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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番이나 꺾였던고?|신동아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番이나 꺾였던고?

新聞社 編輯局의 午後 한 時 半

  • 박윤석│unomonoo@gmail.com

    入力 2011-11-22 15: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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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회="" 이야기="">
    • 한 大監의 집을 나선 한림은 황금정을 걷는다. 年末 저녁 거리는 戰車와 自動車, 行人으로 분주하다. 명치정과 本情은 밤의 熱氣로 후끈해지고 朝鮮銀行 앞 廣場은 오가는 人波로 가득하다. 貴族會館은 急造된 朝鮮의 貴族들과 더불어 頹落해가고 동양척식회사와 殖産銀行은 활기찬 새해를 準備하고 있다. 證券去來所는 各種 惡材가 續出해 近年에 보기 드문 大暴落을 이어온 한 해를 마감했다. 올해의 마지막 新聞을 찍어내는 저물 녘의 新聞社에는 押收 通報가 下達되었다. 送年號 新聞은 記事 檢閱로 버려지고 다시 製作해야 할 身世가 되었다.
    (第4張)

    한通의 電話에 平和는 깨어졌다.

    “이런 提起, 또 押收야.”

    “여보, 큰일 났소. 押收요 押收.”

    웅성거림 속에 먼발치서 編輯局長의 表情을 살피던 社會部長이 다가간다. 檢閱에 걸리는 頻度는 社會部가 가장 높다. 記者 數도 編輯局 내 最大다. 無慮 6名이나 된다. 政治部와 經濟部는 各 1名이다. 部長 하나 記者 하나.



    “야, 機械 멈춰라 機械.”

    하루의 騷亂을 접고 마감 後의 고요로 접어들어야 할 編輯局에 제2차 騷亂이 일어난다. 編輯局長은 警務局 圖書課 檢閱官과 通話 中이다.

    “…輪轉機 세웠습니다.”

    -오늘 新聞 펼쳐주십시오.

    “오늘 記事는 어디가 나쁘다는 겁니까.”

    - 제ㅇ面 ××題目의 記事 全部요. ㅇ團 ㅇ行부터 ㅇ行까지 削除하세요.

    짧은 通話를 마친 局長은 털썩 電話筒을 내려 걸었다. 午後 내내 주고받은 數十 次例 電話 通話 모두를 합친 것만큼 疲困하다.

    輪轉機는 얼마間의 訊問을 吐해놓고 멈추었다. 곧 警察이 들이닥칠 것이다. 이 時刻 檢閱當局의 多急한 움직임은 總督府 警務局의 內部 記錄에 이렇게 나타나 있다.

    午後 4時부터 5時 사이 夕刊이 나올 무렵의 警務局 圖書課. 그때쯤이면 檢閱界의 冊床 위에는 百燭 電球가 輝煌하게 켜져 있다. 使喚이 한글 新聞社로부터 新聞을 갖고 달려와서 檢閱者에게 건네준다. 한 字 한 單語라도 等閑히 할세라 檢閱者의 눈은 번득이고 있다. 붉은 줄이 그어진 新聞이 關係者들에게 돌려지고 있다. 날 듯이 電話에 달려가 京畿道 警察部에다 “ㅇㅇ日步 第 ××××湖 第 ㅇ面 ××題目의 記事는 治安妨害로 差押되었으므로 手配해주십시오” 한다. 新聞社에서는 管轄 警察署원의 出動으로 新聞이 全部 押收된다.



    갓 나온 新聞은 警察이 到着하기 前에 그 一部가 이미 눈치껏 이곳저곳으로 配布되고 난 뒤일 수도 있다. 輪轉機의 速度는 日就月將해 지난해 日本에서 導入한 最新型 機械는 時速 8萬部를 찍어내고 있다. 時速 3萬部 印刷를 자랑하던 輪轉機는 2年 만에 交替되었다. 5萬部가 넘지 않는 全體 部數를 1時間 안에 찍어내고 남는 速度다. 輪轉機 세우라는 通報를 받기까지 이미 相當 部數가 印刷되었기 때문에 押收 前에 一部를 빼돌릴 수도 있는 것이다. 檢閱當局度 이를 모르지 않는다.

    削除된 新聞의 納本이 다시 到着해야만 이 일이 끝난다. 그러나 이 削除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當局이 新聞發行者를 信賴하는 것을 根本 前提로 한다. 假令 그 新聞社가 “機械 세워요”의 命令이 있었는데도 泰然히 그대로 輪轉機를 돌리면서 말로만 “세웠습니다”하고 모두 찍어낸 뒤 마지막 한 張을 要求대로 記事削除海 納本한다면 完全히 전 部數를 發送할 수도 있는 것이다.

    新聞은 어렵사리 나왔다. 問題가 된 記事는 社會部 所管은 아니었다. 社說이었다. 政治部에 配屬된 論說半원 2名이 오늘은 뒷마무리 行事를 치렀다.

    平素 같으면 마감 後 新聞 나올 때까지 宿直室에서 바둑 두고 있을 社會部長 玄鎭健은 그 희고 맑은 얼굴이 黃昏처럼 불콰해져 곧장 술집으로 나가기라도 할 態勢다. 有名人士 玄鎭健은 지난해 이맘때 雜誌 ‘別乾坤(別乾坤)’과의 인터뷰에서 하루 日課에 對해 “9時30分부터 午後 4時30分까지 執務. 그때부터 바둑 두다 黃昏녘에 歸家”라고 答했다. 그 以後는 “食事 後 讀書. 不眠症으로 어떤 때는 새벽 3時까지 讀書”라고 덧붙였다. 氣像은 午前 5時. 讀書하고 食前 散步한다고 했다. 술 마시는 얘기는 없다.

    來日 아침 幹部會議에서 營業局長은 具體的인 數値로 經營損失을 提示하며 監督 不實에 핀잔을 놓을 것이다. “지지리 말을 해도 또 그러느냐. 빈정대는 表現을 하지말래도.” 社長은 누구에게라 할 것이 없는 호통을 칠 것이다. 하루 生活 中 第一 반가운 때가 언제냐는 質問에 “新聞을 다 만들어서 輪轉機 돌아가는 소리 들을 그때”라고 對答하는 社長이다.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던고?

    1927年 新聞社 編輯局.



    2年餘 만에 編輯局長 자리에 다시 돌아온 지 한 달이 채 안 되는 李光洙도 貴重한 時間을 날려버렸다. 그는 出勤 前 집에서 아침 6時부터 2時間假量 小說을 쓴다고 한다. 可能한 限 저녁 6時면 歸家해 일찍 잠자리에 들 程度로 時間과 健康을 管理하고 있다. 6個月 前에 오른쪽 腎腸을 除去하는 手術을 받은 後로 모임을 最少化하고 있다. 젊어 客地에서 얻은 結核이 마흔을 바라보는 只今까지 痼疾로 繼續되는 가운데 腎臟結核이 생겼다고 한다. 朝鮮 最初의 女性開業醫였던 夫人이 結婚 前부터 아이 둘을 키우는 只今까지 그를 看護하고 있다. 李光洙는 編輯局長으로서 自身의 하루를 이렇게 要約하고 있다.

    新聞社에 가서는 同僚들의 出席狀況을 보고 宿直部를 보고 書信 온 것을 보고 主要한 新聞을 보고 小說 한 回 쓰고 不得已하면 社說도 쓰고 工場에 몇 番 들락날락하고 社長室에 몇 番 불리어가고 各 面의 主要記事를 읽어 或是 是非 들을 것이나 없나 或是 면박당할 것이나 없나를 보고, (…) 間或 同僚의 不平을 듣고 間或 警務局에 불리고, 그리고 輪轉機가 돌아 新聞이 제時間에 나오는 것을 보고 나면 내 하루의 作業이 끝이 난다. 그러고는 곧 타기 싫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고(…)



    來日 新年號부터 나갈 그의 새 連載小說이 미리 印刷되어있다. ‘群像(群像)’이라 題目韓 그 첫 會議 導入部는 이렇다.

    革命家- 그의 이름은 公算(孔産)이라고 부른다. 勿論 이것은 假名이다. 그의 本名이 무엇이냐고 물어도 나는 絶對로 對答할 수가 없다. 이것이 이야기꾼이 지키는 唯一한 祕密이요 또 信義이다. (…) 公算이 病으로 누운 지는 벌써 一 年이 넘었다. 그의 病은 肺結核이다. (…) 여러 해 동안 不規則하高度 心身 過勞한 生活을 한 結果로 처음에 感氣 같은 病이 마침내 肺病으로 判明되고 말았다.

    夫人은 지긋지긋하다며 발길에 채는 藥甁을 걷어찬다. 壁에 부딪히고 房바닥에 뒹구는 藥甁은 藥物을 房바닥에 쏟아놓는다. 몇 방울이 돌아누운 共産의 얼굴에 튄다. 新年號치고는 多少 憂鬱한 始作이다.

    朝鮮人보다 朝鮮말 잘하는 檢閱觀

    檢閱에 걸린 社說은 題目이 ‘세모(歲暮)’다. 歲暮를 맞아 세모의 感情을 傳하는 送年社說의 한 句節도 檢閱官은 이 歲暮에 그냥 넘기지 않는다. 朝鮮말을 朝鮮人보다 더 잘한다는 日本人 檢閱官은 아직 神經을 곤두세우고 待機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의 送年辭說은 1929年 한 해의 主要 事件을 몇 가지 言及하고 있다.

    元山 勞動大爭議(元山 勞動大爭議)는 實로 朝鮮 未曾有의 大爭議 事件으로 參加人員 2000餘 名, 爭議日數 約 3個月에 이르렀다. 不幸히도 勞動者 側의 準備不足과 當局의 沒理解한 態度에 依하여 結局은 勞動者 側의 敗北로 끝났지만 勞動者 自身의 組織이 强固하여야 할 것과 한 勞動者團體의 爭議만으로는 勞動者의 勝利를 얻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된 點에 있어서는 더 큰 敎訓을 받았다고 할까.

    2年 連續 논바닥을 달구고 뱃가죽을 등에 붙게 한 忠淸 全羅 慶尙道의 大가뭄度 言及되었다.

    봄부터 여름에 걸친 三南 一帶의 大凶재는 昨年부터 가뭄 飢饉으로 呻吟하던 可憐한 同胞들의 二重의 災厄이었으며 우리 生活記錄史上 빼지 못할 大佛像史였다. 요행히 國內外 熱烈한 同胞의 毅然이 있어 냇물에 물 한 방울의 感이 없지 않았으나 同胞愛의 發露로 보아 萬金의 價値가 남았다고 할 만한 意義가 있다. 이러함에도 不拘하고 數百萬원臺의 代金을 消費하며 朝鮮統治 20年의 朝鮮博覽會를 開催하였음은 朝鮮人을 위하여 무슨 所得을 갖게 하였는지 只今도 疑問이다. 不幸히 今年은 緊縮競技로서 해를 보낸다.

    가을 博覽會 때는 上京客들을 겨냥해 한몫을 노리고 旅館施設로 許可받으려는 申請이 殺到했다. “褓따리 주머니 맛을 보려고 코만 반반히 붙은 女子면 으레 妓生으로 나간다”는 말이 나돌 程度로 一時 景氣가 후끈했다. 博覽會 開催 석 달 前 記事가 傳하는 風景이다.

    博覽會를 앞둔 京城市價는 次次 歲月이 좋아간다. 돈 1원 쓰려면 부들부들 떠는 시골農夫들도 官廳의 勸告에 褓따리를 짊어져야 할 模樣이니 돈이 어디서 나와 어디로 가던지 間에 歲月은 豐盛豐盛할 것이다. 열댓間 넘는 집이면 으레 旅館집이 되는 판에 집貰가 올라가고 따라서 電話값이 올라가고 自動車가 늘어가고. 그뿐만이 아니다. 現代 妓生의 典型인 西道妓生은 벌써 제2차 決死隊를 組織하고 30名이 이미 京城에 侵入하였다던가.

    經濟와 政治라고 할 것이 없는 朝鮮이긴 하지만 後半期에 深刻해진 經濟 不況과 政治 不安은 해를 넘겨 持續될 兆朕이다. 社說은 이어진다.

    11月 광주고보學生과 光州中學生 衝突事件을 發端으로 全國的 學生 및 社會의 大運動을 본 것은 今年의 大事件이다. 學生의 衝突이 前朝鮮의 問題로 變한 것은 當局에서 主張하는 것과 같은 一部 共産主義者의 策動이 아니라 蓄積된 平素의 民族的 不平不滿이 이 機會에 暴發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니 朝鮮人이 무엇을 要求하고 무엇을 主張하는지 그 一端을 볼 수 있겠다.

    押收는 12月 들어 6番째다. 光州學生運動 以後 이어진 學生들의 同盟休校와 社會團體들의 움직임과 關聯해 新聞과 檢閱의 부딪침이 늘어났다. 押收措置가 絶頂에 達했던 1924年의 56件, 1925年의 57件보다 月平均 回數로 보자면 이番 달이 더 많다. 1920年代 中盤을 넘어서면서부터 押收 件數는 每年 줄어왔다.

    1929年 한 해의 押收는 이로써 28回가 되었다. 計算해보면 押收율 8%. 平均 13日에 한 番꼴로 押收된 셈이다. 押收된 新聞部數는 33萬部가 넘는다. 每番 輪轉機가 세워질 때마다 이미 印刷돼 있던 1萬部 以上씩이 沒收된 것이다.

    本報 押收(押收)

    12月31日子 發行 本報 第 3367號는 記事 中 當局의 忌諱(忌諱)에 抵觸된 바가 있어 發賣禁止의 處分을 當하였기에 抵觸된 記事는 削除하고 號外로 發行 頒布하였음을 알려 드림.



    來日 製作하는 新聞에는 前날의 新聞이 押收되어 再發行되었음을 알리는 事故(社告)가 1面 아래에 박히게 된다. 每番 같은 文案으로 날짜와 호수만 바뀌는 이 固定欄이 10年동안 한결같이 持續되어왔다. 李光洙에 앞서 前任 編輯局長이었던 主要한(朱耀翰)은 後날 이 時節을 諷刺的으로 回顧하고 있다.

    新聞에는 세 가지 時代가 있었다. 첫 時代는 押收당하는 것을 壯하게 여기는 때요, 둘째 時代는 압수당해도 不得已하다고 생각한 때요, 셋째 時代는 押收 아니 當하기를 힘쓰는 때다.(…) 朝鮮 新聞界의 編輯局長이라는 것은 一種의 私設 檢閱官에 不過하다. 每日 新聞 初벌을 細細히 읽고 不穩 文字가 들어가 있는지를 보는 것이 그의 가장 重要한 職務다. 그러므로 그의 最大의 特權은 때때로 圖書課 事務官에게 톡톡히 꾸지람을 듣는 것이다. 이 檢閱事務는 쉬운 듯하면서도 實로 어려운 일이다. 國語(國語)라고 써야 할 것을 일어(日語)라고 한 글字 잘못 써 押守를 當한 적도 있고.

    京城으로 퍼져간 光州學生事件의 熱氣

    그저께 29日子 新聞도 마찬가지로 押守를 當했다. ‘이 땅의 主人은 朝鮮人이다’는 社說이 問題가 되었다. 다시 찍어낸 新聞에서는 題目이 ‘光州事件의 意義’로 바뀌었다.

    光州事件은 마침내 解禁(解禁)되었다. 애初부터 揭載를 禁止하지 않았던들 이처럼 큰 波瀾을 惹起하지 않았을 것이니 이番 一團의 事件이야말로 當局의 言論彈壓에 對한 뼈아픈 敎訓이라 아니할 수 없다.

    光州事態가 發生 55日 만에 비로소 報道 禁止에서 풀려난 날이었다. 11月3日 일어난 光州學生 衝突과 以後 各地로 波及된 同調 示威는 報道 禁止됐다. 한참 뒤에 異例的으로 措置를 撤回한 當局은 그 理由를 이렇게 說明했다.

    學生騷擾事件은 자유로운 報道를 禁止케 한 結果 朝鮮 內 各地에 번져서 여러 가지 過大한 浮言流說(浮言流說)을 일으키고 當局이 新聞紙上에 發表하는 騷擾事件의 眞相이라는 것은 一般 朝鮮人들에게는 官邊 側의 欺瞞的인 宣傳人 듯한 誤解를 일으키게 했다. 그러므로 朝鮮民心을 안정시키는 方法으로서는 이 事件의 新聞揭載를 禁止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이를 解除하되, 잘못된 技士로서 人心을 동요시키는 事項에 對해서만 團束함이 效果的이라는 것을 認定하고 1929年 12月28日 이의 報道禁止를 全部 解除하게 되었다.

    光州學生事件은 12月 京城으로 波及되어 男女學校 生徒들이 總同盟 休學을 벌임으로써 前 朝鮮의 各 學校로 擴散되기에 이르렀다. 곳곳에서 檄文이 뿌려지고 示威가 일어나 多數 學生이 連行되었다. 己未年 3·1運動 以後 10年 만에 보는 꿈틀거림이 느껴졌다. 3年 潘 前 6·10 萬歲 때의 熱氣를 超越했다. 이 같은 雰圍氣를 몰아 一帶 民衆運動을 일으키려던 謀議가 事前 發覺되어 新幹會 44名, 槿友會 47名이 檢擧되었다. 主謀者級人 권동진(權東鎭) 허헌(許憲) 홍명희(洪命憙) 韓龍雲(韓龍雲) 等 열 사람은 保安法 違反罪로 京城地方法院檢査局에 送致되었다.

    當時 編輯局長이던 주요한度 西大門刑務所에 拘禁돼 只今 高等法院 思想檢査의 取調를 받고 있다. 조병옥(趙炳玉)李 들고 온 連判狀에 署名했다가 둘 다 그리됐다. 지난해 第3次 共産黨事件으로 김준연(金俊淵) 編輯局長이 投獄된 以後 1年 半의 空白 끝에 朱耀翰은 지난달 編輯局長에 任命되었다. 그리고 이 일로 다시 한 달 만에 李光洙로 交替되었다. 권동진과 韓龍雲은 10年 前 西大門刑務所 身世를 진 바 있다. 辯護士 資格으로 刑務所를 제집처럼 드나들던 허헌은 이番에는 갇히는 立場이 됐다. 허헌은 新聞社의 理事職도 겸하고 있다. 洪命憙는 5年 前 編輯局長이었다.

    西大門刑務所에는 只今 2000名 가까운 사람이 收容돼 있다. 그中 이른바 思想犯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한 500名 된다. 定員은 일정한데 들어가는 사람은 해마다 增加해서 世界에 보기 드물게 狹小한 곳―그곳이 朝鮮의 監獄이다. 28日子 新聞은 이렇게 傳한다.

    16個의 刑務所, 10個所의 支所, 合이 26個所. 收容力은 最大 1萬2000名. 여기에 1萬6000名 가까이 들어찼으므로 그 困難이 莫甚하다. 個性과 金泉, 두 少年刑務所는 400名 庭園에 1100名이 들어가 있다. 房은 이처럼 좁은데 집어넣기만 꾸준히 하므로 大槪 한 坪에 8名이 들어가 있는 곳이 수두룩하다. 日本에서는 한 坪에 2名꼴이다. 罪囚 數字는 朝鮮과 正反對로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 刑務所 女看守는 南間數보다 待遇도 좋지 못하고 被服도 異常한 것을 입혀 눈에 거슬리던바 이番에 監獄令이 改正되어 職名도 看守로 고치고 被服도 鮮明한 洋裝으로 고치기로 하였는데, 洋裝으로 하면 짧은 치마를 입혀야 되는데 거기 從事하는 女子들이 大槪 다리가 굵고 허리가 절구桶 같으므로 外貌 問題도 考慮 中에 있다 한다.

    1910年 倂合 當時 7000名 남짓하던 全國의 收監者가 20年 동안 두 倍 以上이 되었다. 收監 人員은 1919年 3·1運動 以後 急增했다가 1923年부터 以前 狀態로 돌아갔는데 지난해 1928年부터 다시 늘기 始作해 올해는 己未年 當時 數字를 넘어섰다.

    社會部 記者들의 鐵筆俱樂部

    오늘은 긴 밤이 될 것이다. 한림度 그렇고 한림의 同僚들도 그렇고 警察도 그렇고 警察의 監視와 追跡을 받는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來日은 新年號가 製作된다. 오늘 밤까지 미리 만들어놓는 特輯記事들이 있지만 來日도 여느 때와 같이 바쁘게 되어 있다. 記事 마감의 아우聲. 規則的인 늦은 點心. 工場에서는 하루를 쉬고 난 活字가 뽑히어 오늘의 자리에 저마다 새롭게 配列되고 새 두루마리 종이뭉치를 건 輪轉機는 다시 또 規則的인 轟音을 내며 돌아갈 것이다. 休日은 없다. 지난 10年 동안 新聞이 쉰 날은 强制 休刊 外에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土曜日 日曜日은 勿論 나왔고 名節에도 나왔다. 記者들은 2週에 한 番꼴로 休務를 갖는 것으로 되어 있다. 原則的으로 그렇다.

    우리의 붓끝은 날마다 흰종이 위를 갈며 나간다.

    한 자루의 붓, 그것은 우리의 쟁기요 唯一한 延長이다.

    거치른 山기슭에 한 이랑의 火田을 일구려면

    돌부리와 나무등걸에 호미끝이 부러지듯이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番이나 꺾였던고?

    (…)

    스위치를 젖혔느냐, 輪轉機가 돌아가느냐

    猛獸의 咆哮와 같은 轟音과 함께

    한 時間에도 몇 萬張이나 박혀돌리는 活字의 威力은

    民衆의 脈搏을 이어주는 우리의 血壓이다!

    오오 붓을 잡는 者여 偉大한 心臟의 把守兵이여!

    1924年에서 1925年 사이 社會部 記者로 있던 심대섭(沈大燮)李 나중 沈熏(沈熏)이라는 筆名으로 發表한 시다. 社會部 記者들의 모임인 鐵筆俱樂部의 機關紙 ‘鐵筆(鐵筆)’에 ‘畢竟(筆耕)’이란 題目으로 낸 것이다. 鐵筆은 펜을 뜻하는 新造語다. 이 奇想天外한 筆記具의 登場으로 永遠하리라 믿어져온 붓의 時代는 急速히 저물고 있다. 千年萬年 永久하리라는 暗示를 주며 萬年筆로 命名된 또 하나의 現代的 筆記具는 ‘모던(modern)’ 知識人의 象徵物처럼 되어가고 있다. 먹물에 흠뻑 젖은 붓은 어느새 사라져가고 잉크의 바다에서 鐵筆이 헤엄치는 世上이 되었다. 沈熏은 詩와 小說, 評論과 시나리오의 모든 장르를 涉獵하더니 마침내 映畫 製作에 뛰어들었다. 스스로 臺本을 쓰고 監督한 1927年의 映畫 題目은 ‘먼동이 틀 때’였다.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던고?

    小說家 沈熏이 長篇小說 ‘상록수’ 當選金으로 忠南 唐津郡 송악면 부곡리에 세웠던 常綠學院.

    鐵筆俱樂部는 서로 親睦을 圖謀하고 言論彈壓에 맞서는 한便에 社會部 記者들의 給料 改善運動도 벌였는데 最低賃金 80원을 내세운 交涉에서 會社가 拒否하자 심대섭은 同僚 記者들과 더불어 退社했다. 1925年 5月 下旬이었다. 함께 나간 8名 中에는 임원근(林元根) 박헌영(朴憲永) 허정숙(許貞淑) 김동환(金東煥) 안석주(安碩柱)가 있었다. 이들은 다들 나이도 비슷했고 入社 時期도 1年 안팎으로 共通點이 많았다. 저마다 社會主義運動에 邁進하거나 다른 新聞社로 옮겨가 繼續 일했다.

    美術 文學 演劇 映畫 藝術 全般에 能通했던 안석주는 藝名 안석영(安夕影)으로 일찍이 新聞 揷畵의 新紀元을 열면서 沈熏과 映畫製作도 함께 했다. 金東煥은 그해 最初의 長篇敍事詩 ‘國境의 밤’을 發表해 文壇의 注目을 받고 있었다. 올해는 主要한 李光洙와 더불어 ‘3人媤家집’을 펴내고, 綜合月刊誌 ‘三千里’를 創刊해서 運營하고 있다. 沈熏은 新聞社를 떠난 지 10年 뒤 新聞社의 創刊 15周年 記念 現象小說에 應募해 當選됐다. 題目은 ‘상록수’였다. 그리고 다음 해, 連載가 끝나고 單行本으로 小說이 出版된 다음 달에 장티푸스로 夭折했다.

    獨立은 어디서 오는가

    밤이 깊어간다. 한림은 編輯局의 3層 窓門 너머로 太平桶 거리를 내다본다. 가스燈 아래 오가는 行人들 사이로 救世軍 慈善냄비의 鐘소리가 울린다. 지난해 첫선을 보인 慈善냄비는 올해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23日부터 거리에 나왔다. ‘貴下의 喜捨金(喜捨金)을 慈善남비에’라고 揮帳을 단 救世軍을 行人들이 둘러싸고 있다. 靈魂의 救援을 위하여 世上의 罪惡과 싸울 것을 다짐하는 救世軍은 乙巳條約과 庚戌國恥 사이에 朝鮮에 뿌리를 내렸다.

    西大門政(西大門町)에 있는 朝鮮救世軍本營(救世軍本營)에서는 例年과 같이 겨울 貧民救濟를 한다. 市內 各處에 慈善남비(慈善鍋)를 걸어놓고 오고가는 사람에게 同情을 얻는다 한다. 또 1원짜리 冊을 만들고 그 속에 慈善卷(慈善券) 20張을 넣어 冊을 산 사람이 그 慈善權을 貧民에게 나누어주면 貧民은 慈善權을 가지고 西大門政 貧民飮食소(貧民飮食所)에 가서 더운 국밥을 먹게 하고 또 極貧民(極貧民)에게는 쌀 若干씩을 나누어준다는데, 慈善남비는 昨年에도 試驗한 結果 成跡이 매우 良好하였으므로 今年에도 亦是 많은 期待를 하고 있다.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던고?

    救世軍 慈善냄비는 日帝强占期에 처음 登場했다. 寫眞은 1960年代 서울 거리의 救世軍 慈善냄비.

    잠을 쫓으려 編輯局을 한 바퀴 돈다. 政治部의 唯一한 記者는 日本門 通信을 飜譯하고 있다. 立法機關과 政黨이 없기 때문에 政治部는 外國 新聞의 境遇와는 달리 할 일이 別로 없다. 事實上 政治가 없는 朝鮮에서 大槪의 問題는 社會問題다. 總督府조차 社會部의 所管이다. 政治部의 주된 일은 日本 通信使에서 電報(電報)로 오는 通信 記事를 飜譯해서 揭載하는 일이다. 外報 飜譯部라고 우스개로 부른다. 日本과 나라 밖 消息이 1面을 차지한다.

    印度의 國民회의가 간디의 獨立案을 可決했다는 消息이 들어와 있다. 국민회의는 1885年 發足한 政黨인데 第1次 世界大戰 後 마하트마 간디가 植民政治에 對抗하는 大衆的 運動組織으로 轉換해 獨立運動의 求心點으로 만들었다. 간디의 後援을 받는 자와할랄 네루가 이番에 完全 獨立을 국민회의의 目標로 宣言한 것이다. 새해 첫날을 맞아 모든 階級의 撤廢와 大同團結, 今週, 英國 織物 不買, 自國 綿花 奬勵와 같은 具體的 實踐 綱領을 發表하리라 한다.

    국민회의는 完全自治를 통한 獨立을 標榜하는 스와라지 運動과 國産品 愛用을 促求하는 스와데시 運動 그리고 國民 敎育 運動을 3代 要綱으로 實踐해왔다. 乙巳條約 다음해부터 始作되었으니 25年째다. 印度는 어디로 가는가. 獨立을 宣言한다고 獨立이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印度는 獨立으로 가기 위한 統一된 路線과 運動의 體制를 維持하고 있다. 還甲을 맞은 간디가 指導하는 民族的 無抵抗的 獨立鬪爭에 社會主義 綱領을 導入하려는 40歲 네루의 急進 路線은 意見 差를 보이면서도 하나의 組織으로 融合해가고 있다. 간디는 繼續 물레를 돌리고 大衆은 그와 네루를 따라 물레와 실처럼 돌아가고 있다.

    조선도 禁酒運動과 朝鮮物産奬勵運動을 해보았으나 別 實效는 없었다. 지난 5月에 서울 YMCA가 小規模의 朝鮮物産 奬勵 바자를 열었을 때도 구경 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出品된 物件도 초라했다. 印度에 비해 朝鮮은 統一된 獨立路線과 體系가 없다. 人口 對備로 볼 때 獨立運動家와 獨立運動團體는 더 많을지 모르나 統合된 一貫性이란 點에서 보면 不足하다. 民族 唯一 黨, 民族 協同戰線을 標榜하며 左右統合 團體로 出帆한 新幹會는 3年이 못 된 只今 基盤이 흔들리고 있다. 左와 禹, 派閥과 派閥 間의 內部 龜裂은 繼續 벌어지고 있다. 이番 달 光州學生運動에 連繫한 民衆大會 謀議 件으로 新幹會 幹部가 大擧 逮捕되자 解散하자는 목소리가 左派 쪽에서 나오고 있다. 曖昧한 綱領에 各種 派閥이 두루 섞인 新幹會는 主導權을 둘러싼 內部 神經戰이 累積되어왔다. 印度에도 무슬림과 힌두라는 宗派의 葛藤이 潛伏해 있지만 朝鮮의 常習的인 內紛과는 樣相이 좀 다르다.

    印度의 獨立運動을 보면 간디를 비롯하여 모두 國內에서 하고 있었고, 國內에서 하므로 大部分은 合法的으로 하고 있었다. 合法的으로 同志의 結束을 많이 하면 機會를 얻어서 各地에서 一齊히 일어날 수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獨立運動者들은 大槪 海外로 나왔다. 이것은 마치 民族을 日本의 손에 내어 맡겨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던고?

    印度의 非暴力 獨立運動을 이끌었던 간디는 當時 植民 朝鮮에서도 關心의 對象이었다.

    李光洙가 먼 後날 回顧한 대로 朝鮮의 處地는 印度와 달랐다. 8年 前, 3·1運動 2年 뒤에 李光洙가 上海에서 歸國했을 때 그는 民族反逆者 取扱을 받았다. 臨時政府에서 機關紙인 獨立新聞의 社長을 지내던 사람이 祖國에 돌아온 것은 獨立運動을 배반하고 日帝에 歸順한 것이라는 게 當時의 平均的 民心이었다. 다시 2年 뒤 그가 新聞社에 入社할 때에도 記者 多數가 拒否運動을 벌일 程度였다. 上海 갔던 者가 어떻게 日帝時代에 入國하는가, 하는 編輯局의 輿論이었다. 그러면 日帝時代에 사는 너희들은 무어냐, 라고 한림은 反問했다. 日帝 統治下 新聞社에 勤務하는 記者들과 家族 親知들, 日帝 統治를 받으며 살아가는 同胞들은 다 뭐가 되느냐는 물음이었다.

    民族主義者라고 일컫는 사람들은 한림이 보기에 決코 民族的이지 않았다. 또 社會主義 共産主義 한다는 사람들은 社會主義 인터내셔널 노래를 부르고 共産主義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指示를 받지만 全혀 인터내셔널하지가 않았다. 間島로 移住한 百姓들은 불쌍하다고 義捐金을 보내자 하고 滿洲와 上海로 亡命한 運動家들은 훌륭하다고 支援金을 보내자고 한다. 나라를 떠난 사람들은 同情이나 尊敬을 받고, 나라를 지키고 사는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기 싫어하는 것인가. 李光洙는 다시 말한다.

    民族의 獨立은 獨立을 運動함으로 될 것이 아니요, 民族이 獨立의 實力을 갖춤으로만 이뤄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民族의 實力을 기르는 길은 民族 各 個人의 實力을 기르고, 이러한 個人들이 團結함으로 獨立의 힘을 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힘이 없고는 獨立이 오게 할 수도 없거니와, 設使 남의 힘으로 또는 僥倖으로 獨立이 오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오래 지닐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깨닫고 보니 나는 同胞들이 많이 사는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제 主權이 있는 나라의 革命 運動은 國外에서 하는 것이 便하고, 第 主權이 없이 남의 植民地가 된 나라의 獨立 運動은 國內에서 하여야 한다는 結論을 얻었다.

    3年 前 6·10萬歲 事件을 奇貨로 檢擧旋風이 지나간 뒤 潰滅的 打擊을 입은 朝鮮共産黨을 再建하고 第3次 責任祕書가 된 金哲秀(金?洙)는 組織事業 途中 彈壓이 닥쳐오면 그냥 亡命하려고 하는 後輩들을 가리켜 “못난 사람들”이라 했다. 地下에 남아서 日常的으로 닥치는 苦痛을 견뎌가며 黨 組織 收拾에 나서기보다 어서 나라 바깥으로 빠져 나가려고만 한다는 아쉬움과 못마땅함이었다.

    한림은 생각한다. 逃走와 亡命의 差異는 무엇인가. 肉身은 逃亡하되 精神은 逃亡 안 갔다고 主張하는 것이 亡命인가. 몸과 마음이 다 떠나는 것이 逃避인가. 亡命者라는 名稱은 그럴싸하고 逃亡者라는 이름은 猖披한 것인가. 나라 밖으로 나갔다가 나라 안으로 되돌아오면 도망가는 것인가. 同一한 現實은 名分을 달리 주면 다른 現實이 되는 것인가. 朝鮮을 亡國의 그날까지 支配한 名分論이 상투 자르고 洋服 입은 只今 愛國者들의 細胞에 綿綿히 흐르고 있기라도 한 것인가.

    亡命한 사람들은 上海를 찾아들어갔고 쫓겨난 사람들은 國境 가까운 間島에 居住했다. 滿洲 살던 사람이 歸國하면 故鄕에 돌아왔다고 반길 테지만 傷해 있던 사람이 돌아오면 왜 왔나 돌려보낼 듯 敵對的인 눈빛으로 쳐다본다. 一旦 國境을 넘어 나가면 돌아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돌아 들어오는 境遇는 監視를 받거나 爆彈을 던지거나 監獄에 가거나 主로 셋 中 하나였다. 李光洙는 이 셋 다가 아니었다. 朝鮮民族의 認識水準을 앞서가는 銳敏함으로 大衆的 表象이 되었던 李光洙는 大衆의 平均的 認識 틀에 가두어지지 않는 異質感으로 排斥당하고 뭇매를 맞게 되었다.

    마지막 皇帝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던고?

    淸나라 마지막 皇帝 푸이.

    김철수의 눈에는 上海에 나가 있는 사람들이 國內에서 活動하는 朝鮮共産黨에 影響力을 行使하려는 態度도 거슬렸다. 海外로 나가게 된 事情이 어떠했건, 그곳에서의 苦楚가 어떠하건 國境 밖에서는 입으로 많은 일을 處理하지만 國內에서는 모든 것을 몸으로 堪當해야 한다. 分裂된 채 相爭하는 同牀異夢(同床異夢)의 그룹들은 다른 團體들과 마찬가지로 共産主義 組織 內에도 例外 없이 있었다. 朝鮮共産黨의 精神的 物質的 後見人인 모스크바의 코민테른은 보다 못해 1927年, “海外 亡命者들이 朝鮮共産黨을 直接 指導하려는 行爲는 禁止되어야 한다”는 規定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또 하나의 記事에 눈길이 간다. 中國 消息이다. 帝王(帝王)의 豪華(豪華)도 只今엔 春夢(春夢)-淸나라 마지막 皇帝 宣統帝(宣統帝)의 近況을 담고 있다. 中國은 朝鮮이 倂合되던 다음 해 辛亥革命, 그 다음 해 中華民國 建國으로 淸나라 王朝를 끝냈다. 그로부터 17年이 지났다. 朝鮮의 純宗과 마찬가지로 한 王朝의 끝이자 王朝制度 自體의 終結이 된 運命의 宣統帝는 只今 23歲다. 세 살에 卽位해 일곱 살에 廢位되었다. 在位 中 皇帝 노릇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것도 純宗과 같다. 다섯 番 結婚했으나 後嗣가 없는 點도 두 番 婚姻한 純宗과 비슷하다. 그의 이름은 아이신줴러 푸이(愛新覺羅 溥儀). 滿洲 東北部 女眞族의 族長으로서 女眞族을 統一하고 後金(後金)을 세운 淸 太祖 아이신줴러 누르하치(愛新覺羅 奴爾哈赤)의 後孫이다. 順從의 先祖인 太祖 李成桂는 東北 地域 女眞族의 根據地를 발板으로 高麗를 뒤엎고 朝鮮 建國에 이르렀다.

    映畫와 富貴를 혼자 누리던 一國의 帝王으로 나라를 잃어버리고 淪落(淪落)의 길로 빠지어 온갖 苦楚를 다 맛보고 온갖 風霜을 다 겪는 이는 過去 歷史에도 많이 볼 수 있거니와 現在에도 그 數가 적지 않지만 崎嶇한 목숨으로 極度의 貧窮에 빠진 이는 아마도 全 靑(淸) 宣統帝(宣統帝) 外에는 다시 없을 것이다. 일찍이 中原에 君臨하여 四億 人民을 다스리고 號令하던 그로서 오늘날에 한 몸도 便安히 依託할 곳이 없고 意識의 威脅까지 받게 될 줄이야 누가 꿈에나 생각하였으랴. 아래에 記錄한 艾花(哀話)는 最近 天津(天津)으로부터 上海에 돌아온 옛 臣下가 傳하는 이야기다.

    宣統帝가 居住하는 곳은 本來 전 臣下의 住宅이었으나 最近에 와서는 그 住宅이 어떤 商人에게 팔리게 되어 매우 困難 中에 있으며 나머지 家産은 大槪 數十萬원에 不過하여 그 家産이 없게 되는 날에는 生活 困難에 빠질 形便에 있어서 무슨 事業이나 하여 收入을 얻으려고 애쓰던 中 하루는 天眞에 있는 뉴욕 어떤 新聞社의 記者라고 自稱하는 獨逸人 로트라는 者가 찾아와서 甘言利說로 宣統帝를 꾀어 合字로 新聞社를 經營하자 하였다. 宣統帝는 그 獨逸人을 믿게 되어 現金 20萬원을 주어 모든 設備를 하게 하였던바 그 獨逸人은 忽然 간 곳이 없이 蹤跡을 감추고 말았다. 이에 비로소 宣統帝는 詐欺를 當한 줄 알게 되었으나 그 돈은 畢竟 잃어버리게 되어가지고 살던 家産을 하루아침에 버리게 되었다. 宣統帝의 家庭에는 本妻와 妾 두 사람 外에 下人 한 사람이 있었는데 요사이 그 下人이 腸窒扶斯에 걸려 죽은 뒤로 宣統帝는 下人도 두지 못하고 飮食을 自己 손으로 만들어 자시게까지 되었다. 前날에는 維新(遺臣)과 政客(政客)들이 오락가락하며 制定(帝政)復活을 圖謀하여 옛날의 映畫를 꿈이나마 꾸게 하였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그 門 앞에 차마(車馬)를 볼 수가 없다. 忠臣인 체하는 維新들度 요사이는 宣統帝를 訪問하지도 아니할 뿐 아니라 비록 宣統帝가 찾아와도 生活費나 보태달라고 하지나 않을까 하여 面會까지 拒絶한 일이 있다.

    日本의 東北 地域 점거와 軍閥(軍閥)들의 亂立으로 只今 中國은 다시 三國志의 時代로 돌아간 듯한 樣相이다. 王朝가 所願대로 滅亡한다고 해서 問題가 一擧에 解決되는 것은 아니었다. 滿洲族(滿洲族) 500萬名의 中國支配를 끝내자는 熱望이 帝國主義에 反對하는 口號를 壓倒했다. 反帝國主義 運動은 西歐式 改革의 希望 속에서 稀釋되어간 反面, 260年 동안의 抑壓과 恥辱을 쓸어내자는 民族的 口號는 單番에 革命的 열기로 녹아들어갔다. 舊秩序는 解體되었고 社會는 混亂으로 접어들었다. 2年 뒤인 1932年 3月1日 푸이는 滿洲國(滿洲國)의 首班으로 다시 卽位하게 된다. 滿洲 地域의 朝鮮人은 날로 增加해 135萬名에 이르고 있다.

    속이는 일이 없기를

    校正을 보는 정리부(整理部) 冊床 위에는 한 名이 벌써 이불을 깔고 잠을 請하고 있다. 宿直者가 아닌 사람들도 밤이 늦으면 그냥 자고 아침을 맞는 境遇가 더러 있다. 整理部長 자리에는 來日 新年號 新聞에 담길 特輯 記事들의 校正紙들이 쌓여 있다. 어두운 불빛 아래 한림은 그中 몇 張을 暫時 훑어본다. 1930年 展望―우리는 어떻게 할까. 各 團體 主要 幹部의 抱負가 담겨 있다. 먼저 槿友會(槿友會) 委員長 정칠성(丁七星)李 女性 敎養에 對해.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던고?

    日帝强占期 큰 人氣를 끌었던 박가분.

    否認敎養 運動은 어느 때든지 問題거리로 되어있으나 새해부터는 特히 農民 勞動者 層의 婦人을 中心 삼아 敎養을 시키고 싶소. 朝鮮의 夫人運動이 槿友會를 中心으로 움직이고 있으나 一般的으로 보아 農民 勞動者들 夫人이 좀 뒤떨어지는 것이 事實이기 때문입니다.

    大邱에서 上京한 韓男券番(漢南券番) 所屬의 妓生 정칠성은 1923年 物産奬勵運動에 參與한 뒤로 大邱여자靑年會를 結成하고 執行委員이 되었다. 1924年 허정숙(許貞淑) 주세죽(朱世竹) 等과 社會主義 女性團體인 朝鮮女性同友會를 結成하고 執行委員이 되었다. 1925年 東京女子技藝學校에 入學해 留學生 이현경(李賢卿) 黃信德(黃信德) 等과 함께 社會主義 運動團體인 삼월회(三月會)를 結成하고 1927年 歸國해 左右統合 女性運動團體인 槿友會에 參與해 中央執行委員長이 되었다. 京城 布木商 組合長 박승직(朴承稷)의 말이 이어진다.

    언제든지 하는 말이지만 새해부터는 色 있는 옷을 입기를 奬勵하고 싶으니, 흰 衣服처럼 非經濟的이요 非衛生的인 것도 없소이다. 그리고 우리 商業界에 있어서는 數量과 品質을 속이는 일이 絶對 없기를 바라며 緊縮과 節約을 하고 술이나 담배 中 한 가지는 끊어야 되겠으니 나는 二十 餘名의 食口에 對하여 벌써 禁煙을 斷行하여 實施하는 中이외다.

    鍾路4정목 배오개市場 맞은便 박승직商店은 1898年 開業 以來 多年間 個人企業 最高 納稅者에 올랐다. 貧寒한 집안에서 敎育도 받지 못하고 送波場에서 장사를 배워 行商으로 基盤을 닦은 박승직은 布木 都散賣로 始作해 穀物 輸出 等으로 滿洲까지 事業範圍를 넓혀 株式會社로 擴張했다. 婦人의 意見으로 만들어진 官許(官許) 第1號 化粧品 박가분(朴家粉)은 1920年代를 席卷했다. 요즘은 왜分(倭粉) 兩分(洋粉)으로 불리는 輸入 化粧品의 競爭이 加熱되어 박가분의 人氣가 주춤하다. 日本 新式 化粧品을 많이 찾고 프랑스 香水와 未濟 美容비누 냄새를 풍기는 것이 流行이다.

    10年의 回顧

    12月31日 새벽이다. 거의 가거나 잠들고, 켜진 電燈불은 몇 안 남았다. 쥐 한 마리가 編輯局을 橫斷한다. 1年이 지났다. 10年도 지나갔다. 그동안 한림의 周邊 여기저기서 오고간 숱한 말이 겨울밤 바람에 흔들리는 窓門 소리처럼 或은 幻聽처럼 스쳐간다.

    - 나이는 늙고 媤집살이는 고되고, 어찌하면 좋을는지…앞으로 記者生活 10年은 더해나갈 수 있을까.

    - 新聞記者 生活이 언제나 戰鬪生活이니까 쉬 늙지요. 日本 記者는 40世가 本格인데 朝鮮 記者들은 퍽 어린 셈이야.

    - 新出 때는 언제나 興奮해 떠들고 오래 지나면 沈着해지고 말지요. 10年 前에는 氣分으로 떠들었고 只今 記者들은 老鍊해졌다고 볼 수 있지요. 요새는 新出 記者도 10年 前 우리가 처음 記者 되었을 때처럼 그렇게 甚한 感激性은 없는 것 같아 보입디다.

    - 新聞記者뿐 아니라 朝鮮民族 全體가 10年 前보다는 퍽 沈着해진 것이 事實이지.

    - 어느 나라든 政府 機關紙보다는 政府 反對지가 잘 팔리는 것이지. 그러나 朝鮮 新聞의 民族主義라는 것도 漸漸 去勢되는 것이 事實일세. 新聞을 아니 한다면 모를까 新聞의 生命을 維持하는 것을 前提로 한다면 當局의 檢閱基準에 依해서 次次 去勢될 밖에 別수가 있겠나. 只今 10年 前의 新聞을 펴놓고 보면 아찔아찔한 글이 많이 실려 있고 紙面이 搖亂하기 짝이 없지만 그때는 그것도 無事通過했단 말이야. 그러나 한두 次例씩 停刊(停刊)의 맛을 본 오늘에 와서는 그 水準에 天壤之差가 있네. 10年 前에는 한 달에 10回 以上 押收 있기를 例事로 알고, 사실 押收 많이 當하기를 競爭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요새 와서는 아주 딴판이지.

    - 當局은 絶對 行政權을 가졌고 자칫 司法處分에 걸려들기 일쑤네. 懲役이야 살고 나오면 되지만 停刊을 當하면 當場 損害가 數萬원이니 어찌 조심스럽지 않겠나.

    - 그렇게까지 하면서 新聞을 發行할 必要가 있을까.

    - 글쎄 그것이 問題란 말일세. 그것은 新聞뿐만 아니라 朝鮮 사람이 經營하는 모든 文化事業에 對한 問題일세. 우리가 學校를 해나갈 必要가 있느냐, 우리가 農村事業을 해나갈 必要가 있느냐, 우리가 合法的 모든 團體를 해나갈 必要가 있느냐 하는 問題가 되겠지. 結局 그것은 程度 問題 아닐까.

    - 그래도 新聞은 合法的으로 朝鮮人의 主張을 조금이라도 代表하는, 純全히 朝鮮 사람의 손으로 經營하는 唯一한 事業機關이요, 唯一한 政治的 經濟的 文化的 指導機關이지. 서너 個밖에 안 되는 民間新聞이 朝鮮의 知識階級의 總集中소가 된 것은 그런 事情 때문이야.

    - 하지만 政治 經濟가 없는 畸形的인 社會에서 記事 材料는 貧弱하고 文盲率은 높은데 일어(日語)신문은 識者層을 겨냥해 漸漸 파고들고 있으니. 廣告收入은 龜尾의 新聞이 販賣收入의 倍나 되고 日本만 해도 販賣收入과 對等한 水準인데 朝鮮의 境遇 販賣收入의 折半이 될까 말까. 販賣部數는 모든 新聞을 다 합쳐야 10萬部가 될까 말까 하니 2000萬 人口에다 비기면 200名 中에 한 部밖에 안 되는 셈이야. 다른 나라 新聞이 100萬部 200萬部 하는 것에 비기면 어림도 없단 말이야.



    朝鮮社會가 좁은 까닭인지 或은 朝鮮 사람의 度量이 좁아서인지 억지로 허물을 들춰내고 마는 風潮가 많아, 한 줄의 記事라도 이 ‘民間檢閱’을 念頭에 두고 쓰지 않으면 큰 逢變을 하게 된다. 人士同情 記事를 실으면 ‘왜 이런 놈을 다 실어주느냐’고 抗議가 들어오고, 또 안 실으면 ‘왜 저런 것은 실리고 나는 안 실어주느냐’고 惹端을 친다. 朝鮮人 團體의 일은 아무리 好意를 가지고 써주어도 자칫하면 是非가 일어난다. 그들의 大部分은 다 虛張聲勢氣 때문에 眞實에 가깝게 쓰면 大槪는 內容暴露가 되는 탓이다. 쓸 料量이면 最大限의 形容詞를 서너 個 집어넣어 주어야 뒤에 말막음이라도 될 것이다.

    이 時節을 回顧해 朱耀翰은 이렇게 또 하나의 苦衷을 呼訴하고 있다. 東京의 最高 名門 第1高等學校를 卒業하고 上海에 留學 中 獨立新聞에서 記者로 活動했던 주요한度 이제 30代로 접어들었다. 3·1運動을 앞둔 1919年의 劈頭, 열아홉에 最初의 綜合 文藝同人誌 ‘창조’ 創刊號의 첫 페이지에 現代的 散文詩 ‘불놀이’를 發表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朱耀翰이다. 나이 서른은 宛然한 中年이다.

    떠나는 사람들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던고?

    1909年 釜山 東來溫泉 一帶.

    날은 곧 새어 한 해의 마지막 해가 올랐다. 北西쪽 窓門으로 仁王山의 百席이 겨우내 매달린 紅柹 하나처럼 물들어 오른다. 옆 椅子에 발을 올리고 비스듬히 冊床에 팔을 고인 채 잠들었던 한림은 黃昏 무렵인 줄 錯覺하며 소스라치듯 깨어났다. 出勤한 職員들이 하나 둘 코트와 上衣를 벗어두고 와이셔츠에 조끼차림으로 屋上으로 올라간다. 아침마다 모여서 體操하는 게 流行이다. 한림은 굳어가는 胡떡에 굴러다니는 시트론 소다수 한 甁을 찾아내 療飢를 했다. 마감을 하는 동안 午前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갔다. 校正紙가 나오기까지 빈 會議室 구석으로 기어들어 椅子와 椅子를 이어붙이고 눈을 붙였다. 꿈을 꾸었다.

    ‘…東萊 溫泉場(東萊 溫泉場)이다. 終點에서 電車를 타고 北에서 南으로 부산부(釜山府)를 길게 宗團한다. 오른 쪽은 금정산(金井山), 왼쪽으로 山과 丘陵 너머 물길을 따라 20里 밖에 수영만(水營灣)과 海雲臺. 거기서 바다가 열린다. 부산역까지 12㎞. 여기서 警盛行 列車票를 끊는다. 1910年 倂合되던 해 가을 門을 연 르네상스式 새 歷史는 2層에 호텔도 있다. 1912年에 開業한 철도국 直營의 釜山鐵道호텔이다. 서울의 朝鮮鐵道호텔보다 2年 먼저 생겼다. 남은 汽車 時間 동안 港口를 따라 南으로 넓게 뻗은 大路를 걸어 50m 높이의 용두산에 오른다. 동산 아래 10萬坪이 넘는 日本人 居留地는 그야말로 바둑板처럼 區劃 整理가 되어있다. 日本의 開港地 하나를 떼어다놓은 것 같다고들 한다. 釜山은 1876年 江華島條約이 締結되던 해 唯一하게 最初로 開港되었고 다음해 阼階(租界)가 設置되어 日本 淸나라 英國의 領事館이 開設되었다. 눈 아래 港口의 旅客埠頭에는 관부連絡船이 碇泊해 있다. 乙巳條約 두 달 前에 첫 運行을 開始한 以來 運航速度와 輸送能力이 急伸張해왔다. 배에서 내린 사람 相當數는 翰林과 같은 汽車를 탈 乘客들이다. 京城 가는 사람, 大邱나 平壤에서 내릴 사람, 新義州 지나 鴨綠江 넘어 奉天으로 갈 사람, 가끔은 유럽까지 直行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도쿄나 오사카에서 시모노세키를 거쳐 釜山 서울 新義州로 해서 安東 시베리아 러시아 유럽을 車票 한 張으로 換乘해 旅行할 수 있다. 관부連絡船을 管理하는 日本 政府 철도국은 世界로 가는 汽車라는 新槪念의 中核에 이 釜山을 놓았다. 올해 蔚山飛行場과 汝矣島 京城飛行場의 個項食餌 열렸다. 한림은 스물한 살에 故鄕을 떠나 上京한다. 많은 사람이 漸漸 더 어디론가 떠나가고 있다….’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던고?

    1926年 釜山港의 관부連絡船.

    수런대는 騷亂을 까마득히 쫓아 한림이 다시 잠이 깨었을 때 壁에 걸린 時計는 午後 1時를 가리키고 있었다.



    編輯局의 午後

    한 時 半

    某-든 손가락이

    푸른 原稿紙에

    肉薄한다

    突擊한다

    (…)

    찰칵

    철컥

    工場에서는

    活字의 悲鳴-

    社會部長의 귀는

    일흔두 個다

    젊은 見習記者의 손끝은

    종이 위로 滿洲의 戰爭을 달린다

    (…)

    分娩의 數分 前

    달음박질하는 輪轉機

    벙글거리는 齒輪(齒輪)

    다리 꼬고 椅子에 자빠져

    나는 눈을 감고 網膜 위에 그려본다

    汽車는 驛마다

    우리의 아들-新聞紙를 뿌려주겠지

    前 朝鮮의 수그러진 머리 위에서

    외치는

    딩區는

    그 子息의 模樣을

    4個月 뒤, 다가오는 새 봄에 新聞界에 入門하게 되는 22歲의 김기림(金起林)은 見習記者 時節의 印象을 담아 後날 이 같은 詩를 發表하게 된다.



    東亞日報 / 동광 / 別乾坤 / 新東亞 / 鄭鎭奭, ‘韓國言論社’, 나남출판, 2001 / 鄭鎭奭, ‘日帝時代 民族紙 押收記事 모음 1’, LG상남言論財團, 1998 / 현길언, ‘文學과 사랑과 이데올로기-현진건 硏究’, 太學士, 2000 / 임경석, ‘잊을 수 없는 革命家들에 對한 記錄’, 역사비평사, 2009 / 조영복, ‘文人記者 金起林과 1930年代 ‘活字-圖書館’의 꿈’, 살림, 2007 / 노형석, ‘모던의 誘惑 모던의 눈물’, 생각의 나무, 2004 / 김상태 便역, ‘尹致昊 日記’, 역사비평사, 2005 / 東亞日報社, ‘民族과 더불어 80年’, 2000 / ‘캠브리지 中國史 11’, 새물결, 2007

    박윤석

    東아시아 三國의 近代를 探究하는 硏究者. 서울大學校 東洋史學科를 卒業하고 동아일보에서 記者로 20年 일했다. 建國大學校 言論情報大學院에서 韓國近代와 近代新聞에 對해 講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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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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