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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鹿野苑’ 主人 茹茹審|新東亞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鹿野苑’ 主人 茹茹審

“遂行은 않고 聖스러운 체만 하는 껍데기 中은 되지 않겠소!”

  • 김서령 自由寄稿家 psyche325@hanmail.net

    入力 2005-02-24 11: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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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는 스님도 俗人도 아니다. 슬픔이 가득 찬 눈망울을 깜박이며 猛烈 精進하는 修行者일 뿐이다. 地球 反對便 뉴질랜드에 善防(禪房) ‘鹿野苑’을 열어 冥想과 構圖를 傳播하는 女女心. 專心專力하지 않는 僧侶를 批判하고 佛敎의 生活線을 嚴格히 實踐하는 그의 삶에서 문득 阿羅漢(阿羅漢)의 모습을 본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녹야원’ 주인 여여심

    ‘鹿野苑’ 近處 숲을 散策하는 女女心.

    뉴질랜드는 南섬과 北섬으로 이뤄진 나라다. 그中 南섬은 面積이 南韓과 비슷한데, 人口는 고작 100萬名밖에 안 된다. 南섬의 가장 큰 都市는 크라이스트처치로 여기에 30萬名이 모여 산다. 그中 韓國人은 2000名 남짓 된다고 들었다.

    크라이스트처치에 한 달 假量 머물 일이 생겨 이 참에 여기 사는 韓國人들을 만나 그들이 사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었다. 銳敏하게 세운 내 안테나에 茹茹心이라는 獨特하고 眞摯한 사람이 捕捉됐다. 스님은 아니지만 俗人도 아닌, 눈 깊고 생각 크고 苦悶 많은 女性. 나는 ‘鹿野苑’이라는 이름의 그 집으로 달려가 南方佛敎 僧侶가 입는 붉은 歌詞를 고쳐 만든 듯한 옷을 걸치고 머리를 파랗게 민 여여심을 만났다. 地球 反對便까지 흘러와 머리채를 다 잘라버리고, 뺨에는 아직 고운 기운을 지우지 못한 채 乘도 속도 아닌 狀態로 자그만 冥想센터를 열고 스스로 左衝右突 살아가노라고 말하는 女女心. 우리는 처음 만났지만 姊妹愛라고 해도 좋을 共感으로 숱한 이야기를 나눴다.

    國內 最初 阿含經 10卷 飜譯

    茹茹審은 韓國 나이로 마흔넷에 여덟 살, 여섯 살 난 아이가 딸린 엄마였다. “午後 3時면 學校로 아이를 픽업하러 가야 한다”고 말하는 途中에도 자꾸만 時計를 올려다봤다. 그는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아 主로 집 안에서만 生活한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 冥想時間을 빼앗기는 것은 勿論, 사람들이 남기고 간 말들이 머릿속에 亂舞해 精神集中에 妨害를 받기 때문이란다. 요즘은 살림집에 딸린 冥想센터에도 나가지 않고 혼자 自身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앉았을 때가 많다고 한다. 그가 穿鑿하는 것은 根本佛敎다. 20代 때부터 漠然히 根本佛敎를 追求했다.

    “佛敎를 처음 接할 때부터 韓國과 中國의 看話禪社(看話禪師)들이 주고받았다는 禪問答들이 왠지 假飾처럼 느껴졌어요. 겉으로 흉내만 낼 素地가 있고 眞僞를 證明할 길이 없는 無責任한 言行으로 보여 우스꽝스럽다고 여겼지요.”



    그러다 29歲가 되어 만난 것이 ‘阿含經(阿含經)’이다. 茹茹審은 國內 最初로 阿含經 10卷을 飜譯하고 解說한 佛經學者로, 오래 會議하던 佛敎의 참모습을 阿含經에서 비로소 만난다. 거기에 나온 佛敎의 簡潔하고도 正鵠을 찌르는 가르침과 너무나도 청렴하고 率直하며 單純해 보이는 修行僧들의 言行에 疑心 없이 마음이 활짝 열렸다.

    “이것이야말로 眞正한 佛敎다 싶었어요. 阿含經이 내게 안겨준 가장 큰 膳物은 佛敎修行의 窮極이 저 어떤 抽象世界가 아니라 바로 貪慾과 성냄, 어리석음을 뿌리째 뽑아낸 心身의 淨化狀態라는 것을 알게 해준 것이었죠.”

    그때 以後 遂行에 關心을 가지고 제 마음 안의 탐진치(貪瞋痴·탐하고 성내고 어리석음)를 끊어내기 위해 猛烈精進의 길로 들어섰다. 그 길은 스스로 評價하듯 左衝右突 縱橫無盡이었지만 지그재그로 걸어가는 中에 조금씩 빛이 보이기 始作했다. 茹茹審은 몸 안의 情熱이 유난히 많은 사람으로 보였다. 뿜어내는 뜨거움이 여느 사람과는 달라, 本人은 바로 그 熱氣 때문에 괴롭겠지만 언젠가 괴로움이 여여심을 阿羅漢으로 이끌어줄 날이 올 것이라 나는 믿고 싶었다.

    “茹茹審, 阿羅漢이 뭐지요?”

    “탐진치를 끊어내 輪廻에서 자유로워진 存在지요.”

    “茹茹審은 阿羅漢인가요?”

    “예에? 阿羅漢이요?” 하며 펄쩍 뛰기에 “阿羅漢을 實際 만나보기는 했나요?” 물었더니 “金海 多保線院의 붓다빠라 스님이 阿羅漢이라고 말들 하지만 直接 만나지는 못했어요” 한다.

    머리는 깎고 싶어서 깎았다. 깎고 나니 그렇게나 便安해졌다. 元來 남들이 誤解할까 두려워서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怯쟁이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섣불리 僧團에 登錄한 出家僧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나는 茹茹審議 홈페이지(www. migadaya.com)를 통해 그가 出家僧이 되지 않는 理由를 알게 됐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녹야원’ 주인 여여심

    여덟 살, 여섯 살 난 두 子女와 이야기를 나누는 茹茹審.

    “事實이지 出家해서 遂行은 제대로 안 하고 査辦으로 轉轉해온 스님들은 속인 못지않게 正直性과 固結性이 缺如돼 있다. 事故는 未成熟한 채 善防에 들어가 漠然한 妄想에 사로잡혀 修行만 하는 스님들은 裁可者들에게 高壓的이기 쉽다. 禪房에서 어깨에 잔뜩 힘주고 죽어라 遂行하는 衲子(衲子)로서 俗人들에게 지나치게 高壓的으로 權威를 내세우는 스님은 自身이 擇한 길에 對한 意志와 矜持를 뒷받침해줄 哲學的, 人間的 成熟이 缺如되어 있다. 그러면서 話頭를 打破한다는 代妄想에 사로잡혀 自己錯覺에 빠져 지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出家僧段의 一員은 아니지만 그것의 生理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僧俗의 底邊에 共通的으로 흐르는 現實 問題를 이제 알 것 같기에 훌러덩 옷을 갈아입고 중이 되는 일이 더욱 조심스럽다. 중이 돼서도 俗人과 똑같은 行世를 할 바에야 무엇하러 중이 되나? 차라리 내 손으로 밥해먹고 내 義務에 充實한 게 낫다!

    내가 萬若 今生 어느 때인가 흰머리가 돼서라도 出家 修行者가 된다면 最小限 裁可者보다 正直하고 固結할 것이며 奔走하지 않고 生活을 簡素하게 할 것이다. 滿足할 줄 알아서 남들이 供養하기 쉽게 할 것이며, 感官은 고요하고 思慮 깊어질 것이다. 俗人들에겐 뻔뻔해 보일지 모르지만 알랑거리지 않을 것이며, 賢者의 叱責을 살 어떤 行動도 삼갈 것이다. 萬若 이것을 實踐할 수 없다면 나는 出家修行者가 絶對로 되지 않으리라.”

    이것은 南方卷 스님들이 늘 讀誦하는 ‘必須 自費頃’에 나오는 말씀을 根據로 追求하는 茹茹審議 原則인데, 그는 出家僧은 아니지만 이 原則을 徹底히 지켜내려 애쓰고 있다. 그것도 낯선 나라, 母國에서 11時間을 날아와야 하는 地球 反對便의 都市 한 모퉁이에 열여덟 坪짜리 善防을 하나 만들어놓고 쿡 찌르면 눈물이 주르륵 흐를 듯한 선량하고 겁먹은 눈으로 뜨겁고도 아프게!

    家族 내 ‘宗敎戰爭’

    남들은 世上과 妥協하며 徐徐히 抛棄하고 늙어갈 마흔 中盤에 眞理를 찾으려고 저토록 猛烈精進하는 茹茹審은 남들과는 썩 다른 어린 時節을 보냈다. 茹茹心이 태어날 무렵은 京城藥廛을 나온 아버지가 事業에 失敗한 直後였지만, 살림은 아직 넉넉했다. 집에 祈禱房이 있었고 거기서 祈禱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자랐다.

    “어머니는 산 祈禱를 가면 100日 동안 집을 떠나 있곤 했어요. 아버지는 바깥일이 잘 안 되는 게 어머니 때문이라며 많이 驅迫했고 그러니 不和가 있었죠. 어머니에게 영鷄와 前生에 關한 얘기를 늘 들었어요.

    한番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갑자기 窓門이 깨지면서 시커먼 將軍 셋이 집 안으로 들어와 當時 習慣的으로 注射(酒邪)를 부리는 아버지를 向해 短刀를 겨누더래요. 勿論 엄마 눈에만 보이는 일이었죠.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熱心히 祈禱만 했는데 나중에 보니 글쎄 아버지가 바지에 똥을 싸셨더래요. 그 以後 아버지는 많이 順해지셨어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랐으니 저절로 靈性과 神祕를 믿게 됐죠.”

    이런 이야기를 할 때 茹茹審議 말套는 獨特하다. 自身에게 뇌이듯 천천히 고요하게 말한다.

    “어머니가 癌으로 돌아가신 後 그 衝擊으로 어머니가 믿던 天道敎를 버리고 佛敎를 選擇했어요. 勿論 그 後 各種 宗敎를 涉獵하며 彷徨하는 過程을 거쳤죠. 그토록 獻身的으로 祈禱하며 苦生한 어머니를 그렇게 죽게 내버려둔 그런 神은 나에겐 全혀 고맙거나 必要하지 않은 存在였어요. 내 일곱 兄弟는 한동안 宗敎 없이 各自 외로움 속에서 뿔뿔이 彷徨하다가 나중에 宗敎를 가졌어요. 美國 사는 언니들은 가톨릭을, 韓國 사는 오빠들은 基督敎를 選擇했죠.”

    宗敎에 얽힌 家族間 葛藤이 茹茹心네 집에도 總天然色으로 演出됐던 模樣이다.

    “나보다 먼저 佛敎書籍을 接했고, 또 그 書籍들을 自身의 冊꽂이에 꽂아놓아 나를 자연스럽게 佛敎로 이끈 張本人인 큰오빠는 軍醫官으로 他地에서 몇 年 지내는 동안 외로움을 못 이겨 基督敎를 믿기 始作했죠. 그 後 큰오빠는 웬만한 牧師님은 놀라 자빠질 程度로 書齋에 하나 가득 聖經註釋書를 꽂아놓고 聖經을 硏究했어요.”

    ‘~쟁이’와 ‘~敎人’

    茹茹審은 어떤 宗敎의 이름으로 온갖 無禮를 恣行하고 自他를 迷妄으로 몰아넣으며 괴롭히는 사람을 일러 ‘~쟁이’라 부르고, 眞情으로 그 宗敎 敎主의 뜻을 理解하고 믿는 이를 ‘~敎人’이라고 달리 부른다. 聖經註釋서도 註釋書려니와 오빠의 常識을 믿었기에 茹茹審은 오빠마저 ‘~쟁이의 亞流’가 될 줄은 斟酌도 못했다.

    “基督敎에 깊이 들어간 오빠는 佛敎에 心醉해 佛經 冊까지 쓰는 막내동생이 걱정되어 當身이 다니는 敎會 牧師에게 ‘釋迦牟尼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대요. 그랬더니 牧師는 暫時 머뭇거리다가 ‘에~ 말하자면 사탄이지요’ 하더래요. 오빠가 그 말을 내게 傳하며 若干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 때 正말 놀랐어요. 그러나 火가 나기보다는 웃음이 나오데요. 그 後 오빠는 더 以上 사탄 운운하지는 않았지만, ‘靈的으로 波長이 다르니 絶對로 우리를 위해 祈禱하지 말라’고 申申當付했죠.”

    이런 가운데도 그는 오빠와의 討論에서 始終一貫 굽히지 않고 예수님은 人類의 靈的 스승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姿勢를 取했고, ‘宗敎의 本質은 같다’는 主張을 펴나갔다. 鹿野苑을 짓기 前 佛像을 가지러 韓國에 간 적이 있다. 그때 兄弟들 中 언니 하나 빼곤 만날 수가 없었다.

    “내가 偶像을 가지러 온 ‘사탄’이라 두려워서 못 만난다고들 했어요. 基督敎의 特性上 그들의 內面에 그런 種類의 恐怖心이 생겨날 수도 있음을 理解하고 있던 터라 뭐 큰 衝擊은 없었어요. 多幸히 最近 큰오빠가 當時 當身이 나를 안 만난 것은 잘못이었다고 謝過를 하셨어요.”

    이런 말을 할 때 茹茹審은 世上 끝에 혼자 선 듯 쓸쓸해 보인다. 宗敎 때문에 茹茹審은 家族 사이에서 외로운 것 같다. 피를 나눈 兄弟들말고 男便과도 그런 衝突을 反復해서 겪었다. 그러나 끝내 自身이 追求하는 길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나는 元來 主觀的이고 目的志向的인 사람이에요. 오로지 내 世界에 빠져 있느라 다른 사람에게는 關心이 없으니 누가 좋아하겠어요.”

    戀愛로 無常을 배우다

    思春期 茹茹審은 鷺梁津 近處 江南女中에 다녔다. 잔病치레가 잦은 아이였다. 中2 때부터 戀愛질을 하기 始作했다.

    “처음 어떤 男學生을 만나면 精神 못 차리고 좋아해서 막 雙무지개가 뜨는 것 같았죠. 그런데 그게 두 番째 만나는 瞬間이면 다 부서져버려요. 어떤 男子를 만나도 두 달을 채 못 넘겨요. 그러면 또 딴사람을 만나고…. 何如튼 끊임없이 相對를 바꿔봐도 처음의 무지개가 부서지기는 마찬가지였어요. 요즘도 이렇게 말해요. 나는 戀愛를 통해 無相을 배웠노라고. 人間의 虛妄을 中學校 때 이미 봤노라고. 가슴속에 불덩어리가 하나 들어 있어 그 情熱을 퍼부을 對象이 必要한데, 思春期에는 그게 異性일 수밖에 없잖아요. 사람을 만나 내 속에 있는 넘치는 情熱을 퍼부을라 쳐도 相對는 그것을 받아줄 準備가 안 되었거나 그만한 크기의 情熱을 담을 그릇이 안 되는 거예요.

    여러 番 失望하면서 나중에는 그 對象이 스님으로 옮겨갔죠. 한때는 承服만 보면 땅바닥에 엎드리고 싶었어요. 承服은 그냥 옷이 아니라 내게는 佛敎的 理想을 體現해낸 빛깔이었거든요. 스님만 보이면 가슴이 마구 쾅쾅 뛰던 時節도 있었어요. 그러나 그것도 虛像임을 알게 됐죠. ‘되지도 않을 사람들 앞에 엎드리는 것은 내 잘못이다’는 結論을 얻었죠. 가슴속의 불덩이는 絶對的인 것을 찾기 願하는 熱情이니 그걸 퍼부을 對象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음을 알게 됐어요.”

    열여섯 살에 꾼 꿈 하나가 只今도 생생하다. 꿈에 화살로 달을 쐈다. 그래서 딱 맞혔다. 너무 멀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활시위를 핑 당겼는데 虛空에서 ‘맞혔다!’는 歡呼가 들렸다. 氣分이 宏壯히 좋았다. 氣分이 어찌나 좋던지 3日 동안 꿈의 雰圍氣에 醉해 꿈속의 氣分을 곱씹었다.

    “열여섯 살에 화살로 달을 쏘는 꿈을 꿨어요. 어머니가 꿈 이야기를 듣더니 ‘너는 앞으로 마음工夫를 해서 衆生救濟를 할 사람이다’고 하셨어요. 내가 이 길을 걷는 것도 그 꿈이 늘 마음에 있기 때문일 겁니다.”

    神祕體驗度 했다. 어느 날 浮石寺 無量壽殿 法堂에 엎드려 있자니 過去 어느 瞬間 自身이 바로 여기서 法服을 입고 엎드려 있는 映像이 보였다. 經典을 줄줄 외고 다닐 때였다.

    “阿含經戰을 解說해 出刊할 때였어요. 어느 禪僧이 저보고 ‘前生에 중이 아니고서는 經傳을 다룰 수가 없다’고 했어요. 그러나 出家僧이 되는 길은 늘 中間에서 막혔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高3 때였다. 아주 힘든 해였다. 自殺危機를 몇 番이나 넘겼다. 아침마다 ‘오늘은 집을 나가야지’ 하면서 學校로 갔다.

    “사람이 참 우스워요. 그때 내가 班長이었는데 自殺하거나 家出하려고 해도 班長이란 감투가 언제나 마음에 걸리는 거예요. 責任을 다해야 한다는 義務感이 튀어나가려는 欲望을 눌러주더라고요.”

    學歷考査가 끝나도 ‘衆生救濟’라는 말이 언제나 마음속에 맴돌았다. 外交官이 될까 同時通譯師가 될까 망설이던 時節, 親舊들과 法住寺에 놀러갔다. 俗離山에 눈이 엄청 쌓인 겨울날이었다. 눈 위로 걸어가는 어떤 스님을 보았다.

    “뻥을 좀 치자면 時間이 멈추는 것 같았어요. 하얀 눈과 對比되어 나타난 灰色 法服의 映像이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어요.”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녹야원’ 주인 여여심

    茹茹審은 “修行보다는 親睦과 情報交換이 目的인 여느 절의 布敎方式에 食傷했다”고 말한다.

    般若心經과 初發心自警文을 本格的으로 읽기 始作했다. 아울러 한국외국어대 中國語學科에 支援했다. 同時通譯師가 되어 佛敎와 經典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入學하던 해 佛敎學生會 서클 룸에 앉아 있다 문득 加智山 석남사로 떠날 作定이었다. 서클 룸에 있던 한 慶尙道 男學生이 玉篇과 英韓辭典을 넣은 짐을 代身 들고 석남사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따라 나섰다.

    “정작 짐 들고 따라오던 그 애가 나중에 중이 됐어요. 나는 그날 밤에 다시 山을 내려왔어요. 왜냐고요? 說明을 못 하겠어요. 그게 答이에요. 房에 가서 짐을 풀었더니 世上이 거꾸로 빙빙 돌아요. 到底히 있을 데가 아니다 싶어 다시 내려왔죠. 印象 좋으신 한 스님이 ‘가시게?’ 하셔서 ‘예’ 하고 얼른 나왔지요.”

    그 무렵 꿈은 凶했다. 잠만 들면 몸 위로 온통 松蟲이가 비 오듯 쏟아졌다.

    “차츰 松蟲이를 雨傘으로 받고 있는 꿈이 나오다가 나중에는 내가 집 안으로 들어오고 집 바깥에만 松蟲이가 떨어지다가 徐徐히 그게 안 보이기 始作하데요. 그러니 살 만해졌죠.”

    休學屆를 냈다. 오빠가 醫師였으니 ‘憂鬱神經症’이란 診斷書를 添附해 休學할 수 있었고, 집에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다. 그 무렵 술을 무척 마셨다. 가슴속의 불덩이는 如前히 치솟다 가라앉기를 反復했고 그 浮沈에 따라 佛敎 冊도 읽고 中國語도 工夫했다.

    ‘씹버러지’에서 벗어나는 길

    茹茹審은 뭐든 猛烈히 뿌리까지 파고드는 사람이다. 當時 그의 工夫는 그저 冊 몇 卷 읽는 程度가 아니라 宗敎의 根幹을 파고드는 方式이었을 것이 뻔하다. 그러다 몰래 집을 빠져 나오는 날은 길가 麥酒집이나 布帳馬車에 앉아 하염없이 술을 마셨다. 自己를 휘두르는 主體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늘 괴로웠다. 짐을 벗고 마음을 便安히 내려놓고 싶었다. 方法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復學해서는 甑山敎와 新鮮度, 그리고 基督敎 쪽도 기웃댔다.

    “남들은 발가락만 담그거나 한 발만 담글 일을 난 언제나 두 발을 풍덩 담가버리죠. 그러니 몸 全體가 흔들릴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 時間이 걸리고 괴로운 代身 確實히 맛보고 確信에 차서 돌아나올 수가 있었다. 不安은 如前했다. 누가 머리를 잡고 흔드는 듯 頭痛이 甚했고, 이 船社 저 禪師를 찾아 이 절 저 절을 徘徊하면서 몇 年을 보냈다. 누군가 말해줬다.

    “너에게 네 어머니의 靈歌가 붙어 있어.”

    어느 날 가본 黑石洞의 지장사가 異常하게도 아늑하게 느껴져서 每日 거기에 갔다. 어머니 靈歌를 제 몸에서 떼어내기 위해 49日 동안 1000倍(拜)를 하기로 作定하고 혼자 每日 절을 올렸다. 스물셋 處女가 每日 땀을 뻘뻘 흘리며 빈 法堂에서 1000倍를 하는 風景은 想像만으로도 苦痛스럽다. 茹茹審은 무엇에 쫓기듯 必死的으로 苦行에 매달렸고, 마침내 49日이 지나자 몸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그때 茹茹審은 웬만한 僧侶가 到達할 수 있는 境地에 이른 것인지도 모른다.

    “大學時節 자주 가던 절에는 菩薩님들이 常住하고 있었어요. 初八日이 가까워질 무렵 공兩方에서는 菩薩님 몇 분이 燃燈을 만들고 있었죠. 그 菩薩님들 가운데 덩치가 크고 豪放한 女丈夫가 계셨는데, 말을 너무 우습게 해서 菩薩님들이 하루 終日 배꼽을 쥐게 만들었죠. 使用하는 單語가 常말임에도 異常하게 상말 같지 않고 우습게만 들렸는데, 이를테면 子女를 ‘씹버러지’라고 하는 거예요. 男便이 바람둥이인데다 子息들까지 무척 속을 썩인 模樣인지 그 말에 나타나는 ‘몸서리침’ ‘진저리침’이 내 설익은 눈에도 환히 보였어요.”

    그 以後 茹茹審은 人間이 씹버러지에서 벗어나는 길을 늘 생각했다. 그 始作은 바로 ‘五蘊(五蘊·佛敎에서 精神과 物質을 五分한 것. 色·受·想·行·識을 이름)’에 對한 眞正한 炎症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大部分의 사람들은 五蘊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괴로워하며 살지만, 五蘊에 眞情으로 炎症을 느낄 때 비로소 苦痛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게 된다는 覺醒이었다.

    “五蘊은 衆生을 三界에 묶어두는 足鎖죠. 五蘊은 꿀 묻은 칼과 같아서 칼을 핥다가 혀를 베면 暫時 멈췄다가 다시 꿀의 단맛에 이끌려 칼을 핥는 것이 茶飯事예요. 그러나 이 五蘊의 特性을 明晳하게 認識하고 厭症을 느끼기만 해도 그것이 실마리가 되어 阿羅漢이 될 수 있다는 거죠.”

    靑年期에 茹茹審은 이미 五蘊에 厭症을 느낄 줄 알았다. 最小限 수다원(깨달음의 첫 段階)李 되겠다는 發源을 세웠다. 大學校 4學年 겨울放學 때는 每日 3000倍를 하면서 自身을 닦았다.

    “祈禱 中에 獨聖閣에 모셔놓은, 핀돌라라는 머리와 눈썹이 허연 阿羅漢이 갑자기 클로즈업되며 내 앞으로 확 다가와요. 後佛幀畫에 登場하는 老人인데, 요즘도 난 遂行이 잘 안 되거나 어려움이 있을 때 핀돌라 尊者를 鹽害요. 며칠을 부르면 問題가 解決되는 經驗도 여러 番 했죠.”

    그렇게 절 近處를 뱅뱅 맴돌며 절하고 企圖하고 經典을 暗誦하며 20代를 보냈지만 정작 出嫁하지는 못했다. 늘 出嫁를 目前에 두고 살았다. 卒業을 앞두고 다시 大學院에 갈까, 出嫁를 할까 어느 쪽에 牌를 던질지 苦悶하며 1000倍를 했다. 腦裏로 들려온 對答은 出嫁가 아니라 大學院이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進學했다. 宗敎哲學을 工夫할 作定이었으나 曲折 끝에 마르크시즘을 工夫했다. 거기에서, 서울大에서 西洋哲學을 專攻한 한 男子를 만나 모처럼 다시 戀愛를 始作했다.

    “악수(惡手)는 늘 佛敎였다.”

    “내가 그때껏 만나본 男子 中에서 가장 똑똑했어요. 서로 자꾸 부딪치는 面이 있었지만 내가 그를 너무 좋아했으니까 自身을 억눌러 그에게 맞췄지요.”

    3年 戀愛 끝에 둘은 結婚했다. 碩士를 마친 後 茹茹審은 大寒佛敎新聞의 硏究職 記者가 되고 男便은 博士課程에 登錄해 둘에게는 日常의 幸福이 찾아오는 듯했다.

    “악수(惡手)는 늘 佛敎였어요. 절에만 가면 男便이 異邦人처럼 보이는 겁니다. 13坪짜리 집에서 新婚살림을 차렸는데 原稿 쓴다는 핑계로 혼자 옆房에 가서 잠들곤 했어요.”

    虛浪하고 淡淡하게 맨 밑바닥까지 率直하게 마음을 드러내 보이지만 어쩔 수 없이 憂鬱한 이야기였다. 茹茹審 夫婦는 둘 다 탐진치를 걷어내 니르바나를 얻는다는 마음工夫를 하면서도 정작 夫婦의 不和를 自力으로 調整할 수는 없었던 模樣이다.

    男便이 博士學位를 받을 무렵 移民을 窮理했다. 傷處 많은 韓國을 떠나고 싶었다. 뉴질랜드라는 나라, 크라이스트처치에 關한 情報를 모았고 着着 準備했다. 世界에서 가장 아름다운 都市로 꼽히는, 집집마다 庭園에 꽃을 가꾸고 잔디 손질하는 것이 가장 큰 이슈라는 南方의 都市에 가서 살고 싶었다. 오랜 工夫가 끝나고 男便이 經濟正義實踐市民聯合에 就職했지만 計劃대로 떠났다. 훌쩍 未練 없이 飛行機에 올랐다.

    내 땅에 큰 愛情이 없을 줄 알았는데 移民 첫해는 每日 鄕愁病에 시달렸다. 바닷가에 나가 이 물이 韓國에 닿겠지 하면서 가슴속으로 울었다. 새벽에 잠자리에서 깰 때면 隣近 空港에서 나는 飛行機 소리만 들어도 견딜 수 없는 氣分이 들었다. 아침마다 돌아가야지 하면서 잠이 깼다. 그 무렵 妊娠을 했다. 입덧과 鄕愁病이 겹쳤다.

    이 무렵 여여심을 救援한 것은 부처가 아니었다. 冥想遂行度 아니었다. 것은 바로 이곳 뉴질랜드 사람들의 生命에 對한 畏敬과 親切이었다. 病院에 가면 醫師와 看護師들은 배부른 여여심을 부처 對하듯 所重하게 待接해줬다. 韓國 病院에서는 어디서도 받을 수 없는 待接이었다.

    “都大體 어떻게 하는데요?”

    産婦人科에서 겪은 侮蔑感과 羞恥心을 잊지 못하는 내가 하도 궁금해서 물어봤다.

    “얼마나 내 몸을 所重하게 다루는지 나와 아이가 王妃와 王子라도 된 氣分이었어요. 醫師는 自己가 하는 일을 一一이 說明해줘요. 只今 네 몸 속에 뭐를 좀 넣을 건데 ‘當身이 넣을래요, 내가 넣을까요’를 다 물어봐요. 피가 묻으면 敬虔한 表情으로 꿇어앉아서 성스러운 것을 만진다는 듯 조심스럽게 닦아줘요. 病院만 가면 氣分이 좋아졌어요. 이 나라가 살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죠.”

    茹茹審은 내게 나중에 電話로 말했다.

    “애들 아빠는 훌륭한 點이 많은 사람이에요. 一旦 아이를 가지면 우리는 한番도 同寢하지 않았어요. 男子에겐 그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도 아이를 위해서 꼭 지켜줬어요.”

    그렇게 두 아이를 낳으면서 뉴질랜드에 定着했다. 如前히 韓國에서 보내오는 佛敎 關聯 일을 했다. 前에 佛敎新聞에 連載하던 ‘阿含經 解說’은 10卷으로 묶여 이미 出版됐고 ‘法華經’도 飜譯出刊됐는데, ‘旌善 阿含經’은 뉴질랜드에 와서 飜譯했다. 오클랜드 佛敎人會에 連結해 南섬 最初의 韓國人 佛敎團體를 만들어 墓審査라는 이곳 最初의 절이 생길 수 있는 礎石을 놓았다. 이 佛敎團體에서 茹茹心이 맡은 職責은 布敎部長이었다. 모임에 오는 사람들에게 佛經을 講義했다. 그러나 出家僧이 아니라서 서러움이 컸다.

    “중만 나타나면 난 찬밥身世가 되는 거예요. 또 ‘佛敎’ 或은 ‘査察’에 對한 認識과 接近 意圖가 基本的으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일을 推進하다 보니 正말 갈수록 스타일만 구겨졌어요. 내 뜻을 펼 수 있는 空間을 가지고 싶었어요.”

    如前히 가슴속에 불덩이는 활활 타고 있었다. 다른 엄마들처럼 아이에게 集中할 수 없을 때도 많았다. 日常이 시들하고 無常했다. 男便은 때로 “當身은 절로 갈 사람이니 그만 여기서 떠나라”고 말했다. 아이를 두고 떠날 수 없는 어미에게 그 말은 殘忍했다. 出家를 敢行할 수도, 그렇다고 깨달음에 對한 끌림을 끊어버릴 수도 없는 困惑이 여여심을 如前히 괴롭혔다.

    茹茹心이 스스로 스승으로 모신 분은 위빠사나 冥想遂行을 中興시킨 미얀마의 마하視 스님이다. 위빠사나 修行은 簡單히 말해 自身의 몸에서 일어나는 精神的, 身體的 現象의 性格을 意識으로 明瞭하게 理解하고 알아차리려는 努力을 말한다.

    여여심을 알기 위해 위빠사나 冥想에 關한 資料를 여러 篇 읽어봤다. 내가 理解한 바로는 위빠사나 冥想은 具體的인 參禪의 테크닉인 듯하다. 漠然하게 話頭를 들고 面壁하는 方式이 아니라 自己 心身과 周邊에 나타나는 現象들을 하나씩 놓치지 않고 注視하는 동안 차츰 이 모든 現象이 ‘無償’이고 ‘無我’임을 걸 깨닫게 된다. 以前의 모든 部處 阿羅漢 聖者들도 바로 이 길을 통해 涅槃을 體得했다고 茹茹審은 말했다.

    金海 多保線院의 붓다빠라 스님도 윤회관은 좀 다르지만 여여심의 스승이었다. 自身의 一擧手一投足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할 때마다 그것을 一一이 觀察하고 注視하는 일이 처음에는 어렵지만, 繼續하다 보면 차츰 더 많은 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修行者가 繼續 注視해 나가면 일어난 모든 것은 暫時 後에 반드시 사라짐을 스스로 보게 된다. 모든 現象이 덧音을, 이 世上에 實體는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되는 瞬間부터 眞正한 깨달음이 始作된다는 것이다.

    形象, 感覺, 생각, 意圖, 意識은 永遠하지 않은 것이다. 永遠하지 않은 것은 괴로운 것이고 괴로운 것은 實體的 自我가 아니며 實體的 自我가 아니라면 내 것 또한 아니다. 이와 같이 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는 것이라 한다. 거룩한 弟子들이여, 이와 같이 보면 形象, 感覺, 생각, 意圖, 儀式을 嫌惡하게 되고, 嫌惡하는 까닭에 기쁘게 여기지 않게 되며, 기쁘게 여기지 않는 까닭에 解脫하게 된다. 解脫하면 眞實한 智慧가 생겨 ‘다시 태어나는 일은 끝났고 淸淨한 遂行은 完成되었으며 해야 할 것은 다 行했고 더 以上 輪廻하는 狀態에 이르지 않게 되었음’을 스스로 안다. [잡아함경 9景]

    茹茹審은 멈추지 않고 根本佛敎를 追求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瞬間에도 그걸 놓아버릴 수는 없었다.

    “삶이 고통스러우니까 어찌됐건 苦痛을 끊는 方法을 찾고 싶었어요. 修行보다는 親睦 爲主, 情報交換이 目的인 一般 절의 布敎方式에 난 아주 食傷해 있었죠. 아무리 작아도 내 뜻을 펼칠 空間을 내 돈으로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懇切한 所望은 꼭 이루어진다. 茹茹心이 품은 所望은 移民 온 지 5年 만에 現實이 된다. 어느 스님이 構圖 精進하는 여여심을 갸륵히 여겨 信徒들이 푼푼이 모은 돈을 기꺼이 내놓았다. 資金이 넉넉하지 않으니 살림집의 마당 귀퉁이에 집을 지었다. ‘鹿野苑’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20代의 어느 날 커다랗게 다가왔던 핀돌라 尊者의 寫眞을 걸었고, 뒤늦게 좋아하게 된 마하視 스님의 寫眞도 걸었다.

    自己만의 節, ‘鹿野苑’

    그는 期於이 혼자 힘으로 根本佛敎의 度量을 세운 것이다. 出家僧이 아니라도 상관없었고, 누가 손가락질해도 介意치 않았다. 요즘은 모든 것을 ‘自律體制’로 돌려 冥想에 關心 있는 사람들이 제 발로 찾아와 法堂에 앉았다 돌아간다. 茹茹審은 그들에게 아무런 强制도 하지 않았다. 위빠사나 修行이란 徹底히 혼자의 힘으로 自身을 지켜보는 일이고, 그 方法은 프린트된 資料를 읽어보는 것으로도 充分했다.

    “正말로 마음工夫를 願하는 사람은 배고픈 이가 밥을 찾듯 그렇게 스스로 찾을 겁니다. 요즘은 ‘저 自身의 工夫’와 ‘子息들 잘 돌보기’ 그리고 ‘法友님들의 精進’에만 關心을 쏟아요.”

    그리고 茹茹審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代身 遂行日記를 썼다. 遂行하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鹿野苑 홈페이지에 올려 冥想 修鍊하는 이들에게 指針을 준다.

    “괴로운 感覺(木 갑갑症, 어지럼症, 어깨통, 頭痛)이 한番 强打해서 두려움과 憂鬱症 속에서 시들버들하고 있으면 마치 强震(强震) 後의 餘震(餘震)처럼 苦痛도 그렇게 弱해진다. 첫 番째 强打 以後 徐徐히 弱해지다가 아주 사라지더니 지난 土曜日에 다시 한 番 强打. 그리고 다시 徐徐히 여진처럼 弱해진다. 그런대로 이런 가운데 흐름을 잘 타야 하리라. 몸이 疲困하면 强震이 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또 다른 原因은 소리遂行이 내게 안 맞는 것 같아 行船視 소리내어 名稱 붙이기를 中斷하고 예전처럼 속으로 하기로 했다.”

    “行船을 하며 목 갑갑症이 심해지거나 어깨통이 심해지는 듯하면 그곳에 儀式을 보내며 ‘不快感, 不快感’ 하고 名稱을 붙여주면 좀 緩和된다. 그리고 平常時의 念佛도 亦是 속으로 하되 마음을 혀끝에 두고 있다. 이건 좀 섣부른 判斷이 될 수도 있겠으나, 소리遂行은 이池(理智)가 높은 사람에겐 今方 限界를 안겨주는 것 같다.”

    “修行者는 귀머거리처럼 行動해야 한다. 普通사람은 소리를 듣는 瞬間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려서 그쪽을 본다. 或은 그에게 말을 한 사람을 向하여 對答하려고 고개를 돌린다. 그는 沈着한 態度로 行動하지 않는다. 反面 귀먹은 사람은 어떠한 소리나 말에도 注意를 기울이지 않는다. 들리지 않으니까. 소리를 들으면 卽時 ‘들음, 들음’ 하면서 알아차리고 배로 돌아와야 한다.

    귀머거리가 되는 方法을 攄得했다. 電話나 갑작스러운 訪問으로 사탄의 傳喝을 귀에 찔러주는 사람이 있으면 조용히 受話器를 내려놓거나 門을 열고 조용히 退場시키는 것이다. 카펫 바닥에 갖가지 映像이 보이는 것이 가끔은 섬뜩할 程度인데, 그것에 對해 思惟하거나 分析하지 않는다.”

    여여심의 親切하고 率直하고 洞察力 가득한 글들을 읽자면 위빠사나 冥想遂行으로 涅槃에 이르는 길이 그리 아득하게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具體的인 테크닉을 익혀 猛烈히 매달리기만 하면 우리는 모두 부처에 이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茹茹審은 只今 길 위에 있다. 아직은 混沌과 苦惱의 길이다. 男便과는 얼마 前에 期於이 헤어졌다. 男便은 집을 나갔지만 根本原因은 自身에게 있었다고 茹茹審은 기꺼이 降伏을 宣言한다. 성냄도 미움도 털어버리리라 作心했고 요즘은 어느 程度 平穩에 到達했다.

    “男便이 집을 나가면서 혼자 살 수 있겠냐고 물었어요. 난 當身에게 關心있는 게 아니라 當身 幸福에 關心있으니 상관없다고 말했어요.”

    씩씩한 對答과는 달리 茹茹審은 말하면서 눈에 눈물을 비쳤다. 붉은 옷 위로 눈물이 번졌지만 決코 허약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가 解脫에 이르기를, 모든 苦痛을 벗고 鎭靜한 大自由에 이르기를 나는 茹茹審議 손을 꽉 잡으면서 빌었다.

    “遂行 않는 者와 相從 않겠소”

    “人間은 살덩어리, 感覺덩어리, 생각덩어리, 意志덩어리, 分別作用덩어리. 이 덩어리들은 貪慾과 성냄과 어리석음에다 호르몬 天下이기 때문에 制御하고 淨化하지 않으면 안 되오. 앞으로 난 遂行自然(修行者然) 하며 遂行하는 체만 하고 專心專力하지 않는 껍데기 중들은 相對 안 할라요. 왜냐하면 貪慾, 성냄, 어리석음의 흐름에 휩쓸려 떠내려가면서 各種 호르몬의 樣相에 따라 左衝右突할 수밖에 없는 것이 遂行 않는 人間의 心身(心身)이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要素들의 支配를 거스를 能力은 且置하고 거스르고자 하는 努力조차 없으면서 몸에 歌詞를 걸치고 聖스러운 체하는 그 모습이야말로 其實은 상카(Sangha·僧侶들의 規範)를 基礎부터 흔드는 숨은 惡性 바이러스임을 잘 알기 때문이라오. 앞으로 난 全혀 隨行 않는 사람들과는 相從 안 할라요.”

    이런 시니컬한 글 속에 茹茹審議 猛烈精進의 다짐이 들어 있다. 크라이스트처치의 鹿野苑에서 제가 낳은 아이 둘과 함께 根本佛敎의 坐禪, 行善, 生活線을 實踐하며 僧俗을 벗어나 살고 있는 한 女子, 茹茹審議 法名은 淡마디나, 本名은 이연숙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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