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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歸鄕|新東亞

특별한 歸鄕

  • 入力 2006-08-11 11: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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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하기
    • 1958年 慶南 蔚山 出生
    • 부산대 哲學과 卒業, 同 大學院 修了
    • 1989年 '創作과 批評' 통해 登壇
    • 小說: '살이있는 무덤' '銀杏나무 사랑' '날지 않는 청둥오리'
    • 임수경統一文學賞 受賞
    “아빠, 누구 만나러 서울에 가?” “할아버지를 만나러 간단다.”

    “우리 할아버지는 서울에 없잖아.”

    말없이 부산역에서 서울行 列車를 타고 떠난 旅行에 여섯 살 짜리 둘째 놈은 궁금한 게 많았다. 그러나 아홉 살 짜리 딸은 雰圍氣를 살피고 입을 다물고 있다. 우리 家族은 列車 안에서 椅子를 돌려 서로 마주 보며 369게임과 끝말잇기를 하고 오징어와 김밥도 먹으면서 즐거운 汽車旅行을 했다. 大邱쯤 지나자 놀이도 시들해져 各各 自己 일로 돌아갔다. 아내는 스킬 自首를 하고 딸애는 童話冊을 읽고 아들 녀석은 이 車輛 저 車輛으로 나돌아다니고 나는 비가 내리는 바깥 風景을 바라보았다.

    비에 젖은 山野가 뒤로 빠르게 흘러가고 汽車는 北行을 繼續했다. 이제 곧 京義線이 이어진다니 이대로 鐵의 실크로드를 타고 서울과 平壤을 거쳐 中國과 러시아, 유럽으로 갈 수 있는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大戰쯤 지나니 긴 旅行에 無聊해진 아들과 딸이 椅子 사이의 境界線을 두고 서로 다투고 있었다.

    ‘扞率이 너, 요 線을 넘어 오면 안돼.’



    ‘누나도 요 線을 넘어 오면 絶對 안돼.’

    난 그제야 只今 만나러 가는 사람이 最下種氏라는 걸 다시 한 番 뚜렷하게 떠올렸다. 故鄕이 北쪽인 崔氏는 넘지 않아야 될 休戰線을 넘어와 南韓에서 單 하룻밤 잔 罪로 萬 36年하고 一週日을 監獄에서 살고 來日이면 北으로 넘어가는 非轉向 長期囚다. 난 그를 1982年 全州矯導所 特別舍棟에서 만났다. 그때 난 運動圈 出身의 大學校 3學年 除籍生이었고 그는 無期囚였다.

    80年代 初 모스크바 使動이라던 全州矯導所 特別舍棟 4社는 참 殺伐했다. 난 그 當時의 雰圍氣를 小說 ‘살아있는 무덤’에서 다음과 같이 스케치했다.

    非轉向 政治犯 長期囚를 收容하는 特別사동은 15尺 周壁과 두 길 남짓 되는 間壁으로 에둘러 包圍된 채 唯一한 바깥 窓口인 便所 뒤窓마저 나무板子로 봉해져 한 오라기 불빛조차 빠져나가지 못했다. 特舍 內部는 完全히 密封된 古代의 地下王陵을 연상시켰다. 길고 陰散한 複道는 左右의 數十 個의 閉鎖獨房을 玄室(玄室)처럼 거느리고 있었다.

    獨房 안에는 30∼40年의 受刑 生活에 들피지고 깡마른 數十 名의 非轉向 思想犯들이 무덤 속의 土俑처럼 歲月마저 잊은 채 꼿꼿하게 坐定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崔氏와 非轉向 長期囚들을 만난 첫 느낌은 奇異하다는 것이었다. 왜 轉向을 하지 않고 棺짝과 같은 0.75坪 獨房에서 服役하고 있는 것일까. 소나 말도 한 달만 갇혀 있으면 牛黃이 들기 始作한다는 그곳이다. 게다가 때때로 人間 忍耐力의 限界를 試驗하는 轉向테러工作이 加해지던 地獄 같은 그곳의 삶을 그들은 왜 미련스레 固執하고 있는 것일까? 地獄 같은 監獄을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나의 머리로는 到底히 理解할 수 없었다.

    그들 中 崔氏는 누구보다도 明敏했다. 日帝時代 神經제일중학교 하얼빈工大를 나왔고 光復 後에는 平壤에서 金策工大를 나와 고스플란(國家計劃委員會) 貿易企劃局 輸出企劃部長으로 勤務한 그는 工作員이라기보다 實務型 테크노크라트였던 것이다.

    그러면 그는 오로지 이데올로기와 思想만을 最高로 여기는 理念의 化身이었을까? 내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는 英文版 처칠回顧錄 6卷을 英語로 읽고 暗記하고 있었는데 世界의 政治 經濟 軍事 文化 歷史 等 多方面에 對한 놀랍도록 該博한 知識과 識見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官에서 보여주는 映畫 ‘기러기 아빠’나 ‘미워도 다시 한 番’을 보고는 엉엉 울었다. 아마도 北에 두고온 處子가 생각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故鄕과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이를 한 試圖 잊지 못하고 있었다.

    “내 故鄕은 咸鏡北道 城津郡 학동면 용포동이요. 마루에서 보면 푸른 바다가 보였지요. 故鄕 바다는 춤추는 물이라 해서 이름이 無水彈(舞水灘)이었어요. 無水彈 위로 해와 달이 차르르 자르르 뜨는 光景이 아직도 눈에 三三下午. 白沙場 모래는 또 얼마나 맑은지, 하루 終日 뒹굴어도 옷에 먼지 하나 묻지 않던 곳이라오.”

    平壤에서의 結婚 生活도 幸福했다. 아내는 김일성대 經濟學部를 나와 같은 職場에 勤務하고 있었고 둘 사이에 2男 1女를 두어 남부러울 게 없는 家庭이었다.

    “나이 서른 여섯 한창 재미있을 때였소. 夫婦間에 낮에 門 걸어 놓고 뽀뽀한 적도 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느닷없이 黨으로부터 召喚이 있었다.

    “傀儡軍 所長인 當身 叔父가 5·16 軍士 쿠데타에 加擔해서 主體勢力이 되었는데 南으로 내려가서 叔父에게 統一事業에 關해 얘기해볼 수 있겠는가?”

    그의 叔父는 만주군관학교 出身으로 北韓 政權에서 懲役을 살고 徹底한 反共鬪士가 되어 越南한 사람이다. 어떻게 說得을 바라겠는가. 하지만 冷戰時代 國家間에 벌어지는 이런 일에 애當初 個人의 自由意志란 끼여들 餘地가 없는 것이다.

    崔氏는 南派되었으나 하루만에 叔父의 손에 依해 防諜隊로 넘어간다. 巨大한 分斷의 틈바구니에서 叔姪間에 벌어진 悲劇이었다. 그리고 叔父는 조카를 防諜隊에 넘겨줘 無期囚로 만들었다는 一抹의 罪意識(?)으로 조카의 轉向工作에 專念한다. 叔父는 轉役해 當時 住宅公社 社長으로 있으면서 崔氏를 호텔로 불러내 轉向을 懇曲하게 付託한다.

    “널 집어넣고 내가 발뻗고 잠을 잔 적이 없다. 널 밖에 내놔야 北에 있는 兄님 볼 面目이 있어, 이놈아.”

    叔母는 옛날 그의 初等學校 女子 同窓生까지 데려와 새 살림을 차리고 알콩달콩 살라고 勸誘한다. 그러나 崔氏는 끝내 轉向을 拒否한다.

    89年度 發表된 나의 小說 ‘살아있는 무덤’에 남아 있는 그의 肉聲을 들어보자.

    “叔母님, 제가 轉向하지 않는 理由는 叔父님에 對한 사사로운 感情 때문이 아닙니다. 前 信念을 抛棄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統一이 되면 뜨거운 가슴으로 안아야 할 사랑하는 妻子息이 以北에 있습니다. 그들을 한時라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한 點 부끄럼 없이 만날 그 날을 위해 저 自身을 모든 面에서 純潔하게 지켜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6·15 南北頂上會談으로 뜻밖에도 崔氏에게 歸鄕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우리 家族은 서울에 到着하여 그가 살고 있는 落星垈의 집으로 갔다. 人事를 하고 來日이면 平壤으로 떠나는 感懷를 물으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꿈만 같아요. 來日이면 平壤에서 마누라와 子息들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正말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난 36年間이나 監禁한 南韓政府에 對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計算을 해보니 내 나이 滿 일흔 둘인데 監獄 밖에서 36年 살았고 監獄 안에서 36年 살았소. 왜 悔恨이 없겠소. 하지만 다 分斷 때문에 생긴 일 아니오. 난 只今 當場 統一은 바라지 않소. 그러나 여기까지 온 것을 絶對 후퇴시켜서는 안되오.”

    崔氏는 褓따리를 싸면서 말했다.

    “난 北의 아내와 子息들을 만나면 뭘 잘했다고 떠드는 것보다 먼저 容恕부터 求하려고 해요. 36年 동안 한 아내의 지아비로서, 子息들의 아버지로서 할 일을 다 하지 못해 正말 未安하다고.”

    어느덧 그의 눈에 이슬이 맺힌다. 그는 내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음 世代에는 나와 같은 이런 悲劇이 나오지 말고 統一이 되어야 할 텐데”라고 말했다.

    비는 繼續 내리고 있었다. 우리 家族이 落星垈 驛 階段으로 내려가 通路로 꺾어 들어갈 때까지 그는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들 한솔이는 崔氏에게 손을 흔들며 말한다.

    “할아버지, 다음에 또 만나요.”

    果然 天眞爛漫한 아이의 말대로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는지. 그의 특별한 歸鄕이 分斷으로 인해 南北으로 흩어진 모든 離散家族의 歸鄕과 平和統一로 이어지길 바라며 우리는 南行列車를 탔다. 비는 아직도 그치지 않고 車窓을 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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