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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팽한 保守·進步 主流는 自由主義|新東亞

팽팽한 保守·進步 主流는 自由主義

政治·經濟·社會學者 110名이 分析한 代表的 知識人 45人 理念性向

  • 박성원swpark@donga.com 육성철sixman@donga.com

    入力 2005-05-10 23: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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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理念對決에 따른 分斷과 戰爭의 遺産을 儼然히 안고 있는 韓國社會에서 果然 思想과 理念의 자유로운 競爭은 어디까지 可能한 것인가. 이는 ‘思想과 良心의 自由‘를 憲法的으로 保障받고 있는 大韓民國 社會에서 知識人들이 늘 부딪히게 되는 核心的 問題라 할 수 있다.

    더욱이 6·15 共同宣言 以後 南北間 和解協力 基調가 持續되는 渦中에 政治的·經濟的 · 社會的 理念 葛藤의 골은 되레 深化되는 狀況인데도 知識人들조차 客觀的이고 공정한 눈으로 相對方의 哲學과 方法論을 評價하기 보다는 我執과 偏見으로 相對方을 ‘守舊‘니 ‘親北‘이니 賣渡하는 傾向까지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 葛藤의 調停者 役割을 해야 할 政治權은 討論보다는 걸핏하면 政爭 次元의 色깔攻防을 일삼으며 차분하고 眞摯한 問題解決을 가로막고 있다.

    全體主義 社會가 아닌 限 어느 社會에서나 思想的 이념적 葛藤은 存在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見解와 立場을 얼마나 공정하게 討論하고 合理的으로 檢證하느냐는 것은 한 社會의 發展水準을 가늠하는 文化的 尺度라고 할 수 있다.

    ‘2001年 韓國의 知識人·政治權의 理念指導‘ 를 主題로 한 新東亞 特別企劃은 이같은 觀點에서 마련되었다. 》

    諮問委員



    ● 金根植(아태평화재단 硏究委員)

    ● 류동민(충남대 敎授)

    ● 윤상철(한신대 敎授)

    ● 이남주(성공회대 敎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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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밀레니엄을 希望과 挫折 속에 맞이한 韓國의 大衆에게 知識人들은 只今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가. 그들이 解釋한 오늘의 韓國과 그들이 提起한 韓國社會의 나아갈 길은 어떠한 理念, 哲學, 方法論에 根據하고 있는가.

    ‘신동아’는 大衆媒體 等을 통해 오늘의 韓國社會를 主題로 삼아 많은 發言을 하고 있는 代表的 知識人들을 正面으로 다뤄보기로 했다. 안팎으로 커다란 混沌과 葛藤을 겪고 있는 오늘의 韓國社會에 關해 發言을 많이 해온 이들 知識人의 視角을 交叉分析해봄으로써, 大衆과 知識人 間의 距離를 좁히고 知識人 集團 內部에 存在하는 相互無關心과 獨善, 偏狹의 壁을 허무는 데 보탬이 되기 위해서다.

    이番 企劃에서 評價對象으로 삼은 知識人들은 政治·國際政治·經濟·社會 等 社會科學 分野에서 大衆媒體에 많이 登場한 45名의 ‘大衆的 知識人’에 限定했다. 이들이 自己 學問 分野에서 代表性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問題는 이 企劃이 意圖하는 바가 아니며, 따라서 어디까지나 現實問題와 關聯한 大衆的 影響力 側面을 評價 對象 選定의 基準으로 삼았음을 밝혀둔다.

    評價 對象者는 具體的으로 韓國言論硏究院에서 提供하는 新聞記事 檢索 사이트인 ‘KINDS’를 통해 最近 2年間 新聞 寄稿文 및 新聞記事에 그 이름이 擧名되는 頻度數를 基礎로 專門家들의 意見을 參考하여 選定했다.

    이들에 對한 評價·分析作業은 11月24日부터 12月14日까지 評價對象 當事者 45名을 包含, 該當 分野 博士學位를 所持한 大學敎授와 硏究所 硏究委員 等 110名의 專門家그룹을 相對로 팩스나 이메일 電話인터뷰를 통해 實施했다. 專門家그룹 가운데는 先輩나 同僚 知識人에 對한 自身의 認識을 公開的으로 表明하는 데 따른 負擔 때문에 匿名을 要求하거나 一部 對象에 限해 評價를 留保하는 境遇도 있었다.

    ‘신동아’는 調査 過程에 分類上 便宜를 위해 正統左派, 新左派, 急進的 民主主義, 進步的 自由主義, 改良的 自由主義, 保守的 自由主義, 正統保守主義 等 社會科學 分野에서 比較的 널리 使用돼온 이념적 用語를 例示했으며 專門家그룹 大部分이 實際 이 基準에 따라 評價作業에 參與해 주었다.

    ‘신동아’가 例示한 위 分類體系는 社會體制의 構成과 變化, 分配와 效率의 關係, 經濟에 對한 政府介入, 韓國 政治體制의 性格과 變化方向 等에 對한 知識人의 立場을 主要 基準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념적 分類體系는 무엇을 强調하는가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기 때문에 一部 應答者들의 境遇 나름의 體系를 가지고 分類할 수도 있다는 點은 充分히 豫見되었다. 또한 ‘신동아’의 分類體系에 따르면서도 應答者마다 그 意味規定을 달리 하고 있는 境遇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이러한 混線을 補完하기 위해 各各의 分析對象 人物에 對한 評價·整理段階에 들어가서는 應答해준 專門家그룹이 說明하는 判斷根據를 充分히 參酌하여 應答者가 驅使한 用語를 再解釋하기도 했다. 讀者들의 便宜를 위해 例示된 理念分類 體系를 簡單히 說明하면 다음과 같다.

    正統左派는 마르크시즘의 資本主義 分析과 階級論을 韓國社會에 適用하려는 傾向이다. 社會的 分配構造의 再構造化와 勞動階級의 獨自性 및 中心性을 强化하는 等 傳統的 意味의 社會主義的 價値를 追求하는 데 關心을 보이며, 現在 韓國 政治經濟體制에 對해 根本的으로 批判意識을 堅持한다.

    新左派는 正統左派와 많은 部分을 共有하지만, 社會體制 分析에 있어서 더욱 現實的으로 이데올로기, 文化, 性 等 餘他 社會的 均衡을 重視하고, 變革主體에 있어서도 勞動階級의 役割만을 强調하지 않는다.

    急進的 民主主義는 直接民主主義의 實現에 많은 關心을 가지고 있으며 同時에 分配正義의 實現이야말로 民主主義가 제대로 作動하기 위한 前提로 把握한다. 이들은 現實政治 改革에 積極的이지만, 資本主義體制 自體를 否定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最終的으로 資本主義 體制를 넘어서는 改革을 意圖할 수 없다.

    進步的 自由主義는 政治的 性向으로 보면 急進的 民主主義와 類似하지만, 資本主義 體制를 受容한다. 따라서 ‘穩健改革론’으로 볼 수 있는데 國家權力에 對한 個人의 自由 問題에 많은 關心을 기울인다.

    以上의 네 傾向들은 그 동안 韓國社會體制와 發展戰略에 批判的인 立場을 取하면서 그 變化를 摸索해왔다는 點이 共通的이다.

    改良的 自由主義는 分配의 正義보다는 政治的, 經濟的 支配能力을 重視한다. 政治體制의 效率性을 强調하고 安定的인 市場經濟 體制를 摸索한다. 다만 權威主義體制의 否定的 遺制들을 部分的으로 矯正함으로써 體制의 效率的 作動을 試圖한다.

    保守的 自由主義는 現在 韓國 社會에서 保守主義를 代表하는 傾向이며 分配보다는 效率을 優先視한다. 庾信 以來 韓國의 發展國家 體制에 肯定的이며 北韓에 對해서는 批判的 視角을 一貫되게 適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正統保守는 光復 以後 只今까지 構築된 ‘韓國的 價値’, 韓國의 政治社會的 秩序를 自由民主主義 固守 次元에서 積極 擁護하는 傾向을 보인다. 따라서 南北和解 等 旣存秩序가 修正될 수 있는 狀況을 憂慮한다.

    이番 評價에 參與해준 專門家 그룹의 名單은 다음과 같다(가나다 順).

    강근형(제주대 政外科 敎授)

    강명헌(단국대 經濟學科 敎授)

    강석훈(성신여대 經濟學科 敎授)

    강순희(韓國勞動硏究院 動向分析室長)

    강신준(동아대 經濟學部 敎授)

    강신택(서울대 行政大學院 名譽敎授)

    강정구(동국대 社會學科 敎授)

    江天(부산외대 經濟學科 敎授)

    고숙희(세명대 行政學科 敎授)

    구갑우(경남대 北韓大學院 敎授)

    권오성(충남대 講師)

    권오윤(동국대 國際關係學科 專任講師)

    김경웅(統一敎育院 敎授)

    金根植(아태평화재단 硏究委員)

    김기원(韓國방송통신대 經濟學科 敎授)

    김기흥(경기대 經濟學科 敎授)

    김대영(韓國政黨政治硏究所 硏究委員)

    김동운(동衣襨 經濟貿易學部 敎授)

    김만흠(서울대 社會科學院硏究員 特別硏究員)

    김명섭(한신대 國際學部 敎授)

    金命洙(한양대 言論情報臺 敎授)

    김상태(한남대 政外科 敎授)

    김성건(서원대 社會敎育科 敎授)

    김성훈(중앙대 農經濟學科 敎授)

    金映洙(釜慶大 行政學科 敎授)

    金映豪(성신여대 政外科 敎授)

    김용직(성신여대 社會學科 敎授)

    김일영(성균관대 政外科 敎授)

    김재일(단국대 社會科學部 敎授)

    金在洪(동아일보 論說委員)

    김재훈(대구대 經濟學科 敎授)

    김정렬(美國 조지워싱턴大 客員硏究員)

    김진웅(경북대 師範大敎授)

    김태우(國際平和戰略硏究所 首席硏究委員)

    김태효(新亞細亞硏究所 外交安保硏究室長)

    김현희(한신대 社會學科 敎授)

    김형구(釜山經濟硏究所 所長)

    김홍기(한남대 國際通商學科 敎授)

    나성린(한양대 經濟學科敎授)

    남궁곤(東亞日報 21世紀平和硏究所 常任硏究委員)

    노병일(대전대 社會福祉學科 敎授)

    노진철(경북대 社會學科 敎授)

    류동민(충남대 經濟學科 敎授)

    문정인(연세대 國際學大學院 院長)

    민경국(강원대 經濟貿易學部 敎授)

    박명광(경희대 副總長)

    박복영(政策企劃委員會 專門委員)

    박상태(서강대 社會學科 敎授)

    박승길(大邱 효성가톨릭대 社會學科 敎授)

    박은홍(民主社會政策硏究院 常任硏究委員)

    박재창(숙명여대 行政學科 敎授)

    박정동(KDI 硏究委員)

    朴鍾哲(統一硏究院 先任硏究委員)

    朴振(企劃豫算위 行政3팀長)

    배동인(강원대 社會學科 敎授)

    송호근(서울대 社會學科 敎授)

    송홍선(예금보험공사 專門委員)

    신정완(韓國勞動硏究院 硏究委員)

    여현덕(에드퓨처 代表·美國 펜실베이니아對 招請學者),

    염홍철(대전산업대 總長)

    우명동(성신여대 經濟學科 敎授)

    원용찬(전북대 經濟學科 敎授)

    유병규(현대경제연구원 硏究委員)

    劉承旼(汝矣島硏究所 所長)

    유재일(대전대 政治外交學科 敎授)

    유팔무(한림대 社會學科 敎授)

    有限數(CBF 金融그룹 會長)

    尹建永(연세대 經濟學科 敎授)

    윤상철(한신대 社會學科 敎授)

    윤정로(韓國科學技術院 人文社會科學部 敎授)

    이각범(한국정보통신대學校 敎授)

    이강천(동우캐피탈 代表理事)

    이기훈(충남대 經濟學科 敎授)

    이남주(성공회대 중어中國學科 敎授)

    이두원(연세대 經濟學科 敎授)

    이상철(仁川發展硏究院 硏究委員)

    이수훈(경남대 社會學科 敎授)

    이일영(한신대 經濟學科 敎授)

    이장영(국민대 社會學科 敎授)

    이재석(대우중공업 專務理事)

    이종석(世宗硏究所 硏究委員)

    이철기(동국대 國際關係學科 敎授)

    이홍종(釜慶大 國際地域學部 敎授)

    이환성(國土硏究院 責任硏究員)

    이희옥(한신대 國際學과 敎授)

    임정덕(부산대 經濟學科 敎授)

    임혁백(고려대 政外科 敎授)

    張夏成(高麗大 經營學科 敎授)

    전병유(韓國勞動硏究院 硏究委員)

    전상인(한림대 社會學科 敎授)

    전재호(경남대 極東問題硏究所 客員硏究委員)

    정낙근(安民政策포럼 事務總長)

    井星旗(경남대 經濟學科 敎授)

    정순오(한남대 社會科學部 敎授)

    鄭在浩(서울대 外交學課 敎授)

    조명래(단국대 社會科學部 敎授)

    조영철(國會 事務處 豫算分析館)

    조현연(성공회대 社會文化硏究所 硏究員)

    曺喜昖(성공회대 社會學科 敎授)

    주상영(세종대 貿易學科 敎授)

    최순(동아대 廣告學部 敎授)

    최태룡(경상대 社會學科 敎授)

    한남제(경북대 社會學科 敎授)

    한준상(연세대 敎育學科 敎授)

    홍덕기(전남대 經濟學科 敎授)

    황태연(동국대 政外科 敎授)

    黃筆洪(단국대 人文科學部 敎授)

    그 外 匿名 答辯者 2 名 包含 合計 110名

    政治 國際 分野의 大衆的 知識人들에 對한 同僚 知識人 集團의 評價에서는 먼저 應答者들의 態度와 視角에서 몇가지 特徵이 나타났다.

    첫째 特徵은 大部分의 評價가 應答者 自身의 ‘政治的 性向’李 評價에 影響을 끼쳤다는 點이다. 同一한 評價對象者라 하더라도 應答者가 相對的으로 左派라면 一般的으로 保守的 性向의 人士에게 더 保守的인 評價, 卽 正統保守 或은 極右라는 評價를 내리고, 進步性向의 人士에게는 덜 左派的인 評價 卽 進步的 自由主義 或은 急進的 民主主義라는 評價를 내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應答者가 相對的으로 右派라면 一般的으로 保守的 人士에게 덜 保守的인 評價, 卽 保守的 自由主義 或은 正統保守主義라는 評價를 내리고, 進步的 人士에게는 더 左派的인 評價, 卽 正統左派 或은 新左派, 急進的 民主主義라는 레벨을 붙였다.

    特히 흥미로운 것은 應答者의 햇볕政策에 對한 支持 與否에 對해 同一한 評價對象者의 評價가 異例的으로 相衝한다는 點이다. 卽 햇볕政策 反對性向의 應答者들은 親(親)햇볕政策 人士에게 더 左派에 기운 評價를 내리는 反面, 햇볕政策 支持性向의 應答者들은 親햇볕政策 人士에게 덜 左派的인 評價를, 햇볕政策 批判人士에게는 더 右派的인 評價를 내렸다.

    둘째 特徵은 應答者의 政府에 對한 親疏(親疎) 與否에 따라 答辯에 差異가 있다는 點이다. 親政府的 性向의 應答者들은 政府批判的 人士들에 對해 그가 左派 立場이면 極左派로, 右派 立場이면 極右, 守舊派로 評價했다. 또한 親政府的 人士들에 對해서는 過去 保守的이었던 親政府 人事를 덜 保守的으로 評價한 反面 過去 左派 性向의 親政府 人事를 덜 左派的으로 評價했다. 反對로 左派立場에서 反政府的 性向을 갖고 있는 應答者들은 過去 保守的이었던 親政府 人事를 더 保守的으로 評價하고 過去 左派性向의 親政府 人事에 對해 더 保守的으로 評價했다.

    또한 右派 立場에서 反政府的 性向을 갖고 있는 應答者들은 過去 保守的이었던 親政府 人事에 對해 더 左派的으로 解釋하고 過去 進步的 性向의 親政府 人事에 對해서는 더 左派的으로 解釋했다.

    結局 應答者의 政治的 性向과 現政府에 對한 親疏 與否에 따라 應答者의 立場을 正當化하기 위해 評價對象者의 이념적 地形을 各各 더 保守的으로, 더 左派的으로, 덜 保守的으로, 덜 左派的으로 評價하는 ‘政治的 恣意性’을 共通的으로 보여줬다고 볼 수 있다. 이는 結局 現在 韓國의 이념적 地形이 本來的 意味의 西區 左右 이데올로기의 스펙트럼에 따라 客觀的으로 評價되는 것이 아니라, 如前히 自身의 政治性向에 依해 多分히 恣意的으로 解釋되고 있음을 斟酌케 하는 것이다.

    韓國政治의 이념적 混亂

    評價對象이 된 知識人의 自體 特性 가운데는 現實政治와의 關聯性이 評價에 크게 作用했음을 確認할 수 있었다. 例를 들면 過去 5共和國이나 6共和國에 參與한 學者들에 對해 保守的인 性格을 强調하는 評價가, 文民政府나 김대중 政府에 參與한 知識人에 對해서는 改良的 自由主義 或은 急進的 民主主義라는 等의 比較的 改革的인 評價가 主流를 이루었다.

    이와 함께 知識人의 北韓問題에 對한 見解 亦是 重要한 評價基準으로 作用했다. 右翼이나 保守性의 가장 重要한 理由로 北韓에 對한 批判的 立場과 現 政府의 統一政策에 對한 批判的 視角을 드는 境遇가 많았다. 또한 北에 對한 宥和的 態度, 現 政府 統一政策에 對한 肯定的 視角 等이 改良的 或은 進步的이라는 修飾語를 붙이는 根據로 提示됐다. 設問視 例로 提示된 理念의 配列은 傳統的인 槪念의 座-愚를 基本 軸으로 하였음에도 우리 社會에서 北韓問題는 이를 뛰어넘는 이념적 龜裂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分析된다.

    全體的으로 中間 이념적 性格에 對한 規定에 相當한 差異가 있었다. 中間的 立場에 對해 改良的 自由主義, 進步的 自由主義, 急進的 自由主義 等 다양한 表現이 使用되고 있는데 그 含意는 應答者마다 조금씩 달랐다. 어떤 境遇에는 左派的 性向과의 親和性을 指摘하기도 하고, 어떤 境遇에는 左派的인 傾向과의 差別性이 强調됐다. 特히 많은 사람들이 ‘自由主義’라는 槪念을 使用했지만 이에 對한 뚜렷한 合意는 아직 存在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中間的 立場이 本來 분명한 性格 規定을 하기 어렵다는 理由도 있지만, 그 동안 韓國 社會에서 現實政治와 北韓 問題에 依해 保守와 進步가 規定되다 보니 中間的 立場이 자리잡기 어려웠던 理由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評價對象者의 이념적 地形 亦是 相當數가 立場의 變化가 두드러지고 無定見 或은 思想的 軌跡의 缺如 等 客觀的으로 評價하기에는 致命的인 弱點을 갖고 있는 것도 現代 韓國 理念地形의 現住所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現 政府의 이념적 地形에 對해서도 保守派는 ‘進步陣營’ 或은 ‘左派的 立場’으로 批判했고, 逆으로 左派陣營은 ‘變節한 進步陣營’ 或은 ‘保守的, 右派的 立場’으로 批判했다. 이는 韓國政治에서 김대중 政府의 總論的 理念地形 亦是 아직은 明確한 이념적 色彩로 斷定짓기 힘들다는 事實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辯護士·참여연대 事務處長): 進步的 自由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박원순 辯護士는 참여연대의 成長과 함께 大衆的 影響力을 가진 人物로서 知識人들 사이에서도 認知度가 매우 높았다. 折半의 應答者들이 그의 思想的 性向을 ‘進步的 自由主義’로 評價했으며, 나머지 應答者들의 評價는 ‘改良的 自由主義’와 ‘急進的 民主主義’로 나뉘어졌다. 注目할 만한 事實은 大部分의 應答者들이 그를 오늘날 韓國社會에서 ‘行動하는 知識人’의 典型으로 看做하고 있다는 點이다.

    한便 참여연대가 提示하는 經濟政策이나 그의 發言 等을 注目하는 이들은 ‘進步的 自由主義’로 評價했다. 自己省察的 批判意識을 强調하면서 市民社會的 進步性을 堅持하고 있지만, 資本主義를 넘어서지 못하고 階級意識이 弱하다는 點에서 自由主義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經濟問題에 關한 限 ‘合理的이고 透明한 經濟’라는 典型的인 中産層 意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批判도 있다. 다만 이러한 評價를 내린 應答者들度 市民運動으로서 참여연대의 現實的 限界에 起因할 뿐, 그의 個人的 性向은 보다 進步的이라고 믿고 있다.

    政治水準을 重視하는 이들은 民主化 履行 以後 市民社會의 成長過程에 그가 主導한 參與連帶가 重要한 役割을 했고, 그의 國家保安法 硏究가 獨步的이라는 點을 들어 그의 路線을 ‘急進的 民主主義’로 評價하고 있다. 그러나 保守的 知識人들은 “社會現實이나 文化 等 社會全般에 對한 理解가 充實하지 않은 運動家”라고 貶毁했다.

    이에 對해 박원순 辯護士는 “進步的 自由主義가 딱 맞는 것 같다. 우리 社會는 左側이 워낙 弱하다. 그래서 조금만 다른 主張을 내놓아도 左翼으로 몰린다. 基本的으로 갖춰져야 할 게임의 룰, 制度, 民主主義, 普遍的 原則이 없다. 그런 土臺가 있어야 비로소 이념적 스펙트럼이 意味를 갖는다”고 말했다. 朴辯護士는 國家保安法 廢止 主張을 例로 들면서 “내가 左翼이라서 그런 主張을 하는 게 아니다. 但只 民主主義의 基本 人權에 반하는 法이라서 廢止를 要求하는 것이다. 하지만 韓國 社會에서는 그런 論理가 설 땅이 좁다”는 意見을 提示했다.

    송복

    (연세대 社會學科 敎授): 正統保守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송복 연세대 敎授에 對해서는 大部分의 應答者들이 ‘正統保守主義’로 評價했다. 그를 ‘保守的 自由主義’라고 評價하는 이들도 그의 學問的 著作이 個人의 自由와 權利의 伸張에 關心을 보여주고 있다는 點을 指摘하는 程度였다.

    그러나 그러한 面貌는 社會學이라는 學問이 相對的으로 自由主義的이라는 點에 起因할 뿐, 個人的인 性向에서 비롯됐다고 보기 어렵다. 大部分의 應答者들은 그가 1970年代 以後 보여준 旺盛한 臺(對)言論活動에서 그의 思想的 傾向을 判斷하고 있다. 한 應答者는 宋敎授에 對해서 “保守主義보다도 頑固한 守舊主義 或은 半民主主義가 오히려 더 적합하다”고 一鍼을 놓고 있다. 宋敎授가 旣得權 勢力의 主張을 露骨的으로 代辯할 뿐만 아니라 地域主義的 性向이 매우 强하다는 意見도 나왔다.

    이에 對해 宋敎授는 “正統保守主義라는 말은 없다. 그냥 保守主義라고 해야 맞다. 正統과 保守를 함께 羅列하는 것은 同語反復이다”고 말했다. 宋敎授는 知識人들이 自身을 保守主義者로 評價한 것에 對해 “歷史와 傳統을 重要하게 생각하다 보니 그런 얘기를 듣는 것 같다”고 答했다. 宋敎授의 말.

    “어느 民族이든 뿌리가 있다. 그것을 바탕 삼아 키워가면서 改革해야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다. 儒敎的으로 말하면 ‘온고이지신’이다. 詩人 金洙暎은 ‘傳統은 아무리 더러운 傳統이라도 좋더라’고 말했다. 歷史主義는 傳統을 基盤으로 해서 피라미드를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改革도 漸進的으로 하는 게 좋다고 본다.”

    송호근

    (서울대 社會學科 敎授): 進步的 自由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송호근 서울대 敎授의 思想的 傾向에 對해서 應答者의 折半 程度가 ‘進步的 自由主義’로 評價했고, 나머지 應答者들度 ‘改良的 自由主義’ 或은 ‘保守的 自由主義’로 分類했다. 그에 對한 評價가 自由主義 範疇 안에서 다양하게 나오는 理由는 그의 다채로운 知的 遍歷, 社會問題에 對한 積極的인 介入, 그리고 精力的인 著述活動 때문이기도 하지만, 自身의 이념적 志向을 直接的으로 드러내지 않는 文體에 起因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를 接한 時點과 깊이에 따라 매우 다르게 評價하는 듯하다.

    그를 ‘進步的 自由主義者’로 보는 이들은 그가 知識人의 自己省察成果 社會的 役割을 强調하고, 個人의 自由에 對한 信念을 堅持하며, 勞動과 福祉問題를 다루고 있는 點에 注目한다. 그러나 折半 以上의 應答者들이 이러한 評價는 그의 指摘遍歷에 對한 대단히 皮相的이고 一面的인 觀察이라고 批判하면서, “그는 根本的으로 엘리트主義者 或은 國家主義者”라고 指摘했다.

    그가 勞動社會學者이면서도 勞動者에 對한 愛情이나 勞動運動에 對한 理解가 깊지 않은 것 같다는 評價도 있었다. 더 나아가서 財閥과 國家를 中心으로 하는 體制의 利益과 統治能力에 傾倒돼 있다는 指摘도 있었다. 學者들 가운데는 特히 “宋敎授가 最近 醫藥分業 事態에 對한 新聞칼럼에서 貧弱한 論理와 經驗的 根據를 提示하면서 醫師集團을 斗頓했다”면서 “때와 爭點에 따라 政治的 立場이 甚하게 뒤바뀌는 等 正體를 알 수 없다”고 酷評하는 이도 있었다.

    이에 對해 宋敎授 自身은 “左派的 性向은 없고, 社會民主主義的 志向을 갖고 있다. 社會民主主義와 進步的 自由主義의 中間 程度로 볼 수 있다. 爭點에 따라서는 市場的 理念과 親和力을 갖고 있으며, 市場의 弊端을 統制해야 한다는 데 더 많은 力點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宋敎授는 進步的 自由主義에 對해 “自由主義를 基本的인 出發點으로 하면서도 市場의 限界를 國家와 政治의 介入으로 克服해 나가려는 理念’이라고 定義했다.

    신용하

    (서울대 社會學科 敎授): 保守的 自由主義 또는 民族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신용하 서울대 敎授의 思想的 傾向에 對해서 折半 以上의 應答者들이 ‘保守的 自由主義’ 或은 ‘正統保守主義’로 評價했으나, 이들을 包含, 大多數의 應答者들이 ‘民族主義者’에 同意했다.

    그를 ‘民族主義者’로 보는 이들은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을 程度의 깊이있는 學問的 省察과 他의 追從을 不許하는 硏究業績을 통해 民族的 正體性과 自矜心을 일깨우는 한便 一貫되게 反日路線을 堅持해왔다는 點에서 ‘尊敬받는 急進的 民族主義者’ 或은 ‘强性 民族主義者’로 評價했다. 그러나 그의 民族主義는 主로 日本을 對象으로 하고 있으며, 美國을 包含하는 帝國主義 一般으로 擴張되지 못한다는 點으로 ‘非合理的 或은 二重的 民族主義’라는 評價를 받기도 한다.

    그를 ‘保守的 自由主義者’ 或은 ‘正統保守主義者’로 評價하는 이들은 그 根據로서 “北韓에 對해 非友好的이고, 美國에 對해 二重的이며, 그리고 現在의 政權과 構造改革에 對해 留保的이고 守舊的인 態度를 보여왔다”는 事實을 根據로 들었다. 反面 또 다른 이들은 그가 市民團體의 리더로서 思想的으로는 漸進的 改革을 통한 社會正義 實現을 追求한다는 點을 들어 ‘改良的 自由主義者’로 分類했다.

    이에 對해 申敎授는 “나는 保守的인 사람이 아니다. 나는 中道派이며 開放的 民族主義者라고 생각한다. 保守的 自由主義보다는 若干 改革的인 側面이 있다”고 말했다. 申敎授는 知識人들이 自身을 ‘保守的 自由主義’로 評價한 點에 對해 “내가 平素 男子들이 머리에 물감 들이거나 西洋 흉내를 내는 것에 批判的인 視角을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流通이나 서비스業을 强調하는 것에 反對하고 製造業과 實質的 附加價値를 重視한다. 이런 點들이 젊은 敎授들이 볼 때 舊時代的 色깔로 보였을 수도 있다”고 答했다.

    (연세대 社會學科 敎授): 保守的 自由主義 또는 正統保守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유석춘 延世大 敎授는 旣得權層의 立場을 堅持하는 ‘保守的 自由主義’ 或은 ‘正統保守主義’라는 評價가 많았다. 特히 ‘儒敎資本主義論’의 主張, 市民運動에 對한 批判的 態度, 그리고 地域主義的 性向 等이 그 根據로 提示되었다.

    이에 對해 兪敎授는 “어떻게 評價하든 神經쓰고 싶지 않다. 西歐의 槪念으로 보면 新自由主義가 保守라고 볼 수 있는데, 나는 新自由主義者가 아니다. 나는 傳統的 價値를 重視하고, 그것을 活用해서 韓國社會의 指向點을 찾아야 한다고 主張하는데, 그것을 保守라고 본다면 保守主義者가 맞다. 나는 最近 누구보다도 政府의 政策을 强力히 批判하는 사람이다. 그런 意味에서 改革的이다. 그런데 내가 嶺南 出身이라는 理由로 保守라고 몰아붙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主張에는 決코 同意할 수 없다”고 答했다.



    柳時敏

    (時事評論家): 進步的 自由主義 또는 急進的 民主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유시민氏에 對해서는 ‘進步的 自由主義’ ‘急進的 民主主義’ ‘改良的 自由主義’의 巡으로 다양한 評價가 나왔다. 그 理由는 그가 資本主義의 克服을 志向하는 歷史認識을 가지고 있었던 ‘新左派’에서, 市民運動家로서의 ‘急進的 民主主義者’를 거쳐, 現實問題에 介入하면서 보인 改良主義的 態度에 起因하는 듯하다.

    柳氏는 이에 對해 “나는 ‘自由主義的 左派’ 甚至於 ‘改良主義’라는 指摘에 別로 拒否感이 없다”고 말했다.

    柳氏는 “自由主義的이라는 말은 基本的으로 우리 憲政秩序에 不滿이 없다는 것”이라면서, ‘左派’라는 말에 對해서는 보다 詳細한 說明을 덧붙였다.

    “只今 우리 社會는 憲法이 明示하는 바를 實現하지 못했다. 그것을 積極 追求하는 側面에서 進步的이라는 거다. 이철승氏 같은 兩班들은 우리 憲法을 너무 좁게 解釋하고 있다. 나는 이데올로기的 對立이 아니라 보다 넓은 意味의 憲法的 合意, 卽 人權과 正義 等으로 自由主義를 擴張시켜나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내가 주된 攻擊對象으로 삼는 것은 憲法的 價値에 實際로 半(反)하는 勢力이다. 나는 敎條主義的 左派도 批判하지만 所謂 保守라고 내세우는 사람들 中에도 憲法上 基本原則을 無視하는 發想을 하는 사람들을 批判한다.

    基本的으로 人權·民主主義·平等·福祉 等 憲法이 志向하는 바를 가로막고 있는 慣行과 이데올로기를 攻擊하고 地平을 넓히고자 하는 것이며, 우리의 憲法的 價値를 지키려 한다는 面에서 ‘改良的’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각범

    (한국정보통신대學校 敎授): 保守的 自由主義 또는 改良的 自由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이각범 한국정보통신대 敎授는 ‘保守的 自由主義’ ‘改良的 自由主義’ ‘正統保守主義’의 巡으로 다양한 評價가 나왔다. 그 根據로서 “生來的인 保守性向에 體制의 원활한 運營을 위한 社會改革에 關心을 기울이기 때문”이라는 指摘이 나왔다.

    李敎授는 “이제 進步-保守의 槪念이 크게 바뀌어야 한다”면서 “世界가 變化하고 있는 方向으로 우리가 빨리 變할 수 있도록 바꾸는 게 進步여야 하고 그 面에서 나는 進步”라고 말했다. 李敎授는 그러나 “世界를 資本主義 市場經濟 視角에서 보는 게 傳統的 保守 槪念이라면 나는 ‘保守’이고 이 點에서 改良的 自由主義者”라고 덧붙였다.

    李敎授는 “80年代式 進步槪念을 갖고 있는 學生들이 보기에 내가 極保守로 비칠 수도 있을 것”이라면서 “그러나 世界가 나아가는 方向에 우리가 適應하고 그 속에서 正義 等 價値를 追求하지 않으면 어떠한 進步도 不可能하다”고 强調했다.

    李敎授에 따르면 ‘世界化’는 누구의 主張이나 政策이 아니라 必然的 過程이고 現在의 方向 그 自體이며 이를 爲해 必要한 게 우리社會의 正常化·透明化·合理化라는 것이다. 이같은 自身의 觀點을 ‘保守’라고 본다면 補修일 수도 있겠지만 只今은 開港을 해야 하느냐 마느냐로 날을 지샐 수 있는 때가 아니며, 於此彼 하지 않을 수 없는 ‘第2의 開港’(世界化)을 어떻게 잘 할 것인가가 論議의 中心이 돼야 한다고 主張했다.

    조혜정

    (연세대 社會學科 敎授): 急進的 民主主義 또는 改良的 自由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조혜정 延世大 敎授 만큼 다양한 評價를 받은 知識人도 드물 것 같다. 조敎授의 思想的 傾向에 對해서는 ‘急進的 民主主義’ ‘進步的 自由主義’ ‘改良的 自由主義’로 評價하는 應答者들이 비슷하게 나타났고, 그 外에도 ‘極端的 女權主義者’ 或은 ‘(文化的)自由主義者’라는 評價가 나왔다. 이렇듯 여러 가지 評價가 나온 理由는 그의 女性과 文化에 對한 指摘(知的) 關心과 大衆的 實踐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조敎授의 主張에 共感하는 이들은 그를 ‘急進的 民主主義者’ 或은 ‘進步的 自由主義者’로 評價하는 데 인색하지 않다. 이들은 女性과 男性間의 性差別的 對立構圖를 廢止하고 進步的 平等을 追求하는 한便, 그의 著書인 ‘學校를 拒否하는 아이, 아이를 拒否하는 社會’에서 알 수 있듯이 巨大談論에서 疏外된 爭點들을 捕捉해 個人의 自由를 保護하고 伸張하려는 그의 實踐的 信念에 支持를 표한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進步性에도 不拘하고 經濟的 不平等에 對한 模糊한 態度와 中産層的 文化主義로 인해 相當數의 應答者들이 그를 歷史意識과 社會意識이 缺如된 ‘앞뒤가 엇갈리는’ 體制內的 改良主義者로 規定했다.

    조혜정 敎授는 知識人들의 評價結果에 對해 ‘答하지 않겠다’는 意見을 傳해왔다.

    (성공회대 社會學科 敎授): 新左派 또는 急進的 民主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조희연 성공회대 敎授에 對한 評價는 ‘新左派’ 或은 ‘急進的 民主主義’로 비슷하게 나뉜다. 大部分의 應答者들은 그가 進步陣營을 代表하는 젊은 社會學者이자 韓國 市民運動을 主導하는 社會運動家라는 事實에 同意한다. 그 亦是 박원순 辯護士와 더불어 代表的인 ‘實踐的 知識人’으로 評價된다.

    그를 ‘新左派’로 보는 이들은 그가 新社會運動을 强調하고 參與連帶의 創立指導者로서 市民運動을 通한 社會改革을 追求해왔다는 點을 根據로 든다. 知識人들은 그가 提示하는 이념적 路線보다도 直接 몸으로 보여준 社會的 實踐을 보면서 그를 ‘新左派’로 認識하고 있는 듯하다.

    그를 ‘急進的 民主主義者’로 分類하는 이들은 그가 歪曲된 保守的 市民社會를 克服하고 이를 바탕으로 政治改革을 推動해 完全한 民主主義를 追求하려는 데 關心을 둔다는 點에 注目하면서도, 同時에 그의 內面的 性向은 左派에 가깝다는 點을 한결같이 指摘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를 선뜻 ‘左派’로 規定하지 못하는 理由는 그가 學術運動과 社會運動을 통해 보여준 實踐的 柔軟性과 現實適應感覺 때문인 듯하다.

    그는 自身의 생각을 學問的으로나 實踐的으로 모나지 않게 드러내는 데 익숙하다. 그 結果 더 急進的인 이들은 그를 ‘折衷主義者’ 或은 ‘現實妥協主義子’로, 保守的인 이들은 그가 重要한 問題를 설익은 事變으로 비껴간다고 批判한다.

    이에 對한 조희연 敎授의 말.

    “正統左派는 勞動運動을 强調하지만, 나는 市民社會의 急進的 介入을 重視한다. 87年 以後 民主化가 進行되면서 改良的 이슈에 對한 革命的 接近이 必要해졌다. 現實的 矛盾이 變化하고 있기 때문에 接近法도 달라져야 한다. ‘新左派’가 左派的 視角을 堅持하면서 社會的 變化에 對應해 積極的으로 實踐하는 것이라고 보았을 때 나는 그 部類에 屬한다.”

    조敎授는 韓國 社會에서의 市民運動에 對해 “進步를 위해서는 다양한 後方 陣地가 必要하다고 본다”고 答했다.

    한상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院長): 改良的 自由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한상진 한국정신문화연구원長은 折半 程度의 應答者들에 依해 ‘改良的 自由主義者’로 評價됐다. 나머지 應答은 ‘保守的 自由主義’와 ‘進步的 自由主義’로 비슷하게 나뉘어진다. 改良的 自由主義 或은 進步的 自由主義로 評하는 이들은 그가 知識人의 自己省察的 批判能力에 依存하는 市民社會와 社會改良을 통한 個人의 自由 擴大에 關心을 가진다는 點에 注目한다.

    그러나 그가 最近 보여준 친(親)정부적 態度 때문에 知識人으로서의 自己批判 能力이 痲痹되지 않았는가를 憂慮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保守的 自由主義’로 評價하는 이들은 그의 ‘衆民론’李 民衆에 對한 思辨的 搜査일 뿐이며 그가 그다지 進步的인 知識人이 아니라고 보았다. 또한 最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院長으로서 보여준 行態를 들어 “自由主義가 重視하는 節次的 民主主義마저 放棄하고 있다”고 憂慮했다. 더 批判的인 이들은 그가 ‘겉만 進步的인’ 人物이라고 貶했다.

    이에 對해 한院長은 먼저 分類方式에 異議를 提起했다.

    “너무 쉽게 ‘딱紙’를 붙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知識人들의 이념적 地圖를 그리겠다는 試圖는 나름대로 意味가 있겠지만 方法論에 있어서는 좀 더 많은 討論이 必要하다고 본다. ‘改良的 自由主義’라는 用語가 正確한 것인지 疑問이다.”

    한院長은 自身의 이념적 地形에 對해 “내가 主張한 ‘衆民理論’은 對立的 모델보다는 廣範圍한 社會連帶를 통한 問題解決을 强調하고 있다. 그런 意味에서 나는 ‘改革的 中道路線’이라고 부르고 싶다. 나는 自由主義에 反對하지 않지만, 自由主義 理念으로 問題를 풀어가는 것에 同意하지 않는다”고 答했다.

    한완상

    (上肢帶 總長): 進步的 自由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한완상 上肢帶 總長은 大部分의 應答者들에 依해 ‘進步的 自由主義’로 評價됐지만, 一部는 ‘改良的 自由主義’로 評價했다. 또한 學問的 力量과 實踐的 知識人으로서의 力量을 두루 갖춘 人物이라는 點에 大部分 同意했다.

    ‘進步的 自由主義’로 評價하는 이들은 그가 1970年代 提起한 ‘民衆社會론’, 民主化 鬪爭과 解職敎授 履歷, 그리고 統一副總理 時節 보여준 進步的 對北政策 等을 그 根據로 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敬虔한 基督敎 牧會者이자 人間主義 復活을 부르짖는 모습도 그의 進步的 性向을 더 浮刻시키는 듯하다.

    그러나 그의 基本的인 性向은 自由主義日 뿐이며, 그의 進步性은 保守的 紙背集團에 依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評價도 있었다. 다만 韓國의 保守的인 政治體制 안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몇 안되는 進步人士 中 하나라는 事實 때문에 그러한 批判은 枝葉的인 것으로 看做되는 듯하다.

    그를 ‘改良的 自由主義’로 보는 이들은 그가 統一과 南北關係에 對해 進步的 視角을 가지고 있더라도 資本主義 體制에 對한 批判的 發言을 한다거나 勞動階級을 政治的으로 支持한 적이 없다는 點을 들어 그의 進步性의 限界를 指摘한다. 一部 保守的인 知識人들은 講演이나 新聞 칼럼을 根據로 그를 ‘新左派’나 ‘急進的 自由主義者’로 分類했다.

    이에 對해 한總長은 “大體로 옳은 指摘이다. 하지만 左派도 右派도 나를 進步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福祉的 自由主義者’나 ‘改革的 自由主義者’가 더 正確한 表現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總長은 自身이 社會學을 專攻한 知識人들로부터 ‘進步的 自由主義者’로 評價받은 것에 對해 “冷戰體制의 解體를 强力히 主張해왔고, 個人의 能力을 尊重하는 市場의 論理를 認定하되 社會的 弱者에 對해서는 政府와 企業이 配慮해야 한다는 ‘民衆社會론’을 力說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答했다.

    (社會科學院長·고려대 碩座敎授): 가장 美國 的인 保守的 自由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김경원 社會科學院長에 對한 評價는 ‘保守的’ ‘美國的’이라는 말로 要約할 수 있다. 그를 保守的 自由主義라고 答한 比率이 가장 높았고 다른 表現을 使用한 境遇도 正統保守 等의 保守的 特性을 强調한 것이 大部分이다. 一部에서는 ‘改良的’ ‘合理的’이라는 評價를 내렸는데, 發表한 글에서 比較的 合理的인 方式으로 自身의 主張을 폈기 때문으로 理解할 수 있다. 그리고 그를 ‘保守主義’라고 指摘하면서 “現實的이다” “신중한 對北觀을 가졌다”는 等의 肯定的 意味를 附與한 境遇도 있지만, 過去 5共和國에 參與하고, 自由民主主義에 對한 制限을 認定했다는 理由를 그의 保守主義的 特性과 連結시키는 否定的 評價도 적지 않았다.

    또한 ‘美國的’이라는 評價는 다른 評價對象者의 境遇 거의 찾아볼 수 없는 答辯이었다. ‘美國的’이라는 理由로 敎科書的 自由民主主義를 信奉한다는 것을 든 境遇도 있으나 이보다는 國際秩序의 變化를 美國의 位相과 役割을 中心으로 把握하고 있다는 點을 指摘한 境遇가 大部分이었다. 美國 中心의 國際秩序를 받아들이고, 한-美 關係를 外交의 基本 軸으로 設定하는 立場은 다른 國際政治學者들에게서도 어렵잖게 發見할 수 있기 때문에, 그에게만 唯獨 ‘美國的’이라는 評價가 附與되고 있는 것은 매우 興味있는 反應이다. 이는 아마 그가 위의 立場을 다른 學者들보다 분명하게 提示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가 “現在 美國 中心의 國際秩序가 不平等한 側面은 있을지 몰라도 이는 客觀的인 現實로 認定될 수밖에 없다”고 主張하거나, 아셈(ASEM)과 같은 유럽과 아시아의 協力機構에 對해서도 美國과의 關係를 理由로 신중함을 보이는 態度 等이 그 例일 것이다.

    金院長은 이와 같은 評價에 對해 “나에 對한 다른 學者들의 評價에 이러쿵 저러쿵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前提로 “다른 나라에서도 美國의 比重을 認定하는 것은 一般的 現象이며 그 自體가 客觀的 評價인데 이를 두고 保守라고 하는 것은 理解가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스스로는 이데올로기的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젊은 時節 프랑스의 레이몽 아롱에 思想的으로 心醉했던 金院長은 “基本的으로 ‘懷疑主義’가 나의 學問的 出發點”이라고 말했다. 敎條主義에 反對하며 恒常 自身이 뭘 모른다는 疑心을 갖는다는 얘기다. “난 뭔가 剛한 信念을 가진 사람을 보면 부럽다”고 金院長은 덧붙였다.

    그는 代身 ‘歷史社會學的 方法論’을 取하고 있다고 스스로 밝혔다. 歷史的 社會的 資料를 土臺로 있는, 그대로의 變化過程을 把握하고, 있는 그대로 整理해보자는 것이다.

    김세균

    (서울大 政治學과 敎授): 正統左派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應答者의 多數는 金世均 서울大 敎授의 이념적 地形을 ‘正統左派’로 分類했다. 資本主義의 矛盾을 批判하고 勞動階級의 立場을 固守하며 부르주아 民主主義가 아닌 프롤레타리아 民主主義와 社會主義的 變化를 主張한다는 點이 그 根據로 提示됐다. 資本主義 立場과 勞動 資本主義를 變革하고 勞動階級이 利益을 固守해야 한다는 金敎授를 韓國 政治學者들은 正統左派로 分類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金敎授에 對해 ‘社會民主主義的 傾向을 가진 新左派’ 或은 ‘進步的 自由主義’ ‘急進的 民主主義’라는 立場과 이미 낡은 것으로 判明된 마르크시즘에 갇혀 있다는 點에서 ‘舊極左派’ 或은 ‘民衆中心의 極左派’라는 評價도 있었다. 一部 應答者는 그를 가리켜 “낡은 것을 뛰어넘는 부지런함과 才能이 缺如돼 있다”고 酷評하기도 했다.

    이렇게 엇갈리는 評價는 그가 ‘國立서울대학교’의 政治學과 敎授이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取하고 있는 獨特한 現實的 基盤에 起因한 것으로 보인다. 卽 가장 安定的인 서울大 敎授라는 그의 制度圈內 基盤이 ‘사민주의的 新左派’ 라는 評價를 可能케 한 反面, 勞動階級 中心의 마르크스레닌주의에 對한 그의 一貫된 主張은 그를 “時代變化에 柔軟하지 못한 舊時代的 極左派”로 分類하게 만든 것이다.

    金敎授 自身은 이에 “굳이 區分하자면 나는 ‘正統左派’와 ‘急進的 民主主義’의 中間쯤”이라고 말했다. 古典的 마르크스주의의 問題提起를 受容하면서도 우리 社會에서 提起되는 많은 現實的 問題解決에도 關心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金敎授는 ‘改革’과 關聯해서도 自身은 우리社會의 變化를 이끌어갈 수 있는 進步的 改革을 學問的으로 追求하는 立場이라고 밝혔다.

    나종일

    (경희대 政治外交學科 敎授): 保守的 自由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나종일 경희대 敎授에 對해 가장 많은 答辯은 ‘保守的 自由主義’로 나타났다. 흥미로운 것은 韓國 政治學者들이 羅敎授의 理念을 評價하는 데 김대중 政府에 參與한 事實을 가장 많이 考慮하고 있다는 點이다. 平素 그의 思想的 傾向은 保守的 國際政治觀에 익숙한 것이었는데 오랫동안 김대중 大統領의 政治的 助言者였고 政權 出帆 以後에는 大統領職 引受委員會 行政室長과 國家情報院 次長을 지내면서 對北 햇볕政策의 支持者로 刻印됐던 點이 ‘保守的 自由主義’라는 評價를 내리게 한 것으로 解釋된다.

    結局 羅敎授의 이념적 地形은 思想的 스펙트럼의 特定 部分을 차지한다기보다 國民의 政府에 깊숙이 參與한 知識人으로 評價된 셈이고, 바로 이런 點에서 保守的 自由主義 外에도 그에게 改良的 自由主義, 進步的 自由主義, 中道 右派라는 評價가 나온 것이다. 또한 羅敎授에 對해 ‘急進的 民主主義’라는 評價와 “이념적 色깔 自體가 不分明하다”는 評價를 내리고 있는 것 亦是 같은 脈絡으로 볼 수 있다.

    그 밖의 흥미로운 意見으로는 保守的 傾向과 地域主義的 性向이 婚材한다는 點에서 ‘權威的 保守主義’라는 評價가 있었고, ‘民主的 自由主義’라는 特異한 分析도 있었다. 또한 羅敎授에 對해 ‘正統保守主義’라는 少數意見도 提起됐는데 이는 아마도 햇볕政策을 支持하지만 羅敎授의 이미지가 保守的 位置에 親熟한 國精院 次長으로 認識되고 있는 데서 起因한 것으로 보인다.

    羅敎授 自身은 이에 對해 “나는 自由主義者(Liberalist)로서 ‘個人의 自由’보다는 ‘社會正義(Social Justice)’에 더 關心을 둬왔다”고 말했다. 그런 點에서 保守的 自由主義 乃至 新自由主義와 다르다는 것이다. 個人의 創意性(initiative)을 重視한다는 點에서는 古典的 自由主義者로 볼 수도 있지만 個人의 能力이 모자라는 部分은 福祉 等으로 커버해야 한다는 思考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羅敎授는 自身을 굳이 말하자면 ‘進步的 自由主義者’라고 했다.

    문정인

    (연세대 政外科 敎授): 改良的 自由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문정인 연세대 敎授에 對해서는 ‘改良的 自由主義’라는 評價가 가장 많았다. 그에 對한 評價는 主로 햇볕政策을 積極 支持하고 對北問題에서 比較的 合理的인 接近을 하고 있으며 冷戰的 南北關係의 變化를 믿고 있다는 點에 根據했다.

    同一하게 햇볕政策의 權威者인 이종석 博士가 ‘進步的 自由主義’로 評價되는 反面, 문정인 敎授가 ‘改良的 自由主義’로 評價된 것은 過去 그의 國際政治的 解釋과 接近이 多少 保守 傾向을 갖고 있었다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過去 그의 保守的 國際政治管을 記憶하고 있는 政治學者들은 少數意見으로 ‘保守的 自由主義’라고 評價하고, 그를 最近 햇볕政策의 支持者로 認識하고 있는 保守 性向의 政治學者들은 ‘進步的 自由主義’라고 評했다.

    文敎授는 自身을 가리켜 ‘改良的 自由主義’라는 評價에 對해 “改良的이란 말은 英語에는 없는 表現이며 굳이 말하자면 ‘改革的(reformed)’이라고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卽 自身은 理想主義的인 ‘그냥 自由主義’와 區別된다는 것이다. 對北問題와 關聯, 그는 “過去에는 나도 保守的이었으나 南北關係에는 自由主義的 接近이 必要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文敎授는 “政治思想 一般에서 볼 때 나를 保守라 볼 수 있으나 韓國籍 狀況에서 旣得權보다는 變化를 追求한다는 側面에서 自由主義的 性向이 剛하다”고 說明했다. 文敎授는 “그러나 나는 최장집 敎授나 임혁백 敎授에게서 언뜻언뜻 보이는 사민主義까지는 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숙명여대 政外科敎授): 保守的 自由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박재창 숙명여대敎授는 基本的으로 ‘保守的 自由主義’라는 評價를 받았지만 ‘保守的’이라는 評價는 現實政治에 對한 發言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專攻, 學問的 方向과 關聯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議會民主主義를 專攻했고 制度, 節次 等을 重視한다. 이러한 그의 性向은 한便에서는 安定을 强調하고, 或은 旣得權을 擁護하는 ‘保守主義’로 評價되지만 한便으로 議會民主主義가 많은 問題點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自由主義的 性向이 剛한 것으로 評價된다.

    朴敎授 自身도 이와 關聯, “이념적 性向으로 본다면 나는 進步的 自由主義에 가깝다”고 말했다.

    다만 그間 關心을 두고 얘기해온 게 議會民主主義와 制度 節次 等이다 보니까 ‘保守的 自由主義’ 소리를 듣는 模樣이라는 것이다.

    朴敎授는 實際 經實聯 初期 活動에 積極 參與했고, 環境團體와 公選協 等 市民運動에도 많은 關心을 보여왔다. 革命을 외치는 左派와는 距離를 두었지만 疏外된 사람들의 問題, 社會的 價値에도 큰 意味를 두고 있다는 얘기다.

    朴敎授는 “政治的으로는 내가 議會主義 多元主義를 重視하는 自由主義者인 게 맞지만 經濟的으로는 自由主義나 新自由主義에 反對하는 進步的 自由主義라고 하는 것이 더 正確한 表現”이라고 말했다. 朴敎授는 “나는 적어도 經濟的으로 絶對 保守主義가 아니며 ‘責任있는 進步主義’로 살고 싶다”고 거듭 强調했다.

    西陣營

    (고려대 政外科 敎授): 改良的 自由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西陣營 高麗大 敎授에 對해서는 ‘改良的 自由主義’라는 評價가 많았다. 于先 그의 學問的인 傾向도 旣存 保守的인 部門에서 重視했던 것보다는 過去의 視角에서 漏落된 새로운 領域을 찾아간다는 意味에서 ‘自由主義的’ ‘改良的’이라는 評價를 받았다. 그러나 이와 함께 그가 文民政府의 改革을 支持하고 한때 參與했던 것을 根據로 그에게 改良的 自由主義라는 評價를 내린 이도 많았다.

    徐敎授는 이에 對해 “내 스스로는 ‘改革自由主義’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고 말했다. ‘改良的 自由主義’는 左派的 性向에 선 사람들이 일정한 部類를 自己들과 區別짓기 위해 쓰는 用語에 不過하다는 것이다. 徐敎授는 “그러나 改良自由主義든 改革自由主義든 旣存 保守가 重視하던 特定 領域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課題와 領域을 찾아나간다는 點을 特徵으로 한다”고 덧붙였다.

    손호철

    (서강대 政外科 敎授·縣 美國 UCLA 交換敎授): 新左派와 急進的 民主主義의 同居.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손호철 서강대 敎授는 그동안 左派的 見解를 剛하게 代辯해온 代表的 知識人이다. 따라서 그를 ‘左派’라고 評價하는 이가 많은 것은 當然하다. 그를 ‘正統左派’라고 評價한 境遇도 있었지만 大部分은 新左派的 傾向이 强하다는 點을 指摘하며 ‘舊左派’와 區別하는 境遇가 大部分이었다. 特히 左派的 視角을 韓國畫하려는 그의 努力에 對한 肯定的인 評價가 있었다.

    그러나 그에 對한 應答 中에는 그의 이념적 性向을 ‘急進的 民主主義’ ‘進步的 自由主義’ 等으로 規定하며 左派와는 區別하려는 應答도 적지 않았다. 少數이기는 하지만 그를 ‘改良的 自由主義’ 甚至於 ‘穩健民主主義’라고 分類한 應答도 나온 것은 意外다. 이는 그의 見解가 社會로 傳達되는 通路와 관계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應答者는 손敎授에 對해 “매우 부지런한 學者”라고 評했는데 그는 左派 傾向이 剛한 媒體의 發刊에 直接 參與하고 이들 媒體를 통해 自身의 意見을 밝히기도 하지만, 同時에 主要 言論 媒體를 통해 부지런히 政治狀況 等 現實的인 問題에 對한 見解를 밝혀왔다. 따라서 學者들은 어느 媒體를 통해 손敎授를 接하느냐에 따라 다른 判斷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例를 들면 現 政府에 對한 그의 評價도 學術誌를 통해 傳達될 境遇에는 現政府의 新自由主義的 性格, 現 政治體制의 保守性에 對한 批判이 浮刻되며 그에게서 左派的 性向을 쉽게 發見할 수 있다. 그러나 一般 言論 媒體를 통해 孫 敎授를 接했을 境遇에는 比較的 溫乾한 知識人으로 判斷했을 可能性이 높다. 勿論 그가 現實 問題에 對해 發言하는 境遇 특정한 理念을 剛하게 내세우지 않고 比較的 柔軟한 姿勢를 取하고 있는 點도 이와 같은 評價가 나온 理由라고 할 수 있다.

    손敎授 自身은 “搾取와 (地域的·成績)差別과 排除 等을 批判하고 人間的 價値를 追求하려는 것은 基本的으로 모두 左派”라면서 “그런 面에서 나는 左派的 性向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손敎授는 “그러나 나는 이데올로기에 따라 硬直되지 않고 新左派든 舊左派든 肯定的인 面을 綜合하고자 애써왔다”고 말했다. 나쁘게 말하면 ‘折衷主義’로 비칠 수도 있지만 다양한 角度의 長點들을 韓國的 狀況에 綜合해보고자 努力해왔다는 얘기다. 그는 “勿論 그런 努力은 아직 完成에 이르지 못했으며 때로는 相互矛盾되고 서로 부딪치는 緊張感을 느끼고 있다”고 告白했다.

    안병준

    (연세대 政外科 敎授): 保守的 自由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안병준 연세대 敎授에 對해서는 ‘保守的 自由主義’라는 評價가 多數였다. 그가 正統 國際政治 理論에 立脚해 있고 對外共助와 美國을 重視하고 旣存 慣行과 틀을 强調한다는 點에서 一旦은 保守主義的 性向에 기울어 있는 것으로 評價했다. 그러나 그가 保守主義 國際政治管을 固守하지만 西洋의 合理的 傳統을 繼承하고 있고 햇볕政策에 對해서도 總論的으로는 支持하고 있다는 點에서 韓國에서 ‘正統保守主義’로 看做되기보다는 ‘保守的 自由主義’로 分析된 듯하다. 勿論 少數지만 相對的으로 進步的인 政治學者들은 그를 ‘正統保守主義’ 或은 “冷戰論理와 南北對決을 堅持한다는 點에서 極右 直前의 初(超)保守主義者”로 應答했다.

    安敎授는 이에 對해 “保守的 自由主義니 뭐니 하는데 基本的으로 關心이 없다”면서 “나는 樂觀論도 悲觀論도 아닌 現實主義者”라고 말했다. 주어진 現實속에서 適切한 解決策을 찾는 것을 重視하고 있다는 것이다. 安敎授는 “報酬나 進步는 이데올로기에 不過하다”면서 “(그동안 關心을 가져온) 國際關係는 이데올로기的으로 接近키 어려운 것”이라고 덧붙였다.

    (세종재단理事長): 改良的 自由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아태평화재단 理事長으로 在職하다가 最近에 세종재단으로 자리를 옮긴 오기평 前 서강대 敎授에게는 ‘改良的 自由主義’라는 評價가 많았다. 勿論 그를 ‘保守的 自由主義’로 應答한 政治學者도 적지 않았다. 이 둘의 評價 모두 過去 서강대 敎授 時節 國際政治와 關聯된 그의 硏究와 主張이 保守的 國際政治觀에 立脚했고, 國民의 政府 들어서는 아태평화재단 理事長으로 對北 햇볕政策을 政策的으로 支持했다는 點을 勘案한 것으로 보인다. 特異한 意見으로는 “對北關係 改善을 平和的으로 이끄는 데 寄與할 수 있는 理論的, 政策的 資源을 갖고 있다”는 點을 들어 ‘合理的 自由主義’로 評價한 것과 政治的 新潮보다 學者의 信條를 强調하는 ‘進步的 自由主義者’라는 評價였다.

    吳理事長 自身은 “過去 統一論議 等 憊眩質的 論意를 別로 하지 않았다는 側面에서 保守로 비쳤는지 모르지만 나는 決코 保守主義者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吳理事長은 “報酬는 이미 定立돼 있고 우리 社會에 두터운 基盤을 갖고 있다”면서 “따라서 우리 社會에서는 進步의 論理가 더 必要하며 나는 이를 開發하기 위해 努力해왔다”고 말했다. 吳理事長은 “그런 意味에서 ‘改良的 自由主義’ 乃至 ‘合理的 自由主義’라는 評價는 比較的 正確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상우

    (서강대 政外科 敎授): 正統保守

    이상우 서강대 敎授에 對한 壓倒的인 評價는 斷然 ‘正統保守主義’로 나타났다. 다른 사람과 달리 李敎授에 對해 大部分의 政治學者들이 ‘正統保守’라는 一致된 分析을 하고 있다는 點이 눈에 띈다. 그만큼 그의 이데올로기的 色彩가 분명하고 그의 言行 亦是 一貫되고 있다는 것이다.

    對北 穩健政策人 햇볕政策을 一貫되게 反對하고 大韓民國의 正統性을 固守하며 北韓의 威脅에 맞서 國家安保를 主張하는 것을 只今 韓國의 多數 政治學者들은 ‘正統保守’로 評價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少數의 應答者들은 李敎授의 분명한 움직임에 對해 “正統保守의 道를 넘어선 危險한 極右保守 或은 守舊的 保守”라는 評價를 내리기도 했다. 卽 冷戰的 認識에 갇혀 있을 뿐 아니라 國家安保를 내세워 思想의 自由를 認定하지 않는 것은 嚴密한 意味의 正統保守가 아니라는 것이다. 特히 한 應答者는 李敎授에 對해 “過去 獨裁政權 時節 民主化運動에 同調한 前歷이 全혀 없고 한나라당의 保守性도 性에 안 찬다고 酷評하면서 自由民主主義를 威脅하는 極右主義者”라고 酷評하기도 했다.

    그 밖의 少數 意見으로는 正統保守지만 自由民主主義 價値를 堅持한다는 點에서 ‘保守的 自由主義’라는 評價와 “合理的 自由主義와 保守的 自由主義가 緊張關係를 形成하고 있다”는 評價가 있었다. 이들의 評價는 아마도 李敎授의 保守的 價値에 對한 肯定的 同調를 前提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 듯하다.

    이교수 自身은 “自由民主主義를 基本으로 하는 大韓民國이 原則이고 이 原則을 지키려는 나는 分明 正統保守”라고 말했다. 李敎授는 “北韓도 同等한 價値로 認定하자는 進步의 主張은 받아들일 수 없으며 自由民主的 基本秩序를 採擇하고 있는 大韓民國의 絶對性을 나는 一貫되게 固守해왔다”고 덧붙였다.

    李長熙

    (한국외국어대 法學科敎授): 進步的 自由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李長熙 외대敎授에게는 ‘進步的 自由主義’라는 評價가 主를 이루었다. 平素 國家保安法 撤廢와 韓美行政協定(SOFA) 改正 및 南北和解를 積極支持하고 그 貫徹을 위해 市民團體에서 活潑하게 活動한 點이 이와 같은 評價의 主要因인 듯하다.

    本來 法學을 專攻한 敎授로서 특정한 政治思想的 見解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同時에 主要 이슈에 對해 在野 및 市民團體와 함께 多少 急進的 主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 敎授에게는 ‘進步的 自由主義’ 外에도 少數意見으로 ‘新左派’ ‘急進的 民主主義’라는 評價와 ‘改良的 自由主義’ ‘保守的 自由主義’라는, 서로 엇갈리는 評價가 同時에 나왔다.

    이교수 自身은 “나는 進步的 自由主義 같은 性向이 없다”면서 “그저 環境 勞動 等 모든 學問 分野에서 자유로운 硏究를 하자는 게 내 所信”이라고 말했다. 利敵性 論難을 불러왔던 初等學生用 統一敎育圖書 ‘나는야 統一 1世代’를 썼다가 利敵表現物 製作嫌疑로 97年 12月 不拘束 起訴됐고 지난해 2月 公訴取消 處分을 받은 李敎授는 “우리나라는 이념적 地平이 너무 좁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李敎授는 “大學에 있는 사람으로서 지난番 事件처럼 消耗的 葛藤에 아직도 잡혀있다는 게 안타깝다”면서 “思想의 自由市場에서 大衆의 支持를 받고 거기에서 眞實을 檢證받는 風土가 하루 빨리 造成돼야 한다”고 强調했다.

    李敎授는 “自由民主主義는 恒常 열린 姿勢를 잃지 않아야 生命力이 있다”면서 “知識人이 弱者의 목소리를 내주는 것을 色깔과 容共으로 몰아붙이는 硬直된 社會라면 그것은 社會主義나 다를 바 없다”고 덧붙였다.

    이종석

    (世宗硏究所 硏究委員): 進步的 自由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이종석 博士에 對한 評價 中 多數를 차지한 것은 ‘進步的 自由主義’였다. 大多數의 政治學者들은 李博士를 評價하는 根據를 햇볕政策과 對北問題에서 찾았다. 初期 硏究에서 ‘김일성 假짜論’을 論駁하고 北韓의 客觀的 實體를 分析하는 데 集中했던 이종석 博士는 ‘國民의 政府’ 들어 햇볕政策의 代表的 理論家로 떠올랐다. 그런 李博士에 對한 評價를 볼 때 韓國 政治學者들은 對北 穩健政策과 北韓에 對한 實事求是的 分析을 强調하는 그를 ‘進步的 自由主義’로 看做하고 있음을 確認할 수 있다.

    이종석 博士에 對한 이런 評價가 가지는 意味는 韓國社會에서 特定人士에 對한 이념적 評價가 平素의 階級的 立場이나 政治思想的 軌跡과 相關없이 北韓에 對한 觀點과 主張만으로 이루어지는 境遇가 많다는 點이다. 오랫동안 冷戰的 對決時期를 거쳤던 韓國의 知的(知的) 環境에서는 北韓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對決萬能이 아닌 和解 爲主의 對北觀點을 가진 것만으로도 充分히 ‘進步的’으로 비친다는 것이다.

    그 밖의 意見으로 이종석 博士를 ‘改良的 自由主義’와 ‘急進的 民主主義’라는 評價도 있는데 이는 應答者의 政治的 性向에 따라 李博士의 理念 地平을 달리 解釋한 데서 연유한다. 卽 對北政策에서 保守的 立場에 同調하는 學者들은 그를 急進的 民主主義로, 過去 오랫동안 左派 性向을 堅持하던 學者들은 그를 改良的 自由主義로 評價하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 特異한 應答으로는 ‘主思派的 色彩를 內包한 햇볕論者’라는 評價와 “學問的 깊이가 오래 되지 않았다”는 評價, 그리고 김대중 政府의 對北政策을 積極 支持한다는 點에서 ‘改革的 自由主義’라는 評價와 아예 ‘햇볕政策의 傳道師’로 規定한 評價도 있었다.

    李博士는 이에 對해 “내 스스로 進步的 自由主義에 近接한다고 생각하는데 萬一 可能하다면 進步的 民主主義라고 불리고 싶다”고 말했다. 單純한 自由主義를 넘어 平等과 福祉의 問題가 考慮되는 自由主義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南北問題에 關해서는 ‘進步的’이라는 用語보다는 ‘前向的’이라는 말이 的實하다”면서 “重要한 것은 北韓을 있는 그대로 본 뒤 論議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와 같은 接近法을 ‘內在的·批判的 接近論’이라고 불렀다. 처음부터 批判의 잣대만 들이대서는 眞實이 보이지 않으며 一旦 事物을 있는 그대로 理解하고 評價한 뒤 批判해야 한다는 것이다.

    임혁백

    (고려대 政外科 敎授): 改良的 또는 改革的 自由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임혁백 高麗大 敎授는 進步的 自由主義, 改良的 自由主義, 合理的 自由主義, 改革的 自由主義라는 評을 받았다. 그는 社會民主主義와 親和力을 가지고 있다는 點이 指摘됐지만 設問對象 中 自由主義라는 이미지가 가장 剛하게 形成돼 있는 便이었다. 그리고 “自由主義의 理論的·實踐的 風土가 瘠薄한 韓國에 自由主義 패러다임을 供給한다”는 評價도 있었다. 이러한 評價가 相當 部分 硏究活動에 기초한 것이라는 點도 注目할 만하다.

    林敎授는 “改革的 自由主義라는 表現은 맞지만 ‘改良的’이라는 表現은 내가 아주 싫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改良的’이라는 말에는 現實妥協的 또는 保守的이라는 뉘앙스가 있으며 自身은 自由主義를 根幹으로 하면서 社會正義나 不平等 解消를 追求한다는 點에서 ‘改革的 또는 進步的 自由主義’자라는 것이다.

    (고려대 政外科 敎授): 急進的 民主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최장집 고려대 敎授는 評價對象者 中 ‘急進的 民主主義’라는 應答이 가장 많은 境遇다. 이는 現在 分類 可能한 理念指導 內에서 그의 位置에 對해 比較的 强한 合意가 存在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具體的인 內容을 보면 그에 對한 評價도 매우 複雜함을 엿볼 수 있다.

    于先 그의 ‘急進的 民主主義’라는 理念指導上의 位置가 比較的 溫乾한 改革論과 親和力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境遇가 있다. 元來 그는 權威主義로부터 民主主義로의 履行을 强調하며 階級的인 觀點보다는 市民社會의 發展에 注目했다는 點에서 左派와는 距離가 있는 境遇로 볼 수 있다. 勿論 民主主義로의 移行過程은 但只 市場의 擴大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社會的 分配 問題와 勞動問題에 對한 解決과 竝行돼야 한다고 主張한다는 點에서 單純한 市場主義者와는 區別된다. 그리고 그의 理論들이 過去 韓國社會의 權威主義 體制에 對한 抵抗을 分明히 하였기 때문에 民主主義 앞에 ‘進步的’ 或은 ‘急進的’이라는 修飾語가 붙는 것에 많은 사람이 同意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를 比較的 左派 性向에 가까운 人物로 보는 評價도 적지 않았다. 甚至於 正統左派라고 規定한 이도 있었다. 이는 그의 社會民主主義的 性向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보다 더 重要하게 指摘된 것은 崔敎授의 韓國 現代史에 對한 解釋 問題다. 이는 當然히 99年 6·25戰爭에 對한 解釋을 둘러싼 思想論爭의 影響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韓國 社會가 如前히 現代史 或은 北韓과 關聯한 이데올로기 問題의 影響을 크게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代表的인 例라고 할 수 있다.

    崔敎授는 “남들이 뭐라고 부르는 것은 自由지만 내 스스로 무슨 主義者로 붙일 생각은 없다”면서 論評을 拒否했다.

    崔敎授의 이같은 反應에 對해 崔敎授를 잘 아는 人士들은 99年 自身의 韓國 現代史 解釋을 놓고 벌어졌던 ‘色깔論의 惡夢’ 때문이라는 解釋이 支配的이다.

    崔敎授 自身은 國家와 市民社會 等 普遍的 民主主義 槪念에서 出發하고 있는데 自身의 見解에 批判的인 人士들이 여기에 ‘急進的’이라는 ‘否定的 뉘앙스를 덧漆하는 데 對해 몹시 不便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理念의 自由市場에서 自由롭고 公正하게 競爭할 수 있는 條件이 形成돼있지 못한 韓國의 現在時點에서 自身을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다루려 하는 自體가 正當치 못하다는 얘기다. 그만큼 우리社會가 硬直돼 있다는 게 崔敎授가 經驗으로 體得한 現實이라는 것이다. 美國 等에서는 全혀 異常하지 않은 自由主義的 分派가 韓國에서는 ‘過激하다’ ‘急進的이다’고 매도될 만큼 워낙 保守的 土壤이 壓倒的이라는 뜻이다.

    하영선

    (서울대 外交學課 敎授): 保守的 自由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保守的 自由主義’라는 槪念은 이番 設問 中에서 가장 많이 나온 應答이다. 이는 評價 對象의 保守性을 强調하는 境遇도 있지만 많은 境遇 ‘比較的 뚜렷한 政治性向을 갖지 않은 保守主義’라는 意味로도 使用됐다.

    아마 後者의 境遇에 가장 들어맞는 케이스가 하영선 敎授에 對한 ‘保守的 自由主義’라는 評價일 것이다. 그는 只今까지 現實政治에 直接 參與하지 않고, 主로 글을 통해 自身의 생각을 밝혀왔다. 學問的 發言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신중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러한 이미지를 갖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에게서 뚜렷한 性向을 찾아보기 어렵다” 或은 “여러 問題를 보는 認識的 스펙트럼에 多少 差異가 있다”는 評價도 있었다.

    同時에 하교수에 對해 ‘改良的 自由主義’, 或은 ‘現實主義的’이라는 評價도 있었다. 이는 글을 통해서 나타난 그의 主張이 比較的 合理的이라는 印象을 주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過去 ‘용미論’이라는 表現을 통해 感情的인 方式이 아니라 利害關係를 잘 따져서 美國과의 問題를 解決해야 한다고 主張한 바 있으며, 同時에 對北政策에서도 單純한 ‘包容論’과 ‘封鎖論’이 아닌 ‘選擇的 包容政策’을 主張한 바 있다.

    그러나 매우 少數지만 그의 保守性을 强調하거나 設問 對象 中 가장 禹(右)에 있는 사람이라는 指摘도 있었다. 이는 主로 河敎授가 表現은 신중하지만 北의 現 體制에 對해 매우 批判的인 視角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最近에는 南北頂上會談의 合意, 特히 統一方案을 批判하고 政府의 態度에 批判的인 發言을 한 것과 關係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河敎授는 “80年代式 圖式的 잣대에 不過한 保守-進步가 果然 正確한 表現인지 疑問”이라면서 “現在를 肯定하는 게 保守고 改善하자는 쪽이 進步라고 한다면 요즘은 現在의 南北關係를 肯定하는 게 進步인지 保守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從來 基準에서 보면 ‘保守’와는 多少 距離가 있는 김대중 政府의 對北認識과 햇볕政策으로 表現되는 現在의 對北政策을 肯定하는 게 保守인지 進步인지 한마디로 規定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河敎授는 “南北關係에선 報酬나 進步 槪念보다는 ‘愼重論’과 ‘積極論’으로 區分하게 좋다”는 代案을 提示했다. 河敎授는 이와 關聯 “나는 굳이 말하라면 ‘現實主義的 理想論’에 가깝다”고 主張했다. 河敎授는 “21世紀는 훨씬 다양하고 進取的인 思考를 必要로 하는 時期”라면서 “假令 ‘地球的 民族主義’ 같은 複合 槪念이 必要하다는 點에서 나는 ‘複合注意’를 方法論으로 내세우고 싶다”고 덧붙였다.

    한승주

    (고려대 政外科 敎授·前 外務部 長官): 現實主義的 改良的 自由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한승주 高麗大 敎授에 對해서는 ‘保守主義’라는 評價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大多數는 그에게서 ‘自由主義’ ‘現實主義’ ‘改良的’이라는 이미지를 느낀다는 意見이었다. 다만 ‘改良的 自由主義’라는 評價가 種種 매우 改革的인 이미지를 주는 다른 境遇와 달리 그는 ‘保守主義에 가까운 改良的 自由主義’라고 할 수 있다.

    韓敎授에게 ‘改良的’ ‘現實主義的’ ‘열린 思考의 所有者’라는 等의 評價가 내려지는 데는 그가 文民政府 時節 外務部 長官을 歷任하며 對北包容 政策을 폈다는 點이 가장 重要하게 作用했다. 當時 核 危機 等 南北關係와 北美關係가 緊張으로 치닫던 狀況에 核問題를 協商으로 妥結지었던 것이 只今도 사람들에게 剛한 印象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只今도 對北問題에 對해서는 一貫된 論理를 維持하고 있으며 그의 對北觀이 一時的 狀況論理에 依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韓敎授는 그러면서 美國 等 世界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把握하는 姿勢를 堅持하고 있다. 김경원 社會科學院長은 最近 發刊된 韓敎授의 칼럼集 ‘南과 北 그리고 世界’ 序文에서 韓敎授를 가리켜 “複合的이고 流動的인 리얼리티(reality)를 機械的으로 圖式化하기를 拒否하고 狀況을 ‘있는 그대로’ 把握하는” 스타일이라고 描寫했다.

    韓敎授는 “(김영삼政府 時節) 長官으로 일할 때는 北韓에 對해 너무 穩健하다, 너무 進步的이다고 保守派쪽에서 批判을 많이 했다”면서 “北韓과의 關係를 强壓이 아니라 對話로 풀어가야 한다는 햇別政策의 基調는 事實 그때 始作된 것”이라고 말했다. 韓 長官은 “그러나 只今 햇볕政策이 本格化된 狀況에 내가 ‘政策實現은 좀더 現實的이어야 한다’면서 ‘冷徹’을 자꾸 强調하니까 날보고 ‘保守的’이라고 批判하는 사람도 있다”고 說明했다.

    함재봉

    (연세대 政外科 敎授): 正統保守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함재봉 延世大 敎授에 對해서는, 그의 ‘儒敎的 價値’, 或은 東아시아 談論에 對한 主張 때문인지 ‘正統 保守主義’라는 評價가 大部分이다. 따라서 그가 保守라는 評價를 얻은 것은 다른 사람이 現實政治에 參與하는 過程에, 或은 北韓에 對한 態度로 얻었던 保守成果는 좀 다른 意味라고 하겠다. 이러한 特殊性으로 인해 그의 性向을 座-宇라는 軸으로 區分하기 어렵다는 答도 있었다. 그리고 그를 ‘正統 保守’라는 性向과 함께 “美國的 價値를 가진 典型的인 人物”로 評價하는 意見도 있었다.

    咸敎授는 이에 對해 “우리가 過去부터 重視해온 學緣 血緣 遲延 等의 價値가 否定的 側面이 있다 해서 完全히 갈아엎고 나간다는 것은 不可能하다”면서 “그런 傳統을 基盤으로 現代에 맞게 椄木, 活用해보자는 나의 方法論을 保守라고 한다면 保守라 불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咸敎授는 現在 같은 생각을 가진 知識人 그룹과 함께 만드는 同人誌 ‘傳統과 현대’ 編輯主幹度 맡고 있다.

    황태연

    (동국대 政外科 敎授): 新左派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황태연 동국대 敎授에 對한 評價에서 多數 應答은 ‘新左派’였으나, 흥미로운 것은 다른 評價對象 人士와 달리 그에 對해서는 다양한 答辯이 相對的으로 많이 나왔다는 點이다. 黃敎授를 ‘新左派’로 보는 視角은 獨逸에서 마르크스주의를 專攻했고 歸國 後에 主로 마르크스주의와 批判理論的 觀點에서 學問的 硏究를 進行했던 過去 ‘行跡’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黃敎授는 ‘國民의 政府’ 誕生에 깊숙이 介入했고 政權交替 以後에도 現 政府의 獨步的인 이데올로그로 活動하면서 過去 左派的 立場이 相當히 變化한 것으로 評價됐다. 그의 이념적 地形에 對해 ‘左派’라는 見解와 함께 ‘進步的 自由主義’ ‘急進的 民主主義’ ‘改良的 民主主義’라는 少數 評價가 적잖은 것도 바로 이런 脈絡에서 解釋할 수 있을 것이다. 한 應答者는 “黃敎授가 過去에 理論的으로 正統마르크시즘을 主張했지만 最近에는 現實政治의 論理를 받아들였다”는 理由를 들어 “正統 左派에서 改良的 自由主義者로 그 立場이 旋回했다”고 評價했고, 또 다른 政治學者는 ‘新左派’와 ‘正統 保守主義’를 같이 應答하기도 했다. 過去 左派的 視角의 硏究業績과 現在 親政府的 政治 活動이 겹치면서 政治學者들의 評價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밖에 特異한 意見으로는 地域問題에 對해 保守的 態度를 가지고 있다는 評價가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黃敎授가 ‘疏外地域 聯合論’과 ‘抵抗的 地域主義’를 主張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黃敎授는 自身에 對해 “마르크스뿐 아니라 칸트와 헤겔, 베버와 하버마스 等 西洋 政治思想家들에 對한 廣範圍한 關心을 가지고 있다”는 點에서 ‘改革的 自由主義’로 評價했고 實際 몇몇 政治學者들도 黃敎授를 ‘改革的 自由主義’로 分析하기도 했다.

    黃敎授는 무엇보다 自身을 ‘新左派’로 보는 사람들에 對해 “내가 마르쿠제 等의 新左派를 失敗한 槪念으로 規定하고 그 極端的 左翼들을 一貫되게 批判해왔다는 點을 모르고 하는 소리거나 아니면 意圖的으로 나를 攻擊하기 위한 소리일 것”이라고 一蹴했다. 黃敎授는 “極左나 極右 兩 極端을 除外하면 한 社會에서 서로 共存이 可能하다는 立場”이라면서 “國家가 完全한 市場經濟 秩序 回復을 위해 獨占規制 等 일정한 役割을 해줘야 한다는 獨逸式 ‘秩序自由主義’가 내가 取하고 있는 立場”이라고 說明했다.

    經濟分野에서는 主로 政府介入과 市場原理 間의 關係를 어떻게 設定하는가, 財閥改革 問題에 어떤 立場을 取하고 있는가, IMF나 國際金融資本으로 象徵되는 美國式 新自由主義에 어떤 態度를 堅持하는가 하는 點들이 該當 學者나 知識人의 이념적 方法論的 基盤을 判斷하는 基準으로 作用했다.

    그러나 大衆的 認知度가 높은 人物들에 對해 經濟學者 또는 經濟專門家들 스스로가 正確하게 認識하지 못하고 있는 境遇도 많았다. 이番 調査에서 觀察된 매우 希望的이고도 흥미로운 現象은 答辯者 自身의 이념적 性向과는 無關하게 學術活動이 忠實하거나 合理的인 論理를 갖춘 人物에 對해 全般的으로 一致되는 評價가 나왔다는 點이다. 勿論 分析對象者의 選定 自體가 言論露出度에 큰 比重을 두고 이루어진 것이지만, 적어도 專門家들 사이에서만은 單純한 有名稅나 大衆的 認知度보다는 主張의 學問的·論理的 說得力에 比重을 두는 文化가 形成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現象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철규

    (서울시립대 經濟學科 敎授): 改良的 自由主義 또는 進步的 自由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강철규 서울시립대 敎授에 對해서는 ‘改良的 自由主義’라는 答辯이 가장 많았으며 그와 거의 비슷한 頻度로 ‘進步的 自由主義’라는 答辯도 提示됐다. 그 밖에 ‘保守的 自由主義’라는 答辯도 一部 있었으며 ‘新左派’, ‘正統左派’라는 答辯도 드물게나마 있었다.

    應答者들이 提示한 判斷 理由는, “姜敎授가 基本的으로 市場經濟 原理와 英美式 資本主義 모델을 支持하는 立場을 取하고 있는 人物로서, 制度的 改革을 통해 財閥問題 等을 解決할 수 있다고 主張하며 그 過程에서 一定 部分 政府의 主導的인 役割을 認定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要約할 수 있다.

    그가 官治 經濟를 批判하고 있지만, 다른 한便으로는 改革을 위한 政府의 積極的 介入을 擁護하고 있다는 主張도 눈에 띄었다. 또한 ‘市場의 힘을 理解하고 있으나 政府介入을 必要 以上으로 主張한다’는 批判도 提起됐다. 한便 進步的 知識人들은 姜敎授에 對해 “基本的으로 中産層에 바탕을 두고 있는 ‘保守的 中産層 自由主義者’이며 必要에 따라 政府 및 財閥과 連帶할 수도 있는 人物”이라는 否定的인 答辯을 내놓았다.

    그럼에도 姜敎授에 對해 大部分의 應答者들이 大體로 ‘改良的’ 또는 ‘進步的’ 自由主義에 一致된 意見을 나타낸 것은 姜敎授가 꾸준히 活動해온 舞臺가 比較的 溫乾하고 體制內的 改革을 追求하는 經濟正義實踐市民聯合(經實聯)이라는 點과, 相對的으로 誠實하고 一貫된 學問的 活動을 背景으로 삼고 있다는 點 때문으로 分析된다.

    姜敎授 自身은 이에 對해 “내가 무슨 主義者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면서 “다만 나는 基本的으로 市場經濟를 擁護하고 官治經濟를 反對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姜敎授는 “政府는 市場의 틀을 形成하는 水準에서만 介入해야 한다”면서 “韓國社會는 政府의 介入이 많다 보니까 利益團體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고 指摘했다. 그 사이에서 問題를 解決할 수 있는 勢力이 市民이며 市民勢力은 政府에 對해 市場經濟의 룰을 正確하게 適用하도록 끊임없이 批判해야 한다는 게 그의 主張이다.

    공병호

    (인티즌 代表): 保守的 自由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공병호 인티즌 代表는 매우 精力的인 人物로 只今은 벤처企業 經營人으로 變身했지만, 지난 몇 年間 財閥問題를 비롯한 다양한 經濟論爭의 核心 멤버였다. 다양한 活動을 통해 그의 主張이 잘 알려진 만큼, 共代表에 對한 專門家들의 評價 또한 大體로 비슷한 內容이었다.

    그를 ‘保守的 自由主義’라고 評價한 答辯이 가장 많았으며, 그보다는 多少 頻度가 떨어지지만 ‘正統保守主義’라 評價한 答辯도 적지 않았다. ‘進步的 自由主義’ 및 ‘急進的 民主主義’라는 答辯도 한 件씩 있었으나, 全體的인 脈絡에서 볼 때 多少 逸脫된 評價로 보인다.

    共代表의 具體的인 主張에 對해서는 非合理的이고 一貫性이 없다거나, 財閥의 行爲를 大部分 正當化하는 데 汲汲한 ‘似而非 自由主義者’ 또는 ‘守舊的 財閥自由主義者’라는 等 全般的으로 否定的인 評價가 많았다.

    反面, 少數지만 保守性向의 應答者로부터는 ‘確信에 찬 熱情主義者’이며 “우리 社會에 이러한 主張이 널리 퍼져야 한다”는 評價도 있었다. 興味로운 答辯으로는 “그가 社會的 發言을 가장 活潑하게 했던 것은 自由企業센터所長 時節의 일이므로 그것이 그의 個人的 所信을 얼마나 反映하는 것인지 明確하지 않다”는 內容이 있었다. 類似한 脈絡에서 벤처企業으로 進出한 以後 正體性에 混亂이 發生하고 있다는 主張도 나왔다.

    共代表가 主導해서 創設하다시피 한 自由企業센터가 全國經濟人聯合會(全經聯)의 財政支援을 받는 機關이며, 精力的인 매스컴 活動을 통해 財閥의 立場을 代辯하는 主張을 널리 펼쳐왔다는 點에서 反財閥的人 立場에 있는 應答者들로부터는 좋은 評價를 받기 어려웠을 것으로 判斷된다. 그러나 共代表는 親企業 性向의 答辯者 中에서도 “自由主義 論理로 保守的 結果를 擁護하려 한다”는 否定的인 評價를 받기도 했는데, 이것은 言論活動에 비해 그를 뒷받침하는 學術的 活動이 相對的으로 不足했다는 데 原因이 있는 것으로 分析된다.

    이에 對해 共代表는 “大體로 同意한다”고 答했다. 共代表는 自身의 著書를 引用하며 이념적 指向點을 說明했다. “나는 그동안 네 卷의 冊을 썼다. ‘市場經濟란 무엇인가’, ‘市場經濟와 그 敵들’, ‘企業家’, ‘市場經濟와 民主主義’ 等이다. 여기에는 保守主義에 關한 內容이 들어있다. 恒常 體制를 市場論理에 맞춰 변화시켜야 한다. 내가 强調하는 ‘작은 政府’, ‘個人的 選擇과 責任’, ‘企業 自由主義’ 等이 保守的 이미지로 비친 것 같다. 左派들은 내가 剛한 保守主義者라고 主張하지만, 外國의 事例를 통해 보면 나는 平凡한 사람이다. 歲月이 흘러 사람들의 意識이 變하면 나를 普通사람으로 評價하게 될 것이다.”

    김수행

    (서울대 經濟學部 敎授): 新左派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金隨行 서울大 敎授는 英國 런던大學에서 마르크스經濟學을 體系的으로 工夫한 人物로서 칼 마르크스의 ‘資本論’을 國內 最初로 完譯했다. 이 때문인지 ‘新左派’라는 答辯이 가장 많았으며, 그에 못지 않은 頻度로 ‘正統左派’라는 答辯이 나왔다. 少數意見으로는 ‘急進的 民主主義’나 ‘改良的 自由主義’라는 答辯도 있었다.

    한가지 特徵은 保守的인 性向의 答辯者들로부터도 肯定的인 評價가 壓倒的으로 많았다는 點이다. 例컨대 分析對象으로 提示된 學者들 中에서 ‘理論的으로 定立된 唯一한 人物’이라거나 ‘世俗的 成功보다는 學問的 成就를 追求’하는 ‘學究派’라는 答辯들이 그러하다. 金敎授를 ‘新左派’ 또는 ‘正統左派’라고 規定한 理由로는 學問的 背景이 마르크스經濟學이라는 事實이 提示되었고, ‘正統 마르크스-레닌주의의 傳道師’이며 ‘아직 社會主義에 未練을 못 버린 人物’이라는 少數意見도 있었지만, 大體로 現實問題에 對해서는 悠然하고 實用的인 立場을 取하고 있다는 點이 指摘됐다.

    全體的으로 볼 때 金敎授가 韓國戰爭 以後 事實上 國內에서 最初로 마르크스經濟學을 工夫한 第1世代라는 點 때문에 ‘左派’라는 答辯이 많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가 勞動者의 經營參加나 社會民主主義的 福祉制度 擴充 等에도 關心을 가지고 있다는 點, 그리고 學問的 成就度가 卓越하다는 點 等이 好意的인 評價에 反映된 것으로 分析된다.

    金敎授는 知識人들의 評價 結果에 對해 “日程이 너무 바빠서 答辯할 수 없다”는 意見을 보내왔다.

    김태동

    (大統領諮問政策企劃委員回 委員長): 進步的 自由主義 또는 改良的 自由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김태동 政策企劃委員長은 現 政府의 登場과 함께 大統領 經濟首席祕書官으로 登用된 바 있는 改革的 이미지의 經濟學者이다. 예일大學에서 博士學位를 받은 그는 典型的인 美國式 經濟學 敎育을 받은 엘리트임에도, 土地公槪念을 主張한다든가 所得分配 및 財閥問題 等에서 매우 改革的인 主張을 많이 했다. 金委員長에 對해서는 ‘進步的 自由主義’라는 答辯이 가장 많았고 그와 거의 비슷한 頻度로 ‘改良的 自由主義’라는 答辯도 提示됐다. 一部에서는 ‘急進的 民主主義’와 ‘新左派’라는 答辯도 나왔다.

    金委員長에 對한 全般的인 評價는 매우 否定的이었다. 例를 들어, “白面書生에 그치는 것이 우리 社會에는 더 나았을 사람”, “曖昧模糊한 DJ家臣”, “優越感과 劣等意識이 混在된 獨不將軍型”, “理性보다 熱情이 더 剛한 사람” 等 거의 毒舌에 가까운 批判이 主流를 이루었다. 反面 正反對의 方向에서 “旣成 政治權에 完全히 包攝돼 守舊的 統治이데올로기化 했다”는 批判도 있었다.

    事實 金委員長의 學問的 成長背景이나 現 政府 登場 以前까지의 學術活動 等을 勘案하면, 그를 ‘左派’라고 規定하는 것은 그다지 適切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그에 對한 否定的 評價는 大部分 個人的 特性과 關聯된 非難의 性格을 띠고 있는 것들이 많다. 이와 같은 否定的 評價들이 大勢를 이룬 것은 金委員長으로 象徵되는 DJ政府의 政策亂脈相과 實情에 對한 不滿이나 批判이 反映됐기 때문으로 分析된다. 어찌 보면 設問調査 時點 自體가 그에게는 不利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對해 金委員長은 “分類方式에 別로 同意하지 않지만 굳이 나눈다면 進步的 自由主義와 改良的 自由主義者 中間쯤에 屬할 것 같다”고 말했다. 金委員長은 自身이 尊敬하는 經濟學者는 英國의 존 스튜어트 밀과 2次大戰 中 獨逸의 基民黨 政策에 影響을 미쳤던 사람들이라며 “韓國 社會에서 가장 時急한 事案은 公正競爭 秩序를 確立시켜 市場의 힘을 키우는 것”이라고 主張했다.

    (汝矣島硏究所長): 保守的 自由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유승민 汝矣島硏究所長에 對해서는 大多數의 應答者가 一貫되게 ‘保守的 自由主義’라고 答辯했다. 保守的인 應答者들로부터는 “知的 能力, 個人的 性品 等 모든 面에서 模範的인 學者”라는 評價를 받았다. 또한 進步的 性向의 應答者들度 柳所長에 對해 肯定的으로 評價한 境遇가 많았다. 例를 들어, “財閥을 擁護하는 便이지만 市場經濟에 일정한 原則을 지닌 세련된 自由主義者” “硏究員 發行 學術誌에서나마 꾸준히 自身의 主張을 體系化하려는 努力이 돋보임” 等의 答辯이 그러하다.

    이에 對해 柳所長은 “納得이 잘 안된다. 例示된 方式으로 나눈다면 保守的 自由主義가 맞을 것 같지만, 그보다는 實用主義에 가깝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柳所長은 經濟 知識人들이 自身을 ‘保守的 自由主義者’로 評價한 理由에 對해 “나는 財閥의 强點을 살려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急進的인 財閥解體에 反對한다. 그런 面에서 保守的이다. 또한 나는 官治金融을 强度 높게 批判하고 規制撤廢를 主張한다. 그렇게 보면 自由主義者日 수 있다”고 答했다.

    有限數

    (CBF金融그룹 會長, 前 全經聯 專務): 保守的 自由主義 또는 正統保守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有限數 CBF金融그룹 會長에 對해서는 ‘保守的 自由主義’라는 答辯이 가장 많았으며, 그에 못지 않게 ‘正統保守主義’라는 答辯도 많았다. 그가 포스코經營 硏究所長 出身으로 特히 IMF 危機 局面을 맞아 全國經濟人聯合會 專務를 맡으면서 市場原理를 强調하고 친(親)기업적인 主張을 精力的으로 펼쳐온 人物이라는 點에서 專門家들의 答辯內容은 거의 一致한다.

    理念 地形에서 공병호 代表와 類似한 評價를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흥미로운 點은 肯定的인 評價가 相對的으로 많았다는 事實이다. 例를 들어 “冷徹한 視角으로 經濟問題를 봄” “狀況認識이 若干 保守的이기는 하나 脈絡을 잘 把握하고 있다” “途中下車로 企業經濟 發展에 큰 損失을 가져왔다”는 評價 等이 그것이다.

    反面 少數意見으로 “財閥擁護 論理가 一貫性을 缺如하고 있다”는 否定的인 評價도 있었다. 特히 “포지션에 따라 財閥問題에 對한 立場이 多少 機會主義的으로 變動한다”는 指摘도 있었다.

    全經聯 全無라는 位置 自體가 象徵하는 것처럼, 財閥親和的 立場을 取한다는 點에서 半(反)財閥論者들로부터는 否定的인 評價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有限數 會長에 對한 全般的인 評價는 “比較的 合理的인 思考의 所有者”라는 肯定的인 意見이 主를 이루었다.

    이에 對해 兪會長은 “나는 正統保守主義는 아니고 保守的 自由主義에 가까울 듯하다. 나는 그렇게 頑固한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다. 兪會長은 스스로 改良主義에 가깝다며 그 理由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 社會의 價値, 制度 中에는 長點도 있다고 본다. 그래서 急進的 變化에 反對한다. 財閥도 問題가 있지만, 短點을 고치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TV討論에 나가서 旣存의 것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 것이 保守的으로 보였던 것 같다. 하지만 論理 自體가 保守的이지는 않다. 反動도 아니고 水球도 아니다. 나는 柔軟하며 改良的 保守主義로 볼 수 있다.”

    이필상

    (고려대 經濟學科 敎授): 改良的 自由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이필상 高麗大 敎授에 對해서는 ‘改良的 自由主義’라고 應答한 比率이 가장 높았으며, ‘進步的 自由主義’, ‘急進的 民主主義’가 그 뒤를 이었다. 李敎授의 境遇 얼마 前까지 比較的 溫乾한 市民運動團體인 經實聯을 中心으로 꾸준한 大衆的 活動을 벌여 왔으나, 意外로 過激한 知識人으로 비춰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原則 없고 對案 없는 批判論者”, “嚴密한 論理보다는 煽動的인 體制 批判” 이라는 等 人身攻擊性 酷評도 나왔다.

    이에 對해 李敎授는 “同意하고 싶지 않다. 나는 基本的으로 韓國 經濟에 批判的이다. 落後된 政治가 經濟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바뀌지 않는 經濟問題에 憤怒하고 있다. 그런 立場을 ‘改良的 自由主義’로 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스스로 健全한 市場經濟를 위한 ‘改革論者’라고 생각한다. 改良과 改革은 어쨌든 바꿔야 한다는 意味에서 비슷할 수도 있다”고 答했다.

    李漢久

    (한나라당 議員): 保守的 自由主義 또는 正統保守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이한구 議員은 대우경제연구소長을 거쳐 國會議員이 된, 한나라당의 核心 經濟브레인이다. 그에 對해서는 ‘保守的 自由主義’와 ‘正統 保守主義’라는 答辯이 거의 비슷한 頻度로 提示됐다. 흥미로운 事實은 그가 財閥擁護論的인 主張을 하면서도 한便으로는 政府의 介入에 그다지 反對하지 않는다고 評價한 應答者들이 많았다는 點이다.

    李議員의 經濟哲學에 對해 “政府介入의 必然性을 前提하고 理論을 展開한다” “韓國型 發展모델의 强點을 認定한다” “朴正熙 時代의 經濟發展 戰略에 未練을 가진 것 같다”라는 答辯들도 나왔다. 이것은 經濟開發期 재무부 官僚 出身이라는 이의원 個人의 履歷과도 關聯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便 李議員에 對한 肯定的인 評價는 主로 그가 論理的이고 豐富한 知識의 所有者라는 側面에 集中됐다. “모든 問題에 對해 한마디씩 할 수 있는 百科事典的 知識인”이라거나 “全體를 보지 못하나 部分的인 論理力은 있다”는 評價는 批判的 基調 속에서도 그의 長點을 認定하고 있는 것으로 分析된다.

    그러나 政治人으로 變身한 뒤의 活動에 對해서는 否定的인 評價가 壓倒的으로 많았다. “政治에 入門한 以後 合理性과 一貫性을 喪失했다”거나 “過去와 最近의 性向이 다르다” “出世志向的인 이미지” 等의 答辯이 이러한 評價를 反映하고 있다. 이 部分은 김태동 政策企劃委員長의 境遇와 類似하게 政治權 全般에 對한 不信感이 一部 投影된 結果라고 判斷된다.

    이에 對해 李議員은 “個人的으로 改良的 保守主義 性向이 强하다고 생각한다. 理念은 保守主義지만 늘 改革을 志向한다. 내가 法秩序를 尊重하고 段階的 改革을 主張하기 때문에 保守主義者로 비친 것 같다”고 말했다. 李議員은 特히 自身이 保守主義者로 評價된 理由에 對해 “對北關係를 바라보는 頑固한 立場 때문일 것”이라고 分析했다.

    李議員의 말. “나는 對北關係에 대단히 保守的이다. 나는 北韓이 믿을 만한 相對가 아니라는 것을 經驗했다. 그래서 現 政府의 햇볕政策에 대단히 批判的이다. 北韓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危險한 게임을 벌이고 있다. 나는 아무리 좋은 制度라도 節次를 無視하는 것에 反對한다. 나는 새로운 改革措置가 成功하기를 바라지만, 基礎與件과 段階를 더 重視한다”

    (高麗大 經營學科 敎授): 進步的 自由主義 또는 改良的 自由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장하성 고려대 敎授는 參與連帶를 통한 少額株主運動으로 有名한 人物이다.

    一旦 그에 對해서는 ‘進步的 自由主義者’라는 答辯이 가장 많았다. 敎授로서는 보기 드물게 强力한 行動主義者이며 反財閥主義者로서의 이미지가 깊게 刻印돼 있다는 點에서 保守性向을 가진 答辯者들로부터 否定的인 評價를 받은 것은 어쩌면 當然한 일일지 모른다.

    예컨대 “참여연대를 통해 合法을 假裝하고 있지만, 內心 願하는 것은 財閥解體人 新左派”, “1人 1票의 政治民主主義로 1人 多數票가 可能한 資本主義에 挑戰하려는 矛盾的인 主將을 函“, “自身의 잣대에 맞지 않는 것을 모두 잘못이라고 보는 사람”, “時代 狀況을 앞질러가는 行動主義者”라는 式의 批判的 評價가 많이 提示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便으로는 進步的 性向의 答辯者들로부터 “中産層 少額株主의 限界”에 머물고 있다거나, “自由主義者이나 原動力은 保守的인 立地에서 나온다”라는 否定的인 評價를 同時에 받았다.

    張敎授의 主張이나 學問的 背景은 充實한 市場經濟 原理에 기초하고 있고 이른바 ‘아메리칸 스탠다드’(美國式 標準)를 念頭에 두고 있다. 그런 點이 保守的인 財閥擁護論者는 勿論 進步的인 論者들로부터도 批判을 받는 重要한 原因으로 分析된다.

    이에 對해 張敎授는 “荒唐하다. 이렇게 사람을 도마 위에 올려놓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이데올로기的 偏向性을 論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左派든 右派든 現實性이 있고 社會發展에 도움이 된다면 좋다. 내가 市民運動을 하기 때문에 그런 評價가 나온 것 같다”고 答했다. 張敎授는 “改良的 自由主義라는 表現에 同意하지 않는다”며 “그런 評價가 나온 것은 내가 資本主義 社會의 節次的 正當性을 重視하고 그런 論理를 市民運動 속에서 主張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張敎授는 이어 “내가 少額株主運動을 펼친다고 했을 때 運動團體에서는 ‘무슨 投機꾼을 保護하느냐’고 批判했다. 한便 右派에서는 나를 世上을 뒤집으려는 ‘빨갱이’로 몰아부쳤다”고 덧붙였다.

    정운영

    (경기대 經濟學科 敎授): 新左派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정운영 경기대 敎授에 對해서는 相對的으로 다양한 答辯이 提示되었다. 가장 頻度가 높았던 答辯은 ‘新左派’지만, ‘急進的 民主主義’나 ‘進步的 自由主義’라는 答辯 頻度도 매우 높았다. 그 밖에 ‘正統左派’에서부터 ‘改良的 自由主義’ ‘保守的 自由主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答辯들이 提示됐다.

    鄭敎授는 벨기에 루벵大學에서 마르크스經濟學을 專攻했으며, 김수행 敎授와 함께 戰後 韓國 마르크스經濟學의 第1世代로 꼽히는 人物이다. 그가 左派라는 答辯이 나온 데는 이러한 學問的 背景이 作用한 것으로 보인다.

    한 答辯者는 그를 가리켜 “스스로 左派라고 말할 수 있는 人物”이라고 描寫했다. 特히 그가 ‘한겨레신문’ 論說委員으로서 썼던 칼럼에 나타나는 半(反)市場的, 平等主義的, 急進的 情緖에 注目하는 應答者들이 많았다.

    그러나 現實問題에 對한 立場은 “幽然하다”는 評價가 支配的이었다. “根本은 左派지만 處方은 分配主義的”이라거나 “具體的인 懸案에 對한 立場은 마르크스주의的이라 보기 어렵다” “實際 性向은 自由主義的”이라는 評價 等이 그러하다.

    鄭敎授는 最近 TV討論 司會者로서 大衆的 認知度가 急激하게 높아졌는데, 이와 關聯해 意外로 否定的인 評價가 많았다. “社會的 雰圍氣와 立地에 便乘하려는 機會主義的 處身” “最近 所信은 弱해지고 處世術은 能해지는 듯” “妥協主義的이고 종잡을 수 없다”는 等의 評價가 그러하다. 이것은 討論프로그램 司會者의 特性上 自身의 主張을 剛하게 내세우기 어렵다는 點이 否定的으로 作用한 듯하다.

    이에 對해 鄭敎授는 “評價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나는 한番도 左派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韓國的 知識人 風土가 너무 硬直돼 있다 보니 多少 삐딱하게 말하는 것이 左派로 分類될 수 있다. 事故가 柔軟한 社會라면 나를 左派로 보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鄭敎授는 知識人들이 自身을 ‘新左派’로 評價한 理由에 對해 “專攻 分野와 讀書 趣向의 影響 때문일 것”이라는 反應을 보였다.

    “나는 政治經濟學을 專攻했지만, 그런 視角으로 韓國社會의 代案을 提示하지는 않았다. 讀書量이 雜多하다 보니 글을 쓸 때 左派的 見解를 가진 사람의 主張을 넣는 境遇가 많다. 主流 사람들이 볼 때 그것이 生疏하다 보니 나를 左派로 誤解했는지도 모르겠다.”

    정운찬

    (서울대 經濟學部 敎授): 改良的 自由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정운찬 서울대 敎授는 現政權 出帆 以後 韓國銀行總裁 等의 要職 提議를 줄곧 拒絶하면서 더욱 有名해진 人物이다. 그에 對해서는 ‘改良的 自由主義’라는 評價가 가장 많았고, 보다 具體的으로 改革的, 進步的, 또는 正統이라는 修飾語가 따르는 케인즈主義라는 答辯도 많았다.

    一旦 正敎授가 經濟學界 內에서는 널리 알려진 케인즈主義子인데다 스스로 ‘改革的 케인즈主義’라는 槪念을 積極的으로 提示했기 때문으로 分析된다. 特히 프린스턴대학 出身의 典型的인 美國留學派 엘리트임에도 美國式 스탠더드나 IMF의 政策處方, 國際金融資本의 橫暴 等에 對해 批判的인 視角을 갖고 있다는 點에서 이른바 新自由主義者들과는 明確하게 區別된다는 點, 그리고 市場原理를 堅持하면서도 合理的인 政府介入을 注文하고 있다는 點 等이 이러한 結果가 나온 重要한 理由일 것이다.

    鄭敎授 個人에 對한 評價가 肯定的이냐 否定的이냐에 無關하게 이러한 內容들에 對해서 거의 모든 應答者들의 答辯이 一致하였다. 그렇지만 “立地에 따른 有名稅 保有者일 뿐, 眞面目은 아직 確認되지 않았다”라거나 “손에 흙을 묻히지 않는다” “學究派는 아니지만 象牙塔 固守主義子”라는 式의 否定的인 評價도 있었다.

    이러한 批判은 어찌 보면 知識人의 役割과 關聯된 딜레마의 表現이라고도 볼 수 있다. “批判만 하고 現實參與는 왜 하지 않느냐”는 一角의 拒否反應이나 ‘浪漫的 改革主義者’라는 評價도 이러한 延長線上에 놓여 있다.

    이에 對해 鄭敎授는 “進步的 自由主義 쪽으로 가고 싶은데, 改良的 自由主義로 보이는 模樣이다. 分類가 恣意的이라고 생각되지만, 그 中間쯤에서 改革을 推進하는 立場으로 볼 수 있다”고 答했다.

    鄭敎授는 自身이 지난 98年 言及했던 ‘改革的 케인즈主義’에 對해 “韓國처럼 資本主義 市場經濟의 基本的 룰이 脆弱한 나라에서는 國家가 巨視的 플랜뿐만 아니라 微視的인 構造調整에도 積極的으로 介入해야 한다는 뜻으로 쓴 用語다. 나는 ‘改革的 케인즈主義’가 改良的 自由主義와 進步的 自由主義 中間쯤에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長): 保守的 自由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좌승희 院長은 全經聯 傘下 團體인 한국경제연구원長을 맡고 있다는 點에서 一旦 財閥擁護論자라는 이미지가 强烈하게 聯想되는 人物이다. 그러나 事實은 오랫동안 韓國開發硏究院(KDI)에 勤務한 官邊 이코노미스트로서 市場經濟 原理를 一貫되게 擁護하는 主張을 펴온 人物이다.

    左院長에 對해서는 ‘保守的 自由主義’라는 答辯이 壓倒的으로 많았으며, ‘改良的 自由主義’나 ‘正統保守主義’라는 答辯이 뒤를 이었다. 分析對象 人物 中에서 應答者들의 答辯이 가장 좁은 範圍에서 形成된 人物이다.

    全般的인 評價는 比較的 肯定的이었다. “問題의 本質을 잘 알고 解決方案을 提示할 能力이 있는 人物”이라거나 “市場經濟 原理를 强調하며, 財閥의 前近代的 行態는 批判한다”는 等의 答辯이 그러하다. 그렇지만 “改革보다는 旣存 시스템에 對한 合理的 理解를 追求”하는 人物이라는 點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경제연구원長이라는 現在의 位置 때문에 ‘保守的’이라는 評價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分析된다.

    이에 對해 左院長은 “나를 評價한 사람들이 내가 쓴 글을 얼마나 읽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저 經濟原則에 忠實하고 있을 뿐이다. 나 自身도 내가 무슨 主義者인지 잘 모른다. 保守的 自由主義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社會分野에서는 다음과 같은 過程을 거쳐 大衆的 影響力이 큰 知識人들을 選定하였다. 먼저 한국사회학회 會員 名簿에서 勞動社會學 및 産業社會學, 政治社會學, 社會變動論 等 이념적 志向과 聯關이 높다고 看做되는 分野를 自身의 專攻 關心 分野로 提示한 硏究者들과 現實 社會問題에 자주 介入하는 硏究者 等 50人을 選定했다.

    다음으로 이들의 大衆的 影響力을 確認하기 위하여 最近 5年 間 中央日刊紙에 글을 寄稿하거나 當事者가 記事에 登場했던 件數를 檢索했다. 여기서 集計된 檢索件數를 基礎로 삼되 學問이 아닌 특수한 事件이나 政治的 活動 때문에 言論에 많이 擧名된 人士는 分析對象에서 除外했다.

    代身 社會學을 專攻하지 않았더라도 實際 뚜렷한 理論的 또는 이념적 基盤을 갖고 社會問題에 大衆的 發言을 많이 한 ‘活動家型 知識人’을 一部 包含시켰다.

    강명구

    (서울대 新聞學科 敎授): 改良的 自由主義 또는 急進的 民主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강명구 서울大 敎授에 對해서는 ‘改良的 自由主義者’라는 評價가 많았지만, 成熟한 市民社會가 國家와 資本市場을 牽制하는 데 關心을 둔다는 點에서 ‘急進的 民主主義者’로 分類되기도 했다. 그는 認知度 幅이 相對的으로 좁았지만, 比較的 이념적 色彩가 明確한 知識人으로 認識되고 있다.

    이에 對해 姜敎授는 “同意하지 않는다. 나는 社會民主主義者다. 나는 우리 社會가 너무 偏向돼 있다고 생각한다. 多樣性을 認定하는 社會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自由民主主義의 基本 原則이라도 지키라고 主張한다. 그것이 나를 ‘改良的 自由主義者’로 判斷한 根據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강정구

    (동국대 社會學科 敎授): 正統左派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강정구 동국대 敎授의 이념적 志向에 對해서는 ‘正統左派’라는 評價가 가장 많았으며, ‘急進的 民主主義’가 그 다음이었다. 一部 應答者들은 그를 ‘新左派’ ‘進步的 自由主義’ ‘民族主義’ 그리고 ‘主思派’로 評價하기도 하였다. 그를 正統左派라고 評價한 應答者들은 그 根據로 그가 一貫되게 反帝國主義 路線을 堅持해왔다는 點을 들고 있다. 그의 反帝國主義 路線이 反資本主義에 根據한다고 判斷한 應答者들은 그를 ‘正統左派’로 分類했지만, 韓國 現代史에 對한 民族主義的 認識에 根據하고 있다고 判斷한 應答者들은 ‘急進的 民主主義’를 包含해 다양한 診斷을 내리고 있다.

    한 應答者는 姜敎授가 公的 領域의 社會主義化를 追求하고 反帝國主義에 立脚한 勞動者 中心社會에 關心을 두고 있지만, 市場經濟 機能을 全面 否定하지 않는다는 點에서 ‘新左派’로 評價했다.

    그를 ‘正統左派’로 보는 사람들도 南北問題를 바라보는 그의 視角에 對해서는 다양한 評價를 내리고 있다. 이제까지 그는 南韓이 北韓의 어떠한 行動에 對해서도 民族主義 觀點에서 慣用的인 態度를 取해야 한다고 主張해왔다. 이러한 志向에 對해 一部 保守的인 學者들은 ‘過度한 理想主義’ 或은 ‘盲目的 主思派’로 批判했다. 한 應答者는 姜敎授의 過度한 反帝國主義的 路線이 흔히 非論理를 낳기도 한다고 批判했다. 그는 姜敎授가 ‘興南撤收視 美軍陷穽을 타고 온 避難民들이 美帝國主義者들에 依해 拉致됐다’고 主張했다는 事例를 提示했다.

    이에 對해 姜敎授는 “正統左派는 아니지만 左派는 맞다. 正確히 表現하자면 ‘民族民衆民主主義者’로 봐야 할 것 같다”고 答했다. 姜敎授는 “主要 關心事가 統一 問題고 對北政策을 肯定的으로 評價하다 보니 그런 結果가 나온 것 같다”며 “나는 基本的으로 北韓社會를 좋게 본다. 但只 社會主義 國家라서 그렇게 보는 것은 아니다. 나는 南韓보다 北韓이 더 民族 中心의 歷史를 갖고 있다고 본다. 萬一 朝鮮 社會가 外勢의 介入 없이 內在的 歷史發展 過程을 거쳤다면 社會主義 形態로 갔을 可能性이 높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김진균

    (서울대 社會學科 敎授): 正統左派 또는 急進的 民主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김진균 서울대 敎授에 對해 大多數 應答者들은 ‘左派’로 評價했다. 그를 ‘正統左派’로 評價하는 이들은 그 根據로서 그가 一貫되게 勞動階級의 獨自性을 主張하면서 勞動運動의 現場에서 몸소 實踐해왔다는 點을 들고 있다. 그러나 그를 ‘新左派’ ‘穩健左派’ 或은 ‘그냥 左派’로 評價하는 이들은 그가 實際로는 매우 溫乾한 立場을 지니고 있었지만, ‘正統左派가 不在한 韓國的 現實’ 或은 ‘權威主義 體制에 依한 造形’ 等에 依해 反省的으로 過激하게 表出됐다고 보고 있다.

    이와 달리 社會科學界를 代表하는 知識人으로서 權威主義 體制에 抵抗해왔던 履歷을 重視하는 이들은 그가 左派의 識見을 가지고 있을 뿐 過去부터 一貫되게 急進的 民主主義를 堅持해왔다고 評價했다. 그의 最近 活動을 더 重視하는 이들 또한 그가 ‘資本論理의 差別化 傾向이 빚어낸 問題에 對抗하기 위해 共生的 삶의 追求에 關心을 두고 있다’는 點을 들어 急進的 民主主義者로 分類했다.

    이렇듯 對比되면서도 留保的인 評價가 나온 理由는 一次的으로 應答者들의 個人的인 經驗과 觀點 때문이기도 하지만, 金敎授 自身이 韓國 社會科學界에서 ‘보기 드문 스승의 風貌’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政治的 狀況에 따라 대단히 柔軟하게, 反民主的이고 反資本的인 爭點들에 對應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로 인해 保守的인 知識人들의 批判도 “情緖的 判斷에 依支하여 行動하는 學者”라든가, “實踐的인 代案 提示가 弱하다”는 水準에 머물고 있다.

    金敎授는 調査 結果에 對해 ‘答辯하지 않겠다’는 立場을 傳해왔다.

    박세일

    (서울대 國際地域院 敎授): 改良的 自由主義

    팽팽한 보수·진보 주류는 자유주의
    박세일 서울대 敎授는 大部分 應答者에 依해 엘리트 中心의 改革에 關心을 두는 ‘改良的 自由主義者’로 評價됐다. 美國의 霸權主義的 資本主義에 맞설 수 있는 ‘自主的 世界化’를 主張한다는 點에서 ‘進步的’으로 評價하기도 한다.

    朴敎授는 “大體로 맞는 分析이라 본다”면서 “傳統的 西歐槪念으로는 市場을 强調하는 게 報酬지만 韓國的 條件에서는 市場機能을 强調하는 게 되레 進步的인 側面이 있다”고 말했다. 朴敎授는 그런 意味에서 “우리 社會에는 健康한 保守가 좀 弱하다”면서 “나는 自由主義를 基礎로 하되 그 限界인 個人主義의 橫暴를 共同體的 倫理나 共同體的 連帶로 補完하는 ‘共同體的 自由主義’를 追求하고 있다”고 紹介했다. 朴敎授는 “個人이 共同體的 屬性 없이는 存在하기 어려운 게 現實”이라며 “이웃의 어려운 사람에 對한 關心을 기울이는 ‘空間共同體’와 歷史的으로 傳統에서 繼承할 것은 繼承하겠다는 ‘時間共同體’를 통해 自由主義의 限界를 끊임없이 補完해줘야 한다”고 强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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