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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萬 兵力의 51日 大追擊戰 腸 上司, 18年 만에 빚을 갚다|신동아

160萬 兵力의 51日 大追擊戰 腸 上司, 18年 만에 빚을 갚다

江陵 北韓 潛水艦 浸透事件

  • 오세영| 歷史作家, ‘베니스의 開城商人’ 著者

    入力 2010-12-22 11: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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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나긴 作戰이었다. 1996年 9月15日 밤 北韓 潛水艦이 江原道 江陵 安人眞理 앞바다로 浸透하면서 始作된 끈질긴 追擊戰은 無慮 51日 만에야 幕을 내렸다. 浸透 工作員 25名을 射殺하거나 生捕하는 戰果를 올렸지만, 我軍 8名이 戰死하고 民間人 4名이 목숨을 잃는 等 우리 側 被害도 컸다. 더욱이 그 渦中에 美國에서는 로버트 金이 逮捕되고 러시아에선 최덕근 領事가 被殺되는 뜻밖의 事態가 벌어졌다.
    1978年 11月25日 午後 6時, 京畿道 安養 隣近 수리산.

    해가 짧은데다 山속이다 보니 日沒時刻까지 30分이나 남았지만 周圍를 分揀하기 힘들 만큼 어두웠다. 그렇게 어둠이 깔린 수리산을 特戰司 1個 中隊가 소리를 죽이며 搜索하고 있었다. 特戰司는 一般 步兵科 編制를 달리하기에 1個 中隊라고 해도 兵力은 겨우 10名을 上廻한다.

    忠南 洪城郡 광천읍에 浸透한 北韓 工作員 3名이 軍의 包圍網을 뚫고 어느새 安養까지 北上했다. 더 以上 北上을 許容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對間諜作戰本部는 精銳 特戰司 兵力을 출동시킨 것이다.

    先頭에 선 先任下士가 뭔가 異常을 感知했는지 주먹을 불끈 쥐며 停止 信號를 보냈다.

    “뭡니까?”



    中隊長이 姿勢를 낮추며 다가왔다.

    “사람이 지나간 痕跡이 있습니다.”

    先任下士가 落葉을 가리켰다. 어둠 속에서 용케도 발자국을 發見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게 工作員의 발자국이라고 斷定 짓기는 어렵지 않소?”

    中隊長은 신중했다.

    “발자국이 생긴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데다 2~3人이 빠른 速度로 뛰어간 痕跡입니다. 이미 珍島개 하나가 發令된 마당입니다. 登山客日 理 없습니다. 北韓 工作員이라고 봐야 합니다.”

    先任下士는 當場 쫓아가자고 했지만 中隊長은 선뜻 決定을 내리지 못했다. 相對는 北韓의 最精銳로 꼽히는 偵察局 所屬의 工作員들이다. 섣불리 行動하다 包圍網이 뚫리는 수가 있다. 그렇다고 꾸물對面 꼬리를 놓친다. 上部에 報告하고 支援을 要請할 것인가. 아니면 中隊 獨斷으로 追擊할 것인가. 暫時 苦心하던 中隊長은 쫓아가기로 했다.

    “그렇다면 담배村 쪽으로 빠져나가려 할 텐데, 兵力을 半으로 나누겠소. 내가 追擊할 테니 先任下士는 隊員들을 引率하고 담배村에 먼저 가서 埋伏하고 있으시오!”

    “알겠습니다.”

    先任下士는 隊員 中에서 6名을 指目하더니 앞장을 섰다. 隊員들은 M16 小銃을 꼭 쥔 채 先任下士의 뒤를 따랐다.

    出動할 때 잔뜩 緊張했던 特戰司 隊員들은 막상 交戰이 臨迫하자 平靜을 되찾았다. 相對가 偵察局 所屬의 工作員이라고 해도 大韓民國 特戰司가 그들을 制壓하지 못할 理由가 없다. 隊員들은 부지런히 先任下士의 뒤를 따랐다.

    “너! 너! 저기! 그리고 너! 너는 저기!”

    先任下士가 埋伏地點을 정해주자 隊員들은 迅速하게 埋伏에 들어갔다. 先任下士의 豫測이 틀리지 않다면 곧 北韓 工作員들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

    前方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稀微하지만 틀림없이 人기척이었다. 隊員들의 緊張이 最高潮에 達했다.

    그 瞬間 펑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追擊하던 中隊員들이 信號彈을 쏘아 올린 것이다. 支援兵力에게 位置를 알리기 위해 쏘아 올린 信號彈은 工巧롭게도 埋伏 隊員들 앞에 떨어졌고 가뭄으로 바짝 마른 나뭇잎에 불이 옮겨 붙었다.

    “불이다!”

    갑작스러운 山불로 埋伏 隊員들은 허둥댔고 그 사이에 北韓 工作員은 悠悠히 包圍網을 빠져나갔다. 緊急 出動한 特戰司는 北韓 工作員을 逮捕 或은 射殺할 수 있는 機會를 그렇게 놓쳐버리고 말았다.

    한 달 넘게 闊步하다 越北

    1978年 11月4日 광천읍 학성리 海岸으로 浸透한 北韓 偵察局 所屬 工作員 3人은 隣近의 軍事施設을 探知하던 中 나무를 주우러 山에 올라온 附近 住民들에게 發覺되자 그들을 殺害하고 北上, 逃走했다. 軍은 卽刻 非常警戒網을 펼쳤지만 北韓 工作員들은 豫想보다 훨씬 빠른 速度로 移動하면서 包圍網을 벗어났다. 그들은 洪城과 豫算, 그리고 溫陽과 天安을 거치며 繼續 北쪽으로 移動했는데 그 過程에서 民間人 여러 名이 被殺됐다.

    緊急 出動한 軍은 安養 수리산에 이어 富平, 金浦에서도 工作員들과 마주쳤지만 番番이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여러 次例 包圍網을 빠져나간 工作員들은 金浦郡 운양리 天玄部落 뒷山에서 北에서 내려온 案內員을 만나 12月4日 子正 무렵 감암포에서 江을 건너 無事히 北으로 歸還했다. 忠淸道와 京畿道 一帶의 地域師團과 西部戰線에 駐屯한 海兵部隊, 特戰司와 戰鬪警察, 그리고 豫備軍까지 總動員돼 한 달 以上 忠淸道부터 軍事分界線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工作員들은 보란 듯 包圍網을 벗어나 越北한 것이다.

    工作員 3名이 無慮 한 달이 넘도록 忠淸道와 首都圈 一帶를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다 다시 北으로 돌아간 것은 衝擊的인 일이었다. 1968年에 靑瓦臺와 蔚珍·三陟地區에 武裝間諜이 南派됐을 때도 包圍網을 뚫고 北으로 歸還한 사람이 있었지만, 그때는 休戰線에서 가까운 곳이거나 險한 山岳地帶여서 이番과 境遇가 달랐다.

    工作員들을 놓친 데는 君의 豫想이 틀린 것도 큰 몫을 했다. 낮에는 비트를 파고 숨어 있다가 밤에 山골짜기를 타고 逃走할 것이란 豫想을 뒤집고 北韓 工作員들은 환한 대낮에 大路로 移動한 것이다. 逃走하는 過程에서 떨어뜨린 日誌에 依해 工作員들은 平澤에서 病占까지 汽車로 移動했고 冠岳山 入口 賣店에서 빵을 사 먹은 事實이 밝혀졌다. 完全히 虛를 찌른 行動이었다.

    脫出經路가 고스란히 드러나면서 問責이 뒤따랐고, 該當部隊는 切齒腐心의 歲月을 보내야 했다. 問責을 當한 部隊 中에는 指揮官 以下 部隊員 全員이 削髮을 하고 每日 10㎞를 驅步하며 復讐를 다짐한 곳도 있었다.

    wag the dog

    産業化에 成功한 大韓民國은 1990年代로 접어들면서 經濟的 繁榮을 謳歌했고 文民政府가 出帆하면서 軍部獨裁의 어두운 그림자도 걷히기 始作했다. 韓國이 平和的 政權交替를 이루는 동안 北韓은 世襲을 마무리지었다. 1990年代로 접어들면서 김정일의 後繼者 承繼는 速度를 더했다. 金正日은 1990年 最高人民會議 第9期 1次 會議에서 國防委員會 第1副委員長으로 選出된 데 이어 1993年 國防委員會 委員長이 되면서 事實上 世襲을 完成했다. 김일성은 勞動黨 總祕書와 國家主席 자리만 차지하고 2線으로 물러났다.

    平和的 政權交替를 이룩한 韓國과 世襲을 達成한 北韓. 그런데 社會主義의 敗北는 韓半島에 局限된 것이 아니었다. 20世紀 말로 접어들면서 世紀 내내 持續되던 이데올로기 對立이 마침내 終末을 告했다. 自由陣營이 이기고 共産陣營이 진 것이다. 마르크스는 資本主義가 스스로의 矛盾으로 인해 저절로 崩壞할 것이라 했는데, 그前에 社會主義가 먼저 무너져버린 것이다. 資本主義도 많은 問題點을 지니고 있지만 그래도 ‘能力에 따라 일하고 必要에 따라 分配한다’는 社會主義의 虛構性에 비해서는 現實的이었던 것이다.

    蘇聯은 解體됐고 共産圈 國家들은 改革과 開放을 서둘렀다. 改革과 開放만이 새로운 環境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었다. 러시아와 中國은 改革과 開放을 통해 活路를 摸索했지만 北韓은 바뀌지 않았다. ‘우리 式’을 내세우며 閉鎖를 固執했다. 섣불리 門을 열었다가는 體制가 崩壞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東獨이 脈없이 西獨에 吸收統一되는 過程을 똑똑히 지켜본 터였다.

    이대로 門을 굳게 걸어 잠근 채 體制를 維持할 수는 없을까. 自然히 非對稱前歷이 北韓 指導部의 關心을 끌게 되었다. 非對稱前歷은 不利한 傳貰를 한番에 逆轉시킬 수 있는 魅力的인 武器다. 그리고 非對稱武器의 代表는 核이다. 北韓이 核을 保有하면 東北亞의 안보는 根本부터 흔들리게 된다.

    寧邊의 核施設에서 核武器를 製造하고 있다는 疑惑이 일면서 韓半島에 다시 危機가 몰려왔다. 北韓은 原子爐임을 들어 强力하게 反撥했지만 美國은 如此하면 寧邊의 核施設을 爆擊할 氣勢였다. 北韓 조평통 書記局 副局長 박영수의 ‘서울 불바다’ 發言은 이때 나온 것이다.

    危機의 瞬間에 지미 카터 前 美國 大統領이 仲裁者 노릇을 하면서 고비를 넘겼고, 처음으로 南北 頂上會談이 열리게 됐다. 그러나 큰 期待를 모은 南北 頂上會談은 1994年 7月8日 김일성 主席이 急逝하면서 霧散되고 말았다. 그렇게 되면서 흐지부지 넘어간 北韓 核은 두고두고 後患을 낳게 된다.

    그 무렵 北韓은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洪水와 冷害로 穀物 收穫이 크게 줄어들면서 住民들은 배를 곯아야 했고, 그동안 石油와 가스를 외상으로 대주던 러시아가 現金 決濟를 要求하면서 燃料도 모자라게 됐다. 工場은 멈춰 섰고, 電燈이 꺼진 거리는 暗黑 世上으로 變했다. 춥고 배고픈 苦難의 行軍이 始作된 것이다. 人民들의 입에서 ‘그래도 首領님 時節이 좋았는데…’ 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果然 김정일은 危機를 克服할 것인가. 世襲이 이뤄져도 김정일이 神格化한 金日成을 代身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란 展望도 나왔다.

    內部 混亂을 收拾하기 위해서 밖에서 問題를 일으키는 것을 꼬리가 개를 흔든다는 意味로 ‘왜그 더 도그(wag the dog)’이라고 한다. 1996年으로 넘어오면서 北韓의 狀況이 그러했다. 情報當局은 緊張해서 北韓軍의 動向을 銳意注視했다.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雰圍氣였다.

    350t 상어級, 潛航하다

    160만 병력의 51일 大추격전 장 상사, 18년 만에 빚을 갚다

    潛水艦 浸透 後 江陵市 강동면 安人眞理 野山에서 軍人들이 逃避 中인 武裝間諜을 搜索하고 있다.

    1996年 9月13日, 咸鏡南道 낙원군 退潮 海軍基地.

    乘用車가 어둠이 깔린 기지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海上處長 김동원 大佐가 김대식 上場을 맞이했다. 出征에 앞서 工作員들을 激勵하기 위해 偵察國葬 김대식 上場이 基地를 찾은 것이다. 김대식 賞狀은 堵列한 浸透要員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김일성大學 經濟學部를 나와서 韓國軍의 特典司令官에 該當하는 偵察局腸이 된 特異한 經歷을 지녔다. 人民軍 總司令官을 歷任한 對南 强勁派 김격식 大將이 그의 四寸이다.

    “出戰 채비가 完了되었습니다.”

    艦長 정영구 中佐가 굳은 얼굴로 決意를 다졌다.

    “목숨을 걸고 偉大한 指導者 同志를 守護하겠습니다.”

    案內助長 儒林 少佐가 不動姿勢를 醉했다. 潛水艦 乘組員 22名과 次例로 握手를 나눈 김대식 賞狀은 마지막에 堵列한 세 사람의 偵察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들은 所屬이 달라 艦長은 勿論 海上處長도 이들의 正確한 身上을 모르고 있었다. 그저 助長은 少佐이고 2名의 兆원은 大尉라는 것 程度만 알려져 있었다.

    “貴官들의 武運을 빌겠다.”

    김대식 上場이 偵察組 세 사람의 손을 힘껏 잡았다. 乘組員들과 握手할 때와는 달리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期必코 任務를 完遂하겠습니다.”

    偵察組腸이 悲壯한 表情으로 입을 열었다.

    “乘船!”

    艦長 정영구 中佐의 命이 떨어지자 22名의 乘組員과 3人의 偵察組는 迅速하게 潛水艦에 乘船했다.

    “다녀오겠습니다.”

    김동원 大佐가 김대식 上場에게 敬禮를 하고 마지막으로 乘船했다. 이미 두 次例나 潛水艦 工作을 成功的으로 마친 바 있는 김동원 對坐는 自身이 있었다. 22名의 乘組員과 3人의 偵察組를 태운 상어級 潛水艦은 徐徐히 退潮港을 빠져나갔다. 時計는 1996年 9月14日 子正을 가리키고 있었다.

    以前에는 母船에서 分離된 半潛水艇을 利用해 海岸浸透를 試圖하던 北韓은 1990年代로 들어서면서 浸透手段을 潛水艦으로 바꿨다. 그쪽이 不純한 日記에 安全했기 때문이다. 南韓의 海岸警戒는 큰 問題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不純한 日記가 휠씬 큰 障礙였다. 浸透에 動員하는 두 種類의 潛水艦 中 80t짜리 유고級은 勞動黨 3號廳舍 作戰部에서 直接 運用하고, 350t짜리 상어級은 人民武力部 偵察局 해傷處에서 支援을 받는다. 그런 理由로 乘組員과 偵察組는 서로 所屬이 달랐다.

    潛水艦은 스노켈(外部 空氣를 빨아들여 엔진을 稼動, 蓄電池를 充電하는 시스템)만 水面 위로 올려놓고 南쪽으로 向했다. 北韓 領海지만 美國 偵察衛星의 監視를 避하기 위해 水中으로 航海하는 中이다. 軍事分界線을 넘으면 스노켈마저 내리고 完全 潛航해야 한다. 韓國 海軍은 P3C 對潛哨戒機를 導入하면서 海上監視 能力이 크게 强化됐다. 그렇지만 너무 겁먹을 必要는 없다. 東海는 潛水艦이 活動하기에 與件이 아주 좋은 바다다. 港口는 水深이 깊어 숨氣가 쉽고, 寒流와 暖流가 交叉하면서 생기는 首魁는 레이더와 小나를 攪亂시킨다. 海水의 密度가 海域에 따라 큰 差異가 있는 것도 探知能力을 떨어뜨리는 要因 中 하나다. 海上浸透에서 正말로 두려운 것은 갑자기 惡化되는 日記였다.

    波濤 뚫고 海邊으로

    160만 병력의 51일 大추격전 장 상사, 18년 만에 빚을 갚다

    武裝間諜의 逃走를 遮斷하기 위해 搜索隊가 春川 소양댐 船着場에 軍 哨所를 設置, 警戒를 强化하고 있다.

    美國 워싱턴 美國 海軍 情報局.

    情報分析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東海를 航海 中인 潛水艦 프로비던스에서 微細한 音響을 捕捉했는데 그게 潛水艦인지 與否가 確實치 않았다. 로스앤젤레스級 攻擊潛水艦人 프로비던스의 後尾에 달린 曳引 小나는 500㎞ 떨어진 敵 潛水艦의 움직임까지 探知한다. 北韓 潛水艦이 隱密히 潛航 中인가. 그럴 可能性이 있지만 이것만 가지고 速斷할 수는 없다. 물 속을 航海하는 潛水艦의 움직임을 正確히 探知하는 것은 最高의 探知 技術을 가진 美國 海軍에도 쉬운 일이 아니다. 물고기떼와 首魁가 種種 潛水艦으로 誤認되곤 한다. 正確한 水門(水紋)을 探知하려면 北韓 退潮港 入口에 水中 聽音網을 設置해야 하는데 이는 現實的으로 不可能했다.

    曳引 소나에 잡히는 信號音이 조금씩 커졌다. 首魁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分析官은 얼른 水中派 리스트 프로그램을 作動하고 受信되는 陰門과 比較해봤다. 사람마다 音聲이 다르듯이 潛水艦도 各國의 潛水艦마다 내는 소리가 다르다. 美國 海軍은 여러 種類의 水中 陰門 리스트(Underwater Parameter List)를 데이터베이스로 構築해놓고 있었다.

    소리가 다시 작아졌다. 確實치는 않지만 상어級으로 推定되는 潛水艦이 南쪽으로 亢進하는 것 같았다. 分析官은 아무래도 上部에 報告해야겠다고 判斷하고 報告書를 作成하기 始作했다.

    1996年 9月17日 午後 9時, 江陵 安人眞理 海岸.

    갈수록 波濤가 거세졌다. 波高가 2m는 될 것 같은데 이 狀態라면 헤엄쳐서 潛水艦으로 돌아갈 수 없다. 偵察組腸 儒林 少佐는 潛水艦을 海岸 가까이 불러들이기로 하고 送信機를 집어 들었다.

    退潮 基地를 出港한 潛水艦은 15日 午後 8時에 江陵 安人眞理 海上에 當到했고, 案內兆 2人과 偵察組 3人은 夜陰을 틈타 海岸에 上陸했다. 江陵 一帶의 軍事施設과 飛行場, 發電所의 位置를 撮影하는 것이 이番 浸透의 目的이다. 大韓民國 海兵隊가 有事時에 元山에 上陸하는 것을 目標로 하고 있듯이 北韓 海軍은 江陵을 上陸 豫定地로 定하고 있었다.

    一旦 公海上으로 물러갔던 潛水艦은 16日 늦은 午後에 偵察組와 案內條를 태우기 위해 다시 海岸으로 接近했지만, 波濤가 갑자기 세지는 바람에 接線을 抛棄하고 먼 바다로 돌아가야 했다. 하루를 기다려 17日 늦은 午後에 再次 接近을 試圖했지만 波濤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었다.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潛水艦은 無理지만 海邊에 다가가기로 했다.

    “陸上으로 脫出한다!”

    이 무렵 韓國軍은 海岸 警戒에 많은 虛點을 드러내고 있었다. 國民 便益을 理由로 海岸 鐵條網이 續續 撤去됐고, 警戒 部隊도 現役 師團에서 豫備軍이 主軸인 動員師團으로 交替됐다. 事實 海岸을 철벽같이 警戒하는 것은 不可能하다. 全軍을 모두 海岸 警戒에 投入해도 50m當 哨兵 1名을 세우게 된다. 그렇게 해본들 浸透를 完璧하게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北韓 工作員들은 그날로 歸還하는 當夜工作을 ‘逍風’에 比肩하고 있었다.

    勿論 群島 問題點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陸軍은 熱相觀測裝備를 配置했고 海軍은 哨戒機를 導入했지만 如前히 限界가 있었다. 最高의 友軍은 險한 날씨. 隨時로 變하는 변덕스러운 날씨가 南에는 友軍이 됐고 北에는 最强의 敵이 됐다.

    이렇게 波濤가 센 날 潛水艦을 無理해서 接近시켰다가는 자칫 坐礁될 危險이 있다. 더구나 여기는 暗礁地帶다. 海岸 70m까지 接近한 艦長은 難堪한 表情으로 海上處長을 쳐다봤다.

    “해보는 데까지 해보자!”

    苦心하던 海上處長이 決斷을 내렸다. 狀況이 어렵지만 그렇다고 偵察組와 案內條를 그냥 놔두고 돌아갈 수는 없다.

    “負傷(浮上)한다. 천천히 後津河라!”

    물 위로 떠오른 潛水艦은 스크루를 逆回轉시키며 천천히 後進했다. 艦長 정영구 中佐는 浮上해서 後進하는 쪽을 擇했다. 그쪽이 暗礁를 避하는 데 유리하다고 判斷한 것이다. 집채만한 波濤가 밀려오면서 潛水艦은 甚하게 요동쳤다. 艦長은 잔뜩 緊張해서 左右를 살폈지만 漆黑같은 어둠 속에서 四方에 흩어져 있는 暗礁들을 찾아내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

    鈍濁한 느낌과 함께 潛水艦이 그대로 멈춰 섰다. 海岸을 50m 남겨놓고 暗礁에 걸린 것이다. 憂慮하던 일이 끝내 터지고 말았다.

    “앞으로 빼라!”

    艦長이 허둥대며 前進을 命令했다. 그러나 엔진을 最大로 稼動시켜도 潛水艦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暗礁에 단단히 걸린 것이다. 最惡의 狀況이 發生했다. 函內에 沈默이 흘렀다. 날이 밝으면 潛水艦은 눈에 띌 것이다. 海上處長은 時計를 들여다보았다. 17日 22時를 가리키고 있었다. 더 遲滯할 수 없다. 決定을 내려야 한다.

    “潛水艦을 抛棄하고 陸上으로 脫出한다.”

    海上處長은 機密書類 消却을 命했다.

    生死를 건 追擊戰

    160만 병력의 51일 大추격전 장 상사, 18년 만에 빚을 갚다

    武裝間諜 搜索에 나선 軍人들이 1996年 9月20日 江陵市 강동면 한 野山에서 地圖를 보며 掃蕩作戰을 熟議하고 있다.

    1996年 9月18日 새벽 1時17分, 安人眞理 海岸 警戒哨所.

    波濤가 허연 입을 벌리고 쉴 새 없이 밀려오면서 을씨년스러운 雰圍氣를 더했다. 海水浴客들로 붐비던 게 엊그제 같은데 海邊은 어느새 썰렁한 바닷가로 變해 있었다. 이런 날은 夜間 勤務가 더욱 지루하다. 哨兵은 아직 한참 남은 交代 時間을 怨望하며 周圍를 둘러봤다.

    그런데 저게 뭘까. 海岸가에서 불빛이 보였다. 이렇게 波濤가 센 날 밤에 누가 저곳에…? 或是 배가 念慮된 漁夫가 자다가 달려 나온 것일까. 한참을 지켜보던 哨兵은 報告해야겠다고 생각하고 受話器를 집어 들었다. 이때가 1時35分頃. 비슷한 時刻에 安人眞理 海岸道路를 運行하던 택시技士가 殊常한 者들이 海岸을 서성이고 있다고 警察署에 申告했다.

    그만하면 發見과 申告는 迅速하게 이뤄진 便이다. 그렇지만 그 다음부터가 問題였다. 正確을 期하기 위해서 現場 偵察을 實施한 것까지는 좋은데, 不必要하게 時間을 끌면서 上部 報告가 遲滯된 것이다. 對間諜作戰을 總括하는 合同參謀本分에 報告가 들어온 時刻은 午前 4時15分. 合同參謀本部는 午前 5時를 期해 江原道 地域에 非常警戒令을 發令했는데, 그때는 潛水艦 乘組員들이 이미 山속으로 逃走한 다음이었다.

    初期 對應은 늦었지만 以後의 措置는 그런대로 成功的이었다. 合同訊問組가 現場으로 急派되어 狀況 分析에 나섰고, 豫想 逃走路에 따라 沮止線이 迅速하게 펼쳐졌다. 豫想 逃走路는 1968年에 蔚珍·三陟, 그리고 1978年에 鑛泉으로 南派된 武裝間諜들의 復歸路를 分析해서 作成했다.

    反面에 北韓 工作員들은 以前에 南派된 적이 있는 工作員들로부터 脫出路를 敎育받고 있었다. 北韓 工作員들은 平安南道 平原郡 어파리에 있는 北韓 偵察局 南派工作員 訓鍊所에서 訓鍊을 받는데, 그곳 敎官들은 南派 經驗이 있는 工作員들로 構成돼 있었다. 敎官들 中에는 여러 次例 南派된 사람들도 있는데, 敎導隊指導國 軍團長 임태영 中將은 無慮 27番이나 南派돼 共和國 二重英雄이 된 사람이다.

    檢證받은 脫出路를 따라 必死의 脫出에 들어간 北韓 工作員과 이番에는 絶對로 놓치지 않겠다는 對間諜作戰本部. 쫓고 쫓기는 生死의 追擊戰이 1996年 9月에 江原道 江陵 一帶에서 벌어졌다.

    乘組員 11名 自決

    1996年 9月18日 午後 4時, 강릉시 연곡면 靑鶴山.

    潛水艦을 脫出한 工作員 12名이 숨을 헐떡이며 靑鶴山 기슭을 오르고 있었다.

    “저게 노인봉, 그리고 저쪽이 매封印 것 같습니다.”

    地形地物을 把握하던 部處長이 땀을 닦으며 말했다. 潛水艦을 抛棄하고 上陸한 지 6時間이 지났다. 그들은 이미 第1次 沮止線을 突破하고 백두대간 줄기를 타고 있었다. 이대로 백두대간을 타고 北上하면 休戰線에 이르지만, 乘組員들의 얼굴에서 希望의 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偵察組와는 달리 正式으로 浸透工作 訓鍊을 받은 적이 없는 그들은 이미 脫盡한 狀態였고 武裝도 변변히 갖추지 못했다. 1次 沮止線은 용케 빠져나왔지만 繼續해서 沮止線을 突破할 自身은 없었다. 搜索隊는 이미 바로 뒤까지 쫓아오고 있었다.

    “偵察組는 빠져나갔을까요?”

    艦長이 물었지만 海岸處長인들 알 턱이 없었다. 미리 上陸한 偵察組와 案內兆 5名 外에도 上陸해서 逃走하는 過程에서 8名이 흩어졌는데 그들의 生死도 궁금했다.

    헬기 소리가 나자 乘組員들이 一齊히 몸을 숨겼다. 벌써 發覺된 것일까. 헬기 여러 臺가 날아오더니 稜線에 兵力을 내려놓기 始作했다. 아무래도 더 以上 달아나는 게 不可能할 것 같았다. 갖가지 狀況에 對備해 여러 種類의 訓鍊을 받은 그들이지만 걸어서 北으로 復歸하는 境遇는 包含돼 있지 않았다. 海上處長이 悲壯한 얼굴로 乘組員들을 쳐다봤다.

    “아무래도 여기를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다. 죽음으로써 將軍님의 恩惠에 報答하겠다. 내가 앞장설 테니 모두 뒤를 따르라.”

    말을 마친 海上處長이 머리에 拳銃을 갖다 댔다. 一發의 銃聲이 울리면서 海上處長이 쓰러졌다. 乘組員들 모두 울먹이며 무릎을 꿇고 앉자 艦長 정영구 中佐가 그들의 머리에 銃을 대고 次例로 방아쇠를 당겼다. 乘組員들은 ‘共和國 萬歲’를 외치며 죽어갔고 마지막으로 艦長만 남았다. 拳銃을 머리에 대고 自決하려던 정영구 中佐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山속을 向해 내달렸다.

    乘組員 11名이 脫出을 抛棄하고 靑학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즈음 그들과 떨어져서 혼자 山속을 헤매던 이광수 上位가 生捕되면서 비로소 工作員들의 所屬과 規模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總人員은 25名. 11名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1名이 생포됐다.

    19日로 넘어가면서 前科가 이어졌다. 午前 10時15分 江陵市 강동면 單幕骨 亡德고개에서 特功聯隊가 3名을 射殺한 데 이어 午後 4時10分에는 緊急 出動한 特戰司가 칠성산에서 逃走하는 乘組員 3人을 射殺했다. 비슷한 時刻에 鐵壁部隊가 강동면 山城우리에서 1名을 더 射殺했는데 그는 組員들과 헤어진 偵察組張으로 밝혀졌다. 미리 上陸해 있던 偵察組와 案內條는 潛水艦이 坐礁된 것을 알고 逃走했는데, 무슨 理由인지는 모르지만 助長은 組員들과 헤어져 單獨으로 行動하고 있었다.

    作戰이 繼續되면서 續續 前科가 報告됐다. 於此彼 潛水艦 乘組員들과 案內條는 北으로 復歸할 能力이 없다. 問題는 남은 偵察組 2人. 그들은 包圍網을 뚫고 北으로 逃走할 能力을 지닌 者들이다. 對間諜作戰本部는 特戰司에 그 任務를 맡기기로 했다.

    我軍 被害도 續出

    1996年 9月21日 午前 9時, 江陵市 칠성산 附近 982高地.

    헬기에서 로프가 내려지면서 特戰司 隊員들이 익숙한 솜씨로 로프를 타고 地上으로 내려섰다.

    “빨리 움직여!”

    選任擔當官 장기용(假名) 上司가 隊員들을 督勵했다. 工作員들이 칠성산 쪽으로 逃走하고 있다는 情報에 따라 緊急出動한 길이다. 現地까지 남은 工作員들은 案內助長과 案內員, 艦長과 機關長, 그리고 問題의 偵察組 2人이다.

    레펠링을 끝낸 特戰司 隊員들이 迅速하게 戰鬪隊形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헬기로 正常으로 移動해서 밑으로 훑고 내려가는 搜索은 效果가 큰 만큼 危險도 따른다. 언제 어디서 銃彈이 날아올지 모른다. 相對가 北韓 偵察組라면 더욱 警戒해야 한다. 出動한 特戰司는 바로 18年 前 安養 수리산에서 北韓 工作員을 눈앞에서 놓친 그 部隊. 切齒腐心의 歲月을 보낸 끝에 마침내 名譽回復의 機會를 잡은 것이다. 장기용 上士는 982高地에서 目擊된 工作員들이 偵察組라고 確信했다. 두 番의 敗北는 없다. 腸 上士는 隊員들을 3人 1組로 編成하고 搜索에 들어갔다.

    豫測이 틀리지 않다면 偵察組는 이 附近에 비트를 파고 어두워질 때까지 꼼짝 않고 隱身해 있을 것이다. 그런데 豫測이 너무 正確했던 것일까. 豫想보다 빨리 交戰이 벌어졌다. 982高地 9部 稜線에 이른 特戰司는 바위 틈에 몸을 숨기고 있던 偵察組 2名과 正面으로 마주쳤다. 距離는 不過 7~8m.

    “엎드려!”

    장기용 上士는 高喊을 지르며 얼른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뒤따르던 隊員도 재빨리 避할 곳을 찾아 姿勢를 낮췄다. 그런데 後尾에 섰던 隊員이 마땅한 掩蔽物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銃彈이 날아들었다. 銃擊戰이 이어졌고 中隊長이 志願兵을 이끌고 달려왔지만 偵察組는 이미 자취를 감춘 다음이었다. 全域을 얼마 남기지 않았던 中士는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最初의 我軍 戰死者가 發生한 것이다.

    安養에 이어 또 한 次例 當한 꼴이 되고 말았다. 隊員들은 이를 갈았다. 1978年에 北으로 復歸한 工作員들이 偵察局의 敎官으로 있다는 情報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番에 潛水艦을 타고 내려온 偵察組는 그들이 養成한 工作員들日 것이다. 이番에는 絶對로 놓치지 않겠다. 장기용 上士는 悲壯한 낯빛으로 隊員들을 督勵했다.

    어수선한 雰圍氣 속에서도 前과는 이어졌다. 22日 새벽 1時20分 칠성산에서 工作員 1名을 射殺했는데 案內兆로 確認됐다. 그리고 새벽 6時45分에 칠성산에서 艦長 정영구 中佐가 射殺됐다. 남은 工作員은 案內助長 儒林 少佐와 機關長 마일춘, 그리고 偵察組 2人. 장기용 上士는 狀況板을 凝視하며 偵察組의 豫想 逃走路를 머릿속으로 그려봤다.

    그 사이에 怒濤部隊와 花郞部隊에서도 戰死者가 發生했다. 搜索前이 繼續되면서 我軍의 被害도 漸漸 늘고 있었다.

    北 潛水艦 뜨자 로버트 金 逮捕

    9月24日 美國 버지니아 州 알링턴 포트마이어 美 陸軍 將校클럽.

    워싱턴 DC 市內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位置한 이 將校클럽에 美軍 高位 將校들과 워싱턴 駐在 各國 武官들이 續續 到着했다. 韓國大使館 무관부에서 國軍의 날을 記念해서 스탠딩 뷔페 形式의 파티를 연 것. 파티는 美國人들에겐 生活의 一部다. 參席者들에게는 交流와 情報 交換의 場이기도 하다. 參席者들은 三三五五 짝을 지어 談笑를 나눴고 和氣靄靄한 雰圍氣에서 파티는 무르익어갔다.

    그때 파티와는 어울리지 않는 服色의 男子 셋이 빠른 걸음으로 韓國 武官들과 談笑를 나누던 初老의 紳士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이 紳士에게 自動車 接觸事故 申告가 들어왔다며 잠깐 밖에서 얘기하자고 했다. 紳士는 疑訝해 하며 그들과 함께 나갔고, 이를 지켜보던 海軍 武官이 不安한 表情으로 그들의 뒤를 따랐다.

    “FBI입니다. 로버트 金, 當身을 國家機密流出 嫌疑로 逮捕하겠소.”

    韓國系 美國人으로 美 海軍 情報局 컴퓨터 專門家로 勤務하던 로버트 金은 그렇게 파티 現場에서 FBI 搜査官들에게 連行됐다. 로버트 金은 조국의 뒤떨어진 諜報 現實을 안타까워하면서 北韓과 關聯이 있는 情報를 韓國 海軍 武官에게 여러 次例 넘겨준 적이 있었다.

    로버트 金이 그동안 韓國 武官에게 傳達한 情報들은 北韓의 情勢와 支援 食糧의 配給 實態, 脫北 現況 等으로 極祕로 分類될 事案은 아니었다. 相對國이 英國이나 캐나다라면 얼마든지 美國 政府 次元에서 提供할 수 있는 水準의 情報들이었다. 더욱이 로버트 金은 情報 提供과 關聯해서 韓國 政府에 그 어떤 代價도 要求하지 않았다. 떠나온 故國에 對한 愛國心에서 비롯된 일인데, 그의 ‘法的 故國’은 그것을 容納하지 않았다. 로버트 金은 法院에서 有罪判決을 받았고 10年 가까운 歲月 동안 自由를 잃고 살게 된다.

    로버트 金 事件에 對해 美國이 지나칠 만큼 神經을 곤두세운 데는 不便하던 當時 韓美關係가 크게 作用했다. ‘民族은 理念보다 優先한다’는 말로 就任辭를 裝飾한 김영삼 大統領은 浪漫的 民族主義를 標榜하며 北韓을 包容하고 나섰다. 그러면서 韓美共助에 틈이 벌어진 것이다. 金永三 政府는 核 危機 以後로 浪漫的 民族主義를 抛棄했지만 한番 금이 간 信賴는 쉽게 回復되지 않고 있었다.

    그럴 때 北韓에서 潛水艦이 내려온 것이다. 當時 退潮港을 出港한 潛水艦은 2隻. 1隻이 다시 歸航한 것까지는 韓國 情報當局도 把握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1隻은 어디로 갔을까. 一旦 外海로 빠져나가면 追跡이 힘들다. 디젤 엔진의 熱氣를 感知하려면 偵察衛星이 있어야 하고, 엔진 陰門을 探知하려면 特需 소나 裝置를 附着한 공격형 潛水艦이 있어야 하는데 둘 다 韓國軍에는 遙遠한 것들이다.

    그렇다면 美 海軍 情報部는 상어級 北韓 潛水艦이 江陵으로 向하고 있다는 事實을 把握하고 있었을까. 그러면서도 韓國에 通報하지 않은 것일까. 로버트 金이 그와 關聯이 있을까.

    이와 關해서는 아직까지 正確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어느 나라나 情報探知 能力은 極祕事項으로 取扱한다. 그리고 機密維持를 위해서는 友邦國의 安保도 희생시키는 게 그쪽의 法則이다.

    진작부터 로버트 김을 監視하고 있던 FBI는 江陵에 潛水艦이 出現하자 躊躇없이 로버트 김을 逮捕했다. 그는 不運한 時期에 注目받는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現實感이 缺如된 政策 때문에 純粹한 愛國心이 抑鬱한 代價를 치르게 된 셈이다.

    최덕근 領事 被殺

    160만 병력의 51일 大추격전 장 상사, 18년 만에 빚을 갚다

    1996年 10月5日 최덕근 領事의 遺骸가 든 棺이 太極旗에 싸여 殯所에서 靈柩車로 옮겨지기 前 遺族들이 棺을 부여안으며 울부짖고 있다.

    9月28日에 성산면 보광리에서 案內助長 儒林 少佐가 日出部隊에 依해 射殺되면서 潛水艦 工作員 索出作戰은 1段階를 마감했다. 北韓은 放送을 통해 潛水艦은 潮流에 밀려 漂流한 것이며 工作員들을 無事히 돌려보내지 않으면 千배百倍 報復할 것임을 闡明했다.

    偵察組를 除外한 全員이 이미 射殺되고 逮捕된 마당이다. 軍 指揮部는 搜索展에 動員된 部隊들을 복귀시켰다. 그러면서 對間諜作戰本部 指揮官도 軍司令官에서 軍團長으로 下向調整됐다. 언제까지 對間諜作戰에만 매달릴 수는 없다. 그리고 어쩌면 北韓이 저들의 脫出을 돕기 위해 休戰線에서 制限的 挑發을 敢行할지도 모르는 狀況이었다.

    偵察組는 이미 第3 沮止線까지 突破했을 것으로 豫想됐고 搜索에 動員된 兵力은 大幅 縮小됐다. 이제부터는 包圍와 埋伏 代身 追擊에 注力해야 한다. 合同訊問組는 情報 蒐集에 매달렸고 特戰司는 出動態勢를 完備하고 命令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이番에도 1978年처럼 工作員을 北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다. 特戰司 隊員들은 이番만은 絶對로 놓칠 수 없다는 悲壯한 覺悟로 出動命令을 待機했다.

    10月1日,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北韓이 豪言하던 千배百倍 報復은 엉뚱한 곳에서 始作됐다. 10月이면 블라디보스토크는 겨울이다. 午後 6時밖에 안 됐지만 거리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최덕근 領事는 退勤 걸음을 재촉했다. 完成하지 못한 報告書를 아파트에 돌아가서 마무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國家安全企劃部 所屬 工作官印 최덕근 領事는 最近 北韓의 羅津·선봉地區 및 中國의 훈춘과 豆滿江을 사이에 둔 國境都市 下山을 다녀왔다.

    共産圈이 崩壞되면서 經濟的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北韓은 積極的으로 痲藥 密輸에 매달리고 있었다. 崔 領事는 痲藥을 調査하던 中에 北韓이 僞造 달러 製造에도 關與하고 있다는 情報를 入手하고 現地로 달려간 것이다. 僞造紙幣 製造는 痲藥 密造와 次元이 다르다. 國家의 安保를 直接 威脅할 수 있는 重大한 犯罪다. 美國 情報當局은 塵肺와 거의 區別되지 않는 精密 僞造紙幣, 이른바 슈퍼노트의 出現에 神經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階段을 올라가던 崔 領事는 人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나타났을까. 웬 男子가 바짝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는 本能的으로 危險을 느끼고 몸을 避하려 했지만 男子의 손이 더 빨랐다. 눈 깜빡할 사이에 崔 領事는 칼에 찔렸고 아파트 階段에 쓰러져 숨을 거뒀다. 剖檢 結果 ‘네오스티그민브로마이드’가 檢出됐는데 이는 北韓 工作員들이 携帶하는 萬年筆 毒針에 使用되는 毒物이었다.

    마지막 機會

    都大體 偵察組 2人은 어디에 있는 걸까. 9月21日 칠성산에서 特戰司의 追擊을 뿌리친 偵察組는 그 後로 蹤跡이 杳然했다. 이미 休戰線을 넘어 北으로 歸還한 것일까. 北韓에서 조용한 걸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五里霧中이던 偵察組의 行方은 10月8日 五臺山 재미재에서 把握됐다. 偵察組가 偶然히 마주친 民間人 3名을 殺害하고 逃走한 것이다. 五臺山에서 蹤跡을 감춘 지 8日 만의 일이다. 一旦 越北하지 못한 것이 確認됐으니 아직 機會는 있다. 特戰司는 더 詳細한 情報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出動 準備에 萬全을 期했다.

    10月16日에 두 番째 情報가 들어왔다. 偵察組가 麟蹄郡 軍縮校 附近 道路에서 民間人에게 目擊된 것이다. 軍이 緊急 出動해서 渡江을 沮止하고 나섰지만 偵察組의 對應이 더 빨랐다. 遮斷을 豫想하고 南쪽으로 迂廻해 신남리를 거쳐 楊口大橋 附近에서 江을 건넌 것이다. 偵察組는 그 渦中에서도 軍縮校와 3軍團 司令部를 撮影하며 任務를 遂行했다. 두 사람의 偵察組는 거듭되는 包圍 속에서도 如前히 北으로의 復歸를 自信하고 있었다.

    이틀間에 걸친 遮斷과 埋伏이 虛事로 돌아가자 軍은 焦燥해졌다. 그 狀況에서 生捕된 李光洙는 記者會見에서 偵察組의 北韓 歸還을 壯談하고 나섰다. 昭陽江을 넘었다면 이제 남은 것은 鐵柵線뿐. 機會는 單 한 番뿐이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장기용 上司가 會議를 마치고 나오는 地域大將에게 달려갔다.

    “現場으로 出動하기로 했소.”

    地域大將의 말에 장기용 上士는 失望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式으로 뒤를 쫓아가서는 잡을 수 없을 것이다. 偵察組는 틀림없이 昭陽江을 迂廻해서 盜講할 것이다. 칠성산에서 놓쳤을 때도 그랬다. 그러니 現場으로 出動하는 것보다는 미리 楊口大橋로 가서 埋伏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指揮部의 判斷은 그렇지 않았다.

    아쉽지만 上部의 命令에 服從해야 한다. 特戰司 隊員들은 悲壯한 覺悟로 헬리콥터에 올랐다. 아무리 저들이 高度의 訓鍊을 받았다고 해도 한 달 가까운 時間이 흐르면서 體力이 많이 消盡됐을 것이다. 그리고 民間人 出入이 統制되는 곳이라 警戒兵들의 눈을 避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장기용 上士는 分身과도 같은 K2 小銃을 꼭 쥐며 決戰의 瞬間에 對備했다. 이番 出動도 虛事로 돌아가면 地域大將에게 特功組 編成을 强力하게 建議할 생각이었다.

    10月22日 楊口郡 南面 靑3里 隣近 軍部隊.

    軍部隊 撮影을 마친 偵察組 2人은 迅速하게 移動했다. 山기슭에 마련해놓은 비트로 빨리 가서 어두워질 때까지 숨어 있어야 한다. 偵察組는 쫓기는 中에도 偵察 任務를 疏忽히 하지 않았다.

    칠성산에서 特戰司와 交戰하고 逃走한 偵察組 2人은 農家에 潛入해 飮食物을 훔치고, 빈집에서 밤을 지내며 北上을 繼續했다. 그동안 偵察組가 全혀 發覺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住民과 偶然히 만난 것도 여러 番. 그렇지만 偵察組는 堂堂하게 行動하며 疑心을 사지 않았다. 平昌에서는 大汎하게도 용평스키장의 娛樂室에 潛入해서 잠을 자기도 했다. 意表를 찌르는 行動이었다.

    切齒腐心의 記憶

    自身을 얻은 偵察組는 대낮에 移動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法. 軍縮校에서 民間人에게 들킨 것이다. 아무리 韓國軍으로 僞裝했어도 仔細히 살펴보면 어딘가 殊常한 구석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偵察組는 南쪽으로 迂廻하는 方法으로 出動郡의 虛를 찌르며 北上을 繼續했고 軍部隊 偵察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

    비트로 돌아가던 偵察組가 걸음을 멈췄다. 射擊場 附近을 移動하던 中에 偶然히 運轉兵과 마주친 것이다. 運轉兵은 한눈에 그들이 工作員임을 알아보고 氣怯을 하고 돌아섰지만 偵察組의 손이 더 빨랐다.

    一旦 비트로 돌아온 偵察組는 서둘러 移動에 들어갔다. 運轉兵을 찾는 소리가 漸漸 가까워지고 있었다. 현리 쪽으로 復歸하려던 計劃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偵察組는 東쪽으로 方向을 바꾸기로 했다. 軍事分界線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 偵察組度 只今이 고비임을 잘 알고 있었다.

    蹤跡을 감췄던 偵察組가 2師團 區域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對間諜作戰本部가 卽刻 出動했다. 情況으로 봐서 틀림없는 情報 같았다. 그동안 番番이 놓친 理由 中에는 確實치 않은 情報도 큰 몫을 차지했다. 埋伏 中인 軍人을 偵察組로 誤認한 申告도 있었고 잡고 보니 無斷 離脫病인 境遇도 있었다. 그렇게 허둥대는 사이에 偵察組는 悠悠히 包圍網을 빠져나간 것이다.

    그런데 2師團 區域에서 目擊된 偵察組의 行方이 다시 杳然해졌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接受된 申告 中에서 10月23日 23時40分 軍縮校 附近의 외딴집에서 主人을 襲擊하고 달아난 無理와 다음날 午前 8時30分頃 인제읍 附近 山 稜線을 타고 急히 달아나다 헬기에 觀測된 두 사람이 偵察組日 可能性이 컸다.

    東쪽으로 迂廻해서 固城에서 軍事分界線을 넘으려는 意圖일까. 그렇지만 아직 斷定하기에는 이르다. 그저 도둑일 수도 있고 뒤늦게 버섯을 採取하러 山에 오른 사람들일 可能性도 排除할 수 없었다. 數日 前 附近에서 武裝 脫營兵이 發生한 것도 골칫거리였다. 對間諜作戰本部는 愼重을 期하기 위해 機務部隊院들을 出動에 同行시키기로 했다.

    장기용 上士는 偵察組가 東쪽으로 迂廻할 것이라 確信했다. 18年 前에도 이와 恰似한 狀況이 있었다. 安養에서 交戰을 벌이던 北韓 工作員들은 冠岳山을 迂廻해 富川을 거쳐 金浦半島로 빠져나간 것이다. 장기용 上士는 初任 下士 時節에 指揮官을 爲始해서 隊員 全員이 削髮하고 驅步하며 切齒腐心하던 것을 똑똑히 記憶하고 있었다. 두 番 다시 같은 恥辱을 겪을 수는 없다. 特功組 編成을 上申한 腸 上士는 指揮部의 許諾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焦燥한 時間을 보냈다.

    機務部大將 戰死

    160만 병력의 51일 大추격전 장 상사, 18년 만에 빚을 갚다

    1996年 9月22日 午前 강릉시 구정면 어단리 칠성산에서 射殺된 武裝間諜 2名의 遺留品이 言論에 公開됐다.

    11月4日 午後 3時, 香爐峯 前方陣地.

    鐵柵線까지 10㎞밖에 남지 않았다. 인제와 高聲 쪽으로 돌아 山머리谷山에 이른 2人의 偵察組는 비로소 北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自身이 들었다. 한 달하고도 보름이 넘는 期間의 逃走도 이제 끝이다. 여러 番 南派된 사람은 많지만 이렇게 긴 時間을 쫓기다 歸還한 例는 없었다. 北에 돌아가면 틀림없이 英雄이 될 것이다. 10月25日 北에서 指令이 내려왔지만 亂數表를 태워버린 바람에 解讀하지 못했는데 內容이 무엇이든 相關이 없었다. 곧 北으로 復歸할 것이다.

    逃走가 40日 넘게 繼續됐지만 두 偵察組는 如前히 體力을 維持하고 있었다. 그 동안 빈집을 털며 끼니를 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休戰線 一帶는 벌써 겨울이지만 이제 하루만 참으면 된다. 훔친 運動服을 껴입은 偵察組는 境界를 疏忽히 하지 않으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는 民間人 出入이 統制된 곳입니다.”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放心한 탓일까. 後尾 境界를 疏忽히 했던 것이다. 돌아보니 진지 周邊 除草作業을 하던 兵士가 낫을 들고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 瞬間 兵士의 顔色이 싹 變했다. 그러나 미처 소리를 지르기도 前에 偵察組의 短劍이 날아갔다.

    軍團 直轄 山岳特供連帶가 急히 兵士가 被殺된 용대리 연하동 일대로 急히 出動했다. 眞相을 正確하게 把握하기 위해 3軍團 機務部大將이 同行했다. 연하동 一帶는 6·25戰爭 前에 北派된 호림部隊가 南쪽으로 歸還할 때 經由한 곳인데 이제는 反對로 南派工作代가 이곳을 거쳐 北으로 歸還하고 있었다.

    새벽 4時28分. 날이 바뀌어 11月5日이 됐다. 現場에 出動해서 彈皮를 살핀 機務部大將은 北派 工作員의 所行임을 確信했다. 情況으로 봐서 멀리 달아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兵力을 增員해서 一帶를 完璧하게 包圍해야 한다.

    “工作員 所行이 틀림없어, 卽時 增援을 要請하시오.”

    機務部大將이 特功聯隊 情報將校에게 指示를 내리는 瞬間 銃聲이 울리며 두 사람이 쓰러졌다.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偵察組가 銃을 發射한 것이다.

    我軍의 應射가 始作됐고 지프에 据置된 106㎜ 無反動砲가 불을 뿜으며 一帶가 霎時間에 阿修羅場으로 變했다. 出動兵力이 急히 追擊에 나섰지만 偵察組는 이미 現場을 빠져나갔다.

    機務司 大領이 戰死했다는 悲報가 傳해지면서 搜索에 나선 特戰司 隊員들의 얼굴에 悲壯한 決意가 스치고 지나갔다. 軍事分界線이 咫尺이다. 여기서 놓치면….

    腸 上司의 손가락이 빨랐다

    날이 밝으면서 搜索前이 本格的으로 展開됐고 附近에서 핏자국이 發見됐다. 偵察組가 106㎜ 無反動砲에 負傷을 當한 듯했다. 그렇다면 아직 연하동을 빠져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장기용 上士는 그렇게 判斷하고 골짜기를 뒤지기 始作했다. 선불 맞은 짐승은 사냥꾼에게 달려든다. 偵察組가 죽기를 覺悟하고 抵抗하면 我軍의 被害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腸 上士는 豫想 隱身 地點을 向해 천천히 接近해 들어갔다. 特功組를 編成할 餘裕도 없었다. 腸 上士는 單獨으로 追擊에 나서기로 했다.

    復讐를 다짐한 것은 特戰司 隊員만이 아니었다. 情報將校, 兵士를 잃은 特功聯隊員들도 잔뜩 毒이 올라 있었다. 그러면서 妙한 競爭心이 일고 있었다.

    “…!”

    살기가 傳해왔다. 장기용 上士는 反射的으로 몸을 낮췄다. 瞬間 銃聲이 울렸는데 銃彈이 날아간 곳은 反對 方向이었다. 隱身해 있던 偵察組가 맞은便에서 接近해오는 搜索隊를 보고 發射한 것이다. 곧 偵察組와 特功聯隊 사이에 交戰이 벌어졌다.

    腸 上司의 豫想이 正確하게 맞았다. 偵察組 둘이 豫想 地點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腸 上士는 숨을 멈추고 照準에 들어갔다. 타깃이 正確하게 照準線에 들어왔다. 하지만 相對는 2名이고 特殊訓鍊을 받은 偵察組다.

    殺氣를 느낀 것일까. 瞬間 偵察組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얼른 銃口를 腸 上司에게 겨누었다. 그러나 張 上司가 더 빨랐다. 銃聲이 2發 連續해서 일었고 偵察組 두 사람은 次例로 쓰러졌다. 이것으로 特戰司는 18年 前의 빚을 갚았다.

    11月5日 午前 10時30分, 偵察組 2人이 용대리 연하동에서 射殺되면서 江陵에 浸透한 工作員 25名이 51日 만에 全部 射殺 또는 生捕되었다. 我軍의 被害도 적지 않았다. 豫備軍을 包含해서 無慮 160萬名에 達하는 大兵力이 出動했고 8名이 戰死했다. 民間人도 4名이나 목숨을 잃었다. 誤認射擊에 依한 死亡도 3名이나 됐고 義務警察과 豫備軍度 各各 1名씩 목숨을 잃었다.

    江陵 潛水艦 事件은 애初부터 武裝間諜 南派를 目的으로 한 浸透는 아니었다. 潛水艦이 坐礁되는 바람에 일이 벌어진 것이다. 武裝間諜 南派와 住民 煽動은 더 以上 工作手段이 되지 못했다.

    160만 병력의 51일 大추격전 장 상사, 18년 만에 빚을 갚다
    五 세 영

    1954年 忠南 洪城 出生

    慶熙大 史學科 卒業

    1993年 歷史小說 ‘베니스의 開城商人’으로 글쓰기 始作

    著書 : ‘萬波息笛’ ‘花郞西遊記’ ‘蒼空의 透寫’ ‘小說 玆山魚譜’ ‘구텐베르크의 朝鮮’ 外


    以後 南쪽에도 變化가 있었다. 김대중 政府가 햇볕政策을 내세우면서 南과 北은 和解 무드로 들어갔고 北韓을 보는 國民의 눈도 많이 달라졌다.

    그렇다면 韓半島는 戰爭의 危險에서 解放된 것일까. 速斷은 禁物이다. 北核과 長距離 미사일이 새로운 威脅으로 登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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