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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연의 사람in] 從軍記者 꿈꾸던 小兒응급의 出身 改革新黨 이주영 議員|新東亞

[정혜연의 사람in] 從軍記者 꿈꾸던 小兒응급의 出身 改革新黨 이주영 議員

“地域經濟·敎育 살려야 그 힘으로 ‘地域醫療’가 뿌리내려요”

  • reporterImage

    정혜연 記者

    grape06@donga.com

    入力 2024-05-25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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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師와 國會議員, 業의 性格 닮아 있어

    • 醫療 現場 이야기 傳하지 않는 건 無責任한 일

    • 改革新黨에 對한 믿음·愛情, 漸漸 깊어져

    • 李俊錫은 ‘合理的 알고리즘’ 裝着한 政治人

    • 從軍記者 꿈꾸던 模範生, 父母 勸誘로 醫大 進學

    • 葡萄송이 같은 발가락에 反해 小兒靑少年科 行

    • 小兒科 抛棄 내몰린 現實에 懷疑感 느껴

    • 各界 專門家 國會에 많이 들어오는 게 眞正 國民 위한 길

    [映像] 이주영 改革新黨 國會議員 議員



    꿈이 뭐냐는 물음에 恒常 ‘記者’라고 答했다. 初等學生 때 TV 속 걸프戰을 取材하는 記者를 보며 從軍記者를 꿈꿨다. 冊 읽는 걸 좋아하고, 映畫와 音樂 雜誌도 種類別로 사 볼 程度로 世上을 알아가는 일이라면 흠뻑 빠졌다. 뼛속까지 文科라 믿었던 딸에게 아버지는 슬그머니 醫大 入學 願書를 내밀었다. 다니던 外高에 女子 同級生 大部分이 醫大에 支援하던 雰圍氣도 한몫했다. 그렇게 從軍記者를 꿈꾸던 그는 뜻하지 않게 醫大에 進學했다.

    專攻을 定할 무렵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小兒應急室 인턴 時節, 아이의 발을 잡고 있다가 매끈하고 통통한, 갓 달린 葡萄송이처럼 동그란 발가락에 반했다. 첫째를 낳고 엄마가 됐고, 둘째를 낳던 해 小兒靑少年科 專門醫가 됐다. 셋째를 낳은 뒤부터 小兒應急室 醫師로 일했다. 小兒應急室은 生死苦樂이 共存하는 舞臺였다. 每日 여러 아이와 父母의 劇的인 瞬間을 目睹했다. 어떤 날은 기쁨과 安堵가 交叉했고, 어떤 날엔 답답해 鬱火통이 치밀기도 했다. 고된 日常에도 아이들을 治療한다는 보람에 그의 삶은 햇살 좋은 낮처럼 내내 환했다.

     개혁신당 비례 1번으로 22대 총선에 당선, 초선의원으로서 4년간 의정 활동을 펼칠 예정인 이주영 의원은 “의료 현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 의정 갈등이 봉합되는 데 역할 하겠다”고 말했다. [지호영 기자]

    改革新黨 比例 1番으로 22代 總選에 當選, 初選議員으로서 4年間 議政 活動을 펼칠 豫定인 이주영 議員은 “醫療 現場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 議政 葛藤이 봉합되는 데 役割 하겠다”고 말했다. [지호영 記者]

    比例 1番의 무게

    天職이라 여기며 다니던 일터를 저버리는 건, 애初 그의 計劃에 없었다. 날이 갈수록 醫療 現場이 모래城처럼 무너지고, 保護者의 不信과 訴訟이 日常이 되던 때에도 그는 끝까지 버텼다. 비슷한 또래 아이를 키우는, 비슷한 나이帶 同僚들은 서로가 小兒應急室 射手의 沮止線이 돼줬다. 2023年 3月 小兒靑少年科 閉果 宣言이 나올 때도 現場을 지켰다. 10年 勤務 經歷을 뒤로하고 올해 2月, 그가 結局 醫師 가운을 벗은 건 依支했던 同僚들이 하나둘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 各自의 事情과 삶이 있었기에 누구도 서로를 탓하지 않았다. 그저 人生에서 하나의 챕터가 끝났을 뿐이었다.

    正確히 석 달 뒤, 그는 國會議員에 當選했다. 이番에도 ‘되겠다’는 剛한 意志보다는 周邊 勸誘가 먼저였다. “當身 같은 사람이 必要하다”는 말에 마음이 動했다. 22代 國會 開院을 앞둔 改革新黨 이주영(42) 議員의 이야기다.



    李 議員은 1982年 大邱에서 태어나 동국대 醫大를 卒業하고 서울아산병원에서 修鍊, 小兒靑少年科 專攻醫를 거쳐 小兒應急醫學 細部專攻의로 일했다. 順天鄕大 天安病院 小兒專門應急센터 敎授로 10年間 勤務하다가 2月 退社 後 改革新黨에 入黨, 3月 20日 比例代表 1番에 이름 올렸다. 比例代表 2番에 配定된 천하람 候補와 함께 共同總括選對委員長 職責을 맡아 選擧運動 내내 발로 뛰었다.

    總選을 치르고 한 달 뒤 이 議員을 서울 忠正路 동아일보 社屋에서 만났다. 어떻게 지내냐는 質問에 “아직 일이 바쁜 건 아니지만 完全히 새로운 일을 배우는 過程이라 精神이 없다. 아이들은 ‘엄마가 每日 집에서 잠을 자는 건 좋은데, 아침마다 나가는 건 싫다’고 한다. 應急室은 黨職制라 24時間 勤務하면 오프 때는 하루 終日 집에 있으니 아직 適應을 못 하는 것 같다”며 빙긋 웃었다.

    李 議員이 出馬 當時 注目을 받은 건 醫師 出身이라는 履歷에 앞서 所屬 政黨 때문이었다. 李俊錫 代表가 國民의힘을 나와 獨自的으로 세운 改革新黨의 比例代表 1番. 結果的으로 李俊錫·천하람 議員과 함께 國會 入城하게 되는 成績表를 받았지만, 그는 “우리 黨에서 한 名만 國會에 들어가야 한다면 그건 李俊錫, 두 名이라면 천하람까지라고 생각했다. 셋 다 當選되던 瞬間 ‘이 黨은 이제 살겠구나’ 싶었다”며 그날을 回想했다.

    當選되리란 豫測은 일찌감치 하지 않았나요.

    “周邊에서 比例 1番은 3% 넘으면 될 거라고 했어요. 當選 可能性만 보면 제가 第一 높았죠. 事實 제 當選 與否는 저에게 重要한 問題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1番인 내가 안 되면 아무도 안 되는 거구나. 나는 꼭 돼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 瞬間부터 選擧運動을 對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졌죠. 두 番째로 當選 可能性이 높은 사람은 천하람 候補였어요. 李俊錫 代表의 當選은 아무도 自信할 수 없던 狀況이었죠. 開票 當日 李俊錫 代表 當選 確定 消息이 떴을 때 눈물이 날 뻔했어요. 빗속에서 뛰고, 100個 團地를 다 뛰어다니고…. 選擧運動을 어떤 마음으로 했는지 옆에서 봤으니까요. 李 代表 當落에 따라 改革新黨에 힘이 걸리는 程度는 天地 差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 當選보다 이 代表 當選 消息이 더욱 기뻤습니다.”

    不過 석 달 前까지 醫師였다가 國會議員으로 移職하게 됐어요. 業의 性格이 完全히 다른데, 政治에 발을 들여 보니 어떤가요.

    “完全히 다른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病院도 비슷했어요. 어떤 일이 주어지면 스스로 빨리 배워서 結果를 내야 했죠. 모든 患者의 케이스가 다르니까 늘 새로운 視角과 接近이 必要했어요. 政治도 마찬가지로 積極的으로 배우고, 周邊에 도움을 求하고, 함께 해나간다는 點에서 닮아 있어요. 다만 醫師는 처음엔 同僚 醫師, 看護師와 患者 狀態를 共有하고 마지막에 主治醫가 홀로 決定하고 責任을 져야 해요. 反面 政治는 個人으로부터 發火된 생각을 擴張하고, 說得을 통해 周邊 同意를 얻고, 마지막에 일을 推進할 때는 많은 이의 마음이 모인 狀態여야만 可能하죠. 그런 點에서 反對되는 性格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아직 그런 過程을 많이 經驗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 議員, 先輩 政治人을 통해 배우며 民意를 잘 反映해 보고자 합니다.”

    李俊錫과 올바른 알고리즘, 그리고 方向性

    李 議員은 出馬하기까지 苦悶이 깊었다. 그가 쓴 칼럼과 지난해 11月 出刊한 冊 ‘우리는 다시 먼바다로 나갈 수 있을까’를 接한 여러 政黨에서 迎入 提議가 있었다. 一言之下에 拒絶만 하던 그의 마음을 움직인 건 醫師 出身인 박인숙 前 議員이 말이었다. 小兒心臟學 部門에서 國內 1位로 꼽혔던 그는 19·20代 國會議員을 지냈다.

    박인숙 前 議員의 어떤 助言에 出馬를 決心하게 됐나요.

    “小兒 醫療에서는 偉大한 롤모델이죠. 오래前부터 尊敬하던 분이고, 子女도 저처럼 세 名이어서 同質感을 느꼈고요. 제가 苦悶을 말하니 敎授님께서 ‘醫療 現場의 이야기를 그대로 말할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니.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도 醫師로서 責任을 지지 않는 것’이라는 趣旨로 助言해 주셨죠. 當時 저는 計劃 없는 채로 病院을 그만둔 狀態였어요. ‘더는 小兒醫療를 할 수 없겠구나’ 하는 挫折感, 저의 20年이 모두 사라진 것 같은 感情에 빠져 있었고요. 그런 狀況에서 敎授님 말씀이 ‘이 일은 해야 하는 일이야’라고 들렸어요. 國會議員이 되겠다는 欲心으로 入黨한 건 아니에요. 政黨의 一員으로서 現時點의 問題에 對해 목소리를 내고, 方向性에 對해 이야기 하고자 始作한 겁니다.”

    여러 곳에서 迎入 提議를 받았는데 왜 改革新黨이었나요.

    “敎授님 面談 以後 뉴스 檢索을 하면서 政治 懸案과 政黨에 對해 찾아봤어요. 李俊錫 代表의 創黨 過程, 改革新黨이 하고자 하는 바가 눈에 들어왔어요. ‘萬若에 政治가 내 人生에 들어온다면 여기가 맞겠다’는 생각이 들어 入黨했죠. 政治에 對한 偏見이 選擧運動 期間에 地域區를 돌며 支持者들을 만나면서, 여러 旣成 議員님 이야기를 들으며 많이 바뀌었어요. 저희가 참 劣惡한 環境이었거든요. 그런데도 指導部와 黨員들이 어떻게든 해보려는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들 全部 眞心이구나. 적어도 누가 돼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을 다잡게 됐어요. 選擧 끝나고 改革新黨에 던져진 100萬 票라는 數字를 보면서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시금 느꼈고요. 男便도 醫師인데 우리가 病院에만 있으면서 알지 못했던 世界에 對해 이야기하며 ‘이 黨이 제대로 나아간다면 우리나라 政治의 未來가 새로운 場을 맞이할 수 있겠다’ ‘아이들에게도 政治에 對해 제대로 가르쳐야겠다’고 했죠. 改革新黨에 對한 愛情은 漸漸 깊어지고 있어요.”

    李俊錫 代表에 對한 評價가 紛紛한데, 곁에서 지켜본 李 代表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直接 만나기 前에는 才氣潑剌하고 外向的인 줄로만 알았어요. 가까이서 보니 혼자 생각에 잠길 때가 많고, 머릿속에 알고리즘이, 플로 차트가 돌아가는 게 보이는 듯했어요. 어떤 計算이 介入되지 않고, ‘이건 이렇게 하는 게 맞는데?’ 이런 種類의 알고리즘이 돌아가는 느낌이었죠. 알고리즘은 誤謬修正의 可能性이 重要한데 ‘아니오’라고 했을 때 언제든 화살標를 꺾어 修正할 수 있는 좋은 順序圖를 裝着한 사람이구나 싶었고요. 일도 두세 가지를 同時에 바쁘게 하는데 方向性이 있고, 그렇기에 다른 黨에 對해서도 脈絡 없이 非難하지 않더라고요. 醫師 出身으로서 ‘曖昧한 政治 哲學보다는 올바른 알고리즘과 方向性이 훨씬 重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李俊錫 代表에게 漸漸 더 確信과 信賴를 보내고 있어요.”

    4월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개혁신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서 이주영 의원(왼쪽)이 이준석 대표, 천하람 의원과 함께 꽃다발을 들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뉴시스]

    4月 11日 서울 汝矣島 國會에서 열린 改革新黨 中央選擧對策委員會 解團式에서 이주영 議員(왼쪽)李 李俊錫 代表, 천하람 議員과 함께 꽃다발을 들고 記念 撮影을 하고 있다. [뉴시스]

    使命感 넘치던 小兒靑少年科 마니아

    始終一貫 차분한 態度로 條理 있게 對答하는 모습이 國會議員이라기보다는 患者 狀態의 經過를 傳하는 大學病院 敎授에 더 가까웠다. 말의 水位도 大槪의 政治人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데 反해, 그는 自身의 말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가닿을까를 苦心하며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는 듯했다. 꼿꼿하게 편 허리와 속까지 뚫어보듯 빤히 들여다보는 눈, 흐트러짐 없는 옷매무새가 어떤 一生을 살아왔을지 斟酌게 했다.

    어린 時節 模範生이었을 듯합니다. 全校 1等을 놓치지 않는 秀才였을 것 같기도 하고요.

    “外高를 나와서 그 程度로 成績이 좋지는 않았어요. 전 事實 雜多한 것에 關心이 많은 學生이었어요. 冊 읽기를 좋아했고, 映畫와 音樂 雜誌는 種類別로 다 사 봤고, 피아노도 오래 쳤어요. 좋아하는 映畫도 高1 때까지는 週末이면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 보고요. 내가 모르는 世上을 보는 걸 좋아했어요. 旅行을 많이 다니고 싶었는데 家庭形便上 그러진 못했고요. 그래서 더 冊과 映畫에 沒頭했고, 自然스레 作家나 監督, 記者를 憧憬하게 됐어요.”

    意外로 어릴 때 꿈이 醫師가 아니라 記者였다고요.

    “高3 때 醫師에 對해 眞摯하게 생각하기 前까지 제 꿈은 恒常 記者, 從軍記者였어요. 當時 걸프戰이 있던 時代였고, 從軍記者라는 職業이 相當히 意味 있게 다가왔죠. 以後로는 백지연·신은경 아나운서를 보며 앵커를 꿈꾸기도 하고, 法大를 나와 辯護士가 되는 건 어떨까 苦悶하기도 했고요. 恒常 文科였어요. 偶然히 아버지가 ‘辯護士가 되더라도 醫大를 나와 四時를 치면 競爭力이 있다’고 하셔서 願書를 쓰게 됐어요. 醫大가 6年인지도 모르고 들어갔어요. 醫學 工夫가 재미있다기보다 大學 生活이 즐겁다 보니 再修를 하려다 抛棄하고 쭉 工夫한 케이스예요. 저희 學番 雰圍氣가 좋았거든요. 좋은 親舊들, 先後輩들과 工夫하며 크게 苦悶하지 않고 살았어요. 醫師로서 使命感보다는 ‘Do no harm’이라고 ‘患者 몸에 나쁜 걸 하면 안 돼’라는 걸 늘 배웠던 記憶이에요.”

    2000年代 後半에 서울아산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한 後 小兒靑少年科 專門醫를 選擇했어요. 當時에 어떤 契機가 있었나요.

    “元來 外科를 志望했어요. 언제나 最善일 수 없지만 最善을 向해 가는 手術 過程이 멋있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오래 서 있으면 쓰러지는 迷走神經性失神이 있어서 參觀하다가 두 番 쓰러지는 바람에 抛棄했어요. 인턴 때 小兒應急室에서 아기 발을 잡고 있었는데 葡萄송이처럼 동그란 발가락이 너무 예쁘더라고요. 이걸 平生 보면 祝福이겠다 싶었죠. 첫 患者가 小兒癌患者, 처음 떠나보낸 患者도 中學生 白血病 患者였는데, 患者 한名 한名과의 關係에서 배워가는 것이 使命感이더라고요. 아무것도 아닌 나를 봐주는 保護者들의 눈을 보고, ‘우리 先生님’이라고 불러주는 아이들을 보며 使命感을 갖게 됐죠.”

    李 議員이 小兒靑少年科를 志望하던 2009年까지만 해도 只今의 小兒靑少年科를 보는 視角과는 差異가 있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이른바 ‘小兒靑少年科 마니아’가 있던 時節이었다. 그 亦是 小兒 患者들을 眞心으로 對하던 小兒靑少年科 마니아였고, 2013年 小兒應急室에서 일을 始作할 때만 해도 몸이 高될지언정 일은 正말 즐거웠다고 한다. 專攻醫들이 서로 가르치고 배우고, 患者·保護者·醫師가 서로 信賴하며 病魔와 싸워나가며 보람도 느꼈다. 그러나 公告하던 信賴 關係에 龜裂을 일으킨 事件이 2017年 12月 일어났다.

    “韓國 醫療界에 아주 象徵的인 梨大牧洞病院 新生兒 死亡事件 以後로 많은 것이 變했죠. 그 以後로 訴訟 自體를 많이 하는 雰圍氣가 됐어요. 訴訟이 많아진다는 건 民願은 10倍, 20倍 늘어난다는 뜻이에요. 大部分의 事案이 民願의 口實이 되고, 醫師들은 醫學的 判斷을 했는데도 經過가 안 좋으면 訴訟부터 걱정해야 했어요. 分明 10年 前에는 그런 두려움은 없었어요. 어려울 것 같아도 敎授들이 ‘한番 살려보자’ 하는 雰圍氣가 分明 있었거든요.

    그런데 只今은 外科系 手術하는 敎授들이 ‘나는 小兒 專攻 아니라서 못해’라고 물러서는, 恐怖스러운 雰圍氣가 커졌어요. 그렇다 보니 小兒靑少年科 專門醫들한테 일이 過하게 몰리고, 民願과 訴訟을 甘受하며 일하게 됐죠. 小兒의 境遇 期待餘命에 따른 期待所得까지 算定하니까 額數도 커요. 잘못이 없더라도 아이가 잘못되면 온라인 커뮤니티에 輿論이 否定的으로 造成됐고요. 結果的으로 小兒를 專攻한 분들이 스트레스를 堪當할 수 없을 程度로 안타까운 現實에 내몰린 거죠.”

    辭職書를 내기까지

    이주영 당시 총괄선대위원장이 선거를 사흘 앞둔 4월 7일 경기 화성을 거리 유세에서 이준석 대표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개혁신당]

    이주영 當時 總括選對委員長이 選擧를 사흘 앞둔 4月 7日 京畿 華城을 거리 遊說에서 李俊錫 代表를 支持하는 發言을 하고 있다. [改革新黨]

    10年 사이, 醫療 現場에는 患者와 醫師가 感情的으로 멀어지는 일이 늘었다. ‘이걸 錄音하고 있을 거야’ 하는 疑心, ‘이 醫師는 消極的이고 매정하구나’ 하는 不信이 싹트면서 醫師와 患者는 漸漸 乾燥한 서비스 提供者와 受惠者가 됐을 뿐이다. 李 議員은 “醫師가 最大限 勇敢하게,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으려면 患者와 醫師 間 信賴가 먼저”라며 只今의 醫療 現實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使命感으로 버텼는데, 結局 일을 그만두게 된 것도 그런 理由에서인가요.

    “다른 理由도 있었어요. 地域醫療로서 懷疑를 느끼는 일이 늘었거든요. 누가 봤어도 어려웠을 狀況이고, 그 以上 現代醫學으로 方法이 없는, 어느 病院에 갔어도 똑같은 프로토콜로 했을 狀況이라는 게 있거든요. 醫療陣의 그런 決定에 保護者분들이 대놓고 ‘地域病院이라서…’ 라는 말을 하거나, ‘그래도 서울로 갈래요’라고 하는 境遇가 時間이 갈수록 늘었죠. 서울로 가면 문전박대당할 가벼운 事案인데도 서울로 가겠다고 하니…. 事實 저는 서울아산병원에 있을 때나 天安 순천향병원에 있을 때나 똑같은 小兒靑少年科 醫師고, 오히려 只今 더 經驗이 많은 醫師인데 ‘地域病院 醫師라는 理由 하나만으로 充分히 信賴받지 못하는구나’ 싶어 懷疑가 컸어요. 事實 中部 全體를 통틀어 저희 病院 醫療陣이 끝까지 버티고 있었는데, 漸漸 法的 危險이 늘고 精神的으로 일하기 힘들어지면서 同僚들이 하나둘 辭職하고, 病院 一部가 門을 닫게 됐어요.”

    家族들은 醫師를 관둘 때에도, 國會議員을 하겠다고 했을 때도 支持해 주던가요.

    “男便에게 ‘辭職을 할 건데, 앞으로 다시 일할 計劃이 없어’라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苦悶했어요. 苦心 끝에 말하자 男便이 처음으로 ‘以前까지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 支持해 왔지만, 只今 狀況에서 當身이 萬一 監獄에 가면 우리 애들은 누가 봐. 이제 그만두고 安全한 일을 하면 좋겠어’라고 말하더라고요. 男便은 開業醫인데 제가 한番은 ‘當身은 이런 自愧感을 理解하기 어렵겠지…’라는 말을 했어요. 그때 ‘여보, 나도 醫師야. 當身이 醫師 取扱 못 받는 거 슬퍼’라고 하더라고요.

    出馬한다고 했을 때 男便은 勿論 兩家 父母님들도 ‘네가 充分히 생각했겠지’라고 하시며 熱心히 하라고 하셨어요. 다만 政治權이 아무래도 攻防이 벌어지니까 다칠까 봐 걱정하시긴 했어요. 男便은 只今도 言論으로 接하던 政治人들 사이에 제가 있고, 그間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니 힘들까 봐 걱정하죠. 아이들은 ‘엄마는 무슨 일을 하려고 國會議員이 된 거야?’라고 물어요. 그 質問이 저에게는 참 本質的 물음이 되더라고요. 앞으로 政治的 行步라는 것이 없을 수 없고, 모두에게 說明할 수 없는 決定을 내릴 때도 있겠죠. 적어도 家族들이 물어볼 때 對答할 수 있고, 그 對答에 家族이 부끄럽지 않도록 恒常 準備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醫大 增員 問題를 둘러싸고 大統領과 醫療人 團體의 葛藤이 석 달 넘게 이어졌다. 政府도, 醫師도 窮極的으로 地域醫療와 必須醫療를 지키고 살려야 한다는 데는 異見이 없다. 方法論을 두고 兩者 間 葛藤의 골이 깊어지는 形局이다.

    政府는 窮極的으로 必須醫療 强化를 目的으로 首都圈을 除外하고 公共醫療 死角地帶인 地方醫大 醫大生을 增員하기로 했는데, 政府의 方向性에 對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地域에서 누릴 수 있는 醫療를 擴充하고, 接近性이 떨어지는 脆弱階層 醫療 强化의 方向性은 맞아요. 다만 묻고 싶은 건 政府가 생각하는 ‘地域醫療’라는 것의 正義가 무엇인가 하는 거죠. 只今도 빅5病院으로 쏠림이 甚하고, 國立 據點 醫療病院 元老 敎授님들이 自愧感을 느끼는 狀況에서 地域의 醫大生을 늘린다고 해서 地域醫療의 信賴度가 높아질까요. 그게 可能했다면 地域經濟와 地域 敎育은 왜 못 살리나요? 地域經濟와 敎育을 살렸다면 地域醫療는 살리려는 努力 없이도 거기서 힘을 갖고 뿌리를 내렸을 거예요. 只今은 地域 人口가 消滅하고, 經濟가 힘을 잃고, 醫療뿐 아니라 地域 인프라를 地域民들이 信賴하지 못하는 狀況에서 醫大生만 늘리는 것이 答일까 疑問이 들어요.

    참 가슴 아팠던 말이 ‘落水效果’라는 말이에요. ‘醫大生 많이 뽑아놓으면 누군가 非人氣科에 가겠지, 實力 없는 누군가 가겠지’ 하는 생각과 함부로 뱉는 말들…. 그 말을 쓴 政府, 言論 모두 意圖가 나빴던 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地域病院의 小兒應急 醫師였던 저로서는 ‘내가 나를 證明하기 위해서라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는 거예요. 醫局 成績 1等인데도 小兒靑少年科에 온 後輩도 있어요. (記者가 놀라자) 보세요. 記者님度 놀라잖아요. 이미 모두가 ‘1等인데 왜 小兒科를?’ 하는 생각이 있으니 안 가는 거예요. 내가 力量이 있어도 非人氣科를 志望하고, 地域病院에 가는 瞬間 ‘淘汰된 醫師’ 取扱을 받는 게 現實이죠. 이런 雰圍氣가 蔓延한 狀況에서 地域 醫大生만 늘린다고 地域醫療가 살아나진 않을 거예요. 根本的 解決策 마련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가 끝나갈 때쯤 이 議員에게서 辱을 먹을지언정 해야 할 이야기는 하겠다는 결氣 같은 것이 엿보였다. 2024年을 사는 大韓民國 國民이 苦悶하는 바와 國家가 나아가야 할 方向에 對해 끊임없이 苦悶하는 初選 議員의 熱情도 느껴졌다. 22代 國會에서 이주영 議員의 쓰임이 적지 않을 걸로 보인다.

    眞情으로 庶民 위한 길

    이주영 의원. [지호영 기자]

    이주영 議員. [지호영 記者]

    一般 사람들은 ‘醫師 出身 國會議員이 國民, 特히 庶民을 위해 뭘 할 수 있겠나’라고 疑心하기도 합니다. 앞으로 國會議員으로서 어디에 重點을 두고 일할 計劃인지 궁금합니다.

    “우리나라 政治의 多樣性이 擴大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障礙人을 比例代表로 이름 올릴 때 저분이 障礙人을 더 理解할 거라고 생각하지 ‘障礙人이 一般人의 삶에 對해 뭘 알겠어?’라는 말은 하지 않죠. 또 企業人이 國會 入城할 때 ‘經濟에 對해 잘 알겠지’라고 하지 ‘庶民에 對해 뭘 알겠어?’라는 質問은 하지 않잖아요. 唯獨 醫師에 對해서는 先入見이 있죠. 萬若 議會가 醫療體系 正常化에 寄與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正말 旣得權만 醫療體系를 利用하는, 結局 庶民은 診療 拒否를 當하는 狀況이 올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醫師뿐 아니라 IT 專門家, 科學技術, 宇宙航空 專門家들이 國會로 더 많이 들어와야 해요. 國會의 專門性이 擴大되고, 專門 領域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眞情으로 庶民을 위한 길이죠.”

    改革新黨은 保守도 進步도 아닌, 前에 없던 새 政治를 할 걸로 期待를 모았습니다. 改革新黨의 當面 課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事案에 따라서 流動的으로 當面 課題를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曺國革新黨과 같이 인터뷰한 적도 있고, 國民年金에 對해서는 다른 黨과 비슷한 목소리를 내기도 했어요. 올바른 方向成果 現時點에서 實現 可能性 있는 答이 있다면 그 方向에 對해서는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봅니다. 政派에 갇혀 있지 않고 政治的 빚이 없는 黨이기 때문에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自信 있을 수 있고,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에도 덜 눈치 볼 수 있죠. 兩쪽 모두에서 票를 가져와야 하기 때문에 말하지 못하는 不便한 眞實이 있어요. 저희는 支持率이 조금 오른다고 政權을 가져올 수 있는 政黨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不便한 話頭를 많이 꺼내서 公論化할 겁니다. 國民들이 和答해 주시기만 하면 兩黨이 無視할 수 없는 그런 黨이 될 거라고 봅니다.”

    4年 뒤에 어떤 國會議員으로 評價받기를 바라시는지도 궁금합니다.

    “4年 뒤 이 모든 葛藤이 잘 봉합돼 醫療界가 正常化하고, ‘하고자 했던 일을 이뤘으니 다시 小兒科 醫師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좋겠어요. 그때 國民들이 ‘근데 너는 한 番 더 해라’고 말할 程度로 ‘좋은 國會議員이었다. 그래서 아쉽다’고 느끼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그때 가서 國會議員 그만하겠다는 것도 失禮되는 얘기일 수 있고, 한 番 더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穩當치 않다고 생각해요. 一旦 眞心을 다해 忠實히 일할 것이고, 4年 뒤에는 많은 것이 나아지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國會議員으로서 우리나라가, 우리 社會가 앞으로 어떤 方向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한 말씀 付託드립니다.

    “서로가 서로를 認定하는 나라, 서로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나라가 重要하다고 생각해요. 個人이 各自의 未來를 위해 熱心히 살아나가고, 國家는 國家의 未來에 對해 方向性을 가지는, 그런 發展的이고 未來志向的인, 個人과 國家가 함께 가는 社會가 되면 좋겠습니다.”

    신동아 6월호 표지

    신동아 6月號 表紙



    정혜연 차장

    정혜연 次長

    2007年 東亞日報 出版局에 入社. 여성동아, 週刊東亞, 채널A 國際部 等을 거쳐 2022年부터 신동아에서 勤務하고 있습니다. 金融, 不動産, 재태크, 流通 分野에 關心이 많습니다. 意味있는 記事를 生産하는 記者가 되기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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