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遁走曲(遁走曲) 80年代|新東亞

李文烈 長篇小說

遁走曲(遁走曲) 80年代

第1部 / 帝國에 비끼는 노을, 5話. 他者로부터의 信號

  • 入力 2017-11-12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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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박용인]

    [일러스트·박용인]

    1.
    始作은 무겁고 깊은 잠이었을 것이다. 前날 저녁 9時 뉴스가 끝나고부터 쓰기 始作한 새 長篇 超高價 이튿날 새벽 4時를 넘기면서 한 段落이 마무리되자마자 그는 거의 昏絶하듯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그 잠의 끝은 가위눌림과도 같은 絢爛하면서도 執拗한 꿈의 뒤엉킴이었다. 그는 난데없이 스핑크스를 만난 財數 없는 나그네같이 되어 끊임없는 拷問같이 이어지는 수수께끼의 正答을 허겁지겁 골라대야 했다. 

    처음에는 낱말 고르기 같은 것으로 始作된 것 같다. 匡諫(狂簡) 淸光(淸狂) 犬疥(?介) 生光(生光) 見輕(見輕)같이 主로 기역字로 始作되는, 옛날에는 中國과 우리가 같은 말처럼 썼으나 이제는 漸漸 낯선 말이 되어가고 있는 單語들이 몰려와 제자리를 찾으려고 아우聲이다가, 다음은 應對 酬酌(酬酌)에 따르는 美辭麗句 잇기가 되었다. 男女가 情談을 나누거나 술꾼들이 風流를 드러내고, 文人들이 才談이나 警句를 주고받을 때, 또는 世上에서 밀려난 者들이 눈을 허옇게 치뜨고 世上을 흘겨보거나 저희끼리 虛勢를 부리면서 주고받는 大邱(對句)와 大連 같은 것들이 한동안 虛荒하게 부딪치며 북새를 떨었다. 

    그가 듣기로는, 아무리 긴 꿈이라도 잠에서 깨어나기 直前 마지막 짧은 瞬間의 腦 活動 海里(解離) 狀態에서 일어나는 表象(表象) 作用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날 아침의 느낌으로는 간밤 내내 그런 꿈에, 追窮과도 같은 말과 글의 洪水에 시달린 것 같았다. 東洋古典的人 知識이나 情報 或은 敎訓이 貯藏된 位置나 大綱 알아둔다는 氣分으로 설읽은 市警과 楚辭(楚辭)에, 여기저기서 조각으로 주워 읽은 陣門(秦文) 한部(漢賦), 六曹 病려(騈儷)에 唐宋 拷問(古文)이며 當時(唐詩) 訟事(宋詞)가 無意識의 바닥에서 떠올라 記憶으로 引出되기를 기다리며 꿈속에서 와글거렸다.
     
    그런 것들로 미루어 그 아침의 꿈은 간밤 새로 始作한 그의 두 番째 長篇과 聯關이 있어 보였다. 이미 한 卷의 冊을 냈고, 다시 中短篇集 한 卷이 年末 出刊을 앞두고 있지만 그는 아직도 自傳的인, 或은 지나온 지 오래지 않은 삶을 追體驗하는 글쓰기로 自身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한 番 더 觀念的이고 思辨的인 主題를, 幻想的인 리얼리티로 加工된 世界와 目的的으로 創造된 人物이 어우러져 펼쳐내는 一種의 乾達小說로 世上을 만나볼 作定을 했다. 

    첫 小說 ‘人間의 大地’는 남보다 登壇李 늦어지고 있다는 느낌에 躁急해져 먼저 中篇으로 發表되었고, 單行本으로 나오면서 600枚 남짓의 警(輕)長篇 形態로 자랐지만, 처음부터 長篇으로 구상된 小說이었다. 그 바람에 西쪽으로는 로마로부터 東쪽으로 인더스 流域까지 額子 속 主人公의 10年에 걸친 巡禮記 或은 宗敎的 遍歷 時代는 짧게 引用된 紀行文 形態로 要約되거나 數百 個의 各州(脚註) 處理로 代置되어 있다. 하지만 그 津津한 內容은 몇 卷의 創作노트와 資料集으로, 그리고 1970年代 後半 들어 漸次 活潑해지는 印歐語(印歐語) 原書 普及으로 그의 머릿속에서는 아직도 자라고 있는 定格의 長篇小說이었다. 

    그런데 간밤 署長을 마무리한 假題(假題) ‘百濟實錄’이란 그의 두 番째 長篇小說은 그 舞臺와 文化的 背景에서 첫 番째와 아주 달랐다. 東洋의 古典的 諺文(言文)과 事由로, 偏執症的 誇大妄想에 좀 별난 曙光(書狂) 氣質까지 있는 舊韓末의 한 逸脫的 知識人을 正色하고 敍述함으로써 오히려 戱畫化한, 醫師(擬似)實錄體 壯懷(章回)小說이었다. 亡國과 被植民 時代, 그리고 解放과 戰爭과 分斷을 겪으며 아시아的 封建國家의 黃昏과 近代를 貫通해 現代로 行進해 들어가는 그를 통해 우리 近現代史를 돌아보고, 거친 대로 只今 우리가 앓고 있는 重要한 病症이 近代 유럽 元山(原産)의 理念 過剩임을 診斷하는 敍述 構造로 되어 있다. 



    20代 後半 世上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다시 文學으로 敗退한 直後부터 始作된 그 構想은 늦은 軍服務 時節에 이미 大綱의 얼개를 갖추었지만, 具體的인 着手는 近來까지 쉽게 엄두를 내지 못했다. 東洋의 古典的인 諺文과 事由로 敍述해간다는 것은 擬古的 門틀과 語彙로, 남만의 왜가리 소리를 내는 무리(南蠻 ?舌之·許子의 무리, 여기서는 되지도 않는 말과 論理로 시끄럽게 떠드는 外國人)처럼 밀려드는 西洋오랑캐(西夷)의 言說과 論理를 지운다는 것이니, 豫想되는 그 어려움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몇 年 前부터 그는 諺解類(諺解類)를 參考로 한 우리말 擬古文體(擬古文體)뿐 아니라 世上 사람들에게는 死語(死語)가 되어가고 있는 漢字 語源의 古典的 文魚들, 그리고 흔히 引用되는 全高(典故)와 私的(史蹟) 要約에다 아직도 우리말의 一部처럼 使用되는 故事成語, 그리고 依古文에서 引用하기 좋은 名文 佳節(佳節) 따위를 나름으로 分類해 創作資料 노트란 이름으로 모아오고 있었다. 아마도 그 새벽꿈의 마지막을 그렇게도 搖亂하게 닫은 것은 어젯밤 執筆이 始作되면서 意識 속에서 펼쳐지게 된 그 노트가 그 새벽 꿈속에서 一齊히 들고일어나 無意識에 잠겨 있는 自己 存在를 主張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에서 깬 뒤에도 그는 如前히 눈을 감은 채 한참이나 더 그 搖亂하지만 종잡을 수 없는 말과 글의 衝突을, 힘들여 모았으나 그토록 順序 없이 한꺼번에 引出할 생각은 全혀 해보지 못한 言述(言述)과 記錄의 亂動을, 다시 한 番 돌이켜보았다. 그러나 마지막 꿈속에서와 마찬가지로 거기에 무슨 특별한 意圖나 因果關係의 고리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었다. 序列도 優先順位도 없는 突出과 偶發의 無秩序한 衝突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깨어날 때쯤 印象的인 記憶처럼 떠올린 單語들에 더해 語節이나 短文이 몇 個 더 떠올랐는데, 그中 하나가 ‘狂휼(狂?)과 화사(華士)의 노래’였다. 


    [일러스트·박용인]

    [일러스트·박용인]

    광휼과 華奢라면 주공단(周公旦)이 帝王(齊王)으로 봉한 太公望에게 죽은 古典的인 아나키스트 兄弟의 이름이다. 마르크시스트를 處理할 때 쓰기 위해 ‘孟子’ 속 古典的 共産主義者 許磁를 그 노트에 올려두었던 것처럼, 西歐 近代의 아나키스트를 處理하기 위해 ‘韓非子’ 속에서 찾아두었던 周나라 初期의 古典的 自由인 또는 자주인(自主人) 兄弟….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는 내처 잠자기를 抛棄하고 눈을 떴다. 새벽 4時가 넘어 든 잠자리라 點心 때까지 푹 자둘 생각이었으나, 꿈을 記憶해내는 동안에 活性化된 腦가 더는 平穩한 睡眠을 許容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다시 居室의 壁時計가 느린 소리로 한동안 딩딩거렸다. 차분하게 헤어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열 番은 넘은 듯했다. 그제야 간밤 잠들기 前에 두꺼운 커튼을 치고 잔 것을 想起한 그는 일어나는 대로 窓門 커튼부터 젖혔다. 어깨에 걸린 窓틀 너머로 내다보니 벌써 正午에 가까운 듯한 늦가을 햇살에 눈부신 이웃집 정원이 성큼 다가왔다. 

    그는 未練 없이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나 冊床머리로 갔다. 그리고 새 小說을 始作하면서 冊床머리 冊꽂이로 뽑아 올려둔 ‘百濟實錄’ 創作노트 둘째 卷에서 그 두 사람의 出處가 ‘韓非子’ 외저설(外儲說) 便이란 것을 알아내고, 다시 ‘韓非子’ 國譯판을 들췄다. 그러나 ‘광휼과 화사의 노래’ 같은 것은 없고 太公望이 帝王으로 봉해져 山洞으로 내려갔을 무렵 東海 바닷가에 살며 賢者로 稱頌받던 그 두 兄弟의 自負心에 찬 論議 한 句節만 나왔다. 

    ‘우리는 天子의 臣下도 아니고/ 諸侯의 벗도 아니다./스스로 밭 갈아 먹고 살고/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며/ 아무것도 다른 이에게 빌고자 하지 않는다./위로부터 받은 名譽도 없고/임금으로부터 받는 俸祿도 없다./벼슬할 뜻 없이 스스로 일해 살아간다.’ 

    그리고 나머지는 古典的 國家主義者 或은 絶對王權論者인 太公望이 왜 그들 兄弟를 잡아 죽였는지 說明하는 데 바쳐지고 있다. 주공단이 齊나라로 사람을 보내 賢者를 죽인 까닭을 묻자 太公望은 答한다. 

    ‘그들은 天子의 臣下가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調整의 臣下로 쓸 수도 없고, 諸侯의 벗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제가 부릴 수도 없습니다. 또 스스로 밭 갈아 먹고, 스스로 우물을 파 마시며 다른 이에게 바라는 바가 없기 때문에, 賞을 주어 勸하거나 罰을 내려 못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또 위로부터 내려지는 名譽를 願하지 않으니, 비록 슬기롭다 해도 쓰이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고, 임금이 내리는 祿俸을 받지 않으려 하니 또한 어질다 해도 共 세우기를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벼슬하지 않겠다는 것은 다스려지지 않겠다는 것이고, 일을 맡지 않겠다는 것은 충성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외저설의 장구를 더듬어가고 있을 때 그가 깨어난 기척을 느낀 아내가 조용히 門을 열고 房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래도 일찍 일어났네요. 날이 희붐할 때까지 불이 켜져 있는 것 같았는데. 아침床 차려도 되겠어요?”

    2.
    方今 지은 듯 따뜻한 밥床 때문에 밤샘으로 깔깔한 입안이지만 半 넘어 그릇을 비우고 일어나는데, 華奢하게 차려입은 어머니가 왠지 좋게 보이는 얼굴로 건넌房에서 나왔다. 뒤로는 幼稚園에 다니는 큰아이가 할머니 치마꼬리를 놓칠세라 따라붙고 있었다. 

    “곧 點心때인데, 어딜 가시려고요?” 

    “오늘 옻骨(漆谷) 힝아(형님) 七旬 잔칫날이따. 土曜日이다마는 니는 거다 갈 時間 없제?” 

    “아 예, 오늘은 좀…. 午後에 찾아봐야 할 사람이 있어서.” 

    그는 얼른 그렇게 對答하고 어머니를 門間까지 바래다주었다. 居室로 돌아가 소파에 앉으니 언제나처럼 卓子 위에 中央紙 둘과 自身이 다니는 地方 新聞社 그날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는 먼저 自身이 前날 編輯한 스포츠 面과 金曜 特輯판을 펼쳐 大綱 훑어본 뒤 中央紙로 넘어갔다. 언젠가부터 머리技士가 엇비슷해지는 느낌이 들더니, 그날은 題目까지 같았다. 

    <崔 代行 ‘平和的 政權移讓이 내 使命’> 

    10·26 事件이 있고 벌써 한 달, 무언가 緊迫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 政局 裏面과 달리 태평스러운 최규하 大統領 權限代行의 그런 原論的인 다짐이 그랬고, 記事가 크지는 않았지만 왠지 눈길 가는 新軍部 實勢와 記者들의 面談 같은 것도 그랬다. 그리고 무슨 수군거림 속에 進行되는 것 같은 ‘朴正熙 大統領 弑害事件’ 搜査 過程이 風聞과 臆測 속에 온갖 야살을 떨고 있을 뿐. 

    新聞은 입안에서만 웅얼거리는 듯 아직도 잘 알아들 수 없는 말을 號外로 傳하는 느낌이다. ‘怪物’은 아직도 엘바 섬을 脫出하지 않았는가. 그 ‘殺人魔’는 언제 注秧에 上陸할 것인가. 그 ‘簒奪者’는 언제 60時間이면 서울로 들어오는 距離에 이를까. 그리하여 다시 ‘우리 大統領 閣下’는 언제 靑瓦臺로 돌아오실 것인가. 

    하지만 確信에 가까운 段程度 있다. 테니스 코트의 誓約은 稼動되기 始作했고, 順序가 바뀌고 時差가 있었지만 結局 王과 王妃는 斷頭臺에서 나란히 處刑되었다. 울고불고하며 葬禮를 뒤따르는 國民들도 있지만, 200年 前 파리에서도 그랬다. 아버지 어머니를 죽인 悖倫의 子息들처럼 많은 파리 市民이 울고불고하며 거리를 뛰어다녔다는 記錄이 있다. 民衆의 날이 온다. 市民의 날이 온다. 權力은 모두 그들에게로. 모두가 한배에서 난 개새끼 같은 그들의 指導者에게로. 

    벌써 몇 달째 이란 事態를 中心으로 記事를 쏟아 내고 있는 國際 面도 別로 다를 바 없었다. ‘엔테베式 奇襲 檢討’는 美國大使館 人質 救出 方案을 놓고 하는 論議에서 뽑은 題目 같고, ‘호메이니는 蘇聯諜者’는 回敎革命을 바라보는 美國 情報機關의 認識을 斷面的으로 드러내 보이는 題目인데, 全體的으로 新聞마다 들려주는 게 그 소리가 그 소리인 듯했다. 

    그가 공연히 못마땅해하며 新聞을 뒤적이고 있는데, 아내가 막 잠에서 깨어나 칭얼거리는 둘째를 안고 나와 맞은便 소파에 앉았다. 늦은 除隊 뒤에 얻은 아이라 둘째는 이제 겨우 두 돌을 넘긴 터였다. 잠에서 막 깨어나 그리 좋은 審査는 아니었으나 어미가 제때 안아주었고, 맞은便에는 아비까지 있어선지 아이는 곧 칭얼거림을 멈추었다. 아내가 그런 둘째를 따로 떼어 곁에 앉히면서 操心스레 물었다. 

    “어제 청계(靑溪) 姨母님 왔다 가셨어요. 둘째 敎育保險을 들어달라고 왔는데….” 

    “昨年에 큰애 保險 하나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어? 둘째 이제 겨우 두 돌인데, 벌써 무슨 敎育保險이야?” 

    “그렇지만 안 들어줄 수도 없었어요. 할 수 없어 積金(積金)式으로 했는데, 좀 비싸네요.” 

    “積金食餌 뭔데? 그렇다고 왜 비싼 거야?” 

    “2年만 넣으면 中途解止해도 우리가 낸 元金을 다 돌려준대요.” 

    그 무렵은 때 아닌 保險의 季節이었다. 있던 것이든 새로 생긴 것이든 保險會社마다 서투른 設計士를 量産해 親姻戚과 軟膏 販賣로 職場마다 집집마다 골머리를 앓게 했다. 그도 新聞社란 職場과 그사이 冊卷 팔아 얻은 이름 때문에 아내가 새로 넣은 保險을 합치면 그해만 保險이 다섯 計座 늘었다. 

    “그럼 그사이 拂入한 돈의 利子만으로 姨母님 手當 契約 手數料, 저희 該當職員 賃金까지 다 나온다는 얘기군. 차라리 그냥 敎育保險 싼 걸로 하나 넣지 그랬소.” 

    귀찮기는 하지만 아주 못 견딜 額數도 아니라 그가 그렇게 마무리를 짓는데, 아내가 다시 풀죽은 소리를 보탰다. 

    “어제는 浦項 原길 아주버님이 왔었어요.” 

    원길이라면 집안 아재비뻘이지만 同甲내기에 어릴 적 한때 이웃에서 함께 자라 族親이라기보다는 故鄕 親舊처럼 여기고 있었다. 父母를 따라 浦項으로 나간 뒤 거기서 高等學校까지 나오고 軟膏도 많아 아내는 그를 ‘浦項 아주버님’이라 불렀는데, 예전 大學을 그만두고 暫時 故鄕에서 어정거릴 때는 그와 좋은 술동무로 어울리기도 했다. 除隊 뒤 大邱로 나올 때 보니 아직도 半乾達로 故鄕을 떠돌고 있었는데, 갑자기 大邱로 찾아 왔다는 게 좀 난데없었다, 

    “어디서 뭘 하고 있대? 우리 집에는 어떻게 온 거고?” 

    그가 궁금하면서도 한便으로는 반갑기도 해서 그렇게 들떠 묻자 아내가 조금 어두운 表情이 되었다. 

    “어머님과 얘기하시는 걸 들어보니 요즘 아주 고단하게 지내시는 것 같네요. 昨年에 다시 浦項으로 나갔는데 이것저것 해봐도 잘 안 돼 여름에 釜山으로 옮겼다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거기서도 일자리를 못 얻어 이리저리 겉돌다가 요즘은 月賦 冊을 판다네요.” 

    “釜山서 月賦 冊 판다며 大邱 우리 집까지는 어떻게?” 

    “月賦 冊 좀 사달라고 오신 것 같아요. 아주버님께 冊을 臺는 出版社가 아주 커서 全國區로 營業이 可能하다나요. 來日 다시 온다고 했는데, 여기 廣告 팜프렛 한 자락 두고 갔어요.” 

    아내가 그러면서 재떨이로 눌러두었던 割賦書籍 販賣 宣傳 傳單과 全集類 圖書目錄 같은 것을 한 묶음 펼쳐놓았다. 그가 보니 알만한 出版社고, 圖書 目錄에는 藏書로 받아두어도 될 만한 全集類度 있었다. 그가 特別히 성가시다는 氣分 없이 圖書目錄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는데, 아내가 다시 둘째를 안으면서 가벼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 이 집 日, 이거 너무 일찍 벌였는가 봐요. 우리한테는 두 칸 傳貰房이나 廚房 넣고 房 두 個 뽑은 차고 房 傳貰가 제格인데. 實속 없이 겉만 번지르르하게 일을 크게 벌여놓았으니….” 

    그는 아내가 뭘 後悔하는지 今方 알아들었다.

    只今 그가 있는 집은 그前에 살고 있던 범어동 골짜기에서 로타리 쪽으로 많이 나온 곳에 새로 造成된 住宅團地 안의 한 桐(棟)이었다. 여남은 집 되게 團地를 만들고 庭園까지 제법 模樣 나게 꾸며 高級 住宅團地 흉내를 냈지만, 그 地域이 아직은 都心에서 멀고, 周邊 開發도 잘 되어 있지 않아 一般에게 別로 人氣가 없었다. 

    그러자 建設會社는 限없이 늦어지는 分讓을 기다리지 못하고, 分讓 못한 집을 1年 單位로 傳貰를 놓게 되었는데, 그리 되다보니 一般 傳貰보다 傳貰金이 터무니없이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分讓에 對備해 傳貰 期限을 1年 短期로 한 게 住居의 安定性을 해쳐 傳貰집을 찾는 이들이 선뜻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시원하게 뽑은 居室과 廚房에다, 일곱 坪이 넘는다는 안房 말고도 제대로 된 房이 둘이나 더 있는 住宅 規模나, 아직 자리 잡지는 못해도 예순 坪은 넘어 보이는 庭園이 暫時 살 傳貰집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負擔이 된 듯했다. 

    收拾 끝나자마자 經濟部에 떨어져 그때는 住宅建設과 不動産 쪽을 出入하는 動機 하나가 傳貰집을 求하는 그에게 처음 그 집을 紹介했을 때, 갑자기 倍로 치솟을 傳貰金에 怯부터 먹은 그는 한番 구경이나 한다는 氣分으로 따라가 보았다. 몇 年 不便 없이 살던 부엌 딸린 두 칸 房 傳貰집에서, 居室 廚房 化粧室이 따로 갖춰진 單獨住宅이나 다를 바 없는 2層 傳貰집으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서라 더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집 구경을 하면서 안房 말고도 居室 건너 있는, 書齋 또는 執筆室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널찍한 房 한 칸이 먼저 마음을 끌더니, 모든 게 시원스럽게 빠진 집 구석구석과 아직 支柱木을 대고는 있어도 제법 邸宅의 庭園같이 設計된 造景 配置에 庭園樹라고 할 만한 品種과 守令의 나무들이 어우러진 게, 진작부터 마음 들어 하며 살아온 집 같은 愛着까지 느끼게 했다. 

    “그래봤자, 한 해 살고 어찌 될지 모르는 傳貰집인데 뭘 그리 서둘러요?” 

    나중에 함께 집을 보러 온 아내가 턱없이 반해 契約에 매달리듯 서두르는 그에게 핀잔처럼 그렇게 말했다. 머쓱함을 감추느라 그는 갑자기 무슨 대단한 令監이라도 받은 것처럼 멀쩡한 얼굴이 되어 되받아쳤다. 

    “살다보면 우리 집이 되는 수도 있지, 사람마다 달팽이처럼 날 때부터 제집을 달고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그날부터 터무니없고도 엉뚱한 내 집 마련에 들어갔다. 먼저 倍로 늘어난 傳貰金은 銀行 出入하는 先輩記者에게 付託해 貸付를 얻고, 때마침 들어온 첫 番째 印稅는 집을 꾸미고 그 집에 맞는 家具를 들이는데 썼다. 그러다 여름 늦게 銀行 빚의 倍는 되는 두 番째 印稅가 들어와 于先 銀行 빚부터 갚으려고 하는데, 그 말을 들은 建設出入 同期가 다시 그에게 새로운 提案을 했다. 

    “於此彼 잘 팔리지도 않는 눔의 집, 차라리 名臣住宅 그놈아들한테 그따우 刻薄한 短期 傳貰 말고 아파트처럼 分納으로 그 집 分讓해줄 수 없는가 函 물어보까요? 봄에 낸 傳貰金을 契約金하고 先給金으로 돌리고, 차라리 銀行 빚 갚으려는 이番 印稅 그거 몽땅 住宅 分讓 中途金으로 돌리면 어떻겠십니꺼? 그러면 殘金이 한 1500 남게 될 낀데, 그걸 來年 末까지만 完納하면 一般 아파트 分讓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代金 完納이 되니까는 그렇게 함 해보시지요. 내가 잘 아는 그 會社 專務한테 말해보믄 우째 될 것도 같십니다마는.” 

    따져 보면 그 提議는 前에 살던 房 두 칸짜리 2層 傳貰金에다 銀行 빚 얹은 1800萬 원을 契約金 및 先給金으로 始作해 2年 만에 4500萬 원짜리 新築 住宅을 分讓받겠다는 어림없는 計劃인데, 異常하게도 그는 조금도 겁나지 않았다. 그 무렵 한꺼번에 들어온 冊 10萬 部 印稅가 그의 肝을 키운 듯했다. 

    “그럼, 한番 그래볼까요? 좀 떨리기는 합니다만.” 

    그가 엄살 섞어 그렇게 말끝을 흐리자 뭐가 신이 났는지 建設出入 動機가 더 豪氣를 내어 일을 굳혔다. 

    “까짓 거. 마 그라입시다. 某 아이믄 때(道)地 뭐. 내 보이 李兄 같으면 우째 잘 喉蛾(휘어)낼 거 같구마는.” 

    다음 날 名臣住宅 쪽에서도 그런 提案을 받아들여주어 그가 낸 傳貰金은 分讓代金 先給金으로 바뀌고, 그 무렵 들어온 印稅는 銀行 빚을 갚는 代身 모두 名臣住宅 쪽에 中途金으로 支拂되었지만, 아직 그 內幕을 잘 알지 못하는 아내는 그렇게 큰 住宅을 專貰 내어 겉만 번지르르 해 보이게 된 것만으로도 걱정이 泰山 같은 表情이었다.

    3.
    어중간하게 아침 兼 點心을 먹고 집을 나서는데 아내가 물었다. 

    “어제 밤샘이나 다름없었는데 이대로 外出해도 괜찮겠어요? 어딜 가려고요?” 

    “말하지 않았어? 이番 週末에는 無何有(無何有) 先生을 만나러 간다고?” 

    그가 무심하게 대꾸하자 무언가 釋然찮은 게 있을 때 그러듯 아내가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無, 뭐라고요? 無何有? 그분이 누구시더라…. 當身이 잘 안 쓰는 先生이란 呼稱을 가져다 붙이니 어째 낯설게 들리네요.” 

    “新聞社 收拾 時節부터 몇 番 史跡으로 드나든 허항(許恒) 敎授 말이야. 前에 鏡臺(慶大)에 오래 계셨다는. 70年代 初에 停年하고 몇 年 쉬시다가 가까운 地方大에 待遇敎授로 다시 나가시게 된 것 같아. 作別人事라도 올린다는 게 此日彼日 하다 보니 이리 늦었어. 벌써 大學 附近으로 移徙나 가지 않았는지 모르겠네. 於此彼 내 쪽에서도 머지않아 作別人事는 드려야 할지 모르는 분인데, 그間 이래저래 身世진 일도 感謝드리고 가져온 冊 몇 卷도 돌려주고.” 

    “아, 當身의, 그 늙은 同志….” 

    그제야 아내가 누군지 알겠다는 듯 조심스러워하면서도 웃음氣를 감추지 못한 말套로 그렇게 받았다. 그가 無何有 先生을 처음 만나고 돌아온 날을 記憶해낸 것 같았다. 

    “이달 들어 週末마다 별렀는데 이제야 찾아보게 됐네.” 

    그가 그런 말로 어머니께 告해야 할 遺筆乳房(遊必有方)을 아내에게 代身하고 大門을 나섰다. 住宅團地를 나서 큰길로 접어들면서 새삼스레 周邊을 돌아보니 저만치 건너보이는 隣近 野山에는 이미 初겨울이 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於此彼 都心으로 編入될 곳이라 마음먹고 심은 듯한 野山비탈의 잎 陳 銀杏나무나 참나무붙이가 그랬지만, 그 안쪽 샛노란 落葉松 숲이 더욱 그런 情趣를 느끼게 했다. 그는 처음 梵語로터리까지 걸어가 버스를 타려고 했으나, 집을 나서기 前에 書架에서 찾아낸 冊 몇 卷이 든 書類 封套가 갑자기 짐스러워져 버스 停留場에 이르기도 前에 택시를 잡았다. 

    “효목동으로 갑시다. 軍人아파트 덜 가 옛날 洞네 入口 쪽으로.” 

    택시技士에게 그렇게 말해놓고 보니 갑자기 내려야 할 곳이 記憶에 가물가물했다. 根幹 몇 달 머릿속에서 이따금 떠올려보아서 말로만 또렷하지, 實際 길 찾기는 그리 自信이 없었다. 드나든 3年 동안에 딱 세 番 찾아가 보았는데, 그것도 한番은 先輩 記者의 案內를 따르기만 했고, 마지막 訪問은 또 1年 가까이 지난 터라, 그 洞네 어귀에 내린다 해도 先生의 집을 찾아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될 地境이었다.

    그가 無何有 先生을 처음 찾아본 것은 3年 前 늦깎이 記者 收拾 막바지 무렵이었다. 그날은 文化部 收拾으로 大學 및 學術 擔當 先輩를 따라나서게 되었는데, 그 先輩는 뒷날까지도 오래 그에게 印象을 남긴 사람이었다. 日本 무슨 帝國大學을 나왔고, 日帝 때 骨董 ‘데칸쇼(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派로 哲學을 始作해, 1970年代까지는 아직 舶來(舶來) 新商品에 屬하는 實存主義며 프랑크푸르트學派의 除雪까지 훤히 꿰고 있다는 國寶級 哲學徒社의 首弟子를 自處하는 地方大學 哲學科 出身인데, 新聞社에서는 벌써부터 용담虎穴(龍潭虎穴)이라는 紅扇루(紅仙樓) 論斷의 所長(小壯) 孤樹로 자리 잡아가는 여섯 基 先輩 記者였다. 

    그 先輩의 臟器는 談論에 슬그머니 大學 專攻을 끌어들여 때가 오면 무서운 暗記(暗器)처럼 不時에 흩뿌리는 것인데, 그도 뒷날 記者 初年兵 時節 紅扇루 論壇에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하이데거가 어떤 小論文에서 分析한 휠덜린의 詩 한 句節을 잘못 引用했다가 며칠 두고두고 홀로 낯붉힐 狼狽를 當한 적이 있다. 

    “午後에는 우리 都市에만 있는 眞品 骨董 한番 보러가지. 보니 李兄도 그쪽에 全혀 關心 없는 사람 같지는 않던데.” 

    “예? 무슨 말씀이신지요?” 

    “日前에 보니 E.H. 카가 쓴 바쿠닌 電氣 들고 다니는 것 같았는데.” 

    “아, 그거 經濟部 收拾 따라 나갔다가 新聞社 돌아오는 길에 헌冊房 골목에서 그런 英文版 冊 한 卷이 눈에 띄기에…. 크게 쓰인 바쿠닌이라는 이름만 보고 그저 잡아둔 겁니다. 아직 제대로 한番 훑어보지도 못했어요.” 

    “바로 그거야. 바쿠닌이라는 이름만 보고 冊을 사둘 程度라면 아나키즘에 關心 있을 거라는 推測이 生판 틀리지도 않겠지. 午前에 收拾이라고 慶北大 한番 둘러보았으면 됐고, 午後에는 따로 가볼 만한 곳도 없으니, 이제 이 나라에서는 稀貴種이 된 늙은 아나키스트나 보러 가지 않겠어?” 

    “아나키스트라고요? 아직도 아나키스트를 自稱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水彩畫 물감으로 人共旗(人共旗) 그려 下宿房 壁에 붙여놓고 김일성 萬歲 부르는 아이들 말고.” 

    “그럴 것 같았지. 다른 사람들은 李兄이 데모하다 退學당한 걸로 疑心하기도 하는 것 같더라만, 나는 진작부터 그게 아닐 거라고 믿고 있었지. 한 배에서 난 개새끼들의 싸움에 말려들어 怪常한 소리로 짖어대는 隔世遺傳型 지진아도 아니고.” 

    “過讚이십니다. 하지만 아나키즘에 關心 있을 것이란 推測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只今 절 데려가시려는 곳은 어딥니까” 

    “無何有(無何有) 先生을 한番 찾아가볼까 해. 효목동이니까 멀지 않은 곳이야.” 

    “無何有라면 無何有之鄕(無何有之鄕)의 그 無何有입니까?” 

    “아마 그럴 거야.” 

    사수인 先輩가 그러면서 周圍를 두리번거렸다. 그사이 大學 校門 쪽으로 좀 걸어 나와선지 校門 안으로 들어오는 택시들이 더러 보였다. 그中에 빈 채 나가는 택시 한 臺를 불러 세운 射手가 먼저 助手席에 타며 택시 技士에게 말했다. 

    “효목동 쪽으로 가다가 세워달라는 곳에 좀 세워주쇼.” 

    그리고 등 뒤 쪽 자리에 탄 그가 姿勢를 잡고 앉기 바쁘게 무슨 緊한 通報처럼 말했다. 

    “點心때가 끼어 아무래도 먼저 民生苦를 解決하고 無何有 先生 宅을 찾아야겠어. 葬儀社 옆 뼈다귀 解酲국 집에 가서 속이나 좀 풀고 가자고.” 

    葬儀社와 뼈다귀 解酲국이란 單語가 妙하게 連結돼 食慾을 半減시킨 原因도 있지만, 그보다는 無何有란 先生의 號에 궁금한 게 많아 그가 東問西答처럼 射手의 말을 받았다. 

    “그런데 말입니다. 無何有란 號, 그거 字號(自號)한 겁니까. 어디서 받은 거랍디까?” 

    “그건 물어보지 않았는데…, 뭐가 궁금하지?” 

    “無何有之鄕의 無何有라면, 人爲(人爲) 또는 柳湋(有爲)와 自然 또는 無爲로 對立된 世界에서 人爲 또는 有爲가 全혀 없는 어떤 理想鄕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그건 長子(莊子)流의 理解일 테고, 아나키스트의 또 다른 이름인 自主人 또는 自由人의 紫朱나 自由와 對立되는 人爲 또는 有爲가 없는 世界일 수도 있지. 組織이나 支配 統制 같은 人爲와 柳湋 말이야.” 

    多幸히도 그들이 택시로 달린 時間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신천동과 만촌동 어름의 어느 큰길가 뼈다귀 解酲국 집에서 別로 내키지 않은 點心을 먹었는데, 바로 옆 商店이 掌醫用品을 店鋪 여기저기 늘어놓고 쌓아둔 葬儀社 事務室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도 哲學科를 나온 射手는 뜯고 있는 게 돼지뼈다귀라서 그런지 뼈다귀解酲국을 달게도 먹었다. 그리고 나머지 그날의 일로 더 기억나는 것은 學部 時節에 無何有 先生의 講義를 들은 적도 있는 先輩가 恭遜한 人事 뒤에 그를 紹介하자마자 그의 두 손을 꼭 잡고 반기던 無何有 先生이었다. 아무 緣故 없는 젊은 同志가 스스로 찾아와 자주인(自主人)으로서 함께 어깨 겯고 갈 뜻을 밝힌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구먼. 반갑네. 잘 찾아주었어. 젊은 同志.

    4.
    길이 조금 헷갈려 택시에서 내린 後에 골목 한두 個를 돌기는 했지만 無何有 先生은 如前히 한 해 前 그 자리, 草家三間 이엉을 걷고 기와만 얹은 것 같은 낡은 一字집 韓屋에, 亦是 한 해 前과 別로 달라진 게 없는 구부정한 모습으로 그를 맞아주었다. 그가 올린 절을 맞절로 받는 것도 변함없었다. 그는 꼭 한 해 만에 다시 찾아보는 게 적잖이 마음에 걸렸으나, 先生은 別로 介意치 않는 듯했다. 어중간한 辨明을 다 듣지도 않고 그의 便치 않아 하는 속을 풀어주었다. 

    “別 소릴. 한 해 한 番 찾아주는 것도 요새 世上으로 봐서는 대단한 精誠이지. 더군다나 同志는 아직 記者 初年兵 아닌가? 나도 예전 釜山에서 작은 新聞社 主筆로 일해봤는데, 記者 노릇 그거 제대로 하자면 現場 取材만으로도 정신없지. 더군다나 大邱西는 東亞 朝鮮 中央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이 읽히는 게 귀(貴)新聞社 아닌가?” 

    先生은 그가 編輯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잊은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음은 한결 便해져 그는 바로 찾아온 까닭부터 털어놓았다. 

    “崔 先輩 얘기 들으니 先生님께서 다시 地方 大學에 講義 나가시게 되었다기에 한番 찾아뵌다는 게 이리 늦었습니다.” 

    “아 그거, 뭐라더라. 待遇敎授라고, 一週日에 한 番 나가면 돼요. 講義案 따로 提出 안 해도 되는 特講으로다.” 

    “그래도 캠퍼스가 直轄市 밖이라. 先生님께서 이 집에 그대로 계실지도 잘 모르고….” 

    “그것도 괜한 걱정이네. 택시든 뭐든 慶山 넘어가는 길까지만 나가면 市內버스 市外버스 할 것 없이 그 大學 가는 車는 총총 있으니까. 바쁜 同志가 그렇게 날짜를 꼽아가며 힘들여 찾아올 일도 아닌데.” 

    그런데 이番에는 그런 先生의 말이 재촉처럼 되어 그는 于先 緊한 用件부터 處理한다는 氣分으로 들고 간 書類 封套에서 먼저 冊 세 卷을 꺼냈다. 正色을 하고 만들었지만 어딘가 虛勢를 부리고 있는 것 같은 두꺼운 四六倍版 하드커버 壯丁의 ‘韓國 아나키즘 運動史’ 前篇(前篇)과 얇지만 靑色 헝겊 하드커버로 精誠 들여 만든 ‘近代科學과 아나키즘’이라는 飜譯書였다. 앞엣것은 ‘韓國無政府主義 運動史 編纂 委員會’ 編纂에 先生의 序文이 붙은 冊이었고, 뒤엣것은 크로포트킨이 쓴 冊을 어떤 귀에 익지 않은 이름의 飜譯者가 飜譯한 것이었다. 그리고 세 番째는 슈티르너의 ‘唯一者와 그 所有’ 英語版이었다. 

    “그동안 제가 한番 읽어보겠다고 가져갔다가 아직 돌려드리지 못한 先生님 冊들입니다. 大部分 先生님도 餘分이 없는 것들이라기에 振作 돌려드린다고 돌려들었는데 그래도 이 세 卷이 남아 있더군요.” 

    그리고 다시 두 卷을 더 꺼내 그 冊들 위에 얹으며 덧붙였다. 

    “이건 修習記者 時節에 남산동 대도劇場 뒷골목 헌冊房에 갔다가 偶然히 얻은 것인데, 카(E.H.카)가 쓴 ‘바쿠닌 電氣’입니다. 先生님 藏書에 없는 것이면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이 冊은 언젠가 先生님께서 元來 가지고 있었는데, 없어져버려 아쉬워하시던 우드코크의 ‘아나키즘 運動史’ 英語版입니다. 지난番 서울 길에 鍾路書籍 外西部(外書部)에 注文한 ‘比較宗敎學 事前’과 엘리아데의 ‘宗敎思想史’를 찾으러 갔다가 徐가 한구석에 이 冊이 눈에 띄기에 先生님을 위해서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無何有 先生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든 것인지, 그를 뻔히 쳐다보다가 그中에서 먼저 ‘近代科學과 아나키즘’을 집으면서 말했다. 

    “이 크로포트킨 飜譯版은 國漢文 混用 印刷에 語彙가 舊投稿 漢字를 너무 많이 쓰고 있는 것 같지 않았나? 요새 젊은 사람들 읽기에는…. 그래서 내가 새로 飜譯해보려고 하는데 젊은 同志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先生님이 指摘하시니까 좀 그런 것 같기는 하지만, 그 冊은 제겐 正말 感動的이었습니다. 이 冊을 읽으면 크로포트킨은 革命家나 思想家, 社會運動家, 學者 같은 그 어떤 呼稱보다도 文筆家나 文章家로 더 우러러보입니다. 제가 다른 冊들보다 그 冊을 오래 가지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처음 읽었을 때의 感動과 衝擊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어떤 句節은 그걸 쓴 크로포트킨에게서 高潔한 人格을 넘어 거룩한 聖者의 氣品 같은 것까지 느끼게 했습니다. 그의 人間에 對한 다함없는 믿음과 샘솟는 憐憫과 情愛며 相互扶助의 本性에 對한 宗敎的 信仰과도 같은 確信은 내가 읽은 그 어떤 언지(言志)나 文士(文詞)에서보다 더 큰 感動을 주었습니다.” 

    잠깐 ‘近代科學과 아나키즘’의 어떤 感動的인 句節들에서 받은 强烈한 衝擊이 되살아나 先生의 問議를 잊고 있던 그가 거기서 퍼뜩 精神을 차려 에둘러도 너무 에두른 對答을 했다. 


    [일러스트·박용인]

    [일러스트·박용인]

    “하지만 飜譯은 別로 神經 안 쓰고 읽어 그때는 先生님이 指摘하신 걸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만, 요새 사람들이 읽기에는 아무래도 漢字와 漢文 語套가 너무 많이 쓰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자 先生도 그의 誇張 섞인 書評은 듣지도 않은 사람처럼 自身의 主題 쪽으로만 對話를 몰아갔다. 

    “飜譯한 그 이, 젊은 同志는 잘 모르겠지? 先代 아나키스트로 日帝의 獄苦까지 치른 분인데, 내게는 中學校 時節부터 欽慕해온 恩師와도 같은 분이네. 내가 처음 읽을 때만 해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읽혔는데, 歲月이 가니 文章도 사람 따라 늙고 낡아지는 것 같네. 그래서 더 늙기 前에, 飜譯을 새로 한다기보다는 先生의 飜譯을 새롭게 解釋하고 다듬어 볼까 하네. 그 분의 飜譯을 完結해드린다고나 할까. 따라서 머지않아 새 飜譯版이 나올 듯하니 크로포트킨의 冊은 이 同志가 그냥 간직해도 될 것이네.” 

    그래놓고 나니 先生도 自身이 처음 주고받던 말에서 벗어나 있는 걸 알아차린 듯 主題를 바로잡았다. 나머지 다른 두 卷을 가리키며 지나가는 말처럼 덧붙였다. 

    “그리고 이 두 篇, 카와 우드코크度 나 같은 늙은이가 아직까지 싸안고 있을 冊은 아니네. 世上도 언제까지고 이런 冊을 禁書로 묶어둘 수도 없고, 그래서 혼자서 안고 가는 脾臟(秘藏)의 冊일 수만도 없을 것이네. 그렇다고 ‘近代科學과 아나키즘’처럼 이제 와서 내가 새로 飜譯해보겠다고 나설 엄두도 나지 않고.…. 參考가 되어도 젊은 同志에게 더 參考가 될 테니, 그 둘도 도로 가져가게.” 

    그런데 그 같은 無何有 先生의 仕樣이 애써 무덤덤하게 치르려고 하는 作別의 儀式을 콧등 시큰한 感動으로 始作하게 만들었다. 

    “그럼, 그 冊들을 元來 있던 자리로 되돌려놓는 것으로 하지요. 實은 저도 이제 더는 그 冊들을 힘들여 끌어안고 다닐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가 이제는 아주 마음을 비워버린 사람처럼 그렇게 말하자 先生이 갑자기 啞然해하며 그를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퍼뜩 精神을 차린 사람처럼 차분하게 물었다. 

    “젊은 同志, 무슨 일인가? 갑자기 내 집 마당에 지고 온 冊 褓따리 다 풀어놓고 맨몸으로 훨훨 먼 길 떠날 사람같이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3年 前 崔君과 함께 찾아온 同志를 自主人의 길을 함께 하려고 찾아온 동도(同道)로 여기고 기꺼이 맞았네. 精密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여러 해 홀로 自主人의 意識과 意志를 길러온 듯하고, 또 외로운 그 길을 걷기에 좋은 品性도 지닌 듯해 반가웠네. 이 오두幕을 찾아준 것은 몇 番 안 되지만, 多數하지도 않고 精銳하지도 못한 대로 自主人의 理想을 품고 모인 사람들과의 자리 또는 둘만의 私的인 談話에서 말을 섞고 생각을 나눈 자투리 時間만도 다 이으면 며칠 밤낮은 될 것이네. 그런데 처음부터 떠날 作定으로 暫時 머문 사람처럼 말을 하니 참으로 알 수 없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아니, 애初에 同志는 어떻게 나를 찾아왔는가. 그래도 여기 올 때는 每番 바쁜 中에도 어렵게 時間을 내는 것 같았는데.” 

    그런 無何有 先生의 물음에 그는 暫時 머뭇거렸다. 그날 先生을 만나러 오면서 漠然히 생각해온 대로 그저 무심한 作別 人事로만 끝낼 것인가, 아니면 마침내 故國으로 돌아가는 오이디푸스처럼 아버지를 自身의 삶에서 지우기 前에 마지막으로 그 자취를 더듬어보는 길에 지나지 않았음을 밝힐 것인가. 그러나 머뭇거림은 오래지 않았다. 외로운 自主人을 더욱 외롭게 만들게 되더라도 그는 自身의 出處를 속이거나 向方을 감추고 싶지는 않았다. 

    “少年 時節 끄트머리쯤 저는 제법 眞摯하게 아버지를 찾아 나섰는데, 그 여러 길 가운데 하나가 어머니였습니다.” 

    그가 張皇하게 들리지 않도록 그렇게 虛頭를 꺼내는데, 先生이 誇張된 끄덕임과 함께 그의 거리낌 없는 吐露를 激勵하듯 맞장구를 쳐주었다. 

    “아, 그 동경대학에서 農經濟學을 했다는 椿府丈. 박헌영이 따라 越北했다고 들었고. 그런데 慈堂께서는 어디서 무얼 工夫하셨는지….” 

    “겨우 千字文이나 떼고 女四書(女四書) 몇 句節 귀동냥한 것밖에 없는 舞鶴의 殘飯(殘班) 閨秀였습니다. 結婚 뒤에 留學 中인 아들에게 疏薄(疏薄)받지 않게 하려는 媤어머니의 配慮로 1930年代 後半에 新設된 女學校에 한 學期 다닌 적이 있지만, 그걸로 敎育받은 新女性이 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한때 熱烈한 黨 일꾼이었고, 女盟(女盟)에서 宣傳 煽動에 動員된 적도 있었음을 수줍게 告白하는 것을 듣고 저는 그걸 可能하게 한 것이 아버지임을 直感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어머니를 통해 아버지를 찾아보았는데 거기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아나키스트 痕跡을 보게 되었습니다.” 

    “自主人의 길을 그런 異常한 經路로 접어들게 되는 수도 있군. 그래 慈堂께서 보여준 椿府丈의 자취는 어떤 것이었는가?” 

    “아버님께 들은 대로 傳한다는데, 어머님이 傳하는 마르크시즘의 여러 槪念이나 用語 大部分이 제게는 妙하게도 아나키즘의 그것들로 들렸습니다. 勿論 그때 내가 理解하는 아나키즘은 高等學校 世界史 敎科書 모퉁이에 나오는 아나키즘 紹介 水準을 크게 넘지는 못했겠지만, 어쨌든 階級과 事由(私有)의 發生, 勞動, 分配, 賃金 利子, 剩餘價値로 이어지는 一連의 槪念은 어머님이 注入받은 時期로부터 數十 年이 지난 그때의 回想에서도 古色蒼然한 아나키的 빛과 熱氣를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具體的 狀況을 생생하게 드러내기 위해 李相花(理想化)된 過去로서의 遠視共産社會나 空想的 社會主義 쪽의 象徵的 比喩가 제게 그런 印象을 주었을 것입니다만, 어머니는 敵(赤)과 黑(黑)을 嚴密하게 區分하지 못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희 故鄕에도 아나키즘 傳統 같은 것이 稀微하게 살아 있어서인지 모르지만.” 

    “젊은 同志가 한 番도 하지 않은 얘기를 떠나가는 이 마당에야 듣게 되는군. 그렇지, 그들과 우리는 배가 다른 兄弟, 그러나 生來的으로는 그래서 오히려 敵愾心과 正統 是非가 많은 怏宿(怏宿) 兄弟지.” 

    그날 그는 異常하게도 無何有 先生의 집에 오래 머문 것 같은 記憶이 없다. 그때까지의 이야기도 한 자리에 선 채로 다 한 것 같고 그 뒤의 조금 더 이어진 것 같은 對話도 그리 印象 깊게 記憶에 남은 게 없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先生의 집을 나설 때 들은 말은 오래 가슴 저려하며 記憶했다. 

    “나는 日本 留學 時節에 처음 대면한 自主人의 李箱과 一部 내 故鄕 안의(安義)의 어두운 知的 傳統을 물려받아 限平生 이 길을 걸어왔네. 처음 大學 講壇에 서면서는 더 많은 젊은 同志들과 함께 이 길을 가는 꿈도 꾸었지만 이제는 나도 늙었네. 歲月은 우리에게 冷淡했으며 인터내셔날에서 마르크스와 바쿠닌의 激突로 드러나고 풍뢰회(風雷會) 흑도회(黑濤會) 時節과 우리 動亂에서는 서로 被奪까지 보기를 서슴지 않았던 적(赤)도, 먼저는 日本 帝國主義 모습으로 나타나 여지없이 우리의 싹을 짓밟고 分斷 뒤에는 徹底한 冷淡과 默殺로 우리를 枯死시켰던 백(白)도 한가지로 우리에게 苛酷했지. 하지만 젊은 同志가 오든 가든 나는 이 길을 가는 수밖에 없네. 그것도 全 時代의 迷妄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燦然한 自主人의 世界로 行進해갈 것이네. 잠깐이라도 멈추면 蜃氣樓처럼 흩어져버릴 行進일지라도. 잘 가게. 젊은 同志. 아버지를 지운다는 것이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끝내 다시 돌아올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돌아오고 싶을 때는 언제든 돌아오게.” <繼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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