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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北 數十 里, 東西 四五 리… 肥沃한 土地에 屛風처럼 山이 둘러싸고|신동아

南北 數十 里, 東西 四五 리… 肥沃한 土地에 屛風처럼 山이 둘러싸고

50萬 高麗人 歷史의 첫 場 연 지腎虛(地新墟) 마을

  • 글: 반병률 韓國外大 國際地域大學院 敎授

    入力 2003-05-26 18: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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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朝鮮後期 굶주림과 日帝의 暴壓을 避해 러시아로 떠났던 韓人들.
    • 그 後孫들은 140年이 흐른 只今 유라시아 大陸 곳곳에 흩어져 朝鮮族 또는 高麗人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 1930年代 中盤부터 始作된 러시아 政府의 强制移住 政策의 結果다.
    • 한때 600餘 個에 達했던 沿海州 一帶의 韓人마을들은 이제 痕跡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歷史의 뒤안길로 사라진 러시아 韓人마을을 찾아 不幸했던 初期 러시아 韓人移民史를 되짚어본다.(편집자)
    남북 수십 리, 동서 사오 리… 비옥한 토지에 병풍처럼 산이 둘러싸고
    ‘지腎虛(Tizinkhe)’. 1863年頃 생겨나 1937年을 전후해 사라진 러시아 沿海州 南쪽地域에 位置해 있던 러시아 最初의 韓人마을 이름이다. 至信허는 區(舊)蘇聯에 머물던 50萬 高麗人의 淵源地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마을을 記憶하는 이들은 極히 드물다. 半世紀에 걸친 冷戰時代에 러시아 地域과 接觸하지 않고 살아온 우리들은 勿論이고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로부터 사할린, 그리고 中央아시아의 타슈켄트, 알마아타로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廣闊한 유라시아 大陸에 흩어져 살고 있는 高麗人 中에서도 지腎虛라는 마을을 알고 있는 이들을 찾기는 어렵다. 그만큼 至信허는 歷史文獻이나 古地圖(古地圖)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뿐, 現代의 地圖에서는 사라진 地名이다.

    筆者는 이 마을과 남다른 因緣이 있다. 高麗人 歷史에 關心을 갖기 始作한 10餘 年 前부터 ‘지腎虛’는 歷史學者인 筆者의 오랜 話頭였다. 그러다 마침내 2年 前인 2001年 7月 國家報勳處 學術調査團을 이끌고 ‘지腎虛’ 마을의 옛터를 發掘·調査해 學界의 關心을 불러일으켰다.

    當時 調査團은 關聯 文獻資料들은 勿論, 러시아의 古地圖와 現代指導, 9世紀末 刊行된 朝鮮地圖 等 各種 資料들을 參照해 ‘지腎虛 發掘’이라는 凱歌를 올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事實은 TV와 主要 日刊紙에 크게 報道됐다.

    그로부터 1年19個月이 지난 2003年 2月, 筆者는 5名으로 構成된 韓國外國語大學校 歷史文化硏究所 學術調査團을 이끌고 지腎虛 마을을 다시 찾았다. 2月4日부터 18日까지 約 2週에 걸친 調査團의 硏究課題는 블라디보스토크, 파르티잔스크, 우수리스크, 하바로프스크 一帶의 硏究所, 大學, 記錄保存所 等을 訪問해 韓國學 關聯 資料를 蒐集하고 高麗人과 러시아 老人들을 인터뷰하는 것이었다.



    謝過와 보드카로 祖上의 넋 위로

    2月9日 아침 8時10分頃 우리 一行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호텔을 나섰다. 이番 踏査에는 블라디보스토크 한국교육원의 박희수 院長과 僑胞新聞人 ‘沿海州消息’의 김광섭 社長이 同行했다. 筆者가 이들 現地 僑胞人士들에게 同行을 勸誘했던 것은 지腎虛 마을을 單純히 學術的인 調査 對象에 머무르게 할 게 아니라, 現在의 高麗人 社會에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一行을 실은 미니버스는 온통 흰 눈으로 뒤덮인 山과 들을 兩옆으로 내치며 눈길을 미끄러지듯 달렸다. 알촘, 라즈돌리奴隸, 바라바쉬를 거쳐 午後 1時20分頃 마침내 지腎虛 마을로 들어가는 길 入口인 비노그라드나야강(Rechka Vinogradnaia)에 到着했다. 이 講義 移轉 名稱은 지腎虛江(Rechka Tizinkhe)이었다.

    비노그라드나야강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꺾어진 入口에서 約 15分쯤(2km) 들어가니, 2年 前에 찾았던 農家가 나타났다. 닭, 젖소, 거위들이 낯선 異邦人들의 出現에 놀라 푸드덕거리며 한꺼번에 울어대자 한 農民이 집 門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2年 前 筆者에게 歷史 속에 묻힌 지腎虛의 存在를 確認해줬던 시디코프 보리스 알렉산드로비치(Sidikov Boris Aleksandrovich)氏였다. 그와 나는 끌어안으며 再會의 기쁨을 나눴다. 그에게 一行을 一一이 紹介했다. 軍服務 時節 이 地域에 마음이 끌려 除隊 後 이곳에 定着했다는 시디코프氏는 젖소를 기르며 牛乳工場에 牛乳를 供給하고 있다.

    2年 前 시디코프氏는 筆者에게 韓人들의 집터와 硏子매 맷돌, 缸아리 破片을 보여주면서 지腎虛 마을에 關해 重要한 證言을 해줬었다. 그는 韓人 遺跡에 남다른 愛情을 갖고 있었다.

    이날 시디코프氏는 그동안 새롭게 發見된 또 다른 집터와 硏子매 맷돌 한 짝, 아래받침돌 等을 보여주었다. 一行은 硏子매 맷돌 위에 가져간 謝過와 보드카를 올려놓고 김광섭 社長의 主宰로 祭祀를 올렸다. 오래 前 이곳에서 살았던 高麗人 祖上들의 넋을 慰勞하기 위해서였다.

    强制移住로 마을은 사라지고

    筆者는 2年 前 장마와 우거진 雜草 때문에 確認해보지 못했던 비노그라드나야강 上流地域까지 올라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中國과의 國境地域이라 러시아守備隊가 駐屯하고 있어 더 以上 前進할 수 없었다.

    시디코프氏의 記憶으로는 第2次 世界大戰이 끝날 무렵 이곳에는 집 두 채가 남아 있었다. 終戰 後 러시아 農家 40채가 들어서면서 소프호스(國營農場)가 만들어졌고, 現在 自己 집 位置에 國營農場의 責任者가 살았다고 한다. 소 200마리를 기르는 牧場이 있던 이 마을의 名稱은 ‘迂路치쉐 非盧그라드盧예(Urochishche Vinogradnoe)’. 牧場 以外에 葡萄나무, 살구나무 等 果實나무를 많이 栽培한 데서 비롯된 名稱일 것이라는 게 시디코프氏의 斟酌이다.

    筆者가 가져간 現代 러시아 地圖에는 비노그라드나야강 옆 地點에 ‘非盧그라드盧예(Vinogradnoe)’라 標示돼 있는데, ‘非居住地域’으로 돼 있다. 하지만 그 以前에는 시디코프氏 집에서 西쪽으로 中國과의 國境 附近까지 韓人마을이 分布해 있었고, 시디코프氏가 所藏하고 있던 옛 地圖에는 지腎虛(Tizinkhe)로 標示돼 있었다고 한다. 以上의 內容을 綜合하면, 1937年 强制移住로 廢墟가 됐던 지腎虛 一帶는 2次 世界大戰 以後 러시아 農民들의 國營農場 마을이 들어섰다가 이제는 시디코프氏의 牧畜業을 위한 牧草地로 變한 것이다.

    시디코프氏는 “過去 韓人들이 러시아와 朝鮮 國境地帶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와서 定着한 것은 自己나라 政府(朝鮮 政府)의 追跡을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라고 反問했다. 나름대로 매우 흥미로운 時刻이었다.

    시디코프氏는 自身도 韓人關聯 書籍들을 읽어봤지만, 韓人들이 洪후즈(紅? 賊 : 붉은 鬚髥을 한 魔的이라는 뜻)나 强盜였다는 內容을 보지 못했다며 홍후즈는 大部分 中國人들이었음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는 또한 韓人들이 이 地域에서 熱心히 農事를 지으며 러시아 軍隊에 食糧을 提供한 事實을 强調했다. 시디코프氏는 집 周邊의 硏子매 맷돌과 집터를 보여주면서 韓人들이 쓰던 가위, 질그릇 破片, 쟁기의 쇠날을 膳物로 주었다.

    最初의 韓人移住에 關한 記錄들

    現在 韓國과 러시아 學界에서는 霧散(茂山)의 최운보(崔運寶)와 慶興(慶興)의 養鷹범(梁應範), 두 사람이 이끄는 咸鏡道 農民 13家口가 1863年 月經(越境)을 嚴禁했던 國法을 어기고 목숨을 걸고 豆滿江을 건너 지腎虛에 定着한 것을 最初의 韓人移住로 看做하고 있다. 이보다 앞서 沿海州地域이 淸나라 領土에 屬해 있었을 때는 勿論, 1860年 베이징조약(北京條約)으로 沿海州가 러시아 領土가 된 以後에도 朝鮮農民들이 豆滿江을 건너간 일이 있었다. 그러나 사냥이나 採取 또는 여름에 播種하고 가을에 秋收해 돌아오는 이른바 季節型 移住에 不過했을 뿐, 永久居住와 定着을 위한 移民은 아니었다. 이 點에서 1863年의 지腎虛 마을 開拓은 現在 舊蘇聯 各地에 흩어져 살고 있는 50萬 高麗人들의 첫 出發을 알리는 歷史的 事件임에 틀림없다.

    至信허는 元來 中國式 名稱으로 戒心하(鷄心河, 發音은 ‘지腎虛’)라고 表記했던 江의 이름이다. 漢字 뜻 그대로 解釋하면 ‘닭의 心臟部分에 該當하는 江’인데 語源이 분명치 않은 이 江 이름을 따 最初의 韓人마을 이름을 지腎虛라 했고, 以後 韓人들이 우리式 漢字發音을 빌려서 ‘地信墟’ ‘地新墟’ ‘池新河’로 表記했던 것으로 推定된다.

    지腎虛江은 現在 비노그라드나야강(Rechka Vinogradnaia)으로 名稱이 바뀌었다. 이 江은 探險隊만(Bykhata Ekspiditsii:過去 노보古老드만)으로 들어가는 그라드코이江(Rechka Gladkoi)의 支流로 北쪽 中國 國境地帶에서 發源해 南쪽으로 흘러 그라드코이江으로 이어진다. 지腎虛 마을은 러시아守備隊 哨所가 位置해 있던 探險隊만으로부터 19km 程度 떨어져 있고, 北쪽으로 中國領인 훈춘과는 14km 程度 距離에 있었다.

    最初의 韓人移住에 關한 記錄들은 移住時機는 勿論, 移住한 家口와 人員數에서도 다양한 偏差를 보이고 있다. 먼저 러시아 쪽의 記錄들을 살펴보자.

    1867~69年에 동시베리아 總督의 派遣으로 南部 沿海州地域을 踏査한 프르制발스키(N. M. Przheval’skii, 1839~88)는 1869年에 쓴 글에서 “1864~65年 겨울에 韓人 10家口가 朝鮮政府의 禁止를 무릅쓰고 우리에게 移住해왔다”고 記錄했다. 그러나 다른 資料들을 參照해 補强한 것으로 여겨지는 自身의 著書 ‘우수리스크 크라이 旅行(Puteshestvie v Ussuriskom krae), 1867~69’에서는 韓人들이 “이미 1863年 12家口가 移住해왔다”고 修正했다. 時期가 1年餘 앞당겨졌을 뿐만 아니라 家口數도 10家口에서 12家口로 늘어난 것이다.

    남북 수십 리, 동서 사오 리… 비옥한 토지에 병풍처럼 산이 둘러싸고

    지腎虛 마을의 存在를 確認해준 러시아人 시디코프氏와 그의 農場

    한便 1910年 年黑龍州地域 一帶를 調査한 아무르探險隊의 綜合報告書로서 1912年에 刊行된 ‘年黑龍地域의 中國人, 朝鮮人, 日本人(Kitaitsy, Koreitsy, Iaponitsy v Primore)’에서는 最初의 韓人移住에 關한 敍述이 좀더 具體的으로 言及돼 있다. 當時 探險隊의 團長 곤닷치(N. L. Gondatti)는 1911~17年 연흑룡주 總督을 지낸 人物로 韓人들에게 매우 友好的인 政策을 取했던 것 같다. 探險隊에 參與했던 그라베(V.V Glave)가 作成한 이 報告書에는 “1863年 以前에는 블라디보스토크와 南部 우수리群(郡)에 少數의 獨身 朝鮮人들이 나타났으나, 이들은 여름에 일하고 가을에 되돌아갔다. 1863年에 들어서면서 家族들의 (永久定着을 위한) 移住가 始作됐다. 最初의 13家口가 노報告로드만에 새로이 造成된 포세트區域의 國有地를 占有하였던 것이다”고 記錄돼 있다. 지腎虛라는 마을 名稱이 言及되지는 않았으나, 現在 學界에서 받아들이는 學說의 根據가 바로 이 報告書다.

    最初의 韓人마을人 지腎虛의 初期 形成過程은 러시아側 資料를 廣範圍하게 分析한 高麗人 韓國史學者 博譜리스 敎授에 依해 仔細하게 밝혀져 있다. 그의 硏究에 따르면, 南部 우수리 地域에 最初로 移住한 韓人들에 對한 첫 番째 公式報告는 老報告로드 哨所 大將인 레자노프(Rezanov)가 沿海州 群舞知事인 카자케비치(P.V.Kazakevich)에게 보낸 1863年 11月30日子(現在 西曆으로 12月13日子) 報告書다.

    이 報告書에 따르면 레자노프 中尉는 “韓人 몇 사람이 와서 20家口가 老報告로드 哨所로부터 15베르스타(藥 16km) 떨어진 지腎虛江 盆地에 定着할 수 있게 해달라고 呼訴하였는데, 이미 이들은 이곳에 대여섯 채의 집을 지어놓은 狀態였다”고 報告했다. 이들 韓人들은 또한 自身들을 洪후즈로부터 保護해줄 수 있도록 러시아軍人 5名을 派遣·配置해줄 것을 要請했다. 레자노프 中尉의 報告를 받은 沿海州 群舞知事 카자케비치는 韓人들의 要請을 받아들였다. 1864年 5月 레자노프 中尉에게 홍후즈의 攻擊으로부터 韓人들을 保護하기 위한 哨所를 지腎虛 마을 周邊에 配置하고, 韓人들의 定着을 志願하라고 命令했던 것이다.

    레자노프 中尉가 이 命令書를 接受한 것은 1864年 가을의 일이었는데, 이 무렵 지腎虛江 盆地에는 60名 程度의 韓人들이 새로 지은 집과 菜蔬밭, 農土를 갖고 家畜을 키우며 살고 있었다.

    카자케비치 群舞支社에게 보낸 레자노프 中尉의 두 番째 報告書는 1864年 9月21日(西曆 10月4日) 作成된 것인데, 지腎虛 마을의 韓人들에 對해 한層 仔細하고 公式的인 內容을 담고 있다. 이 報告書에서 레자노프는 지腎虛에 定着한 韓人들이 熱心히 農事를 짓고 있으며 이들이 生産한 메밀을 優先的으로 國庫로 購入할 수 있게 해달라고 請願했다. 또 硏子매 맷돌을 設置해주고, 中國人 ‘라(La)’로부터 빌린 種子와 糧食費用을 갚기 위한 補助金 200루블을 貸與해줄 것도 要請했다. 移住 2年 後인 1865年 沿海州 群舞知事는 지腎虛江 盆地에 形成된 最初의 韓人마을의 公式名稱을 老報告로드 哨所 大將인 레자노프의 이름을 따서 레자노보(Rezanovo)라 했다.

    그렇다면 韓人들의 記錄은 어떨까. 筆者가 確認한 바 現在 남아 있는 最初의 記錄은 初期 韓人社會 指導者 中의 한 사람이자 符號였던 최봉준(崔鳳俊, 1862∼1918)李 ‘海藻新聞(海朝新聞)’을 創刊하면서 쓴 發刊辭이다. 이 ‘發刊하는 말’에서 최봉준은 “西曆 一千八百六十三年은 곧 陰曆 甲자지年(甲子之年)이라. 우리 同胞 十餘 家口가 처음으로 이 俄國(俄國)地方 지腎虛에 건너와서 荒蕪地地(荒蕪之地)를 開拓하고 年(連)하야 살음(살게 됨)에 해마다 몇十 戶씩 늘어가니…”라고 썼다.

    최봉준은 咸鏡北道 慶興 出身으로 1869年 8歲의 어린 나이에 父母를 따라 지腎虛로 移住한 後 自手成家한 立志傳的인 人物이다. 이 點에서 이 글은 지腎虛 移住民이 쓴 지腎虛에 關한 最初이자 唯一한 記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한 가지 誤謬가 發見된다. 최봉준은 지腎虛 이주의 時期를 ‘1863年’으로 正確히 記錄하고는 있으나 ‘甲子年(甲子年)’, 卽 1864年으로 잘못 計算했던 것이다. 問題는 當時 韓人들이 陰曆에 익숙해 있었고, 또 지腎虛 出身이자 韓人社會의 有力人士였던 최봉준이 ‘甲子年’으로 알고 있었다는 事實은 그 正確性 與否에 關係없이 當時 韓人들이 最初의 移住時機를 ‘甲子年’으로 認識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두 番째로 紹介할 記錄은 러시아地域을 中心으로 活動했던 獨立運動家이자 歷史家였던 계봉우(桂奉瑀, 1880∼1959)가 1920年 ‘獨立新聞’에 12回에 걸쳐 ‘뒤바보’라는 筆名으로 連載한 ‘아령실기(俄領實記)’다. 계봉우는 1914年 러시아 韓人들이 推進했던 韓人老齡移民 50周年記念行事의 一環으로 計劃한 러시아 韓人移住民事, 卽 ‘江東쉰海’ 刊行을 위한 資料蒐集과 編輯을 책임졌던 人物이다. 그는 1919年末 北間島 大韓國民會(大韓國民會) 代表로 大韓民國臨時議政院 議員으로 上海에 派遣됐는데, 이광수(李光洙)의 付託으로 寄稿한 ‘아령실기’에 러시아 韓人들의 歷史를 李主事, 風俗, 勞動, 社會, 敎育, 獨立運動으로 나누어 紹介했다.

    계봉우는 “泗川百九十七年 甲자춘(甲子春)에 霧散(茂山) 최운보(崔運寶), 慶興(慶興) 養鷹범(梁應範) 2人이 가만히 豆滿江을 건너 훈춘(琿春)을 經由하야 지腎虛(地新墟)(車(此)는 연추(煙秋) 等地)에 來週(來住)하야 新開墾(新開墾)에 着手하니”라고 記述하고 있다. 다른 記錄들과 달리 最初의 移住漢人으로 최운보, 養鷹범 2人을 擧論하고 있다는 點에서 注目되나, 家口數에 對한 言及이 없다. 계봉우 亦是 移住時機를 ‘甲자춘(甲子春)’, 卽 1864年으로 記述하고 있다. 이것은 앞서 言及한 최봉준의 例와 같이 當時 老齡의 韓人들이 韓人의 最初 移住時機를 ‘1864年’으로 認識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中國人 집과 비슷

    初期 지腎虛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앞에서 言及한 프르制발스키는 1868年 지腎虛 마을을 訪問하고 貴重한 記錄을 남겼다. 多少 길지만, 引用해보기로 한다.

    “가장 廣闊하고 오래된 韓人마을 지腎虛에 對해 敍述하는 것이 쓸모없는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 마을은 老報告로드 港口로부터 18베르스타(藥 19km) 떨어져 있는, 肥沃하고 景致가 좋은 盆地에 位置하고 있다. 萬(灣)으로부터 始作해 內陸으로 뻗어 있는 山들이 이곳 盆地에 이르러서는 마치 두 個의 屛風을 두른 듯한 地形을 이룬다. 盆地의 길이는 15베르스타(藥 16km)며, 幅은 1~1.5베르스타(1km~1.6km)다. 활模樣으로 구불구불하게 굽이치며 빠르게 흘러가는 지腎虛江은 盆地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는데, 兩쪽을 거의 같은 크기로 갈라놓아 農事에 便利하고 肥沃한 農土를 만들어놓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山들은 비탈이 꽤 가파르고 堅固한 덤불, 鬱蒼한 雜草들과 여러 個의 좁은 길들이 있어 決코 平坦치 않은 形勢를 갖추고 있다. 그 뒤로 높은 山봉우리들이 무리를 지어 에워싼 形勢가 아름다움의 極致를 이루고 있다. 10베르스타(藥 11km)에 걸쳐 길게 늘어져 있는 지腎虛 마을의 집들은 100報 乃至 300步씩 떨어져 있다. 韓人들의 집은 흙壁과 門종이를 발라 막은 窓門, 暖爐(아궁이)와 板子寢牀, 草家지붕 等 外形으로나 內部構造로나 中國人의 집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중략…)

    집과 집 사이에는 韓人들이 공들여 가꾼 마당이 있다. 들판에서의 農事는 암소와 황소를 부려서 하지만 粗雜한 形態의 쟁기를 使用한다. 農作物로는 收受를 가장 많이 播種한다. 그리고 自家食糧으로서만이 아니라 中國人들에게 팔기 위해서다. 株式으로 콩, 강낭콩, 보리를 播種하고, 量은 적지만 옥수수 감자 메밀 大麻 담배를 심으며 野菜밭에는 오이 호박 무 상치 고추 等을 심는다.”

    以外에도 프르制발스키는 지腎虛에 머물면서 參席했던 葬禮式에서 自身의 通譯으로 많은 對話를 나눈 지腎虛 마을 老爺(老爺, 村長) 최운국에 對한 얘기 等 매우 貴重한 記錄을 남기고 있다.

    以後 지腎虛 마을의 모습은 朝鮮政府에서 派遣한 官吏들이 記錄한 文書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82年頃 지腎虛 마을을 찾았던 김광훈(金光薰)과 신선욱(申先郁)은 마을을 다음과 같이 描寫했다. “큰산이 솟아 있는 아래에 한 마을이 있는데 마을 이름은 지腎虛(地信墟)이다. 南北으로 數十 里이고 東西로 四五 里인데 집들이 櫛比하다. 그 가운데 良人哨所가 있고 西學서숙(西學書塾)이 있는데, 가르치는 사람이 西洋人이고 우리 아이들이 授業을 받고 있다. 이들은 西洋말과 西洋글을 할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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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最近 地圖(危)에는 ‘지腎虛’라는 地名이 없지만, 옛 地圖(아래)에는 ‘지腎虛’라고 분명하게 標示돼 있다.

    지腎虛 마을의 住民 數는 國境地帶인 六鎭地方 農民들이 大擧 越境해 넘어오면서 빠르게 늘어났다. 1863年 最初의 移住民 13家口에서 1864年 가을에는 30家口 140名으로, 1865年에는 65家口 343名으로, 그리고 1866年에는 100餘 家口로 크게 增加했다. 1867年에는 500名이 지腎虛로 移住해왔고, 1868年에는 900名이 國境을 넘었다. 이들 가운데 一部는 지腎虛로부터 西쪽으로 14km 假量 떨어져 있는 연추江(煙秋河, 現在의 Tsukanovka 江)街의 연추마을(煙秋, Yanchikhe)로 移住했다. 지腎虛에 이어 연추마을이 새로운 定着地로 알려지면서 1867年 朝鮮으로부터 150家口가 移住했다. 이들 가운데 一部는 연추마을에 남고 나머지는 1868年 8月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는데, 이들은 다시 數二푼强(現在의 라즈돌리奴隸江)으로 보내졌다. 그 結果 1869年에 數二푼 江가에 푸漆로브카마을이 形成됐다. 이곳은 그 後 醜風脂肪 韓人마을들의 淵源이 되는데, 이 마을의 名稱은 定着計劃의 責任者였던 러시아 官吏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1869年 六鎭地方에 몰아친 大凶年은 以前까지의 間歇的인 移住와는 달리 暴發的인 規模의 大移動을 가져왔다. 러시아 資料에 記錄된 1869年 가을과 겨울의 對移住를 살펴보면, 1869年 9月末∼10月初 1850名의 農民(男子 1300名, 女子 550名)李 다양한 루트를 통해 지腎虛로 移住해왔는데, 이들은 衣服이나 備蓄한 食糧이 없었다. 이어 같은해 11月末∼12月初에는 훨씬 더 많은 4500名이 지腎虛로 몰려들었다.

    이른바 記事凶年(己巳凶年)으로 불리는 1869年의 大凶年과 그로 인한 對移住는 後日 두고두고 러시아 韓人社會에 이야깃거리가 됐던 것 같다. 이때 여덟 살의 나이로 父母를 따라 지腎虛로 移住했던 최봉준은 “1868年(1869年의 잘못) 記事(己巳)에 이르러는 本國 咸鏡道 地方에 凶年이 크게 들거늘 그 해 겨울에 氣黃(饑荒) 들었던 百姓 數千 號가 一時에 지腎虛로 來到하니 旣往에 우거(寓居)하던 몇十 好意 農作한 힘으로는 數千 人口를 救濟할 方策이 없는지라, 그런고로 氣黃을 이기지 못하여 生命을 救濟하매 극근得生(極僅得生)韓 半分(半分)에 지나지 못하였다”고 回想하고 있다.

    남북 수십 리, 동서 사오 리… 비옥한 토지에 병풍처럼 산이 둘러싸고

    옛 地圖에는 ‘지腎虛’라고 분명하게 標示돼 있다.

    大移動의 前奏曲 ‘記事凶年’

    계봉우 亦是 ‘아령실기’에서 記事凶年과 그로 인한 對移住를 매우 드라마틱하게 描寫했다.

    “1869年의 凶年은 陰曆 7月에 내린 長매(長?, 强風에 따른 黑非)로 인한 것이었는데, 이때 六鎭地方은 한줌의 벼도 거둘 것이 없는 空轉(空前)의 大凶年이었다. 이에 더해 얼마 前 雄基灣에 美國 商船이 漂着(漂着)했는데 積載돼 있던 物貨를 마음대로 나누어 가진 事件을 調査한다는 所聞이 나돌았다. 이에 英文(營門)將校가 事實 調査하러 온다는 所聞을 듣고 이를 두려워한 慶興 邑民 96家口가 陰曆 11月 一時에 豆滿江을 건너 지腎虛로 몰려들었다. 아무런 準備도 없이 들이닥친 이들을 맞은 지腎虛 마을에는 居處할 집도 食糧도 없어 移住民들은 굶주림과 추위의 阿鼻叫喚 狀態에 빠지게 됐다.”

    지腎虛 마을은 이렇게 물밀듯이 몰려드는 移住民을 消化할 수 없었다. 러시아當局 亦是 豫期치 못한 事態였다. 結局 移住民들을 다른 地方으로 移駐시켜 定着케 하는 것이 最善의 對策이었다. 1869年에는 지腎虛를 開拓했던 최운보가 지腎虛 貧民 35家口를 이끌고 抽風(秋豊, 數二푼)으로 移住했고, 1870年에도 亦是 지腎虛 마을 貧民 60家口가 러시아 官吏의 指導를 받아 醜風으로 옮겼다.

    러시아政府는 1871年 여름 지腎虛 마을 70餘 家口 315名을 包含한 연추 等地의 貧民 500名 假量을 아무르주(黑龍週)의 아무르江 支流 社마르카江가의 블라고슬로벤노예(Blagoslovennoe) 마을로 이주시켰다. 블라고슬로벤노예는 러시아當局이 韓人들의 러시아化를 目標로 政策的으로 造成한 最初이자 唯一한 模範마을이었다.

    이처럼 지腎虛로 移住했던 韓人들이 南部 우수리地域 各地를 開拓하면서 수많은 韓人마을들이 形成될 수 있었던 것이다. 1871年 1月의 統計에 따르면, 當時 南部 우수리 一帶에는 總 3750名의 韓人들이 定着해 있었는데, 지腎虛 1200名, 연추 300名, 時지미 80名, 노보古老드만(灣) 120名, 포세트만 周邊 150名, 數二푼 盆地(抽風) 1200名, 나홋카·스챤(守廳) 500名, 그리고 러시아 마을에 200名이 居住하고 있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韓人이 最初로 지腎虛로 移住한 것은 1863年의 일이다. 그러나 1914年 當時 러시아의 韓人들은 移住 50周年 記念行事를 準備했다는 記錄이 있다. 이 行事를 準備한 이들은 1864年을 最初의 韓人移住가 일어난 해로 認定했던 것으로 보인다. 當時 移住50周年記念行事에 關한 論議가 始作된 것은 1913年 6月부터의 일이다. 以後 1913年末 4名의 圓弧인(이른바 러시아 國籍을 取得한 사람) 指導者 崔在亨(崔在衡), 최봉준, 채두성, 박영휘에 依해 ‘韓人啞鈴移住 50周年記念 發起會’가 組織됐다.

    남북 수십 리, 동서 사오 리… 비옥한 토지에 병풍처럼 산이 둘러싸고

    2003年 2月 지腎虛 마을을 찾은 韓國외국어대 歷史文化硏究所 學術調査團 一行. 가운데(오른쪽에서 세番째)가 시디코프氏다.

    4名의 發起人 가운데 斷然 注目되는 人物은 崔在亨이다. 그는 當時 沿海州地域 韓人의 自治機關인 勸業會 會長이었으며, 그 自身이 記事凶年 當時인 1869年 9月, 9歲의 나이로 父母를 따라 지腎虛로 移住했던 人物로, 老齡韓人社會에서는 名實相符한 最高元老였다. 최봉준 亦是 최재형과 같은 時期에 지腎虛로 移住했던 人物로 최봉준과 崔在亨은 義兄弟 關係였다. 1908年 무렵 최봉준 崔在亨 김학만, 이들 세 사람은 韓人社會의 ‘英雄 三傑(三傑)’로 尊敬받던 人物이었다.

    發起人들의 提案에 따라, 地方代表원회의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2月3日부터 7日에 걸쳐 開催됐는데, 數二푼(抽風), 노보키예브스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스챤(守廳), 徒費허, 吏逋, 신한촌, 勸業會 等 8個 地域 및 團體 代表 25名이 參席했다. 러시아人으로는 포스타빈, 쥬코프, 블라노프스키 等 3名이 參席했다.

    大會는 1914年 9月21日(現在 西曆으로는 10月4日)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韓國式으로 記念式을 開催하기로 했다. 이들은 처음 移住한 곳이 지腎虛이나 ‘모임의 便宜’를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를 記念式 場所로 잡았다. 또한 記念式을 9月21日로 잡은 것은 ‘러시아의 極東歷史記錄’에 韓人이 처음 移住한 날로 記錄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會議는 또한 韓國式 記念碑를 砲세트(목허우)에 세우기로 하고, 韓人移住歷史를 한글과 러시아語로 發刊하기로 했다. 여기에서 特記할 것은 記念行事를 徹底히 韓國式으로 擧行하기로 決定한 事實이다. 卽, 記念式에 參與하는 사람들은 모두 韓服을 입으며 될 수 있는 대로 韓國 갓을 쓰고 韓國 古代의 禮服을 입기로 決定한 것이다.

    記念行事發起會는 곤닷치 연흑룡주 總督의 許可를 얻었다. 그리하여 3月25日, 30餘 名의 代表가 參加한 가운데 니콜스크-우수리스크(현재의 우수리스크) 勸業會 會館에서 開催된 地方代表원회의에서는 記念行事에 關한 具體的인 決定이 이루어졌다. 名譽會長으로 포스타빈 博士를 選任하고, 記念行事 經費로 3萬8700餘 루블을 確定했다. 9月21日 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에서 記念式을 擧行하고, 一週日 後인 9月28日 포세트에서 記念碑 除幕式을 擧行하기로 決定했다.

    會議는 大部分이 원호인人 22名을 委員으로 한 ‘韓人啞鈴(俄領)移住 50周年記念會’를 組織하고 執行部 幹部로 會長 崔在亨, 書記 김기룡, 財務 함세인을 選出했다. 會議의 主要한 決定事項은 ‘권업新聞’ 紙面을 통해 全體 韓人社會에 알려졌다.

    이처럼 着實하게 進行中이던 50周年記念行事는 그러나 第1次 世界大戰이 勃發하면서 러시아政府가 블라디보스토크에 戒嚴令을 宣布하고, 韓人의 民族運動을 彈壓함으로써 霧散되고 말았다. 곤닷치 總督은 8月初 記念行事發起會側에 1915年으로 延期할 것을 命令했던 것이다.

    사라진 마을은 모두 606個

    筆者는 2001年 以後 沿海州(프리모裡에)와 하바로프스크주, 猶太人自治區 等 러시아極東地域의 韓人마을들을 찾아 나섰다. 蘇聯時節 刊行된 러시아側 資料에 根據해볼 때, 1937年 强制移住로 閉鎖돼 永遠히 사라져버린 韓人마을의 數는 約 444個에 達한다. 여기에 1929年 中國 滿洲軍閥 張作霖(張作霖)의 洞中鐵道 占領으로 惹起된 中·蘇間 武力衝突로 閉鎖됐던 沿海州 南部의 하산스키 區域 韓人마을 162個까지 합치면 無慮 606個의 韓人마을이 歷史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지腎虛 마을 亦是 이들과 같은 運命을 겪었다. 지腎虛 集團農場의 住民들은 1937年 가을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地域으로 强制 移住됐다.

    사라진 韓人마을 606個에는 强制 移住 以後 韓人마을터에 러시아人들이 들어와 러시아마을로 變한 곳은 包含되지 않았다. 이들까지 包含할 境遇, 1937年 當時까지 러시아極東地域에 存在했던 韓人마을 數는 훨씬 많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들 韓人마을 大部分은 그 位置를 찾아내기가 거의 不可能하다. 이들 마을에 對해 證言해줄 高麗人 老人들은 거의 世上을 떠났으며, 살아 있는 이들도 너무나 오래된 일이라 제대로 記憶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設使 이들에게 稀微한 記憶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周邊環境이 많이 變해 元來의 位置를 찾아내기는 힘들다.

    强制移住 以後 70年 가까운 歲月 속에 韓人마을 大部分이 完全한 廢墟가 돼버렸다. 또 形便이 어려운 高麗人들이 自身들의 옛 故鄕을 찾는 일도 없다. 러시아마을로 變한 地域에서 러시아人들의 證言을 통해 겨우 그 痕跡을 찾아낼 수 있을 뿐이다.



    筆者는 各種 文獻資料와 이들 러시아人들의 證言에 힘입어 2001年 以後 20個에 가까운 韓人마을들의 位置를 찾아냈다. 그 過程에서 筆者는 渤海 遺跡들과 만나고, 70餘 年 전 땀과 피눈물을 흘리며 蘇聯 땅을 開拓한 억센 高麗人 先祖들의 삶의 痕跡을 보았다. 初期 韓人李住民들이 남긴 이 遺物과 遺跡들이 더 毁損되기 前에 모아서 保存해야 한다.

    그러나 한·러 親善의 歷史的 根據地였던 沿海州를 비롯한 러시아極東地域에 關한 우리들의 關心은 턱없이 不足하다. 올해는 러시아 韓人 移民 140周年의 뜻깊은 해다. 지腎虛 마을의 始作과 終末은 彈壓과 差別의 어두운 面과 親善과 協力의 밝은 面을 同時에 가졌던 한·러 關係의 兩面性을 端的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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