醫聖)으로 불리는 許浚조차 침에 關해서는 許任 앞에서 꼬리를 내린다. 宣祖 37年 許埈珥 임금의 물음에 答한다.

    “神은 침을 잘 모릅니다만 許任이 平素 말하기를 經脈을 이끌어낸 다음에 아시穴에 鍼을 놓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許浚의 나이 58歲, 許任의 나이 34歲 不過한 點에 비추어 보면 대단한 稱頌이 아닐 수 없다.

    壬辰倭亂 初期에 宮中에 들어와 光海君에 이르기까지 26年 동안 王의 寵愛를 받은 許任 鍼灸法의 祕訣은 果然 무엇일까. 여러 記錄에 따르면 許任은 鍼을 놓는 技法에 뛰어난 것으로 評價된다. 宣祖 37年 實錄은 “宣祖가 偏頭痛을 앓자 許浚은 病을 診斷하고 남영은 穴자리를 잡았으며 許任은 鍼을 놓았다”고 記錄하고 있다. 여러 記錄으로 미뤄 許任은 침 자리나 鍼에 對한 理論보다 鍼을 놓는 實際 方法을 重視했다.

    광해군 살린 補瀉法

    그의 침法人 補瀉法(補瀉法)은 手法派 技術의 決定版이자 祕法으로 ‘許任 補瀉法’으로 따로 分類된다. 그가 쓴 鍼灸經驗方의 序文에도 鍼에 對한 그의 생각이 分明히 나타나 있다.

    “不敏한 나는 어릴 때 父母님의 病을 고치려 醫學에 몸담은 뒤로…환자를 治療하는 데 診療의 要點과 疾病의 變化過程, 補瀉法을 明確히 밝히고자 한다.”

    許任 補瀉法의 步法은 萬若 침을 5푼 깊이로 찌른다면 2푼을 찌르고 멈추었다 2푼을 찌르고 나머지 1푼을 찌르면서 患者로 하여금 숨을 들이마시게 한다. 마치 風船에 바람을 불어넣는 것과 같이 내 몸에 氣를 팽팽하게 채워 넣는 것이라 해서 步法이라 한다. 司法은 이와 反對의 方法을 쓰며 風船에서 空氣를 빼는 것처럼 自沈한다. 特히 그는 “오른손으로 鍼을 놓는다면 왼손을 놀려서는 안 된다”고 指摘한다.

    이는 우리가 穴(穴)이라고 하는 침 자리의 特性을 알아야 理解할 수 있다. 穴은 구멍이지만 皮膚로 덮여 막혀 있으므로 왼손으로 문질러 內面의 氣를 活潑하게 만든 後에 磁針을 해야 한다는 것. 機가 活動하면 블랙홀처럼 구멍이 열리고 氣의 흐름이 더욱 活潑해지면 그때 鍼을 놓아야 效果를 極大化할 수 있다는 理致다. 그의 鍼法은 天地人(天地人) 鍼法으로도 불리는데 세 番으로 나눠 2푼, 2푼, 1푼씩 上中下 次例로 찌르는 것에 起因한다. 그의 鍼法은 單純하지만 이처럼 本質을 읽어내고 臨床이라는 實戰에 適用한 祕法이다.

    筆者는 이 鍼法을 復元해 臨床에 適用해보았더니 다른 疾患에도 效果가 좋았지만 自己 몸이 일으킨 免疫의 叛亂인 알레르기 疾患에 特效를 보였다. 알레르기 鼻炎은 꽃가루나 溫度 變化 等 外部에 우리 몸이 必要 以上의 敏感한 反應을 보이면서 나타나는 疾患이다. 콧물이나 재채기도 이런 外部的 要因을 없애기 위한 恣意的 反應일 뿐이다. 許任의 補瀉法 中 司法은 外部 刺戟에 對해 지나친 緊張感을 風船에서 바람 빼듯 治療한다. 難治病으로 알려진 耳鳴도 귀 안의 神經細胞人 乳母細胞의 興奮을 진정시킴으로써 좋은 效果를 보았다.

    무속과 여색에 빠진 왕 허임 침법이 살리다!
    이상곤

    1965年 慶北 慶州 出生

    前 大邱한의대 안耳鼻咽喉皮膚科 敎授, 大韓韓醫師協會 外觀科學會 理事

    現 甲山韓醫院 院長, 韓醫學 博士, 東亞日報·農民新聞·프레시안 칼럼 進行

    著書 : ‘콧속에 健康이 보인다’ ‘코 博士의 코 이야기’ ‘낮은 韓醫學’ 等 多數


    朝鮮 最高의 沈毅인 許任에 對한 記錄은 光海君 卽位 15年에 사라진다. 1623年 仁祖反正이 일어난 바로 그해다. 光海君은 自身의 疾患을 臣下들에게 漏泄한 것에 憤怒해 그를 罷職한다. 數十 年 동안 自身의 意志에 따라 數없이 宮을 들락거린 그였지만 光海君이 流配를 當해 權座에서 쫓겨난 後 다시는 語義로 돌아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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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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