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年 在位 내내 肝疾患 苦痛|新東亞

45年 在位 내내 肝疾患 苦痛

黃疸, 腹痛, 눈病 달고 산 肅宗

  • 이상곤│甲山韓醫院 院長·韓醫學 博士

    入力 2013-05-22 14:55:00

  • 글字크기 설정 닫기
    45년 재위 내내 肝질환 고통

    景福宮 勤政殿에서 열린 ‘肅宗ㆍ인현왕후家禮의’ 再現行事. 仁賢王后는 肅宗의 繼妃다.

    아마도 가장 이른 나이에 韓藥을 먹은 사람은 現在 海兵隊에서 服務 中인 筆者의 작은아들(한의대 在學)일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黃疸을 앓아 韓藥을 먹었기 때문이다. 筆者는 當時 茵蔯蒿湯을 處方해 10cc씩 나눠 사흘 程度 먹였다. 그랬더니 症狀이 바로 사라졌다.

    요즘 “韓藥은 肝(肝)에 나쁘다”는 洋方 쪽 意見만 듣고 韓藥 服用에 拒否感을 가진 이가 적지 않다. 하지만 不過 100年 前까지만 해도 肝疾患에 韓藥이 널리 쓰였고 藥效도 좋았다. 韓藥 말고는 달리 藥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韓藥이 間에 나빠 患者에게 害를 끼친 事例는 보기 힘들다. 朝鮮의 王들도 肝炎이 왔을 때 韓藥으로 治療했고 그 效果를 톡톡히 봤다. 代表的 人物이 肅宗(李諄·1661~1720)이다. 肅宗의 肝炎 症狀은 15歲 때인 在位(1674~1720) 2年 9月에 始作된다. 實錄은 이렇게 傳한다.

    “9月 13日 머리가 아프고 咽喉痛이 생기자 衣冠들과 共助佐郞 이국헌이 感氣로 診斷하고 代表的 感氣 處方인 刑房敗毒散을 服用케 한다. 이튿날에도 頭痛과 咽喉痛이 持續되자 肅宗의 外堂叔 金錫胄가 나서 衣冠들과 함께 處方을 變更한다. 小柴胡湯에 麥門冬 葛根 知母 황백을 더하여 處方한다.

    以後 增稅는 好轉되는 듯했지만 9月 17日 갑자기 水剌를 들기 싫어하면서 惡寒과 惡心 症狀이 始作된다. 가슴이 답답한 症狀에 焦點을 두고 兩擊産을 處方하기도 하고, 밥맛을 당기게 하는 異攻散, 逍遙山이라는 處方으로 바꿔보기도 하지만 好轉되지 않았다. 9月 25日 肅宗의 얼굴과 눈이 누렇게 變해가자 衣冠들은 黃疸 症勢로 診斷하고 處方을 急旋回한다. 黃疸을 治療하는 時令湯을 處方한 지 3日 만에 얼굴과 눈의 노란빛이 가시기 始作한다. 皮膚色에 潤氣가 돌고 오심 症勢가 줄어들면서 밥맛이 돌아왔다.

    時令湯을 쓴 지 5日이 지난 9月 30日 黃疸 빛은 完全히 사라졌고 수라와 沈水도 日常的 狀態가 되면서 時令湯을 보다 溫和한 處方인 백출제습탕으로 바꿨다. 10月 2日 黃疸을 治療한 지 7日 만에 衣冠들에게 ‘平常時와 같으니 더 以上 묻지 마라’고 下校한다.”



    肝은 봄과 나무를 象徵

    現代醫學은 黃疸을 誘發하는 肝炎을 一般的으로 前黃疸氣, 黃疸氣, 回復期 3期로 나눈다. 戰況달기는 黃疸이 생기기 1~2週 全義 期間으로 若干의 熱感과 關節痛, 疲勞感, 無氣力症 等 感氣 症狀과 같은 症勢가 나타나고 食慾不振, 惡心, 嘔吐 等 消化器系 症狀과 上腹部 不快感을 呼訴한다. 黃疸氣는 黃疸 빛이 나타나기 始作하는 1~2週間으로 症狀이 가장 甚한 期間이다. 回復期는 黃疸이 漸次 사라져 1~6週 뒤 回復되는 期間이다.

    肅宗의 治療 記錄들은 이런 解釋과 딱 맞아떨어진다. 韓藥 服用 一週日 만에 黃疸이 사라지고 肝炎 症勢가 回復됐다는 것은 現代醫學의 視角으로 봐도 眞記錄이다. 그만큼 韓藥의 肝炎 治療效果가 뛰어나다는 證據다. 안타까운 事實은 肅宗이 어린 時節 黃疸을 앓았으면서도 肝 健康을 管理하지 못하고 肝과 關聯된 疾病을 앓다 肝硬化 症勢로 生을 마감했다는 點이다. 그는 黃疸 發病 以後에도 45年을 더 살았지만 平生 肝疾患 關聯 症狀을 나타냈다.

    韓醫學에서 肝은 봄과 나무를 象徵한다. 여린 새싹들이 땅을 비집고 솟아오르는 것은 봄이 가진 生命力, 卽 힘 때문이다. 새싹의 生命力, 自身보다 數百 倍 무거운 흙더미를 뚫고 地上으로 솟아나는 힘은 可히 暴發的이라고 할 수 있다. 英語로 봄은 ‘spring’이다. 龍鬚鐵처럼 壓縮된 힘으로 튀어오르는 에너지를 가졌다는 뜻이다.

    象徵은 現象과 내면 秩序의 組合이다. 이처럼 間의 本質은 튀어오르는 陽氣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솟아오르는 힘을 收斂하고 진정시켜 에너지의 均衡을 이루려 한다. 이는 肝이 가진 또 하나의 性質, 卽 陰氣다. 우리 身體가 갖은 方法을 動員해 體溫을 攝氏 36.5度로 維持하는 것처럼 肝도 恒常性을 追求한다. 陰氣와 陽氣를 조화시키려고 努力하는 것이다.

    量的인 뜨거운 힘은 精神的으로는 興奮과 憤怒로 表出되며 鬪爭을 主導한다. 눈은 불꽃으로 이글거리다 甚하면 病이 든다. 눈은 間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反面 이렇게 밖으로 터져 나가는 火를 진정시키고 收斂해 均衡을 이루도록 하는 힘이 陰氣다. 陰氣의 代表的 飮食은 신맛을 내는 것들이다.

    韓醫學은 間에 疾病이 생기면 肝과 관계된 系統의 機關에 全身的 症狀을 일으킨다고 본다. 興奮을 잘하고, 눈이 나빠지며, 아랫배가 緊張되고 굳어진다. 아랫배는 튀어오르는 間의 量的 屬性을 드러내는 밑바닥이다. 東醫寶鑑과 中國 醫學書 難境(難經) 또한 아랫배와 눈에 나타나는 症狀, 火를 잘 내는 性格 等을 肝疾患 診斷의 要點으로 봤다.

    ‘肝이 병들면 兩쪽 옆구리 아래가 아프면서 아랫배까지 땅기고 성을 잘 낸다(동의보감). 겉으로 나타나는 症狀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얼굴빛이 퍼렇고 성을 잘 낸다. 속으로 나타나는 症狀은 배꼽 왼쪽에 動機(動氣)가 있으며 눌러보면 단단하고 若干 아프다. 病으로는 오줌이 방울방울 떨어지며 大便이 잘 나오지 않는다. 눈은 肝이 虛할 때 잘 보이지 않는다(난경).’

    이들 醫學書는 肝이 虛할 境遇, 卽 陰氣가 모자랄 때는 신맛이 나는 飮食인 참깨 개고기 자두 부추를 먹어 간을 步하도록 했다. 疲勞할 때 마시는 한放 드링크劑에 신맛이 나는 芍藥이 많이 든 것도 그 때문이다. 肝이 실하다는 槪念은 肝이 鬪爭을 主導하는 將軍이라는 定義에서 由來한다. 鬪爭은 緊張이 必須이며 筋肉의 지나친 緊張은 쥐가 날 듯 땅기는 症狀을 誘發한다. 이런 症狀을 緩和하려면 단맛이 든 멥쌀, 대추, 쇠고기, 아욱 等을 勸한다. 이런 論理가 韓醫學에서 말하는 食補(食補)의 核心이다.

    興奮하고 배 아프고

    肅宗은 韓醫學書에 나오는 이런 모든 症狀을 平生 달고 살았다. 15歲 때 황달성 肝炎을 앓은 以後 작은 일에도 興奮을 했으며 쓸데없이 애肝腸을 태웠다. ‘애肝腸’이라는 말 속에도 간 疾患에 對한 韓醫學的 診斷의 核心이 숨어 있다. 오죽하면 간醬(肝腸)을 녹이고, 태우고, 졸이고, 말린다는 表現을 썼을까. ‘애’는 焦燥한 마음속을 뜻하는 純우리말로 焦燥함을 强調해서 붙인 것이다. 實錄은 肅宗이 憤怒한 모습을 여러 次例 記錄했다.

    “임금의 노여움이 暴發하여 漸次로 煩惱가 甚해져 입에는 꾸짖는 말이 끊어지지 않고, 밤이면 또 잠들지 못하였다. 內醫院의 門안에 비답하기를 ‘마음이 답답하여 숨쉬기가 곤란하고 밤새도록 煩惱가 甚하여 자못 收拾할 수가 없다’고 했다.”(재위 14年 7月 16日)

    在位 21年 9月 13日 肅宗은 繼續된 凶年에 對한 解決策을 쓴 備忘記(備忘記)를 臣下들에게 내리면서 “큰 病을 앓은 나머지 조금만 思索함이 있어도 문득 血壓이 올라온다”고 했다. 實錄에는 달아오르는 熱을 주체하지 못해 火를 내는 肅宗 때문에 臣下들이 덜덜 떠는 모습을 描寫한 대목도 있다.

    “최계옹이 上訴하기를, 臣下들이 벼슬을 桎梏(桎梏)처럼 여기고 宮에 들어가는 것조차 무서워하며 벌벌 떤다. (賃金 앞에 서면) 발을 포개고 서서 숨을 죽인다고 했습니다.”

    當時 弘文館이었던 최계옹은 1710年(在位 36年) 肅宗의 지나친 便黨性과 火를 잘 내는 性格的 缺陷에 直擊彈을 날리는 上疏를 쓴 後 濟州牧使로 左遷된다. 肅宗은 憤怒調節 障礙 症候群쯤 되는 疾患을 앓은 셈이다. 모두가 肝이 튼實하지 못했기 때문이 벌어진 일이다.

    韓醫學에선 아랫배가 땅기고 아픈 症狀을 疝症(疝症)이라고 하는데, 間에 問題가 생기면 이런 症狀이 찾아온다. 꼭 간 疾患이 아니어도 疝症이 생길 수 있다. 차가운 물 속에서 性關係를 가진 後 女性의 아랫배가 차갑고 땅기고 아프면서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苦痛을 呼訴하는 것도 이에 屬한다. 性關係 後 아랫배가 물에 依해 식으면서 筋肉이 굳어져 아래를 데워야 할 기운들이 筋肉 사이로 스며들지 못하고 위로 치밀어 올라 생긴 症狀이다. 이런 症狀에는 蟠葱散이라는 處方이 特效다.

    中國 最高(最古)의 醫學書인 黃帝內經은 疝症을 ‘아랫배에 病이 생겨서 배가 아프고 大小便이 나오지 않는 것인데 찬 기운 때문에 생긴다’고 說明했으며, 醫學入門은 ‘疝症이 間의 疾病으로 發生한다’고 規定했다. 肅宗의 첫 疝症 發病 記錄은 在位 22年 12月 3日에 나온다. ‘上(上)에게 처음 疝症이 發病하여 아랫배가 찌르는 듯한 者통이 甚했다. 狀況이 매우 急하여 曲骨이라는 經穴에 뜸을 뜨고 나았다’고 적혀 있다. 在位 29年에는 肅宗이 自身의 疝症과 함께 火症에 對해서도 답답함을 呼訴한다.

    “床이 말하기를, 몇 年 前부터 이 病(疝症)의 뿌리가 이미 생겼는데, 처음에는 若干의 痛症을 느낄 뿐이더니 어느 새 이 地境이 되었다. 賞이 또 歎息하기를, 사람이 자고 먹는 것을 제때에 하여야 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였다. 性質이 너그럽고 느슨하지 못하여 일이 있으면 내던져두지를 못하고 出納(出納)하는 文書를 꼭 두세 番씩 훑어보고, 듣고 決斷하는 것도 遲滯함이 없었다. 그러자니 午後에야 비로소 밥을 먹게 되고 밤中에도 잠을 자지 못하였다. 그래서 火症(火症)이 날로 성하여 이 地境에 이른 것이다. 내가 病의 原因이 있는 곳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어쩔 道理가 없다.”

    45년 재위 내내 肝질환 고통

    肅宗의 눈病을 治療했을 것이라고 推定되는 굼벵이(왼쪽)와 綠內障 治療에 使用된 냉이.

    눈病 治療하는 굼벵이

    肅宗은 눈病 때문에도 苦生했다. 勿論 그 뿌리는 간 疾患이었다. 在位 30年 12月 11日 實錄은 이렇게 적었다.

    “火症이 뿌리내린 지 이미 오래고 나이도 衰해 날로 깊은 痼疾이 되어간다. 무릇 사람의 一時的 疾患은 고치기 쉽지만 가장 治療하기 어려운 것은 火症이다. (…) 오랜 時間 數應하면 火焰이 위로 올라 비록 한겨울이라도 손에서 負債를 놓을 수가 없다. 나의 눈病은 여기에서 起因한 것이다.”

    肅宗 43年에는 눈이 어두워져 臣下들의 報告조차 葬地(壯紙)에 큰 글씨로 簡略하게 쓰도록 했다. 甚至於 婚禮式을 올린 後 人事 온 王世子 夫婦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내가 눈病이 이와 같으니 王世子빈의 얼굴을 보고 싶어도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라고 歎息했다.

    韓醫學은 눈을 불의 通路라고 본다. 어두운 밤길에서 고양이를 보면 눈이 파랗게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肝 疾患으로 發生한 憤怒와 焦燥함의 花甁은 불의 通路에 불을 더해 안 神經을 위축시킨다. 肅宗의 눈病에 內醫院은 公廳(空靑)이라는 藥물을 썼다. 記錄엔 ‘中國에서 어렵게 求한 貴한 藥물’이라고 돼 있다. 韓醫學에서 밝히는 空靑의 藥理作用은 이렇다.

    ‘間에 禍가 있으면 피가 뜨겁고 氣가 위로 치솟아 血脈이 통하지 않게 된다. 間에 熱을 내리면 五臟이 安定되어 눈의 여러 가지 症狀이 回復되는데 空靑의 찬 맛은 쌓인 熱을 없애준다.”

    公廳은 楊梅靑(楊梅靑)이라고도 한다. 청은 色깔, 功은 內部가 비어 있음을 의미한다. 楊梅는 模樣을 뜻하는데 中國飮食店에서 後食으로 나오는 과일 餘地(枝·리즈)와 비슷하다. 구리가 있는 鑛山에서 나며 속이 빈 孔雀石을 가리킨다. 孔雀石 속에 난 구멍에 물이 들어 있는 것을 最高로 여기며 비어 있는 것을 그다음으로, 속이 찬 것을 하품으로 본다. 좋은 것은 綠內障으로 實名하거나 바람이 불면 눈물이 나는 症狀, 눈에 膜이 생겨서 가리는 瞖膜(膜) 疾患을 治療한다.

    하지만 實錄은 公廳이 그다지 效驗이 없었다고 記錄했다. 그렇다면 視力減退 症狀을 治療한 藥은 무엇이었을까. 記錄에는 없지만 推論하자면 굼벵이를 쓰지 않았을까 싶다. 中國 淸나라 때 나온 藥物學書인 本經素症은 굼벵이의 效能을 이렇게 說明한다.

    ‘人體에서 피(血)는 飮食物이 胃腸에서 삭고 삶아지고 쪄지는 더러운 狀態에선 벗어났지만 맑은 에너지인 氣(氣)로 變換되기 前 狀態의 物質이다. 飮食物을 받아들여 깨끗한 血液으로 轉換하는 役割은 肝이 맡는다. 굼벵이는 더러운 두엄에서 태어났지만 가장 맑은 매미로 탈바꿈한다. 그래서 더러운 것을 맑게 하는 作用을 한다. 血液이 말라들어 가거나 나쁜 피를 淨化해 눈이 어두워지는 것을 治療한다.’

    요즘 市中에서 肝炎이나 肝硬化에 굼벵이를 쓰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處方이다.

    마지막까지 苦痛 준 肝

    많은 사람이 果然 韓醫學이 눈 疾患을 治療할 수 있었을지 疑問을 나타내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失明을 일으키는 綠內障度 治療했다. 더 대단한 것은 그 治療에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냉이(正確하게는 냉이의 씨앗)를 썼다는 點이다.

    냉이 氏의 藥名(藥名)인 석명자(蓂子)의 漢字 뜻은 냉이의 效能과 密接한 關係가 있다. 席()은 나무를 깨서 나눈다는 뜻이고, 名(蓂)은 어둡다는 뜻이다. 눈이 캄캄하고 어두운 것을 깨서 없앤다는 意味다. 東醫寶鑑에 記錄된 냉이 氏의 效能은 좀 더 具體的이다. ‘靑盲木通(靑盲目痛)하여 事物을 볼 수 없는 疾患을 治療한다’고 쓰여 있다. 靑盲木通은 綠內障의 典型的 症狀으로, 겉으로 보기엔 눈이 멀쩡하나 앞을 보지 못하고 痛症이 甚한 狀態를 가리킨다.

    韓醫學은 綠內障이 防水의 흐름이 나빠지면서 發生하는 것으로 본다. 房數는 水晶體와 角膜 사이에 흐르는 눈 속의 눈물로, 血液에서 걸러져 나온 것인데 흐름이 나빠지거나 眼球 속에 고이면 눈의 壓力이 높아지고 視神經을 눌러 視力을 저하시키고 痛症을 일으킨다.

    냉이는 물을 몸 밖으로 뽑아내는 이수나 利尿 作用을 통해 綠內障을 治療한다. 特히 洞네 어귀 냇가에 많이 자라는 큰황새냉이가 效驗이 좋다. 東醫寶鑑에 나오는 석명자는 큰황새냉이를 말한다. 물가에 자란 것이 눈 속의 물을 빼내는 效能을 發揮한다고 여겼다. 어린 筍과·잎은 뿌리와 더불어 이른 봄을 裝飾하는 나물이다. 냉이국은 뿌리도 함께 넣어야 참다운 맛이 난다. 데워서 우려낸 것을 잘게 썰어 나물粥을 끓여 먹기도 한다.

    하지만 안질환이 問題가 아니었다. 肅宗 在位 40年에 들어서면서 肝疾患은 惡化一路였다. 難境에 ‘肝이 병들면 오줌이 방울방울 떨어지며 大便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肅宗은 이런 症狀을 그대로 보였다. 在位 40年 4月 27日 實錄은 “相議 患候가 7個月 동안 繼續돼 增稅가 百 가지로 變해 浮氣(浮氣)가 날로 더해졌다”고 했다. 浮腫이 繼續되자 宣祖의 曾孫으로 宗親이었던 유천군 이정은 “性質이 强力한 藥을 쓰면 안 된다”는 語義들의 反對를 무릅쓰고 ‘도수환(導水丸)’이라는 處方을 固執했다. 이 藥이 크게 效驗을 보이자 感歎한 肅宗은 스스로 詩를 지어 그의 功勞를 致賀했다.

    “여덟 달을 온갖 房술로 다스렸지만 한 가지 丸藥으로 빠른 效驗을 얻었네. 至極한 그 功勞 내 마음에 새겨두니 宗親에게 恩寵을 표하노라.”

    유천군이 處方한 도수환은 大黃, 木桶, 牽牛子 等의 藥材를 包含한 藥으로 强力한 利尿 效果와 大便의 館長 效果를 겸한 處方이었다. 이 藥으로 큰 效驗을 봤다는 記錄으로 미루어 肅宗에겐 大小便을 제대로 못 본 게 가장 큰 問題였던 셈이다. 이런 一連의 治療 事實을 살펴 보면 肅宗의 主要 疾病은 肝疾患이었으며, 그 範疇 안에서 持續的으로 狀態가 惡化됐음을 알 수 있다. 肅宗은 在位 45年 10月 아들 年齡群이 死亡하자 健康이 急速度로 나빠졌다. 46年 5月에는 肝硬化 末期 症勢인 復讐가 차올랐다.

    “侍藥廳에서 入診하였다. 聖上의 患候는 腹部가 갈수록 더욱 膨脹하여 배꼽이 불룩하게 튀어 나오고, 하루에 드는 米飮이나 粥의 等屬이 몇 홉度 안 되었으며, 呼吸이 고르지 못하고 精神이 때때로 昏睡狀態에 빠지니, 온 朝廷과 百姓(中外)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以後 한 달 만에 肅宗은 世上을 떠났다.

    45년 재위 내내 肝질환 고통

    京畿 高陽市 西五陵 內 肅宗의 무덤인 明陵.



    痘瘡과 인두法

    45년 재위 내내 肝질환 고통

    池錫永이 牛痘 施術에 使用한 禹頭枕과 琉璃板.

    肅宗의 목숨을 빼앗은 病이 肝疾患이라면 그의 人生에 가장 커다란 影響을 끼친 疾患은 朝鮮時代 民衆을 무척이나 괴롭힌 痘瘡(痘瘡·天然痘)이다. 예부터 마마, 손님, 砲槍(疱瘡)으로 불렸으며 日本에서는 天然痘(天然痘), 中國에서는 天火(天禍)라 불린 무서운 疾病이었다. 우리나라에선 百世瘡(百世瘡)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百世瘡은 平生 한 番은 겪어야 하는 傳染病이라는 뜻으로, 한番 傳染病에 걸려서 살아남으면 再發하지 않는다는 免疫의 基本原理를 우리 祖上들이 理解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天然痘는 空氣로 傳播되는 바이러스(variola)가 일으키는 疾患이다. 一旦 感染되면 高熱과 發疹이 일어나고 頭痛, 嘔吐, 몸살 症狀이 隨伴되며 2~4日이 지나면 얼굴, 손, 이마에, 以後에는 몸통에 各各 發疹이 생긴다. 症狀이 일어난 지 8~14日이 지나면 딱지가 앉고 흉터가 남는다. 天然痘에 對한 記錄은 4世紀頃 陳(晉)나라 醫師인 葛洪이 醫書에 詳細히 記錄한 것이 처음이다. 우리에겐 朝鮮 太宗 때부터 本格的인 記錄이 나타나 近代에 이르기까지 가장 무서운 疾病으로 認識됐다. 濟衆院 1次年度 報告書는 4歲 以前의 嬰兒 40~50%가 痘瘡으로 死亡한다고 했다.

    朝鮮 後期엔 痘瘡 治療法으로 인두法을 主로 썼다. 인두法을 처음 紹介한 人物은 公式的으로는 丁若鏞이다. 어린 時節 痘瘡을 앓다가 죽을 뻔한 데다 여러 아이를 痘疹으로 잃은 아픔 때문에 인두法에 關心을 갖게 됐다. 淸나라 康熙字典에서 “모든 두즙(痘汁·天然두汁)을 코로 받아들여 숨 쉬면 (天然痘가 빠져) 나가게 된다. 이를 神通한 種痘法이라고 한다”라는 句節을 보고 疾病을 內部에서 外部로 밀어내는 普遍的 韓醫學的 論理에서 外部에서 內部로 심는 種痘法에 興味를 느끼게 된다.

    45년 재위 내내 肝질환 고통

    朝鮮의 義城(醫聖)으로 불리는 許浚. 一介 衣冠에 不過하던 許浚은 光海君의 天然痘를 治療함으로써 堂上官에 除授된다.

    核心은 痘瘡의 딱紙인 試料를 採取하는 方法이었다. 天然痘의 고름인 두張(痘漿)을 直接 採取해 쓰는 法과 痘瘡을 앓은 이의 옷을 입히는 法, 媽媽 자국을 말려 가루로 만든 뒤 코로 빨아들이는 法 等이 있었는데, 가장 安全하고 確實한 方法으로는 濕氣 있는 痘痕(痘痕·媽媽 자국)을 코로 빨아들이는 수묘법(水苗法)李 勸奬됐다.

    이런 方法은 잘못하면 感染의 危險에 露出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宗廟를 만드는데, 좋은 墓를 求해서 陶瓷器 甁에 넣고 密封해 숙墓 段階로 변화시켜 使用한다. 이때 모든 責任은 醫師가 짊어져야 한다. 그러자 市中에선 갖가지 荒唐한 이야기들이 나돌았다. 종두에 적합한 階節과 날짜, 試料 採取龍 아이의 選擇方法이 따로 있으며, 이를 잘 定해야 萬一의 危險에 對備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重要한 것은 이런 方式의 인두法이 分明히 效果를 보였다는사실이다.

    우리 歷史의 前面에 許埈珥 登場하게 된 背景에도 痘瘡이 있다. 一介 衣冠에 不過한 許浚이 語義 양예수를 제치고 宣祖의 寵愛를 받은 것은 光海君의 痘瘡 때문이었다. 光海君의 痘瘡을 果敢한 處方으로 治療하자 宣祖는 그를 一躍 堂上官에 除授했다. 許浚은 그 以前까지 痘瘡 症勢와 旣存 傳染性 疾患의 症狀을 區別하지 못하는 狀況에서 痘瘡이라는 이름을 正確한 病名으로 分離해 公式的인 醫學用語로 確立한다.

    天然痘 專門 醫師 有償

    肅宗에게 痘瘡은 잊을 수 없는 疾患, 怨讐 같은 疾患이었다. 첫 夫人인 인경왕후, 그다음으로는 肅宗 自身이 痘瘡을 앓았고, 王世子인 연령군度 痘瘡에 걸려 苦生했다. 特히 肅宗의 어머니 明聖王后는 肅宗의 痘瘡을 治療하기 위한 祈禱에 나섰다 무리해 世上을 떠난다.

    實錄에 記錄된 痘瘡의 첫 番째 犧牲者는 肅宗의 前 夫人이자 謝氏南征記로 有名한 金萬重의 조카딸 인경왕후였다. 肅宗 在位 6年의 일이었다. 10月 19日 인경왕후가 痘瘡이라는 確診이 떨어지자 肅宗과 明聖王后는 昌慶宮으로 옮기고 인경왕후는 敬德宮에 남아 있다 10月 26日 昇遐한다. 在位 9年 10月 18日에는 肅宗이 痘瘡에 걸린다. 治療는 처음엔 內醫院에서 主導했다. 하지만 升麻葛根湯이라는 處方이 오히려 發熱 症勢를 甚하게 일으키자 痘瘡 專門醫 有償(柳)李 入試海 治療의 主導權을 行使한다. 화독湯으로 熱을 가라앉힌 後 東醫寶鑑의 步元湯 處方을 썼다. 10月 27日 얼굴에 생긴 곪은 腫氣 때문에 症狀이 다시 심해지자 社성회천湯이라는 處方으로 바꾸어 投與한다.

    社성회천湯은 보원湯이라는 處方에 雄黃(雄黃·天然 砒素化合物)을 더한 것으로 宣祖, 光海君 때의 人物인 학송 전유형이 만든 獨自的인 處方이다. 전유형은 解剖學的 知識을 重要하게 여긴 獨特한 醫師이자 文身으로, 痘瘡에 對한 그의 處方은 박진희 이경화 等 朝鮮 後期 醫師에게 널리 퍼졌다. 이런 努力 德澤일까. 10月 29日 肅宗은 熱이 내리고 얼굴에서 딱紙가 떨어지면서 好轉됐다. 治療를 主導한 유상은 ‘增補山林經濟’를 지은 유중림의 아버지로 庶孼 出身이었다. 以後 유상은 功勞를 認定받아 同知中樞府事로 두 階級 特進의 榮譽를 누리면서 年齡群의 痘瘡 治療에도 參與한다.

    嚴冬雪寒의 찬물 洗禮

    肅宗의 痘瘡은 權力指導까지 바꿔놓았다. 明聖王后가 肅宗의 治療를 위해 基良法(祈禳法)을 行하다가 昇遐했기 때문이다. 14歲 어린 나이에 卽位한 肅宗은 어머니의 强力한 保護를 받았지만 結局 痘瘡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다. 實錄에 記錄된 明聖王后의 모습은 한마디로 ‘극성스러운 어머니’ 그 自體였다. 在位 1年 6月 21日의 記錄이다.

    “當初에 自轉(明聖王后)은 여러 公子들이 隱密히 火를 일으킬 뜻을 품었음을 알고, 幸여 毒殺 試圖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임금의 飮食을 모두 親히 장만하여 손수 갖다 드렸다.”

    大妃의 過度한 干涉으로 直接 飮食을 장만하다보니 臣下들 사이에 뒷말이 나왔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엄마標 집밥’ 德分일까. 肅宗은 朝鮮 王 中에서 英祖 다음으로 在位期間이 길었다.

    明聖王后의 過度한 子息사랑은 結局 自身의 命을 재촉한다. 急한 마음에 무당을 불러 點을 봤는데 肅宗의 痘瘡이 明聖王后에게 든 三災(三災) 때문에 생겼다는 占卦를 받는다. 明聖王后는 悲壯한 覺悟로 무당의 處方에 따라 삿갓을 쓰고 素服차림으로 물벼락을 맞았다. 嚴冬雪寒에 물벼락을 맞은 그女는 結局 病을 얻고 그해 12月 5日 昇遐했다. 實錄은 이렇게 記錄한다.

    “床이 痘瘡을 앓았을 때 巫女 幕禮가 術法을 가지고 禁中(禁中·大闕)에 들어와 基良法을 行하였는데 對備가 每日 차가운 샘물로 沐浴할 것을 請하였다.” “朴世采가 上疏하여 맨 먼저 이 말을 내었는데 임금이 처음에는 그런 일이 없다고 하였으나 朝廷의 臣下들이 여러 番 爭論하여 마침내 流杯하게 되었다.”

    45년 재위 내내 肝질환 고통
    이상곤

    1965年 慶北 慶州 出生

    前 大邱한의대 안耳鼻咽喉皮膚科 敎授, 大韓韓醫師協會 外觀科學會 理事

    現 甲山韓醫院 院長, 韓醫學 博士, 東亞日報·農民新聞·프레시안 칼럼 進行

    著書 : ‘콧속에 健康이 보인다’ ‘코 博士의 코 이야기’ ‘낮은 韓醫學’ 等 多數


    嚴冬雪寒에 차가운 물로 沐浴하다 對備가 죽자 臣下들은 巫女 幕禮를 處刑하라고 여러 次例 建議하지만 肅宗은 끝내 流配刑으로 事件을 終結한다. 明聖王后의 아버지는 西人 김우명(1619~1675)으로 南人(尹鑴)과의 對立에서 敗하고 火病으로 죽은 人物이다. 明聖王后는 말과 글로 ‘飮食을 끊고 自決하겠다’는 말을 내릴 程度로 南人을 憎惡한 人物이었다. 男인 出身 장옥정(張禧嬪)李 명성왕후에 依해 쫓겨난 것도 그 때문이다. 肅宗은 어머니가 죽자 장옥정을 다시 入闕시켜 宿願에 封했다. 天然痘가 朝廷의 權力指導까지 바꾼 셈이다. 朝鮮時代도 그렇지만, 只今도 指導者의 疾病과 健康은 國家의 運命을 바꿀 수 있는 要素가 된다.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