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逸脫 속 사랑의 浪漫과 背反|新東亞

逸脫 속 사랑의 浪漫과 背反

낯선 男子의 트럭에서 먹고 자고 섹스하고…

  • 강유정 映畫評論家 noxkang@hanmail.net

    入力 2008-07-08 14: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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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 위에서 그女들은 집에서 못 느끼던 오르가슴을 느끼고 집에서 맛보지 못한 自由를 만난다. 旅行은 逸脫이다. 逸脫은 日常에서 잠자던 欲望을 일깨운다. 逸脫 속 로맨스는 誘惑的이지만 完成되는 瞬間 背反에 直面한다. 逸脫 속 사랑은 감미롭지만 流通期限이 짧다. 逸脫은 脫走이자 回歸이다.
    일탈 속 사랑의 낭만과 배반

    ‘生活의 發見’

    어떤 旅行은 祕密의 記錄과도 같다. 누군가에게 ‘春川’ ‘江陵’ ‘慶州’는 平凡한 地名이지만 비밀스러운 旅行의 記憶이 있다면 그곳들은 暗號가 된다. 暗號는 旅行을 간 當事者 둘만의 共有物이다. 두 사람이 그 곳에 함께 가지 못한다면 暗號는 永遠히 祕密에 부쳐진다. 封印된 時間 속에서 發效되는 追憶, 그래서 때로 旅行은 至毒한 傷處의 記錄이 되기도 한다.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그곳, 그 時節, 그 사람.

    하지만 二律背反的이게도 사람들은 돌아오기 위해 旅行을 떠난다. 封印된 追憶을 그리워하지만 그곳이 旅行地이기에 追憶과 함께 떠오른다. 旅行은 日常 속에 沈澱된 欲望을 追憶이라는 이름과 함께 떠오르게 한다. 旅行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버리고 떠나올 수밖에 없는, 逸脫의 必然性이다. 結局 日常으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기에 旅行은 追憶이 되고 祕密이 된다.

    돌아올 곳이 旅行地와 같다면, 그러니까 祕密 없이 떠나온 旅行地라면 그것은 平凡한 地名과 섞여 地圖 위의 한 點으로 사위어든다. 하지만 祕密이 있을 때 地名은 追憶이 되고, 그곳의 이름은 傷處를 남긴다. 그 어느 地名을 말할 때마다, 마음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게 어딘가 아파온다. 그 地名을 속으로 읊을 때 잘못 깨문 입술에서 새어 나온 피 맛처럼 아릿해지는 것이다.

    돌아올 곳이 없다면, 旅行이 삶이 되어 流浪이 된다면, 이 아릿함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돌아올 곳이 있기에 떠난다. 그곳은 日常이 아닌 다른 領域, 於此彼 그곳의 삶이 日常을 浸透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우리는 다른 나를 怯 없이 그곳에 내놓는다. 여기, 이곳에서와 다른 나를 묻고 온 곳, 旅行地. 當身은 或是 旅行地에서 길을 잃어본 적이 있는가. 當身 마음속의 地圖에는 어떤 ‘指名’들이 남아 있는가.

    이 男子에게 ‘무진’은 恥辱과 傷處, 侮蔑과 自虐의 空間이다. 서울에서는 有能한 丈人과 아내가 昇進 자리를 마련해두고 기다린다. 좋지만 싫은 일이다. 成功과 出世는 男子를 우쭐하게 하지만 妻家 德이라는 꼬리票가 이 男子의 自尊心을 건드린다. 男子는 초라해진 自身을 이끌고 故鄕으로 向한다. 안개가 더 먼저 반겨주는 곳, 無盡. 男子는 그곳에서 只今보다 훨씬 더 초라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던 젊은 時節을 만난다. 그리고 고운 소프라노 목소리로 ‘木浦의 눈물’을 부르는 女先生 하인숙과 하룻밤을 나눈다.



    ‘안개’ 속 ‘生活의 發見’

    일탈 속 사랑의 낭만과 배반

    ‘生活의 發見’

    김승옥의 ‘霧津紀行’을 原作으로 만든 映畫 ‘안개’는 旅行地에서 限없이 卑怯해지는 男子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는 俗物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俗物로 認定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떠나온 서울이지만 故鄕도 支離滅裂하기는 마찬가지다. 더 恥事하고 더 속惡漢 곳이 바로 故鄕 無盡이다.

    男子는 自己의 卑怯함을 마주하듯, 自身에게 성큼 한발 다가오는 女先生을 물리치지 않는다. 男子는 “누군가가 自己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주지 않으면 相對便을 찌르고 말 듯한 絶望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그 女子의 조바심을 빼앗”는다.

    그리고 男子는 마지막으로 한 番만 “背反을, 無責任을 肯定하기로” 하고는 서둘러 故鄕을 떠나 日常이 자리 잡고 있는 서울로 向한다. 또 한 番 男子에게 ‘무진’은 侮蔑의 空間으로 깊어진다. 이제 地圖를 펴고 무진을 볼 때, 男子는 ‘하인숙’이라는 祕密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무진은 씻을 수 없는 侮蔑과 傷處가 되어 男子의 平生을 따라다닐 것이다.

    여기 이 男子는 서울에서 失敗를 맛보고 無作定 京春線 列車에 올랐다. 春川에 있는 先輩를 만나는 게 目的이긴 하지만, 實狀 旅行 自體가 目的이지 先輩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春川에 간 男子에게 문숙이라는 女子가 다가온다. 문숙은 경수가 찾아간 先輩가 마음에 두고 있는 女子다.

    그런데 이 女子가 경수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女는 빈속에 마시는 燒酒처럼 빠르게 吸收돼 男子의 日常을 逸脫로 끌고 간다. 경수는 뱀처럼 自身에게 감겨드는 女子를 마다하지 않는다.

    問題는 그 다음이다. 하룻밤, 春川의 逸脫이었던 女子가 그 以上을 要求하는 것이다. 男子는 唐慌스럽다. 그래서 숨가쁘게 春川을 떠나 釜山으로 向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 다음이다. 釜山으로 가던 경수는 못미처 慶州에서 내리고 만다. 自身에게 말을 걸고 誘惑하더니 어느 새 훌쩍 慶州에 내려버린 선영 때문이다.

    別 볼일 없고 苟且한 逸脫

    일탈 속 사랑의 낭만과 배반

    ‘바이브레이터’

    홍상수 監督의 여러 映畫는 男子들이 旅行地에서 꿈꾸는 로맨스와 逸脫을 날것으로 보여준다. 假令 ‘江原道의 힘’의 男子 主人公은 雪嶽山으로 놀러가서는 지나가는 女子들을 힐끔거리며 뭔가 로맨스가 생기지 않을까 노린다. 이런 男子의 모습은 ‘生活의 發見’의 경수가 春川 소양호에 혼자 놀러온 듯한 어린 女大生을 보며 好奇心을 갖는 데서도 드러난다. 경수는 或是나 저 女學生과 어울려볼 수 있을까, 꿈꾼다.

    興味롭게도 홍상수의 旅行 映畫에서 男子들이 擇하는 로맨스는 結局 方席집에 가서 女子들과 놀거나 性賣買 女性을 불러 하룻밤을 때우는 것이다. 로맨스를 꿈꾸지만 結局 그들이 行하는 逸脫은 別 볼일 없고 때론 苟且하다.

    ‘江原道의 힘’의 한 場面은 이 苟且함을 잘 보여준다. 旅行 一員인 두 사람은 女子를 사서 宿所로 불러들인다. 그런데 한 男子의 女子는 몸매도 미끈하고 얼굴도 예쁘다. 主人公 男子의 파트너는 그보다 못하다. 主人公 男子는 툴툴거리기 始作한다. 失笑를 흘릴 수밖에 없는 이 場面들은 그들이 旅行地에서 行하는 逸脫이라는 게 이렇게 우습다는 것을 立體的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낯뜨겁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런 旅行을 마치고 돌아온 男子가 둘도 없이 家庭的인 男便과 아버지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이 ‘집’에 돌아온 男子는 男便으로 되돌아온다. 大門을 열고 나서면 또 다른 愛人과 만나고 旅行地에 가면 로맨스를 꿈꾸지만 집에서는 다른 사람처럼 군다.

    김수용 監督의 ‘안개’가 旅行地에서의 逸脫을 아릿한 追憶과 背反의 侮蔑感으로 裝飾하고 있다면 홍상수 監督의 ‘江原道의 힘’은 그 逸脫을 우스운 것으로 비웃는다. 그런 點에서 ‘生活의 發見’은 男子들이 旅行地에서 꿈꾸는 逸脫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克明하게 보여준다. 먼저 말했다시피 春川의 女子 문숙은 먼저 경수를 誘惑해 하룻밤을 보내고 告白까지 했다.

    慶州의 女子 선영은 어땠을까. 선영은 경수의 애를 태우다 태우다 하룻밤을 許諾한다. 하지만 그 以上은 許諾하지 않는다. 경수는 그 以上을 願하는데 선영은 假借없다. 경수는 春川에서 自身에게 執着하는 문숙을 “미친년”이라고 辱하며 떠나왔다. 그런데 慶州에서 경수는 春川에서 보았던 문숙의 모습과 하나 다를 바 없다.

    親舊가 좋아하는 女子가 나를 選擇해 誘惑하고, 偶然히 汽車 옆자리에 同乘한 美女가 말을 걸어오는 일. 事實上 이는 혼자 旅行하는 男子들이 꿈꾸는 로맨스의 典型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그女가 하룻밤의 快樂까지 許諾한다면 男子가 꿈꾸던 旅行의 逸脫은 完成된다.

    그런 點에서 홍상수 監督의 ‘生活의 發見’은 旅行에서 꿈꾸는 男子들의 誘致한 欲望의 展示場이다. 自身이 願하는 바를 쉽게 준 女子는 금세 잊고, 끝까지 애를 태우는 女子 옆에서 戰戰兢兢하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旅行地에서 로맨스를 꿈꾸지만 結局 그것도 스캔들이자 醜聞, 逸脫에 지나지 않은 것. ‘안개’와 ‘生活의 發見’ 사이에 그 可逆反應이 놓여 있다.

    덜덜거리는 트럭 위에서

    일탈 속 사랑의 낭만과 배반

    ‘더티 댄싱’

    그럼에도 사람들은 旅行을 아름다운 逸脫의 꿈으로 記憶하고 싶어 한다. ‘7日間의 사랑’이라는 映畫만 해도 그렇다. 英文學 敎授인 로버트 벡위드는 어느 날 갑자기 自身에게 아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아들은 바로 10年 前 세미나 次 프랑스에 갔다가 만난 女醫師 니콜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다.

    로버트에게 이 로맨스는 누구에게도 發說하지 못한 浪漫的인 祕密이었다. 映畫 속에서 로버트와 니콜이 나눈 로맨스는 나나 무스쿠리의 ‘사랑의 讚歌’와 함께 神話化한다. 노을 지는 바닷가에서, 日常을 벗어던진 두 戀人은 永遠과 같은 입맞춤을 나눈다. 10年 前의 逸脫을 神話로 記憶하는 것은, 그것을 간직한 로버트 自身이다. 逸脫은 記憶 속에서 浪漫的 神話로 자리 잡는다.

    映畫는 追憶의 封印을 뜯고 現實로 闖入한 로맨스의 痕跡으로 進行된다. 로버트의 아이를 홀로 키우던 니콜이 죽고, 이제 아이에 對한 責任이 生父인 로버트에게 다가왔으니 말이다. 現實, 日常의 아내에게 10年 前의 祕密을 告白하는 瞬間 追憶은 不倫으로 汚染된다. 映畫는 난데없이 登場한 男便의 로맨스를 醜聞이 아닌 日常으로 받아들이는 한 家族의 努力을 그려낸다.

    그렇다면 이 作品이 ‘미워도 다시 한 番’과 같은 멜로드라마일까? 이 映畫가 注目하는 것은 傷處를 縫合하고 일어서는 家族 드라마가 아니라 바로 아름다운 追憶이라고 말하는 便이 옳다. 映畫는 現在가 아닌 過去 속 그 사랑의 아름다움을 全景化한다. 題目인 ‘7日間의 사랑’처럼 이 映畫의 絶頂은 過去 ‘7日間’에서 비롯돼 그곳에서 消滅된다. 映畫 全體의 애잔함을 이끄는 同人(動因) 亦是 7日間의 祕密이 가진 共感帶다. 누구나 나름대로 가슴속에 크고 작은 ‘7日間의 追憶’을 간직하고 있으니 말이다. 映畫 ‘7日間의 사랑’은 비밀스러운 旅行의 追憶에 浪漫的 同意를 求하고 있는 셈이다.

    한便 日本 映畫인 ‘바이브레이터’는 낯선 男子와의 旅行과 그 逸脫이 준 새로운 感覺을 그려내고 있다. 르포 作家인 女子는 처음 보는 男子의 덤프트럭에 올라타 그와 함께 며칠間의 時間을 보낸다. 그女는 男子의 트럭에서 먹고, 자고, 情事를 나누며 오로지 길 위에서 時間을 보낸다. 낯선 男子와의 逸脫에서 얻는 女子의 快感과 衝動은 트럭의 덜덜거리는 振動과 함께 고스란히 傳達된다.

    逸脫은 回歸이자 發見

    일탈 속 사랑의 낭만과 배반

    ‘델마와 루이스’

    旅行이 주는 興奮은 非但 家庭, 아내 或은 男便을 벗어나 다른 사람을 만나 느끼는 不倫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旅行은 그 自體로 逸脫의 快感을 膳賜한다. 17歲 少女 베이비는 家族과 함께 山莊으로 旅行을 간다. 上流社會의 貴族休暇라 할 그곳으로의 旅行이기에 베이비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

    그런데 期待치 않은 그곳에서 베이비는 自身이 살던 都市에서는 全혀 經驗할 수 없었던 짜릿한 逸脫, 快感, 祕密과 만나게 된다. 그 祕密의 主人公은 바로 춤. 베이비는 댄스 敎師 자니를 만나 새로운 춤의 世界와 사랑, 熱情을 經驗하게 된다.

    映畫 ‘더티 댄싱’은 旅行地에서 만나는 로맨틱한 사랑이라는 公式을 그대로 따라간다. 特記할 點은 旅行地에서의 사랑이라는 公式 속에서 季節은 大部分 여름이라는 事實이다. ‘더티 댄싱’의 季節도 여름이다. 뜨거운 여름, 땀에 젖은 셔츠를 입고 이른바 더티 댄싱이라 불리는 춤을 추는 男子, 자니. 베이비에게는 마치 새로운 世界처럼 그가 다가온다.

    1980年代 靑春映畫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을 ‘더티 댄싱’은 ‘베이비’라 불려 마땅한 純眞한 少女와 섹시한 男子와의 戀愛를 그리고 있다. 旅行地, 山莊에서 始作해 그곳에서 끝나는 이 戀愛는 ‘以後 그 둘은 어떻게 되었을까’와 같은 質問과는 距離가 멀다. 처음부터 그들의 戀愛는 旅行地에서의 逸脫, 그리고 짜릿함으로 規定돼 있기 때문이다.

    勿論 이러한 設定의 映畫는 ‘더티 댄싱’ 以前에도 많았다. ‘避暑地에서 생긴 日’이라는 題目처럼 避暑地, 旅行地, 休暇와 逸脫的 戀愛는 公式처럼 따라다니곤 했으니 말이다. ‘더티 댄싱’의 새로움이라면 旅行地에서의 逸脫이라는 情緖를 몸의 言語인 춤으로 再照明했다는 것일 테다.

    춤은 부끄러운 戀人들의 接觸을 合理化해준다. 춤이란 애初부터 가슴과 가슴이 닿고, 볼과 볼이 맞닿는 體溫의 交流이기 때문이다. 수줍고 純眞한 베이비가 한 걸음씩 춤을 배워가면서 자니와의 愛情도 깊어가고 둘이 나누는 感情의 密度도 깊어간다. ‘Be my baby’라는 音樂으로 두 사람의 距離는 가까워지고, ‘Time of my life’라는 音樂과 함께 絶頂을 向해 간다. 계층적 差異를 克服한 두 사람의 사랑은 旅行地의 感情이 人生 最高의 瞬間이 되었을 때 觀客에게 作別을 告한다. 그들의 사랑은 永遠히 旅行地의 逸脫로서 剝製되어 있다.

    어쩌면 旅行地에서의 만남, 그 사랑의 有效期間은 7日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7日이 지나 보름이 되고, 보름이 日常이 된다면 그 짜릿함은 揮發되고 비릿한 日常의 맛으로 變質되고 말 터이니 말이다. 相對方의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입술을 말아 불러보고, 입술에 입술을 대고, 차가운 皮膚에 손을 대는 行爲가 新鮮한 逸脫이 될 수 있는 有效期間 亦是 7日이 아닐까? 짧은 有效期間 안에서 사랑은 浪漫的 神話로 脚色된다.

    로드무비의 代名詞 格인 ‘델마와 루이스’는 집을 벗어나 길 위에서야 自身을 찾은 女性들을 그려낸다. 수많은 映畫가 旅行地의 逸脫을 追憶으로 記憶하지만 때로 어떤 映畫는 旅行과 全 生涯를 맞바꾼다.

    델마와 루이스도 마찬가지다. 그女들은 집에서 느껴보지 못한 오르가슴을 길 위에서 經驗하고, 집에서 맛보지 못한 自由를, 그리고 무엇보다 自己 自身을 만나게 된다. 虛空에 뜬 車 안에서 두 손을 맞잡은 그들의 旅行은 그렇게 끝나지 않은 채 머물러 있다. 落下할 것을 알지만 그女들의 逸脫은 곧 回歸이자 發見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어쩌면 逸脫은 流通期限이 짧게 定해져 있기에 逸脫일 수 있을 것이다. 日常으로의 回歸가 없다면 逸脫은 永遠히 回復 不可能한 離脫이 되기 때문이다. 假令 繼續 旅行을 하면서 殺人行脚을 일삼는 ‘캘리포니아’의 主人公들이나 ‘보니와 클라이드’의 主人公들처럼 말이다.

    짜릿한 背反의 快感

    ‘캘리포니아’의 人物들은 旅行의 自由를 殺人이라는 逸脫行爲로 極大化하고자 한다. 이미 그들의 旅行은 日常으로 回歸할 軌道를 벗어난 지 오래다. 보니와 클라이드度 마찬가지다. 그들의 旅行은 逸脫 그 自體의 軌道에 進入함으로써 逸脫이 日常을 顚覆하고 만다. 때로 이러한 逸脫은 法과 生活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日常人에게 짜릿한 背反의 快感을 준다. ‘이지 라이더’의 主人公들이 멋진 모터사이클을 타고 道路 위를 疾走할 때 우리는 발 묶인 우리의 日常에 暫時 幻想을 提供하는 것이다.

    하지만 結局 旅行이란 되돌아와야 할 삶이 있기에 짜릿한 脫走가 아닐까. 萬一 當身에게 3日間의 時間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家族과 함께 日常을 持續할까. 아니면, 어린 時節 살던 마을을 찾아갈까. 그것도 아니면 혼자 조용한 곳에서 살아온 時間을 反芻하며 보낼까. 當身이 選擇한 旅行地는 곧 當身의 追憶과 祕密의 場所일 것이다.

    일탈 속 사랑의 낭만과 배반
    강유정

    1975年 서울 出生

    고려대 國語敎育科 卒業, 同 大學院 碩·博士(國文學)

    高麗大·극동대 講師

    동아일보 新春文藝 入選(映畫評論), 조선일보 新春文藝 當選(文學評論), 경향신문 新春文藝 當選(文學評論)

    現 高麗大·韓國綜合藝術臺 講師


    獨逸 映畫 ‘노킹 온 헤븐스 도어’는 時限附 人生을 宣告받은 두 男子를 통해 旅行의 意味를 本質的으로 생각할 機會를 提供한다. 그들은 한 番도 바다를 본 적 없기에 旅行을 떠난다. 그리고 그 旅行의 過程에 追憶이 될 수많은 일을 저지른다. 磨耗된 삶 끝으로 가는 旅行은 곧 天國의 門을 두드리는 旅程이 되고, 죽음의 瞬間 바닷가에서 그들은 天國을 보게 된다. 밥 딜런의 同名 音樂이 흐르는 겨울 바닷가에 앉아 마지막 술을 나누는 두 男子의 모습은 映畫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後로도 오랫동안 머릿속 映寫幕에 남아 있다.

    그들은 地上을 떠나기 前 自身의 指導에 그 바다의 이름을 追憶으로 새긴다. 어쩌면 두 男子의 旅行은 우리가 숱하게 지나치는 작은 旅行과 逸脫의 壓縮인지도 모른다. 祕密을 만들고 追憶을 貯藏해 天國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旅行을 떠난다. 그 旅行의 記錄, 地圖는 當身의 存在를 그려 넣을 座標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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