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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역 플랫폼의 가락국수 맛을 아십니까?”|신동아

“대전역 플랫폼의 가락국수 맛을 아십니까?”

  • 入力 2006-08-02 11: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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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蒸氣機關을 돌리는 火夫 노릇을 하는 機關助士로 出發한 신범철氏는 142萬km 無事故 記錄을 세웠다. 記錄 更新을 앞둔 지난 9月 새마을號를 몰던 그는 瞬間的인 直感으로 危險을 알고 大型 慘事를 避해 갔는데...경의선이 다시 뚫리는 날 그는 新義州까지 無事故 列車를 몰 수 있을 것인가?
    대 前에서 0時50分에 떠나는 木浦行 緩行列車가 實際로 있었을까? 事實이든 아니든 流行歌謠 ‘大田 블루스’는 中年層의 愛唱曲이다. ‘世上은 잠이 들어 고요한 이 밤…’, 이 노래는 변변한 離別의 말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列車에 몸을 싣는 哀切한 마음을 가슴저리게 뿜어 올리고 있다.

    40代가 넘은 地方 出身 사람들에게 ‘緩行列車’와 ‘大田’은 남다른 存在다. 京釜線과 湖南線이 만나고 갈리는 곳이 大戰이다. 工業化가 進行됨에 따라 農村 젊은이들은 물동이와 호밋자루, 지게와 쟁기를 내던지고 너도나도 서울로 向했다. 그들의 定處(定處)는 그냥 ‘서울’이었다. 서울에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해봐야 할지에서는 달리 對策이 없었다.

    韓國 最高의 無事故 機關士

    上行線 列車가 大戰쯤에 이르면 고향역에서 緩行列車에 몸을 실었을 때의 두려움과 설렘도 눅눅해져 버린다. 緩行列車 客室에서 대여섯 時間이나 부대꼈으니 몸도 지칠 대로 지쳤다. 이럴 때 ‘이곳 대전역에서 20分間 停車하겠습니다’라는 車內放送은 上京길에 녹초가 된 몸을 추스리라는 시그널이다. 언 손을 ‘煦煦’ 불어가며 가락국수 한 그릇으로 元氣를 되찾고 고단한 서울길에 다시 나섰던 것이다.

    汽車를 처음 탔을 때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汽車도 自動車나 船舶처럼 運轉士가 핸들을 돌려서 方向을 바꿀 것인가? 아니면 列車 바퀴와 레일이 맞물리기 때문에 레일이 휘어진 대로 알아서 方向을 틀어지는 것일까?’ 하는 疑問이 그것이다. 레일이 휘어진 대로 方向을 트는 것이 汽車라면 機關車 運轉社(機關士)는 뭣하는 사람일까?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아직도 이 疑問에 對해 明快히 答辯할 수가 없다. 太平洋을 가로지르는 飛行機도 離陸 前에 自動航法裝置에 코스를 入力해 놓으면, 離陸 後에는 操縱士의 操作 없이도 飛行이 可能한 世上이다. 그러니 機關士가 原始的으로 핸들을 造作하지 않아도 汽車 方向이 바뀔 것이라고 漠然히 推測할 뿐이다.

    大田으로 간다. 大田驛 附近에 機關車 乘務事務所가 있고, 그곳에는 우리나라 最長의 無事故 記錄을 保有한 機關士 신범철氏(53)가 있다.

    그는 只今 大田-釜山 間을 運行하는 京釜線 列車의 機關士로 있다. 새벽에 釜山을 出發하여 이제 막 大田에서 後任者와 交代하고 나왔다는 申氏를 만났다. 만나자마자 平素에 벼르고 있던 궁금症부터 털어놓았다.

    ―汽車길의 레일이 굽어진 곳에서, 機關士는 自動車 運轉하듯이 方向을 돌립니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自動車가 다니는 길은 넓기 때문에 自動車는 狀況에 따라 進行 方向을 이리저리 바꿔야 하지만, 機關車는 레일 위를 달리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機關車 바퀴 方向을 바꾸면 脫線하게 돼 오히려 큰 事故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機關士가 이리저리 핸들을 造作해서 方向을 바꾼다면 큰일입니다.”

    申氏가 씽긋 웃고 나서 車輪이 어떤 原理로 레일을 離脫하지 않고 맞물려 進行하는지에 對해 한참 說明했다.

    ―그렇다면 間間이 일어나는 脫線事故의 原因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 가지 原因이 있지요. 機關車나 客車에 어떤 缺陷이 있다든지, 아니면 線路가 놓인 地盤에 問題가 있는 境遇 脫線할 수도 있지만, 그런 事故는 至極히 드물어요.”

    ―現業 機關士 中에 最長 無事故 記錄을 갖고 있다고 들었는데, 機關士의 無事故 記錄은 어떻게 管理되는 것입니까?

    “機關士 잘못으로 일어난 事故는 機關士 責任으로 돌아갑니다. 速度 調節을 잘못 해서 過速을 했다거나, 機關車나 客車의 缺陷 與否를 事前에 發見하지 못했다거나, 또한 驛 構內에서 機關車의 線路를 바꿀 때 잘못하면 事故가 일어날 可能性이 있습니다. 크든 작든 事故가 發生했을 때 그것이 機關士의 잘못이라는 게 判明되면 그 동안 쌓아온 無事故 記錄은 없어지고 제로 狀態에서 다시 出發하게 됩니다.”

    現在 申氏의 無事故 記錄은 142萬㎞다. 機關士가 된 以來 이 記錄이 한番도 제로로 還元된 적이 없다고 한다. 機關士가 된 以來, 적어도 自身의 잘못으로 事故를 일으킨 적이 한番도 없다는 얘기다. 우리 나라에 鐵道가 생긴 以來 最長 無事故 記錄은 142萬 3200㎞로, 97年度에 停年退職한 將兵權氏가 갖고 있다. 申氏의 現在 記錄과는 3200㎞ 差異가 난다. 申氏는 取材次 만났던 9月 末에 “앞으로 15日만 事故를 내지 않으면 韓國 最高 記錄을 更新하게 된다”고 했다. 이 記事가 나갈 무렵이면 그는 이미 連日 新記錄을 更新하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한 無事故 記錄

    그렇다면 機關士가 하는 일은 具體的으로 무엇일까?

    “于先 發車 驛에서 始動을 걸어서 列車를 움직이게 하고, 目的地에 다다르면 멈추게 하는 일이지요. 列車 運行 前에 列車의 異常 有無를 檢査하는 일도 機關士의 義務 中 하나입니다. 勿論 整備 擔當者들이 따로 있지만 그걸 믿고 탔다가 問題가 생기면 그 責任은 機關士에게 돌아옵니다.”

    좀더 具體的으로 說明하면 이렇다. 機關士는 運行할 動力車를 引受받아 檢收(檢受) 당담자에게서 機關車의 狀態에 對해 說明을 듣는다. 이어 動力車의 性能과 整備 狀態를 點檢한 뒤에 列車 運行에 들어간다. 運行中에는 驛長 및 次長과 緊密히 連絡하고, 各種 信號機·表紙·運行時間·運轉條件의 變化에 따라 速度를 調節하는 等 諸般 措處를 取한다. 終着驛에 到着하면 다시 列車를 點檢하고, 動力車와 火車 및 客車를 分離한 뒤 動力車를 機關車 事務所에 引繼한다.

    ―사람들에게 汽車 소리를 흉내내 보라고 하면 ‘칙칙폭폭’이라고 합니다. 이 ‘칙칙폭폭’은 幼稚園 時節 우리말 擬聲語 工夫의 代表的인 事例로 통하는데, 事實 그건 蒸氣機關車 時節의 소리 아닙니까?

    “그렇지요. 안 맞는 거지요.”

    ―그렇다면 蒸氣機關車 時節부터 機關士로 일해온 사람으로서, 요즘의 디젤機關車 소리를 흉내낸다면 뭐라고 하는 게 좋겠습니까?

    “글쎄요, ‘빠앙’하는 건 奇跡 소리고… ‘덜크덩 덜크덩’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그 소리도 事實은 汽車에서 나는 소리라기보다는 線路의 이음매 때문에 나는 소리거든요. 機關車의 機關이 돌아갈 때에는 ‘우우웅’ 하는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데….”

    ―말이나 글로 表現하기에는 ‘칙칙폭폭’만큼 情趣가 있는 것은 없네요. 칙칙폭폭의 情趣를 살리기 위해서 그런 소리를 내는 裝置를 別途로 만들어 달고 다니면 안 되겠습니까. 나이든 사람들의 鄕愁도 刺戟하고, 아이들 國語 敎育의 一貫性도 지켜나갈 겸해서….

    申氏는 “그거 참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치면서 한바탕 사람 좋은 웃음을 웃었다. 그가 웃는 모습은 열 輛이 넘는 客車를 씩씩하게 끌고 鐵路를 疾走하는 機關士라기보다(물론 機關士가 客車나 貨車를 腕力으로 끄는 것은 아니다), 시골 初等學校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다칠세라 校庭의 琉璃조각을 줍는 校監 先生 쪽이 더 어울릴 것 같은 表情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어릴 적 꿈은 先生님이 되는 것이었다.

    先生님을 꿈꾼 少年

    1947年 논산시 연산면 덕암리에서 貧農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故鄕에서 中學을 卒業하고 敎師를 養成하는 大田竝設高等學校 入學試驗에 挑戰했다가 落榜했다. 다음해에 다시 挑戰하려고 再修를 했는데, 말이 再修地 農事일 하느라 변변히 冊 한番 들여다볼 짬이 없었다. 그는 그 무렵 敎會에 나가기 始作했는데 스스로 “信仰的 體驗을 많이 했다”고 털어놓는다.

    그는 只今도 篤實한 基督敎 信者다. 機關室에 올라가 列車를 運行하기 前에 그는 乘客의 安全을 祈願하는 祈禱를 해야 비로소 마음이 平安해진다고 한다. 크리스천이 아닌 讀者일지라도 그가 세운 142萬㎞ 無事故 記錄은, 그와 ‘그의 하나님’이 함께 이룩한 結果라고 評價해주는 데 인색할 必要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의 基督敎 入門 時節은 祝福스런 記憶으로만 남아 있지 않다.

    “學校도 떨어지고 앞길이 寞寞해서 새로 맛들이기 始作한 信仰에 依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침 저녁 가릴 것 없이 每日 敎會에 나갔지요. 좀 우스운 얘긴데, 當時만 해도 저는 敎會를 週日(日曜日)에만 나가도 되는 곳인 줄 몰랐어요. 敎會에 나가는 사람은 職場이나 學校에 가는 일을 함께 해서는 안 되는 줄 알았습니다. 시골 敎會여서 그랬는지 ‘高等學校 다니면서도 敎會에 나올 수 있다’는 事實을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니까요.”

    이 純眞한 ‘어린 양’은 敎會에 繼續 나가기 위해서 高等學校 入學願書를 써놓고도 應試를 抛棄했다. 그래서 忠南 演算中學校 卒業이 그의 最終 學歷이다. 그는 “學校에 다니면서도 敎會에 나갈 수 있다는 事實을 한참 뒤에야 알았다”며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그러나 “요즘도 누군가 出身 學校 얘기를 꺼내면 주눅이 든다”고 告白한다.

    大田에 鷄龍公告가 있었는데 그 學校에 鐵道運轉課가 있었다. 그곳에서 1年間 敎習 過程을 거쳐 鐵道廳 機關助士(現 職級으로는 副機關士) 公採에 應試해 合格했다. 1966年, 그의 나이 열아홉 時節의 일이다. 以前에는 별다른 採用 節次 없이 鐵道 公務員의 紹介로 아무나 들어가 대충 일했는데, 1965年부터 公採制度가 施行됐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機關助士 公採 2基인 셈이다.

    처음 配置된 곳이 全羅北道 益山이었다. 機關士나 機關調査의 職場은 ‘列車’다. 列車는 서울에서 釜山까지, 或은 서울에서 木浦까지 달리는 것인데, 어디에 勤務한다는 말이 成立될 수 있을까? 益山에서 勤務하게 됐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가?

    “假令 서울에서 木浦까지 가는 列車가 있다고 합시다. 서울 乘務員이 大田까지 汽車를 끌고 오면, 이어 大戰에 勤務하는 乘務員들이 列車를 引繼받아서 木浦까지 가는 것입니다. 大田에 온 서울 乘務員은 木浦나 釜山에서 올라오는 列車를 引繼받아 다시 서울로 돌아갑니다.”

    火夫 노릇의 機關助士와 通票

    신범철氏가 처음 機關助士로 몸담았던 汽車가 바로 ‘칙칙폭폭’의 元祖인 蒸氣 機關車였다. 조개炭(石炭)을 때서 물을 끓이고 거기서 發生하는 水蒸氣가 피스톤을 밀어서 動力을 만들었다. 이 動力으로 바퀴가 回轉하면 巨大한 牽引力이 생겨, 客車나 貨車를 끌게 되는 것이다.

    이때 피스톤을 밀쳐준 過熱 蒸氣는 過熱館 周圍를 지나면서 飽和蒸氣로 바뀌어 굴뚝으로 나가는데, 이때 나는 소리가 ‘칙칙’이다. 反面 보일러 안의 燃料(조개炭)李 타면서 생긴 가스가 굴뚝으로 빠져나갈 때 나는 소리는 ‘폭폭’이다.

    機關助士란 職銜은 그럴듯하지만 當時 그의 主任務는 보일러에 조개炭을 넣어 불을 때는 華府(火夫) 노릇이었다. 主要 驛에는 燃料를 만들어 供給하는 곳이 있었다. 主要 驛 線路에는 石炭燃料가 山더미처럼 쌓여 있고, 크레인을 利用해 이 燃料를 機關車에 싣는다. 機關車에는 炭水車(炭水車)가 連結돼 있어 燃料와 물을 供給받는다.

    機關助士의 主 任務는 炭水車의 燃料를 삽으로 퍼서 불을 때는 것이었다. 燃料를 퍼넣는 作業은 發車 驛에서부터 終着 驛까지 쉼없이 繼續된다.

    石炭을 불구덩이에 퍼넣는 作業이라고 해서 쉽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경사진 길을 올라갈 때에는 蒸氣의 힘이 세야 하는데, 막상 오르막길을 만나 燃料를 많이 퍼넣으면 안 된다. 機關車가 힘을 내려면 퍼넣은 燃料가 제대로 타야 힘을 내는데, 오르막길을 만났다고 그제서야 燃料를 많이 넣으면 미처 燃料가 타지 못해 힘을 내지 못한다. 따라서 機關調査는 平坦한 길에서 부지런히 燃料를 퍼넣었다가 오르막길에서 機關車가 힘을 發揮하도록 해야 한다.

    오르막길이 긴 곳에서 燃料를 適切히 供給하지 못하면 中間에 列車가 멈춰서고 만다. 오르막 線路를 오르다가 아예 멈춘 列車를 다시 稼動하여 움직이기란 不可能에 가깝다. 緊急히 支援을 要請하여 다른 機關車가 와서 밀어주거나, 아래쪽 平坦한 線路까지 後進해야 다시 稼動할 수가 있다. 當時 이런 일은 심심찮게 發生하였다.

    ―앞에 가던 列車의 엔진이 꺼져서 미끄러져 後進하는 境遇, 뒤에서 따라오는 列車와 追突할 危險은 없었습니까? 요즘이야 無線電話機 等 通信體系가 發達했다지만, 그때는….

    “無電機마저 없던 그 時節이 安全에 있어서는 오히려 完璧했다고 볼 수 있지요.”

    무슨 얘길까?

    눈썰미가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列車가 플랫폼에 들어올 때 작은 훌라후프처럼 생긴 링을 걸어주고, 出發할 때비슷한 것을 다시 받아들고 가는 모습을 目擊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 링은 列車 機關士가 以前 驛에서 받았던 ‘通票(通票)’다. 通票는 그저 주고받는 象徵이 아니다. 한 列車가 A驛에서 B逆으로 出發했을 境遇, A役을 出發한 列車의 機關士가 通票를 B驛에 갖다주기 前까지는, A驛에서는 그 어떤 列車도 B役을 向해 출발시키지 않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A驛과 B驛 사이에는 單 한 個의 列車만 存在하게 된다.

    通票 內部에는 原形이나 四角形·三角形·마름모 等 各其 다른 模樣의 쇠붙이가 內藏되어 있다. A驛과 B驛 사이의 通票가 原形이라면, B驛과 C驛 사이의 通票는 三角形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移轉 驛에서 使用한 通票를 다음驛 通過用으로는 使用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제 模樣의 通票가 들어가야 驛 사이의 電話가 通話되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어떤 列車가 A驛과 B驛 사이에서 機關 故障으로 멈춰섰다고 하자. 이 列車는 B驛에 通票를 傳達하지 못했으므로 後續 列車는 A役을 出發하지 못한다. 故障난 列車가 機關을 修理한 後 B驛에 到着해 通票를 提出해야, B驛에서 A逆으로 電話가 通話되고 A驛에서는 後續 列車를 출발시키게 되는 것이다. 아주 原始的인 體制처럼 보이지만, 이 通票야말로 列車 追突을 막는 最高의 安全 시스템이었다.

    大田發 0時50分은 軍用列車

    그런데 요즘은 通票 代身 無線 電話를 使用하기 때문에, 效率 面에서는 앞설지 모르나 安全性에서는 옛 通票 活用 時節보다 못 하다는 것이다.

    “只今은 無線 電話機도 있고 無電機도 있으니까 今方 連絡이 되지만 예전에는 그런 通信手段이 없었기 때문에 運行 途中에 故障나면, 出發했던 驛까지 後進을 합니다. 後進하더라도 通票 制度 때문에 뒤따라오는 列車가 없어, 아무 問題가 없었습니다.”

    ―當時 機關調査의 月給은 얼마나 됐습니까?

    “5000원이었어요. 쌀 네 가마 半을 살 수 있는 돈이었으니까, 다른 業種에 비해서 많은 便이었지요.”

    ―機關士와 機關助士의 業務는 어떻게 扮裝돼 있었습니까?

    “한마디로 列車 運轉은 機關士가 하고, 機關調査는 불을 때는 일이 主業務였어요. 初期에는 機關調査가 두 名이었습니다. 新入 機關調査를 ‘補助’라 하고, 古參 機關調査를 ‘本務’라고 했는데, 本務는 경사진 오르막 線路 같은 어려운 區間에서만 불때는 일을 했어요. 그런 區間에서는 老鍊하게 燃料를 넣어야 機關車가 持續的으로 힘을 낼 수 있거든요.”

    機關士나 機關調査의 給與가 他 職種에 비해 높았던 것은 理由가 있다. 作業環境이 至極히 劣惡했기 때문이다. 石炭이라는 燃料로 물을 끓이고 끓는 물에서 나온 蒸氣의 힘으로 列車를 움직이는 시스템을 維持하는 限 作業環境은 劣惡할 수밖에 없었다.

    “여름철 같은 境遇 그냥 들어갔다간 온몸을 다 데요. 手巾을 물에 흠뻑 적셔서 얼굴을 감싸고 들어가지 않으면 火傷을 입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옆에 가만히 있으면 숨이 막힙니다. 따라서 手巾으로 얼굴을 감싸고 되도록 姿勢를 낮춰서 일을 해야 합니다. 炭水車와 機關 사이가 相當히 떨어져 있는데 그 사이를 鐵板으로 이어놨거든요. 그런데 列車가 甚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고 鐵板을 往來하는 것은 참 어려웠습니다. 그 時節의 機關助士들, 苦生이 참 많았지요.”

    이런 어려움에도 不拘하고 機關助士로 採用된 사람들 中 途中에 抛棄한 사람은 한 名도 없었다. 요즘 젊은이들 같았으면 견뎌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當時 申氏가 일했던 列車는 益山-全州, 益山-群山, 或은 益山-煙霧 區間을 運行하는 地選(支線)이었다. 乘客들은 大槪 열무나 고추, 콩 等屬을 褓따리에 바리바리 싸서 팔러가는 褓따리장수들이었다.

    只今은 列車를 利用하는 乘客들의 模樣새도 다르고 機關士나 副機關士의 勤務與件度 크게 달라졌다. 하지만 신범철 機關士는 그래도 ‘칙칙폭폭 時節’에 對한 그리움을 쉽게 떨치지 못한다.

    “宏壯히 좋아졌지요. 60年代만 해도 사람들이 列車 지붕 위에도 매달려 가고, 元來는 들어올 수 없게 돼 있는 機關室에까지 꽉 찼거든요. 그때에는 모두 가난했지만 사람 사는 맛이 났어요. 그런데 線路를 大大的으로 直線으로 만들면서부터 初等學校 敎科書에 나오는 列車가 洞네 어귀나 山모퉁이를 칙칙폭폭하며 비잉 돌아나오는 그런 情趣 있는 모습은 구경할 수가 없게 됐지요.”

    그뿐일까? 秋夕이나 설 名節 때면 膳物 꾸러미를 兩손에 나눠 들고(가족에게 줄 옷가지라면 內容物을 꺼내 가방에 챙겨 담았으면 더 簡便했을 텐데, 當時엔 왜 모두 와이셔츠를 齷齪같이 종이箱子에 넣은 채로 들고 다녔는지 모르겠다) 緩行列車의 琉璃窓으로 기어드는 모습은 이제 ‘그 때 그 時節’ 얘기가 되어버렸다. 申氏는 그런 浪漫과 韻致가 사라져버려 못내 서운하다고 했다. ‘빠르고 安全하고 快適한 鐵道旅行’을 志向하는 鐵道廳長이 들으면 영 섭섭해 할 소리다.

    ―流行歌 ‘大田 블루스’에 나오는 大田發 0時50分發 列車가 實際로 있었습니까?

    “0時50分에 大田을 出發하는 列車가 있었습니다. 예전 그 列車는 軍用列車였습니다. 勿論 只今은 없어졌지요.”

    ―옛 緩行列車 時節에 汽車를 타보면 대전역에서 唯獨 停車 時間이 길던데, 京釜線과 湖南線이 갈라지는 곳이어서 그랬습니까? 아니면 驛 構內의 가락국수 長壽들하고 鐵道廳이 ‘作黨’을 하고….

    “緩行列車가 워낙 速度가 느리지 않습니까? 大田에는 몇 時까지 到着해야 한다는 目標가 있었는데, 늦게 到着해서 蹉跌을 빚는 것보다, 차라리 미리 到着해서 기다리는 便이 낫다고 생각해서 서둘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大田驛에서는 20分이나 30分씩 停車하게 되었지요. 只今은 기껏해야 2分 程度밖에 쉬지 않습니다.”

    68年度에 軍에 入隊하여 3年間 服務를 마치고 71年에 대전역으로 復職해보니 事情이 달라져 있었다. 燃料價 石炭에서 벙커C유로 바뀐 것이다. 石炭을 퍼넣는 重勞動에 시달렸던 때와는 달리 밸브를 調整하여 燃料를 供給하게 됐으니, 勤務 環境이 ‘革命的으로’ 變한 것이다. 勿論 그가 예전에 勤務하던 益山 等의 地選에는 아직도 石炭車가 運行되고 있었다.

    申氏가 機關助士에서 ‘朝(助)’를 떼고 正式 機關士가 된 때가 74年 7月17日이다. 66年度에 機關助士로 들어갔다가(군복무 期間 3年을 包含하여) 8年 만에 機關士 公採에 合格한 것이다. 그러니까 申氏의 無事故記錄은 그가 機關士로 일하게 된 74年을 起點으로 26年 동안 쌓아온 것이다.

    ―機關士라면 누구나 無事故인 채로 停年退任을 하고 싶어할 텐데, 26年이란 긴 時間 동안 無事故 行進을 할 수 있었던 要因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세요?

    “맡은 일을 熱心히 하는 것말고 또 있겠습니까? 아, 있습니다. 家庭이 平安해야 합니다. 집안에 걱정거리가 있으면 事故 나기 쉽습니다. 機關士는 運行中에 暫時도 딴생각을 하거나 한눈을 팔지 않아야 합니다. 집안 問題로 暫時라도 精神이 멍해지면 前進 方向에 뭐가 나타나도 몰라요. 그래서 機關士의 夫人들은 걱정거리가 될 만한 家庭事는 男便에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가장 發生頻度가 높은 事故는 무엇이지요?

    “건널목 事故지요.”

    ―건널목에 사람이나 自動車가 있을 境遇, 일찍 發見하면 急制動을 해서 事故를 避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 사람이나 自動車가 비키機 前에는 事故를 避할 수 없습니다. 機關士의 눈에 보였다 하면 이미 늦은 겁니다. 건널목 700m 前方에서 汽笛을 울리도록 돼 있는데 그때 건널목에는 사람이든 自動車든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急制動을 하더라도 制動距離가 600m나 되기 때문에 當事者가 避하지 않는 限 不祥事가 일어나게 돼 있어요.”

    몇 年 前까지만 해도 하루 車輛通行이 100代 以上인 곳은 1種 或은 2種 건널목으로 分類해서 遮斷器를 設置했다. 그러나 사람과 車輛 通行이 적은 곳은 統制 없이 알아서 건너가게 했다. 그러다 只今은 모든 건널목에 遮斷器를 設置해서 統制하고 있다.

    遮斷器가 내려오기 始作하면 一旦 停止해야 한다. 그런데 急한 사람들은 재빨리 건너갈 欲心에 遮斷器가 내려오는 渦中에 自動車를 몰아 通過하는 境遇가 있다. 이런 짓이야말로 自殺 行爲나 다를 바 없다. 이 篇의 遮斷器는 通過해도 건너便 遮斷器가 이미 내려와 꼼짝 못하고 갇히기 때문이다. 건널목 遮斷器는 사람이 들어올리면 올라가게 돼 있다. 따라서 自動車 助手席에 탄 사람이 재빨리 내려서 遮斷器를 들어올리고 車를 통과시키면 된다는 것이 申氏가 일러준 應急處置 要領이다.

    그러나 눈 쌓인 겨울철이라면 狀況이 달라진다. 눈이 쌓여 있으면 遮斷器를 들어 올리고 出發하려고 해도 鐵길 위에 놓인 自動車 바퀴가 눈에 미끄러져 헛돌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汽車가 온다는 信號가 떨어지면 一旦 멈추는 것이 가장 安全하다.

    經驗으로 避한 慘事

    申氏는 지난 9月에 건널목 事故를 未然에 防止한 것을 評價받아 鐵道廳長 表彰을 받았다. 申氏는 그때를 생각하면 只今도 아찔하다고 말한다.

    “맞은便에서 오던 汽車가 건널목에 있던 自動車를 친 事故가 發生했어요. 저는 京釜線 下行線으로 내려가고 그 列車는 上行線으로 올라오던 中이었거든요. 釜山 물금역 隣近의 건널목이었는데, 何必 그곳은 커브길이어서 事故가 난 건널목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時速 140㎞의 새마을號를 몰고 커브길을 막 돌아서는데 맞은便에서 오던 上行線 列車의 速度가 너무 느리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뜻 그 列車의 機關車 앞部分을 살펴보니 부숴진 痕跡이 있었다. 申氏는 瞬息間에 判斷을 내렸다. ‘速度로 봐서 저 列車는 건널목에서 事故를 내고 只今 멈춰서기 위해서 制動中일 것이다. 萬一 自動車를 들이받는 事故를 냈다면 그 自動車나 사람이 下行線 線路 쪽으로 튕겨나와 있을 것이다.’

    申氏는 瞬息間에 非常制動 措置를 取했다. 커브길이어서 그의 列車는 時速 100㎞로 달리고 있었는데, 그 速度에서 數値上의 制動거리는 500m다. 列車는 搖亂한 소리를 내며 速度를 줄였고, 完全히 멈춘 後 앞을 보니 上行線 列車가 들이받은 自動車가 申氏가 進行하려던 下行線 線路 한가운데에 걸쳐 있었다.

    萬一 非常制動 措置를 取하지 않고 그대로 前進하여 線路 위의 自動車를 들이받았다면(다행히 사람은 이미 避했고 빈 自動車였지만) 그의 列車는 脫線했을 수도 있다. 脫線했다면 수많은 乘客들의 安全은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마주 오는 列車와 스쳐 지나가는 건 瞬息間이다. 그 瞬間에 ‘反對便 列車의 速度가 느리다, 앞部分에 破損된 痕跡이 있다, 事故를 내고 제동중이다, 그렇다면 내 線路에도 問題가 있을 수 있다, 非常制動을 해야겠다’는 判斷을 재빨리 내릴 수 있었던 것은 經驗에서 비롯된 年輪 때문일 것이다.

    列車 乘務員은 勤務地 轉出이 없는 게 原則이다. 事故를 낸 境遇 問責삼아 다른 곳으로 보내는 境遇가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管內 地域에서 繼續 勤續하도록 한다. 같은 區間에서 繼續 運轉하는 것이 安全 運行 次元에서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機關士를 오래 하다 보면 區間의 線路事情을 훤히 꿰뚫고 있다.

    같은 區間에서만 繼續 勤務하다 보면 安易하게 생각해서 태만해질 수 있지 않겠느냐는 質問에 그는 “機關士 노릇을 하는 것 自體가 安逸이나 태만하고는 距離가 멀다”고 펄쩍 뛴다.

    ―철든 以來 거의 平生을 列車 機關室에 勤務해온 사람으로서, 요즘 充員되는 젊은 機關士나 副機關士(옛 機關助士)들을 어떻게 보십니까?젊은 사람들이 勤務에 臨하는 姿勢는 예전과 많이 다를 텐데요?

    “많이 다르지요. 제가 처음 機關助士로 들어왔을 때 機關士의 말 한마디는 하느님 말씀이나 한가지였어요. 게다가 機關士는 年輩가 훌쩍 높은 어른이었기 때문에 시키는 일에 뭐라고 말대꾸를 할 엄두는 내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안 그래요. 맘에 안 들면 금세 抗辯이 건너오고 따지기도 하고….”

    ―無條件 服從하는 硬直된 關係보다는 問題가 있으면 堂堂히 意見을 말하기도 하는 게 安全運行을 위해서 오히려 合理的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側面도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列車의 機關士는 乘客 全體의 安全運行을 책임지는 莫重한 任務를 띠고 있기 때문에 機關士 守則에 機關助士는 機關士의 命令에 服從하라고 돼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規定이 통했지만 요즘 사람들하고는 잘 안 맞는 模樣입니다. 勿論 저는 젊은이들의 그런 情緖를 알기 때문에 脾胃를 맞춰 주려고 努力하는 便이긴 합니다만….”

    ―勤務時間이 週期的으로 바뀌기 때문에 就寢時間도 왔다갔다 할 것 아닙니까. 隘路가 많겠습니다.

    “大田에서 釜山까지 3時間 半이 걸리는데, 부산역에 가면 乘務員이 就寢할 수 있는 休憩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등만 대면 今方 코골고 자는데 저는 낮에 자는 習慣과는 親해두지 못해서 어려움이 많습니다.”

    ―休日을 어떻게 보냅니까?

    “家族이랑 어디 놀러가는 것은 엄두도 못 냅니다. 집에 들어갔다 하면 無條件 잡니다. 나처럼 나이든 사람들이야 問題가 안 되지만 젊은 사람들은 夫婦生活에 問題가 있어서 葛藤을 겪는 境遇가 많습니다. 物情 모르고 結婚한 新婚 夫人들은 ‘뭐 이런 職場이 다 있느냐’고 따지기도 하고….”

    스무 살이 되기 前부터 列車 乘務員으로 살아왔으니 結婚도 乘務員 時節에 했을 게 分明하다. 그렇다면 夫人도 鐵道 旅行과 關聯해서 劇的으로 만났다든지 하는, 近似한 로맨스가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 점잖은 豫備 長老님 機關士에게 그런 걸 期待할 수는 없었다.

    夫人 서정순氏(50)와는 73年에 結婚했다. 故鄕 後輩뻘인 서정순 處女는 申氏가 兵役을 마치고 다시 機關助士로 復歸했을 때, 申氏가 退勤길에 내리곤 하던 蓮山驛 附近에서 洋裝店을 運營하고 있었다. 將來를 約束한 뒤 이 處女는 每日 저녁 蓮山驛에 나와, 언제 勤務를 마치고 돌아올지 모르는 徐氏를 몇 時間씩이나 기다리곤 했다. 눈이 펑펑 내리는 한겨울밤에, 處女는 씩씩하게 機關車를 몰고 나타날 愛人을 기다리고, 그 愛人은 사랑하는 女人을 위해 汽笛 소리를 平時보다 한 番쯤 더 울리면서 플랫폼으로 들어오고…. 長老님에게는 그만 해도 近似한 그림이다.

    電動車보다는 機關車가

    ‘우리 鐵道 行政의 改善點이나 앞으로의 바람직한 發展方向에 對해 한 말씀 해달라’는 注文에 申氏는 “그런 거야 높은 사람들이 알아서 잘 하겠지요”라며 웃었다. 乘務員은 本是 單純해서 오직 列車의 安全運行 外에는 다른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列車 運行 以外의 모든 생각은 ‘雜念’이라는 것이다. 機關士들은 남의 말도 고스란히 믿어버리기 때문에, 退職한 後 事業을 벌인 機關士 出身 中에 成功한 사람은 極히 드물다고 한다.

    首都圈 電鐵 1號線의 國鐵 區間은 鐵道廳에서 管轄한다. 따라서 列車 機關士들 中에는 電動車 機關士 쪽으로 自願해 가는 境遇가 있다. 電鐵 運行은 地下 勤務라 環境이 나쁘기는 하지만 서울에 居住할 수 있다는 利點이 있다. 또 深夜勤務를 하지 않기 때문에 이 點을 選好하기도 한다. 그러나 申氏는 電動車로 옮겨보고 싶은 마음이 없다.

    ―長距離 乘客들을 싣고, 汽笛을 빠앙 울리면서 千里길을 疾走하는…, 그래야 機關士 하는 맛이 나는 게 아닐까요?

    “그런 게 있긴 해요. 名節 같은 때 故鄕을 찾는 수많은 乘客들을 安全하게 싣고 달려가서 終着驛 플랫폼으로 들어갈 때 어깨가 으쓱해지는 自負心 같은 것 말입니다. 하지만 事情에 따라서 勤務하는 곳이 다를 뿐이지, 電動車 機關士도 우리 못지않게 重要하지요.”

    ―機關士들도 혹 列車 乘客들로부터 팬레터나 膳物을 받기도 하나요? 機關室은 客車와는 隔離돼 있어서 흔치 않는 일이겠지만….

    “허허허, 이런 일은 가끔 있어요. 브레이크를 쓸 때 車體가 앞뒤로 쿵쿵 흔들리는데, 이때 乘客들이 民願葉書로 告發을 하거든요. 民願은 함부로 處理하면 안 되기 때문에 여러 節次를 거쳐서 措置 結果를 民願人에게 通報합니다. 勿論 運轉하는 機關士의 能力과 아주 關係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브레이크를 使用하는 境遇 車體가 유난히 흔들리는 그런 列車가 따로 있습니다. 機關車 두 臺가 끄는 境遇지요.”

    무슨 얘길까? 하나의 機關車로 運行할 때에는 別 問題 없으나, 客車를 11量이나 12梁을 다는 境遇 列車 맨앞에 두 臺의 機關車를 連이어 連結시킨다. 따라서 驛區內에서 出發하거나 멈춰설 때, 뒤쪽의 機關車가 進行하던 慣性에 依해서 앞車 쪽으로 쏠리면서 덜컹거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의 두 눈에 疲困氣가 어려 있고, 오래 붙잡아 두면 괜한 雜念만 보태는 턱이 될 것 같아 일어서기로 했다.

    “京義線을 달리고 싶다”

    手帖을 덮으면서, 最近에 南北關係가 好轉되어 京義線 連結工事 起工式이 있었는데, 機關車를 몰고 新義州까지 달려보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疲困해하던 그가 대번에 “첫 開通列車가 아니더라도 停年 退任까지 4年이 남았다. 그 사이 한 番이라도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며 반색을 한다. 글쎄, 重要한 路線이니만큼 無事故 記錄을 保有한 그에게 첫 開通列車의 運行을 맡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鐵道廳長이 알아서 할 일이고….

    무릇 汽車旅行에서, 特히 밤汽車를 타고 있을 때, 우리는 想念에 빠지곤 한다. 그러나 이때 絶對로 想念에 빠져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다. 機關士다. 가끔씩 내 몸과 내 安全을 모두 맡기고 列車를 탈 때 맨앞 機關室에서 나를 끌고 가는 그 사람, 機關士의 存在를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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