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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兄님’ ‘아우님’…술과 品 나누는 부처 같은 山골 이웃|新東亞

‘兄님’ ‘아우님’…술과 品 나누는 부처 같은 山골 이웃

  • 김광화 農夫 flowingsky@naver.com

    入力 2005-09-09 14: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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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빈 집을 얻어준 서광철 아저씨, 主治醫처럼 돌봐주는 藥師 하윤희氏, 외로울 때면 찾아가는 영덕이. 山골 이웃들은 나누는 것 自體를 기뻐하는 고마운 사람들이다. 勿論 살다 보면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마음苦生도 하지만, 웃을 때가 더 많다. 웃고, 싸우고, 술 마시다 보면 이웃들과 맺은 情은 더욱 깊어만 간다.
    ‘형님’ ‘아우님’…술과 품 나누는 부처 같은 산골 이웃

    권영덕·오금숙 부부네 上樑式 뒤풀이 光景. 이 夫婦는 사람을 워낙 좋아해 溪谷이 이웃들로 가득 찼다. 술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고 風物 장단에 맞추어 춤도 추고.

    내손으로 흙을 일구고 穀食을 키워보니 하늘과 山, 그리고 江을 다시 보게 된다. 논두렁 밭두렁 논길 물길 모두 앞서간 어른들의 숨결이 배어 있음을 皮膚로 느낀다.

    우리 사는 山골에는 ‘步메기’란 게 있다. 논農事를 같이 하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물길을 다잡는 일을 말한다. 山기슭을 논으로 만들다 보니 洑도랑을 만들어 溪谷물을 끌어들여야 한다. 이 일이 한 두 사람 힘으로 되는 게 아니다. 1年 農事에 普通 서너 番 步메기를 한다. 봄에 못자리할 때 한 番, 가뭄이 드는 5月에 또 한 番, 그리고 洪水가 나 洑도랑이 망가졌을 때 한다.

    벼 이삭이 팰 무렵 步메기를 했다. 날이 푹푹 찌니 일이 쉽지 않다. 그래도 洑도랑을 고치고 나서 논으로 물이 콸콸 흘러들어가는 光景을 보는 瞬間, 더없이 흐뭇했다. 그러고는 溪谷에 발 담그고 보주(보메氣꾼의 代表)가 마련한 술을 한盞 걸쳤다. 물가에 둘러앉으니 몇 사람 안 된다. 예전에는 열 서너 名이 함께 한 적도 있는데 只今은 다섯 사람이다. 새삼 한 사람 한 사람이 所重하다.

    삐딱밭 일궈 子息 넷을 大學에

    그 많던 사람, 다 어디로 갔나. 溪谷 물살 따라 사람들 얼굴이 스치고 지나간다. 지난해 돌아가신 분도 있고, 나이가 일흔이 넘어서며 논農事를 그만둔 분도 있다. 농사지을 마음은 있는데 몸이 不便해 못하는 사람도 많다.



    서광철(71) 아저씨도 몸을 다쳐 步메기를 함께 하지 못했다. 아저씨와 나는 因緣이 각별하다. 내 故鄕도 아니고 緣故도 없는 이곳에 뿌리내리게 도와준 사람을 한 사람만 꼽으라면 바로 광철이 아저씨다. 마을 빈 집을 알아봐주고, 허술한 집을 修理하는 일도 도와주셨다. 땅도 마을 사람들이 去來하는 값에 買入하게 해주셨다. 낯선 사람에게 關心과 愛情을 기울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아저씨와 가까운 이웃이 됐다. 아저씨는 農事지을 씨앗을 골고루 나눠주셨다. 그리고 논밭을 오가는 길에 農事 때를 알려주시고, 技術을 가르쳐주시곤 했다. 그런데도 아저씨는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으셨다. 어떤 일이든 日에는 代價가 따라야 한다고 믿었는데 아저씨는 그게 아니었다. 나눠주는 그 自體를 기쁘게 여기시는 게 아닌가.

    그러던 아저씨가 몇 해 前 事故를 當했다. 비탈진 곳에서 耕耘機를 몰다가 耕耘機와 함께 넘어진 것이다. 耕耘機 뒤에 끌고 다니는 트레일러에 아저씨 배가 깔렸다. 耕耘機는 엔진 소리가 유난히 커 웬만해서는 사람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다. 그 때 나는 事故난 곳에서 멀지 않은 밭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事故를 몰랐다.

    지게를 지고 일어서는데 東쪽에서 아침 해가 떠올라 눈이 부셨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고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뭔가 異常했다. 耕耘機가 넘어져 있고 몇 사람이 多急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지게를 팽개치고 달려갔다. 젊은이 한 사람과 할머니 두 분이 트레일러를 들고 아저씨를 꺼내려고 했지만 힘이 不足한 狀況이었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트레일러를 들었다. 빅토르 위고의 小說에 나오는 張 撥長처럼. 부랴부랴 大戰 큰 病院으로 옮겨져 手術을 받고는 살아나셨다. 그러고는 또 억척스럽게 일을 하셨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보면 不可思議하게 느껴지는 게 많다. 두 분은 自己 땅이라고는 다랑논 몇 마지기가 全部다. 그런데도 子息 넷을 모두 大學까지 보냈다.

    “只今 생각하면 어떻게 했나 모르겄어. 남의 삐딱(비탈)밭, 못 쓰는 밭 얻어서 했으니. 옛날에는 耕耘機가 있어, 뭐가 있어? 다 지게로 져 날랐지. 소로 쟁기질하고.”

    이웃과 適當히 距離 두기

    ‘형님’ ‘아우님’…술과 품 나누는 부처 같은 산골 이웃

    서광철 아저씨와 이복순 아주머니. 저 작은 몸으로 子息 넷을 모두 大學까지 공부시켰다.

    아저씨는 지난해 또 큰 手術을 받았다. 耕耘機 事故 後遺症으로 脊椎에 結核菌이 侵入해 허리 아래가 痲痹됐다. 또다시 배를 가를 수 없어 옆구리를 갈라 手術을 했단다.

    “그동안 들어간 治療費가 5000萬원은 될 거야. 더는 病院에 있을 수가 없었어. 그 돈을 子息들이 다 낸 거야. 허리가 다 낫지는 않았지만 안 되겠더라고. 醫師에게 退院시켜달라고 하고 집에서 齷齪같이 運動했지. 죽어라 하고 걸으려 하니까 걸어지더라고. 이제는 運動 삼아 農事일을 조금씩 하는데 子息들이 자꾸 말려. 땅을 팔라고 하는데 팔 수가 있나. 餘暇 故鄕이고 집이 있응께. 사는 限, 팔 수 없지.”

    시골에 살아 보니 이웃도 갈래가 많은 것 같다. 옛날 마을은 大部分 물을 中心으로 이뤄져 있다. 마을을 나타내는 漢字가 東(洞)이다. 물水(水) 便에 한 가지 東(同). 먹는 물은 勿論 農事짓는 물을 함께 쓰면서 마을을 이어온 셈이다.

    步메기 亦是 그런 마을 文化의 延長이다. 只今 논에서 나온 쌀을 먹고 사는 限, 물을 함께 쓰고 管理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비라도 適當히 와주면 이웃 사이 웃을 일이 많으리라. 하지만 가뭄이 들면 달라진다. 제 논에 서로 물을 대려고 얼굴을 붉히고 때로는 感情이 爆發하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며칠 지나 다시 만나면 허허 웃는다. 뻔한 속을 서로 다 안다. 外面하고는 살 수 없는데 웃어야지. 보메期할 때는 이웃이 자리를 지켜주는 것만으로도 感謝하다. 광철이 아저씨도 빨리 健康해져 다시 함께 洑메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웃 이야기가 나온 김에 우리 마을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앞에서 이야기한 보메氣꾼은 내 논과 이웃해 農事짓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마을 이웃은 따로 있다.

    大家族처럼 어울려 산 이웃

    우리 마을은 새로이 만들어졌다. 내가 예전에 살던 마을에서 조금 더 山으로 들어간다. 이곳도 元來는 마을이 있어 한창때는 10家口 以上 살던 곳이란다. 그러다가 마을 全體가 비었던 곳인데 都市를 떠나온 젊은이들이 한두 家庭씩 자리를 잡기 始作했다. 빈 집 修理해서 사는 사람도 있고, 터를 새로 닦아 집을 짓기도 하면서 열 집 가까이 되자 山村마을을 이루었다. 어느덧 只今은 열댓 집으로 늘어났다.

    마을 이야기를 하자니 새삼 조심스럽다. 마을이 새로 생긴 데다가 都市 살다 온 사람들이라 個性이 剛하다. 이웃에 對해 曰可曰否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조용히 자유롭게 살고 싶은 사람도 있다. 農事도 텃밭 程度 일구는 사람부터 몇千坪을 짓는 사람까지 모두 다르다. 나이도 20代부터 60代까지. 新婚夫婦도 있고, 혼자 사는 사람도 있다. 젊은이가 많으니 아이도 많다.

    마을 歷史는 10年이 채 안 되지만 그 사이 나름대로 迂餘曲折도 많았다. 처음 마을이 생기던 때는 耕耘機가 다니던 山길이 있었을 뿐이다. 큰길에서 마을길로 들어서자면 自動車 기어를 1段으로 놓고 크게 숨 한番 몰아쉬어야 할 만큼 길이 險했다. 게다가 非鋪裝길이라 장마 때면 흙이 쓸려가 바위가 들쭉날쭉 드러났다.

    길도 險했지만 물도 만만치 않았다. 먹을 물은 山 여기저기에 옹달샘이 있으니 그걸 끌어다 먹는다. 샘 하나를 한 집이 쓰는 境遇가 많고, 두세 집이 함께 쓰는 境遇도 있다. 장마가 끝나면 水道管이 막히기 일쑤고, 가뭄 때는 물이 말라버리기도 했다. 길과 물을 解決하고자 이웃들과 자주 만났다.

    農事일이나 집짓기는 서툴지만 되도록 손수 하자는 雰圍氣다. 마음 맞는 이웃끼리 품앗이를 했다. 자주 어울려 놀기도 했다. 누구네 아기 돌이라면 當然히 모여 놀았고 甚至於 生日날을 핑계로 모였다. 새로 移徙 오면 집들이, 집을 지으면 上樑式. 어울리자고 하면 핑계도 많았다. 가을에는 어른 아이 다 모여 秋收感謝祭를 열기도 했다. 겨울에는 主題를 定해 함께 工夫도 하고 討論을 벌였다.

    돌이켜보면 大家族처럼 어울려 살려고 했던 거다. 그런데 이웃과 자주 어울리다 보니 좋은 點도 많았지만 알게 모르게 傷處를 주고받았다. 한두 집이 떠나는 걸 지켜보면서 이웃 關係가 달라지기 始作했다.

    무엇이 問題일까. 뿌리를 더듬어 가 보니, 이웃에 對한 關心과 期待가 지나친 데 理由가 있었다. 事實 이곳에 오기 前에는 서로 얼굴조차 모르던 사람들이다. 團地 歸農을 했으니 情緖가 비슷하리라 생각했고, 서로 좋은 이웃이어야 한다는 期待가 컸다. 그리고 버려진 땅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切迫感도 있었고, ‘自發的 가난’이라는 價値를 서로 確認하고 싶어했다.

    ‘형님’ ‘아우님’…술과 품 나누는 부처 같은 산골 이웃

    溪谷 물을 논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이웃들과 함께 보메期하는 모습. 한창때는 열 서너 사람이 함께 했는데 이제는 대여섯 사람이 한다.

    이웃과 부대끼며 새삼 느낀 건 이웃이 나를 必要로 하는 部分보다 내가 이웃을 必要로 하는 面이 많다는 것이다. 이웃이 나와 같기를 바라고, 내 뜻을 理解하기를 바라고, 내 秩序를 흐트리지 않기를 바란다. 世上에 對해서도 그렇다. 내가 世上을 必要로 하는 만큼 世上은 나를 必要로 하지 않는다. 그 틈새가 넓을수록 傷處를 많이 받는다.

    가까이서 많이 부대낀 이웃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웃 사이 다툼에서 한걸음 물러서 있거나 거리라도 조금 떨어진 이웃과 疏通이 더 잘됐다. 어쭙잖게 善心을 쓰다가 誤解를 산 經驗도 있다. 이웃이 願하지 않는 일인데 돕겠다고 나선 게 오히려 이웃한테는 負擔이었나 보다. 그러면서 언제부터인가 좋은 이웃이 되기를 抛棄했다. 어쩌면 좋은 이웃되기보다 나쁜 이웃이 안 되기가 더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必要한 숨결을 나눌 수 있는 距離

    그래서 생각한 게 이웃과 適當히 距離 두기다. 그게 어느 程度 可能한 게 우리 마을이다. 普通 마을은 우물이나 江을 中心으로 모여 있다. 우리 사는 곳은 山골이라 그런지 집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다. 山中턱에 서너 집, 溪谷 한쪽에 또 한 집, 다시 山허리 돌아 두세 집. 이런 式으로. 마을길만 같이 쓸 뿐 農事도 먹는 물도 마을 全體가 함께하지 않는다. 그나마 마을길이 어느 程度 鋪裝되고 나서는 마을會議도 드물어 一年에 한두 番 모이는 게 고작이다.

    漸漸 이웃 關係가 바뀌고 있다. 距離가 가깝다는 理由로 曖昧하게 어울리던 자리는 줄어든다. 代身에 되도록 손발이 맞고 呼吸이 便한 이웃을 만나려고 한다. 距離가 조금 멀지만 共感帶가 있다면 자주 만난다. 交通과 通信이 發達하면서 이웃 槪念도 달라지는 게 아닐까. 우리 食口는 慶南 山淸에 사는 이웃과 가깝게 지낸다. 六十嶺 고개에 터널이 생기면서부터 그집 앞마당까지 한 時間이 채 안 걸린다. 그런 點에서 都市도 決코 멀지 않은 이웃이다. 우리 삶은 都市를 떠나왔지만 都市를 버린 게 아니다. 땅에 뿌리내릴수록 呼吸도 깊어지는 것일까. 都市 사람을 以前보다 훨씬 많이 알고 다양하게 만나는 便이다.

    이곳에 들어온 지 8年. 그 사이 몇 家庭은 이곳을 떠났다. 벌써 主人이 몇 番 바뀐 집도 있다. 미운 情 고운 情이 든 이웃이 하나둘 떠나가고 그곳에 새로운 얼굴이 자리잡고 산다.

    蕙園(8)이네가 올 봄에 우리 이웃집으로 移徙를 왔지만 여름이 지나는 只今까지 서너 番 만난 게 全部다. 그렇다고 사이가 나쁜 게 아니다. 새로 移徙 온 이웃과 미운 情은 되도록 들고 싶지 않다. 蕙園이네 亦是 適當한 距離 두기가 ‘딱 좋다’고 한다. 自身의 呼吸으로 살아가되 必要한 숨결이라면 서로 나눌 수 있는 距離.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事實은 우리네 삶은 지난날의 農村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길게 보면 자연스러운 삶을 찾아가는 過程이라고 할까. 그래서인지 이웃과 자주 만나지 않아도 통하는 部分은 뜻밖에 많다. 農事를 잘 짓는다는 百 마디 말보다 밭의 穀食을 보면 이웃이 그대로 보인다. 집 안팎을 깨끗이 整理整頓하고 사는 이웃집은 스쳐 지나기만 해도 刺戟을 받는다. 自然分娩으로 아이를 낳은 이웃을 보면 내 일마냥 자랑스럽다.

    시골 마을에서 갓난아기 울음소리를 듣는 게 쉽지 않다지만 우리 마을은 조금 다르다. 요 몇 年 사이 아이가 여럿 태어났는데 하나같이 自然分娩했다. 産母가 젊은 사람도 있지만 마흔이 다 된 분도 있다. 助産員 分만에 이어 自己 집에서 아기를 낳은 ‘家庭分娩’韓 境遇도 몇 집 있다. 그러니 사람마다 武勇談(?)李 만만치 않다.

    우리집 主治醫 하윤희氏

    우리집 두 아이는 제왕절개로 낳았기에 내가 이웃에게서 받는 代理 滿足은 크다. 나는 아내와 아기를 함께 만들었음에도 낳는 걸 함께하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手術 끝나고 看護師가 안고 온 아기를 잠깐 보고는 또 아이랑 헤어져야 했다. 아내도 힘들었지만 아기는 환한 電氣불빛 아래 낯선 사람과 날카로운 칼날을 보며 이 世上을 만난 것이다. 그러니 이웃이 누구든 自然分娩으로 아기를 낳는다면 괜히 나까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내 머릿속에 아기가 ‘하늘 門’을 밀고 나오는 모습까지 그려지곤 한다.

    그런 이웃 가운데 여기 紹介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하윤희(39)氏. 그이는 山골로 오기 前에 都市에 살면서 藥師로 일했다. 藥局을 하면서 疾病에 對한 構造的인 問題를 苦悶했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自然醫學 工夫를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99年 가을, 우리 사는 山골에 處女 혼잣몸으로 들어왔다.

    ‘형님’ ‘아우님’…술과 품 나누는 부처 같은 산골 이웃

    엄마(하윤희)와 아빠, 그리고 오빠와도 힘을 합쳐 世上에 나온 손하늘. 아빠 姓은 손, 엄마 姓은 下. 이름이 늘도 되고 하늘도 되는 아이.

    우리 食口는 尹喜氏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꼭 病院에 가야 할 程度가 아니라면 그이를 찾았다. 아이가 感氣에 걸리거나 내가 머리가 아프면 電話를 하거나 찾아갔다. 그럼 집에서 할 수 있는 온갖 治療法을 가르쳐줬고, 때로는 簡單한 韓方藥을 지어 주기도 했다. 한마디로 믿음직한 우리집 主治醫였다. 돈은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어느덧 歲月이 흘러 그이는 結婚을 해서 아이가 둘, 모두 自然分娩으로 낳았다. 첫아이 別(5)이는 助産員에서 낳았지만 둘째 늘(2)이는 집에서 낳았다. 늘이 낳은 이야기는 여러 番 들었지만 들을 때마다 새롭다.

    “집에서 낳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큰애 낳고 나서 自身이 생겨서인가?”

    “집에서 낳는 게 좋다는 自信感 때문에 그렇게 한 건 아니에요. 如前히 두려움이 많았지요. 그런데 助産員에서 첫 애 낳을 때 너무 안 좋았던 거예요. 아기 낳는 거는 자연스러워야 하는 데 너무 힘들더라고. 팔에다 링거 꽂아놓고 힘을 주라는 거야. 팔에는 힘을 빼면서 힘을 주래. 그게 可能해요? 正말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라고요. 막상 늘이를 낳을 때가 되니 어디 가서 낳아야 하나?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갈 데가 없더라고. 그러다가 내가 잘 아는 언니가 집에서 낳을 수 있다, 可能하다고 確信을 주더라고요. 나도 첫애를 낳아본 經驗이 있고, 다른 집 아이를 받아본 經驗도 있잖아요. 그리고 周圍에 도와주겠다는 이웃도 여럿 있었어요. 나보다 먼저 집에서 아기를 낳은 輕微(36)氏가 도와준다고 해 마음을 定한 거예요.”

    나는 ‘아이를 낳는다’는 말보다 ‘아이가 나온다’는 말을 더 좋아한다. 낳다와 나온다의 差異는 크다고 믿는다. ‘낳다’는 産母가 中心이 된다. ‘나온다’는 아기가 中心이다. 男子로서 아기를 낳아 보지는 않았지만 왠지 아기가 먼저 움직일 것 같다.

    産婆 할아버지가 되고 싶다

    “아이가 나오는 瞬間을 얘기해 줄 수 있어요?”

    “아침 9時부터 배 아픈 게 심해지더라고. 輕微氏를 불렀어. 痛症은 있었지만 걸어다닐 만하더라고. 그러다가 아 이제 나오려고 하는구나,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도 繼續 왔다갔다 걸었지. 弄談도 하고 까불대면서. 10時쯤 됐나. 아픔이 심해지더라고. 아이고, 하느님! 저절로 엎드리며 祈禱가 나와요. 몸이 막 그렇게 움직여요. 두어 次例 그렇게 아픔이 밀려오더니 이番엔 뭔가 밀려나오는 느낌인데. 正말 아기가 나올 것 같은 느낌이에요. 이제 힘을 줘야겠구나. 輕微氏에게 肛門 좀 눌러달라고. 그래야 힘을 제대로 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엎드려서 아기를 낳았는데 몸이 그렇게 만들더라고요. 呼吸도 그래요. 陣痛이 오면 저절로 ‘내쉬는 呼吸’을 크게 하게 돼요. 그러다가 輕微氏가 ‘아기 머리가 보여’ 그래요. 그럼 힘을 살살 주게 돼요. 몇 時間 苦生할 줄 알았는데 今方 낳았어요. 낳겠다 마음먹고서는 10分 남짓, 서너 番 陣痛하고는 낳았어요. 아기 낳을 때 오르가슴을 이야기하는데, 내 느낌은 眞짜 마려운 똥을 한番에 氣分 좋게 눌 때 드는 느낌이었어요.”

    “길수(男便)氏는?”

    “아기 낳기 5分 前에 왔더라고. 너무너무 기뻤어요.”

    “胎줄을 누가 끊었어요?”

    “길수氏가 했지요. 그이가 要領을 잘 모르니까. 내가 시켰어요. 힘은 없었지만 내 精神이 너무 말짱하더라고요. 가위 가져오라 하고, 胎줄을 자르고 실로 묶고.”

    “別異도 함께 있었다고? 아이가 그런 經驗을 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처음에는 별이 보고 나가 있으라고 했죠. 나도 어찌될지 모르니까. 不安해 소리를 지르면 아이가 놀랄까봐. 그런데 輕微氏가 괜찮다고…. 할 수 없이 같이 있었어요. 그런데 아이가 하나도 놀라지 않고 泰然한 거예요. 내가 陣痛이 와서 숨을 크게 내쉬고 들이쉬면 아이가 나를 그대로 따라 하는 거예요. 두고두고 그때 이야기를 해요.”

    “別異가 엄마 따라 呼吸하는 게 눈에 그려지네요. 그런데 當時 別異가 어렸잖아? 그걸 記憶한단 말이에요?”

    “그때 別異가 30個月쯤 되었을 텐데. 아이한테 直接 물어보세요.”

    둘러앉은 사람들 눈길이 모두 別異에게 向한다.

    ‘형님’ ‘아우님’…술과 품 나누는 부처 같은 산골 이웃

    담틀집 지붕 위에 흙을 올리고 다지다가 쉬는 모습. 쉬지도 않고 繼續 일하는 이가 집主人인 권영덕.지붕 위 네 사람이 바라보는 視線이 다 다르다. 寫眞을 찍는 나는 영덕이를 올려다본다.

    “별아, 엄마가 아기 낳을 때 생각 나?”

    “응, 그때 나 있었는데. (엄마) 옆에 있었어.”

    “그랬구나. 아기가 어떻게 나오든?”

    “엉덩이로 죽 나왔어.”

    별이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다음에 別異는 自己가 낳을 아기를 손수 잘 받아낼 것 같다. 나 亦是 몸 工夫가 좀더 된다면 언젠가는 ‘産婆 할아버지’가 되어보고 싶다.

    내게 또 다른 이웃은 옆 마을에 사는 권영덕(47)·오금숙(42) 夫婦. 이 夫婦는 나를 兄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이들을 親舊로 對한다. 그러니 말할 때도 씨字를 붙이지 않고 그냥 이름을 부른다. 영덕이는 술을 좋아한다. 금숙이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요 몇 年, 이 집 夫婦와 술을 자주 마셨다.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自給은 못해도 自足은 하고 삽니다”

    이들 夫婦가 해준 이야기 가운데 오래도록 記憶에 남는 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自給은 못해도 自足하고 산다.” 또 하나는 품앗이에 對한 그이들의 생각이다. 시골로 내려온 사람들 가운데 自給自足을 目標로 삼는 사람이 많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다. 무엇이 自給인가. 먹을거리, 돈, 子女敎育, 文化와 藝術, 靈性…. 그것을 具體化할수록 自給이 갖는 깊이는 끝이 없다. 그런 내게 이 夫婦가 던진 한마디는 福音이었다. 自足을 하자면 自給이 돼야 한다는 當爲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 다음은 품앗이 이야기. 傳統的인 農耕文化는 품앗이가 重要했다. 機械化가 되기 前에는 農事일을 大部分 사람 힘으로 했다. 혼자서는 堪當하기 힘든 일이 많았고, 여럿이 우르르 하면 일이 빠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품앗이가 發達했다.

    영덕이는 只今은 품앗이가 맞지 않다고 熱辯을 吐한 적이 있다. 품앗이에 ‘앗다’는 ‘빼앗거나 가로채다’이다. 일을 잘하는 사람이 아무래도 품을 잘 가로챈다. 反對로 일이 서투른 사람은 이웃 눈치를 많이 보게 된다. 일을 잘 못하는 사람이 품앗이를 하려면 ‘죽어라’ 일해야 한다. 허리가 빨리 휘고 몸이 쉽게 망가진다.

    平生 힘쓰는 일을 해온 農事꾼도 품앗이가 힘든데, 都市 살다 내려온 우리에게 품앗이란 말 自體가 어울리지 않는다. 歸農 初期에는 이웃 몇 家庭과 품앗이로 모내기와 打作을 해본 적이 있다. 막상 해보니 偏差가 너무 甚했다. 한番도 모를 심어본 적이 없어 곤粥이 된 논에서 발을 옮기는 것조차 제대로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다 中心을 잃고 논에 넘어져, 일은 고사하고 일거리만 만들기도 했으니까.

    反面에 機械는 엄청나게 發達했다. 打作할 때 콤바인 한 臺가 數百 사람 몫을 손쉽게 해낸다. 그러니 영덕이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共感이 갈 수밖에.

    그럼 代案이 뭔가. ‘품나누기’라 한다. 품앗이가 經濟的인 契約關係를 重視한다면 品 나누기는 같이 일함으로써 얻어지는 肯定的인 效果를 살리자는 것이다. ‘죽어라’가 아니라 ‘기꺼이’ 하자다. 함께 일하면 재미도 있고 배우는 바도 많다. 일을 잘하는 사람은 品 나누기를 통해 베풂에 對한 成就感을 누릴 수도 있다.

    술로 自費 베푸는 ‘술 部處’

    그렇다면 品 나누기를 할 수 있는 與件은 무엇인가. 우리가 옛날보다 餘裕가 있어서인가.

    “글쎄. 世上을 사는 方式의 差異가 아닐까. 우리가 시골로 내려온 게 選擇이듯 (품앗이든 품나누기든) 그것도 하나의 選擇이라고 봐. 사람마다 넉넉한 게 다르잖아요? 이웃이 모내기 하루 해줬으니까 나도 똑같이 모내기로 갚는 게 아니잖아. 집 지을 때 도울 수도 있고. 살면서 이런저런 關係의 끈을 이어가는 거지. 이웃 도움을 받았지만 只今 當場 나눌 形便이 아니라면 두고두고 갚아가는 거고.”

    “그래도 가끔은 서운할 때가 있던데.”

    “勿論 없지야 않지. 사람 가슴을 자로 잴 수는 없는 거니까. 그러면서 사람마다 그릇의 크기라 할까 그런 게 드러나는 것 같아”

    이 夫婦는 우리집 지을 때도 품을 많이 내줬지만 그보다 더 큰 품은 술 품이 아닌가 싶다.

    ‘형님’ ‘아우님’…술과 품 나누는 부처 같은 산골 이웃

    우리 사는 山골 마을은 아이가 많다. 어른들이 모이는 자리라면 아이들도 따라 모인다. 어른들 要請에 따라 아이들이 卽席에서 펼치는 公演 한판.

    詩人 趙芝薰은 主導에도 段이 있다며 主導油單론(酒道有段論)이라 하고 18段階로 나눈 적이 있다. 불週(不酒)에서부터 涅槃酒(涅槃酒)까지. 그런데 내 親舊 영덕이는 그 가운데 어느 段階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붙인 이름은 ‘술 部處’다. 술로 이웃을 慰勞하고 술로 慈悲를 베푼다. 괴롭거나, 외로울 때, 화날 때 가리지 않고 같이 마셔주었다. 비 올 때, 눈 올 때를 가리지 않았고, 일하고 있는데도 찾아가면 손을 털고 술床을 내왔다. 술을 마시다가 밤이 늦어도 싫은 내色 한番 한 적이 없다.

    며칠 前 이웃이랑 크게 부딪친 事件이 있었다. 우리 논에 넣어둔 새끼 오리들이 자주 없어졌다. 그러다가 現場을 잡았다. 오리를 막 덮치려고 입을 크게 벌리는 개를 보았다. 일하다 말고 개를 뒤쫓았다. 돌멩이를 손에 쥐고 헐레벌떡 따라갔다.

    漸漸 개와 距離가 멀어졌다. 있는 힘껏 돌멩이를 던지다가 中心을 잃고 넘어졌다. 더 熱 받는다. 個가 간 方向을 따라 繼續 갔다. 누구네 개인지 대충 感이 잡힌다. 그집 들머리에 가니 主人이 있다. 아니나다를까. 좀 前의 그 개가 主人 가까이에서 가쁜 숨을 몰아쉰다. 나 亦是 숨결이 가빠지면서 대뜸 是非를 걸었다. 개 主人이 未安하다고 한다. 다음부터 꼭 묶어놓겠다고. 그래도 火가 안 풀렸다. 예전에 쌓인 感情까지 쏟아져 나왔다. 그러자 싸움이 됐다.

    “우리 人生 한밤中 뱃놀이만 같구나”

    한바탕 거칠게 말싸움을 하고 돌아오는데 발 느낌이 異常했다. 발을 보니 좀 前에 넘어지며 다친 곳에 피가 엉겨 있었다. 온몸이 땀에 젖었고 마음은 무거웠다. 집에 와 傷處난 곳을 물로 씻었다. 消毒하고 軟膏를 바르고 밴드를 붙였다. 좀 前에 싸운 이야기를 아내에게 하려고 했더니 아내는 自己 일에 熱中하느라 들을 姿勢가 아니었다. 혼자 씩씩대다가 김매러 갔다. 어두워지도록 마음工夫를 하며 김을 맸다. 외로웠다. 아내에게도 말을 못했더니 더 외로웠다. 갑자기 영덕이 생각이 났다.

    일을 整理하고 영덕이네로 갔다. 잘 왔단다. 술이나 한盞 하자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고마움에 영덕이 귀에다가 내 외로움을 쏟아부었다. 영덕이는 말이 없다. 땅거미가 짙게 깔리는 저녁. 불도 켜지 않고 마당에서 앞山을 바라보며 그냥 술을 마시고 내게 술을 따르며 듣고만 있다. 묻지도 않는다. 한참을 興奮하면서 내 가슴속 이야기를 했더니 후련했다.

    쏙독새가 뒷山 등성이 어디선가 빠르고 낮게 울었다. 똑 똑 똑…. 밤은 漸漸 깊어가고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어졌다. 술도 당기지 않았다. 갑자기 허전함이 밀려왔다. 오리 몇 마리 없어졌다고 속상할 거 있나. 農事 좀 못 짓는다고 世上이 무너지는 거 아니잖아. 잊어버리자. ‘쪼잔한’ 내 모습이 보였다. 盈德이네 올 때의 외로움은 이제 서러움으로 바뀌었다.

    노래를 불렀다. 속상한 내 이야기를 들어만 주더니 서러운 내 感情에는 영덕이가 장단을 맞춘다. 내가 한 곡하면 영덕이度 한 曲. 그러다가 우리는 노래를 함께 불렀다.

    “검은 山만 떠가네, 검은 물에 떠가네, 우리네 人生 한밤中에 뱃놀이만 같았구나.”



    뱃속에 남아 있던 쓰라림을 뽑아내고자 목청껏 불렀다. 아랫배를 거쳐 목으로 올라오다가 목구멍에서 울림으로, 다시 입안에서 떨림이 된다. 서로 눈빛을 마주 보며 “兄님 아우님 어디 갔소? 고운님度 어디 갔소?” 먼 山 虛空을 向해 입에서 나온 소리를 흩뿌렸다.

    외로움은 영덕이가 달래줬지만 서러움은 쉽게 달래지지 않았다. 山이 되고 싶고 어둠이 되고 싶었다. 내 呼吸 따라 내 몸에서 나온 소리라도 山이 되고 어둠이 되라고 목놓아 불렀다. 數千年, 이 땅의 서러움을 말없이 받아준 山은 또 다른 내 이웃으로 나를 감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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