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革命 氣象 充滿한 强骨 집안|新東亞

革命 氣象 充滿한 强骨 집안

  • 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入力 2005-04-14 14: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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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金色 원숭이의 定期가 뭉쳐 있다’는 뜻의 金猿山(金猿山)을 背景으로 한 冬季(桐溪) 定溫 宗宅은 그 剛剛(剛剛)韓 氣勢가 무림 高手가 살기에 適當한 집이라는 이미지를 준다. 바로 이 집에서 朝鮮 後期 最大의 叛亂事件 主導者 정희량을 輩出한 것을 우연한 일로만 돌릴 수 있을까?
    혁명 기상 충만한 强骨 집안
    서울에서 볼 때 洛東江을 基準으로 하여 江 왼쪽을 경상좌도라 하고 江 오른쪽을 경상우도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오늘날 慶尙南道 地域은 옛날에 경상우도로 불렸다. 경상우도에서 손꼽을 수 있는 名家 中 하나가 宣祖, 광해, 人造의 歲 王代에 걸쳐 活動한 冬季(桐溪) 定溫(鄭蘊;1569∼1641年) 집안이다.

    경상좌도의 집안들이 大體的으로 退溪 李滉의 學風을 繼承하였다면 右道의 집안들은 南冥 曺植의 學風을 繼承하였는데, 冬季 靜穩은 社會的 實踐을 强調하는 南冥의 學風을 이어받은 代表的인 人物로 꼽힌다.

    冬季 定溫 宗宅이 자리잡은 慶南 巨創은 ‘울고 들어가서 웃고 나오는 곳’이라는 말이 傳해진다. 山꾼들의 귀띔에 따르면 居昌 地域은 山勢가 높고 險해서 들어갈 때는 心亂하게 보이지만, 지내다 보면 人心도 좋고 먹을 것도 많아서 살기 좋은 곳이라는 것이다.

    冬季 古宅은 居昌 버스터미널에서 이름난 名勝地인 殊勝對(搜勝臺) 쪽으로 方向을 잡아 택시로 15分 程度 더 들어가야 한다. 殊勝對 바로 못 미쳐서 左側길로 접어들면 江東(薑洞)마을이 나타나고 마을 正面 中央에 冬季 故宅이 있다.

    冬季 故宅으로 接近하는 瞬間 그 周圍 山勢와 故宅에서 풍기는 印象이 凡常치 않다. 武俠誌에 登場하는 무림(武林) 高手가 살기에 適當한 집이라는 이미지를 풍긴다.



    사람마다 各其 풍기는 첫印象이 있듯 집들도 풍기는 印象이 제各其 다르다. 溫和한 느낌을 주는 집이 있는가 하면, 莊重한 느낌을 주는 집이 있고, 왠지 모르게 豐足하고 餘裕 있는 느낌을 주는 집이 있는가 하면, 散漫하고 칙칙한 느낌을 주는 집도 있다. 나는 踏査를 다니면서 집마다 지닌 各其 다른 個性을 比較해 보는 데서 남모르는 재미를 느껴본다.

    剛剛한 바위山인 金猿山

    그런데 冬季 故宅에서 ‘무림 高手가 살 만한 집’이라는 印象을 받은 理由는 무엇인가? 바로 金猿山(金猿山) 때문이다. ‘金色 원숭이 精氣가 뭉쳐 있다’는 뜻을 지닌 金猿山은 백두대간이 德裕山으로부터 智異山으로 뻗어 내려가다가 中間에 뭉친 山이다. 金猿山은 海拔 1360m의 比較的 높은 山으로 巖壁이 露出된 剛剛(剛剛)韓 바위山이다. 五行(五行)으로 보면 火氣(火氣)와 禁忌(金氣)가 4 對 6으로 섞인 火今體(火金體) 山이라 할 것이다.

    冬季 古宅을 마주 바라보았을 때 무엇보다 故宅의 左側 뒤로 4∼5個의 봉우리가 우뚝하게 솟은 金猿山이 쳐다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嚴肅함 乃至 威壓感을 느끼게 한다. 마치 聞慶의 鳳巖寺가 자리한 대머리山人 희양산이 주는 印象과 비슷하다. 兩쪽 다 터 뒤쪽으로 높은 바위山이 뒤에 받치고 있는 形局인 것이다.

    아무튼 冬季 故宅의 太祖山(太祖山)에 該當하는 金猿山은 함부로 말 붙이기가 어렵게 느껴지는 嚴肅함과 함께 寡默한 무림 高手의 品格을 풍긴다. 한마디로 姜夔(剛氣)다.

    有名 古宅을 踏査하는 가운데 金猿山과 같은 火金體의 바위山이 祖山으로 뒤에 받치고 있는 境遇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道를 닦는 절터라면 모를까, 普通 사람이 사는 집터로는 이런 곳을 避하는 것이 一般的이다. 山의 精氣를 吸收하기 벅찬 一般人에게는 金猿山과 같은 姜夔(剛氣)는 單純히 剛한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을 ‘때리는’ 살기(殺氣)로 變하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知己(地氣)가 지나치게 剛한 곳에 집을 짓고 살면 밤에 꿈자리가 사납거나, 때때로 가위에 눌릴 때도 있고, 性格이 暴惡해지거나, 시름시름 아파서 結局에는 病이 드는 境遇가 많다. 1∼2年은 그럭저럭 버틸 수 있다 하더라도 3年이 넘어가면서부터는 버티기가 어렵다. 그래서 이런 場所는 절터나 修道院이 들어서야 제格이고, 그도 아니면 아주 氣가 强한 사람만이 그 터의 기운를 누르면서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剛한 金猿山을 祖山으로 하여 冬季 故宅이 들어설 수 있었던 理由는 무엇인가? 量中陰(陽中陰)의 理致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周易의 八卦(八卦) 中에 離卦(離卦; )가 양중音을 象徵하는데, 단단한 量의 한가운데 부드러운 音이 內在한다는 뜻이다. 단단한 껍데기 속에 부드러운 속살이 있는 빵과 같은 이미지다.

    그런데 이 부드러운 속살에서 妙用(妙用)이 많이 나온다. 冬季 古宅은 이 속살에 該當하는 자리라고 보면 틀림없다.

    金猿山에서 始作된 기운은 한참 내려오는 過程에 마침내 그 성난 怒氣(怒氣)를 풀고 야트막한 흙동산으로 結局(結局)을 이루는데, 바로 그곳에 冬季 故宅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江함에서 우러나는 부드러움, 이곳이 量重陰의 典型的인 자리이며 名當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湖南의 3代 首都터 中의 하나로 꼽히는 全北 변산의 월명암(月明庵)도 이런 量中陰 자리다.

    銳利한 筆力 象徵하는 문필봉

    冬季 故宅의 全體 國稅(局勢)에서 또 하나 注目을 끄는 産銀 箕白山(箕白山). 海拔 1320m에 達하는 孤山인데, 故宅에서 보자면 正面에서 若干 右側 前方에 보이는 山이다. 산이 全體的으로 三角形이면서 그 끝이 旗발처럼 뾰족하다. 대단히 우람한 문필봉(文筆峰) 模樣을 갖춘 山이다. 韓國의 오래된 名門家를 보면 집터 아니면 墓터 앞에 거의 문필봉 하나쯤은 發見된다. 踏査를 해보면 60∼70%가 그렇다.

    箕白山은 봉우리 끝이 붓의 그것처럼 뾰족하고 銳利해서 그 精氣를 받은 사람의 筆力(筆力)도 銳利하다고 본다. 그러면서도 붓을 받치고 있는 下部構造가 두텁고 雄壯해서 뚝심과 自尊心도 갖춘 文筆이다. 끝만 날카롭고 下部構造가 弱하면 外部의 壓力에 오래 버티지 못하지만, 箕白山처럼 두텁고 雄壯한 문필봉이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初志一貫해서 志操를 굽히지 않는 底力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冬季 古宅은 祖山인 金猿山의 武人的 氣質과 案山인 箕白山의 門私的 氣質이 모두 어우러져 있는 집터가 된다. 文武兼全의 터는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金猿山과 箕白山을 바라보니 400年 全義 冬季라는 人物의 性品이 어떠했을지 미루어 斟酌할 수 있겠고, 이 집안 사람들의 氣質도 大江 類推해볼 수 있다.

    이番에는 돈을 보자. 文武兼全을 하였다 하더라도 사람이 品位를 維持하기 위해서는 쓸 만큼 돈은 있어야 하는 法이다. 돈이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第一 먼저 물을 살펴보아야 한다. 背山臨水(背山臨水)라고 할 때 林藪의 狀態를 본다는 말이다.

    冬季 古宅 앞에는 內黨首(內堂水)가 흐르고 있다. 內黨首는 집터를 基準으로 靑龍 白虎의 範圍 內에서 흐르는 물을 가리킨다. 靑龍 白虎를 벗어나 그 바깥에서 흐르는 물은 外黨首(外堂水)라고 부른다.

    內黨首는 밖에서부터 집터를 向해 흘러 들어오는 물을 으뜸으로 치고 그 다음으로는 둥그렇게 활처럼 휘어지면서 집을 감아도는 물을 좋게 본다. 冬季 古宅 앞의 내黨首는 활처럼 돌아나가는 물이다. 그런데 特異한 部分은 내黨首 바깥 쪽에 外黨首가 하나 더 있다는 것이다. 집 大門 바로 앞으로 흐르는 물(內黨首)이 있고, 여기서 20m쯤 밖에 外黨首가 흐른다. 한마디로 내·외당수를 兼全하고 있다. 물은 一旦 財物로 보기 때문에 하나가 아닌 두 個의 내·외당수가 겹으로 집 앞을 흐르고 있다는 것은 그에 比例해 돈이 많다는 點을 의미한다.

    안쪽의 內黨首는 이름이 없지만, 바깥쪽의 外黨首는 江天(薑川)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강천이 어느 쪽에서 흘러오는지를 보기 爲해서 물길을 따라가 보았다.

    金猿山 쪽에서 흘러오는 조그만 실개川이 또 하나 있고, 이 실개川이 흘러오다가 江天에 합쳐지고 있다. 물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故宅의 左側 뒤에서 돌아 흐르는 冬季(桐溪)라고 불리는 가느다란 냇물 줄기가 하나 더 있는데, 이 물도 내·외당수와 함께 江天에서 合流되고 있다. 江天은 다시 殊勝對 쪽에서 흘러오는 위천(渭川)과 합쳐지면서 居昌 쪽으로 흘러간다.

    그러니까 無慮 5個의 물줄기가 古宅 周圍에서 合搜(合水)되는 形局이다. 물은 집앞에서 합쳐질수록 좋다고 본다. 물줄기가 많이 모일수록 財物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人心도 한 군데로 합쳐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를 일러 晩得一波(萬得一破)라고 하는데, 들어오는 쪽의 물은 萬 갈래로 나누어져 오더라도 이 물이 나갈 때는 한 군데로 나간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주 상서롭게 본다.

    서출동류의 明堂水

    물이 흐르는 方向은 어떤가? 佩鐵을 놓고 재보니 故宅의 坐向은 壬坐(壬坐)다. 壬坐는 正南向에서 15度 程度 西쪽으로 기운 方向을 가리키는데, 事實은 거의 正南向에 가까운 方向이다.

    물은 집의 오른쪽에서 始作하여 왼쪽으로 흘러가므로 所謂 말하는 ‘서출동류(西出東流)’에 該當한다. 西쪽에서 始作하여 東쪽으로 흘러가는 물을 가리키는 서출동류에 對해, 어느 寺刹의 老스님은 “서출동류라면 똥물度 藥이 된다”고 말할 程度다. 그만큼 選好하는 물의 흐름이다.

    왜 서출동류가 좋단 말인가? 흥미롭게도 이 물의 흐름이 좋은 理由를 西洋의 어느 生態學者가 나름의 論理로 밝혀놓았다. 그는 西쪽에서 始作하여 東쪽으로 흘러가는 물이 生態系에 가장 좋다고 主張했는데, 日照量을 가장 오랫동안 받을 수 있는 方向이라는 게 그 根據다. 해는 東쪽에서 뜨고 물은 西쪽에서 始作하면 물이 흘러가는 동안 反對쪽에서 떠오르는 太陽을 마주보는 時間이 길어지고, 빛을 많이 받을수록 그 물은 酸素 含有量이 豐富해져서 生態系에 이롭다는 主張이다.

    마지막으로 國稅(局勢)를 살펴보기로 하자. 慶尙道 地勢는 山이 많고 들판이 적기 때문에 慶尙道 古宅들은 뼈대가 있기는 하지만 相對的으로 國稅가 좁은 傾向이 있다. 그러나 冬季 古宅은 例外다. 툭 터진 느낌을 줄 만큼 國稅 또한 넓다.

    鬱鬱한 山中에 사는 사람보다는 넓은 들판에 사는 사람의 마음이 넓기 마련이다. 佛敎의 査察 터도 이와 마찬가지다. 앞이 시원하게 넓게 터진 庵子 터는 오도(悟道) 後의 보임(保任) 터가 많다. 補任이란 分別을 떨치고 萬象을 모두 受容하는 마무리 工夫이기 때문에 넓게 터진 터에서 工夫한다.

    工夫하는 데도 그에 맞는 터가 있다. 시원하게 터진 터는 高段者가 工夫하는 곳이라면, 初步者는 若干 답답하다 할 程度로 周邊이 꽉 짜인 터가 맞다. 그래야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 初步者가 너무 豪放한 터에 있으면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마음이 밖으로 動하는 일이 發生한다. 나는 집터도 같은 文法이 適用된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冬季 古宅을 보면서 ‘孟子’ 眞心章에 나오는 ‘宮卽獨善其身(窮則獨善其身)이요 桶卽兼善天下(通則兼善天下)’라는 글句가 떠오른다. 窮塞할 때는 홀로 修養하는 데에 注力하고, 일이 잘 풀릴 때는 天下에 나가서 좋은 일을 한다는 뜻이다.

    나는 平素에 牌가 잘 안 풀릴 때를 對備해 조용히 숨어서 獨善其身을 할 만한 場所를 物色하곤 했는데, 冬季 古宅을 보면서는 다른 생각이 올라온다. 男兒로 태어나서 兼善天下를 한番 해보아야겠다는 意欲을 샘솟게 한다. 이런 程度의 집 같으면 兼善天下의 抱負를 가질 만한 집터임에 틀림없다.

    忠節의 선비 冬季 定溫

    지리(地理)를 이 程度 보았으니 人事(人事)를 살펴볼 次例다. 이 집안의 哨戒 鄭氏들은 일찍부터 科擧及第를 한 記錄이 있다. 高麗時代 過去 合格者 101名의 名單이 실려 있는 ‘情事放牧(丁巳榜目)’李 故宅에서 所藏하던 古文書에서 發見된 것이다. 高麗末 禑王 3年(1377)에 치른 國子監試에서 壯元及第한 停戰(鄭悛)에게 當時 禮部(禮部)에서 授與한 이 原本은 合格 同期生 101名의 이름을 電源 收錄하고 있어 國寶級 資料로 評價받는다.

    아무튼 首席 合格者인 停電은 冬季 靜穩의 6代祖가 된다. 哨戒 鄭氏가 居昌의 龍山, 안음, 서마리 等地에서 살다가 現在 사는 洞네인 江東에 들어와 살기 始作한 時期는 洞契의 祖父인 勝地空(諱 淑; 1501∼1563年) 때부터니까, 어림잡아 500年 가까운 입향(入鄕) 歷史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 洞네 鄭氏들이 朝鮮時代에 名門家로 浮上한 것은 冬季 정온이 임금에게 목숨을 걸고 直言한 上疏文(甲寅封事)에서 비롯된다.

    洞契가 46歲 되던 해에 賃金 光海君은 동생인 영창大君을 江華島로 歸鄕 보냈다가 强化府使 正項을 시켜 죽이고, 父王인 宣祖의 繼妃이며 영창大君의 生母인 仁穆大妃마저 廢黜하려 하였다. 바로 이때 洞契는 上疏文에서 賃金이 只今 悖倫 行爲를 저지르고 있다고 直言한 것이다.

    이미 光海君은 親兄인 臨海君을 逆謀로 몰아 죽이고 外祖父인 연흥府院君 金悌男을 逆賊이라고 하여 죽였으며, 先王의 功臣, 現身들度 自己 귀에 거슬리는 上疏를 했다고 해서 죽이거나 귀양을 보낸 바 있었다. 그러니 自己에게 悖倫을 저지르고 있다고 直言한 洞契를 그냥 놔둘 理 없는 것은 自明한 일.

    洞契가 올린 上疏文은 光海君이 막 食事를 하려고 水剌床을 받았을 때 입職 承旨가 그 內容을 읽어주었다고 한다. “그런 짓을 하시고 죽어서 무슨 낯으로 宗廟에 들어가서 歷代 先王들을 만나시겠소?” 하는 대목에 이르자, 怒氣가 衝天한 光海君이 水剌床을 발길로 걷어차니 飯饌 그릇과 腸 종지가 어찌나 세게 튀었던지 옆에 있던 侍女와 承旨의 머리가 터져 버릴 地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처럼 凶測한 上疏를 傳達한 承政院 承旨들도 責任이 있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罷職되는 事態가 일어났다. 記錄에 따르면 全國의 儒生은 勿論이고 婦女子들까지도 洞契의 上疏文을 諺文으로 飜譯하여 읽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하며, 洞契가 拘禁된 監獄의 驛卒들度 先生의 人品에 感服되고 또 輿論에 壓倒되어 至誠으로 洞契를 보살폈다고 傳해진다.

    洞契를 擁護하는 全國 선비들의 輿論 때문에 洞契는 죽지 않고 그 代身 濟州島 대정현에 10年 동안 귀양을 가서 圍籬安置(圍籬安置)되는 刑을 받는다. 圍籬安置는 流配地의 담牆 周圍를 마치 새欌처럼 가시덤불로 에워싸서 하늘만 빼꼼하게 보이도록 措置한 집에서 살게 하는 刑罰이다. 말하자면 至毒한 家宅 年金生活이다.

    後日 秋史 金正喜가 濟州島 流配를 가서 生活한 곳이 洞契가 圍籬安置 生活을 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秋史는 대정현 사람들로부터 洞契의 流配 生活이 어떠했는지를 昭詳하게 傳해들을 수 있었고, 그가 行한 선비다운 處身에 感動받았던 것 같다. 秋史는 濟州 귀양이 풀린 後 일부러 居昌의 冬季 古宅을 訪問하여 當時 冬季 後孫인 정기필(鄭夔弼; 1800∼1860年)에게 冬季 先生에 對한 濟州道民의 稱頌을 傳해주면서 ‘衝新黨(忠信堂)’이라는 懸板을 써주고 간 일이 있다.

    洞契가 忠節의 선비로서 尊敬받았던 또 하나의 事件은 丙子胡亂 때였다. 壬辰倭亂과 함께 丙子胡亂은 朝鮮朝의 2代 亂離로 꼽힌다. 壬辰倭亂이 많은 人命被害와 함께 物質的인 被害가 컸다고 한다면 丙子胡亂은 物質的인 被害는 적었지만 精神的인 被害는 오히려 壬亂보다 深刻했다고 볼 수 있다. 丙子胡亂은 그때까지 우습게 알던 오랑캐에게 임금인 仁祖가 맨발로 엎드려 절을 해야 했던 치욕스러운 事件이었기 때문이다.

    名分과 自尊心을 生命보다 所重하게 여겼던 朝鮮朝 선비들에게는 南漢山城에서 무릎꿇은 임금의 恥辱 行爲가 선비의 自尊心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大事件이었다. 1636年 洞契는 남한산성에서 오랑캐와의 和議를 積極 反對했으나 結局 和議가 成立됨에 따라 칼로 배를 긋는 割腹 自殺을 企圖하였다. 主辱臣死(主辱臣死: 賃金이 辱보면 臣下는 죽어야 한다)의 精神이었다.

    그러나 모진 목숨이 마음대로 끊어지지 않자 國恩에 報答하지 못한 것을 恨歎하고 德裕山 자락의 모리(某里)라는 곳에 隱居하면서 伯夷叔齊처럼 죽을 때까지 미나리와 고사리를 먹고 살았다. 고사리를 캐며 살았다고 해서 그 隱居地는 고사리 美(薇)字를 넣어서 ‘채미헌(採薇軒)’이라는 이름으로 傳해진다. 요즘도 後孫들이 冬季 祭祀를 지낼 때는 祭祀床에 반드시 고사리와 미나리를 올려놓는다고 한다. 이 집에서 고사리와 미나리는 菜蔬가 아니라 義理와 節槪의 象徵인 것이다.

    一致일란(一治一亂), 한番 治世가 있으면 다음番에는 亂世가 오는 法. 이는 非但 國家뿐만 아니라 한 집안社에도 適用되는 것인가. 鄭氏 집안에서 冬季라는 人物이 집안을 名門家로 올려놓은 것이 治世였다고 한다면, 洞契의 玄孫인 정희량(鄭希亮: ?∼1728年)의 出現은 鄭氏 집안을 存廢의 岐路에 몰아넣은 一帶 亂世였다.

    정희량은 英祖 4年에 發生한 武臣란(戊申亂,1728年)의 主動者였다. 武臣亂은 朝鮮 後期 叛亂事件 가운데 가장 規模가 컸고, 거기에 加擔하였던 忠淸, 嶺南, 湖南의 내로라하는 名門집안들은 거의 滅門되거나 쑥대밭이 된 事件이었다. 上層 엘리트들이 大擧 加擔하였다는 側面에서 武臣亂은 一般 民亂과는 若干 性格이 다른 政變的(政變的) 性格을 띠고 있었다고 보인다.

    記錄과 情況을 綜合하면 武臣亂의 發生 原因은 네 가지로 集約된다. 첫째는 警鐘의 毒殺說. 警鐘이 게醬(蟹醬)을 特別히 좋아하였는데 毒이 든 게醬을 먹은 直後 갑자기 죽었다는 說이 播多하게 퍼졌다. 警鐘이 죽을 때 입에서 붉은 피를 吐하고 죽은 點, 臨終 直後 警鐘의 屍體에 斑點이 퍼진 事實이 毒殺說을 뒷받침한다.

    둘째는 警鐘의 뒤를 이은 英祖가 肅宗의 親子가 아니라는 點이 提起되었다. 그 證據로 歷代 이씨 王室의 男子들이 鬚髥이 別로 없는 데 反해 영조는 異常하게 鬚髥이 많아, 이는 結局 英祖 어머니인 무수리의 微賤한 身分과 關聯되면서 英祖가 李氏 王統이 아니라는 說이 提起되었다.

    셋째는 警鐘의 뒤를 이은 英祖의 登場과 함께 老論이 다시 政權을 掌握하였고, 老論에게 밀려난 南人들과 少論(樽所)들은 政權에서 完全히 疏外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亂을 일으켰다는 說이다.

    넷째는 當時 굶어 죽는 사람이 續出하는 極甚한 凶年이 繼續돼 사람을 잡아먹는 狀況에 이를 程度로 民心이 洶洶했다는 點이다. 이 時期를 전후하여 ‘民亂의 時代’라고 規定할 수 있을 만큼 수많은 民亂이 發生하고 있었음을 參考할 必要가 있다.

    아무튼 여러 背景으로 인해 일어난 武臣亂은 李麟佐(李麟佐)의 亂이라고도 하고 정희량(鄭希亮)의 亂이라고도 부른다. 朝鮮時代 各種 叛亂事件의 搜査記錄인 ‘추안급국안(推案及鞠案)’에서 武臣란 關聯 記錄을 들춰보면 文件 타이틀에 이인좌, 정희량의 이름이 보인다. 洞契의 玄孫인 정희량이 武臣亂의 主役 가운데 한 사람이었음을 暗示하는 대목이다.

    忠臣의 後孫에서 一瞬間에 逆賊 집안으로 轉落한 江東의 鄭氏들은 30名 程度가 事件에 連累되어 죽어야 하였고, 約 20年 동안 洞네를 떠나 이곳 저곳에 뿔뿔이 흩어져 숨어 살아야 하였다. 한마디로 집안이 결딴난 것이다. 朝鮮時代 罪인 中에 가장 큰 罪人이 쿠데타에 失敗한 逆賊이었으니까, 以後로 정희량에 關한 事實은 哨戒 鄭氏 族譜에서부터 文集에 이르기까지 모든 記錄에서 徹底하게 削除되었음은 勿論이다.

    小說家 이병주가 그랬던가! 勝者의 記錄은 햇빛을 받아 歷史로 남지만, 敗者의 記錄은 달빛을 받아 神話나 傳說이 된다고. 정희량에 關한 內容도 마찬가지다. 江東 마을에서 口傳으로만 稀微하게 傳해지는 정희량에 關한 이야기를 後孫인 靜養院氏(鄭亮元, 62歲)가 99年에 ‘강동(薑洞)이야기’라는 冊으로 펴냈다.

    靜養院氏는 現在 事業體(成現商運)를 運營하는 社長이지만 十數年間 時間 나는 대로 資料를 찾고 現地를 踏査하면서 정희량에 關한 資料와 情報를 꼼꼼하게 涉獵한 鄕土史學者이기도 하다. 朝鮮時代에는 逆賊이었지만 이제 時代가 바뀌었으니 새로운 視角에서 정희량을 解釋할 必要가 있다는 趣旨에서 冊을 펴냈다는 것. 이 冊에는 정희량에 關한 몇 가지 逸話가 나온다. 정희량은 어릴 때부터 人物이 대단히 遵守하였고 頭腦가 非常하였으며 생각하는 것이 엉뚱하다 할 程度로 豪放하였다고 한다.

    정희량이 네댓 살쯤 된 어느 봄날 祖父인 堤川공이 어린 孫子인 정희량을 안고 집 앞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그때 마침 右側으로 바라보이는 金猿山에 山불이 나서 대단한 氣勢로 타고 있었다고 한다. 시커먼 煙氣가 하늘을 가리고 그 煙氣 사이로 불꽃이 널름거리는 光景을 보고 있었는데, 할아버지 품에 안겨 있던 어린 孫子가 “할아버지, 저 둥그런 하늘이 솥(鼎)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허허 고놈이! 하늘이 어떻게 솥이 될 수가 있겠느냐. 그래 하늘이 솥이라면 무엇을 할 것이냐?”

    “萬若 하늘이 솥이라면 저 불로 粥을 끓여서 굶는 百姓들을 모두 먹이면 온 나라 안에 배고픈 사람이 없을 것 아닙니까?”

    어린 孫子에게 이 말을 들은 堤川功은 孫子의 생각이 奇特하기도 했으나 한便으로는 그 그릇이 너무 크고 생각이 지나치게 居昌하여 걱정스러운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鄭鑑錄’과 風水圖讖 思想

    筆者의 注目을 끄는 또 하나의 傳說이 있다. 무신年 봄에 정희량이 擧事를 하려고 하자 누나가 主役을 펴놓고 골똘히 卦를 풀어보았다. 鄭氏집 女子들은 周易을 工夫하는 傳統이 있었다고 傳해지는데, 뛰어난 叡智力을 갖춘 女性들이 많았다고 한다. 아무튼 그 누나는 周易을 풀어본 뒤 동생 정희량의 손을 붙들고 이렇게 말했다.

    “네가 정히 큰 일을 할 命運을 타고났지만, 只今은 때가 아니니 조금 더 기다렸다가 今年 가을 나락이 고개를 숙이기 始作할 때가 賤視(天時)에 맞다. 그때 하거라.”

    그러나 狀況을 더 以上 미룰 수 없는 形便이라고 정희량이 對答하니, 누나는 “이것도 亦是 우리집 가운이고 너의 命運이라 어쩔 수가 없구나. 只今 擧事를 하면 너는 뒷날 목 없는 鬼神이 되고, 무덤 없는 魂魄이 될 것이다”라고 恨歎하였다 한다.

    이러한 傳說들은 알고 보면 風水圖讖(風水圖讖)에 關한 內容들이고, 한걸음 더 類推하여 보면 정희량 自身도 風水圖讖的인 脈絡에서 특별한 運命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여겼을 可能性이 있다. 朝鮮 後期 各種 叛亂事件의 이념적 基盤 中의 하나가 다름아닌 風水圖讖이고, 代表的으로 ‘鄭鑑錄’李 朝鮮時代의 그러한 風水圖참적 世界觀을 反映하고 있다.

    實際로 ‘鄭鑑錄’이라는 이름이 公式記錄에 처음 登場하는 時期가 바로 武臣란 때부터다. 或是 武臣란 主導멤버 中 누군가가 ‘鄭鑑錄’을 비롯한 風水圖讖說을 流布하여 民心을 움직이려 한 것은 아닐까? 鄭氏인 정희량은 或是 自身을 정도령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朝鮮時代 사람들의 內面世界를 支配했던 風水圖讖的인 視角에서 보면 冬季 宗宅의 風水와 정희량이라는 人物의 出生은 몇 가지 點에서 符合되는 部分이 發見된다.

    多少 어렵긴 하지만 이를 풀어보기로 한다. 太祖山人 金猿山의 精氣를 받은 人物이 江東마을 鄭氏 집안에서 언젠가 한 名 태어나기 마련이다. 그 사람은 열두 띠 가운데 一旦 원숭이해에 出生한 申年生(申年生)으로 範圍를 좁혀볼 수 있다. 바로 金猿山이 원숭이(申)의 精氣가 뭉쳐 있는 山이기 때문. 그 다음에는 원숭이띠 中에도 天干(天干)에 임(壬)字가 들어간 壬申年(壬申年)生 人物이 金猿山의 精氣를 받아먹을 것이다. 바로 冬季 宗宅의 坐向이 壬坐(壬坐)에 該當하기 때문이다. 卽 風水의 이기법(理氣法)을 動員하면 宗宅 坐向의 임(壬)과 太祖山人 金猿山의 神(申)李 結合하면 妊娠(壬申)李 되는 理致다.

    그런데 정희량은 逆賊이라고 해서 모든 記錄에서 지워졌으므로 그 出生年度를 確認해볼 수 없다. 推理해 보면 정희량과 함께 亂을 꾸민 李麟佐의 나이가 武臣란 當時 36歲였고, 두 사람이 胸襟을 터놓고 같이 어울렸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비슷한 年輩였을 것이다. 또 記錄에 따르면 무신年에 정희량이 큰며느리를 보았다고 돼 있는데, 當時 婚姻 適齡期가 17∼18歲였음을 勘案하면 정희량은 武臣란 當時 37∼38歲쯤이 아니었을까. 무신年을 起點으로 六十甲子를 溯及해 올라가면 37歲 나이는 壬申年(壬申年) 生이다.

    그 다음에 생각해볼 要素가 擧事年인 무신年(戊申年)이다. 이 亦是 원숭이해다. 원숭이띠가 원숭이해에 擧事를 한 셈. 이러한 重複은 상서롭게 본다. 그런데 여기에 원숭이가 한 마리 더 添加되어 세 마리 원숭이가 三重으로 重複되어야만 제대로 힘을 쓴다고 본다. 傳說에 따르면 主役을 잘한 정희량의 누나는 “나락이 고개를 숙이기 始作할 때 擧事를 하라”고 정희량에게 忠告했다고 하는데, 바로 그때가 陰曆 7月로 신월(申月)에 該當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희량은 그 말을 듣지 않아 失敗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哨戒 鄭氏들이 叛亂의 主謀者를 輩出하고서도 滅門을 當하지 않고 다시 집안을 復舊할 수 있었던 背景은 무엇인가? 가장 큰 理由는 洞契와 같은 忠臣의 祭祀가 끊어지게 놔두면 안 된다는 士大夫層의 輿論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英祖 當代에 冬季 祭祀가 許可된다. 이는 정희량에 對한 미움보다도 先祖인 洞契에 對한 尊敬의 殮이 더 컸음을 나타낸다. 中始祖인 洞契의 名望이 없었더라면 이 집안은 武臣란 때 끝났다고 보아야 한다. 그만큼 韓國 名門家는 中始祖의 名望이 重要한 要素로 作用한다는 事實을 알 수 있다.

    祠堂 正面에 正祖大王이 洞契를 위해 直接 지은 어제時 懸板이 그 復舊를 象徵的으로 말해준다. 武臣亂의 餘波로 20年 동안 숨어 지내야 했던 鄭氏 집안을 다시 일으킨 人物은 營養縣監을 지낸 야옹 정기필(1800∼1860年)이다. 그는 疲弊한 江東 마을을 거의 復舊시켰으며, 現在 江東마을 鄭氏들 또한 大部分 정기필의 後孫일 程度다. 그만큼 冬季 다음으로 比重 있는 人物이다. 야옹 以後로도 繼續해서 人物이 輩出되면서 鄭氏들은 過去의 名聲을 이어가고 있다.

    社會 各界에서 活動하는 이 집안 後孫들을 行列別로 紹介하면 다음과 같다. 정종철(鄭鍾哲, 작고, 慶南知事·서울市長 歷任) 정종구(鄭鍾九, 작고, 동국대 農大學長 歷任, 酒精計의 權威者) 정종선(鄭鍾先, 유타大 博士, 美國 코닥사 先任硏究員) 정종화(鄭鍾和, 高麗大 敎授) 정종진(鄭鍾珍, KBS 報道本部長) 정종욱(鄭鍾旭, 아주대 敎授, 中國大使 歷任), 정종흔(鄭鍾欣, 安養市 副市長 歷任) 정도순(鄭度淳, 스위스大使) 정창순(鄭昌淳, 韓日銀行 專務) 정연순(鄭年淳, 무역진흥공사 本部長) 정용수(鄭龍秀, 檢事) 井泉水(鄭天秀, 延世大 敎授, 벤처企業 社長) 정진수(鄭眞秀, 大熊製藥 理事) 정준수(鄭俊秀, 한국통신 公報企劃部長) 等이다.

    現在 冬季 宗宅의 15代 宗孫은 정완수氏(鄭完秀, 60歲)이고, 鐘夫人 류성규氏(柳星奎, 55歲)는 安東의 著名한 家門인 全州 류氏 류치명(柳致明) 先生의 直系 後孫이다. 安東의 全州 류氏들은 獨立運動을 많이 한 집안으로 有名하다.

    宗孫은 職場이 慶北 榮州에 있어서 居昌 宗宅에서 居住하지는 못한다. 宗孫으로서 宗家를 지키지 못한다는 負擔感을 恒常 가지고 있어 몇 年 안에 일이 整理되는 대로 終價로 돌아오려고 한단다.

    그러나 宗家로 돌아와서 사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于先 故宅의 管理가 쉽지 않다. 1500坪의 大地에 70칸 建物이 있는 邸宅을 쓸고 닦는 일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奉祭祀 接賓客은 더 큰 問題다. 著名한 古宅이기 때문에 지나는 訪問客을 비롯하여, 이곳 저곳에서 많은 손님이 恒常 찾아온다. 알고 찾아오는 손님들은 某某한 분들이기에 疏忽하게 待接할 수도 없다. 宗孫에게는 손님接待가 가장 큰 일이다. 費用도 만만치 않게 든다.

    古宅을 維持하려면 한 달 生活費가 어느 程度 드느냐고 宗孫에게 넌지시 물어보니 500萬원 程度는 있어야 基本 品位를 維持할 수 있다고 한다. 더구나 宗孫은 接賓客을 하면서 古宅을 管理해야 하니 職場을 갖기가 不可能하다. 普通 사람이 職場도 없이 每달 500萬원의 費用을 充當하기는 쉽지 않다. 이 집뿐만 아니라 全國의 有名한 宗孫들이 直面한 共通的인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財産이 아주 많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宗孫들이 집을 지키면서 살기가 어렵다는 結論이 나온다.

    料理솜씨로 有名한 14代 宗婦

    冬季 宗宅은 宗孫인 정완수氏 夫婦보다 宗孫의 어머니이자 14代 鐘夫人 최희氏(崔熙, 75歲)가 有名하다. 14代 宗孫으로 居昌 敎育長을 지낸 정우순氏(鄭禹淳)가 5年 前 他界한 後 혼자 이 넓은 집을 지키고 있다. 안채 뜰 앞에 보랏빛으로 피어 있는 꽃잔디度 할머니가 정성스레 가꾼 것이다.

    최희 할머니는 料理솜씨로 有名해서, 料理雜誌나 女性雜誌에서 할머니 料理法을 자주 取材해 간다. 韓國 上流層의 傳統 料理法을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親庭은 韓國 最高의 富者집이자 12代 萬石꾼을 지낸 慶州 崔富者집이었으니 그 眼目과 솜씨를 미루어 斟酌할 수 있다.

    최희氏는 崔富者집의 現在 宗孫인 최廉氏의 누나이기도 한데, 筆者는 冬季 宗宅을 訪問하기 前 최廉氏를 통해 미리 連絡을 해놓은 터라 할머니가 손수 準備한 저녁食事를 안채에서 맛보는 機會를 가졌다.

    飮食 맛은 全體的으로 담백했다. 名家의 飮食을 맛보기 위해 同行한 農心라면의 최경부 소스開發 專門硏究員은 이 집의 간醬맛에 讚辭를 보낸다. 간醬 特有의 퀴퀴한 냄새가 거의 없으면서도 맛은 고소하고 담백하다는 評價다.

    할머니에게 그 祕訣을 물어보니 古宅 全體의 構造가 日照量을 많이 받는 位置에 있고, 거기에다 金猿山에서 내려오는 물맛이 합쳐져서 그런 것 같다는 說明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집의 물은 서출동류의 格調 있는 물이다.

    飯饌 中에 수란과 肉脯度 빼놓을 수 없다. 水卵은 宗家의 酒案床에 꼭 오르는 飮食이라고 한다. 달걀을 끓는 물에 데친 다음 告訴한 잣국물에 띄운다. 보기에도 깔끔하면서 營養價가 많을 것으로 여겨진다. 傳統禮節 專門家인 이연자氏가 쓴 ‘宗家이야기’에도 이 집의 수란이 紹介되어 있는데, 普通 먹는 鷄卵찜이나 鷄卵 프라이하고는 次元이 다른 飮食 같았다.

    肉脯 또한 別味. 나는 山에 갈 때마다 非常 食糧으로 肉脯를 챙기기 때문에 平素 이 分野에 關心이 많다. 할머니에게 들은 祕法은 이렇다. 쇠고기를 물에 담가 놓아 피를 뺀 뒤 햇볕에 말린다. 이때 모기帳을 쳐 파리가 붙지 않도록 注意해야 한다. 脯를 뜰 때는 손으로 直接 떠야 맛이 있다. 물엿, 雪糖, 진간醬, 후추, 調味料 若干을 넣는데, 單 마늘은 넣지 않는다고 한다.

    잠은 舍廊채에서 잤다. 舍廊채에는 ‘母와(某窩)’라는 扁額이 걸려 있다. 1909年 의친왕 李堈(李堈;1877∼1962年) 公이 이 집 舍廊채에서 約 40日間 머문 적이 있다. 이강공은 舊韓末 承旨를 지낸 이 집 宗孫 정태균(鄭泰均)과 漢陽에서 親하게 지낸 사이였기 때문에 이 집을 찾아왔으며, 그때 남긴 親筆이 ‘모리의 집’이라는 뜻의 ‘母와’다.

    에피소드도 傳해진다. 의친왕이 舍廊채에 머물고 있을 때 居昌 隣近은 勿論이고 南原, 茂朱, 鎭安, 長壽에서까지 사람들이 와서 임금님을 보겠다고 뜰 앞과 門 밖에서 人山人海를 이루었다. 몇 年 前에는 以降 公의 아들인 歌手 이석氏가 宗宅을 訪問하였다. 아버지가 머물렀던 舍廊채에서 자보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온 것이다. 舍廊채에 들어온 이昔氏는 感懷어린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아버지가 요를 깔고 자던 房바닥에 대고 몇 番이나 절을 하더란다.

    宗宅 舍廊채의 하룻밤은 爽快한 熟眠이었다. 7層 아파트의 잠자리와는 確實히 다르다는 걸 實感하겠다. 자고 나니 몸이 부드럽지 않은가! 아침을 먹기 前에 近處에 있는 殊勝對까지 散步를 나갔다. 거리는 1km. 뒷동산의 山길을 넘어가는 데 20分 程度 所要되는 適當한 距離다.

    솔잎 냄새와 새소리를 들으면서 當到한 殊勝對度 絶景이다. 溪谷 한가운데 소나무 사이로 거북 模樣을 한 커다란 바위(岩龜臺)가 신비롭게 놓여 있고, 그 꼭대기에는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돌로 된 座席이 마련되어 있다. 神仙은 바로 이런 곳에서 歲月을 보내는구나. 집에서 不過 20分만 걸으면 山水畫 속으로 直接 들어갈 수 있으니 더 以上 무얼 바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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