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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小說이‘시적(詩的)’이라는 건 蔑視”|新東亞

“내 小說이‘시적(詩的)’이라는 건 蔑視”

金裕貞 文學賞 받은 小說家 심상대

  • 이소리│是認·文學in 代表 lsr21@naver.com

    入力 2012-05-23 11: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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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술, 携帶電話 끊고, 빚쟁이 避해 山속 홀로 生活
    • “小說을 쓰는 수밖에 뾰족한 方法이 없더라고요”
    • 아버지가 준 傷處로 아직도 아버지라는 말이 두려워
    • 書齋에 갇혀 小說 쓰는 글쟁이 輕蔑
    • 12年 空白期에 大學院 工夫와 開城工團 魅力에 빠져
    • 앞으로 ‘小說家 심상대’ 正體性 糾明하겠다
    “내 소설이‘시적(詩的)’이라는 건 멸시”
    小說家 심상대(52)가 中篇小說 ‘단추’로 4月 第6回 金裕貞文學賞을 탔다. 2001年 短篇小說 ‘米(美)’로 第46回 現代文學賞을 받은 지 11年 만이다. ‘단추’는 꿈속에서 잃어버린 단추를 찾아 헤매는 男子와 그 단추를 現實에서 주운 男子의 삶이 엇갈리면서, 이 時代를 사는 젊은이들이 지닌 不安한 꿈과 現實을 담아낸 作品이다.

    심상대 하면, 많은 이가 小說集 ‘墨湖를 아는가’를 떠올린다. 그가 新春文藝에 應募했다 落選한 作品 11篇이 고스란히 실려 있는 이 小說集은 그의 出世作이다. 이 小說集에 對해 묻자 “그 當時 新春文藝 豫審, 本心 審査委員들의 無識함 때문에 誕生했다”고 잘라 말했다. 헛웃음이 났지만 自信感 있는 그의 態度에 내色할 수 없었다.

    携帶電話 없이 江原道 疊疊山中에 홀로 살고 있는 그를 5月 8日 서울 강남구의 한 食堂에서 만났다. 江原道 山中에서 먹이를 찾아 두리번거렸을까. 山짐승처럼 그의 눈이 强烈하게 빛났다.

    “제 小說의 核心은 저도 몰라요”

    읽고 있던 冊갈피에 손가락을 끼운 채 電話하면서 民友는 줄기차게 自身의 꿈을 辯護했다. 단추는 漢江에 던져버렸고 단추 떨어진 코트 입은 꿈을 다시 꾸게 됐고, 그래서 幸福하다는 內容이었다. 自身은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이 두렵지 않고, 가난이 두렵지 않으므로 貪慾에 빠지지 않아도 되며, 自身이 貪慾하지 않으므로 他人의 貪慾에 嘲弄당하거나 支配받을 理由가 없을뿐더러 自身은 抵抗할 理由고 相對도 없다고 그는 말했다. 누군가는 自身의 가난을 貪慾에 對한 抵抗이라 여기겠지만 事實은 抵抗이 아니라 自立 條件이라고. -‘단추’ 中에서



    “어젯 밤을 꼬박 새우고 4時間을 달려 서울로 왔어요. 一週日에 한 番 講義를 하고 家族을 만나기 위해 精神 사나운 서울에 옵니다. 어쩔 수 없이 서울을 오가곤 하지만, 江原道 疊疊山中에 있을 때가 가장 幸福해요.”

    어버이날이어서 딸을 데려왔다며 웃는 그의 얼굴에는 幸福感이 묻어났다.

    ▼ ‘단추’에서 말하고자 한 核心은 뭔가요?

    “自身의 作品에 對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사람은 藝術家가 아닙니다. 제가 쓴 小說이니 그 內容이라면 잘 알지만, 核心이 뭔지는 事實 저도 알지 못해요(웃음). 오히려 評論家나 學者가 對答해야 할 問題죠. 內容을 얘기하기도 쑥스럽고요.”

    ▼ 그럼 小說家가 된 理由는 뭡니까.

    “어린 時節, 제가 꿈을 小說家로 定하게 된 것은 세 사람의 影響 때문입니다. 幼年 時節 한글과 漢字를 가르쳐준 아버지와 江陵市 南陽초교 3學年 擔任先生님으로 제게 圖書館 管理를 맡기신 홍경호 先生님, 그리고 映畫 ‘봄봄’의 原作者 金裕貞 先生님이지요.”

    金裕貞文學賞은 스물아홉 꽃다운 나이에 夭折한 作家 金裕貞(1908~1937)을 기리기 위해 만든 賞이다. 江陵 胎生인 심상대가 春川 胎生인 金裕貞을 기리는 文學賞을 타기 前부터 둘의 因緣은 持續돼 왔다.

    “동해시 동호초교 4學年 때 아버지와 함께 只今은 불타버린 墨湖劇場에서 ‘봄봄’이라는 映畫를 봤어요. 김수용 監督 作品으로 申榮均·남정임·허장강이 出演한 映畫였는데, 映畫館을 나온 뒤 아버지가 이 映畫는 本來 小說이라 말해주신 거예요. 그 뒤 강릉시에 있던 삼문사라는 書店에서 金裕貞의 小說集을 사보게 됐어요.”

    데릴사위를 有心히 觀察하던 少年

    作家는 初等學校 4, 5學年 무렵부터 故鄕인 강릉시 옥계면 남양리 이웃에 사는 데릴사위를 有心히 觀察했다고 한다.

    “나도 ‘봄봄’처럼 데릴사위가 나오는 小說을 쓰려고 생각한 거죠. 問題는 그 데릴사위는 말만 데릴사위였지, 이미 나이 먹어 分家한 사람이었어요. 只今도 돌투성이 新作路에서 덜컹거리며 牛車(牛車)를 몰고 가던 그분의 모습이 떠올라요. 그런 努力들이 小說家로 만든 게 아닌가 생각해요.”

    ▼ 金裕貞의 삶과 文學은 어떻게 보나요?

    “金裕貞 先生님은 運命的으로 小說家의 삶을 산, ‘어쩔 수 없는 小說家’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經濟的 餘裕가 있거나, 剛斷이 있거나, 肺結核과 痔疾에 걸리지 않았거나, 박록주와 박봉자라는 女人에게 失戀당하지 않았거나, 이도저도 아니라 小說에 對한 才能까지 不足했더라면, 그는 故鄕마을을 背景으로 한 이러한 作品을 쓸 생각을 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點에서 金裕貞 文學의 많은 部分은 박록주라는 女人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봐야겠죠. 藥값이며 生活費를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쓰긴 써야 하는 狀況에서 그가 取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素材가 故鄕사람들 이야기였지요. 그의 슬픔과 孤獨과 落望에서 비롯한 유머와 패러독스가 어쩔 수 없이 그의 小說을 貫通하는 精神이 됐다고 봐요.”

    그는 質과 量의 面에서 본다면 金裕貞을 偉大한 小說家라 할 순 없지만, ‘그럴 듯한 거짓말’이라는 側面에서 본다면 金裕貞 小說은 小說이 가 닿아야 할 至高至順한 境地에 到達했다고 敷衍했다.

    ▼ 作家 심상대는 어떻습니까. 作家 金裕貞과 比較해보면요.

    “목숨을 건 戀愛도, 피를 吐하는 失戀도, 가슴이 썩어 문드러지는 離婚도 한番 하지 못하는 現在 小說家들이 眞正 부러워해야 할 人生 條件입니다. 저는 이미 그 나이가 지났으니, 眞正한 小說家가 되기엔 틀려먹었습니다. 登壇하자마자 피를 吐하고 죽었더라면 딱 좋았을 텐데 藝術家로서는 너무 오래 살고 있습니다. 小說家가 되기 前부터 그러했고, 되고 난 다음에도 하염없이 곧 죽어야지, 어서 죽어야지 했으나 나이가 들수록 自殺하기 어려워집니다. 어쩌죠?(웃음) 辯護士나 醫師 같은 분들은 한 番의 試驗으로 平生을 保障받습니다만 小說家는 小說家로서 公認받은 以後에도 한 篇 한 篇 쓸 때마다 하염없이 새로 始作해야 합니다. 習慣과 熟鍊으로 小說 쓰기가 어느 程度 몸에 익은 小說家라고 해도 새로운 小說을 始作할 때에는 登壇 못한 文學徒의 姿勢로 世界와 對敵하죠.”

    小說家 된 以後에도 絶望은 이어져

    作家 심상대가 가장 아끼는 作品은 ‘描寫總’이었다. ‘墨湖를 아는가’를 豫想했지만 아니었다. “生涯 가장 絶望的인 狀態에서 목숨을 걸고 쓴 小說이기 때문”이란다.

    作家가 20年 前 펴낸 小說集 ‘墨湖를 아는가’에 실린 小說 大部分은 軍隊를 除隊하고 大學入試를 準備하다 抛棄한 뒤, 物質과 模糊한 正體性을 克服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쓴 小說이다. 作家는 그때 청량리 精神病院 옆, 뱀처럼 생긴 길쭉한 房에서 貧血 때문에 嘔吐를 일삼으며 小說을 썼다고 한다. 너무 말라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그 때문에 스테로이드를 섞어 만든 正體를 알 수 없는 丸藥을 먹으며 눈에 핏발을 세우고 밤낮 小說을 썼지만 新春文藝에서 모두 떨어졌다. 作家는 그때 心情을 “新春文藝 公告가 나자 新聞社마다 한 篇씩 中篇 短篇 7篇을 應募하면서, 그中 서너 篇은 當選되리라 여겼지만 다 떨어졌다”고 回顧한다.

    “이미 新春文藝 審査委員의 資質을 알고 있었기에 화내지 않고, 다음해엔 모든 장르를 席卷하려고 했죠. 小說家가 되면 대단한 삶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어요. 웬걸요. 小說家가 된 뒤에도 絶望은 繼續됐고, 그래도 小說을 쓰는 수밖에는 뾰족한 方法이 없더라고요.”

    ▼ 大衆小說이나 武俠誌는 어떻게 보나요?

    “저는 武俠誌나 大衆小說은 于先 그 文章이 生理에 맞지 않아 한 張도 읽지 못합니다. 只今도 저는 以前에 읽었던 世界名作小說과 古典을 다시 읽지, 檢證되지 않은 이런저런 小說은 읽지 않지요. 제 人生이 그럴 만큼 넉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 小說을 世界名作小說과 比較해 拙作이라 評價한다면 當然히 首肯하지만, 하찮은 小說과 比較해 이러니저러니 評價받기는 싫습니다. 好評이든 惡評이든 評價는 제몫이 아니라 讀者의 몫이니 저로선 關心 없습니다. 評論家와 學者를 包含한 大部分의 讀者가 어떤 評을 하든 화내지도 않습니다.”

    作家는 2000年 聯作小說 ‘떨림’을 펴낸 뒤 2012年 1月 中篇小說 ‘단추’를 發表하기까지 短篇小說 2篇을 썼다. 2001年 5月 發表한 ‘달팽이 클럽’은 現代文學賞 受賞者 特輯이라 썼고, 2007年 7月 發表한 ‘같은 꿈’은 大學院 授業 課題物이었다. 어쨌든 그는 12年 만에 小說을 發表한 셈이다. 그가 2001年 現代文學賞을 받은 作品 ‘米(美)’는 2000年 以前에 脫稿한 作品이다.

    ▼ 그동안 왜 小說을 쓰지 않았습니까?

    “50代, 60代에도 小說을 제대로 쓰려면 人文學的 素養을 좀 더 培養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小說보다 더 價値 있는 일이 있다면 眩惑돼도 좋다는 判斷이 섰죠. 大學院에 編入해 美術史를 工夫했어요. 한동안은 開城工團의 魅力에 빠졌고요. 徹底히 敗北했고, 빚쟁이에게 逃亡 다니며 山中에 숨어 冊을 읽고 글을 쓰는 身世가 됐어요. 그런데 저는 過去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그는 ‘빚쟁이에게 逃亡 다니며 山中에 숨어’있는 理由에 對해 具體的으로 밝히길 꺼렸다. 政界에 나서려고 빚을 졌다는 程度로 理解해 달라고 했다.

    ▼ 開城工團의 魅力이라고 했는데요.

    “지난 4月에, 1年 만에 다시 開城工團을 찾았어요. 저는 그곳이 좋아요. 아침저녁으로 北側 勤勞者들이 出退勤 버스 53代에 나눠 타고 工場을 드나드는 光景은 感動的인 場面입니다. 5萬3000餘 名의 北側 勤勞者가 124個 南韓 業體에서 일하는 모습에 가슴 벅찼죠.”

    暫時 幸福한 微笑를 짓던 그의 表情이 바뀌었다.

    “只今부터 10年間은 小說을 써 ‘小說家 심상대’의 正體性을 糾明하려고요. 미뤄둔 몇 篇의 長篇小說 가운데 한두 篇을 出刊하고, 中短篇 小說도 發表하겠다는 게 올해 저의 目標예요. 이제까지 저는 輕薄하고 懶怠한 제 遺傳子의 性質에 이끌려 다닌 側面이 있습니다. 제 性格上 忍耐와 諦念이 必要한 長篇小說 쓰기가 버거웠고, 小說만큼이나 술과 親舊를 좋아해 궁둥이 붙이고 앉아 長篇 쓸 時間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술도 끊고 携帶電話도 끊고 山中에 혼자 살다보니 아침잠度 없어졌어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웃음)? 時間이 많아 長篇小說 쓰기에 適切한 體質이 된 거죠. 슬렁슬렁 始作해야죠.”

    그의 말처럼, 作家 심상대는 그동안 長篇小說을 한 篇도 쓰지 않았다. 小說의 참맛은 짧은 小說에 있다고 믿었다. 只今도 한 칼에 人生을 내리쳐 피가 철철 흐르는 그 斷面의 眞面目을 내려다보는 快樂은 短篇小說에 있다고 믿는다. ‘그런 境地에 到達하지 못하고 징징대는 自身의 박재(薄才)가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한다.

    文學賞 批判하며 受賞하는 건 爲先

    ▼ 小說이 詩的이라는 評이 많습니다.

    “제 小說이나 散文의 文章을 보고 詩的(詩的)이라는 評이 있다는 건 알아요. 그런데 이런 評價는 稱讚이 아니라 蔑視입니다. 散文은 散文답다는 소리를 들어야지 詩와 비슷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詩에 對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쓸 재주도 없어요.”

    심상대 關聯 記事를 보면, 作家는 2001年 現代文學賞을 받을 때 文學賞 制度에 對한 유머 넘치는 批判으로 文壇 안팎에서 話題를 모은 것으로 記錄돼 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달랐다.

    “많은 분이 誤解하신 듯한데, 저는 2001年 現代文學賞 受賞所感에서 文學賞 制度에 對해 어떠한 批判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어요. 批判을 하면서도 賞을 받는다면 爲先이죠. 저는 小說家가 되기 前 登壇 以後 10年 동안 해야 할 세 가지 決心을 했습니다. 첫째, 그동안에는 文學賞을 받지 않는다. 둘째, 그동안에는 내 小說集 뒤에 評論家의 解說을 붙이지 않는다. 셋째, 그동안에는 新聞 連載小說을 쓰지 않는다. 2001年은 登壇 10年이 지났으므로 이런 幼稚한 自尊心을 버린 時點이었죠. 그래서 賞을 받았고요.”

    文學賞 制度에 對해서도 “屈原(屈原)의 孤高함도 좋아하지만 漁夫의 凡俗함도 능히 受容하며, 더욱이 이제 저는 批判할 사람이 아니라 批判받거나 批判받을 餘地를 改善해야 할 어른”이라고 말한다.

    “將次 洞네 里長님이 주시는 賞이라도 주면 주는 대로 받겠어요. 床이 무슨 罪가 있겠습니까. 文學賞 많다는 事實이 잘못은 아니죠. 언제는 文學賞에 權威와 公正性이 있어 주고받았습니까.”

    그는 “기껏 文學像 2個 받은 제게 왜 文學賞 制度의 問題點에 對해 質問하느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 最近 韓國 文學이 海外市場에서 好評을 받고 있는데요.

    “韓國 文學의 世界化에 對한 質問은 제가 答辯할 部分이 아닙니다. 팔 만한 文學作品이 있으면 出版業者들이 國際的으로 包裝해 國際市場에 내놓겠죠. 小說家인 제가 ‘世界市場에 어떻게 小說을 팔까’하고 苦悶해야 할 理由는 없어요. 그동안 海外市場 進出이 적었던 理由는 出版業者 탓이 아니라 우리나라 小說이 別 볼일 없었기 때문이죠.”

    ▼ 인터뷰 모두에 아버지 얘기를 暫時 했는데요, 어릴 적 얘기를 해주시죠. 심상대 小說의 主要 背景이기도 한데요.

    “農村과 漁村이 있는 제 故鄕은 小說家로서 좋은 成長背景인 듯해요. 성실한 農夫였던 할아버지와 할머니, ‘閑良’이었던 아버지, 어머니와 兄弟들, 姑母와 三寸, 그리고 大槪 一家親戚으로 이루어진 故鄕마을의 風習은 저를 어떠한 境遇에든 肯定的이고 博愛精神을 지닌 祝祭主義者로 만든 거 같아요.”

    作家의 아버지는 어릴 때 맏이인 그에게 한글과 漢字를 가르쳤다고 한다. 作家는 다른 모든 일엔 失敗했더라도 그 한 가지, ‘글字工夫’만큼은 成功했다고 말한다. 되짚었다. 作家는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여러 해가 지나 自身이 아버지가 되고서야 世上에서 가장 눈물겨운 關係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結論을 맺는다.

    “그분이 眞正 사랑한 이 世上 單 하나의 存在와 意味는 아들인 저였어요. 제가 아무리 아비 노릇을 잘하려고 해도 아버지가 제게 글을 가르쳐주시고, 每 學期 敎科書 表紙를 흰 종이로 싸고 붓으로 科目名과 제 이름을 적던 그 精誠은 따라갈 수 없어요. 그러나 아버지가 제게 준 傷處도 너무 컸기 때문에, 저는 아직 아버지라는 말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어린 時節부터 제가 좋아하는 낱말 몇 個 中에는 아버지라는 말이 包含돼 있지 않아요.”

    ‘선데이 서울’과 ‘거지王 김춘삼’

    그는 어릴 적에는 그리스 로마 神話와 世界名作小說, 古典과 科學書籍을 主로 읽었다고 했다. 中學生 時節 耽讀한 ‘선데이 서울’이나 ‘주간경향’과 같은 黃色雜誌와 軍隊 가기 前 親舊가 읽던 冊을 偶然히 집어 單숨에 다 읽은 ‘거지王 김춘삼’李 記憶에 남는다고 했다.

    “알베르 카뮈, 생텍쥐페리, 리처드 바크 等의 小說을 읽으면 그 作家를 尊敬하게 돼요. 그러니 尊敬하는 作家도 많죠. 우리나라 小說家로는 明川(鳴川) 이문구 先生님을 尊敬합니다. ‘관촌수필’이나 ‘우리 洞네’ 聯作小說처럼 우리나라 散文 傳統에 따른 小說 樣式은 아주 所重한 價値입니다. 이런 小說 樣式은 現代 우리나라 小說이 典範으로 삼고 있는 유럽式 小說 樣式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作家는 小說家가 冊으로 둘러싸인 書齋에 스스로를 監禁하고, 그 冊을 통해 小說을 쓰는 것을 輕蔑했다. 小說家가 거짓 이야기를 지어내고, 逆說과 辱說을 통해 世上에 발을 들여놓는 까닭은 現實 그 속내를 파헤치기 위한 것으로 본다. 小說에 서 거짓말의 反對말은 眞實이 아니라 本質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作家 심상대에게는 携帶電話가 없다. 只今까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利用하지 않는다. 인터넷은 가끔 使用한다. e메일은 郵遞局을 代身하기 때문이란다. 作家는 왜 온라인 世上과 담을 쌓고 있는 것일까. 왜 江原道 첩첩산골에서 홀로 山짐승처럼 살고 있을까.

    “携帶電話는 通話料를 오래 延滯하니 저절로 해지됐습니다. 携帶電話와 술을 끊으니 人生이 열 倍, 百 倍 넉넉해져 幸福해지더군요. 처음엔 빚쟁이로부터 벗어날 길은 山속밖에 없어 숨어들었습니다만, 이젠 제가 살 곳이 그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빚쟁이가 ‘뮤즈’였던 셈이죠. 뮤즈는 銀빛 喇叭을 들고 하얀 날개를 나부끼며 카트린 드뇌브(프랑스 出身의 映畫俳優) 같은 얼굴로 나타날 줄 알았지요. 그런데 現實의 뮤즈는 小說家에게 돈타령이나 하고 脅迫을 일삼는 ‘썩은 감자’였어요. 何如튼 그들로 인해 武陵桃源에 安着했습니다.”

    詩人이나 作家가 글만 써서 먹고살기가 어렵다는 말로 들렸다. 現在의 집 住所를 묻자 “江原道 襄陽, 高聲, 束草 等地를 떠돌고 있다”고 두루뭉수리하게 答하는 作家 심상대. 그와의 만남도 e메일을 통해 이뤄졌다.

    ▼ 앞으로 計劃을 말씀해주시죠.

    “앞으로 반드시 印紙를 붙이는 出版社에서 冊을 낼 겁니다. 지난 7年 동안 出版社로부터 받은 印稅가 단돈 100萬 원이었으니까요. 여기에 제 冊을 낸 出版社가 부도나면서 모든 財産인 冊 7卷이 絶版된 狀態라 저도 그 冊을 사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作家가 冊을 펴내도 그 冊이 몇 卷이나 팔렸는지 알 수 없는 出版 시스템, 이건 큰 問題입니다. 이는 내가 納品해 賣場에 陳列한 謝過가 팔렸는지, 썩어서 내다버렸는지 알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요. 野蠻도 이런 野蠻이 없습니다. 이는 商道德은커녕 基本 以下의 行態죠.”

    그는 “A 出版社가 만든 販賣部數 프로그램을 다른 出版社들이 導入하면 印紙를 붙이지 않더라도 每日 販賣部數를 確認할 수 있다”며 “앞으로 그런 出版社에서 冊을 내겠다”고 말했다.

    “우리 文人들은 왜 沈默하는 거죠? 그러면서 定義가 어떠니, 社會構造와 文化와 歷史가 어떻고 하며 잘난 체한단 말입니까? 自己 財産과 自尊心도 못 지키는 主題에. 참, 計劃을 말씀하셨죠? 저는 小說을 쓰고, 돈을 벌고, 火를 내지 않을 計劃입니다. 이 計劃을 實踐하면 神仙이 될 듯해요.”

    作家 심상대는 1960年 1月 25日 江原道 江陵에서 태어나, 1990年 ‘世界의 文學’에 短篇小說 ‘描寫總’ ‘墨湖를 아는가’ ‘水彩畫 鑑賞’ 等 3篇을 發表하며 作品 活動을 始作했다. 小說집으로 ‘명옥헌’ ‘사랑과 人生에 關한 여덟 篇의 小說’ ‘審美主義子’ 等이 있고, 散文集으로는 ‘갈등하는 新’ ‘濯足도 앞에서’ 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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