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映畫 ‘실미도’로 ‘半指의 帝王 3’와 맞붙는 ‘충무로 君主’ 강우석|新東亞

映畫 ‘실미도’로 ‘半指의 帝王 3’와 맞붙는 ‘충무로 君主’ 강우석

“나는 아티스트 아닌 엔터테이너… 재미없는 映畫는 映畫도 아니다”

  • 글: 황호택 동아일보 論說委員 hthwang@donga.com

    入力 2003-12-29 11: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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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完成度 높은 映畫, 眞摯한 映畫가 成功해야
    • 안성기 설경구는 돈 얘기 안 해, 개런티 가장 센 배우는 한석규 송강호 최민식
    • 韓國映畫 紫陽 豐盛하게 할 女俳優, 沈銀河 장진영 李榮愛 全度姸
    • 돈벌이 아니라 映畫人으로 살아남으려 映畫 한다
    • 임권택 監督에겐 두려움 느껴… 젊은 監督 中엔 강제규 높이 評價
    • 韓國 映畫, 中國·東南亞 市場은 充分히 먹을 수 있을 것
    영화 ‘실미도’로 ‘반지의 제왕 3’와 맞붙는 ‘충무로 군주’ 강우석
    서울 충무로 ‘시네마서비스’로 映畫 ‘실미도’ 開封을 앞둔 강우석(44) 監督을 찾아갔다. 1990年代 以後 충무로에 있던 映畫社들은 大部分 江南 島山大路 周邊으로 移徙했다. 충무로엔 시네마서비스 製作事務所와 最近 映畫 ‘황산벌’을 製作한 시네월드 程度가 남아 있다.

    國家情報院은 내곡동으로 移徙간 뒤 더 以上 ‘南山’으로 불리지 않는데, 映畫界를 象徵하는 말은 如前히 도산대로가 아닌 ‘충무로’다. 映畫판의 大夫가 충무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까.

    충무로는 韓國 映畫界의 ‘絶對君主’ 姜 監督을 키워준 距離다. 그는 大學을 中退하고 無作定 충무로에 뛰어들었다. 只今은 映畫판의 1人者이지만, 車費가 떨어져 충무로에서 西大門區 홍은동 집까지 걸어간 적도 있다.

    姜 監督은 映畫專門誌 ‘시네21’ 評價에서 2003年까지 9年 連續 韓國 映畫界 파워 1位를 지켰다. 韓國 映畫에서 이렇게 莫强한 影響力을 行使하며 長期執權한 사람은 過去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韓國 映畫의 年間 製作 篇數는 70~80篇. 二重 15~20篇이 그가 全額 또는 一部 投資한 돈으로 만들어진다. 全國의 스크린 數는 約 1000個. 姜 監督이 代表로 있는 시네마서비스의 子會社인 프리머스가 保有한 스크린 數가 現在 20個 程度인데, 2年 後엔 230個로 늘어난다.

    韓國 映畫界의 ‘絶對君主’



    시네마서비스에는 김상진 監督의 ‘光復節 特使’와 姜 監督의 ‘실미도’ 포스터가 여기저기 붙어 있다. 그는 職員들이 모두 쉬는 日曜日에도 會社에 나오는 일中毒者다. 그래서 貰들어 사는 빌딩의 警備員이 日曜日에 꼬박꼬박 出勤하는 그를 귀찮게 여기는 눈치란다.

    映畫監督치고 넥타이를 매고 다니는 사람은 드물다. 목을 졸라매는 넥타이가 象徵하는 束縛과 規制가 藝術人들에게 拒否感을 주는 것일까. 부스스한 머리에 점퍼 차림의 그가 주는 이미지는 韓國 映畫界 1人者와는 距離가 멀었다.

    ‘투캅스’ ‘마누라 죽이기’ 等 主로 웃음을 膳賜하는 코믹物 監督을 맡던 그가 이番에 1970年代 實話를 素材로 한 ‘실미도’를 찍었다. 眞摯하고 무겁고 强烈한 映畫다.

    -‘실미도’에서 危險한 場面을 많이 찍었다지요.

    “危險한 場面에서 代役을 쓰지 않고 俳優들을 그냥 出演시켰습니다. 事故 危險이 컸습니다. 웃으면서 즐겁게 찍은 場面은 記憶에 없고 繼續 火를 내며 스태프들을 다그쳤습니다. 俳優들로부터 ‘道 닦는 映畫 같다’ ‘너무 힘들다’ ‘恐怖스럽다’ ‘監督이 너무 무섭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實話를 바탕으로 한 映畫라 生存者들이 있습니다. 事實을 지나치게 劇化하면 生存者들이 말도 안 된다고 할테고, 證言이나 資料에 充實하면 商業的으로 成功할 確率이 낮겠죠. 그래서 中間地帶에서 妥協했어요. 드라마에 對한 重壓感 때문에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나한테는 재미없게 느껴졌어요. 묻어둬도 될 얘기를 굳이 바깥으로 끌어낼 必要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요.”

    -어떤 神이 그렇게 危險했습니까.

    “假令 배를 爆破하는 神입니다. 바다에 뜬 狀態에서 배를 爆破해야 하는데 俳優들도 배 周邊에 있어야 합니다. 水深이 14m였는데 俳優들에게 떠내려가다 危急하면 손을 들라고 했지요. 救命튜브를 던져줘야 하니까요. 그런 場面 찍을 때 힘들었습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하면 觀客들이 눈치챕니다. 할리우드나 韓國이나 모두 畵面 裝置에 돈을 많이 들이거든요. 지나치게 컴퓨터 그래픽에 依存한다든지, 非事實的 그림으로 觀客의 눈만 眩惑시키려 합니다. 눈 위의 爆發 場面을 찍다 俳優 두 名이 타죽는 줄 알았습니다. 計算보다 일찍 터졌거든요. 스킨스쿠버 裝備 없이 맨몸으로 水深 10m에서 潛水訓鍊하는 場面도 힘들었습니다.”

    -북파工作員(HID) 同志會 쪽에서 壓力은 없었습니까.

    “HID 雪嶽同志會 쪽에서 리얼하게 그리려면 自己들 資料를 보라며 도와줬습니다. 犧牲者가 생기고 苛酷訓鍊을 받는 場面은 그 사람들의 助言을 받아 撮影했습니다. 代身 ‘苦生해도 될 놈들’ ‘國家로부터 버림받아도 될 놈들’이란 式으로 그리지는 말아달라고 付託했습니다. 實尾島 生存隊員들은 故人들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말도 했습니다.”

    -40代 後半이나 50代도 실미도 事件이 어렴풋이 記憶 날 程度입니다. 요즘 젊은 世代한테 實尾島가 實感나게 다가올까요.

    “監督의 딜레마죠. 事件을 모르는 觀客이 재미없다고 하면 말이 안 되잖아요. 事件을 모르는 사람도 理解하게 만들어야지요. 實話와 픽션을 잘 버무려야 觀客을 감동시킬 수 있어요. ‘실미도’는 假想 드라마로 생각하고 봐야 합니다.”

    1968年부터 1971年까지 犯罪者들로 構成된 684 北派部隊員 31名이 仁川 앞바다의 無人島 實尾島에서 訓鍊을 받았다. 1968年 1月21日 北韓 124軍 部隊의 靑瓦臺 奇襲事件에 對한 報復을 위해 創設된 部隊였다. 그러나 석 달間 훈련시켜 北韓으로 보내려던 計劃은 取消되고, 이들은 3年 동안 외딴 섬에서 地獄 같은 訓鍊을 받았다. 이들은 處遇에 對한 累積된 不滿과 用途廢棄되리라는 두려움 속에서 敎官과 警備를 서는 期間兵을 殺害하고 脫出했다. 서울까지 進入해 영등포구 대방동에서 軍警에 包圍돼 抵抗하다 大部分 手榴彈으로 自決했다. 살아남은 4名은 軍事裁判을 받고 處刑됐다. 이 事件이 터진 後 國會 眞相調査가 벌어졌으나 生存 敎官들과 死刑執行을 기다리던 684部隊員들은 입을 다물었다.

    實尾島의 實狀은 維新獨裁와 軍事政權 期間 동안 徹底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文民政府가 들어선 1993年 實尾島 敎官(中士) 生存者가 ‘신동아’에 告白手記를 揭載했다. 박영철(假名) 中士는 亂動이 벌어졌던 날 밤 陸地로 外出을 나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김대곤 當時 신동아 部長(現 國務總理 祕書室長)이 直接 그가 居住하는 慶北 義城에 가서 口述을 받아 手記를 代筆했다.

    “‘실미도’ 錄音하느라 바쁘지만 ‘신동아’ 인터뷰라 OK 했습니다. ‘신동아’ 1993年 4月號에 22年 前에 일어난 ‘실미도 事件’의 眞實을 밝히는 生存敎官의 手記가 실리자 監督 10餘名이 映畫로 만들겠다고 덤벼들었죠. 그러나 製作費가 많이 드는 데다 情報當局 및 軍의 干涉과 壓力 때문에 모두 中途에 抛棄했습니다. ‘신동아’가 밝혀낸 祕密을 다시 映畫化하기까지 또 10年이 걸린 거죠.”

    -‘실미도’ 세트場은 그대로 保存했습니까.

    “모두 撤收했습니다. 企業이 所有한 私有地인데 호텔을 지으려 한다더군요. 작고 아름다운 섬입니다. 企業 立場에서는 映畫가 開封되고 사람들이 세트場 보러 몰려오는 게 부담스러웠던가봐요.”

    仁川國際空港이 들어선 永宗島 龍游島와 車길로 이어진 잠진도 埠頭에서 배로 15分 假量 가면 무의도(舞衣島)가 나온다. 무의도는 춤추는 舞姬의 衣裳처럼 아름다운 섬이란 뜻이다. 썰물 때는 무의도에서 實尾島(實尾島)까지 걸어들어갈 수 있고 밀물 때는 小型배로 들어가야 한다.

    -當時 684 北派部隊가 訓鍊받았던 痕跡이 實尾島에 남아 있었습니까.

    “그들이 팠던 우물이 남아 있었습니다. 映畫撮影하면서 그들이 쓰던 帽子 신발 칼 等을 發見했습니다.”

    -그들이 實尾島에 들어가기 前에 저지른 犯罪記錄을 찾아봤습니까.

    “어딘가 남아 있겠지만 軍當局이 資料를 提供해줄 理 없습니다. 妨害나 안하면 多幸이죠. 韓國戰爭을 背景으로 한 강제규 監督의 ‘太極旗 휘날리며’도 國防部 協助를 못 받는데 ‘실미도’에 協助해줄 理가 있겠습니까. 裝甲車도 우리 돈으로 만들었습니다. 銃器도 輸入했구요. 그래서 製作費가 많이 들었습니다.”

    -映畫가 主流觀客인 10∼20臺에 맞춰 製作되다 보니 中壯年 世代가 볼 만한 映畫가 없습니다. 나는 感銘깊은 映畫를 들라면 只今도 ‘닥터 지바고’나 ‘대부’를 꼽습니다. 한마디로 韓國映畫가 죽었던 時節이죠. 外國映畫 輸入쿼터를 따기 위해 韓國映畫를 찍었으니까. 中壯年層 世代에겐 只今의 韓國 映畫가 너무 輕薄하게 비쳐지는 側面이 있습니다.

    “대단히 憂慮되죠. 저러다간 어느 瞬間 觀客들로부터 외면당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 말장난 爲主의 코미디가 판치고 있습니다. 製作者들이 ‘時間 때우기용 娛樂映畫라야 손님이 든다’라는 確信을 갖고 있습니다. 完成度 높은 映畫를 만들려는 엄두를 안 내요. ‘실미도’나 강제규 監督의 ‘太極旗 휘날리며’ 같은 眞摯한 映畫가 成功해야 합니다.”

    一般 映畫 3倍인 110億원 投入

    姜 監督이 映畫界의 흐름을 批判하고 있지만 劇場街에 가벼운 코미디類가 汎濫하게 된 데는 그의 責任이 작지 않다. 스티븐 스필버그도 娛樂映畫를 만들다 ‘쉰들러 리스트’(1993)를 製作해 아카데미 監督賞 等 7個 部門을 휩쓸고 골든글로브賞을 받았다. 姜 監督은 韓國의 스필버그가 되고 싶다는 말을 間間이 한 적이 있지만 ‘실미도’가 ‘쉰들러 리스트’가 될지는 이番에 觀客들의 反應을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실미도’엔 製作費(廣告費 包含)로 一般 映畫의 3倍 가까운 110億원이 投入됐다. 韓國 映畫 平均 製作費(廣告費 包含) 40億원을 回收하자면 觀客이 150萬名 程度 들어야 한다. 姜 監督이 메가폰을 잡은 ‘실미도’가 本錢을 건지려면 350萬名은 들어야 한다는 計算이 나온다. 올 最高 히트作이라는 ‘殺人의 追憶’은 觀客 500萬名을 突破했다. ‘실미도’ 製作費 110億원은 市場 規模에 비추어 無理한 投資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실미도’로 ‘반지의 제왕 3’와 맞붙는 ‘충무로 군주’ 강우석

    강우석 監督과 인터뷰하고 있는 황호택 論說委員.

    -製作費는 主로 어디에 들어갑니까.

    “俳優 스태프 人件費입니다. 俳優들이 無理하게 달라고 해요. 톱스타는 4億5000萬원, 5億원 달라고 하고 追加로 인센티브를 要求합니다.”

    -映畫界 全體가 살쪄야 좋은 映畫가 만들어질 텐데…. 개런티를 너무 많이 要求하는 俳優들을 映畫판에서 王따시키려는 雰圍氣는 없습니까.

    “그 俳優들이 必要하니까 말을 못 하죠. 어떻게든 그 俳優를 出演시켜야 장사가 돼요. 自律的으로 規制하면 좋은데 陰性的으로 돈 많이 주고 서로 데려가려고 하거든요. 나만 살고 보자는 거지요. 한 映畫社에서 4億5000萬원 주겠다고 하면 다른 映畫社에서 6億원 줄게 하는 式입니다. 映畫俳優도 ‘以前 作品은 6億원 받았는데…’라고 나오는 거고 다른 俳優는 ‘내가 왜 걔보다 못하냐’고 따집니다.”

    -監督은 얼마나 받습니까.

    “監督料는 세지 않아요. 監督은 一流라고 해야 한 1億원 받을 겁니다.”

    主演 男女俳優를 5億원씩에 쓴다면 製作費와 廣告費 40億원 가운데 10億원이 들어간다. 全體의 25%를 두 名이 가져가는 셈이다. 할리우드도 形便은 마찬가지다. ‘터미네이터 3’ 製作費가 1億5000萬달러였는데 이中 아널드 슈워제네거 혼자서 개런티로 3500萬달러를 챙겼다.

    “美國도 끙끙 앓는 거예요. 스타만 돈 벌고 投資者는 죽어나갑니다. 製作者는 죽고 劇場은 법니다. 스타와 劇場이 다 가져가는 시스템입니다.”

    -新人을 發掘해 쓰면 어떻습니까.

    “新人俳優 쓰면 觀客들이 아예 쳐다보지도 않아요. 題目이 확 당기는 ‘女高怪談’ 또는 ‘장화, 紅蓮’ 같은 映畫에는 新人俳優를 쓸 수도 있겠지요.”

    -開封館 上映이 끝나면 비디오가 出市되는데 비디오 收入은 얼마나 됩니까.

    “映畫가 히트해야 비디오 輸入도 같이 올라갑니다. 映畫가 興行에 成功하면 TV 비디오 DVD 合해 25億원 假量 들어옵니다. 그런데 亡한 映畫는 2億5000萬원도 안 돼요.”

    -‘실미도’에 나오는 안성기 설경구氏는 어땠습니까.

    “안성기氏는 돈에 超然한 俳優입니다. 오히려 개런티 깎으라고 하는 사람이에요. 설경구度 돈 얘기 안 해요. 한석규 송강호 최민식 세 사람이 第一 세게 받을 걸요.”

    ‘실미도’엔 설경구 안성기 허준호 정재영 임원희 강신일 강성진 等 7名이 主人公으로 出演한다. 충무로의 ‘君主’가 아니면 한 映畫에 이렇게 豪華配役을 싹쓸이해오긴 어려울 것이다.

    “男女의 사랑 얘기는 못 찍는다”

    映畫界에 女俳優 飢饉이 深刻하다. 興行力과 演技力을 同時에 認定받는 女俳優層이 얇다. 女俳優의 役割 比重이 큰 映畫는 企劃조차 되지 않는다. ‘고양이를 付託해’ ‘피도 눈물도 없이’ 等 最近 선보인 ‘女俳優 映畫’들이 줄줄이 興行에 失敗하자 女俳優 映畫의 씨가 말라버린 形便이다. 實尾島度 典型的인 男性 映畫다. 女俳優는 端役으로 두 次例 나온다. 死刑囚의 어머니役, 그리고 강간당하는 무의도 敎師役이 고작이다.

    -江 監督 映畫를 보면 女性이 活潑하게 役割을 하는 作品이 거의 없습니다.

    “내 性格 때문이죠. 내가 멜로드라마를 안 좋아합니다. 男女의 사랑 얘기는 못 찍습니다. 冊을 보고 좋은 것을 發見하면 다른 사람에게 찍으라고 勸誘합니다. ‘마누라 죽이기’처럼 웃기는 건 하겠는데 女性 心理를 엮어 눈물 짓게 하는 것은 닭살 돋아서 못합니다.”

    -38歲에 結婚할 때까지 戀愛는 몇 番 해봤습니까.

    “남들 한 程度겠죠. 映畫에 미쳐 있었습니다. 事實 나는 영화랑 結婚하고 살았습니다.”

    -女俳優 中에서 韓國映畫의 滋養을 豐盛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을 두셋만 꼽으라면….

    “심은하가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텔미썸딩’ ‘美術館 옆 動物園’에 나왔었죠. 마스크 좋고 演技 잘합니다. 留學 가서 美術 工夫한다고 안 나오는데 理解할 수 없어요. 장진영度 좋습니다. 最近 ‘싱글즈’ ‘菊花꽃 香氣’에 主演으로 나왔습니다. 다음으로 李榮愛. 그러니까 장진영 李榮愛 全度姸 程度를 꼽을 수 있습니다. 女俳優 飢饉이에요. 男子들은 물이 좋거든요. 설경구 한석규 최민식 宋康昊 차승원 차태현…. 男子 俳優는 資源이 豐富해 골라 쓸 수 있어요. 박중훈 裵勇浚 이성재…. 그런데 女俳優가 없어 웬만하면 新人을 쓰자고 하는 形便입니다. 女俳優들은 어느 瞬間 스타가 되면 映畫보다 私生活을 즐기는 것 같아요. 좋아하는 男子 생기면 結婚한다고 그만둬버리죠. 映畫를 結婚하려고 하는 겁니까. 美國처럼 結婚한 뒤에도 映畫俳優로 쭉 活動하면 좋을 텐데요. 公人 意識이 不足해요. 女俳優를 卑下하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徹底히 映畫로 勝負를 걸겠다는 精神이 없어요. 結婚해 隱退하는 게 멋있다고 錯覺합니다. 그러려면 映畫俳優 뭐하러 始作했어요.”

    -映畫監督도 하고 製作도 하니까 女俳優하고 스캔들도 더러 있었겠지요.

    “女俳優들이 다 나를 좋아했죠.”

    -어느 女俳優가 特히 좋아했습니까. 實名으로 擧論해봐요.

    “왜 이러세요. 쫓겨납니다. 나를 좋아했던 俳優가 있는데 나는 그女를 別로 안 좋아했습니다. 사람들이 나한테 ‘차다’고 하죠. 내가 俳優들한테 無關心하니까요. 그래서 女俳優 管理하는 매니지먼트社에서 姜 監督한테 보내면 安全하다고 그래요.”

    -正말 安全한가요.

    “다른 사람들은 집적거리는데 나는 關心 없으니까. 내가 映畫界에서 해온 일, 그리고 할 일을 생각하면 女俳優와 스캔들이 생겨선 안 되거든요. 그러다가는 내가 한 放에 무너집니다. 나는 스스로 映畫界에서만큼은 公人이라 생각합니다. 公認은 正말 節制된 生活을 하고 模範된 像을 보여줘야 해요. 脫稅도 안 합니다. 돈 몇 푼 아끼려고 犯法者가 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안성기氏의 私生活이 깨끗하잖아요. 그 兄은 醜聞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니까. 내가 언젠가 ‘兄이라고 女子 안 좋아하겠어’하고 물었더니 ‘맞아. 나도 안 좋아할 理 없지.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하면 안 되잖아’ 하고 말하더군요. 그 말이 맞는 말이에요.”

    충무로에는 姜 監督 門下生이, 데뷔를 시키며 도와준 사람까지 合하면 10餘名에 이른다. ‘注油所 襲擊事件’ ‘新羅의 달밤’ ‘광복절특사’를 만든 김상진 監督, ‘킬러들의 수다’ ‘間諜 리철진’의 장진 監督, ‘接續’ ‘텔미썸딩’의 장윤현 監督이 그의 門下生이다.

    -어느 分野에서 한 사람이 獨走하면 解讀이 있게 마련입니다. 韓國 映畫의 折半 以上에 投資하고 싶다는 抱負를 말한 적이 있는데 그렇게 한 사람이 獨走하다보면 韓國 映畫의 多樣性이 萎縮될 憂慮가 있지 않겠습니까.

    “韓國 映畫가 年間 70~80篇 만들어집니다. 60篇 만들어질 때 내가 15篇 製作했습니다. 그러니까 25%입니다. 70便일 때는 17篇 程度. 25%가 어떻게 獨占입니까. 그리고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라 會社가 製作하는 겁니다. CJ 東洋 롯데가 하면 아무리 많이 해도 獨奏라는 말 안 씁니다. 나는 個人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파워맨 넘버원’ ‘나홀로 長期執權’ 같은 말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두 番째, 多樣性에 關한 이야기인데 내가 코미디를 한다고 해서 코미디 映畫만 製作하는 건 아닙니다. ‘실미도’도 그렇고 昨年에 칸映畫祭 監督賞을 받은 ‘吹花癬’도 내가 돈 댄 映畫입니다. ‘이재수의 난’ ‘草綠 물고기’ 等은 잘 만든 映畫입니다. 모두가 등을 돌려 내가 投資했죠. 單純히 돈벌이하러 映畫판에 들어온 企業과 映畫人으로 살아남기 위해 映畫를 하는 이들과 나는 다릅니다. 나는 100億원 벌면 映畫를 두세 篇 더 찍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데, 企業은 100億원 벌면 ‘얼마 더 벌어라’고 합니다. 나는 돈벌어 땅 사지 않고 映畫에 再投資합니다. 映畫판이 워낙 起伏이 甚하니까 勿論 豫備費는 確保하고 있지요. 그러나 이걸 갖고 子子孫孫 代代로 富를 물려줄 생각은 없습니다. 혼자 映畫界를 주물러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映畫만 찍게 할 생각도 없고 그럴 必要도 없습니다.”

    한때는 三星 大宇 SK도 映畫製作에 손을 댔던 적이 있다. IMF 外換危機를 契機로 빠져나갔지만. 姜 監督은 그 時節에도 企業의 스카우트 提議를 拒絶하는 固執을 부렸다.

    -江 監督이 어떤 인터뷰에서 ‘正正堂堂히 일하는데 뒤통수親 놈을 그냥 놓아둔 적이 한 番도 없다. 勿論 킬러를 雇用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놈 映畫가 나오면 같은 날 興行 될 映畫를 앞뒤로 붙여서 아예 죽여버렸다’는 殺伐한 告白을 했더군요. 映畫판에서 姜 監督에게 밉보이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뜻인가요.

    “單純히 돈 벌러 들어온 投資者들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 映畫는 나라도 눌러놓아야 합니다. 映畫판에서 돈만 벌고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이니까. 그런 사람들이 俳優 개런티를 올려놨어요. 緣줄 없고 人間關係가 形成돼 있지 않으니까 全部 돈으로 하는 거예요. 돈 몇 푼 들고 와서 監督들한테 함부로 하고 映畫에 對해 함부로 얘기하는 사람들이 만든 映畫를 혼내준 적이 있습니다. 요즘은 그런 짓 안 합니다.”

    -그러다 같이 죽을 수도 있는 거죠.

    “勿論이죠. 그렇게 하다 나도 죽은 적 있어요. 까불다가.”

    곽정환 會長에게 映畫 비즈니스 배워

    姜 監督은 말이 빠른 便이다. 性格 急한 사람들이 大槪 말을 빠르게 하는 傾向이 있다. 姜 監督의 말을 注意 깊게 들어보면 ‘습니다’ ‘입니다’ 하는 어미가 없다. 어미는 떨어져나가고 ‘나는 그렇게 했’ ‘그 사람은 그런 사람입’이라는 말만 들린다.

    -1960年生이니까 40代 初盤인데 後輩 監督들이 앞에서 담배도 못 필 程度로 카리스마를 가졌다고 하더군요.

    “全혀 그렇지 않습니다. 助監督도 같이 피웁니다. 本人들이 괜히 어려워서 그러는 거지…. 술자리에서 (담배 피려고) 슬쩍 일어나잖아요. 그러면 내가 ‘너 어디 가! 앉아. 무슨 짓이야 이거. 내가 니 아버지냐. 여기서 피워’라고 붙잡습니다. 代身 게으른 後輩한테는 火를 많이 냅니다. 내가 바쁘게 살고 性質 急하고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모르지만…. 準備를 느긋하게 한다든가, 才能은 있는데 놀고 있는 사람은 혼냅니다. 너 뭐하는 놈이냐, 映畫監督이면 映畫 찍고 映畫企劃을 해야지, 손님 조금 들었다고 놀러다니고…. 나는 그 꼴 못 봅니다. 일하기 싫으면 다른 데로 가라고 합니다.”

    -40代 初盤에 映畫판의 ‘대부’가 된 祕訣이 궁금하네요.

    “남들보다 빨리 ‘映畫도 비즈니스’라는 데 눈을 떴습니다. 配給이 映畫의 興行을 左右합니다. 配給社 꾸리고 劇場 세우고 스튜디오 지어 活用하고…. 이렇게 하다 보니 映畫界를 先導하는 것처럼 보였겠죠. 나는 한해에 映畫 20篇 만들 때까지는 멈추지 않겠다고 公公然히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가 映畫 비즈니스에 눈 뜨고 事業的으로 成功하기까지는 劇場業界의 큰손이던 서울극장 곽정환 會長의 支援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이 映畫界의 定說이다.

    -곽 會長에 對해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말한 적이 있던데요. 映畫界 周邊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에 對한 評價가 엇갈려요.

    “엇갈리지요. 그 兩班 時代에는 映畫판이 善意의 競爭을 통해 돈을 버는 構造가 아니었습니다. 市場이 너무 작아 곽 會長이 映畫를 한 篇 開封하면 다른 映畫들이 죽고 말았죠. 스크린 數가 몇 個 안 되기 때문에 自己 映畫 붙이기 위해 남의 映畫 欠집 내고 上映하지 못하게 하던 時代였거든요. 只今은 스크린 數가 워낙 많아 劇場들이 서로 映畫 달라고 亂離잖아요. 그런 時代에 그 兩班이 넘버원이니까 當然히 被害者가 많았을 겁니다. 곽 會長이 加害한 적도 없는 被害者가 있었을 거라구요. 그 兩班한테 부지런함과 映畫 비즈니스를 배웠습니다. 곽 會長은 失敗에 對備해 映畫를 많이 製作하라고 助言합니다. 조금씩 하다 失敗하면 못 일어난다는 거지요. 많이 하면 失敗해도 하나쯤 成功하는 作品이 나오고 그것이 失敗를 막아준다는 거지요. 힘든 일 생길 때 찾아가 물어보면 탁탁 對答이 나와요. 어디서 그런 想像力이 發動하는지 모르겠어요.”

    姜 監督은 1人者가 되기까지 숱하게 어려운 時節을 겪었다. 映畫에 對한 熱情 하나만으로 춥고 배고픈 時節을 견뎠다. 그때 버릇으로 只今도 술 생각이 나면 布帳馬車에서 꼼장어나 魚묵 按酒를 시켜놓고 燒酒를 마시거나 호프집에서 골뱅이 按酒에 生麥酒를 마신다. 그가 保有한 코스닥 登錄企業 플레너스 株式 118萬3000株를 市價로 換算하면 280億원 假量. 株式甲富가 布帳馬車에서 술 마시는 모습은 멋이라기보다는 窮狀에 가까울 것 같다.

    “‘투캅스 1’ 찍을 때 無理했습니다. 製作費를 잘못 計算해 돈이 크게 모자랐어요. 親舊들에게 돈을 빌렸습니다. 꿔온 돈도 다 떨어져 父母 모시고 살던 집의 傳貰契約書를 擔保로 잡혀 銀行에서 融資를 받았습니다. 올인한 거죠. 이렇게 찍어 映畫를 開封했는데 손님이 많지 않았어요. 처음에 地方 劇場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인데 이렇게 손님이 안 오면 어떻게 하느냐’며 자르겠다(상영 終了)는 連絡이 왔어요. 그때 진 빚을 演出料로 벌어 갚으려면 映畫 10篇 찍어야 했으니 10年 걸려야 갚을 수 있다는 計算이 나왔습니다. 映畫 그만두라는 뜻인가보다고 諦念했지요. 그런데 開封 一週日째부터 觀客이 暴注하기 始作했어요. ‘투캅스 1’에서 번 돈을 種子돈으로 해서 시네마서비스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驕慢을 떠니까 하늘이 그냥 놔두지 않았어요. ‘투캅스 1’로 번 돈 갖고 監督 여러 名을 獨占 契約하고 放漫하게 映畫 投資하느라 2年 半 만에 빚을 22億원이나 졌습니다. ‘투캅스 2’를 막 하고 있을 땐데 이거 무너지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거라는 걱정 때문에 밤을 새웠어요.”

    ‘투캅스 1’ 製作 위해 ‘올인’

    起伏이 甚해 1年에 열 달 울고 두 달 웃는 事業이 映畫製作이다. 그는 事業 걱정 때문에 東이 트는 새벽 대여섯 時까지 줄담배를 피우며 應接室에 앉아 있은 적도 있다고 털어놨다. ‘투캅스 1’로 번 돈 다 까먹고 ‘투캅스 2’ 할 때는 通帳에 고작 100萬원이 들어 있었다.

    “中小企業하다가 목 매 自殺하는 社長들이 나 같은 心情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家族과 職員들한테도 面目 없고…. 이런 祈禱도 해봤어요. ‘다시는 驕慢하지 않을 테니까 하나님 나한테 한 番만 더 機會를 주십시오.’ 그런데 ‘투캅스 2’가 興行에 成功하면서 빚을 다 갚아주더라고요. 工巧롭게도 투캅스 1篇과 2篇 開封 즈음이 人生에서 가장 어려웠던 時期예요. 그 다음부터는 投資戰略을 바꾸었죠. 곽정환 會長한테 投資技法을 배웠습니다. 決定的으로 成長한 契機는 1999年 美國 월街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워버그 핀커스라는 投資그룹이 시네마서비스 持分 45%를 2000萬달러에 사들인 거죠. 워버그 핀커스가 200億원을 넣어주면서 帳簿를 뒤져보더니 事業을 참 잘했다고 稱讚했습니다. 公金 1원짜리 하나 橫領 안 했다는 거지요. 普通 會社 帳簿를 들여다보면 마구 빼내 쓴 게 드러난다는 거예요. 시네마서비스가 무너지기 힘든 會社로 變身한 거죠. 두 番째로 로커스라는 벤처企業과 結合하면서 커졌습니다.”

    -아까 어려울 때 祈禱한다는 말을 했는데 敎會에 다닙니까.

    “우리 食口 모두 敎會에 나가는데 나만 빠집니다. 週日을 지키기가 힘들어요. 아내에게 조금만 기다려주면 當身 손 잡고 敎會 갈 날이 있을 거라고 約束했습니다. 只今은 좀 봐달라는 거죠. 너무 바쁘니까.”

    -商業映畫에서 번 돈으로 藝術映畫에 投資한다는 姜 監督의 哲學에 對해 쇼맨십이라고 비웃는 사람들이 있어요.

    “쇼맨십에 그렇게 많은 돈을 投資합니까. 쇼맨십 보이려면 2億∼3億원짜리 獨立映畫 찍는 데 投資하지 ‘吹花癬’ 같은 映畫에 44億원을 投資하겠습니까.”

    -‘吹花癬’은 프랑스에 輸出했는데 實績이 어땠나요.

    “興行엔 失敗했습니다. ‘吹花癬’ 投資로 20億원 損害봤습니다. 돈보다는 映畫 自體의 意味가 크죠. 商業映畫에서 돈 못 벌었으면 ‘吹花癬’ 投資 못 했니다. 왜 ‘있는 놈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잖아요. 돈 있는 사람들이 돈 더 안 써요.”

    -스스로 아티스트가 아니고 엔터테이너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내가 입버릇처럼 하는 얘기가 ‘재미없는 映畫는 映畫가 아니다’는 겁니다. 觀客을 즐겁게 해주지 못한다면 映畫로서 무슨 意味가 있느냐는 뜻이죠. 藝術映畫라 손님이 안 든다는 말도 理解하기 어렵습니다. 觀客들로부터 무시당하는 것이 藝術映畫라면 言語道斷입니다. 엔터테이너로서 丈人의 소리를 듣고 그 다음에 藝術家로 評價받는다면 더 以上 바랄 게 없겠죠. 나는 觀客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努力하는 監督이고 싶어요. 언젠가 推理小說 作家 스티븐 킹이 全美 圖書賞을 받은 것처럼 나도 藝術家로 認定받으면 좋긴 하겠지만….”

    ‘바람 불어 좋은날’ 보고 大學 中退 決心

    -氣막힌 藝術映畫 만들어서 칸이나 베를린에서 큰 賞 받아보고 싶은 欲心은 없나요.

    “欲心은 있죠. 實行에 옮기려면 相當히 時間이 걸릴 거 같은데요”

    -딱 한 作品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태워 없애라면 어느 作品을 남기고 싶습니까.

    “실미도.”

    -只今까지 만들었던 映畫 中에서는.

    “투캅스 1.”

    -江 代表가 監督한 映畫에 한석규가 거의 登場하지 않던데 特別한 理由가 있습니까.

    “내가 監督한 映畫에 꼭 그 親舊가 나와야 한다는 생각은 別로 해본 적이 없어요. 監督한 映畫에는 안 나오지만 한석규가 出演하는 映畫 製作은 많이 했습니다. 그 親舊 좋아합니다. 석규度 나한테 잘하고. 내가 製作한 ‘草綠물고기’ ‘텔미썸딩’ ‘넘버 쓰리’에 한석규가 出演했습니다.”

    -畫家는 다른 畫家를 시샘하고 글 쓰는 사람은 다른 글쟁이를 認定하지 않는 傾向이 있죠. 조금 거북한 質問 같지만 監督으로서 力量 있는 韓國 監督을 서너 名만 꼽는다면 누구를 꼽겠습니까.

    “임권택 監督한테는 두려움까지 느낍니다. 林 監督은 臺本을 直接 쓰거든요. 臺詞가 잘 어울립니다. ‘將軍의 아들’ 하면 ‘將軍의 아들’에 맞는 臺詞가 나오고 ‘吹花癬’을 하면 ‘吹花癬’에 맞는 臺詞가 나옵니다. 對話에도 유머가 있습니다. 表現은 語訥한데 웃겨요. 英雄치고 유머 없는 사람 없다고 하던데 林 監督한테서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젊은 監督 中에는 강제규 監督을 높이 評價합니다. 강제규 監督은 뚝심이 있어요. 그 親舊 映畫를 보면 저런 엄두를 어떻게 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 程度입니다. 막 밀어붙여서 누구도 不平 못하게 넘어가버립니다. 대단히 뚝심 있는 監督입니다. 그 親舊도 韓國 映畫界에 重要한 役割을 할 겁니다. 後輩들 中에는 장진 장윤현 김상진 監督의 캐릭터가 아주 獨特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흉내내기 어렵습니다. 김상진의 ‘新羅의 달밤’이나 ‘注油所 襲擊事件’이 그렇습니다. 장진 監督은 어린 나이에 유머感覺이 뛰어나죠. 장윤현度 마찬가지고. 이런 監督들이 繼續 나오면 내가 監督 안 해도 될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는 中學校 2學年 때부터 映畫監督이 될 決心을 했다. 다섯 살 때부터 어머니의 치마꼬리를 붙잡고 映畫館에 들어갔다. 어머니는 프로가 바뀔 때마다 映畫館에 갔다. 아버지는 “女子가 나돌아다니면 안 된다”는 頑固한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어머니가 막내를 데리고 映畫館에 간다고 하면 許諾했다. 姜 監督은 어머니의 人質이었던 셈이다. 처음에는 어머니에게 끌려가 졸 때도 많았지만 나중에는 映畫 보는 것이 習慣처럼 됐다. 中學校 2學年 때부터 이담에 커서 映畫監督이 되겠다고 떠들고 다녔다. 高等學校 때는 生活記錄簿의 將來 希望 欄에 ‘映畫監督’이라고 썼다가 擔任先生님한테 꾸지람을 들었다.

    中3 때는 ‘바보들의 行進’을 보고 衝擊을 받았다. 大學校 2學年 때는 이장호 監督의 ‘바람 불어 좋은날’을 보고 더 以上 學校에 다닐 必要가 없다는 判斷을 내리고 성균관대 英文科를 그만두었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습니까.

    “小市民들의 얘기입니다. 文化的 쇼크였죠. 내가 只今 圖書館에서 期末考査 準備하는 것이 무슨 意味가 있는가. 내 人生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學問을 繼續해야 하나 苦悶했죠. 그러다 大學을 中退하고 無作定 충무로로 나왔습니다.”

    姜 監督의 어머니 배영연(74)氏는 只今도 아들이 만든 映畫에 對한 評을 酷毒하게 하는 映畫 마니아다.

    “어머니가 第一 싫어하는 것은 女子들 옷 벗기는 映畫입니다. 映畫監督 그만두는 限이 있더라도 그런 映畫 하지 말라고 하시죠. 그 다음으로 觀客이 들지 않는 映畫는 하지 말라고 말씀하세요. 아들 무시당하는 꼴은 못 보겠다는 뜻입니다. ‘公共의 敵’ 같은 境遇 ‘映畫는 잘 만든 거 같은데 아무리 映畫지만 父母 죽이는 게 말이 되느냐’고 魂이 났죠. 내가 만든 映畫 中에 ‘투캅스’를 第一 좋아하십니다.”

    -三星·大宇 같은 大企業의 映畫投資를 忌避한 特別한 理由가 있습니까.

    “나마저 大企業에 줄 서면 우리 映畫판은 다 죽게 된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그 사람들은 돈이 벌리지 않으면 떠날 사람들이라는 걸 처음부터 알았어요. 實際로 三星·大宇가 映畫판에서 손뗄 때 韓國 映畫 나 혼자 製作했어요. 三星·大宇에 기웃거렸으면 個人的으로는 몇十億원 벌었을지 모르지요. 목돈을 건 스카우트 提議를 여러 番 받았으니까.”

    -聽聞會는 아니지만 財産에 對해서도 좀 묻지요. 株式 外에 不動産은 얼마나 됩니까.

    “不動産은 없어요. 내 집, 어머니 사는 집, 그리고 내가 只今 사는 집을 팔고 移徙 가려고 坡州 헤이리 아트밸리에 땅 사놓은 거 있습니다. 번 돈은 스튜디오와 시네마서비스에 들어가 있고 얼마간 갖고 있는 現金도 投資待機中인 돈입니다.”

    -映畫에 投資할 때 어떤 걸 判斷資料로 삼습니까.

    “一次的인 資料는 시나리오입니다. 女子도 첫눈에 ‘야 예쁘다’ 하는 女子가 있잖아요. 시나리오도 마찬가지입니다. 첫눈에 죽인다는 느낌을 주는 시나리오가 있어요. 俳優는 나중 問題입니다. 내가 監督하거나 投資했던 ‘注油所 襲擊事件’ ‘幸福은 成績順이 아니잖아요’ ‘女高怪談 1篇’ ‘넘버 쓰리’ ‘新羅의 달밤’ 모두 시나리오가 좋았어요. ‘이건 洞네 개가 찍어도 된다’고 말한 시나리오 中에 映畫 찍어 亡한 게 한 篇도 없어요. 두 番째는 누가 이 映畫를 製作하고 監督하느냐를 봐요. 시나리오가 多少 未洽해도 만드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가면 投資합니다.”

    -시나리오 作家는 얼마나 됩니까.

    “登錄한 사람만 200餘名 假量 됩니다. 죽이는 作家는 대여섯 名 될까요.”

    -이름을 擧論해보지요.

    “‘실미도’ 쓴 김희재가 죽이고, 장진은 監督이면서 시나리오 代價입니다. 自己 映畫는 自己가 直接 쓰니까. 거의 天才科예요. 只今은 안 쓰지만 ‘투캅스’ 썼던 김성홍 監督, 이 세 사람을 꼽겠습니다.”

    -시나리오 直接 써본 적 있습니까.

    “助監督 時節에 대충 써본 적 있습니다. 내가 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안 씁니다. 누군가 써준 거 가지고 演出해야지 내가 쓴 걸 찍자면 거기에 沒入해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해요.”

    -投資를 決定할 때 印象을 보고 判斷한다면서요. 觀相을 工夫했습니까.

    “別途로 工夫는 안 했습니다. 그냥 첫印象을 보고 느낌으로 합니다. 只今까지 別로 失敗하지 않았습니다.”

    -非科學的인 거 아닙니까, 그 사람의 여러 가지 經歷이나 周邊의 評價, 科學的인 데이터를 보고 判斷해야지….

    “이미 나를 찾아올 程度면 映畫界에 어느 程度 露出돼 있죠. 그만큼 내가 사람을 重要視한다는 뜻입니다.”

    數字 感覺이 經營에 큰 도움

    그는 初等學校 때 珠算 巖山을 익혔다. 主山은 3段까지 땄고 全國 암산王을 차지한 적이 있다. 웬만한 計算은 計算器를 쓰지 않는다. 數字를 보면 加減乘除해보는 버릇이 있다. 姜 監督은 携帶電話에 電話番號 貯藏을 해놓지 않는다. 電話番號를 300個 假量 외운다.

    그는 映畫俳優 안성기와 김상진 監督의 電話番號를 댔다. 동아일보에서 映畫를 오래 擔當했던 김희경 記者 番號를 물었더니 會社 直通番號를 외우고 있었다.

    -數字 感覺이 經營에 도움이 됩니까.

    “相當히 도움이 됩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하나씩 檢討할 거 아니예요. 나는 한番에 죽 整理되니까 判斷이 빠르죠. 映畫界에서 강우석은 檢討하는 데 10分도 안 걸린다들 말해요.”

    中學校 때 IQ가 140이었다. 慶州에서 初等學校 다닐 때는 慶尙北道에서 IQ가 第一 높게 나와 대구교육청에서 家庭環境調査를 나온 적도 있다. 그런데 IQ가 높은 데 비해 映畫 보느라고 그랬는지 成跡은 別로였던 것 같다. 名門學校 學生으로 뽑히지 못한 것으로 봐서는.

    姜 監督의 아버지는 黃海道 海州 出身으로 慶州에서 事業을 했다. 兄 누나들은 서울에서 工夫하고 江 監督은 막내라서 父母와 오래 머물러 있다가 初等學校 때 서울로 轉學을 왔다.

    -韓 달 用돈은 얼마나 씁니까. 業務關係로 쓰는 돈 말고 술 한盞 하고 어디 가서 맛있는 밥 먹고 하는 純粹한 用돈 말입니다.

    “어느 자리에 가든 으레 내가 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節約해도 한 달에 1000萬원은 씁니다. 나는 法人카드 안 쓰고 個人카드를 씁니다. 그러나 接待 때문에 룸살롱 갈 일 생기면 社長보고 나오라고 해요. 난 이거까지는 못 내겠으니 法人카드로 計算하라고 하지요.”

    -映畫社 하면서 룸살롱 接待할 일이 많습니까.

    “投資者들하고 술마실 때 그런 데 가잖아요. 投資規模가 워낙 크니까 술자리 돈은 거기에 비하면 極히 작은 便이지요.”

    -집에서도 燒酒 마십니까.

    “네. 집에서는 거의 燒酒를 마십니다. 와이프도 燒酒를 좋아합니다.”

    영화 ‘실미도’로 ‘반지의 제왕 3’와 맞붙는 ‘충무로 군주’ 강우석

    지난 4月 實尾島 現地에서 열린 映畫 ‘실미도’ 製作 發表會.

    -발렌타인 30年짜리도 술맛 좋던데….

    “나는 그 맛 잘 모르겠더라고요. 술 많이 마셔봤지만 12年짜리나 30年짜리나 差異를 모르겠어요. 1次로 꼭 燒酒를 마신 뒤 洋酒를 마시기 때문에 醉氣가 올라 맛을 鑑別하지 못하는데다 性格이 急해 빨리 먹거든요.”

    -술 마시다가도 밤 12時만 되면 반드시 튄다면서요.

    “11時에는 夢遊病 患者처럼 일어섭니다. 왜냐하면 恒常 다음날 아침에 約束이 있으니까요. 새벽 2, 3時까지 마시면 아침에 술냄새가 나고 非夢似夢日 테니 만날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겠어요.”

    -酒量은 어느 程度입니까.

    “燒酒로 4甁까지 마십니다.

    -性格 急한 것은 인터뷰 하면서도 느끼겠어요. 말이 아주 빨라요.

    “性格이 急해 損害볼 때가 엄청 많습니다. 조금만 더 들으면 投資 안 해도 될 것을 性格이 急해 하자고 決定해놓고 飜覆하길 싫어하니까 딸려가 損害보는 境遇가 있습니다.”

    -韓國 映畫의 市場 占有率이 40~50%로 올라가면서 충무로에 개미 投資者들까지 몰려들었지 않습니까. 그러나 映畫판에서 돈 벌던 時代는 끝났다는 이야기도 나오더라구요. 갈수로 製作費가 늘어나는 趨勢여서…. 投資市場으로서 映畫판의 展望은 어떻습니까.

    “映畫의 퀄리티는 좋아지겠지만 돈 벌 確率은 낮아질 겁니다. 나도 映畫 製作篇數를 줄여서 한 해에 3, 4篇만 하면 眞짜 돈 벌 自身 있어요. 그런데 映畫판을 키우고 映畫판 사람들을 끌어안고 共生해야 하니까 그렇게 少數精銳로 해서는 안 되죠.”

    ‘실미도’ vs ‘半指의 帝王 3’

    -韓國 映畫가 製作費가 올라가고 市場은 좁아 脫出口가 보이지 않잖아요. 外國市場을 開拓해보면 어떨까요. 韓國 드라마가 中國 베트남에서 韓流(韓流)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 映畫도 그곳에서 可能性이 있다고 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東南亞 市場은 充分히 먹을 수 있어요. 中國이 열렸거든요. 中國市場의 各種 制約이 풀리고 있습니다. 韓國 映畫가 中國과 東南亞에서 1年에 몇 個라도 大舶을 터뜨리면 映畫판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내가 이番에 ‘실미도’를 日本에 直拜하려고 합니다. 12月16日에 日本에서 처음으로 韓國映畫 試寫會를 합니다. 戰略이 맞아떨어진다면 워낙 市場이 커서 해볼 만합니다. 잘하면 ‘실미도’ 製作費를 日本에서 다 뽑을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우리 觀客들이 關心을 가져주면 日本에서도 터집니다.”

    日本에서 ‘쉬리’는 成功했지만 ‘共同警備區域 JSA’는 失敗했다. 直配를 한 日本에서 ‘실미도’가 ‘쉬리’처럼 成功한다면 韓國 映畫製作의 새로운 젖줄이 될 수 있다.

    -美國과 유럽市場은 어떻습니까.

    “유럽은 可能하지만 美國은 閉鎖的입니다. 英語圈이 아닌 나라 映畫에는 觀客이 들질 않아요. ‘와호장룡’처럼 到底히 想像할 수 없는 칼을 던지는 映畫라야 손님을 끕니다. 跆拳道 映畫도 잘 만들면 成功할 수 있겠죠. 美國 觀客들은 格鬪技 映畫를 좋아하니까. 그러나 ‘共同警備區域 JSA’ ‘쉬리’ 같은 映畫는 美國에서 成功하기 쉽지 않습니다. 正말 獨創的인, 우리만이 할 수 있는 映畫라야 成功할 수 있어요. ‘쉬리’는 日本에서 成功했어요. 그것처럼 中國市場만 뚫으면 韓國 映畫의 살길이 생길 거 같아요. 中國市場이 없다면 우리 映畫의 展望은 어두워요.”

    그는 後輩 監督들에게 골프를 못 치게 말리는 것으로 有名하다. 골프가 너무 재밌기 때문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잡기에 빠져 本業에 疏忽할까봐 골프를 못 치게 한다는 것이다. 姜 監督의 핸디캡은 90代 初盤. 映畫 찍을 때는 골프에 손대지 않고 世宗호텔 헬스클럽에서 40分씩 트레드 밀을 타는 것으로 運動을 代身한다.

    그는 結婚도 타고난 性質대로 했다. 38歲에 映畫俳優 안성기氏에게 急하게 付託해서 이화여대 大學院에서 嘲笑를 專攻하던 24歲의 新婦와 結婚했다. 映畫에 미쳐 장가를 안 들고 있자 스포츠新聞 스캔들 記事의 단골이 됐다. 女俳優랑 같이 있어도 스캔들이 생기고, 映畫擔當 여기자랑 술을 마셔도 戀愛한다는 所聞이 났다. 그는 짜증이 나기 始作했다.

    한番은 스캔들에 오르내린 女記者에게서 抗議 電話가 왔다. 映畫판이 寒心하다는 거였다. 더 以上 견디기 어려워 안성기氏에게 電話를 했다. 안성기氏의 夫人 오소영氏가 이화여대 美大 彫塑科 出身으로 母校에서 講義를 했다.

    “‘性器 兄. 結婚하고 싶으니 兄嫂한테 얘기해서 後輩 中에 아무나 紹介 좀 해달라고 해주세요’라고 했지요. 1週日 만에 連絡이 왔어요. 兄嫂가 紹介해준 大學院生과 커피 한盞 마시고 바로 決心해 한 달 半 만에 結婚했습니다. 兄嫂氏가 4年을 지켜봤는데 正말 괜찮은 女學生이라고 推薦했어요. 내가 나이 差異가 너무 많다고 하니 兄嫂氏가 ‘나도 다빈이 아빠하고 10年 넘게 差異 나는데 아무 問題 없다’며 만나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結婚해 只今 다섯 살, 네 살, 두 살 난 2男1女를 두었다. 琴瑟이 좋은 模樣이다.

    試寫會에서 본 ‘실미도’는 只今까지 姜 監督이 製作한 映畫와는 確實히 柳가 달랐다. ‘실미도’가 觀客의 反應에 따라서는 韓國 映畫의 흐름을 바꿔놓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開封하는 ‘실미도’는 韓國에서 거푸 觀客動員 記錄을 세운 ‘半指의 帝王 3’와 激突한다. 韓國映畫의 市場 占有率이 50%를 넘느냐가 ‘실미도’에 달려 있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 ‘半指의 帝王’과 ‘충무로 君主’가 벌이는 한판 戰爭이 올 겨울 劇場街를 뜨겁게 달궈놓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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